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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성탄 준비 / 사 62:6-12, 마 1:18-25
우리는 지금 성탄의 계절을 맞이해서 성탄의 기사가 실려 있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요셉에게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했다. 본문은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1. 요셉의 고민과 그의 인격
요셉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이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한번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던 정혼한 여인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들은 우리의 약혼에 해당되는 사건을 ‘키두씽’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사실상 약혼이라는 말보다는 정혼이라는 말에 더 가까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일단 정혼이 이루어지면,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어도 벌써 상대를 남편과 아내로 부를 수가 있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유대 관습이었다. 그들은 ‘후파’라고 불리는 혼인 예식만 남겨두고 있을 뿐 이미 결혼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성경이 아직 정혼의 상태에 있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남편 또는 아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 1:19절을 보라. ‘그의 남편 요셉은...’ 요셉을 남편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의 사회적 습성으로 미루어 볼 때 타당한 것이었다.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은 요셉을 매우 고민되게 했다. ‘이 부정한 여인과 결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만약 요셉이 마리아의 부정을 구실로 그녀와이 단절을 선언한다면, 그것은 마리아에게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유대 관습에 의하면, 그것은 마리아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신 22:22-24절상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요셉이 마리아와 단절을 선언한다는 것은 이렇듯 마리아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요셉이 고민이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고민 속에서 요셉이 취한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요셉의 인격을 볼 수가 있다. 본문에는 요셉의 인격이 두가지 이미지로 부각되고 있다.
첫째, 의로운 사람이다.
19절상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요셉이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엇다는 것이다. 요셉은 의를 사모하고 추구해 온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볼 때 도무지 마리아의 임신 사건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9절하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자기의 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정혼했던 여인에게 저주나 죽음이 초래하지 않도록 한다. 요셉은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그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를 향한 요셉이 애정과 고민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요셉이 마리아를 정죄의 자리에 내어주었다 할지라도 아무도 요셉을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어느시대, 어느 역사, 어느 사건 속에서나 하나님께서 두가지 속성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속성이란 바로 공의와 사랑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언제나 그분의 사랑과 공존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사랑이 없는 공의는 어쩐지 창백하기만 하고 가까이할 수 없는 딱딱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반면에 의가 없는 사랑은 감상적이고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는 의와 사랑이 놀랍도록 잘 조화를 이룬다. 우리가 성서의 모든 인물들의 생애를 공부하면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적인 사실 중의 하나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생애 속에는 의와 사랑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놓고 고민하는 요셉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닮았던 요셉, 곧 참으로 의로웠고 동시에 참으로 사랑할 줄 알았던 요셉을 발견하게 된다.
2, 천사의 계시
요셉은 예수님의 양아버지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을 선택한 것은 대단히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드디어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메시야의 임신과 탄생을 예고하게 된다. 천사가 요셉을 향해서 계시하는 멧시지를 주목해서 보라. 20절상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꿈을 도구로 해서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성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특별히 구약성서를 보면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으로 꿈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랍들은 성서에서 그런 예들을 보고는 꿈에 굉장한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써 꿈을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읽어보면 꿈이 계시의 도구로 사용된 예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기록된 말씀으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된 이후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이런 초자연적인 방편들의 사용은 대단히 희귀해졌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편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분은 자신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그렇게 하실 수가 있다. 20-21절상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천사가 요셉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가지 독특한 사실들을 볼 수 있다.
첫째, 요셉의 칭호
천사는 요셉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 요셉이 바로 다윗의 후손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다윗의 왕가라는 것은 다 몰락해 버린 후였다. 그러니까 요셉은 몰락한 다윗 왕가의 후예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요셉은 평범한 시민에 불과했다. 이런 요셉은 천사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른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왕가의 혈통을 따져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구약시대에 하신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드디어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이 역사를 행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여기에서 약속을 실현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둘째, 성령의 사역과 말씀의 사역
성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가장 중요한 두가지 방편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과 말씀이다. 누구든 성령과 말씀에 익숙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와 말씀의 거리, 또 나와 성령의 거리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를 결정한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임신과 탄생이 그냥 인간적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사역이라는 것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20절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성서 원문에 보면 ‘성령으로’라는 단어가 대단히 강조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것은 자연적인 임신이 아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22절에서는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다. 성령과 말씀은 하나님이 사역의 두 개의 수레바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객관적인 도구는 바로 말씀이다. 이 말씀처럼 확실한 것은 없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분명한 뜻을 알 수 있고, 주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가 하면 주관적으로 내 안에 임재하시며, 내 심령의 깊은 곳에서 내 전 인격을 통여 나를 움직이시고 나에게 확신을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천사는 예수님의 임신과 탄생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말씀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메시야는 누구인가?
메시야 그는 누구인가? 천사의 계시에 나타난 메시야의 칭호는 두가지이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역할을 알 수 있다. ‘예수’라는 말의 원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것이다. 사실 역사상 처음으로 아기 예수님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이미 구약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여호수아를 들 수 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발음만 조금 다를뿐 예수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여호수아가 예수라는 말이다. 호세아도 마찬가지이다. 호세아도 예수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을까? 그것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곧 구약에서 메시야의 탄생이 예언된 이후에, 사람들이 그 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예수 또는 여호수아나 호세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주인공이 드디어 오신 것이다. 그 전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구원에 대하여 증거하던 그리고 구원을 기다리던 예수들이었고, 이제 이 예수님은 구원 그 자체이신 것이다. 여기에 굉장한 차이가 있다. 구원자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20하-21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처음의 그 이름은 메시야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곧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제 임마누엘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그분의 신성에 대한 증언이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찾아오신 분이시다.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구약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체험이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평범하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라는 정도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정말 하나님이 그 놀라우신 영광을 가지고 내 삶의 자리에 다가오셔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라는 말을 할 때, 제일 먼저 장막(성막)을 연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특별한 의미에서 이 장막에 임재하셨기 때문이다. 요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구절에서 ‘말씀’은 ‘하나님’을 뜻한다. 또 ‘거한다’는 말은 ‘장막을 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은,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장막 속에 임하셨던 것처럼 이제 그분이 육신을 입고 한 인간 안에 온전히 임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신성과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 이것은 어마어마한 신비이다. 이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없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가리켜서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이 아기는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수많은 아기와 다르다. 이 아기는 육신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그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 신비하게도 육신을 입고 인간이 몸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바로 성탄의 사건인 것이다.
4. 요셉의 응답
요셉은 천사를 통해서 이 놀라운 메시지를 계시받으면서 어떻게 응답했는가?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순종하는 요셉
24절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무슨 말인가? 꿈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메시지 앞에 순종으로 응답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순종은 여러 가지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만일 마리아의 임신 사실이 동네에 알려졌다면 이떻게 되었을까?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겠나? 그러나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제 요셉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접했기 때문이다. 이제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순종으로 성탄을 준비했던 요셉의 모습을 묵상해 보라.
둘째, 증거하는 요셉
25절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이것은 요셉이 자기 아내 마리아를 통해서 메시야가 온다는 그 사실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아마도 요셉은 이 사건에 대한 증거자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기까지 동침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카톨릭에서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마리아가 결코 요셉과 동침한 일이 없다는 소위 ‘영원한 동정녀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를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에 보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마리아와 요셉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에게는 형제들이 있었다. 카톨릭에서는 이 형제들을 사촌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서는 사촌이라고도 말한 바가 없다. 그냥 형제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한 여인의 몸을 빌려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인가?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사건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죄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이다. 성탄의 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고 주님과 함께 하게 된 것을 주님게 감사드린다.
< 기 도 >
예수, 임마누엘!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어마어마한 신비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주께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바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찾아오신 이 놀라우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님 앞에 참된 감사를 드리면서. 네게 주어진 인생의 남은 날들을 임마누엘 주님과 더불어 걸어가는 주의 사람이 되길 원하오니 도와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아멘. (1995-05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