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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창세기는 시작에 관한 책입니다.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11장까지는 천지창조와 바벨탑 사건까지이고, 12-50장까지는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원역사(原歷史), 후자를 족장사(族長史)라 부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우주와 인류의 근원에 대해 알게 됩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 고유민족의 근원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죄의 근원에 대해 알게 되고, 여러 언어들의 유래와 세상 여러 종족들의 근원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근원서’(Books of Original)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읽기 전에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창세기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다루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창세기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쓰여 진 책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세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감과 경외감을 가지고 창세기를 읽어야 합니다.
창세기 1:1은 “태초에”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의 첫 번째 문장이기도 합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창조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러나 ‘태초에’(in the beginning)는 ‘종말에’(in the end)라는 말과 쌍을 이루는 단어입니다. 즉,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보면서 종말의 때를 기대합니다. 창세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죄악을 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시고 종말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시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역사적(historical) 이야기(narrative)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 분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송축적(doxological)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인간의 역사만이 아니라 자연계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왕이시며,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어떠한 분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6일 동안의 시간을 거쳐 단계별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나누고 구분하여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사역을 통해서 ‘혼돈’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넷째 날부터 여섯 째 날까지는 그 나누어진 공간에 생명을 채워 가시는 사역을 통해서 ‘공허’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왕이십니다.
‘흑암’은 단순히 빛이 없는 어두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흑암은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흑암도 창조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마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깊음’은 깊은 바다 속 심해를 말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 이 깊음에서 물이 흘러나와 세상을 심판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7:11;8:2). 흑암이 빛과 대조되는 것처럼, 깊음은 땅과 대조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빛과 땅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흑암과 깊음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말은 그것이 그분의 목적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리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해 그 분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또한 우리 인간도 그분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질서에 겸손히 동참해야만 합니다. 천지의 창조주를 바로 알 때 우리는 비로소 겸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2절 하 반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성령께서도 그 사역에 동참하셨던 것을 알게 됩니다. 혼돈과 공허, 흑암과 깊음의 세계에 하나님의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운행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사용된 곳은 구약에서 이곳과 신명기 32:11 뿐입니다. 신명기 32;11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기서 ‘운행하다’라는 동사는 자기의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어미 독수리가 둥지 위를 맴도는 그림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사랑으로 보호하시고 용납하시는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십시다.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를 알 때,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하십니다. 날카로움과 차디찬 세계에 홀로 동떨어져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계획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이요, 가장 중요한 출발입니다. 예전에 어느 집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성경에 나타난 기적이 믿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은 성경에서 동정녀가 아이를 잉태하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기사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라며 늘 강한 의구심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세기 1;1을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아이를 잉태할 수 없고, 맨 발로 물위를 걸을 수 없단 말인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순간, 성경에 나타난 기적과 이사가 믿어지고 인간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우리를 사랑의 날개로 품으심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인생은 더 이상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 분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며, 우리의 행복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