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어? 신조어! / 양선례
퇴근 후 딸아이가 운영하는 카페에 들렀다. 손님이 딱 한 명뿐이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이 시간은, 늘 한가하다. 딸 덕분에 손님이 있고 없고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자영업자의 비애를 실감하고 있다. 최근 들어 유독 불안한 시국과 어려워진 경제가 자영업자에겐 직격탄이 된 듯하여 볼 때마다 안타깝다.
그런데 그 손님이 낯이 익다. 서로 눈인사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이 공간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주로 노트북을 앞에 두고, 화면을 본다. 간혹 전화를 받는다. 영어로 말한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나로서는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으나, 유창하게 잘하는 건 확실하다. 외국인인가? 수염은 길렀으나 얼굴은 토종 그 자체다. 남들 일할 시간에 한가하게 카페에 오는 걸 보면 회사원은 아닌 듯하고, 프리랜서인가? 볼 때마다 궁금했다. 딸아이는 이런 날 보고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놀리곤 한다.
딸아이가 카페를 차린 지 만 3년이 다 되어간다. 집과 가까운 곳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풀방구리의 쥐처럼 들락거리지만 커피 한 잔 내릴 줄 모른다. 아무나 주방에 들어오면 너무 비전문적으로 보인다나, 어쩐다나. 가게를 열면서 주방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게 딸이 내민 조건이다. 오, 그렇담 나야 감사하지. 전업주부도 아니고, 아직은 직장인인데 말이야.
아주 많이 바쁠 때 앞치마 두르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설거지 한두 번 한 게 전부라서 지금까지는 그 조건을 잘 지키고 있다. 철저히 손님으로만 찾아가 차를 주문하고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는다. 이런저런 모임도 여기서 하는지라 사생활이 노출된 건 좀 아쉽다. 딸의 가게지만 커피 한 잔 공짜로 마신 적이 없다. 오죽하면 카페 알바생에게 부모 자식 간에 이렇게 철저히 계산하는 건 처음 본다는 말도 들었다.
딸아이가 탁자로 음료를 가져오자 “저 사람 또 왔네?” 라고 물었다. “응, 저 사람 우리 카페 지박령이야.” “뭐라고, 지방령?” 분명 한국어인데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되물었다. “엄마, 지박령 몰라?” 앞뒤 문맥으로 봐서 의미는 짐작하겠는데 처음 듣는 말이다.
이럴 땐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찾아야지. “엄마, ‘지방령’이 아니라 ‘지박령’이라고요.” 검색어를 입력하는 나를 보고는 딸이 말했다. 뜻을 모르니 철자도 틀릴 수밖에. 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았다. ‘자신이 죽은 곳을 떠나지 못하고 죽은 장소를 계속 맴도는 영혼’이라고 우리말샘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무실 지박령은 ‘야근 등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장시간 사무실에 머무는 직장인을 지박령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며 용례도 친절하게 덧붙여 있었다. 익숙한 그 손님은 지박령이 분명하다.
몇 년 전에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영국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한국어 표제어 26개가 한꺼번에 등재되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대박, K-드라마, 치맥, 먹방, 한류, 김밥, 잡채, 동치미, 삽겹살, 갈비 등이 그것이다. 이 중 몇 개나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에 있을까? K-드라마, ‘먹방’과 ‘치맥’은 찾을 수 없었다. 외국의 사전에도 있는 낱말을 우리가 표준으로 삼는 사전에 없다는 건 아쉽지만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신조어와 줄임말을 모두 싣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딸아이는 젊은이(30대)답게 카페 홍보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인스타그램에 정기적으로 소식을 올리는 건 기본이고, 방문자나 블러그 리뷰 문장 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며칠 전에 ‘느좋’이라는 말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처음 듣는 말일뿐더러 발음조차 어색하여 몇 번을 되물었다. “엄마, ‘조’에 ‘ㅎ’ 받침을 넣는다고요.” 딸은 리뷰에 그 말이 자주 보이길래 ‘너무 좋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느낌이 좋다.’는 말의 줄임말이더란다. 같은 젊은이들끼리도 이처럼 뜻이 안 통할 때가 있는데 하물며 나 같은 기성세대는 말해 무엇하리. 자칫 욕처럼 들리는 이 말을 왜 유행처럼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종종 들르는 블러그와 텔레비전 영상, 예능 자막에서 자주 눈에 띄는 낱말로 ‘그 잡채’라는 말이 있다. ‘사랑스러움 그 잡채’, ‘완전 여신 그 잡채’ 등이 그것이다. 요리 프로그램도 아닌데 잡채라니. 처음에는 ‘그 자체’의 오타인 줄 알았다. 음식 종류인 잡채와 발음이 비슷한 데서 착안하여 쓰지만 그 의미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신조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영원한 건 없다. 자연도,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올해 다시 핀 매화꽃이 작년에 피었던 그 꽃은 아니다. 평생을 약속한 사랑도 시간이 부리는 마술로 닳고 삭고, 엷어진다. 언어도 그렇다. 언제, 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밝혀진 유일한 언어,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울고 갈 판이라고 한탄하는 이도 있지만, 세상에 영원한 게 없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 아닌가. 사람들 생각이나 의식에 따라 변하고 흐르는 건 당연지사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숨이 가쁘다.
점심을 먹고 학교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모처럼 봄 햇살이 따사롭다. 들어오는 길에 현관 앞에서 한 무리의 6학년 여학생을 만났다. 한 아이가 인사를 하니, 곁에 있는 키 작은 여학생이 “선생님, 쌈뽕하시네요!” 한다. 양손으로 엄지척하는 걸 보면 욕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고, 저 말은 또 무슨 뜻이람?
첫댓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입니다. 이러다 세대 간에 대화가 단절될 수도 있겠어요.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한편으론 재밌기도 합니다.
초등 3학년인 손녀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있어
멍해지곤합니다. 가게에 손님이 뜸하면 속상하겠어요.
가게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답니다.
딸이 워낙 철저하게 관리하거든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따님이 바로 옆에서 지내서 더욱 마음이 많이 가겠습니다.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니 알게 모르게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글 잘 읽었습니다.
하하. '훌륭한' 이라고 말씀하시니 부끄럽네요.
딸이 곁에 있으니 든든하긴 합니다.
고맙습니다.
커피는 이제 단순한 음료를 넘어 일상의 필수품처럼 여겨집니다.
손에서 뗄 수 없게 되었어요. (신조어는 정말 황당할 일입니다)
네. 저도 하루에 한 잔은 꼭 마신답니다.
중독이지요.
'느좋' 느낌이 좋다!
하나 배웠습니다.
저에겐 신조어, 준말 다 외래어에요.
아이고, 그런데 발음이 너무 이상해요.
'읽씹'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욕처럼 들리는 그런 말을 왜 만들까요?
'쌈뽕' 저는 산책 하시네요? 로 생각했어요. 아마도 멋지시네요 가 아닐까요?
때론 우습기도, 황당하기도, 언짢기도 하는 신조어가 반갑지 만은 않더군요.
쌈뽕하다.
멋지다.
간지 난다(이 말도 신조어겠죠?)
찾아보니 그런 말이었어요. 칭찬이니 고맙지요.
제가 마침 '신조어' 관련 글감을 찾던 중이라서 쫓아가서
"방금 네가 한 말이 뭐야? 다시 한번 말해 줄래?"
그랬더니
그 아이 굉장히 당황하면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언니들이 그 말을 쓰길래...."
하는 겁니다. 아마 야단맞는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하.
저는 진짜 몰라서 물었던 건데 말입니다.
쌈뽕이 뭔지 궁금합니다. 처음엔 짬뽕으로 읽었어요. 신조어, 줄임말 다 어렵습니다. 가끔 황당하구요.
멋지다.
간지 난다.
칭찬 확실합니다!
찾아보고 기분 좋았습니다. 하하하.
여기에 나온 신조어 중에 '간지 난다'라는 말만 들어봤어요.
따님이 프로 기질이 있네요. 엄마 닮았으면 시작한 일은 제대로 해내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