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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회와 선교적 관점에서 본 국내 무슬림 공동체
<1> 국내 이주민 선교를 통한 이슬람의 이해와
21세기 선교패러다임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 한 것 같이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 맘몬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와 성도의 바른 신앙관이라는 확신을 해본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 안에서 짧은 선교 역사를 통해 세계 제2위의 선교 파송국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한국 교회는 종교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기독교 세계화와 공격적 무슬림 공동체의 선교에 대항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변증하고 각국에서 온 이주민과 산업 연수생,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 국제결혼에 의해 한국에 이주한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다문화 선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이슬람권 출신 근로자와 유학생, 기업가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국인을 손님으로 맞이하고 그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 정치와 한국 기독교는 행정부와 연대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정작 이슬람 국가는 자국에서 포교하고 있는 타종교의 선교사들은 쫓아내고 종교 자유가 있는 나라들에 근로자와 유학생을 군사적 훈련을 시켜 무슬림 극단주의 포교자들을 파송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슬람은 막대한 오일 달러를 가지고 유럽에서 썼던 섹스 전략, 결혼 전략, 학원 전략을 가지고 한국을 무슬림화하기 위한 공략을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무슬림 선교 사역은 이러한 무슬림 이주 노동자와 유학생을 대상으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이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대망을 품고 무슬림이 복음 안에서 변화되고 예수의 참제자로 변화되기 위한 훈련 시켜 이슬람 국가로 역 파송시키는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사명이며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현재 국내 기독교 단체나 선교국엔 이슬람을 연구한 전문가가 전무한 실정에 처해있다.
다만 중동 국가에 근로자로 파견되었다가 입국한 한국 노동자와 대학의 아랍어과를 졸업한 몇 몇의 이슬람 전문가가 있다고 하나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비 기독교인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프라의 확대에 목말라 있는 한국 교회는 종교와 정치와 삶이 하나로 묶여있는 이슬람 공동체의 확장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신학도와 선교학도, 신진 선교학자들이 국내와 해외에서 이슬람 연구에 헌신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 교회와 예수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해 다행한 일이다.
1. 단일 민족관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의 이슬람 포교 전략
한국의 종교는 역사적으로 단군 신화, 불교, 도교, 유교 등 다종교를 거친 사회로 현재 많은 종교가 창궐하고 있는 종교 자유국이지만 폭력을 조장하는 종교는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 종교는 꾸란을 중심으로 하는 삶 자체가 종교이며 정치이기 때문에 이슬람의 무슬림 공동체 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기 때문에 무슬림 공동체에서 쉽게 벋어 나갈 수가 없다.
소수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911 미국 테러 사태와 같은 극단적 무슬림의 테러가 각국에 성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막강한 오일 달러를 앞세운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기독교에게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21세기의 가장 위협적인 종교 세력이 되고 있다.
이주 노동자, 소수민족의 유학생, 국제결혼으로 인한 다문화 가족, 탈북자를 중심으로 하는 새터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독교 선교 현장에서 단일 민족이라는 우리들의 민족관으로는 다문화에 대처하는 구체적인 선교전략과 정책을 펼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 다양성에 근본적으로 대처하는 효과적인 사역을 뿌리 내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무슬림과 이단 세력들은 구체적인 모략으로 한국 기독교의 비도덕성을 공격하며 세상적인 전략으로 무슬림 공동체를 뿌리 내리고 있는 데 한국 선교 단체나 한국 교회는 제 밥그릇 싸움으로 인해 효과적인 전략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농촌 총각을 위한 국제결혼의 성행으로 인해 다문화하고 있는 한국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한 민족은 유럽이 겪은 민족주의 분쟁과 종교 혼란을 야기 시켜 다문화 세력에 잠식당할 수 있고 무슬림과 큰 종교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갈수 있을 것이다.
단일 민족 중심의 한국 사회는 급격한 종교 다원주의와 거주 이주민에 관심을 가지고 통전적 방법의 선교로 국내에 유입된 다문화 사회에 대처할 수 있는 전략으로 나가는 선교 전략의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도와 연합 속에서 대처해야 할 때이다.
지금처럼 교회와 성도가 자기 이익과 세상적인 욕심으로 하나님을 이용한다면 가장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이슬람공동체의 물질적, 공격적 선교 앞에서 교회와 한국 사회는 혼란으로 몰락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슬람은 그 국민의 2%만 개종 시키면 국민전체를 섹스와 결혼과 오일달러로 무장한 무슬림공동체로 초토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종교이다.
이 같은 다문화 문화를 옮기고 있는 이방인과 무슬림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뼈를 깎는 영적 각성과 변화된 인격과 실천적 삶을 요구하고 있다.
2. 다문화 사회에서의 21세기 선교 패러다임
한국 사회는 싼 노동임금과 국제결혼을 통한 다문화 이주민 유입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다문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는데 이러한 다문화 이주민 문제는 세계적 관심사이자 어떻게 풀수 없는 난제가 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의 국내 이슬람 연구는 911 미국 테러와 극소수의 반미 세력과 연관되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이러한 국제적 혼란에 쌓인 한국기독교는 다문화로 접근하고 있는 소수 민족과 무슬림에 대해 복음의 대상과 기회로 삼자는 정치적 옹호론자와 테러를 조장하여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극단적 이슬람 단체를 배격하자고 주장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와의 대립으로 협력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슬람 국가는 가족, 혈연, 민족 공동체이며 삶 자체가 움마 공동체이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그들이 살아온 문화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선교는 문화적 상황에 따라 해법을 달리하게 된다.
무슬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보다 움마공동체를 형성하고 꾸란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와 종교적 정체성이다.
기독교의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 3:15)와 다른 무슬림 종교를 가지고 이슬람은 한국을 집중 선교 전략 지역으로 정하고 공략하고 있다.
무슬림은 비 무슬림의 존경과 회심을 얻기 위해 공격적인 지하드(성전)가 아니라 다와(포교)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런 전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이슬람권에 나가서 하는 선교는 배타적이고 한계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스스로 찾아온 무슬림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도덕적 완성을 간구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여 이슬람 국가로 역 파송하는 선교전략을 계획하여야 한다.
3. 성경적 이주노동자의 개념
구약은 이주노동자를 나그네(게르)라고 표현하고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들(시 39:12, 119:19, 대상 29:15)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방민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적 삶의 원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과 가나안 족속들 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환란을 이겨낸 것을 교훈 삼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 받은 압제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며 성령의 조명하심 속에서 이겨낸 것으로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밀알로 썩어 복음의 뿌리를 내리고 천국을 대망하는 사역으로 이해하고 초대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고통이 아니라 잠시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왔고 완전한 하나님나라에 거하는 영광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희망이 보인다.
(1) 구약에 나타난 할례 받은 자들인 게르와 이주노동자 노크리
구약엔 이스라엘에 정착할 의향이 없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외국인을 노크리라고 했고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사람으로 동화되기를 원하는 외국인을 게르라고 지칭하고 있다.
나그네(게르)는 법적 권리가 없고 혈연과 지연에 주어지는 혜택이 없지만 이스라엘에 거주하며 안식일(출20:10)은 물론 제사(레17:8)도 드리고 유월절도 지킬 수 있었다. (민15:14)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중 선진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좋은 대접을 받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과 인종 차별 없이 살아가는 반면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제 3국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과 인권 문제 등에 노출되어 물질적, 법률적, 행정적 도움이 필요한 상태의 노크리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국토가 없이 게르로 살아왔고 베드로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벧전 2:11)라고 자신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 또한 경제적인 빈곤을 탈피하고자 월남전에서 목숨을 담보로 달러를 벌어들이고 독일에서 간호사와 탄광 노동자로 일하며 열사의 사막 중동에서 게르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기억을 잊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가지고 이 땅의 이주 노동자들을 섬기려 할 때 다문화라는 고단한 이주 노동자의 삶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할례 받지 못한 또 다른 나그네 토샵
토샵은 가난한 품 꾼(출 12:45, 레 22:10, 25:40), 남종, 여종(레 25:6)으로 유월절에 참여하는 사람에서 제외 되었고 게르에 비해 이스라엘에 덜 동화된 사람들로 경제적인 약자에 속해 있어 게르보다 훨씬 더 취약한 하류 계층이었다.
게르는 경제적인 이유와 전쟁으로 인해 난민이 되었고 애굽에서 포로 생활로 억압 받았던 히브리인들은 모두 주권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억압당한 토샵 나그네였다. 이와 다른 시대의 나라 잃은 바벨론 포로들은 상당한 지위에 있었지만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나그네로 취급당했다.(슥 4:1)
따라서 개인이나 집단, 민족에게 기근이나 전쟁의 발생, 직무로 인한 거주는 나그네로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자기 집 없이 방랑하는 나그네(게르, 토샵)는 기아 속에 허덕이는 제 3국의 가난한 사람과 경제적 이유로 타국에서 노동하는 이주노동자, 난민들, 노숙자들일 것이다.
(3) 신약에 나타난 나그네와 이주 노동자
신약의 나그네는 파로이코스(πάροικος)로 오이코스(οικος)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가족 일원중 집을 떠나 외국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지칭 한다.
특히 사회적 유형의 나그네는 사회적 구조적 모순에서 고통을 받는 자들을 의미 할 수 있으며 이주 노동자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눅 24:38, 행 7:6, 엡 2:19, 벧 2:11)
예수의 생애 대부분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이 이루어졌고 예수께서 사역하신 지역인 갈릴리라는 말 자체가 이방인들과 외국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갈릴리는 인종의 다양성과 문화의 혼합성으로 인해 이방이라는 말로 지칭되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는 천상으로부터 오신 나그네로 일정한 거주지가 없고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는 삶의 방식을 따랐다.
이런 예수의 삶의 특징은 소유를 포기한 삶(마10:9~10)으로 은사적 걸식 생활(눅 10:5~10)을 하지만 걱정이나 염려 없이 살아가는 존재론적 삶(마 6:25, 34)의 기준이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신학도와 교회 성도들의 모범이며 힘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죄악 된 세상을 구원하고자 가족과 떨어져서(막 3:32~39) 다문화와 이단에 젖어 있는 역사 속에서 예언자적이며 마지막까지 고난을 수용하는 삶을 살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공유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오늘날 이주노동자들의 삶과 대조할 때 서럽고 고통스런 나그네 삶이지만 종말에는 천국이라는 영생의 땅에 거할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공동체는 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4)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의 나그네 삶
로마의 시민권이 있는 전형적인 도시에서 성장한 바울(행 21:39, 22:28)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결박하기 위해 올라간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부터 인생의 행로가 변경되어 로마인이라는 안락함을 버리고 나그네의 삶을 살며 순교할 때까지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했다.
죽기까지 복음을 전한 바울의 생애는 예수그리스도의 나그네 정신과 삶을 모델로 하여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따른 사람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이주노동자의 이해에 명확한 확증을 준다.
디아스포라 나그네는 고난과 핍박을 피해 흩어져 살았으며 집 없는 설움과 함께 어느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나그네였다.(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 παρεπίδεμοιςδιασποράς 벧전 1:1)
이렇듯 디아스포라 나그네들이 고난과 핍박 속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나그네 삶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나그네는 기근, 경제적 이유, 정치적 이유로 집 없이 유랑하고 있고 인권의 말살과 종교의 자유 박탈, 경제적 약자, 노동력 착취 등의 인권의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
나그네와 다문화 사회 속의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성경적 토대 위에서 정립한다면 다문화 사회를 이해하고 그들을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손님이라 여겨 대접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질 동역자로 훈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다문화 사회의 이해 ?
1. 다문화 사회와 이주노동자 문제
다문화 사회라는 용어는 세대와 성별과 외국 문화 수용 정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니지만 다문화 사회는 법제도와 상관없이 현실 생활에서의 다문화주의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다문화 현상은 산업 사회가 후기 산업 사회로 전환되고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는 가운데 자본주의가 득세하여 문화적 정체성들이 무너지며 파생된 사회 현상이다.
이런 다문화 현상은 기존에 존재하던 다양한 문화적 실체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며 자신들의 모습과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문화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소수 집단의 문화와 정체성이 다양화되며 발생 된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다문화 주의는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현실을 개선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다문화에 노출된 한국 사회는 단일 민족에서 비롯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여러 형태로 유입되어 우리 사회에 동화되거나 거주하고 있는 나그네와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사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우리민족에 동화되고 있는 피부와 문화가 다른 나그네의 설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이주노동자와 이주민
이주노동자는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획득해서 영구히 거주하는 이민과는 다르게 일시적인 취업, 산업 연수를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다.
국제 이주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국가 간의 고용과 소득 기회의 차이에서 기인하는데 이주노동자의 대부분은 보다 나은 소득이나 취업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있다.
이들 이주노동자들은 다양한 종교 문화권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직장 내외에서 서로 다른 성향과 문화 차이로 인해 이주노동자들끼리도 자기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대부분은 체류 기간을 최대한 장기화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국제결혼, 불법체류 등으로 인한 한국 사회는 급속히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전환되어가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국내 이주노동자들은 각 나라와 인종에 따른 문화, 또는 종교의 다양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 사가 다문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순혈 주의와 단일 민족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주 노동자와 국제결혼자들과 그들의 혼혈자녀들을 대하는 시각이 배타적이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권과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 간접 자본의 투입과 자녀들 문제가 사회적 관심으로 새롭게 대두되고 있으며 편견과 차별 의식, 정체성 고민, 제 3국의 어머니에 대한 부정, 무시 등의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혼혈 문제는 6.25 전쟁과 이로 인한 미국의 주둔과는 또 다른 혼혈문제를 낳고 있다.
백인 계열을 선호하는 사상은 얼굴색과 소수 민족,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지의 저소득 국가에서 유입된 이주노동자나 국제결혼으로 한국에서 뿌리 내린 혼혈이나 가족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배타적으로 대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대중문화의 획일화, 문화와 정체성의 다양성에 대한 포괄적 이해 부족으로 다문화 가정의 해체와 배제, 사회적 불평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민족, 문화, 종교, 언어가 다르고 한국에 오게 된 사연도 다른 것 같이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의 삶도 다르다는 것이 인식되어 지고 있고 또 다른 세대 분리를 초래하는 가정의 해체는 또 다른 사회 문제를 가져오고 있다.
3. 인권 문제
한국의 이주자들과 노동자들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이주한 주체이며 정체성의 근거가 되는 문화를 보유한 사람들이다.
이런 다양성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동은 인격의 기초가 되는 문화를 다른 국가에 파급하고 다양한 문화를 소유한 사람의 이동은 인격의 이동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의 인권의 보장은 이주자 문화의 보장이기고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주 노동자와 그 가족의 기본적 인권 보호를 위한 특별한 노력과 협약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민족과 이주민들의 인권 문제 해결은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다국적 사회에 진입한 한국 사회의 건강을 위한 노력이라 생각된다.
이주노동자와 한국사회의 건강을 위한 인권문제의 합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조건에서 모든 사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합당하고 보편적인 원칙들이 존재한다는 전재 속에서 이러한 원칙들이 우리들의 공통된 인간성 속에 존재한다는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들은 각각의 사법권 하에서 인권을 규정하고 보호할 수 있는 부가적인 법률과 절차를 거쳐 기본적 인권 기준을 국내법 안에서 수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실제로 이주 노동자의 권리 촉진을 둘러싼 협력과 연대의 구축을 위한 활동은 아시아와 유럽 국가들에서 수많은 이주 노동자 조직들을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 요소로 작용했는데 이주 노동자의 권리 캠페인이 이주자들에게 직접적인 관심과 자기 방어의 공통 관심사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인권과 시민권, 노동조합과 노동 기준의 보호에 관심 있는 각국의 많은 단체들이 연대하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 법령상 현재의 이주 노동자에 대한 사회 보장의 수준은 상호주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고 사회 보험 중 산업재해 보험을 제외한 다른 사회 보험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위험에 처해있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사실상 별다른 보장을 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입법부의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지만 행정부도 현재의 입법 하에서 적극적인 해석과 법집행을 할 수 없고 재정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의 문제는 한 국가의 문제를 넘어 국가 간의 문제이며 동시에 구조적인 문제이자 개인적 욕망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이자 인종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단순히 법과 제도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지만 동시에 그를 뛰어 넘는 보편적 인도주의를 실현하는 범국가적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일은 보편적인 문제 자체를 과장한다든지 지시적인 자세로 조급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방식과 과정 자체를 조금씩 합리적이며 효과적인 것으로 개선시켜 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데 이주 노동 문제와 그 해법과 관련하여 동질성의 신화, 즉 민족 우월주의, 엘리트주의 혹은 전문가주의를 극복하는 일이 먼저 선행되어져야 한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식의 확장은 그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정착(이민)이 불가피하고 국가가 원하는 값싼 임금의 노동자를 유입하여 이용하며 그들의 인권과 노동권, 사회보장권에 대해 소홀하다면 더 이상 저임금의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기업과 사회에서 노동자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속에서 시민으로 사는 삶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해 나가는 것을 필요로 하며 다양한 통로를 통해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이주민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인식과 영역의 확대가 필요하다.
이런 인식의 확대는 이주 정책의 수준을 인도적인 차원을 넘어 인권과 권리를 인정하는 소극적인 수준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 받는 차별을 반대하고 사회적 갈등의 폭을 줄이고 통합성을 높여 나가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모색과 다양한 지원을 행정부와 정부, 입법부가 협력하는 정책 속에서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부 또한 빈부격차 및 차별적 순혈 주의를 대신하여 다문화 관점을 확산 시키고 결혼 이민자에 대한 한국어 교육과 사회 규범, 요리 등 사회적 지원을 마련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될 것이다.
4. 사회 통합의 원칙과 합의점
통일교가 다국적 여성들과 합동결혼식을 통해 실패한 국제결혼의 선례를 인지하고 교주의 사망으로 또 다른 국제적 고아를 양산 시킨 사회 문제를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사랑으로 섬기고 교제한다면 선교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특히 한국에서 출산한 자녀를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해 본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이산가족의 슬픔과 한국에 입국해 수년 동안 본국의 가족을 보지 못하고 향수병에 시달리는 이주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정기적인 가족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도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국가의 책임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행동으로 바뀔 수 있는 제도와 지원이 절실히 요구되어지고 있다.
이럴 때 사회 통합은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한 사회 내에 제한 없이 평등한 공동체로 진입시키는 과정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사회적 통합은 사회 제도와 이해관계에서의 균열을 최소화하고 동질감을 갖게 하고 합리적인 합의 절차와 결과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해야 된다.
동화와 다른 사회 통합은 상호 관계, 언어적 소통의 가능성, 문화적 공유의 가능성 그리고 사회적 연대감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공통의 문제로 이주자의 사회 문화 통합뿐만 아니라 이주국 국민들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이다.
사회 통합은 이주 정책의 목표로서 다양한 집단의 이질성으로 인해 이해관계의 충돌로 초래될 정치, 사회적 혼란과 문화적 균열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이주자들의 문화와의 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소외되지 않고 공평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평등한 기회의 제공과 노동, 주택 정책, 교육에 있어 동등한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구성원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시민권, 정치권, 사회권, 문화권을 누릴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된다.
사회 통합 정책에서 또 다른 이슈는 한국 사회에 통합되지 못하고 주변화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내국인과 이주자 사이의 괴리를 줄여나가고 한국 사회로의 통합을 촉진 시킬 수 있는 기반 조성 방안을 모색해야 된다.
5. 다문화 사회와 이주 노동자
이처럼 나그네의 삶과 이주노동자의 삶이 연결된 다문화는 한 나라 안에 몇 가지의 문화가 공존하며 하나의 문화 속에 다른 문화가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문화 또는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다원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고 실존적으로는 한 민족 국가 안에 서로 다른 문화 종교 공동체가 공존하고 있는 현실 상황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 역시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구원의 계획에 포함시킨다는 언약이다. (창 15:13)
히브리 백성들과 이방인 모두 차별 없이 동일하게 유월절 규례를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출 12:49)
또한 이방인들을 학대하거나 압제하지 말 것을 성경은 권면하고 있다. (출 22:21)
예수는 유대인 보다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셨고 유대 땅 뿐만 아니라 이방인 마을 갈릴리, 사마리아에서 주로 거하시며 유대인들이 개로 여기는 이방인들과 허물없이 식사하시고 대화하며 믿음의 기적을 베풀기도 하셨다.
특히 부활 승천 후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 명령하셨다.
6. 다문화 속에서의 이슬람을 향한 선교 전략
예수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이루고자 한국 기독교는 이주민 당사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내적 특징을 조사하고 통계를 내어 다문화 현상 속의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여 국내 이슬람 선교 방향을 제시하고 선교 전략의 지침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주노동자는 외국인 노동자를 지칭하는 말로 일정 기간 다른 나라에 가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으로 국내에서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노동의 대가인 임금, 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을 목적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산업 연수생은 기업체에서 산업상의 기술, 기능을 연수받는 자로 국내 제조업체에서 단순노동을 하기 위해 산업기술연수라는 입국 수단을 통해 합법체류자로 근로를 제공해야 되지만 편법이나 위장 이주노동자의 증가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불법 취업자는 체류 기간을 초과하거나 체류 자격이 없이 들어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또는 불법 체류자라는 신종어를 파생 시키고 있다.
<3> 국내 이주민 공동체와 무슬림 공동체
1. 이주민 공동체
한국내의 많은 이주민 공동체 중 필리핀 공동체는 국교인 카톨릭을 기반으로 해당 지역의 카톨릭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언어가 통하는 필리핀의 사제가 구심적 역할을 하는 미사와 같은 종교 활동을 통해 한국 카톨릭 교구로부터 물질적, 제도적 도움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신앙 중심적 공동체는 전국 주요 대도시의 성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카톨릭 성당 중심의 필리핀 공동체와 다르게 무슬림 이주 노동자들은 움마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특수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 사회 여러 분야에서 지각 변동을 가져올 이슬람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사회, 종교적 문제를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 내부의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특성에 대한 실체 파악과 심층적인 이해를 시도하기 위해 한국내의 움마의 이해를 정확히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2. 움마의 정의
움마는 이슬람교의 신앙 공동체, 이슬람 공동체로 전적으로 무함마드의 움마 이슬람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슬람 움마 공동체는 하루 다섯 번의 예배가 의무화 되어 있고 알라의 가르침인 꾸란을 올바르게 보전, 유지 실천하는 범위 안에서 알라가 축복한다는 믿음으로 공동체를 사회적, 정치적, 국가적으로 이루어가고 있다.
이슬람의 신앙을 갖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움마는 동시에 생활 공동체이며 정치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갖게 된다.
즉 움마는 인간의 결합체일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규범도 함께 가지고 공존하는 생활 공동체이기 때문에 항상 국가 중심으로 민족 국가 형태를 형성하고 있다.
이슬람 부흥 운동의 목표는 이상적 사회질서인 움마 공통체 안에서 알라의 신성한 가르침에 의한 통치가 이뤄지는 종교 공동체를 재건 및 보존 실현하는 것과 이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내세우는 교의인 따휘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따휘드 원칙은 만물을 현세와 내세, 물질과 정신, 형이하학과 형이상학, 실체와 의미 등으로 분리되지 않는 단일체로서의 우주로 이해하고 세속적 사회 경제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인식하게 하는 원칙이다.
이슬람은 삶 전체를 관장하는 복합 조직체이기 때문에 모든 가치관이 공동체 우선주의로 형성되어 있다.
이슬람 움마 공동체는 이슬람 사회를 하나로 묶는 요소이고 무슬림들의 언어와 문화와 지리적 장소를 대신하고 있다.
3. 움마에 드러나는 특징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로 인해 창세기 11장 이후 단일 민족, 즉 단일한 혈통으로 구성된 민족은 없어지고 사회적 소수집단, 소수 인종 집단, 소수 민족 집단으로 구분되어 지고 있다.
소수 인종 집단은 대부분 자국의 경제적인 빈곤, 전쟁, 종교의 탄압으로 인해 타국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이민자 집단으로 사회적, 경제적 인정을 원하지만 자신들이 문화와 삶으로 정착시킨 정치적 종교적 분리를 원하지 않는 집단이다.
소수 민족 집단은 역사 속에서 다수 민족에게 정복당한 집단으로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과 권리를 요구하는 집단으로 보통 종교적, 인종적으로 모여 있으면서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정체성 요구에 대하여 해당 국가와 단체들은 일반적으로 초기 동화주의를 포기하고 다양한 정책적 배려를 통해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된다.
동화주의 강요에서 벗어나 관용을 인정하는 정책과 이주민들에 대한 각종 법 제정과 제도화를 통해 차별화를 줄이고 동등성과 평등성을 인정하는 단계를 거쳐 정책적으로 다문화 사회를 지원하여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과 권리를 인정한다면 소수의 집단은 이기적인 모습을 버리고 한국사회와 협력하는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교회는 보다 신중한 다문화 사회를 대비하고 이에 따른 정책 연구와 개발을 통해 사역의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할 것이다.
특히 선교적 관점에서 타종교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문화 사회의 안정적 운영과 다수 지배 집단의 관용을 판단하는 민감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그 집단의 규모에 관계없이 해당 지역의 관습과 관행에서부터 제도화된 정치와 윤리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모든 문화적 사회적 행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다문화 교육과 정책, 배려와 관심이 필요 하며 국내 무슬림 공동체는 한국 교회 앞에 당당히 다문화 사회, 다문화 주의라는 다양한 색깔로 침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과 선교 신학적 조명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윤리적 특징과 종교적, 문화적 특징을 비롯해 정치적 특징 등을 이해하고 다문화 교육과 정책에 배려와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1) 윤리적 종교적 특징
알라는 윤리적으로 인간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윤리적으로 바르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이슬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윤리는 이슬람의 핵심적인 부분이며 꾸란에서 알라는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을 하고있는 데 자비와 징계로 나타내고 있다.
한쪽얼굴의 알라는 그 자신을 한없이 선하게 베풀어 주시는 신이며 끝이 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신이다.
알라의 자비의 베풂에 대해 인간은 감사(슈크르) 해야 한다.
슈크르의 반대는 쿠프로인데 배은망덕 혹은 감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감사할 줄 모르고 알라 앞에서 겸손하지 않는 사람은 무정하고 무심한 사람이라 여기고 심판의 날에 용서 없는 무자비한 재판관, 지독한 보복과 처벌 그리고 복수의 알라를 만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움마 공동체를 떠나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피의 보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무슬림들이 절대적으로 착실해야 하는 것은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의 윤리적 가르침은 정치적으로 해석되어 음주, 음란, 성의 문란, 매춘, 은행의 이자, 자본가들의 부당 이윤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인식하고 있다.
이슬람은 공동체 그 자체가 곧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 이슬람만의 독특한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슬람의 용어와 기독교의 용어를 차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무슬림들 혹은 국내 이주 노동자로 입국한 무슬림에 대한 교회의 접근법은 해외 무슬림들에게 접근하는 방법과 달라질 수밖에 없고 한국 내 무슬림 선교와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에게 사용하는 상황화 접근의 해법도 달라야 한다.
사실상 대부분 무슬림들의 일상생활은 주로 가정과 이웃, 식사와 휴식, 일과 상업 활동인데 그것은 남자들, 여자들, 어린 아이들, 대 가족들, 공동체 지도자들의 통상적인 활동들이 포함된다.
무슬림 가정들의 특정한 민족성, 관습, 가치관, 언어는 이슬람 가르침과 혼합되어 지역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사랑, 충성, 존중, 진리, 영성 기본적 가치관에 대한 인식은 가정을 출발한 집단 안에서 형성되고 대부분 무슬림 문화에서 언어와 가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명예와 수치다.
집단은 자아의 정체성을 깊이 결정해 주기 때문에 집단을 떠나서는 자신의 특성을 강하게 느낄 수 없다.
무슬림 공동체들이 집단을 떠나 현대의 영향을 받아 전통이 붕괴되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공동체를 벗어난 무슬림은 심각한 상실감을 느끼게 될 수 있다.
명예와 수치와 관련되어 이슬람 여성의 베일 착용을 예로 들수 있는데 다양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문화 현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베일은 정체성의 상징이며 의사소통의 한 도구로서 자기의 종교, 신분, 계급, 민족 또는 종족을 나타내는 복잡한 현상을 나타낸다.
그래서 베일은 사회와 문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로 무슬림 공동 사회의 관습, 습관, 사회적 지위, 집안 전통, 각종 계층 등에 따라 다르다.
베일은 어느 지역 안에서 식민지 세력에 반대하는 국가적 운동과 외국 정치를 반대하는 저항의 상징이며 종교적 상징으로 무슬림 여성들은 얼굴을 드러낸 천한 계층의 여성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신들이 높은 신분 및 권위가 있는 여성임을 나타내려는 수단으로 베일을 착용한다.
또한 베일은 대량 생산 할 수 있어 낮은 가격을 가능케 함으로 중, 하류층 사람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는 동시에 유행에 민감할 필요성을 없애고 여성이 베일을 사용하지 않으면 외출할 수 없기 때문에 성적인 유혹을 피하고 순결한 자로 정숙하게 보이는 수단으로 베일을 착용한다.
여성 차별과 함께 경제적 빈곤은 무슬림 사회에 만연한 사회 문제로 빈곤과 여성의 인권이 무시되는 다양한 사회적 특징은 현지에서 사역하려는 선교사에게는 풀어야 할 난제들이다.
사회와 정치는 구별할 수 없는 삶 자체이다.
이슬람의 국제 관계론은 7~9세기 이슬람이 번창하던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슬람 국가는 모든 인류에게 전달해야 할 계시를 믿는 신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보편적 공동체이다.
이슬람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간의 관계는 법률적 차원의 문제이나 이슬람의 입장이 반드시 다른 공동체와의 합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고 민족간, 국가간 또는 공동체간의 합의에는 보통 이것을 추진하는 주도 세력이 정치 지도자와 일치하게 되어 국가의 이익과 종교와의 관계에서 명예와 관련되면 곧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호전적 문화는 일반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전통적 종교를 이해 할 때 민족주의의 발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슬람에게 움마는 곧 국가이자 종교 공동체라는 결론이다.
정치와 종교가 구별되지 않고 오직 정치 지도자만이 존재하는 이슬람에서 지하드는 곧 전쟁을 의미한다.
움마의 발전은 모든 정치 지도자들의 사명이므로 군사력이 강해지면 지하드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지구상에서 악을 제거하라는 알라의 뜻을 구현하고자 전쟁을 불사하기도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그 본질에서 다른 종교이며 기독교 공동체는 섬기는 희생의 공동체이지만 이슬람은 정치적인 국가를 세상에 건국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고 있다.
(2) 무슬림의 여성관
오늘날에도 이슬람 문화권에서 구약 시대와 비슷한 문화를 그대로 볼 수 있고 이슬람권 나라의 여성관 안에는 유목민적인 전통적 여성관과 무함마드의 여성관과 꾸란의 여성관, 주변 문화의 여성관이 병존하고 있다.
영의 세계를 믿고 있는 무슬림의 여성관과 세계관은 정통 이슬람의 세계관과 민속 이슬람의 세계관으로 이해되며 정통 이슬람은 결정론이나 숙명론으로 알라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민속 이슬람의 세계관은 다양한 존재들과 영들로 가득 차 있어 일반 무슬림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무슬림 여성들의 세계관은 민속 이슬람의 축복 개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무슬림 여성들은 결혼, 출산, 불임, 질병,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등 일상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사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슬람 정통교리가 아닌 무슬림 무당을 찾아가거나 다양한 해결 방법들을 요구한다.
이슬람이 정치와 결탁되어 세속화된 남성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무슬림 여성들은 무력감으로 인해 민간 신앙에 의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세속 정부와 종교는 무슬림 여성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어렵고 미국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쟁을 서구 기독교에 의한 이슬람 세계의 탄압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무슬림 여성의 세계관은 서구 세계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어 지하드의 테러 의식을 부추키는 무슬림 여성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해이다.
(3) 무슬림과 움마의 관계
움마는 알라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스마엘의 장자권과 민족주의를 따르는 이슬람은 세계에서 타민족과 문화에 배타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는 고대의 다양한 철학 및 과학들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언어와 가치관에 따라 이해하고 소화하려는 광범위한 노력을 한 결과, 수많은 분량의 전집 글이 아랍어로 변역되어 자기 세계관의 지식으로 받아드렸고 이슬람 관점에 벗어나면 거부하며 이슬람 과학으로 발전 시켜 나갔다.
(4) 한국의 무슬림 공동체의 시작
한국 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터키군 소속 압둘가푸르 카라 이스마일오울루와 주베이르 코치라는 두 무슬림에 의해 1955년 9월 15일 서울에서 70여명이 모여 결성식을 가졌다.
이슬람교는 공동체의 형성 없이는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움마의 형성은 무슬림 종교에서 절대적이다.
2007년 조사에서 한국 무슬림의 숫자가 4 만명에 이른다고 발표되었다.
1980년대 3D 업종에 종사하기 위해 3세계 이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이주의 경로는 2000년대에 들어서 농촌 총각과의 결혼을 위한 이주 여성, 유학생, 사업을 위한 이주 등 유입 경로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다문화 현상은 무슬림 집단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수적 팽창 이외에도 최근 들어 유입 배경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특징이 발견되는 데 유학생과 결혼 이주가정의 증가는 결혼을 통한 종교적, 문화적 요소의 전승과 재생산이 급속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4. 국내 무슬림 선교 과제
한국은 현재 어느 때보다 복합 종교 현상과 종교간 교차 문화의 상황에 놓여있는 다원주의 사회에 처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의 기본적 입장을 직시하면서 한국 교회의 선교 과제에 대한 선교 신학적 접근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할 때이다.
서구가 개인주의라면 이슬람은 공동체 우선주의이다.
이런 국소주의의 이슬람에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전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이슬람의 사회, 정치, 문화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이슬람은 현존하는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선교 신학적 측면에서 이슬람을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종교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을 동시에 파악해야 하고 이슬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국내 무슬림 선교에 있어서 급선무 과제라는 인식을 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자료와 정보 수집,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고 교회 안에 이슬람 분과 위원회를 설치해 성도들에게 정기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해야 한국 교회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 교회, 신천지 등의 이단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이슬람까지 한국 교회에 침투한다면 향후 한국 교회의 부흥은 단절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껴야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 이주민 선교 사역을 지원하기 위한 선교 인력을 개발하고 검토하고 해외 선교의 경험이 있는 선교사들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타문화권 선교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국 상황에 맞게 사역할 수 있는 사역자로 재교육시켜 이주민 사역에 투입 시킨다면 효과적인 이주민 선교의 일익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시대 상황에 따라 산업 선교, 도시 선교, 농촌 선교 등으로 변화되어 온 것처럼 한국 사회가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급격히 변화되고 있는 지금 한국 세계 선교 또한 시대에 맞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국내 선교 사역이 해외 선교 사역보다 과소평가 되어 국내 이주민 사역자에 대한 배려와 격려가 비교적 미약했다.
이에 국내 이주민 선교부를 설치하고 이주민 선교사들이 필요로 하는 자료나 서적, 뉴스 등을 발행하여 간접적으로 사역의 활성화를 위해 물심양면 도움을 주는 문서 선교를 지향하고 중요한 선교 정책 등 의사 결정 과정에서 국내 이주민 선교사를 해외 선교사와 동등한 자격으로 포함 시켜야 한다.
이슬람 선교의 전략에서 아직도 한국 교회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사회 안정과 평화를 위해 문제가 될 수 있는 노동자나 외국인의 유입에 적절한 통제나 제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보수의 입장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무슬림의 한국 입국을 선교의 기회로 삼자는 진보의 주장이 대립하는 양극화는 한국민과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이슬람을 바로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이슬람의 역 포교 전략에 이용되고 있다.
5. 국내 무슬림 선교 전략
선교 환경의 변화는 선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권에 나가는 선교는 한계에 처해 있다.
노출 선교에서 비노출 선교로 전환되어야 하고 봉사가 더 요구되는 NGO 선교를 이용한 통전적 비거주 문서 선교의 수요가 증가 되고 있는 시대이다.
자기 발로 경제적 이유와 결혼 등으로 찾아온 무슬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여 이슬람 국가로 역 파송하는 선교 전략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제자 삼으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위 명령에 따르는 순종의 길이다.
국내에 이주 노동자로 오는 무슬림들은 입국 전 군사 훈련을 방불케 하는 교육을 받고 들어오기 때문에 꾸란에 대한 지식은 상당하다.
이슬람의 이해에서 언급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국내 무슬림 공동체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도록 국내 무슬림에 대한 변증학적 선교 이론을 개발해야 한다.
변증적 선교는 이슬람권을 향해 지리적 경계를 넘어선 전통적인 선교를 위해 우선되어 국내 무슬림들에게 적용 시켜야 한다.
(1) 변증학적 선교
공개적으로 이슬람을 공격하기 보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고 기독교의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는 변증적 태도로 접근해야 된다.
이슬람은 한국을 이슬람화 시키려는 모략을 꾸미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이슬람이 요구하는 도덕적 무장을 하고 기독교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강조해야 된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각성하고 문화란 이름으로 대학이나 결혼 전략, 섹스 전략, 오일 펀드 등을 통해 포교하고 있는 국내 이슬람의 “다와” 전략을 연구하고 이슬람 교육을 담당할 이슬람 분과 위원회를 조속히 설치할 것을 간구한다.
무슬림과 이웃으로 하나가되어 열린 마음으로 공동체를 이해하고 예배를 위한 접촉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그들을 염려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진실되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면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안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기독교의 실천적 사랑을 가슴에 담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씨앗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2) 사회적 배려
노동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적 배려는 그들에게 시급한 과제이다.
사역자들은 이런 사회적 배려를 위해 물량 공세적 경쟁을 피해야 선교의 열매를 아름답게 열수 있다.
경쟁보다는 협력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 경쟁하고 있는 선교단체의 난립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훈련으로 무장된 무슬림 이주 노동자의 진입에 대응 하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3) 통전적 선교
문화가 끊임없이 변화하듯 국내 무슬림 문화도 변화되고 있다.
한국에 유입된 무슬림 이주 노동자들의 생활 패턴과 문화는 급변하여 이제는 나그네가 아니라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전도와 봉사를 포함한 총체적인 통전적 선교를 할 때이다.
도덕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무슬림에게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하고 있는 생활 방식을 따라 사역자와 성도들은 도덕적이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무장하여 그들의 삶이 녹아있는 가정을 방문하여 사회 정의 문제, 인권 문제, 법률 문제, 노동의 현실, 다문화 가정 문제, 체류 문제 등 그들이 현실에서 필요한 것들을 들어주고 해결하는 실천적 전도를 계획한다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종교, 무슬림을 믿는 사람들은 나그네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손님이다.
이들을 잘 접대하고 초청을 위한 프로그램을 활성화 한다면 통전적 선교의 성공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우리와 다른 문화와 정치, 종교를 가진 이방인이 아닌 이미 우리나라에 속해 있는 우리 식구일 수 있다.
이슬람교는 하나님의 언약도, 성취도, 하나님과의 화목(롬 5:10~11)도 없고 사랑도 은혜도, 칭의도 없다.
자기 공로와 자기 속죄에 의한 알라의 은총이나 행위 구원론에 빠져 사랑에 근거한 구원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신앙과 삶을 구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에 새로운 도전과 관심을 가지고 제자 훈련으로 철저한 준비와 노력을 한다면 기독교가 더 이상 사랑도 없고 이웃 사랑도 없는 자기중심적 종교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요구에 순종할 때 여러 방식으로 이 땅에 들어와 무슬림 공동체를 형성한 타문화, 타종교의 나그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설파할 수 있고 그들을 제자 삼아 이슬람 국가에 역파송 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 무슬림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뼈를 깎는 영적 각성과 변화된 인격으로 그리스도의 실천적 삶을 요구하고 있다.
국내 무슬림과 이슬람은 분명 우리와 다른 사고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과 하나로 연합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천국복음 안에서는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
이것이 종교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한국 교회가 이어 받아 유럽에서 무슬림으로 초토화된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에 순종할 수 있는 한국 기독교로 거듭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