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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여인의 찬송 / 느 13:1-3, 눅 1:46-56
어수선하고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다시 기쁜 성탄이 돌아왔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은 가장 큰 경사이며, 온 세계가 축하해야 할 사건이다. 사람마다 이날을 축하하는 의미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기다리는 날로, 어떤 사람은 공휴일로, 자선의 날로, 1년 중 한번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보는 날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언젠가 한 TV기자가 성탄 전날 밤 온갖 성탄절 트리로 휘황찬란하게 장식되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는 거리에서 성탄절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을 세우고 물었다. ‘크리스마스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여인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잘 몰라요. 크리스마스가 예수가 죽었던 날인가요?’ 성탄절은 인류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아기 예수의 탄생의 축복과 기쁨을 온 인류가 함께 나누는 날이다. 그러나 오늘의 성탄절은 주인공 예수의 모습은 간데 없고 교회에서 그것도 예배드릴 때만 찾아볼 수 있는 형편이다. 요즘은 부르는 캐럴이나 서로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카드도 그 본질이 퇴색된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예수 탄생의 거룩함을 표현하기는커녕 드라큘라와 마귀할멈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짓궂은 농담을 하는 그림을 실은 카드가 판을 친다. 캐럴도 보면 인기있는 가수나 개그맨(코미디언)들, 탤런트들도 한몫보려고 캐럴집을 낸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내용은 드물고, 천박한 농담이나 개그를 하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성탄절은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유가 드러나고 찬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쁨을 불우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2천년 전의 첫 번째 성탄절로 돌아가 보자. 그 성탄은 오늘날과 같이 잡다한 의미를 가진 성탄이 아니었다. 성탄 메시지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사가 전하여 준 이 메시지가 바로 우리를 향한 성탄의 의미이자 내용이다. 눅 2: 10절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온 우주와 온 역사에 미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각, 그 현장에 들어가보면 극히 제한 적인 기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탄의 기쁨을 받았다. 그것도 예시적이고 미래적인 의미를 가진 것어어서 과연 그들이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을까, 성탄 그 자체의 의미를 알고 찬양을 하였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예컨대 동방박사, 들에 있던 목자들, 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요셉, 시몬, 안나....이들만이 성탄을 알았고, 성탄을 노래했고, 성탄을 기뻐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메사야 대망사상의 성취로 받아들이고 메시야를 영접하였다. 제한된 사람들에게 해당된 제한된 기쁨의 성탄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중에 과연 누가 성탄을 가장 기쁘게 맞이 했을까? 가장 바른 의미로 그리스도를 맞이한 사람은 마로 마리아이다. 마리아가 가장 큰 기쁨의 성탄을 맞이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성탄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받은 사람이다.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하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며 부정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고 하는 천사의 말에 그대로 순종한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임신한 사람이 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신앙적 교훈을 몇가지 말씀하고자 한다.
1. 마리아는 어머니의 대명사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하나를 들라면 ‘어머니’라는 단어일 것이다. 어머니라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고, 최후에 불러보는 이름이다. 그렇다. 아이들은 엄마라는 말을 처음 배운다. 전장이나 형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최후에 부르는 이름도 어머니이다. 아버지도 어버이이지만 어머니와 똑같지는 않다. 괴롭고 외롭고 병들고 배고프고 지칠 때 떠오르는 이름이 어머니이고, 떠오르는 얼굴이 어머니이다. 어머니란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있고, 어머니에 대한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는 것은 결코 저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를 갖게 되면 몸매를 버린다고 몹시 괴로워하는 여인들이 있다. 마음껏 멋을 내고 외출하지 못한다고 속상해 한다. 물론 아기를 갖게 되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겠지요. 하지만 이 고생을 마다하는 여인은 없다. 이는 어머니의 자격이 없다. 그 10달 동안의 고생을 마다하는 여자는 여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놀라운 신비 앞에서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고생이나 부끄러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여자의 진정한 기쁨이요 마음이다. 어머니가 아이의 태동을 느낄 때의 그 기쁨은 죄송하지만 남자들은 모른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다. 임신의 고통을 겪었고, 출산의 위험을 감내하였다. 함께 산 날들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도 했지만, 인류 구원의 공생활로 예수께서 집을 떠나자 마리아는 인간적인 모정의 아픔이 너무 컸겠지만 이를 잘 참고 견뎠다. 마리아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숨져가는 예수님을 지켜본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어머니는 그 가슴에 그 자식을 묻는다는 말이 있지만, 마리아는 그 고통을 믿음으로 잘 이겨냈다. 마리아는 장한 어머니이자 훌륭한 믿음의 어머니이다. 아들 예수를 하나님께 바친 위대한 어머니이다. 우리 갈보리교회 여신도들은 마리아와 같이 위대한 어머니들이 되기를 바란다.
2. 마리아는 찬송하는 여인이었다.
마리아는 찬송을 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측량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찬송을 크게 부른다. 마리아만이 가지는 기쁨과 감격이다. 나는 기쁘다, 나는 복되다, 모든 사람이 대대로 나를 복된 자라 할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기쁨을 느껴보았는가? 오늘 본문은 마리아 찬가라고 한다. 이 노래는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권능과 성품을 찬양하는 것이다. 셋째는 겸손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상이다. 넷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마리아 찬가는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와 매우 흡사하다. 또한 구약성서 특히 시편을 많이 인용했다. 이는 마리아가 시편을 많이 암송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한 그 내용이 매우 복음적이어서 대부분이 낮은 자, 눌린 자를 옹호하는 내용이다. 교만한 자를 낮추는 도덕적 내용과, 권세있는 자를 파하는 사회적 내용과, 주린 자를 배부르게 하는 경제적 내용이 근본적인 혁명과 혁신을 가져오게 하는 메시야를 지적했다. 이는 종말론적 공의의 심판에 대한 소망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적 배려하고 볼 수 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하나님이 눈길은 가난한 자에게 있고, 하나님의 관심은 깨끗한 영혼에 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은 모든 세대가 행복하다고 했다. 주님의 능력은 크셔서 힘쎈 분이시고, 주의 이름은 거룩하여 모든 이의 존경과 영광과 예배를 받아 마땅한 분이다. 주님은 그의 권능의 팔로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어버린다. 권력을 남용하는 제왕들을 끌어내린다. 그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시고, 굶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게 하신다. 부자와 세력가를 멀리 하시고, 약자와 빈자를 가까이 하시는 은혜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마리아는 개인적인 은총과 자비만을 노래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영원하리라고 했다. 구약성서의 자비(헤세드)는 신약성서의 긍휼(엘레오스)과 같은 의미이다. 은혜, 친절, 사랑, 호의까지 포함한 말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과 민족과 세계에 있을 것이라고 기원하고 있다. 그의 이런 축원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힘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힘있는 분이라고 했는데, 이 힘은 전능하신 능력을 말한다. 마리아는 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확신하고 의지하고 소망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는 여인으로 등장했다. 물론 그녀가 가수이거나 성가대원은 아니었다. 그의 노래는 영혼이 노래였고, 그의 찬양은 마음이 찬양이었다. 마리아는 찬송하는 여인이었다. 찬양은 고운 마음, 착한 마음에서만 가능한 법이다. 우리도 마리아를 본받아야 한다. 외로운 때, 괴로울 때 주님을 향하여 입을 열고 찬양하는 성도가 되자. 무슨 일을 만나거나, 어디에 살거나, 우리의 마음의 찬양을 주님께 바치자. 우리가 찬양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시고, 우리가 주님을 높일 때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며, 그 큰 권능을 행하셔서 비천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 여러분, 모두 마리아같이 찬송하는 성도되어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를 바란다.
3. 마리아는 순종하는 여인이었다.
마리아는 처녀 시절에 예수를 임신했다. 남자를 알지 못했고, 성관계가 전혀 없었는데도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서 임신을 했고,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고지를 받았다. 이때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자 순종이다.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예정과 경륜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생각이고, 경건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총각과 약혼을 한 사이였다. 아무리 여인이 성령으로 임신을 하였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그것을 믿어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믿어줄 사람이 없다. 모든 사람이 미친 여자로 취급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감내한다. 파혼이 되든 말든, 오해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는다. 부정한 여인이라는 죄명을 쓰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이러한 위험과 모험과 희생이 있는데도 아랑곳 없다. ‘나는 메시야를 임신하였노라’ 이 한마디로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박찬 기쁨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위탁해 버린다.
마리아는 인간관계에서도 언제나 적응하며 살았다. 남편과 요셉의 관계나, 아들 예수와의 관계가 그러하다. 약혼자 요셉이 호적하러 가자니 순종했고, 이집트로 피난가자고 하니 초산의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한다. 나사렛 생활이나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여러 자녀들을 기를 때도, 잘 적응하며 살았다. 예수님이 천국복음전파를 위해 집을 떠나실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저술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재벌도 아니고 여걸도 아니었다. 조용한 생활의 여인이었고 믿음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어떤 여결보다도 더 위대한 이름을 남겼다. 그것은 전혀 믿음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이 순종하는 믿음을 배웠을 것이다. 여러분도 마리아 같이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고, 순종하는 믿음을 자녀들에게 잘 가르치기를 바란다. 마리아가 마리아 된 것은 그녀가 잘나서가 아니다. 그의 미모나 능력이나 실력이 좋아서 예수님을 임신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힘이나 자기 뜻이나 자기 능력으로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예정으로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존재이다.
톨스토이의 단편 모음집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하나님이 천사를 불러서, 어느 산골을 지적하면서 그곳에 가서 살고 있는 여인의 영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상당 세월이 지난 후 천사가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그 여인의 영혼을 가져왔느냐?’ 하니 천사가 머뭇거리며 작은 소리로 ‘그 여인이 남편이 엊그제 숲 속에서 나무를 베다가 나무에 깔려 죽었고, 오늘 아침 그 여인은 쌍둥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차마 그 영혼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천사에게 ‘너는 지금 다시 속히 가서 그 여인이 영혼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너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하늘나라로 되돌아오지 못하리라’고 했다. 다시 세상에 온 천사는 그 여인의 영혼을 거두려고 하는 순간, 뜻밖에 새찬 바람이 불더니 천사의 두 날개가 부러졌다.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된 천사는 구듯가게에 취직해 구두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한 부인이 대여섯살 된 예쁜 두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가게에 와서 구두를 맞추겠다고 했다. 예쁜 두 여자아이이 얼굴을 한참 보고 있던 천사가 부인을 향해 ‘이 아이의 어머니입니까?’ 하고 묻자, 그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이 두아이의 아버지는 나무를 베다 깔려 죽었고, 어머니도 며칠 후 죽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아이의 젖을 먹이고 있었기에, 동네 사람들이 이 두 아이를 내게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 내가 낳은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 두 아이가 내 아이가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인과 두 아이가 구두를 맞추고 돌아가자 천사는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스스로 살아가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구나. 그래 맞아!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거야’ 하고 생각하자. 천사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곧 날개가 돋아났다. 이 톨스토이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이다. 마리아가 마리아 된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우리도 내가 나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토마스 풀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 가운데 얻은 한 근의 기쁨은 한 관의 슬픔을 상쇄시킨다’라고 했다. 여러분,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해결사 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미엔 페스트라는 사람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주여, 나는 예라고 대답하기가 두렵습니다.
주님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것입니까? 나는 허탕칠까 두렵습니다.
나는 덮어놓고 백지에 도장을 찍기가 두렵습니다.
나는 한 번만이 아니라 자꾸만 예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 두렵습니다. 아들아, 예라고 대답 해다오!
나는 이 세상에 오기 위해 마리아의 예라는 대답이 필요 했듯이 너의 예라고 하는 대답이 필요하다.
너의 일터에 내가 있어야 하고, 너의 가정에도 내가 있어야 한다.
네가 사는 구역에도 내가 있어야지 네가 있어서는 안된다.
쳐다보는 눈도 내 눈이어야지 네 눈이어서는 안된다.
주어야 할 말은 내 말이지 네 말이 아니다.
변화시킬 생명도 내 생명이지 네 생명이 아니다.
내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다오. 모든것을 내게 맡겨다오.
나는 너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데에 아무래도 너의 예라고 하는 대답이 필요하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아무래도 너의 긍정적인 대답이 필요하다. 오 주님, 주님의 요구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러나 누가 주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내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라고 대답하게 하소서.’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예라고 대답했다. ‘예’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 기쁨에 감사하며 살아갔다. ‘예’라고 대답하는 기쁨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순교자이다. 아무 말이 없다. 오로지 ‘뜻대로 하소서’ 할 뿐이다. ‘예’ 하면서 찬송하자. 그 기쁨과 감격으로 승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여러분,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의 역사 앞에 ‘예’라고 대답하여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성탄절을 맞이하기 바란다. (200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