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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살아온 기억을 계산해요
여왕님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결산을 짐작할 때가 된 듯하네요. 아내의 모습이 이제 여왕이라기보다 완연한 할머니 얼굴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긍지는 마음과 정성이다. 그래서 할머니도 이미 지난 아내 얼굴을 보고도 여왕님이라고 부른다. 그래야 아내의 마음이 편하게 풀리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여왕님이라 호칭하면 시큰둥하며 장난한다고 눈 흘김이 먼저다. 그래도 호칭은 늘 여왕님이다. 마주 앉아 아기처럼 양 볼을 두 손으로 귀엽게 비비며 우리 여왕이라고 추스른다. 얼마간은 믿지 않고 귀찮기만 하다는 눈치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언제나 호칭은 여왕님이다.
큰 딸은 국군 대위로 청와대 지구병원에서 근무했다. 나중에는 뉴질랜드 이민성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공인회계사 사위와 목사 두 사람 사위, 국세청 공무원 사위 부부를 데려왔으면 여왕님이 맞지 않냐고 했다. 여왕님이 아니고는 그런 인재를 임명하듯 데려오지 못했을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제야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인다. 큰 손자 부부는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다음 또 다음 손주들이 큰손자 따라 줄을 이을 것이다. 그렇지 하면서 아내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아내는 딸 넷을 먼저 낳고 아들 둘을 낳았으니 6남매가 태어났다. 외아들 종가에 시집와서 딸만 내리 넷을 낳아 울기도 하고 고생도 너무했다. 눈물 삼키는 날이 많아서 딸들이 그렇게도 미울 수가 없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가거나 씨앗을 데려올 것을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일이다. 그러나 다섯째는 아들을 낳았으니 날개 달고 하늘을 나를 듯한 기분이기도 했다.
다음도 또 아들이라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나는 인제 와서 생각하니 딸 먼저 낳은 일을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아들부터 둘을 먼저 낳았더라면 딸 넷은 세상에 나타나지도 못했을 일이다. 딸 넷을 선물로 여겨야 할 정도로 반갑고 잘한 일이다. 시집을 오니 네 살이나 젊은 신랑이 마음에 안 들어서 친정으로 도망쳤었지. 그래도 어머니가 며느리 데리러 직접 가서 손잡고 데리고 와서 이제까지 살아온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첫 혼사 실패로 재혼한 가정치고 더 잘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첫 만남이 가장 좋은 배필이기 때문이다. 참고 살아온 인생의 끄나풀은 질기고 끈끈한 정으로 바뀌었다. 당시 우리 어머니가 여왕님을 알아보시고 잘 모셔 왔다는 생각이다. 내 말이 맞지? 아내는 고개가 끄덕끄덕 눈가에 반짝이는 물빛이 스미고 있다.
남편이 말단 공무원으로 박봉에 시달려 농사일을 누님 부부와 거드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어도 잘 견디어냈다. 가을에 추수 곡식을 나누는데 누님이 욕심을 부려 큰 가마니를 가져간다고 나에게 일러바쳤지. 겉으로는 모르는 척해도 아까운 마음에 나에게만 실토했었지. 나는 그런 애태운 속마음을 잘 알고 있다. 내가 거들어 그러지 못하게 싸움이라도 거들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알았어. 그 당시에 내가 그렇게 거들었으면 남매 사이 인정은 깨어지고, 농토는 다른 사람이 농사지어 사용료도 마음에 들도록 받았을 거란 말이다.
내가 월급도 받고, 형편이 좋으니 참으라고 달랬다. 베푸는 마음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그랬다. 그러나 자형은 마늘 재배 기술이 좋아서 우리 논에 마늘을 재배했다. 마늘 농사가 해마다 풍작을 이루어 마늘 수확 소득이 땅값의 두 배를 넘었을 때다. 벼농사는 반으로 가르지만, 벼농사의 후작인 마늘은 자형이 소작 관례로 모두 가져간다. 마늘밭을 구경하고 나는 자형에게 땅과 마늘을 맞바꾸자고 우스갯말을 했다. 어림도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 웃기기 위해서 한 말이다. 땅 한 평 값은 당시 5천 원 미만이지만, 마늘은 밭떼기로 평당 일만 원에 팔리고 있었다. 땅 한 평에 마늘 한 접이 생산되어 팔린다고 그랬다.
별도로 우리 집 근처 다른 농지에 마늘 씨앗만 구해주면 내 앞으로 마늘 농사를 지어 주겠다고 자형이 제의했다. 얼씨구 좋아하고 자형 말씀에 따랐더니 3년 농사 소득으로 대구 아파트를 마련했다. 땅값 두 배를 벌었던 결과다. 마늘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던 시절도 특별한 기회였다. 아파트는 아이들 공부를 위해서 꼭 필요했던 일이다. 이때의 아내는 신명이 났던 모양이다. 그렇게도 어렵게 생각했던 아들도 낳았겠다. 대구에 아파트도 생겼으니 그렇게 신명 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누나가 욕심을 부려 큰 가마니 벼를 가져간다고 싸움질했더라면 남매 사이 인정 잃고, 재물도 망조였을 것이다. 만약 내가 아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거들어 판단이 흐렸다면 말이다. 재물은 때가 오면 모을 수가 있지만, 인정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여왕님 그때 참은 마음이 복이 되어 인정도 생기고 재물도 생긴 일로 멋지게 잘한 일이지요.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형은 마늘 농사 성공으로 우리 농장만 한 농장을 위치 좋은 국도변에 마련했다. 지금은 우리 땅값보다 두 배나 높은 시세를 호가한다. 아내가 용케 잘 참은 생각 때문에 두 가정이 복을 받은 셈이다.
지금 손주가 11명이니 생일에 모이면 가족회의 잔치가 이루어진다. 6남매 자식들이 주선한 일이다. 코로나 사태가 오기 전에는 명승지 호텔을 예약하고 우리 부부 생일날은 함께 모인다. 변산반도에 다녀오고 덕유산 무주리조트도 다녀왔다. 단양팔경 하며 문경 호텔 주변의 경치도 만끽했고. 속리산 법주사 구경은 모든 가족이 함께하기가 매우 좋은 분위기였다. 법주사 여행하면서 단편소설 한 편을 섰다. 무주리조트에서도 덕유산 풍경에 취해 소설 "종부"를 하루 만에 다 썼다. 덕유산 산소탱크 싱싱한 공기가 나의 영감을 부추긴 느낌이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손주들이 살고 있어서 명승지 곳곳을 누빈 듯하다. 고궁과 비원도 초대받는 영광을 누렸다. 제주도에서 모든 가족이 며칠을 보내며 여행한 추억이 오래도록 되새겨진다. 우리나라 최남단도 가보고 바다가 그렇게 너르다는 경험을 비로소 알게 했다. 제주도 삼성혈에서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를 생각하며 "을나"가 어린이의 순수 우리말임을 비로소 알게 한다. 우리 사위 고 서방 고 목사가 바로 제주고씨라 더욱더 반가웠다. 많은 가족 서로 만남이 보람이고 참으로 반길 인연이라는 사실이 즐겁다.
조모님은 둘째 아들에게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며 늘 걱정하시다가 끝내 원하던 손주 못 보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현재의 할머니 묘소인 장소에 풍수 전문가 친정 동생들이 물색하여 선정한 장소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금방 둘째 며느리인 숙모가 아들을 낳았다. 할머니가 며느리를 보고 심한 구박까지 했다. 참아낸 숙모님이 훌륭하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 묘소가 명당 효험을 냈다고 말했다. 그런 영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할머니 산소에 잔디도 심고 손질하고 오면 좋은 일이 생긴다.
가까운 예를 들면 산소에 심을 잔디를 캐러 갔다가 쉬는 틈에 나무를 쳐다보니 버드나무에서 느타리버섯이 엉겨 붙은 것이 보였다. 뜯어 담으니 큰 부대에 가득했다. 가져와서 이웃에 나눠 먹었더니 자연산 느타리버섯 맛이 좋다고 인사를 들었다. 버섯채취 중에 더 높은 곳에 올라 모두 뜯으라 주문하는 아내의 모습이나 이만하면 된다고 했다. 남은 버섯이 아까워도 그냥 남겨두고 왔다. 마침, 훗날 다시 잔디를 옮기러 가니 그때 하늘 높이 섰던 나무가 부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마터면 욕심내어 더 높이 올라갔더라면 큰일 날뻔했다. 아내에게 우리 잘한 일이지, 하고 웃으니 옳다고 맞장구쳤다.
할머니 생각이 늘 즐겁고 어릴 때 할머니 불매 소리가 다시 귀에 쟁쟁하다. 내 어린 겨드랑이를 두 손으로 잡고 몸을 옆으로 흔들면, 나는 양다리를 이용해 불매라는 풀무질을 한다. 불매! 불매! 불매야! 이 불매는 어디 불매고 경상도 대 불매다. 불매는 풀무질의 경상도 방언이다. 이것이 어릴 때 할머니께 배운 불매 놀이다. 풀무질하듯 불매 동작에 고환 추가 시계추처럼 흔들어 강한 남자로 키우기 위한 할머니 염원이다. 내가 다섯 살에 할머니는 가족들 울음 속에 돌아가셨다.
할머니 산소에 다녀오면 늘 좋은 생각이 저절로 돋아난다. 푼돈이라도 유가증권을 사면 바로 폭등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산소를 손질하고 오는 날은 좋은 공기를 마셔서 한껏 상쾌하다.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면 의도대로 잘 쓰게 되는 것은 어떤 신명이 지핀 듯하다. 이것은 영험보다 산의 숲에서 나오는 싱그러운 산소 때문에 정신이 맑아지는 이치다. 또 움직이는 운동이 되니 혈액순환도 왕성해지는 효과였다. 그래서 할머니 산소에 다녀오면 늘 좋은 생각과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은 아들과 친손자가 없는 우리 유일한 종증조부님 묘소에 벌초하고 왔다. 할아버지는 딸만 달랑 하나 낳고 아들은 없었다. 돌아가실 때는 우리 어머니가 며느리처럼 돌봐드리고 우리 사랑방에서 가족으로 함께 사시다가 별세하셨다. 내가 평소 할아버지 산소에 벌초 작업을 해오다가 언젠가 도중에 할아버지 외손자가 먼저 벌초하고 가서 그러려니 하고 잊었다. 자기 할아버지 산소 벌초하러 왔다가 자기 어머니가 부탁해서 한 일이라 생각했다.
종증조부 할아버지 산소 벌초를 내가 사는 동안 힘이 자라는 데까지 계속할 작정이다. 산소에 벌초를 시작하려는데 친구들의 전화가 왔다. 다방인데 고향에 온 김에 저녁이라도 같이하자고 연락했단다. 사정이 이러니 참석하지 못한다고 알렸다. 벌초를 마치고 생각하니 종증조부 할아버지께서 나를 끔찍이 보호하는 일이다. 내 앞의 다가올 코로나 질병 위험 때문에 벌초 생각을 하도록 하신 모양이다. 코로나 방역 때문에 거리 두기로 야단인데 내가 벌초 생각으로 위험한 곳에 가지 않도록 말린 것으로 할아버지 의도로 느껴진다. 여기 오지 않았으면 당연히 친구 모임에 참석했을 일이기에 말이다.
산에 오르는 목적이야 여러 가지로 나누겠지만 산에 오르면 상쾌하고 좋은 생각이 많아진다. 자연 속에 풍요로운 산소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는 일이다. 운동으로 혈액순환도 원활해지니 정신과 육신이 조화를 이룬다. 이런 기회를 만드는 일도 만물을 사랑하는 좋은 생각에서 오는 것이다. 평소 어머니가 말씀하신 사랑하는 마음에는 늘 행운이 기다린다고 했다. 내가 자라는 동안 이런 교훈은 몸에 익혀져 생각을 바꾸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한 세부 계획이 나도 모르게 무디어지고 다른 연유로 점차 흘렀다. 공무원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그 사람의 호적을 확인하고 자식이 몇이며 지금의 주소가 어디고 무슨 직업을 하고 있다는 조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의 자손이 나의 원수 갚음 대상으로 피해를 보면 나는 그의 피해 상태보다 더 참혹해질 수도 있을 일이다. 그러기 전에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오히려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할 일이다.
평소 불편한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 저지르는 일은 결과가 불행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성난 김에 하는 급한 운전은 교통사고 유발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버지 원수 갚는 일만 생각하면 내 심정은 늘 불편한 마음이었다. 이런 생각을 바로잡는 어머니 노력이 나를 새로운 생각의 삶으로 바꾸어 준 일이다. 만물을 사랑하는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게 만든 일이다.
내가 아버지 원수를 통쾌하게 갚아주면 그의 자손은 나를 향한 증오가 더욱더 심하게 발동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악순환의 현상이 서로의 가문을 망치고 사회에 끼치는 영향도 악화할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 생각의 방향을 바꾸게 하느라 고심하며 애쓴 일이 느껴진다. 하나뿐인 아들이 혹여 그릇된 생각에 치우칠까? 노심초사하신 모습이 절실히 느껴진다. 내가 세상에 무엇 하러 왔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생각이다.
세상에 왜 왔나
모진 세월에 던져진 알몸 하나
칼날 세운 서릿바람에도 견디며
내가 해야 할 나만의 생각
삶의 이랑마다 깨닫는 질서
접고 펴는 혼을 알게 되더라
살다 보니 숨 막힐 듯 놀랄 기회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망의 늪에서 허둥대는 시간
걸어온 자세가 말해 주더라
흔적은 순간의 대사뿐이라고
저만치 먼저 가서 뒤돌아보는
생각의 친구가
삶의 찰기로 진드기처럼 붙어와
가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태양처럼 알려 주더라
마음의 바다 생각이 넘치면
하늘도 비좁아진다고
우주의 생각이 먼저 열어 보인다
위와 아래가 없고
처음과 끝이 본디 없었다고
옳고 그름을 너무 밝히다
이웃을 잃어버린 블랙홀로
외톨이 신세는 되지 말라고
우주의 교양 훈시에
귀엣말로 깨닫게 하더라
밤마다 속삭여주는 별들의 친구가
배움이 못 미친 진실을 알리고
어둠의 세월 밖에도 광명이 기다린다고
풀잎마다 동공을 반짝이며
눈빛으로 말해 주더라
사랑하는 방법이 유별하지 않고
그대가 나보다 늘 새롭고
아름답게 다가옴을 알려주면
내가 느껴야 할 사랑을
고스란히 알려 주는 그대
벼랑에 줄타기 인생 항로
얽히고설킨 행로에서
훤하게 밝혀주는 손짓 하나
얼굴빛 타고 흐르는 미소로 담아
반길수록 품어오는 세월의 그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