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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林下筆記)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39권 33책 분량으로 경사자집(經史子集)과 역사(歷史)·지리(地理)로부터 서화(書畵)·시문(詩文)·소학(小學)·금석(金石)·전고(典故)·기용(器用) 등에 대한 각종 문헌의 기록을 뽑아 적은 필기류(筆記類) 편저이다.
이유원의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묵농(墨農)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이씨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9세손이다. 이유원은 1841년 과거에 급제하여 헌종 11년(1845)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의주부윤(義州府尹)·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형조판서(刑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 등 내외의 여러 관직을 거친 뒤 1864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며 외직에 머물렀고 이 시기에 저술에 힘을 쏟았다. 1875년에는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882년에는 전권대신(全權大臣)의 자격으로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에 조인함으로써 조선의 문호를 열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양주 천마산(天摩山) 아래에 있는 가오곡(嘉梧谷)에 거주하면서 서울에 왕래하였는데, 『임하필기』는 이 시기(1884)에 완성된 것이다.
이유원은 학문적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은 당대 조선의 저명한 문인들과 사행을 통해 사귀게 된 중국의 문인들을 들 수 있다. 외숙 이탄재(履坦齋) 박기수(朴綺壽, 1774-1845)에게 공부를 하였고 이어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와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1783-1873)에게도 배웠으며, 이외에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 1793-1874)과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를 종유하였다. 중국의 문인들 중에는 섭지선(葉志詵)과 이홍장(李鴻章)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섭지선은 문화적인 면에서, 이홍장은 외교적인 면에서 이유원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섭지선과의 교유는 184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홍장은 이유원이 1875년 세자책봉주청사로 청에 갔을 때 유지개(游智開)를 통하여 사귀었다.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이유원은 점차 국제 정세를 인식하게 되고, 조선이 외국에 문호를 열어 개항하게 된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다방면에 풍부한 지식을 지닌 박학한 학자인 동시에 문장과 시에도 능한 빼어난 문인(文人)으로, 예서(隸書)에 뛰어나며 금석학(金石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유원의 이러한 면모들이 반영된 결과, 『임하필기』는 통시적인 역사와 공시적인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의 장편거질(長篇巨帙)로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이유원 자신이 평소 글을 읽고 차록(箚錄)해 두거나 각종 문헌에서 추려낸 내용을 붓 가는 대로 기록한 것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정기세(鄭基世)의 「임하필기서(林下筆記序)」와 이유원의 「임하필기인」, 그리고 윤성진(尹成鎭)의 「발임하필기후(跋林下筆記後)」이 있다. 이어지는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권1 사시향관편(四時香館編) : 저자가 평소 독서를 하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추려 기록하고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다. 경서(經書)로부터 소학(小學), 천도(天道), 역수(曆數), 지리, 제자(諸子), 평시(評詩), 평문(評文), 잡지(雜識)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권2 경전화시편(瓊田花市編) : 시(詩)와 문(文)의 각 장르별 문체를 설명한 것이다. 단, 이는 이유원의 독자적인 저술이 아니라 명(明)나라 서사증(徐師曾)의 『문체명변(文體明辨)』을 간추려 편집한 것이다.
권3·4 금해석묵편(金薤石墨編) : 중국 고금의 금석문(金石文)에 관한 저술이다. 당시 청나라에서 간행되었던 『서청고감(西淸古鑑)』,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鍾鼎彝器款識)』에서 초록하였다.
권5·6 괘검여화(掛劍餘話) : 병법에 대해서 논한 저술이다. 왕명(王命)을 받고 펴낸 것으로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을 간추린 다음, 실제 역사 속에서 합당한 사례를 뽑아 예증하고 있다.
권7 근열편(近悅編) : 명나라 학자들의 전기적(傳記的)인 사실과 학문적 특징을 소개한 글로 양명학(陽明學)에 경도한 학자 124인이 실려 있다. 저자가 북경에 갔을 때 왕초재(王楚材)라는 사람을 만나 그의 저서를 받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편집하여 완성한 것이다.
권8 인일편(人日編) : 우리나라의 선현(先賢)들과 관련되는 일화(逸話)와 그들의 유훈(遺訓)을 기록한 것으로 수신(修身)에 도움이 되는 말을 추려 모은 것이다. 42개 조목으로 나뉘어 해당되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권9·10 전모편(典謨編) :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바탕으로 천하(天下)를 경륜(經綸)하는 대도(大道)를 논하는 내용이다. 주로 조선의 역사적 사실에서 실례를 들어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편집하였다.
권11·24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권11·12는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부터 시작하여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그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소개하는 내용이고, 권13부터는 역사적 사건과 아울러 관제(官制)·정치(政治)·산업(産業)·경제(經濟)·풍속(風俗)·천문(天文)·지리(地理) 등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총 1647 조목에 이르러 『임하필기』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권25·30 춘명일사(春明逸史) : 저자가 오랜 기간 조정에 있으면서 견문하고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혹은 권24까지 누락된 내용들을 간추려 수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내용은 선현들의 일화와 풍속, 미술 등 다방면에 걸쳐있으며, 1871(고종8)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썼다고 한다.
권31·32 순일편(旬一編) : 『임하필기』를 탈고(脫稿)하고 정원용에게 산정(刪定)을 부탁한 이후 미비한 것들을 정리·보충하고자 쓴 것이다. 관직(官職)의 변천·칙사(勅使)를 대하는 의식(儀式)·조신(朝臣)의 장례(葬禮)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권33·34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 : 주로 시화(詩話)와 서화(書畫)에 관련된다. 중국과 우리 나라의 유명한 필첩(筆帖)·화첩(畫帖)·시(詩)·지필묵연(紙筆墨硯) 등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권35 벽려신지(薜荔新志) : 가오곡의 자연환경을 묘사하고 우리나라 풍토(風土)·예법(禮法)·관습(慣習) 등 자신의 전문을 논한 다음, 선유(先儒) 및 친우(親友)들의 일화(逸話)나 시문(詩文) 등을 수록하였다. 벽려(薜荔)는 저자가 가오곡에서 우거했던 당호이기도 하다.
권36 부상개황고(扶桑開荒攷) :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연혁과 지리를 고찰한 저술이다. 단군조선 이래 고려 까지 37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나라들의 위치와 연혁을 간단하게 서술하였다.
권37 봉래비서(蓬萊秘書) : 금강산과 그 일대의 승경지를 기록한 것이다. 자신이 유람하며 살펴보았던 승경지에 대해 해설하고, 선현들이 남긴 문집 중에서 그 장소와 관련된 시문을 추려서 수록해 두었다.
권38 해동악부(海東樂府) : 우리나라 음악에 관련된 내용으로, 음악의 역사나 악기의 변천 등을 시로 읊었다.
권39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 죽지사(竹枝詞) 형식을 빌려 외국의 문물에 대해 읊은 것이다. 유구(琉球)·영길리국(英吉利國)·법란서국(法蘭西國) 등 30개 나라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서지적 가치
본서는 33책 39권 16편(編)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다. 괘선(罫線)은 있으며 판심제(版心題)는 없고, 판심의 어미(魚尾)는 홑어미이다. 반엽을 기준으로 10행으로 되어 있으며, 1행은 20자이다. 필사본 『임하필기』는 그간 ‘서울대 규장각에 필사본으로 소장되어 있는 것이 유일본으로, 다른 곳에 전사본이 있다는 정보는 아직 없다.’고 알려져 왔는데, 이는 수정되어야 한다. 규장각 소장 『임하필기』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축쇄본(縮刷本)으로 영인(影印)하여 유전(流轉)되고 있다(1961년 초판, 1991년 재판). 이 판본과 버클리 소장본을 비교해보면, 16편 편의 순서나 각 편의 세부 항목의 수록 순서 그리고 내용상으로 큰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버클리본 『임하필기』에는 16편에 대한 총목(總目)과 각 권의 첫머리에 세부목차가 실려 있는 점이 다르다. 또한 장정과 필사 상태, 원고지 형태 등으로 보아 본서가 서지학적으로 더 선본(善本)으로 볼 여지가 있다 할 것이다.
내용적 가치
『임하필기』는 전체적으로 짤막한 기사와 참고자료를 첨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방면에 걸쳐 우리나라의 문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18세기 이래 조선 지식인들의 박물학적(博物學的) 경향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중 이유원이 특히 주목하여 언급한 분야로는, 첫째 국가의 재정․국방․관제(官制)의 변천에 관한 것, 둘째 시화(詩話)에 관련 되는 것, 셋째 음악 및 회화와 서법 등 문화에 관한 것, 넷째 풍속사에 관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이유원이 양반으로서 고급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점과, 조정에 진출하여 오랫동안 고위 관료로 활약하여 국정의 전방에 걸쳐 가지고 있던 관심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임하필기』는 역대의 역사적 사실과 각종 전장제도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이유원이 살아가던 조선 후기의 문물제도와 사대부의 생활 및 민간의 생활 모습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안대회, 「『국역 임하필기』 해제」, 민족문화추진회, 1999.
함영대, 「林下筆記 硏究 : 문예의식을 중심으로 국역 임하필기」,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유영혜,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임하필기1권
● 남풍(南豐) 증공(曾鞏)이 지은 서협송(西狹頌)의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용(龍), 녹(鹿), 승로반인(承露盤人), 가화(嘉禾), 연리목(連理木)과 같은 그림은 한(漢)나라 작품인데, 오늘날 보인 것이다.” 하였고, 소공제(邵公濟.소박)가 이르기를, “한나라 이흡(李翕), 왕치자(王稚子.왕환), 고관방(高貫方)의 묘비에 산림(山林)과 인물(人物)을 조각하였는데, 고개지(顧愷之), 육탐미(陸探微), 종처사(宗處士)의 그림에는 그래도 그 유법(遺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도현(吳道玄)에 이르러서는 탁월한 솜씨가 신의 경지에 들 정도이나, 교묘한 생각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풍스러운 맛이 다소 감하였다. 지금 반주(盤洲) 홍괄(洪适)이 수집한 예도(隷圖)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 송 인종(宋仁宗)이, 태종(太宗)이 쓴 대상국사(大相國寺)의 편액을 돌에 모각하고 절에 가서 전(殿)을 지어 보관하였는데, 서체는 비백체(飛白體)이고 전의 이름은 보규전(寶奎殿)이다. 소흥(紹興) 경진년 굉사과(宏辭科)에서 제목을 ‘보규전태종황제어서찬(寶奎殿太宗皇帝御書贊)’으로 냈는데, 당열재(唐說齋.당중우)가 뽑혔다. 그러나 과문(科文)에 단지 경력(慶曆) 2년이라고만 하였고 월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에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니, 2년 정월 신미일이었다. 소자미(蘇子美.소순흠)가 보규전송(寶奎殿頌)을 지었는데, 주 익공(周益公)이 제보규전송후(題寶奎殿頌後)에, “상재(上宰), 종공(宗工)이 다시 사장(辭章)을 지었다.”라고 한 것은 여이간(呂夷簡)이 기문(記文)을 짓고 장득상(章得象)이 제액(題額)을 한 것들을 말한 것이고, 실록에는 “여이간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당열재가 과문에 “훌륭하다, 요장(堯章)이여, 친히 기술하였네.”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 사관례(士冠禮)에, ‘미수만년(眉壽萬年)’이라고 하였는데, 고문(古文)에 미(眉) 자는 미(麋) 자로 되어 있다. 《박고도(博古圖)》에 있는 옹공함정(雝公緘鼎)의 명문(銘文)에 “미수(麋壽)를 비노니, 만년 무강하라.” 하였다.
● 《당서(唐書)》 서역전(西域傳)에, 말록(末錄)이라는 나라에는 군달(軍達)이 있고 니파라(泥婆羅)라는 나라가 파릉(波稜)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모두 나물 이름이다. 장문잠(張文潛)이 이르기를, “파릉(波稜)은 파릉국(波稜國)에서 온 것이다.” 하였다.
● 여 성공(呂成公)이 이르기를, “진(秦)나라에는 훌륭한 의원이 많았으니, 의완(醫緩)과 의화(醫和)가 다 진나라 사람이다.” 하였고, 시자(尸子)도 이르기를, “의구(醫竘)는 진나라의 훌륭한 의원이다.” 하였다.
● 무팽(巫彭)은 의원이 되었다. 기백(岐伯)의 조사(祖師)는 추대계(僦貸季)이다. 상고 시대의 의원으로 묘부(苗父)가 있다.
● 순우(淳祐) 병오년에 구사(衢士) 시망(柴望)이 《병정귀감(丙丁龜鑑)》을 올렸다. 그 표문(表文)에 이르기를, “옛날부터 지금까지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진 날은 적고 혼란스러운 날이 많았습니다. 임금이 성덕을 가졌고 신하가 훌륭하다면, 앞서 간 수레가 전복된 것을 뒤에 가는 수레는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한(漢)나라의 능을 발굴한 자는 번숭(樊崇)과 동탁(董卓)이며, 당(唐)나라의 능을 발굴한 자는 온도(溫韜)이다. 악인은 생기는 대로 주벌되었으니 천도(天道)는 밝기만 하다.
● 성탕(成湯)과 주공(周公)은 모두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는데, 강왕(康王)은 늦게야 조회를 보았고 선왕(宣王)은 늦게 일어났으니, 따라서 관저(關雎)를 지어 풍자하였고, 강후(姜后)가 스스로 죄를 청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른 아침에 수업하는 것은 선비들의 직분임에랴.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밤낮으로 가정을 잘 다스려 밝힌다.” 하였으며, 《효경(孝經)》에서는 경대부(卿大夫)의 효도를 말하면서 《시경(詩經)》의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는다[夙夜匪懈]’를 인용하였고, 사(士)의 효도를 말하면서 《시경》의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잔다[夙興夜寐]’를 인용하였다. 참정(讒鼎)의 명에 이르기를, “새벽부터 힘써 덕을 크게 빛내더라도 후세의 자손에 가서는 오히려 게을리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숙향(叔向)이 경계한 것이고, 사흘간 새벽에 늦게 일어났던 일과 하루는 아침에 갓을 쓰지 않고 있었던 일을 관유안(管幼安.관영)이 두려워하였으며, 오종(吾宗)이라는 시에서, “집에 있을 때면 항상 일찍 일어나서[在家常早起]”라고 한 것은 두자미가 앞구에서 “질박하기가 옛사람의 기풍이로다.[質朴古人風]”라고 한 것이다. “닭이 울거든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삼가 문안을 여쭙는다.”는 주자(朱子)가 어린아이를 가르친 것이며, “일찍 일어나는지의 여부를 관찰해 보면 그 가정의 흥폐(興廢)를 알 수 있다.”는 여자(呂子)가 문인(門人)을 훈계한 것이다. “닭이 울기를 기다리지 않고 일어난다.”는 육무관(陸務觀.육유)이 아이에게 보여 준 시이며, “닭이 울거든 집안사람들을 거느리고 함께 일어나되 이르고 늦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섭소온(葉少蘊.섭몽득)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선(善)과 이(利) 사이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여 선택하는 것을 순(舜) 임금과 같이 할 뿐이다.
● 진(晉)나라 은중감(殷仲堪)은 아버지 은사(殷師)가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았는데, 옷을 벗지도 않았으며 직접 의술(醫術)을 배워 정밀하고 깊게 연구하였다. 북제(北齊)의 이원충(李元忠)은 모친이 병이 많았는데, 의약(醫藥)에 마음을 쏟아 여러 해 동안 연구하고 익혀서 마침내 의술에 능통하였다. 이밀(李密)은 모친이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았는데, 경방(經方)을 오랫동안 익히고 침약(針藥)을 깊이 터득하여 모친의 병을 치료하였다. 수(隋)나라 허지장(許智藏)의 조부 허도유(許道幼)는 모친의 병환으로 인해 의방(醫方)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여러 아들들에게 경계하기를, “사람의 자식이 된 자는 부모가 드실 음식의 간을 보고 약을 살펴야 한다. 방술(方術)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문중자(文中子)》에, 동천부군(銅川府君.왕융)의 부인이 약을 좋아하여 아들이 비로소 의방을 기술하였다고 하였다. 당(唐)나라 왕발(王勃)이 이르기를, “사람의 자식이라면 의술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당시에 장안(長安)의 조원(曹元)이 비술(祕術)을 지니고 있었는데, 왕발이 그를 종유(從遊)하여 그 비법을 모두 터득하였다. 견권(甄權)이 모친의 병환으로 인해 아우 견입언(甄立言)과 함께 방서(方書)를 연구하고 익혔다. 왕도(王燾)는 모친이 병을 앓자 탕제(湯劑)를 살펴 달이면서 자주 고명한 의원을 종유하더니 마침내 의술에 통달하였다. 이봉길(李逢吉)은 아버지 이안(李顔)이 고질병을 앓았는데, 직접 의술을 연구하여 마침내 방서(方書)에 통달하였다. 두붕거(杜鵬擧)는 모친이 병을 앓자 최면(崔沔)과 함께 소량(蕭亮)에게 의술을 배워 통달하였다.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부모를 섬기는 자라면 의술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소위공(蘇魏公.소송)이 서질명(書秩銘)에 이르기를, “배우지 않으면 뜻을 세울 수가 없는 법, 책이 아니면 무엇을 익히겠는가.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으면 성현(聖賢)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포전정(蒲傳正.포종맹)이 자제를 경계하여 이르기를, “추울 때 옷이 없어도 되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이 없어도 되지만, 책만은 하루라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선성(先聖)의 면복(冕服)은, 상부(祥符) 2년에는 곡부(曲阜)의 문선묘(文宣廟)에 구류(九旒)의 면류관과 구장(九章)의 곤룡포를 하사하였고, 희령(煕寧) 8년에는 국자감(國子監)에서 아뢰기를, “당(唐)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공자(孔子)를 높여 문선왕(文宣王)으로 삼고, 안에서 왕자(王者)의 의복인 곤룡포와 면류관을 내어 소상에 입혔으니, 마땅히 천자의 제례(制禮)를 써야 합니다.” 하였는데, 원의(院議)에서 관품 의복(官品衣服)에 의거하여 구류(九旒)의 면류관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숭녕(崇寧) 2년에는 십이류(十二旒)의 면류관과 구장의 곤룡포로 바꿔 사용하였다.
● 《예기(禮記)》에 예(禮)가 변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시작되었다[始]’라고 하였으니, 단궁 상(檀弓上)에, “공씨(孔氏)가 쫓겨난 어머니의 초상에 복을 입지 않은 것은 자사(子思)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고, “사(士)로서 뇌문(誄文)이 있게 된 것은 이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고, “주루(邾婁)라는 나라가 화살을 가지고 초혼(招魂)한 것은 대개 승형(升陘) 땅에서 노(魯)나라와 싸운 때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노나라 부인이 복머리를 하고 조문하는 것은 대태(臺鮐) 땅에서 주루와의 싸움에 패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단궁 하(檀弓下)에, “빈소에 휘장을 치는 것은 옛날의 제도가 아니니 경강(敬姜)이 지아비인 목백(穆伯)의 초상에 휘장을 치고 곡을 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증자문(曾子問)에, “사당에 두 신주가 있게 된 것은 제 환공(齊桓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고, “자모(慈母)의 상에 상복을 입는 일은 노 소공(魯昭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고, “하상(下殤)에 관목(棺木)과 의금(衣衾)을 써서 염하는 것은 사일(史佚)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교특생(郊特牲)에, “뜰에 100개의 횃불을 사용하는 것은 제 환공(齊桓公)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대부(大夫)가 사하(肆夏)를 연주하는 것은 진(晉)나라의 조문자(趙文子)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고, “대부가 강성하면 임금이 죽이는 것은 의로운 일이니, 이는 노 환공(魯桓公)의 후손인 삼가(三家)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옥조(玉藻)에, “현관(玄冠)에 자주색 수실을 늘이는 것은 노 환공(魯桓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고, “조복(朝服)을 흰 명주로 만드는 것은 계강자(季康子)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잡기(雜記)에, “천자의 명을 받지 않고 제후의 부인이 되는 것은 노 소공(魯昭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고, “대부를 섬겼던 자가 대부를 위해 복(服)을 입는 것은 관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또 《좌씨전(左氏傳)》 은공(隱公) 5년에, “처음으로 육일(六佾)을 쓴 것이다.” 하였고, 희공(僖公) 33년에, “진(晉)나라에서는 이에 검은 상복을 입는 풍속이 시작되었다.” 하였고, 성공(成公) 2년에, “처음으로 후장(厚葬)을 하고 처음으로 순장(殉葬)을 사용하였다.” 하였고, 양공(襄公) 4년에, “노(魯)나라는 이에 비로소 여자들이 초상 때 복머리를 하였다.” 하였고, 양공 11년에, “위강(魏絳)이 이에 비로소 금석(金石)의 음악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였고, 소공(昭公) 10년에, “처음으로 박사(亳社)의 제사에 사람을 희생으로 사용하였다.” 하였고, 정공(定公) 8년에, “노나라가 이에 비로소 어린 양을 숭상하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 역시 예가 처음 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공자가 처음 순장용 나무 인형을 만든 자를 미워한 것은 처음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끝에 가서는 그 폐단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무(劉懋)가 기물(器物)이 만들어지는 시초를 기록하여 《물조(物造)》를 찬술하였고, 유효손(劉孝孫)과 방덕무(房德懋)가 경(經)과 사(史)를 수집하여 《사시(事始)》를 찬술하였다. 그러나 수록된 것은 사물(事物)의 시초로 훈계(訓戒)를 삼기에는 부족하다. 문정공(文正公)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처음으로 왕비와 공주의 장례일에 모두 군악인 고취(鼓吹)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는데, 좋은 법이 아니니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병갑(兵甲)을 만든 일과 전부(田賦)를 시행한 일을 기록한 것은 모두 그 처음을 신중히 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고, 국사(國史)에 기록하기를, “청묘전(靑苗錢)은 폐하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니, 모두 처음을 신중히 한다는 의미이다.
● 토우법(土牛法)에 해의 간색(幹色)으로 머리를 삼고, 지색(支色)으로 몸을 삼고, 납음색(納音色)으로 배를 삼고, 입춘일(立春日)의 간색으로 뿔과 귀를 삼고, 미색(尾色)으로 정강이를 삼고, 납음색으로 발굽을 삼았다. 경우(景祐) 원년에 《토우경(土牛經)》 4편을 천하에 반포하였다. 정도(丁度)가 서문을 지었다.
● 황석공기(黃石公記)에 이르기를, “황석(黃石)은 진성(鎭星)의 정기(精氣)이니, 황(黃)은 진성의 색이고, 석(石)은 진성의 재질이다.” 하였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은 비상노인(圮上老人)을 은군자(隱君子)라고 하였다.
● 유몽득(劉夢得.유우석)이 이르기를, “절부(竊鈇)라는 말에서 마음과 눈이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철봉(掇蜂)이란 말에서 부자지간도 이간(離間)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습매(拾煤)라는 말에서 성현도 의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동파 소식이 변책문주차(辨策問奏箚)에서 이 글을 인용하면서, 철봉 한 구절을 고쳐 이르기를, “투저(投杼)라는 말에서 모자(母子) 사이에도 의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습매라는 말에서 성현도 의혹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 문원공(文元公) 조형(晁迥)이 평소 술수(術數)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역술가가 일찍이 삼명(三命)을 가지고 말을 하니, 공이 이르기를, “자연의 분수는 천명(天命)이고, 천명을 즐거워하여 근심하지 않는 것은 지명(知命)이며, 이치를 미루어 떳떳한 도리에 편안히 하는 것은 위명(委命)이다. 어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자호(慈湖) 선생 양간(楊簡)이 문충공(文忠公) 진덕수(眞德秀)에게 이르기를, “희원(希元)이 학문에 뜻을 두고서 부귀와 이달(利達)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공이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이르기를, “그대가 일찍이 명에 관하여 일자(日者)에게 물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알았다. 본성에서 이 마음을 제거한 뒤에야 도(道)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경전석문(經典釋文)》 모시음의(毛詩音義)에, “초목소(草木疏)에서 봉(葑)은 무청(蕪菁)이라고 하였고, 곽박(郭璞)은 오늘날의 숭채(菘菜)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강남(江南)에는 봉(葑)이 있고 강북(江北)에는 만청(蔓菁)이 있는데, 서로 비슷하지만 다른 채소이다.” 하였다. 장문잠(張文潛 문잠은 송나라 장뇌(張耒)의 자)의 시에 이르기를,
무청이 남으로 가면 모두 숭채로 변하니 / 蕪菁至南皆變菘
숭채의 아름다움은 으뜸이나 뿌리를 먹지 못한다네 / 菘美在上根不食
요잠과 옥순은 볼 수 없으나 / 瑤簪玉筍不可見
먹을 때마다 고국을 생각나게 하네 / 使我每食思故國 하였다.
● 순열(荀悅)의 《신감(申鑑)》에 이르기를, “어린아이가 닭 모는 것을 보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 수가 있다. 어린아이가 닭을 몰 때 급하게 몰면 놀라고 느슨하게 몰면 움직이지 않으나 달래면서 몰면 편안해한다.” 하였다. 허혼(許渾)의 시에, “자취를 감추어 닭 모는 관리가 되었노라.[遯跡驅鷄吏]” 하였다.
● 사마광(司馬光)이 이따금 독락원(獨樂園)에 가서 독서당(讀書堂)에 앉아 이르기를, “걸음을 방해하는 풀은 베어 내고 관(冠)에 걸리는 나무는 잘라 내되, 나머지는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어 서로 이 천지 사이에서 함께 살도록 하라. 이 또한 각각 그 살려는 의지를 이루어 주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장문잠(張文潛)의 정초(庭草) 시에,
사람이 뭇 동물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 / 人生群動中
기는 본래 다르지 않은데 / 一氣本不殊
어찌하여 스스로 사정을 가지고서 / 奈何欲自私
내 몸 편차고 상대를 해친단 말인가 / 害彼安其軀
하였으니, 역시 이와 같은 뜻이다. 이것을 보면 주자(周子)가 창문 앞에 난 풀을 베어 버리지 않은 뜻을 알 수 있다.
● 왕환지(王渙之)가 이르기를, “수레를 탈 때에는 넘어져 떨어질 것에 대비하고, 배를 탈 때에는 전복되어 빠질 것에 대비하고, 벼슬을 할 때에는 뜻을 펼치지 못할 것에 대비하라. 그러면 사고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달관한 자의 말에 가깝다.
● 부현(傅玄)이 지은 석명(席銘)의 좌단(左端)에는, “한가롭게 보낼 때에 기쁨을 만끽하지 말라.” 하였고, 우단(右端)에는, “침소에 들어서는 환란에 대하여 망각하지 말라.” 하였고, 좌후(左後)에는, “안전지대에 있더라도 위태로운 상황을 잊지 말라.” 하였고, 우후(右後)에는, “의혹(疑惑)은 사색(邪色)에서 발생하고, 화근은 말이 많은 데서 발생한다.” 하였다. 관명(冠銘)에 이르기를, “높은 데에 있으면 위태로움을 잊지말고, 위에 있거든 공경함을 잊지말라. 두려워하면 편안하고 공경하면 바르게 된다.” 하였고, 피명(被銘)에 이르기를, “이불이 비록 따뜻하더라도 추위에 떠는 남을 잊지말라. 자기만을 후하게 하지 말고 남을 박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양 원제(梁元帝)의 효덕전천성찬(孝德傳天性讚)에, “은덕을 갚고자 하나 뗏목으로 갈 수가 없으니, 자식의 효도는 티끌 같은데 부모의 사랑은 하해 같도다.” 하였으니, 바로 맹동야(孟東野)의 유자음(遊子吟)이라는 시에서 “촌초의 마음을 가지고 삼춘의 빛을 보답하기 어렵네.[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 유몽득(劉夢得.유우석)의 하복부(何卜賦)에 이르기를, “함께 내를 건너는데 그때에 바람이 분다면 물결을 따라 내려가는 자에게는 길하고 거슬러 올라가는 자에게는 흉하며, 함께 들에서 농사를 짓는데 그때에 비가 온다면 늦벼는 유리하지만 올벼는 불리하다.” 하였다. 동파(東坡)의 사주승가탑(泗州僧伽塔)이라는 시에,
밭 갈 때는 비 내리기를 원하고 추수 때는 개기를 원하며 / 耕田欲雨刈欲晴
가는 배에 순한 바람을 오는 배는 원망한다네 / 去得順風來者怨
하였으니, 이러한 뜻에 근본한 것이다.
● 상심(常心)이 있는 자를 사(士)라 하고, 상심(常心)이 없는 자를 민(民)이라 한다. 뜻을 숭상하는 자를 사(士)라 이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를 사(士)라 이른다. 확고한 뜻을 세워 고고하게 행동하는 자를 유(儒)라 이르고, 천(天), 지(地), 인(人)을 통달한 자를 유(儒)라 이른다.
● 《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 “방성(方城)의 서쪽에 황성산(黃城山)이 있는데 이곳은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밭갈이하던 곳이며,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있는데 자로(子路)가 나루 있는 곳을 물었던 곳이다.” 하였다.
● 묘당(廟堂)이라는 두 글자는 《한서(漢書)》 서낙전(徐樂傳)에 보이니, 이르기를, “묘당 위에서 정사를 수행하여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근심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이르기를, “임금이 정사를 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종묘(宗廟)에 고하고 명당(明堂)에서 논의를 한다.” 하였다.
● 상산(象山) 선생 육구연(陸九淵)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지위의 구분은 없었지만 현인(賢人)과 불초(不肖)한 자는 엄격하게 분변하였는데, 후세에는 지위의 구분은 있으면서 현인과 불초한 자를 대충 분변한다.” 하였다.
● 도가(道家)에서 말하기를, “진인(眞人)의 마음은 마치 구슬이 못 속에 있는 것과 같고, 중인(衆人)의 마음은 마치 바가지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문충공(文忠公) 진덕수(眞德秀)가 이르기를, “이 마음을 마땅히 밝은 거울이나 흔들리지 않은 수면처럼 간직해야 할 것이니, 고목이나 불이 꺼져 버린 재처럼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유도(儒道)는 만세(萬世)를 사실로 삼고, 불교(佛敎)는 만법(萬法)을 공허함으로 삼는다. (끝)
임하필기2권
● 비문(碑文)
유협(옛 중국 사람)이 이르기를, “비(碑)란 돋운다[埤]는 뜻이다. 상고(上古) 시대에 제황(帝皇)이 처음으로 호(號)를 기록하고 봉선(封禪)을 할 때에 돌을 세워 산악 위에 도드라지게 하였으므로 비라고 한 것이다.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엄산(弇山)의 바위에다 사적(事跡)을 기록하였다.” 하였고, 진시황(秦始皇)은 역산(嶧山) 꼭대기에 명(銘)을 새겼는데 이것이 비의 시초이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사혼례(士婚禮)의 “문에 들어서서 비를 맞닥뜨리게 되면 읍을 한다.”라는 글의 주(註)에 “궁실(宮室)에 비를 세워 두고서 해의 그림자를 표시함으로써 시각을 안다.” 하였고, 제의(祭義)의 “희생을 들여와서 비에다 묶는다.”라는 글의 주에 “옛날에 종묘(宗廟)에다 비를 세워 희생을 매어 두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궁궐이나 종묘에 모두 비를 세워서 그림자로 시간을 표시하고, 희생을 매어 두는 용도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인하여 그 위에다 공덕을 기록하였으니, 비의 유래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모방하여 명(銘)을 새긴 것은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에서 시작되었을 뿐이다. 후한(後漢) 이후로는 작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산천(山川)의 비가 있고, 성지(城池)의 비가 있고, 궁실(宮室)의 비가 있고, 교도(橋道)의 비가 있고, 단정(壇井)의 비가 있고, 신묘(神廟)의 비가 있고, 가묘(家廟)의 비가 있고, 고적(古跡)의 비가 있고, 토풍(土風)의 비가 있고, 재상(災祥)의 비가 있고, 공덕(功德)의 비가 있고, 묘도(墓道)의 비가 있고, 사관(寺觀)의 비가 있고, 탁물(託物)의 비가 있게 되었으니, 이들은 모두 용기(庸器)가 점점 없어짐으로 인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른바 돌로 금속을 대신한 것인데 썩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서는 같다 하겠다. 그러므로 비(碑)는 실로 명(銘)을 쓰는 기물이고, 명은 실로 비를 채우는 글인 것이다. 따라서 그 서(序)는 전(傳)에 해당하고 그 문(文)은 명(銘)에 해당한다. 이것이 비의 체재이다.
또 비의 체재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는데, 그 뒤로 점점 의논을 곁들인 것은 잘못이다. 사실을 서술하는 것을 위주로 한 것은 정체(正體)이고, 의논을 위주로 한 것은 변체(變體)이며, 사실을 서술하면서 의논을 곁들인 것은 변체이지만 그 정당성을 잃지 않은 것이며, 사물에 가탁하여 생각을 나타내는 경우의 글은 또 다른 별체로 구분할 수 있다.
● 묘지명(墓誌銘)
지(誌)는 기록한다[記]는 뜻이고 명(銘)이란 이름하는 것[名]을 말한다. 옛사람에게 덕이 있거나 선이 있거나 공렬이 있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 만한 경우에는 그가 죽고 난 뒤에 후세 사람이 그를 위해 기물(器物)을 만들고 거기에다 명을 새겨서 영원히 전해지게 하였다. 이를테면 채 중랑(蔡中郞)의 문집(文集)에 수록되어 있는 주공숙(朱公叔)의 정명(鼎銘)이 그것이다. 한(漢)나라 두자하(杜子夏)에 이르러 처음으로 글을 새겨 묘소의 곁에다 묻음으로써 드디어 묘지(墓誌)가 있게 되었는데, 후세 사람이 이것을 따랐다. 대개 장례를 치를 때에 그 사람의 세계(世系), 이름과 자, 벼슬, 살았던 마을, 행적과 치적, 살고 간 나이, 죽은 날, 장사한 날과 그의 자손들의 대략을 기술하여 돌에다 새기고 덮개를 덮어서 광(壙) 앞 석 자[尺] 되는 곳에 묻어서 훗날 능곡(陵谷)이 변천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였으니, 지명(誌銘)이라고 했을 경우 그 사용한 의도가 심원하고 옛 뜻에도 저해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에 문사(文士)의 손을 빌어 오늘날에 신뢰받고 후세에 전하겠다고 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미화한 자가 이따금씩 있었으니, 글은 비록 같지만 의미는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반듯한 사람에게 쓰게 한다면 필시 사정(私情)에 치우쳐 남들을 따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을 가지고 논하면, 묘지명(墓誌銘)이라고 한 경우는 지(誌)도 있고 명(銘)도 있는 경우를 말하며, 묘지명 병서(墓誌銘幷序)라고 한 경우는 지도 있고 명도 있는 상태에서 또 앞에 서(序)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지명(誌銘)이라고 하였으나 지만 있고 명이 없는 경우도 있고, 혹은 명만 있고 지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별체(別體)이다. 묘지(墓誌)라고 한 경우에는 지만 있고 명은 없으며, 묘명(墓銘)이라고 한 경우에는 명은 있고 지는 없다. 그러나 또 오로지 지(誌)라고만 했는데 도리어 명(銘)이 있는 경우도 있고, 오로지 명이라고만 했는데 도리어 지가 있는 경우가 있으며, 또 제목은 지라고 하고서 내용은 명인 경우가 있고, 제목은 명이라고 하고서 내용은 지인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모두 별체이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 가매장[權厝]한 경우를 권조지(權厝誌) 또는 ‘아무의 빈에 쓰다[誌某殯]’라고 하고, 후장(後葬)을 하면서 재차 쓰는 지문(誌文)인 경우에는 속지(續誌) 또는 후지(後誌)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 죽어서 귀장(歸葬)하는 경우에는 귀부지(歸祔誌)라고 하고, 다른 곳에다 장사하였다가 뒤에 천장(遷葬)하는 경우에는 천부지(遷祔誌)라고 한다. 덮개에다 새기는 것을 개석문(蓋石文), 벽돌에다 새기는 것을 묘전기(墓磚記) 또는 묘전명(墓磚銘)이라 하고, 목판에 쓰는 것을 분판문(墳版文) 또는 묘판문(墓版文)이라고 한다. 이 밖에 장지(葬誌), 지문(誌文), 분기(墳記), 광지(壙誌), 광명(壙銘), 곽명(槨銘), 매명(埋銘)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불가에서는 탑명(塔銘)이니 탑기(塔記)니 하여 모두 20개의 제목이 있는데, 혹은 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혹은 명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바, 이것은 모두 지명(誌銘)의 별제(別題)이다.
그 문체는 정체(正體)와 변체(變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체는 사실만을 서술하고, 변체는 사실을 서술하고 의논을 덧붙인 것이다. 또 순전히 야(也) 자만 써서 단락을 삼는 경우도 있고 허위로 지문(誌文)을 짓고서 명(銘) 내에 비로소 사실을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도 모두 변체이다.
명(銘)의 체(體)로 말할 것 같으면 삼언(三言), 사언(四言), 칠언(七言), 잡언(雜言), 산문(散文)이 있고, 문구 가운데에 혜(兮) 자를 사용하는 것도 있고 맨 끝에다 혜 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맨 끝에다 야(也) 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운자(韻字)를 쓰는 데도 한 구에만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두 구에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세 구에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앞에는 운자를 사용하고 끝에는 운자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앞에는 운자가 없는데 끝에만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한 편 안에 이미 운자를 사용하고 한 장(章) 안에서 또 각각 따로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한 구절씩 걸러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어조사에 운을 두는 경우가 있고, 한 글자를 한 구절씩 건너 거듭 사용하여 스스로 운자로 삼는 경우가 있고, 전체 다 운자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운자를 바꿀 경우에 두 구절마다 한 번씩 바꾸는 경우도 있고 전편에 걸쳐 바꾸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각 편 중에 섞여 나온다.
● 묘비문(墓碑文)
옛날에는 장사 지내는 데 풍비(豐碑)가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서 곽(槨)의 앞과 뒤에다 세우고 그 가운데를 뚫어서 녹로(鹿盧)를 만든 다음 동아줄을 꿰어 하관하는 것이다. 한나라 이후로 죽은 자의 공업을 맨 처음에는 그 위에다 새기던 것을 점점 바꾸어서 따로 돌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유협이 이른바 “원래 종묘에 세워졌던 비(碑)가 무덤에도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晉)나라와 송(宋)나라 시기에 처음으로 신도비(神道碑)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대개 풍수가(風水家)들이 동남쪽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그곳에다 비를 세웠던 것인데 이것을 인하여 이름을 삼은 것이다. 당(唐)나라 비의 제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5품(品) 이상인 관원만 사용하였는데, 근세에는 높이와 너비에 각각 차등을 두었으니 제도가 세밀해진 것이다. 대체로 장사를 치른 자가 지(誌)를 만들어서 유택(幽宅)에다 보관하고 나서 또 비(碑)나 갈(碣)이나 표(表)를 만들어 밖에다 내걸었던 것은 모두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차마 선조의 덕을 은폐시키지 못하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 문체가 문(文)도 있고 명(銘)도 있고 서(序)도 있는데, 혹은 사(辭)라고 하고 혹은 계(系)라고 하고 혹은 송(頌)이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모두 명(銘)을 이르는 것이며, 거기에는 또 정체와 변체가 있다. 불가와 도가에서 장례 지낼 때도 역시 비를 세워 참람스레 품관처럼 하였으니, 아마도 역대로 서로 인습에 젖어 이교(異敎)를 숭상하고 금지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 듯하다.
● 묘갈문(墓碣文)
반니(潘尼)가 반황문(潘黃門)의 갈(碣)을 지었으니, 갈이 지어진 것은 진(晉)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唐)나라의 묘갈 제도를 보면 부석(趺石)은 네모나고 수석(首石)은 둥글었는데 5품 이하의 관원만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비와 갈을 본래 서로 통용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관직의 등급 문제로 인하여 그 명칭을 구분하였지만, 사실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문체도 비와 유사하다. 그러나 명(銘)이 있고 없고는 짓는 사람이 하기 나름이다. 오로지 갈이라고만 하고서 도리어 명을 쓰는 경우도 있고 혹은 명까지 겸해서 말하고서 도리어 명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은 지(誌)나 조(詔)처럼 확고부동한 표준을 내세울 수 없는 것들이다.
● 묘표(墓表)
묘표는 동한(東漢)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안제(安帝) 원초(元初) 원년(元年)에 알자(謁者)인 경군(景君)의 묘표를 세웠는데, 그 뒤로 계속 이어졌다. 그 문체는 비(碑)나 갈과 동일한데, 벼슬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다 쓸 수 있었으니 비나 갈에 등급의 제한이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또 천표(阡表), 빈표(殯表), 영표(靈表)가 있는데, 대체로 천(阡)이란 묘도(墓道)를 말하며, 빈(殯)이란 장사하기 전을 지칭하며, 영(靈)이란 막 죽었을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영으로부터 빈을 하고, 빈으로부터 묘를 쓰고, 묘로부터 천을 만들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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