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복이라
2021. 12. 26(주일낮예배, 교육국수료) 시편 73:17-28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심리학자 에드 디너(Ed Diener)교수는 젠이야기를 만들었다. 젠에 대한 2가지 가상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한가지는 젠은 30년동안 정말 행복하게 살았다. 그래서 좋은 직장에서 좋은 친구와 즐거운 삶을 살았다. 그랬던 젠이 갑작스런 교통사로고 고통없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것이 젠의 첫 번째 이야기이다. 그리고 젠의 2번째 이야기는 젠은 30년동안 좋은 직장에서 좋은 친구와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젠은 5년동안 고통의 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만약 당신이 젠이라면 어느 삶을 선택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5년을 더 사는 삶이 아니라, 30년의 젠의 삶을 살겠다고 대답하였다. 에드 디너는 이러한 사람들의 대답을 통하여 한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람은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아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 삶이 행복하면 내 삶의 모든 부분을 행복하게 여기고, 지금 내 삶이 불행하면 행복하게 살아왔던 삶도 불행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피크엔드 법칙이다. 피크엔드법칙을 보면 사람은 지금이 행복하면 과거의 고통은 3초로 느끼지만, 지금이 고통스러우면 모든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면 한 해를 마무리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끝이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아삽의 시이다. 레위의 15대 손인 아삽은 찬양대의 지도자였고, 또 선견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아마 아삽은 늘 말씀을 읽고,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삽에게 인생의 의문이 생겼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악인은 심판하고, 의인을 형통케 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삽의 눈에 악인은 고통없이 세상을 살아서 교만으로 목걸이를 하고, 폭력으로 옷을 삼으며 사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사람을 교만하게 대하고,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휘둘러서 자기 욕심을 다 채우는 그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죽을 때도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삽은 그런 악인을 보면서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3절)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형통은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 가지는 그 평화를 악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아삽은 실족할 뻔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아삽과 같은 생각을 가질 때가 없는가? 사람들은 종종 우리에게 예수님 믿지 않아도 잘 사는데 뭐하러 교회갑니까? 하는 말을 한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교회다니는 사람이 건강하고, 또 하는 일이 다 잘되어서 멋진 옷을 입고 차를 타고 다니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려야 하므로 늘 쪼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눈치 없는 목사님은 연말에 미혼모를 섬겨야 한다고 케익쿠폰을 보내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 케잌도 못사주는데, 그런데 미혼모를 섬기기 위하여 쿠폰을 사서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인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 그래서 가족간이 여행도 제대로 가지 못가고, 늘 교회와서 예배드리고 또 성도의 교제와 봉사만 하고 산다. 그러니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들 여행한 자랑만 들어야 한다. 그러면 남편의 진급이라도 빠르고, 또 자식들 성적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뭐하나? 하는 아픔을 가지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이 이러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분은 로마서 1장을 읽어야 한다. 로마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악인을 버려두셨다고 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버려두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버려두었다는 말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사람들은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악인을 무관심으로 버려두었다는 것이다.
왜 무관심으로 버려두시는가? 저는 지난 주에 아이들에게 아빠는 너희가 결혼하여 입양하는 것 찬성이다. 라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입양을 해도 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입양을 해도 아빠는 찬성이다고 분명히 말했다. 제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저는 결혼하기 전부터 입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가 입양에 동의를 하지 않았다. 제 아내가 동의하지 않은 이유는 주남, 주혜, 주현이를 키우면서 야단을 쳤지만, 입양한 아이는 야단을 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제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삽은 악인의 형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삽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고통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소로 달려간다. 그래서 아삽이 깨달은 것이 23절-24절이다.
(시 73:23-24)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나님은 악인의 행위를 그냥 내 버려두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은 악을 행할 때 징벌하시고, 그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권능의 오른손으로 주의 백성을 붙잡아서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리(관계)에 거하도록 지켜주시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성도된 우리도 종종 번영, 성공, 부요를 바라보며 산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데,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은 우리를 번영케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히즈 윌이 부른 나도 바보처럼 살래요라는 찬양이 있다.
산 위에서 세상 모르고 배만 만드는 노아
당신 참 바보 같군요 당신 정말 바보 같군요
왜 맑은 날 배를 만드나요 왜 하필 높은 산위에
당신 참 바보 같군요 당신 정말 바보같군요
눈부신 해가 하늘 높이 뜨면 비의 약속 잊을만한데
날마다 듣는 조롱에 그 외로운 길 포기할 만한데
당신은 어쩜 그리 묵묵히 그 길 가나요
당신은 어쩜 그리 그 자리를 지켜냈나요
당신은 어쩜 그리 묵묵히 그 길 가나요
당신은 어쩜 그리 그 자리를 지켜냈나요
당신은 참 바보 같군요 당신 정말 바보 같군요
당신 참 바보 같군요. 나도 바보처럼 살래요.
히즈 윌은 노아의 믿음을 중심으로 이 찬양곡을 썼을 것이다. 화창한 날씨에 산에서 배를 만드는 노아를 세상은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아는 사람들의 조롱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묵묵히 방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써 심판할 때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노아가 묵묵히 방주를 만들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자기 눈에 아름다운 것을 다 취하며 살았다. 그리고 네피림이라고 하여서 거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또 힘을 키워서 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세상의 부러움을 받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때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근심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이겠는가? 창 6:8-9절을 읽기 바란다.
(창 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 눈에 예쁜 사람의 딸을 취하고, 또 네피림(용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는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의 딸을 취하고, 또 더 큰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또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자가 되고,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참된 은혜요 복이 아니겠는가? 이동원목사님의 둘째 아들은 한동대 로스쿨과 미국 USC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제변호사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대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한지 8개월만에 생명을 다하였다. 장래가 촉망되던 43세의 아들을 잃은 목사님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 후에 목사님은 1년동안 아들을 그리워하며 글을 썼다. 그 글을 모은 책이 아들아 씨유 인 헤븐 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서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한다.
범아 너희가 어렸을 때 아빠와 엄마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하고 너희가 영접기도를 하도록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주로 복음주의권에서 많이 사용하는 네비게이토식의 전도지나 나중에 너희가 조금 더 커서는 생명의 다리를 가지고 그림을 그러가며 설명했었지. 아빠가 세계 여러나라의 사람들을 상대로 수많은 설교를 했지만, 내 아들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아빠의 모든 사역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죽은 후 목사님이 아들을 변호사로 키웠다는 것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목사님에게 위로가 된 것은 아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아들이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목사님의 위로가 된 것이다.
왜 이것이 위로가 되었겠는가? 아삽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도 아삽의 이 선포를 고백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보다 더 큰 부와 명예를 가지고 살아가지는 못하지만,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롭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