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행위와 선ㆍ악의 변증법
♣ 선택을 고민하게 하는 순간들
요즘 영상을 통해서 시사와 관련하여 여러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특히 작은 숫자 이지만 자발적으로 광화문 앞으로 모여든 <촛불을 든 시민들>과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눈에 띈다.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여야, 좌우의 진영논리를 떠나 그리고 모든 정치 공학적인 해석을 떠나 순수하게 철학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을 고찰해 보았다. 우선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사회로서 현 시국에 대한 각자의 자유로운 견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누구를 두둔하거나 지지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이러한 사건들을 목도하면서 나름의 철학적 지혜를 떠올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광화문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한 30대 직장 여성의 말에 공감이 갔다. 그녀는 “당시까지 자신의 인생관은 나서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고 평온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광화문 앞에 나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도 매우 망설여졌다고 고백했다. 그러다 결국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서, 자신과 동생들의 미래를 생각하니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국선언에 동참한 한 교수는 한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때까지 한 번도 정치적인 사건에 관련된 적이 없었고, 여야 어떤 편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교수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자부심은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지금의 상황을 그냥 모른 척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이러한 자부심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며, 또한 이때까지의 자부심이 위선적인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시국선언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직장여성과 대학교수의 견해가 옳은 것인지 그런 것인지, 혹은 그들의 선택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진정 도움을 주는 것인지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인지 하는 것에 관한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고 싶지는 않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글은 순수하게 철학적인 통찰을 벗어나 정치적인 주제나 견해로 흐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두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식의 본질에 대해서 이해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의 행동에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망설임이 있었고 결국 결단을 통해서 어떤 것을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 이라는 말이 있듯이, “가급적 문제없이 평온하게 자신의 일상을 영위하면서 작은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자”하는 것은 아마도 대다수의 국민들, 평범한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마음일 것이다. 나 역시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최선을 다하면서 크게 자랑스러운 일도, 크게 부끄러운 일도 없이 평범하게 조용하게 살 수 있다면,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이웃에게 작으나마 도움을 주면서 그렇게 평생을 살고 싶은 것이 소망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가끔 이러한 우리들의 소박한 소망을 보호해 주거나 허락하기에는 너무나 부조리하다. 사회가 있는 곳에 필연적으로 사회악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싫든 좋든 사람들은 어느 순간 윤리 도덕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선택’을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 진정한 죄의식은 상당한 정신적인 성숙을 요구한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다는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싶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평범한 삶, 평온한 삶, 아무 문제가 없는 삶에 일종의 파문을 유발하는 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려움이나 고뇌를 야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선택의 순간을 회피하고자 한다. 즉 세상의 일이나 사회적인 일들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내 코가 석자인데...”라고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일들에 골몰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피가 결과적으로 자신과 자기사회에 어떠한 화를 미칠지 아닐지 그러한 것을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일들이 종교적인 삶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통찰하고 있다.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인간의 생활은 변증법적인 것과 무관하게 영위되고 있어서 선(신앙)으로부터는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고, 너무나 무-정신적인 것이어서 죄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이다. 보잘 것 없는 일에만 열중하며 어리석은 사람들을 흉내 내기에 열중하고 있는 거의 생활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생활, 너무나 정신을 상실하고 있어서 죄라고 말할 수도 없고, 성서에서 말하는 “입에서 토해 낼”만한 가치 밖에 없는 그런 생활, 이런 생활의 어디에서 본질적인 의미로서의 죄의식, 기독교가 바라고 있는 이러한 죄의식을 발견할 수가 있겠는가?”
『죽음에 이르는 병』 중에서
즉 키르케고르는 무엇이 진리인지를 분명하게 인지한 사람에게만 ―왜냐하면 죄란 진리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기에― 진정으로 종교적인 의미의 ‘죄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종교적인 지평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의식한다는 것은 상당한 지성적인 성숙을 요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죄란 ‘진리(선)에 대해 반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만일 진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면 사실상 진리에 대한 반항이라는 말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상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정의인지 불의인지 혹은 무엇이 선인지 악한지 알 수가 없다면, 정의와 선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 진리에 대한 앎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진리에 대한 앎은 어떻게 획득할 수가 있는가? 철학이나 신학을 하면 알 수 있는가? 종교적 삶을 영위하면서 알 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실존주의’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것은 가장 평범한 일상의 삶 중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일과 마주하면서, 특히 윤리 도덕적인 측면의 ‘선과 악’에 대한 선택의 행위를 통해서 알게 된다고 한다. 아니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면서 습득되는 것이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실존적으로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선과 악의 변증법”이 있는 것이다. 평범한 신앙인들이 진리에 대해서 강하게 체감하고 죄의식을 강하게 체감하는 경우는 퍽 드물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시민들이 정의와 불의, 공정함과 부당함을 강하게 체감하는 경우는 퍽 드물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이 자신의 실존을 뒤 흔들 만큼 체험하고 있는 경우는 퍽 드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기회가 자신에게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별 문제 없이 그냥 평범하게 소시민적인 행복”에 대한 희망이 자신으로 하여금 윤리도덕적인 고민을 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현실도피로서는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모른체 한다는 것이 더 이상 자신의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로도. 가령 예언자 예레미아가 고뇌한 것처럼 '신의 사명'에 의해서 혹은 어떤 영웅적인 사명감에 의해서 더 이상 선과 악, 올바름과 그름에 대해서 무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인간은 자신의 모든 존재의 능력을 발휘하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인 ‘진리인지 거짓인지’ 무엇이 ‘국가를 살리는 길이인지, 죽이는 길인지’ 무엇이 ‘의로운 삶인지’ ‘불의한 삶인지’ 나아가 무엇이 ‘죄를 짓는 것인지 아닌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최근 들어서 정치적인 일이나 역사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 증거이다. 아무리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이라도 정신을 가지고 있는 한 이러한 자신의 노력에서 답을 찾을 수가 있다. 그것이 정신을 가진 인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고뇌하는 예레미아>
♣ 평범한 사람을 도덕적인 사람으로 변모시키는 진정한 선택
무엇을 선택하는 가는 자신의 몫이며, 누구도 이러한 숙고의 과정을 거친 한 개인의 선택에 대해서 칭찬이나 찬사를 하거나 혹은 비판이나 비난을 할 수가 없다. 한 인간이란 그야말로 ‘소우주’여서 누구도 그의 의식의 복잡한, 처한 상황의 오묘함을 모두 통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의 선택에 공감을 하거나 공감을 하지 않거나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그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철저하게 숙고를 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통해서 ‘선택을 감행하였다’는 것에는 박수를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숙과와 고민, 이러한 자유의지를 통한 선택의 감행이 전혀 없이, ‘선택’을 한다는 것은 사실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무-정신적인 것에는 어떤 경우에도 선택이라는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선택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자’가 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사실 “이순신장군처럼 나라를 구한 위대한 사건”이나, “정의와 선을 위한 평범한 시민의 작은 선택”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크다, 위대하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심미적인 것이다. 심미적인 것의 본질은 힘의 크기에 있지만, 정신적인 것의 본질은 그 질적인 특성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크거나 작거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며, 정신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의 삶에 작은 파문을 던지는 이러한 ‘선택의 순간’이 오히려 평범한 시민에서 위대한 시민, 의로운 시민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 악이 있다는 것을 다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회악이 있었기에 의로운 시민들이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선악의 변증법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원죄’를 말하면서 “복된 죄여!”라고 한 것이다. 모든 악은 변증법을 통해서 보다 더 큰 선을 산출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곧 키르케고르가 말하고 있는 “선ㆍ악의 변증법”이다.

고갱 :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