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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체험하는 기도. / 神様を体験するお祈り。(2023년 10월 8일 주일예배)
본문; 히브리서 4:14-16
히 4:14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14. さて、わたしたちには、もろもろの天を通過された偉大な大祭司、神の子イエスが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から、わたしたちの公に言い表している信仰をしっかり保とうではありませんか。15. この大祭司は、わたしたちの弱さに同情できない方ではなく、罪を犯されなかったが、あらゆる点において、わたしたちと同様に試練に遭われたのです。16. だから、憐れみを受け、恵みにあずかって、時宜にかなった助けをいただくために、大胆に恵みの座に近づこうではありませんか。
지난 주일에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올바른 모습과 태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우리의 일상 가운데 경험을 종합적으로 살펴 주님의 음성을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삶이라는 사명에 순종할 때 주님께서 채우실 아름답고 놀라운 복을 풍성히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저는 종종 매스컴에 비치는 현실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들리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이나 혹은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단지 육신의 욕구를 해결하면 즐거워하고 재미있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면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맛없는 음식이 더 가치가 있고, 재미없이 진지하게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인생의 태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인생에서 육신적으로 좋은 것들을 누리는 것 자체가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고, 삶의 보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문제를 만나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있는데요.
그리스도인이라면 과연 일상생활에서 단순히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을 누리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만 인생의 참된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제해결을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성과와 성공의 열매를 수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물질적인 성취와 성공을 이루고, 문제가 없는 삶이 행복하다는 세속적인 가르침을 맹종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실력과 노력만을 미덕으로 삼는 무한경쟁 사회, 물질만능 사회, 그리고 적자생존의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요.
이렇게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만을 맹종하려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는 결국 복음을 믿지 않고, 하나님도 믿지 않으며, 기도도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다가 문제가 생기면 먼저 기도하는 대신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대안을 찾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심지어는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물론 기도의 행위 자체가 모든 현실의 문제를 직접 다 해결해 주거나, 기도한 그대로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문제를 극복할 수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목적인 삶이 아니라, 필요한 것들과 문제를 통해 기도하고, 기도를 통해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는 메시지가 오늘 말씀의 핵심포인트입니다.
나의 존재 가치를 뚜렷하게 확인해야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그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문제를 만났을 때 오히려 나의 사람다움과 아름다움과 행복, 그리고 진정한 능력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유익함과 보람이고, 또한 복음의 권능을 누리는 복된 인생인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16절에는 우리가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의 보좌란 곧 우리가 기도의 향이 드려지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계 8:3)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면 그 기도는 금향로에 담긴 향이 되어 주님께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력과 노력을 쌓는 것이 세속적인 삶이라고 한다면, 문제를 만났을 때 우선 기도하며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이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고, 은혜를 입어 살아가는... 존재 자체로 가치가 드러나는 삶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도로 산다는 것은 기도의 능력이 채워진 일상을 산다는 말이기도 한데요. 지난 2천여 년 동안 교회는 수많은 박해와 영적인 공격, 그리고 환란과 문제들에 맞닥뜨려 왔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교회는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바로 기도로 사는 성도들의 삶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에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없고, 실력이 없어 보이는 교회라도 기도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모든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8)
여기서 그들은 이방인들이지요. 중언부언으로 주문을 많이 외우는 기도는 실제로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주문을 많이 외면 욀수록 기도의 효과나 효험이 강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필요한 것과 구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신다면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 것일까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분인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 4장 2절 후반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약 4:2b)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는 말씀은 사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가 기도하고 구할 때에 비로소 얻고, 누릴 수 있다는 뜻인것이죠.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기도하며 구할 때에만 응답하시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현실의 존재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을 때 내가 요청하고 구하는 것에 따라 공급하거나, 공급하지 않는다면 굳이 요청하거나, 청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공급한 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요. 쉽게 말해 눈에 보이는 상대가 나의 필요에 따라서 알아서 공급한다면 그 상대에 대한 믿음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기도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요.
우리가 기도한 것에 하나님께서 반응하시고, 응답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으시지만, 분명히 살아계신 것을 실감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분이라고 한다면 기도를 통해 교제하거나 접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태양과 같이 육신의 감각으로 체감하는 존재를 오늘날에는 더 이상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나라의 대표나 왕이 금식하며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행위도 하지 않지요. 눈에 보이는 대상은 과학적인 연구와 검증을 통해 필요한 것들을 얻기도 하고, 그 유익함을 누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눈에 보이는 존재들에 대해 기도하거나 신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감하고 실감하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수시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시고, 은혜 안에 머무시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 14:23)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더구나 평소에 습관적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눅 22:39-41)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명을 감당할 힘을 얻으셨던 것이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셨으면서도 기도하셨다는 것인데요. 상식의 차원에서 문제의 해결이나 소원빌기의 기도를 하셔야 했다면 굳이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수시로, 습관을 따라, 하루의 시작하는 시각에 먼저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던 것을 기억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기도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그 뜻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도다운 기도인 것이지요. 기도라 하면 단지 소원을 성취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원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면 수시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지요.
만일 누군가 수시로 기도할 필요를 알지 못하고, 혹은 기도를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로 문제해결이나 욕구충족만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제목으로 가장 먼저 고백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면 그 기도자는 더욱 풍성하고, 영적으로 강건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는 곧 하나님을 실감나게 체험하는 응답을 받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문제해결과 필요를 채우려는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내 안에 임재하심과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체험하는 응답을 받는다면 그 기도는 능력이 있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단지 나의 욕망을 채우고,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기도는 단지 소원성취를 위한 빌기(기원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임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와 문제에 대해서 나보다 더 세밀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언제든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당신의 원칙을 세우시고 지키고 계시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에게 정말로 소중하고, 복되고, 풍요로운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기도한 것에 응답받았을 때, 제가 원하는 것이 성취되는 것에 흥분하고 기뻐했던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제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실망했던 적도 많았었지요. 그런데 나의 기도대로 응답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좋은 결실을 맺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거절당한 것이 오히려 저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경험이지요. 수많은 거절의 결과로 저는 제 멋대로의 삶을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현실적인 책임을 져야 하거나, 혹은 좋지 않은 삶의 자리에 서야 하는 일들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것을 후에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는 제가 해 왔던 삶의 선택들에 대해 후회하는 일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탓하거나, 원망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게 해 주셨구요.
최근에는 기도의 응답에 대한 새로운 매력과 감동을 체감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나의 생각이 곧 주님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것을 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생각이 점점 주님으로 물들어가고, 주님 나라인 천국의 영향력이 점점 제 안을 채워가고 있다는 신비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영적인 교만이나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나의 존재를 알고 계시고, 나를 당신의 손에 새기고 계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나게 체감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9:16)
저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복은 꼭 나의 기도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의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지 못해도 감동과 감격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문제란 해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노력이나 실력과 상관없이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 경험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라고 여겨집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자신의 노력과 고민과 실력에 대해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 발생한 것이라면 자신은 그런 어려움들과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나의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다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문제해결을 위한 기원(소원빌기)의 반복이 아니라, 자신이 주님을 알고 주님께서도 나를 알고 계심을 믿기 위한 기도의 삶이 반드시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는 긍정의 응답이 있고, 거절의 응답이 있으며, 또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긍정의 응답은 말 그대로 내가 기도한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마음에 합한 기도라고 할 수 있지요.
거절의 응답도 주님의 뜻과 마음을 배워가는 과정에 필수적인 기도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거절의 응답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배우지 못하기에 건강한 믿음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절의 응답으로 당황하거나, 괴로워하며 의심하는 틈을 사탄과 악한 영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태초의 가인이 그런 미혹에 자신을 내어 주고 말았지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5, 7)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분노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일어나는 죄를 다스려 주님과의 관계와 그 마음에 대하여 배울 기회로 삼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자기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쳐 죽이고 말았지요. 오답과 오류가 많은 우리는 거절의 응답을 받았을 때 비로소 더욱 또렷하게 주님의 뜻과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시험 문제에서 정답을 찾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한 것은 명확한 오답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많은 경우 우리에게 기다리라는 응답을 주십니다. 그 기다림 가운데 거절의 응답이 있는 경우도 있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며 기다릴 줄 아는 자세와 태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또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할 것을 눅 18:1-8에 기록된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로 가르쳐 주시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8)
다시 말해 기다리라고 하시는 응답에 포기하지 않고 기도를 멈추지 않는 이들이 믿음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믿음을 가졌기에 인자가 다시 오실 마지막 때까지 주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순종하여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 다니엘의 예언서에서도 주님의 기다리라는 응답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단 12:13)
기다린다고 해서 무작정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포자기하고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 1:21)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삶의 태도와 자세로 기다리는 것이지요. 분명 주님의 뜻대로, 그리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목으로 기도한 것이 아직 응답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기다리며 자신의 삶의 자리인 각자의 사명을 성실하고 신실하게 꾸준히 지키는 순종으로 주님께 나아가시기를 권합니다.
저도 그런 마음과 태도로 저에게 주신 이 삶의 자리인 하치오지영광교회 담임목사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이 각자의 삶의 자리로 주신 사명을 진득하게 지켜 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이 땅의 현실을 살면서 누리는 가장 권능 있는 특권은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육신의 소원을 말하며 빌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원과는 명백히 구분됩니다. 소원빌기는 자기의 자존심을 갈망하게 하지만, 기도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존귀한 나의 존재감을 회복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한 응답으로 나를 기억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기도의 능력이란 문제를 해결하거나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또렷하고 뚜렷하게 알게 되고,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믿어지는 결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와 소원을 다 알고 계시지만, 기도해야만 응답하시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도 수시로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도로 하나님을 실감나게 체감하는 권세를 누리는 일상의 기쁨과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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