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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41
9월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연중 제2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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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권위와 힘이 실릴 수 있도록, 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시면서 선포하신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오늘 카파르나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 안에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삶과 죽음, 사명과 운명을 명명백백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복음 4장 18~19절)
고향 나자렛에서 크게 배척받고 홀대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실망이 크셨겠지만, 크게 연연해 하지 않으시고, 훌훌 털어버리시고, 다음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침을 계속하셨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오랫동안 들어왔던 유다 지도자들의 고리타분한 말씀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신선했고, 명쾌했으며,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 설교 중에, 그 자리에서 당신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고 권위가 있는지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회당에는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 안에 들어있던 마귀는 예수님의 존재감과 포스에 기가 눌려, 자기도 모르게 일종의 신앙고백을 하고 만것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복음 4장 34절)
카파르나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마귀는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마귀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랜 세월 마귀의 횡포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찬 모습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친 것입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자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루카 복음 4장 36절)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친일 군부 독재자들의 통치방식에 익숙해서 그런지,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권위’라는 단어에 큰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사실 권위라는 것은 나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권위라는 것은 한 사회나 조직이 조화있고 균형감있게 운영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힘입니다.
한 리더십이 권위를 상실하게 될 때,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권력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리더 안에 권위와 품위, 품격이 조화를 이룰 때 그 조직은 살아나는게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자연스레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갖은 기득권란 기득권은 다 누리며, 언제나 정통성 없는 군사독재 정권 편에 섰던 언론들,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놓고 죽음까지 몰고간 반민족적 언론들,
선량한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릇되고 거짓된 정보를 제공한 반복음적 적폐 언론들을 바라보며, 권위와 겸손, 품위과 인격이 사라진 말이 얼마나 천박하고 사람을 해치게 되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와 다른 동물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 언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가장 독창적인 능력이 바로 언어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권위와 힘이 실릴 수 있도록, 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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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칭찬의 함정>
어느 날 까마귀가 치즈 한 조각을 훔쳐서 그것을 조용히 먹으려고 숲 속으로 날아갔는데, 마침 여우가 지나가다가 나무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치즈, 냄새도 좋다. 저것을 꼭 빼앗아야지.’ 여우는 나무 가까이 와서 까마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마나님,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짐승입니다. 나는 당신이 이렇게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참, 마나님의 음성도 아름답겠지요? 만일 그러시다면 마나님은 조류의 여왕으로 불림이 당연합니다. 어려우시지만 노래 한 곡조 불러 주시렵니까?”
까마귀는 자기의 노래를 여우에게 들려주기 위하여 입을 열었습니다. 순간 치즈 조각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우는 그 치즈를 한 입에 삼켜 버리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칭찬이나 찬미가 다 좋을 것일까요? 그것을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다른 욕망이 들어있다면 그것은 참다운 칭찬이 아닙니다. 남을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이용하려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이 얼마나 용감한 고백입니까? 심지어 마르코복음에는 “더러운 악령들은 예수를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라고 합니다.
마귀의 특징은 항상 칭찬하고 찬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찬미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실 무언가를 바라는 그들의 욕망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찬미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우리 찬미가 참다운 찬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자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라고 하시며 그를 교회의 수장으로 세우시고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시몬 베드로의 찬미를 닮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성령을 통한 신앙고백이고, 마귀들은 상대를 이용하기 위한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성령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생각으로 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성령은 믿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열매들도 맺어주십니다. 다른 열매들을 통해 우리의 예배가 참다운 예배인지, 그렇지 않은지 구분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믿음),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미운 마음을 가지고 미사를 드리며 주님을 찬미할 때 아마 주님께서는 “조용히 해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또 기쁘지 않고 우울한 마음으로, 혹은 평화롭지 않고 걱정과 근심, 초조한 마음으로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온유하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찬미를 한다면 더더욱 그러하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4-25)
성령으로 주님을 찬미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주시면 더 감사하겠다는 식의 찬미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것까지 다 빼앗겨도 당신만으로 충분하다는 찬미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래 입장에서는 그 칭찬에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돈벌이를 위해 고래를 칭찬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고래가 죽으면 돈벌이가 사라져서 슬퍼할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칭찬할 때도 이런 고래에게 하는 칭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더 성적을 잘 받아오면 칭찬을 해 줍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해도 칭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의 성적 때문에 칭찬한 것이지 자녀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안에 다른 욕망이 있을 때 그 칭찬은 상대를 이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마귀들도 자신들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찬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쫓아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것을 기대하며 신앙고백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없는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우리 욕정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드리는 찬미를 원치 않으십니다.
지금 주님을 찬미하는 시간에 기쁘고 감사하지 못하면 그의 찬미는 무언가 바라는 거짓 찬미입니다. 마귀의 찬미인 것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되는 일이 없어도, 가족 안에 우환이 생겨도, 그래도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찬미할 수 있을 때 그런 찬미를 즐겨 받으십니다.
성인들은 사자에게 잡혀 먹힐 때도 찬미했고, 목에 칼을 맞을 때도 찬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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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4,31-37 :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나자렛에서 설교하신 다음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새로운 창조는 옛 창조가 끝나는 때인 안식일에 시작되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절)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신다. 그것은 마귀가 진실을 말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마귀가 들린 사람을 완쾌시켜 주신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본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능력은 인간뿐 아니라 마귀의 힘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멀리하려는 그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권능을 견디어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 앞에 마귀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 못하고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그것을 새로운 가르침,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란 것은 조용하고 간단한 말 한 마디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지도자들 즉 그들의 스승들과 다른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고 놀랐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권위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전파되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아들임을 이러한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마귀들이 그분을 알아보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눈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즉 깨어있는 삶이 될 때에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때에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인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보면서 또한 우리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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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의 묵상
알렉산드로스 임금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한 곳을 바라보며 “저 곳에 내 이름을 따다 붙인 도시가 하나 생기면 좋겠다!”라고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뒤 다시 그곳을 방문하니 ‘알렉산드리아’라는 커다란 도시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임금의 말을 듣고 그의 뜻대로 임금의 이름을 따다 붙인 도시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권위가 있으셨다고 말합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뜻은 그 말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만듭니다. 새사람을 만들 수 있는 것만큼 큰 권위는 없습니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말을 한다고 해서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0년 동안 같은 이유로 부부 싸움을 해도 하나의 버릇도 바꾸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에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씀이 어떻게 권위를 지니게 되는지 그 비밀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십니다. 마귀는 은근히 주님을 찬미하듯,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사람들 앞에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베드로는 같은 고백을 해서 교회의 수장이 되고 하느님 나라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의 칭찬으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시는 분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지키려면 세상 것들에 대한 애착에서 초탈해야 합니다.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시는 분은 성령이신데 그 성령의 불은 세속과 육체의 욕망으로 약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애착을 벗어난 사람의 한마디 말이 수천 마디 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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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4)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 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서 잠잠해지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고(루카 8,24), 온갖 질병을 고치는 힘이기도 하고(루카 5,24-25), 마귀들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이기도 하고(루카 4,35),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기도 합니다.(루카 7,14-15)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에 그 힘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옛날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이 아니라, “오늘(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힘’이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서, 또는 다른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날마다 들으면서, 그 말씀 안에서,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1-37)
여기서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음을 느꼈고, 그 힘에 압도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이야기 바로 앞에,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이야기가 있는데,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은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반응과 많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자렛 사람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그 말씀에 권위가 있다고, 즉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다고 느끼지도 않았고, 압도되지도 않았습니다. 나자렛과 카파르나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고, ‘듣는 사람들’ 쪽에 차이가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표현을 조금 바꾸면, 나자렛 사람들은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귀를 막고 있었고,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마태 13,13)이 되었고, 반대로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말씀의 힘’을 느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뒤의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5)
아마도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힘에 놀라고 압도되어서 널리 소문을 퍼뜨리기는 했는데, 참된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그들은 마귀들도 복종하는 예수님의 말씀의 힘에 기대를 걸고 병자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루카 4,40)
여기서 마귀가 한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도 아니고 증언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고, 쫓겨나지 않으려고 반항하는 말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 말은 마귀 들린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마귀가 한 말입니다. 자기가 사로잡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마귀가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마귀에게 자유의지를 빼앗긴 사람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마귀 들린 사람의 말과 마귀의 말은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명령만으로) 마귀를 쫓아내신 일은, ‘예수님의 말씀의 힘’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힘을 생생하게 목격했고, 또다시 놀랐고, 그 힘에 더욱 압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번역이 조금 어색한데, 어떻든 이 말씀의 뜻은, “나는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는 표징이다.”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인간 세상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쫓겨난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마귀들이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들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패배와 멸망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마귀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들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것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단 하나, ‘기도’뿐입니다.(마르 9,29) (기도할 때마다 온갖 잡념이 생기는 것도 마귀의 장난일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더 기도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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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무엇이든 첫 시작을 하게 되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동반됩니다. 처음으로 신학교에 입학 했을 때, 사제가 되었을 때,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을 때, 이곳 청담동 성당에 오게 되었을 때 제 마음 속에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언제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때의 두려움. ~ 그것은 아직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이 중에서도 제가 가장 두려움을 느꼈던 때는 사제품을 앞두고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보기 좋은 사제가 될 수 있을지, 첫 본당에서 사제로서 잘 지낼 수 있을지,
어떤 주임 신부님과 신자분들을 만날지, 온통 걱정뿐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영성지도 신부님께 털어 놓자 신부님께서는 저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 것, 그리고 항상 묵주기도를 바치며 발령이 나지 않았을지라도, 새로운 본당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이 기도 안에서 만난 인연이 되고, 그만큼 저도 정성을 다하게 될테니, 사목 활동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제가 되어 본당에 부임했을 때 저는 실제로 기도 안에서 우리가 만났음을 인식하며 보다 기쁘게 소임을 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 알 수 없는 미래가 바로 두려움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 안에 머무를 때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고 두려움은 점차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는 예수님에 의해 쫓겨나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이를 고백하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마귀로부터 풀려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벗어나 그분이 어떠한 분인지를 아는 순간 마귀의 유혹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것을 드러나게 하시고 감추어진 것을 알려주시는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그 분은 세상을 만든 창조주이시며 나의 머리카락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여러 걱정과 근심을 하게 됩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주위 사람들의 건강, 함께 알고 지내는 이들과의 다툼과 갈등 속에서 우리는 적잖은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모든 인간적인 두려움을 초월하여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 하듯,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느님 아래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알 수 없는 두려움들은 모두 빛을 잃고 맙니다. 그것을 잘 기억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할 수 있고 이는 곧 행동으로 드러나 새로운 권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 미사를 통해 우리의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지켜 주시는 생명의 하느님을 느끼시고 모든 두려움을 그분께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사랑의 행동으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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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성 안토니오수도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Privacy에 갇히는 더러운 영의 영혼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카파르나움에서 당신이 한 일을 고향 나자렛에서도 하라고 고향 사람들이 요구할 거라고 어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오늘 그 카파르나움에 오셔서 더러운 영과 맞닥뜨리십니다.
그러자 더러운 영은 주님을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하며 주님을 나자렛 사람으로 한정합니다. 그런데 이럴 수 있습니까? 나자렛 사람으로 한정해도 되는 분입니까?
이런 사실에서 제가 오늘 포착한 것은 고향 사람이나 카파르나움의 더러운 영이나 다 장소, 자기의 영역에 집착한다는 겁니다. 이는 조폭들이 자기 영역을 일컫는 ‘나와바리’라는 일본말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니까 조폭이든 더러운 영이든 장소에 집착하고 자기 영역에 집착하며, 심지어 개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이 장소와 자기 영역에 집착을 하니 내가 나의 영역, 자기의 사적영역/Privacy를 고집한다면 나는 조폭과 다름없고, 동물들과 다름없으며, 그리고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은 여기에 계시지만 여기에 묶이지 않으시고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계시는 분 아니십니까?
그리고 성령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에서 얘기하듯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처럼 경계에 얽매임 없이 어디든 가고픈 곳으로 가시는 분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으로서 우리 역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의 시간과 장소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가셔서 악령과 대결하신 분이시며 그 악령의 아류들이 하느님의 자녀들 안으로 들어가 노예로 만들고 억압을 하는 곳이면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분 아닙니까?
이렇게 사랑으로 오시는 분을 더러운 영들은 상관성을 부정하고, 자기들을 멸망시키러 오시는 분으로 여기며 오지 말라, 떠나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자기 영역을 고집하며 아무와도 상관없이 살려는 더러운 영에게 영역을 무시하고 들어오시는 주님은 아무리 사랑으로 오셨어도 그것은 침범이고 멸망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오늘 날 폐쇄성 젊은이들이 많다고 하지요. 자기 방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않고 가족과도 아무 상관없이 사는 젊은이들 말입니다.
이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가족들이 갖은 애를 쓰지만 이들은 가족들의 이런 사랑을 괴롭힘으로 여길 뿐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이런 시도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것은 오늘 날 허약하고 타락한 개인주의가 초래한 광범위한 현상으로 수도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복음 선포를 위해 두려움 없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수도자들이 자기 방에 갇혀 지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을 때 사람은 허약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을 때 개인은 홀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을 때 세상은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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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이 “희년선포”에 이어, 메시아로서의 당신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곧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에서 안식일에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구마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 권위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4)
그것은 한 마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
그러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쳤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습니다.”(루카 4,35) 여기서 우리는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이사야와 즈카리아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 한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이사 22,6)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즈카 2,14)
앞의 희년선포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곧 당신의 현존을 그들 가운데 드러내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혀로 하와를 속인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며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곧 당신의 현존에로 회복시키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으로 행하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희년선포와 마찬가지로 원죄 이전의 에덴으로의 복귀를 드러내줍니다. 생명이 충만한 상태애로의 되돌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죽이거나 제거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언제든지 또 다시 침범하고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완전한 문제 해결을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물러가게 할 뿐입니다. 마귀는 또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이는 단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당신의 권능에 의탁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당신 안에서 깨어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도록 합시다.”(1테살 5,5-6)
당신과의 관계맺음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단지 마귀를 쫓아내는 데에 있기보다 생명과 빛이신 당신의 권능 안에 머물라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몹시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그렇습니다. 그들이 몹시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실, “권위”(exusia)라는 말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것은 발설된 말씀이 말씀한대로 이루어지는 힘입니다. 선포된 말씀이 허황되지 않고 곧 실재가 되기에 그 말씀이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낸 것입니다. 곧 “말씀”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어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말씀이 “권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구마자들은 자신의 권능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을 빌려 쫓아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할 일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마기도를 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명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신 그분의 권능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라고 하면서 자신 안에 빛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빛이신지라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 안에 말씀의 권능과 빛이 들게 되고 그분의 현존에 머물게 되면, 어둠은 물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권능과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기에 빛 안에 머물게 되면, 어둠은 아예 침범하지조차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도록 합시다.”(1테살 5,4-6)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말씀의 권능과 힘, 그 가르침의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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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승환 베드로 신부님]
오늘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마을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셔서 가르치시면서 우리 평화공동체를 초대합니다. 우리 다 함께 허리에 띠를 두르고 주님이 베푸시는 말씀의 식탁에로 나아갑시다.
카파르나움에서 주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안식일에 말씀을 듣고 이들은 그 교리에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처럼 궤변을 늘어놓거나 결의론에 빠지거나 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권위를 가지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제나 명확하며 모호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고 동시에 모든 이의 지능을 초월합니다. 부드러우며 독선적이지 않기에 청중들은 그 말씀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그 자리에 마귀 들린 사람이 무대로 나오게 됨을 주목하십시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 날 회당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영으로 알아본 사람은 악령 들린 사람하나였던 것입니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가 예수님을 알아 본 것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있는 악령이 알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령은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어 대항을 시도합니다.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 신지 압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4장 34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놀라운 구마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 사람의 입을 다물도록 명령하시고, 마귀에게 썩 나가라고 권위 있게 말씀하십니다. 또 한 번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알아보고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제 암흑의 나라가 빛의 나라인 예수님에 의해서 해체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4장 36절)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선과 악의 싸움을 보았고,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옛말에도 "등불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고 했듯이 빛이신 그리스도 앞에 악령은 결코 더 이상 그 세력을 확장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예수님과의 대적에서 번번이 지기는 하지만 완전히 떠나가지는 않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시작된 싸움은 오늘 카파르나움 회당을 거쳐 공생활 내내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싸움의 궁극적 종말은 묵시록 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마지막에 이르면 사탄의 권한은 완전히 그 힘을 잃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통치권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권능도 완전히 주님께 굴복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아니하였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귀처럼,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는 악의 세력이 끝없는 유혹의 모습으로 그리고 쾌락의 모습으로 간단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외칠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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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루카 4,31-32)
<안식일에 시작된 새 창조>
루카는 옛 창조가 끝난 때에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자, 주님께서 거룩한 치유 행위를 안식일에 시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율법 아래가 아니라 율법 위에 계시며, 율법을 폐지하는 분이 아니라 완성하는 분(마태 5,17 참조)임을 보여 준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그분의 입김으로 그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네"(시편 33,6)라고 쓰여 있듯이, 세상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런즉 율법은 폐지되지 않고 완성되며, 그로써 잘못되었던 인류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사도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 3,9-10; 참조: 에페 4,22.24). 그분께서 안식일에 일을 시작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창조주임을 보여 주신 것은 적절했습니다. 그분은 이 일과 저 일을 엮어서, 당신이 이미 시작하신 일을 마침내 완수하셨습니다.
-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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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권위>
루카 4,31-37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권위>
있어야 할 곳에서 당당하게
없어야 할 곳에서 자취 없이
해야 할 바를 온 힘 다해
하지 말아야 할 바는 아쉬움 없이
말해야 할 때는 사는 만큼만
침묵해야 할 때는 있어도 없는 듯
가야 할 길에서 쉼 없이
가지 말아야 할 길에서 주저함 없이
착한 이에게는 부드럽게
모진 이에게는 단호하게
약한 이에게는 조심스럽게
강한 이에게는 거침없이
없는 이에게는 아낌없이
가진 이에게는 정의롭게
품어야 할 것은 따뜻하게
내쳐야 할 것은 냉정하게
모두가 지녀야만 하는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아무나 지닐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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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너에게는 내가 있잖아….>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시퍼)….’이라는 시를 묵상했습니다.
하루는 한 생애의 축소판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의 생애가 시작되고 피로한 몸을 뉘어 잠자리에 들면 또 하나의 생애가 마감됩니다. 우리가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눈을 뜰 때 태어나 잠들면 죽는다는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나는 당신에게 투정 부리지 않을 겁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에게 좀 더 부드럽게 대할 겁니다 아무리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불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더 열심히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모두 사랑하기만 하겠습니다.그러나 정말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나는 당신만을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죽어서도 버리지 못할 그리움 그 엄청난 고통이 두려워 당신 등 뒤에서 그저 울고만 있을 겁니다. 바보처럼….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라면 고운님들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미움과 원망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다투거나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 하루 안에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생각할 것입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그 사랑을 왜 평소에는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걸,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걸 왜 진작 못 했을까?”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이 챙기려는 욕심이 용서를 더디게 하고 화해를 머뭇거리게 하고 사랑을 주춤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보호하심과 자비가 베풀어짐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그러자 마귀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나갑니다.당시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죄”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래도 괜찮아…!” 하시면서 죄가 있는 사람을 벌하지 않으시고 더러운 마귀만 쫓아내셨습니다.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인지 자명하게 밝혀졌습니다. 그것도 더러운 마귀의 영이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가 있는 하느님의 능력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능력을 조건 없이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모든 풀의 잎사귀 하나하나마다 그 잎사귀를 보호하는 천사들이 있고, 그 잎사귀를 향해 천사들은 이렇게 속삭인답니다.
“무럭무럭 자라렴! 내가 보호해 줄게.”
그래서 고운님들의 머리카락 하나하나에 천사를 붙여주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신 예수님께서 고운님들을 세상 끝날까지 보호해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성전에 들어가서 ‘성수를 찍을 때’ 주님의 보호하심과 자비의 능력을 입게 됩니다.
“주님, 이 성수로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성수를 찍고 기도하면서 생각이 열리고 마음이 열어지고, 예수님의 권위와 힘(능력)으로 고운님들이 바라는 뜻을 이루어주심을 믿습니다. 아멘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열정’은 ‘하느님 안에 머문다.’라는 뜻입니다. 나만 힘든 것 같고, 나만 외로운 것 같고, 나만 지치고 무너질 때 조용히 고운님들 마음 안에 있는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씀으로 찾아오시어 주님께서 고운님들에게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아! 너에게는 내가 있잖아!”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께서 고운님들에게 주신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씀으로 주님의 권위와 능력을 입고, 고운님들이 바라는 소망을 이루시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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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43)
♧♧ 시편 46편 10절….
"그분께서 세상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꺾고 창을 부러뜨리시며 병거를 불에 살라 버리시네."
* 그분께서 세상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라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상징하며, 그 구원의 섭리에 의해 참된 평화가 세상 끝까지 도래한다는 것은 장차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서 천국 시민들이 누리게 될 완전한 평화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 활을 꺾고 창을 부러뜨리시며 병거를 불에 살라 버리시네...
활과 창, 그리고 병거는 고대 사회에서 사용되던 무기들로서 이는 여기서 많은 적들의 강한 군사력을 상징합니다. 많은 적들이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불타는 지푸라기와 같이 헛될 뿐입니다. 따라서 이는 결국 많은 적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완전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 시편 46편 11절…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나는 민족들 위에 드높이 있노라. 세상 위에 드높이 있노라!"
‘너희는 멈추라...’는 단순히 동작을 멈추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온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의미입니다.(시편 62편 2절, 6절. 참조) 그리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과연 어떻게 세상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지를 깨달아 알며, 그 같은 하느님만이 정녕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지할 대상임도 분명히 알라나는 말입니다. 마침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의 오묘함과 그분의 전능하심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 하고 답답해 하는 우리 자신이 지극히 미미한 존재임을 깨닫고 잠잠히 하느님 앞에 머리 숙여 경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시편 46편 12절…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야곱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산성이시네. 셀라."
8절의 반복으로, 하느님만이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굳건한 피신처가 된다는 사실을 재강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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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 아들 때문에 걱정이에요.”라면서 제게 고민을 말씀하셨던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그의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빈둥대고만 있습니다.
자격증을 따겠다고 학원에 등록하고서는 얼마 못 가서 장래성이 없다며 그만두었고, 취업해도 회사에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금방 그만둡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 자신의 방 청소조차 하지 않으면 게으름이란 게으름은 다 부립니다.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제가 다 한숨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자매님께서는 아들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왜 안 했겠어요. 이런 식으로 계속 살 것이냐고 했더니 자기도 이러고 싶겠냐면서 화를 내면서 집을 나갔다가 한참 만에 들어왔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또 집 나갈까 봐 싫은 소리도 못 하겠고, 저렇게 의욕 없이 사는 모습이 안타깝고 화만 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안타까워서 자매님과 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대답이 하나같습니다. “다 필요 없어요.”라는 것이었지요. 만약에 그랬다가 또 집을 나가면 어떻게 하겠냐고,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더니,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도밖에 없죠.” 응석받이로 키우는 것은 지나친 관대함과 방임의 조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습을 원하실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만 해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답을 이야기하면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는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꾸짖으면서 마귀를 내쫓습니다. 악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뒤로 미루면서 계속해서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타협하지 않고 곧바로 실행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실천안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능력을 전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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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의 결과>
어떤 어린이가 길을 가다가 500원짜리 동전을 주웠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돈을 얻었다는 생각에 신이 나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 한 여자아이가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500원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 아이는 이 500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당시에 아이들 세계에서 인기 있었던 컵라면을 하나 사서 먹고도 또 다른 군것질도 할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면서 ‘그래, 내 돈도 아니니까.’ 하면서 500원을 돌려주었습니다. 이 착한 선행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둘은 20년 뒤에 결혼했습니다. 500원을 돌려줌으로 인해 이것이 인연이 되었고 후에 결혼에까지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자그마한 사랑의 실천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무슨 영향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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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유대인들이 인류의 삶에 공헌한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안식일입니다. 우리가 주말을 보내고, 저녁이 있는 삶을 보내는 것은 안식일이 정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루 쉬셨다는 성서의 말씀이 근거가 되었습니다. 저는 안식년을 잘 지냈고, 새로운 마음으로 주어진 소임을 시작하였습니다. 음악에도 쉼표가 있듯이, 그림에도 여백이 있듯이, 완벽한 것도 좋지만 우리의 삶에는 여유가 있으면 더 좋습니다. 하루 중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누군가를 도와주는 시간을 갖는다면,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다면, 생각을 공유하는 책을 읽는다면, 수고한 자신에게 밝은 웃음을 보낸다면 매일 매일이 안식의 시간이 될 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격려하지 않는다면 남도 그렇게 하기 힘들 겁니다.
다른 하나는 ‘죄의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인 악인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본능과 본성에 따라 사는 생명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 뿐입니다. 예술, 문학, 철학, 문명이 자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하와는 선과 악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지닌 하와는 선을 알면서도 악을 택하였습니다. 아담은 선을 알면서도 하와의 말을 따랐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죄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을 상실한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하느님께 돌아올 생각도 없습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인면수심(人面獸心), 극악무도(極惡無道),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죄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악령에 물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악령에 물든 사람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악령에 물든 사람은 어쩌면 자유의지를 지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 안의 거짓된 자아는 나를 악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 저주스러워라, 저주스러워라! 얼마나 숱한 층층대를 밟아 지옥의 밑바닥까지 끌려갔던 것입니까! 그러면서도 진리에 허덕이며 맘 조리고 애태우면서,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거짓된 자아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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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삶의 균형과 조화>
-관상과 활동(섬김)-
이런저런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우리 요셉수도원 로고입니다. 하늘과 불암산의 대조가 너무 선명합니다. 피정 오시는 분들이나 면담고백성사차 들리는 분들에게 우선 수도원 로고 스티커를 붙여 드린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늘과 산이 상징하는 바 기도와 일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분도회의 모토입니다. 분도회의 영성은 목운동의 영성입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보고 사람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바로 목운동의 영성입니다. 직립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휴대폰의 요셉수도원 로고를 볼 때 마다, 하느님을, 기도와 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전화하기전 ‘찬미 예수님!’ 스티커에 입을 맞춘후 통화하시면 축복을 받습니다.”
요지의 설명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관상이 답입니다. 사랑의 기도, 사랑의 관상입니다.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섬김), 영적 삶의 리듬이자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제 수녀님과 면담성사때 드린 조언입니다.
“화내지도 큰소리도 다투지도 마세요. 화내면 무조건 집니다. 후유증이 너무 커서 수습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어떻게 화내지 않을 수 있어요?”
“저는 거의 화내지 않습니다. 지극한 사랑의 인내로 견뎌냅니다. 화내면 내가 먼저 다칩니다. 강론 준비는 물론 미사드리기가 너무 힘듭니다.--- 매일 강론, 미사 때문에 몸조심, 마음조심, 감정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일 하느님 사랑의 미사은총이, 강론은총이 늘 마음을, 감정을, 몸을 다스려줍니다.”
하느님 사랑의 기도와 관상이 화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관상입니다. 관상의 뿌리 있어 활동의 꽃과 열매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두 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관상觀想’이라는 시입니다.
-“전체를 보는 것이다/삶은 흐른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기다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가을의 황홀과 겨울의 적요/빛과 어둠/아름다움과 추함/강함과 약함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사랑하는 것이다.”-1998.11.4
사랑의 관상적 삶에 대한 고백같은 시입니다. 이어 ‘뿌리 없이는 꽃도 없다’라는 시입니다. 뿌리의 관상, 꽃과 열매의 활동입니다. 관상의 자연적 발로가 활동의 꽃이요 열매입니다.
-“뿌리없이는/꽃도 없다
뿌리로 살아야지/세월속에 묻혀/뿌리로 사는거야
꽃사랑으로 피어날 때까지/기다리며/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살이 고달플 때/꽃사랑 추억으로/갈증축이며
하늘 사랑 꽃으로 피어날/그날 그리며/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1999.7.2
관상과 활동(섬김)은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우선적이 것이 하느님 사랑의 관상입니다. 관상은 활동의, 섬김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사랑의 섬김 활동을 통해 검증되고 확인되는 관상의 진정성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대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정말 영성의 대가입니다. 우리 분도회는 각별한 인연으로 오늘 기념미사가 아닌 축일미사를 봉헌합니다. 말그대로 교황님은 관상가이자 활동가입니다. 교황직에 있으면서도 하느님과의 관상을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 수도생활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릅니다.
과연 하늘이 낸 성입니다. 교황 역사상 큰 ‘대大’자가 붙는 교황은 대 레오, 대 그레고리오 둘 뿐입니다. 어찌 다방면에 걸쳐 그렇게 능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의 신비로운 성인 교황입니다.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에 이은 서방 4대 교부중 한분이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의 ‘베네딕도 전기’ 저술을 통해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에 대한 많은 유익한 정보도 얻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 병약한 몸으로 그렇게 많은 업적을 남겼는지 정말 상상이 안됩니다. 교황의 업적은 다음 다섯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1.교회의 영적 쇄신과 사회적 개혁
2.수도생활에 대한 향수와 수도생활 제도의 강화
3.외교활동:랑고바르드족의 침입과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4.게르만 민족의 여러 부족에 대한 포교활동
5.전례개혁
정말 만능의 천재교황입니다. 재능은 물론 진인사대천명의 최선을 다한 노력이 감동입니다. 그 바쁜 와중에, 컴퓨터나 노트북이 없던 시대에, 욥기 주해서 35권, 40편의 복음 강론, 22편의 에제키엘 예언서 강론, 아가 주해서, 21열왕기 주해서, 사목규정서, 대화집4권, 848편의 서간이 수록된 서간집 14권의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관상의 표현들입니다. 얼마나 교황님이 주님과 일치된 관상적 삶을 사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말그대로 관상의 열매들입니다. 하여 교황님은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오늘 입당송이 교황님의 면모를 요약합니다.
“복된 그레고리오는 베드로 좌에 올라,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기리며 살았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우리 모두 섬김의 사랑 실천에 충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깊은 관상체험을 반영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관상의 열매가 섬김의 활동이요, 사랑의 섬김을 통해 입증되는 관상의 진정성입니다. 이런 주님을 그대로 닮은 교황님의 전 삶은 ‘관상과 섬김’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교황님의 불가사의의 업적은 그대로 주님 사랑의 섬김의 깊이를 표현합니다.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종들의 종으로 친히 섬김의 삶을 사셨던 교황이요, 주님과 일치의 관상이 얼마나 깊었던 분인지 깨닫게 됩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을 닮아 관상과 섬김 활동의 대가임을 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어둠속에서 빛이 비추어라.’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뿐입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주님 주신 관상의 보물을 지닌 우리 하나하나는 주님의 ‘살아있는 보석’같은 존재들입니다. 참으로 관상과 섬김으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는 하느님 영광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관상과 섬김의 일치의 삶을 사셨던 성인들은 물론, 이렇게 살고 있는 형제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얼굴’이요 ‘하느님 영광의 빛’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착한 목자 당신을 닮아 관상과 섬김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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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의 권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전합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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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진정 권위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음의 사건이 벌어진 시간적 배경은 안식일이고, 공간적 배경은 회당이지요. 복음서 내용을 이리저리 반복해서 만나온 우리에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은 공생활 초기라 아직 안식일이 논점이 되지는 않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예수님께 올가미가 되어 드리워질 것이니까요.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2)
복음사가는 이 일화에서 "몹시, 모든, 몹시, 대체" 등 다소 과장이 느껴지는 강한 표현을 자주 사용하며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설명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줄곧 설교를 들어왔을 보통의 유다인들이 놀라는 걸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기존 종교지도자들과 많이 다르긴 달랐나 봅니다.
말씀의 권위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권위 있는 말씀은 과연 어떤 말씀일까요?
말씀이 우리 각자에게 다가와 우리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킨 체험들을 돌아보면서 답을 모아 봅시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우리의 구체적 실존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시선에서 나올 때, 미혹으로 뿌옇던 마음에 확신을 주며 안개를 걷어내어 주실 때, 그 말씀이 필요한 부분에 정조준되어 꽃힐 때입니다.
말씀이 이를 전하는 이의 사심이나 사욕으로 얼룩져 있지 않을 때, 자기 과시나 자기 영광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지향할 때,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진실을 전할 때입니다.
선과 사랑에서 출발한 말씀은 비슷한 지향을 품은 채 귀를 기울이는 이와 부딪혀 파열음을 내거나 튕겨나가지 않고, 순하고 부드럽게 흡수됩니다. 각자의 갈망과 필요를 감싸며 고요히 스며들어 듣는 이와 하나가 되지요. 모르긴 해도 그날 회당에서 예수님 말씀의 권위에 탄복했던 이들에게 그분 말씀은 그리 다가갔을 것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
권위 있는 말씀의 반대 예를 찾아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거칠고 소란스럽고 적대적이며 관계 파괴적인 "말"입니까! 두려움과 경계, 과시, 위협, 거부 등 어둠의 요소로 가득찬 "소음들"이 난무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악의 말이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
악에게 정면으로 던지신 이 말씀은 그 자리에서 곧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천지창조 때와, 주님 탄생 예고의 순간이 떠오릅니다. 말씀의 즉각적 실현은 창조와 강생의 순간은 물론 인류를 악에서 해방시키는 순간에도 이처럼 힘을 발휘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아버지로서, 목자로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1테살 5,4),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1테살 5,5)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1테살 5,11)
이미 사도는 마치 고칠 게 없는 모범 답안을 체점하는 듯 느껴질 정도로 그곳 신자들의 신앙과 열성을 인정해 주며 계속 그렇게 하라고 독려합니다. 이 편지를 받아들고 읽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마음에 피어났을 흐뭇하고 뿌듯한 감사와 기쁨이 느껴집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그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 그분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테살 5,11)
이 마지막 말씀이야말로 듣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되는 권고인 동시에,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어떤 지향으로 임해야 그 "말씀"이 진정 주님의 말씀이 되는지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연 격려하는 말, 성장에 도움을 주는 말은 선과 사랑의 주님에게서 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말씀"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아버지 오른편에 올라가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뚝딱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하지만 자기 것을 빼고 진실되게 하느님 뜻을 전하다 보면 형제자매를 격려하고 성장시키는 "말씀"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지막한 공감, 소소한 인정, 소박한 격려가 작은 치유를, 작은 해방을 일으키는 권위 있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아멘.
"하느님의 종들의 종" 성 그레고리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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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우리는 죄인이고 평범하고,뭐가 중요한가! 그분은 이것 때문에 오셨는데요
르네 브아욤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도록 맡겨드립시다! 우리는 죄를 지었고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분께서 이것 때문에 오셨는데요.”
♣그리고 마부브의 필록세스(시리아의 산문 작가, 440-523경)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하느님이 느끼는 불행은 우리가 그분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선물은 주시면서 받아주기를 기대하고, 우리가 받을 때는 고마워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재산을 받을 때 그분은 오히려 우리가 재산을 보내주는 것처럼 느끼신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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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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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관심 갖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귀, 악의 세력을 알아채고
쫓아내는 예수님을 보고
마귀들은 상관하지 말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사람과 사랑은
상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관계하는 인간이기에
관심이 가는것입니다.
관심이 서로의 성장에 도움을 주게 될 때
행복한 미소~^-^ 를 짓게 됩니다.
마귀, 악은 예수님의 관심을 성가시고
귀찮게 여기는것을 보니 캥기는데가 있나 봅니다.
살면서 내가 뭔지 모르게 부자유스럽고 감추려하고 간섭받기 싫다면 어떤 마음이 도사리고 있는지 관심 갖고 살펴봅시다.
"상관하는것을 고맙게 여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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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루카 4, 34)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누군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안다는 것은
사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랑하는 것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예수님의 이름이
더러운 영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이름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참된 만남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삶을
바꾸어 놓는
이름입니다.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아프고 병든
우리들을
정화하여주시고
건강한 삶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어디로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구원을
당신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삶을 정화시키시는
예수님께로
돌아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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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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