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카손 대성당(Cathédrale Saint-Michel) -카르카손-
▲ 카르카손(Carcassonne) 생 나자르 성당(브뤼기에르주교 출신지역)
브뤼기에르 주교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서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 1835년 9월 28일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쓰고 22일 후 중국 마가자에서 급사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제까지 지상에서 아낌없이 사랑해온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부모님께 이 서한을 올립니다. …
은혜롭게도 하느님 친히
제게 선교사가 되라는 열망을 심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
사랑하는 부모님,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무수한 백성의 영적 필요를 헤아리시고,
우리가 애덕으로 도와주길 기도하는
저들의 울부짖음을 살펴주십시오. …
이제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이 세상에서 잠시 헤어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하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교구 대신학교 교수이며 주교좌 본당 명예 참사위원인 브뤼기에르 신부가 1825년 9월 8일 역마차를 타고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떠나는 날 부모에게 쓴 작별 편지의 내용이다.
그는 이 편지를 쓰기 얼마 전 부모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될 것이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되돌아왔다. 그래서 교구를 떠나던 날 편지로 다시는 못 뵐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시절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대부분은 현지에서 순교하거나 병사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부모에게 신앙의 힘으로 이별의 슬픔을 이겨낼 것을 기도했다.
브뤼기에르는 카르카손 소ㆍ대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브뤼기에르는 노란 머리에 키가 작고 말랐으나 성품은 대담하고 솔직했다. 그는 신심이 깊고 성적이 우수해 학생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그는 스물세 살 때 대신학교 공부를 모두 마쳐 교회법상 사제품을 받을 나이(24세)가 될 때까지 부제로서 소신학교 3학년 교사로 생활했다.
또 1815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은 다음 날 대신학교 교수로 임명될 만큼 교구와 스승들에게 인정받았다.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4년간 철학과 신학을 가르친 그는 이후 주교좌본당 명예 참사위원으로 사목했다.
그가 언제 조선 교회를 알게 됐고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여행기에 “조선 선교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아직 프랑스에 있었고 아주 젊은 나이였다.
이 가엾은 신입 교우들이 버림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자, 이들을 구하러 가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9쪽)는 고백으로 보아 카르카손교구 신부 시절 때부터 조선 선교를 희망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조선 입국 길에 오른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19일 중국 내몽골 마가자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사진은 마가자 성당 성직자 묘지에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과 묘비. 그의 유해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해 이장돼 서울 용산성직자 묘역에 안장돼 있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 추진을 앞두고 그 삶의 궤적을 더듬어 목숨과 맞바꾼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과 선교 열정을 조명하고자 한다.
또 초기 신앙 선조들이 우리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보편 교회 안에서 위대한 유산으로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한 인물로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평가하고자 한다.
왕요셉: 선교 열정 충만한 중국인 청년과 함께 조선으로 향하다.
청년 왕요셉은 중국 쑤저우 사람이었다. 그의 성은 왕(Ouang), 도(Tao), 밤(Vam) 등으로 불렸다. 사진은 왕요셉의 고향인 쑤저우의 한 풍경. 리길재 기자
조선 입국을 준비하며 페낭에 머물고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7월 25일 장 앙투안 뒤브와 신부가 보낸 편지로 조선대목구가 설정됐고 자신이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됐음을 알게 됐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대목구를 설정한 지 10개월 만이다.
왕요셉은 페낭신학교 신학생이었으나 병으로 학업을 그만둔 중국인 청년이었다. 샤스탕 신부가 페낭의 중국인사회 전교회장으로 그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추천할 만큼 왕요셉은 화교들 사이에 대단히 활동적인 교리교사로 알려져 있었다.
페낭신학교 교장 신부인 미셀 샤를 롤리비에(Michel Charles Lolivier, 1764~1833) 신부도 “이 청년은 절대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를 그만둔 것은 건강상의 이유였습니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신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하나입니다. 그는 한자를 잘 알고 있으므로 주교님께서 말을 배우시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중에서)라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왕요셉 자신도 브뤼기에르 주교와 동행하기를 원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를 직접 면담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나는 중국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멀고 더 위험한 선교지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대가 나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얼마 못 가서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다 알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조선으로 가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저는 이와 같은 여행에 따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 이 선교 임무 중 생기는 위험에 맞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망해야 하는 운명입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중에서)
이 말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왕요셉에게 “나를 따라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 카르카손(Carcassonne)대성당(생나자르성당)
카르카손이 있는 언덕에는 로마 시대 이전부터 요새화된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중세시대에 건축된 성을 둘러싼 거대한 방어벽, 주거 건물, 거리, 고딕 성당 등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서 중세의 요새화된 주거지의 대표적 사례이다. 이 지역은 현대 보존과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비올레르뒤크(Viollet-le-Duc)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복원되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기원전 1세기에 ‘카르카소 볼카룸 텍토사굼’이라 불리던 이 요새는 로마 제국에 흡수되면서 기원전 27년에 ‘라틴 콜로니아 룰리아 카르카소’로 개명되었다.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까지의 혼란한 시기에는 약 1,200m에 달하는 성벽을 건설함으로써 외적의 침입을 막았고, 나중에 세운 마을은 안쪽 요새의 3분의 2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이로 인해 마을은 330년대에 ‘카스텔룸’이란 이름을 얻었다.
본래 이곳은 셉티마니아(Septimania) 북쪽 경계의 변경 도시였다. 그 때문에 5세기에 서고트족의 통치를 받았고, 프랑크족의 계속된 침략에 저항해야만 했다. 724년에 아랍인들이 침략했지만 759년 피피누스 단구왕이 주도한 포위 공격으로 몰아냈다. 9세기에는 백작의 저택이 되었으며, 나중에 자작의 저택이 되었다.
성당은 본래 1096년 6월에 지금의 로마네스크 성당이 있는 자리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1270년에 이 성당을 허물고 새 성단소를 세우기 시작하여 1320년대에 완성되었다. 여성 성가대가 생긴 것은 15세기 초이며, 1260년에 라둘프 주교가 진료소와 예배당을 세웠다. 12세기에 백작의 성이 로마 시대 성벽의 서쪽에 세워졌고, 1226년 그 주위에 직사각형의 요새를 보강했다.
요새 주위에 성벽을 세우는 동시에 외부 방어벽을 건설해 마을을 새로 왕의 영지에 포함시켰고, 이곳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13세기 말에 완성된 이 마을은 대표적인 중세 요새지로 인정받았다.
생 나제르(St Nazaire)와 생 켈세(St Celse)에 봉헌된 대성당의 본당은 단속적인 반원형 아치 천장으로 덮인 중앙의 6개의 네이브(nave)과 비슷한 높이의 완벽한 아치가 솟아오른 2개의 좁은 측면 통로로 이루어져 있다. 반원형 아치의 가로 빔은 깊이 박힌 사각 기둥과 원주에서 번갈아 솟아올라 있다. 정통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가대석은 13세기를 압도한 하이 고딕 양식으로 변화되었는데, 동쪽 끝에 육각형의 애프스(apse)가 있는 커다란 수랑(袖廊)에서 그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북부의 하이 고딕 성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러한 양식은 수랑을 강조하는 로마네스크의 전통과 달리 성가대석 자체를 강조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을 고딕 양식화한 것이다. 외관은 프랑스 북부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고딕 양식 교회 건물과 마찬가지로 플라잉버트레스(flying buttress)가 없어서 내부의 아치로 안정성을 유지한다.
이곳에 있는 조각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3세기의 라둘프 주교의 무덤이며, 애프스와 수랑의 창문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뛰어난 수준의 작품이다. 시기는 13세기 말, 14세기 초, 16세기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240년과 1280년에 포위에서 함락되지 않은 것을 계기로 13세기와 14세기 초에 마지막 건설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13세기가 끝날 무렵 마을은 전형적인 중세 요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1262년에 일어난 폭동으로 왕은 이 마을 주민을 대부분 추방하고 강의 반대편에 살게 했는데, 주민들이 새로 만든 마을도 1347년에 요새화되었다.
이처럼 카르카손은 철벽같은 요새로서 백년전쟁 동안, 심지어 1355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다. 1575년과 1585년에 위그노 교도가 기습 공격을 했으나 두 번 모두 재빨리 진압되었다.
앙시앵레짐과 이후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무기고와 병기창이 되었다. 1804년 군사적 요새 명부에서 빠지고 1820년 이류 요새로 재분류되었다. 그 결과 편리한 채석장으로 급격하게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벽과 탑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요새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장 피에르 크로 마이르비유(J.P. Cros-Mayrevieille) 덕분이었다.
1850년 7월 31일에 그는 성벽의 파괴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 역사유적시찰위원회는 성벽을 구하기 위해 전쟁부 장관과 토의한 후 1852년에 이를 위한 최초의 기금을 조성하게 되었다.
1846년에 이미 보고서 준비위원으로 임명된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나르본 문과 로드 문의 복원 사업을 시작했다. 카르카손에서도 작업하던 그는 1879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시기 동안에 외부 방어벽에 있는 많은 탑과 내부의 요새가 거의 완전히 복원되었다.
19세기가 끝나기까지 비올레르뒤크의 뒤를 이어 폴 보스윌왈드(Paul Boeswillwald)가 2개의 성벽 사이에 건설된 가옥을 철거하고 성벽들과 성의 복원 작업을 계속했으며, 1910년에 복원 사업이 완료되었다.
■ 보르도 대성당(Cathédrale Saint-André de Bordeaux)
(보르도 항: 브뤼기에르주교 프랑스 출발항구)
-. 보르도(Bordeaux)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 주
요약: 프라스의 행정구역. 가론 강어귀에서 96㎞ 떨어져 있다. 보르도의 대가문들은 해운업과 보르도산 포도주 무역으로 부를 이룩했다. 이들 가문은 잉글랜드 지배 당시 큰 부를 쌓을 수 있었고, 18세기에 다시 번영을 맞았다. 오늘날에 포도원이 차지하는 지역의 면적은 예전 절정기에 차지했던 최고면적의 반 정도이다. 프랑스 정부와 지역 포도재배업자들은 포도주의 생산량과 질을 철저히 관리하여 주요수출시장을 지켜내려 애쓰고 있다. 17세기는 혼란의 시기로, 종교전쟁에서 대학살이 있었고 무역은 위축되었으나 18세기에 '삼각무역'을 통해 다시금 번영을 누렸다.
가론 강이 도르도뉴 강과 만나는 곳에서 위쪽으로 24㎞ 지점에 가론 강을 끼고 있으며 강어귀에서 96㎞ 떨어져 있다. 이곳은 부르디갈라라는 이름으로, 켈트계 부족인 비투리게스 비비스키족의 주요도시였다.
로마 시대에는 피레네 산맥으로부터 루아르 강에까지 이르던 아키타니아 속주(屬州)의 수도였으며, 스페인 및 브리타니아와의 교역이 번성했다. 4세기에 아키타니아세쿤다(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 지역으로 나누었던 아키타니아의 한 지역)의 수도였던 부르디갈라를 두고, 이곳 태생의 작가 아우소니우스는 방벽으로 둘러싸인 4각형 도시이며 갈리아의 최대 교육 중심지 가운데 하나라고 기술했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보르도 주변지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맞이했으나 10세기초에 아키텐 공작령이 수립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로마사).
17세기는 혼란의 시기로, 종교전쟁에서 대학살이 있었고 무역은 위축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들여 서인도 제도에 팔면서 그곳에서 설탕과 커피를 사들이고 무기와 포도주를 아프리카에 파는 '삼각무역'을 통해 다시금 번영을 누렸다.
1870, 1914, 1940년에 파리에서 망명한 프랑스 정부가 보르도에 피신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4년 8월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수복되었다.
보르도의 대가문들은 해운업과 유명한 보르도산(産) 포도주 무역으로 부를 이룩했다(보르도 포도주). 이들 포도재배와 포도주무역업에 종사하는 가문은 잉글랜드가 지배할 당시에 큰 부를 쌓을 수 있었고, 15~17세기의 위태로운 기간이 지난 후 18세기에 다시 번영을 맞았다. 그후로는 1869년 포도나무 뿌리진디의 만연 같은 가장 심각했던 피해를 포함하여 기생충이나 날씨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곳의 항구지역은 18세기부터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나, 지금은 5개의 외항(홀수가 깊은 배가 정박할 수 있는 바다를 향한 항구)으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이전되고 있으며, 특히 안틸레스 제도, 아프리카, 프랑스 서해안과의 무역이 이전되고 있다. 최근 수년 동안 가장 많은 물량을 차지했던 수입품은 석유이다.
무역은 자본축적에 유리했으나, 여러모로 노력이 기울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업발달을 촉진시키지는 못했다. 전통적인 식품가공업과 가구산업 외에 최근 정유업·석유화학산업·제약업이 추가되었고 포드자동차 공장이 건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