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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서의 이야기 더하기와 빼기
강 돈 묵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다. 동물 중에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러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것은 제대로 확인된 바가 없다. 표출하는 감정을 나타내는 몇 개의 어휘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추측 정도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상에 오직 하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희로애락을 비롯한 모든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면서 서로 소통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언어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이 어떻게 그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삶은 다른 가치를 갖게 된다. 언어를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사용하다보면 사람들의 질시를 받게도 되고, 또 너무 말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언어를 사용하긴 해도 적절하게 사용하길 요구하는 사회에서 인간들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이 사용하는 그 언어를 가지고 표현하는 예술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가치는 판이하게 다르게 된다. 치밀한 구성으로 적재적소에 필요한 언어를 배치하는 작가의 피나는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니까 문학은 절제된 어휘로 꼭 필요한 것만 사용해야 한다는 완성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작가가 어휘 사용에 너그러우면 그 다변만큼 사족이 붙게 되어 독자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에 장애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변에 이끌리어 독자가 현혹될 수도 있으나 이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멀어지게 된다. 필요 없는 말이 끼어들게 되면 내용 전달에 크게 장애로 나타난다. 독자가 내용의 진수에 편안히 이르지 못하고 헤맨다면 그것은 작가의 임무를 제대로 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가는 충분한 설명을 해 줄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러질 못하고 미흡한 어휘의 동원이었다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수필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이야기를 전개해감에 있어서 현란한 어휘의 동원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가로서 제대로 의무를 다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반드시 필요한 어휘들로 작가가 표출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나타내 주어야 한다. 문장의 내용이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되도록 표현이 완성되어야 할 텐데 부족함이 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작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쌓여 있다. 글을 전개해감에 있어서 중언부언해서 헛바퀴가 돌아서도 안 되고, 부족함이 있어 덜컹거려서도 안 된다. 그래서 수필은 필요치 않은 이야기가 끼어들거나 앞에서 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거나 이야기가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아 의미 파악에 장애가 있다면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이 독자에게 전달할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여 독자들에게 충실히 전달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한정된 지면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충실히 한다는 것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집필에 들기 전에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글감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하고, 또 이야기의 순서를 잡아야 하며, 그것이 순리대로 전개되도록 개요를 작성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글은 어느 곳에서든 부족함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작가는 해야 할 이야기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내가 할 이야기에 더 좋은 글감을 보태어 글을 살찌우는 일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빼는 일이 더 힘든 일이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집필의 과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글의 내용이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
엄기원의 <책을 버리면서>
요즘은 수없이 많은 직업이 소생하고 수없이 많은 직업이 소멸의 길을 걸어간다. 뿐만 아니라 그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다양하게 변질되고 있다. 사회 현상의 변화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전에는 대개의 경우 육체적 노동보다는 정신적 활동에 대해 무한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를 흠모하며 살았다. 하지만 세상은 단순하고 간편한 것을 추구하다보니 모든 것에서 가치의 변화가 초래되고 있다.
엄기원의 <책을 버리면서>는 이와 같은 세상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작가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는 책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여 많이 소유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긍정적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세태는 모두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오직 돈만을 소중히 여긴다는 지적이다.
대학 교수로 정년한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980년대 이전에 정년을 맞이한 교수들은 애지중지 모아 둔 전문서적들을 근무하던 대학에 기증하고 몹시 흐뭇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어떤 교수는 학교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순금 열쇠도 받았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년퇴임하는 교수들은 책을 대학이나 도서관 어디에 기증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곳이 없단다. 이만큼 세상이 변해 버렸다.
나 또한 세월 앞에 변해 버린 세상에 고집을 내세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다 보니 모아 놓은 책도 물건도 옷도 버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이러다 보니, 가난하게 살던 옛날이 그리워진다. 먹고 싶은 것 먹지 못하고 입고 싶은 옷 입지 못하던 시절이 그리워지다니!
그러나 그때는 어렵게 살면서도 저금통장에 한 푼 두 푼 저축하는 재미도 있었고, 집집마다 일찍 일어나 내 집 앞 거리를 쓸면서 이웃 사람들과 인사하는 재미도 있었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이 엄마가 싸 준 도시락 보따리를 들고 십 리 이십 리 길을 걸어 소풍가는 재미도 있었다.
-엄기원의 <책을 버리면서>에서
작가가 소중히 간직해 왔던 책을 버리면서 느닷없이 느끼게 되는 세태의 변화를 적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변화는 이미 준비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적가치보다는 황금을 따르게 되어 있는 인간들의 심리를 작가는 이미 예측하고 있다. 지금은 책을 기증하려 해도 받아주는 곳이 없지만, 전에는 책을 대학에 기증하면 ‘순금 열쇠’를 받았다고 함으로써 미래에 도래할 세상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상분의 <명사십리鳴沙十里>
제목에서 작가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명사십리(明沙十里)가 아니고, 명사십리(鳴沙十里)이다. 제목에 한자풀이를 곁들이지 않고, 그냥 ‘명사십리’로 하였다면 이 글에는 별 무리가 없다. 하지만 굳이 한자풀이를 붙였다면 글의 구성은 달라져야 한다. 일반적인 백사장이나 해변의 이야기는 이 글에서는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야 한다. 제목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개하려면 굳이 제목을 그렇게 붙일 필요가 없다.
이 글에서는 후반부의 이세보 이야기를 토대로 구성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제목과 관계한다. 물론 바닷가의 묘사가 전혀 끼어들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려는 이야기를 위해 그 부분은 대폭 줄여야 한다는 뜻이다. 먼저 이세보 이야기를 세심히 언급하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면서 해변의 묘사가 뒷받침 되었더라면 이 글은 더 확실한 존재감을 얻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니까 앞의 기행적 여정은 장황하게 기술함으로써 오히려 손해를 보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문장의 완성도를 위한 배려가 요구된다. 수필에서 감탄형이나 청유형의 문장을 쓰면 분위기가 가라앉게 된다는 점도 유념했으면 좋겠다. 글에는 연이라는 형태단락이 있다. 단락의 첫 칸을 비움으로써 단락의 전환을 표시한다. 이 글에서는 이 형태단락의 변화를 확실히 하기 위해 한 줄씩 띄워놓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글에서 한 줄을 공백으로 둔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허용되는 자유다.
김선기의 <어항>
문학은 어차피 사람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작가가 글감으로 돌을 선택했든 나무를 선택했든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작가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적어 놓고 수필을 썼네 하는 것은 안쓰러운 일이다. 작가가 삶 속에서 얻은 글감이 함유하고 있는 바를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글을 써야 하지, 수기나 쓰듯 일상을 적는 것은 수필이 아니고 생활 작문이다.
김선기의 <어항>은 그런 면에서 차별화된 존재 의미가 있다. 거실 한 편에 방치되었던 어항을 손질하며 작가는 그 사물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찾아 나선다. 전에는 식구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건만, 지금은 텅 빈 가슴이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작가는 어항과 관계되었던 지난 세월을 추억한다. 지금은 작가의 곁에 없는 남편부터 떠올린다. 그리고 그와 같이 했던 어항을 회상한다. 다음은 딸아이다. 부레옥잠을 얻어다 넣고, 구피를 얻어다 기르던 딸도 떠올린다. 어항 속에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가득하고, 현란한 몸짓으로 떼를 지어 다닐 때가 어항이 가장 화려하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던 때라 인식한다. 결국 집안에는 남편이 있고, 귀여운 딸이 있었을 때가 자신이 가장 행복했음을 말한 것이다.
어항이 금붕어, 구피, 달팽이를 보낸 것처럼 원하지 않은 삶에 순응하며 살았다. 어항의 주인이었던 그를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보내고 낡은 어항처럼 흐린 마음으로 살았다. 몸은 움직여도 가슴은 돌멩이 사이에서 썩어가는 금붕어처럼 힘든 날들이었다.
빈 어항도 나처럼 물이 없을 때에는 스스로 강바람으로 채웠을 것이다. 하늘에 둥근 달을 품고 싶어 그 빛에 목말라 한 적도 있었으리라. 담겨진 모든 가족을 따뜻하게 품으며 가끔은 달팽이가 내 집이라고 우기던 그 때가 그리웠으리라. -김선기의 <어항>에서
비록 어항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 글에서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즉, 이 글에서 ‘어항’은 작가 자신이다. 수필은 이와 같이 자신을 다른 사물에 얹어서 형상화할 때에 더욱 값진 생명력을 얻는다.
이 글의 끝부분에 있는 한 단락 네 줄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은 작가가 말하지 말고 독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았을까 한다.
김은혜의 <버려진 돌구유>
고향집 마당가에 방치되어 있는 돌구유를 보고 아버지를 추억하는 글이다. 농사일을 한 아버지는 늘 소와 함께 한 삶이었다. 그러기에 지금도 돌구유를 보면 그 시절 아버지가 소를 자식처럼 아끼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소를 기르지 않는 조카가 고향집을 지키고 있기에 마구간에서 마당으로, 다시 담장 밑으로 내몰린 처지지만 그것이 작가에게 주는 의미는 크다. 아버지인 것이다.
우리 형제보다 아버지와의 만남이 먼저 시작된 터라 이 구유의 나이를 아는 이가 없다. 손으로 보듬다 아버지와 포옹하듯 양팔을 벌려 감싸 안아 본다. 하도 큰지라 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구유처럼 아버지의 품도 참으로 넓었다. 한 치 앞도 가름할 수 없던 삶의 능선에서 뿌연 안개 속을 떠돌다 와도 ‘넌 현명한 아이니까 믿는다.’ 이 한 마디 남기시고 어떤 질책도 싫은 내색도 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던 아버지가 아니던가. 이 구유도 아버지의 인품을 닮았는지 냉대하듯 아무렇게나 두었어도 지킴이처럼 견고하게 잘 버티고 있음이 고맙다. -김은혜의 <버려진 돌구유>에서
결국 작가 김은혜는 돌구유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다. 역시 문학에서 글감이 갖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무엇을 가지고 글을 쓰든 결국 인간의 이야기여야 한다는 진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다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작가는 자신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때에 보탤 이야기를 찾는 일보다 더 시급히 이행되어야 할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과감히 떼어내는 일이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애마 이야기 네 줄은 필요하지 않는 부분이다. 작가는 이와 같이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에 하지 않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남대석의 <오붓한 나들이>
아내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기술한 글이다. 아내를 떠나보내니, 평생 동안 고생시킨 것만 떠오른다. 못난 남편 보필하랴, 자식 뒷바라지하랴 물기 마른 적이 없는 거친 손으로 집안만 종종거렸던 아내의 작은 몸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정년만 하면 전국 방방곡곡 함께 여행하기로 한 아내는 때가 되자 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내가 아들의 배려로 전주 한옥마을에 가게 된다. 그 여정 속에서 흐뭇해하는 아내를 본다. 그러나 글 말미의 사건을 토대로 한다면 이 나들이는 ‘오붓한 나들이’일까 고개가 갸웃둥해진다.
결국 아내는 그 여행 중 쓰러지고 만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종내에는 세상을 떠난다. 여기까지가 현상이다. 현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우리는 현상을 글감으로 가져올 때에는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 글감이 가지고 있는 본질. 그것을 찾아내어 의미를 부여해 형상화시키는 작가의 노력이 없으면 그 글은 생명력을 얻지 못한다.
이 글은 작가가 아내를 잃은 아픔에서 감정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작품의 여기저기에 감정이 넘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글은 객관성을 상실하게 된다. 좀 더 흥분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글감을 음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반드시 그래야 글은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행복’이니 하는 어휘가 민낯으로 나타나는 점도 깊이 짚어봐야 한다. 작가의 입으로 직접 이런 어휘를 동원하기보다는 독자가 그 울림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다른 이들이 너무 많이 사용하여 생명을 잃은 상투적 표현은 가능한 동원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나치게 식상한 표현은 독자들에게서 외면을 당할 수 있음도 깊이 새겨 둘 일이다. 가령 ‘내 허벅지를 몇 번이나 꼬집어보았는지 모른다.’와 같은 표현은 이젠 생명력이 없다.
이 글에서도 작가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보인다. 맨 마지막 단락은 굳이 적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배려한다는 것이 너무 속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젠 독자들의 능력을 믿고 작가는 그들에게 기회를 넘겨주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다.
송보영의 <맛듦>
정제된 소금도 ‘오랜 시간을 햇살과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숱한 날들을 견뎌낸 뒤에 얻은 결과이다.’ 이와 같이 인간도 자신이 하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숱한 시간과 노력을 함께 할 때에 가능한 것이다.
송보영의 <맛듦>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독자들에게 웅변하고 있다. 비록 하잘 것 없는 살구도 농익어 제물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그 단맛을 맛볼 수 있다. 이렇게 농익어 떨어진 살구에는 많은 벌들이 모여 식사를 즐기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떨어진 개살구는 시고 떫어 제 맛을 내지 못하니 벌이 모여들 이유가 없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바라본 작가는 글감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인간도 이렇게 농익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만의 진정한 맛을 간직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그렇다. 어느 분야에서건 깊은 맛을 내는 경지에 이르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금이 단맛을 포함한 맛깔스러운 맛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따가운 햇살 아래 제 몸을 내맡긴 채 담금질을 당했기에 가능했다. 발레리나 강수진도 천상의 춤을 추는 춤꾼이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기에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하물며 나 같은 필부이랴. 쓴맛과 눅눅함으로 제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과 같은, ‘시거든 떫지나 말지’란 말이 딱 어울리는 개살구 같은 내가 그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농익은 모습으로 다시 빚어지기 위해서는 비움과 채움이 철저히 요구되는 맛듦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될 게다. -송보영의 <맛듦>에서
작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최선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길은 정답이 없는 길이다. 다만 그 길을 어떻게 만들고, 어느 자리에 놓았는가에 따라 독자들에게 주는 효과의 폭은 사뭇 다르다.
이 글에서도 발레리나 강수진의 에피소드를 뒤로 하여,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으로 이 글의 주제가 익어갔더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본다. 그리고 우리가 수필을 씀에 마무리 단계에서 ‘그렇다’를 끌어오면 조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글을 읽고 느끼는 바는 독자마다 조금씩 다를진대 굳이 작가가 ‘그렇다’를 넣어 결론을 내리면 이러한 독자들의 사고의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가 되기에 각별히 조심하는 것이 좋다.
조흥제의 <밥 할아버지>
한국동란 때에 참전했던 미국인이 그 인연을 중시하여 지금껏 지탱해 오고 있는 이야기다. 그 미국인은 귀국하여 제대를 하고서도 한국의 젊은이들이 좋아 군무원으로 미8군에 와서 근무를 했다.
그의 곁에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영어 회화를 배우기 위해 모여 들었고, 그때마다 그를 ‘밥 할아버지’라 불렀다. 그는 귀국해서도 결혼도 하지 않고 한국의 젊은이들과 사귐에 더 열성적이었다. 그 많은 경비를 마련하여 한국에도 자주 나왔다. 나이 들어 기력이 쇠잔해지자 비록 한국에는 못 와도 전화를 이용해 소통하고 있었다.
이 글은 한국인 친구 중의 하나인 작가의 큰아들이 그의 구순 잔치에 참석키 위해 미국에 다녀온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곳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고 쓴 글이다. 작가는 이 글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은 개체를 인人이라고 하고, 복수로는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인간은 하나가 아닌 사람의 사이, 즉 집단을 뜻한다. 우리는 무수한 인연으로 묶여 있다. 가족, 일가, 친구, 동창, 직장…….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기쁘지만 나쁜 관계라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상적인 길은 ‘혼자 불당佛堂에서 수도하는 것이 귀하지 않고, 천당天堂에 혼자 가는 것이 귀하지 않고, 백 가지 근심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귀하다.’는 옛 성인의 말씀과 같이 사람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섞여서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났다. 그것은 같은 문화권, 같은 생활권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조흥제의 <밥 할아버지>에서
적절한 글감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작가가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해 간다. 다만 글에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 몇 개의 인용이 있는데 이보다는 자신의 확신에 찬 주장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백청담의 <미안해>
고양이 사육에 대해 적었다. 그동안 키우던 고양이가 없어졌다. 사람들은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 이 글에서도 좀 더 식상하지 않은 내용을 찾아내는 작가의 배려가 요구된다. 내가 적으려는 글의 내용이 다른 이들이 이미 적은 것이 있다면 굳이 그 글을 쓸 필요가 없다.
이 글의 마무리 부분에서 “마불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는 아니 적음만 못하다. 글을 씀에 자신의 이러한 치기스러운 감정의 표출은 절대 금물로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것이다.
이순자의 <함께 한 50년>
자신이 살아온 삶은 자신만의 것이기에 특별하여 애정이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다분히 작가의 감정이 넘치기 마련이다. 이런 글감을 가지고 글을 쓸 때는 이 감정을 느긋하게 관리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나’가 아닌 ‘우리’로 승화시킬 수 있다. 하나의 수필집을 내고 느끼게 되는 감회는 작가에게는 엄청난 것임이 분명하다.
이칠환의 <유행가 속에 묻힌 민족혼>
유행가를 글감으로 시대의 변천을 노래했다. 대중에 깊이 들어가 있는 유행가는 민중의 의식을 노래하기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에 가장 관심을 가졌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글에서처럼 그 많은 유행가 속에서 취택하여 하나의 맥으로 이어간 작가의 시도가 재미있다.
다만 앞부분에 나오는 음악에 대한 식견이나, 음악사회학에 대한 기술은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한다. 왜냐 하면 비록 음악이 그런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해도 유행가는 대중 속에서 숨쉬기에 굳이 이론적 배경이 동원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번 《문학미디어》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구성에서부터 이야기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면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충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집필에 들기 전에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글감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하고, 또 이야기의 순서를 잡아야 하며, 그것이 순리대로 전개되도록 개요를 작성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글은 어느 곳에서든 부족함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특히 작가들이 좀 더 세심히 고심해야 할 점은 내용의 풍요보다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괜히 독자들에게 배려한다는 것이 오히려 문맥에 부담을 주거나 작가의 치기가 드러나는 경우도 종종 있음을 보았고, 이제는 독자에게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작가의 길임도 알았다. 분명 훌륭한 작가는 자신이 할 이야기에 더 좋은 글감을 보태기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찾아내어 빼는 일을 지혜롭게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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