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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해제
1.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서지사항
우리가 주로 접하고 있는 동국세시기는 1911년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발간한 연활자본(鉛活字本)
으로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및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와 합편(合編)
한 것이다. 원사본(原寫本)은 1책으로 홍승경(洪承敬)의 기증본(寄贈本)인데,
기증자 홍승경은 저자 홍석모(洪錫謨)의 증손이다(뒤쪽 계보도(系譜圖)참조).
그런데 이 광문회 본은 원사본과 비교할 때 적지 않은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있다. 예를 들면 정월(正月)
「원일(元日)」조의 “廣州俗是日相慶拜日月神”에서 ‘廣州’는‘慶州’의 오자이며, 같은 달 「입춘(立春)」조의 “立春日
宜春字于門”에서는 ‘春’과 ‘字’ 사이에 ‘二’가 빠져있다. 그 결과 입춘일에 ‘宜春’ 두 자를 문에 붙인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을 “봄(春)에 합당한(宜) 문자를 붙인다.”는 식으로 번역되고 또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연구자들이 인용하고
있다. 원사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으로는 현재까지는 홍승경이 기증한 연세대학교 소장본이 유일한데 1책 42장이
며 크기는 31×20.5㎝다.
□ 저자 : 홍석모(洪錫謨,1781~1857)
□ 간행년도 : 1840년경 전후
□ 소장처 : 연세대학교 도서관
□ 판본, 수량, 크기 : 필사본(筆寫本), 1책(42장), 31×20.5cm
□ 책의 구성과 내용
매 달의 풍속을 왕실, 양반, 서민의 순서를 지키며 기술하였고, 각 달의 끝부분에는 「월내(月內)」라고 하여 그
달의 특정한 날을 지정할 수 없는 세시 내용들을 담았다. 마지막에는 윤달의 풍속을 간략히 정리하여 실었다.
그리고 각 세시 내용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등 중국의 예를 들어 그 근원을 밝히려 하였다.
2.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와 저자 홍석모(洪錫謨)
세시풍속 연구자들이 세시기류(歲時記類)로 가장 많이 인용하는 책이 동국세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서지적인 사항들이나 저자인 홍석모에 관한 연구실적이 거의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홍석모의 생몰연대가 대개 미상(未詳)으로 나와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홍석모는 서울의 명문 가문인 풍산(豊山) 홍씨(洪氏) 중에서도 핵심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 추만공파(秋巒公派)
자손이다. 추만공(秋巒公) 홍영(洪霙, 1584~1645)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사위이며 예조참판을 지냈고,
그의 아들은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인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으로 정조(正祖)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의 부친인 홍봉한(洪鳳漢)이나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고조가 된다.
홍석모는 희준(羲俊)의 외아들이고, 홍양호는 희준의 생부다.1) 홍양호는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형(文衡)으로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천안군 환성면 용곡리(龍谷里)에 있는데,
본인이 묘지(墓誌)의 서(序)를 쓰고 묘표(墓表)는 아들 희준이 찬하였다.
그러나 그의 막내아들 희민(羲民, 1762~1822)의 묘가 과거 양주군 해등면(海等面) 우이동인 점으로 미루어
사후에도 이들의 우이동 기반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석모의 부친 희준(1761~1841)은 이조판서
와 홍문관 제학을 지내고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목공(文穆公)이고 묘소는 천안군 서면 용암리(龍岩里)
봉서산(鳳棲山)에 있으며, 묘지는 서유구(徐有榘), 소지(小誌)는 아들 석모가 찬(撰) 하였다.
풍산 홍씨 족보에 의하면 홍석모는 1781년 7월 29일에 태어나 1857년 10월19일에 죽었다.
묘소는 천안군 서면 용암리 봉서산에 있다. 초명은 석영(錫榮),자는 경부(敬敷), 호는 도애(陶厓)다.
1804년에 생원이 되었고 음사로 남원부사를 지냈다. 묘갈(墓碣)은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찬했고, 묘지는 참판
송지양(宋持養)이 찬했다.
철종실록에 의하면 1855년에 “전부사(前府使) 홍석모에게 옷감과 먹을 것을 내려주었는데, 화성(華城)에서
열렸던 내연(內宴)에 참여한 사람으로 회근(回巹), 즉 혼례한 지 60년이 지났기 때문이다.”2)라고 하였다. 화성
에서 열린 내연이란 정조가 1795년에 회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화성으로 원행(園幸)하여 벌인
행사를 말한다. 혜경궁 홍씨와는 조카벌이 되는 홍석모는 이때 쯤 부인 청주 한씨(1780~1857)와 혼인한 것 같다.
홍석모의 장인은 판서를 지낸 한용탁(韓用鐸)이다. 자식은 2남 7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건주(健周)와 선주
(善周)이며, 사위는 창녕(昌寧) 조석필(曺錫弼), 전주(全州) 이만기(李晩器), 연안(延安) 이공익(李公翼), 연일
(延日) 정원필(鄭元弼), 온양(溫陽)정문교(鄭文敎), 동래(東萊) 정기복(鄭基復), 연일(延日) 정주석(鄭疇錫) 등
이다.
1991년 11월 6일에 충청남도 천안시 쌍룡동 산 68-5에 있던 홍석모의 부친 희준과 석모 부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지석 등이 발견되었다.3) 희준의 묘는 배위(配位) 용인(龍仁) 이씨(李氏)와의 합장묘로 이씨가 남편보다 6년 먼저
죽어 이곳 선산에 장사지냈다가 이장하여 남편과 합장하였다. 홍석모의 모친인 정경부인 용인 이씨는 1760년
2월 5일에 태어나 1836년 6월 17일에 죽었다. 용인 이씨의 아버지, 즉 도애의 외할아버지는 부사 이장우(李章佑)
이고 어머니, 즉 도애의 외할머니는 풍양(豊壤) 조씨(趙氏)다. 이장 과정에서 백자 지석 3건 12장(2장 중복),
토제 지석함 2개 및 토제지석 102장이 나왔는데, 그중 백자지석 2건은 도애가 부모를 위해 찬한 소지(小誌)이며
지석함 2개 중 1개 함에 들어있는 토제지석 71장은 도애 부모인 희준과 용인 이씨의 지석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有明朝鮮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世子右賓客成均館經筵春秋館同知知事義禁府判事五衛都摠府都摠管事
豊山洪公羲俊之墓(艮坐) 貞敬夫人龍仁李氏祔左
또 다른 토제 지석함의 지석 31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도애와 부인 청주 한씨의 지석이다.
有明朝鮮通政大夫行南原府使豊山洪公錫謨之墓(艮坐) 貞敬夫人龍仁李氏祔左
(풍산홍씨대동보 1985中)
秋巒公派系譜圖
1세 之慶
2세 侃
3세 侑
4세 演
5세 龜
6세 伊儀俶
7세 繼宗
8세 禹甸
9세 脩(繼)
10세 履祥鸞祥鳳祥
11세 雴霙(秋巒公, 예조참판, 월사 李廷龜의 壻)
12세 柱元(永安尉,宣祖駙馬) 柱後(出) 柱臣柱韓柱國
13세 萬容萬衡萬熙萬恢
14세 重箕重模重聖
15세 鉉輔允輔鎭輔
16세 鳳漢維漢良浩挺漢明浩
17세 ○(혜경궁홍씨) 羲宅樂源羲俊(出) 羲民羲俊(繼) 羲臣
18세正祖必榮敬謨是謨錫謨淳謨
19세 定周健周善周
20세 祐吉祐獻
21세 承穆承祿
22세 範植駿植
23세 命憙冑憙
24세 起文起川
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서문의 저자 이자유(李子有)
동국세시기 서문을 쓴 이자유는 1786년 7월생으로 호는 곡양(縠瀼)이며1850년대 초까지 살았던 것 같다.
홍석모는 5년 연하인 그와 30여 년을 사귀었으며 책의 서문을 부탁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회갑 때는 축하 서문을
써주고 또 먼저 죽은 그를 위해 제문(祭文)을 짓는 등 두 사람의 교유가 매우 깊었던 것같다.4)
이러한 배경을 고려할 때 이자유가 1849년 9월 13일자로 쓴 서문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은 홍석모의 생애를 이해
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운명에 막혀 쌓아 놓은 재주를 아무도 사지 않아 저 대궐의
풍부한 책들을 접할 수 있는 높은 벼슬은 남에게 넘겨주고 말단 관리로 머물면서 늘그막에는 자포자기하여 오직
사부(辭賦)와 시율(詩律)로서 스스로 무료함을 보내고 적적하고 우울하고 평온치 못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니
어찌 이리도 어그러진 일이 있겠는가.” 그러면서 그는 도애의 세시기 작업을 무료한 가운데 소일거리로 보낸
것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 어쩌면 친구 곡양의 말대로 도애가 자신의 선대들처럼 높은 벼슬로 현달했던 인물
이라면 이 책은 물론 그밖에 많은 시문들도 남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4.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내용의 특징
세시기(歲時記)란 일 년 중 계절에 따른 사물이나 행사 등을 기록한 책이다.
예기(禮記)의 「월령(月令)」등 고전에 나타나는 세시의 의미는 상서(尙書),즉 서경(書經) 중에 “요
임금이 (순에게) 말하기를 하늘의 역수는 너의 몸에있다(堯曰咨爾舜天之曆數在爾躬).”고 한 문구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역수(曆數)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제왕의 대통을 이어감이 세시기절(歲時氣節)의 선후(先後)와
같다는 뜻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 「사부(史部) 시령류(時令類)」의 서문들을 보면 시령(時令) 또는 월령
(月令)에 관한 책들이 있는 것은 선왕(先王)들의 정치가 갖는 근본이 천도(天道)에 따라 인사(人事)의 절(節)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5) 후세의 저술들이 대개 농가일용(農家日用),여염풍속(閭閻風俗)을 담은 것
들이어서 예기의 내용과 다르지만 ‘민사가 곧 왕정이다.
(民事卽王政)’라는 인식에서 그 전통의 연속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민간의 풍속과 일용을 담은 세시기류와는
달리 서울사람인 홍석모의 경우는 주로 시절음식과 서울풍속을 많이 다루고 있는 가운데서도 전국적인 풍속을
언급하였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남긴 시문류를 통해서도 알수 있듯이 생활의 여유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여행과 폭넓은 독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특히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잦은 인용인데, 그 이유는 이후 보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이 책의 편찬시기와 동국세시기의
편찬연대(1840년대)와의 간격이 무려 300년을 넘어 이 기간에 벌어진 풍속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99가지 주요 항목이다.
가지많은 나무 외양간뒤 세우기
강원도 산간지방 새 쫓기
경주 지방 신일(愼日)
경주 지방 일월신(日月神)
과일나무 시집보내기[嫁樹]
관북지방 나무소[木牛]
관상감(觀象監) 벽사문(辟邪文)
귀밝이술[牖聾酒]
꼬꼬매[姑姑妹]
납일(臘日) 대나(大儺)
다리밟기[踏橋]
단귀 첩[單貼]
달맞이[迎月]
달불이[月滋]
달점
덕담(德談)
돌팔매싸움[石戰]
동전 던져 맞추기
돼지날 콩가루로 얼굴씻기
돼지주머니(亥囊)
쥐주머니(子囊)
떡국 몇 그릇 째 먹었나
만리현과 우수현(雨水峴) 편싸움
매서(賣暑)
묘일 여자가 집에 먼저 들어오는 것 꺼림
묘일 토사(兎絲) 차고 재앙 물리기
묵은나물[陳菜] 만들어 먹기
문안비(問安婢)
바람개비[回回兒]
법고(法鼓) 모연문(募緣文)
벼 낟가리[禾積]
볏가릿대[禾竿] 세우기
보름 개 굶기기
보름 전 붉은 팥죽
보름날 남의집밥 빌어먹기
보름날(上元) 약밥[藥飯]
보름밤 그림자로 점풍하기
복쌈[福裹]
부럼깨물기[嚼癤]
이빨겨루기[齒較]
부적[桃符]
비파정(琵琶亭) 편싸움
빗접 머리카락 태우기
사일에 뱀꺼려 이발 안하기
삼재법(三災法)
삼패일(三敗日)
설빔[歲粧]
세배(歲拜)
세주(歲酒)
세찬(歲饌)
세함(歲銜)
세화(歲畵) 문배(門排)
수세(守歲)
수직성(水直星) 액막이
숙청문(肅淸門) 액땜
시루떡[甑餠]
시전 (모충일毛蟲日)에 가게 열기
아현 주민 편싸움[邊戰]
안동 놋다리[銅橋] 밟기
안택경(安宅經)
야간통행금지 해제
야광(夜光) 귀신
연날리기[風錚]
연상시(延祥詩)
연초 가자(加資)
영남 줄다리기[葛戰] 점풍
오곡밥
오행점(五行占)
용알건지기[撈龍卵]
승검초[辛甘菜] 진상
유생식당 원점(圓點)
인일(人日) 동인승(銅人勝)
인일제시(人日製試)
일월직성(日月直星)액막이
입춘날 춘첩자(春帖子)
재미(齋米)
전문(箋文)과 표리(表裏)
절제(節製)
제웅치기놀이[打芻戱]
제주 나희(儺戱) 화반(花盤)
조금날[潮減日]기일(忌日)
조롱박 세 개 액막이
조하(朝賀) 의례
종각네거리 흙 부뚜막 바르기
주발 안 곡식 씨 보고 점풍하기
중 떡 바꾸어 먹이기
쥐 태우는 불[燻鼠火]
집불이[戶滋]
청참(聽讖)
추령(芻靈) 제웅[處容]
춘도기과(春到記科)
춘련(春聯) 춘축(春祝)
춘천 지방 수레싸움[車戰]
충청도 횃불싸움[炬戰]
평안도 지방 돌팔매질
풍기(豊基) 수리(首吏) 검은 소 거꾸로 타기
은중경(恩重經) 진언(眞言) 인쇄
16일 기일(忌日) 풍속
8일 패일(敗日) 기일(忌日)
위 항목 중 음식에 관한 항목은 귀밝이술[牖聾酒], 묵은나물[陳菜] 만들어먹기, 보름날(上元) 약밥[藥飯],
복쌈[福裹], 부럼깨물기[嚼癤], 세주(歲酒), 세찬(歲饌), 시루떡[甑餠], 오곡밥, 승검초[辛甘菜] 진상 등이지만
세부적으로 언급된 다양한 음식류들을 열거하면 가장 많은 항목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시절음식에 대한 언급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당시 양반 사족들의 보양(補養)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밖에도 항목을 분류하는 데 중요한 분야로 설정될 수 있는 것이 점풍(占豊)과 주술적인 풍속으로 주로 정월에
집중되어 있지만 다른 달에도 간간히 보이고, 또한 주요 관심사로 언급되고 있다.
동국세시기와 다른 두 세시기, 즉 경도잡지와 열양세시기를 비교하면 제목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후자의 두 세시기가 서울 풍속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동국세시기는 전국적인, 특히 지방 풍속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조선중기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의 내용들을 당시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지에 대해 확인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국세시기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세시기는 초나라 풍속 36종을 수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이다.
이것은 중국 육조시대 후베이(湖北) 지방과 후난(湖南) 지방의 연중행사와 풍속을 기록한 책으로, 6세기 중엽에
양나라 종름(宗懍)이 편찬하였다. 원래는 10권이었으나 명대(明代)에 1권이 되었다.
종름이 지을 당시는 형초기(荊楚記)라고 하였는데 7세기 초 수(隋)나라 두공섬(杜公贍)이 증보 가주(加注)
하여 형초세시기라 하였다. 현존하는 중국 세시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초나라 특유의 세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풍속도 기술되어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특히 다음과 같이 이 책의 내용을 다양하게 인용하고 있다.
- 설날 길경 등을 넣어 만든 도소주(屠蘇酒)와 엿을 드린다.
- 정월 초하루에 닭을 그려 창호 위에 붙인다.
- 입춘날에는 「의춘(宜春)」이란 두 자를 문에다 붙인다.
- 마을 풍속에 정월 보름날 문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버들가지를 문에 꽂은 후 팥죽에 숟갈을 꽂아 놓고 제사
지낸다.
- 인일(人日)에 일곱 가지 채소로 국을 끓인다.
- 중원일에는 중, 도사, 세속인 모두 우란분을 차려 제각기 절에 공양한다.
- 공공씨(共工氏)에게 바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질 귀신이 되었다.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했으므로 동짓날 팥죽을 쑤어 물리치는 것이다.
인일에는 그밖에도 인사(人事)를 점친다고 하는데, 일곱 가지 채소국을 먹는것 외에 전채(翦綵)로 머리 장식
[花勝]을 만들어 꽂고 다니며 높은 언덕에 올라가 시를 읊는 풍속이 있었다고 하였다.
경도일(競渡日)이라는 것도 중국 초나라 풍속으로 이 책에 나온다. 이날은 음력 5월 5일로 전국 시대 때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강에 빠져 죽은 날이어서 사람들이 이날에 용주(龍舟)를 타고 건너는 경주를 하여 굴원을
기념하였다고한다.
그밖에 이 책에 인용된 중국 세시기 등 관련 문헌은 다음과 같다.
高承事物記原
戴德大戴禮
董勛問禮
杜甫시
孟元老東京夢華錄
武珪燕北雜錄
范成大「賣癡獃」
范成大「上元紀吳中節俳諧體」
司馬光日錄
徐光啓農政全書
葉廷珪海錄碎事
蘇東坡시
蘇東坡仇池筆記
孫思邈千金方
宋敏求春明退朝錄
沈榜宛署雜記
呂希哲歲時雜記
吳均西京雜記
溫革瑣碎錄
王錡寓圃雜記
王定保摭言
于奕正帝京景物略
韋述西都雜記
劉子翬시
兪宗本種果疏
劉向別錄
陸啓浤北京歲華記
陸放翁劒南詩稿歲首書事詩
應劭風俗通
李匡呂시
李睟光芝峯類說
李安訥「飮南宮績四馬酒」
李詡戒菴漫筆
張耒시
張遠隩志
張平子西京賦
鄭正則祠享儀
宗懍荊楚歲時記
周處風土記
周煌琉球國記略
陳淏花曆新栽
崔寔農家諺
崔寔月令
古今藝術圖
高麗史
唐書 「高麗傳」
東京雜記
東國輿地勝覽
餅餌閒談
本草綱目
史記
說文
續漢書「禮儀志」
詩經 「豳風」
詩經 「邶風」
禮記 「月令」
藝苑雌黃
雍洛靈異錄
周禮
摭遺
天寶遺事
抱朴子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서序
내가 일찍이 설과 보름에 관한 우리의 풍속을 각기 수십 절구의 시로 간략하게 지은 일이 있었는데, 그 시를 본
사람은 내용이 충실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입을 벌리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이어 그 다음
절기들도 서술해 가면 한 나라 세시의 유래와 실제가 갖추어지지 않겠는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 겨를을 찾지 못하고 몇 년을 지내다가 지금에 이르니 몸은 쇠약해지고 게을러져 필력이 쇠퇴하여
이전처럼 문득 생각나는 대로 적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나의 친구 도애(陶厓) 홍석모(洪錫謨)가 찾아와 책상(丌)위에 책 한 편을 뽑아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우리나라 세시를 기록한 것이다. 중국에는 종름(宗懍)6) 이래로 이런 책을 지은 사람이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에는 여태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번에 마치 못생긴 여자가 미인의 표정을 흉내 내듯이 격에 맞지 않은 시늉을 내어 우리 풍속이
각기 다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서문 하나 없이는 믿을 만한 책이 될 수 없으니 나를 위해 서문 하나 부탁한다.”
고 하였다.
내가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책을 끝까지 읽어보니 정월부터 섣달까지 제목이 모두 23항목이었으며,
그 달에 행해지지만 구체적으로 날짜를 잡을 수 없는 행사는 그 달 끝에다 ‘월내(月內)’로 구별하여 실었고 맨
나중에는 윤달 행사를 붙였다. 가까이는 서울로부터, 멀리는 궁벽한 시골에 이르기까지 비록 평범한 하나의
행사라고 해도, 그리고 아무리 비속한 것일지라도 그 절기에 해당하면 빠뜨리지 않고 모두 실었으며 우리나라
풍속 밑에는 반드시 전설이나 기록물 중에서 부합되는 것을 널리 채집하여 그 유래와 출처를 증명하였다.
고증이 풍부하고 내용이 넉넉한데다가 잘못 빠진 것들을 모두 실은 것이 물줄기를 따라 물의 근원에 이르고
가지로 말미암아 그 뿌리에 이른 것 같으니, 이는 비단 한 나라의 풍속을 묘사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려한 옛 중국문명과 견주어 유사한 것들을 잘 살려 엄연히 하나의 통일된 문자를 이룬 것이다.
풍부하다 그의 표현력이여. 반드시 후세에까지 충분한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큰솥에
들어있는 잘게 저민 고기 한 점 맛본 것이니 어찌 그와 더불어 제대로 된 고기 맛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오호라. 홍군이 젊은 시절만 해도 그에 대해 기대했던 사람들이 “그가 아니면 누가 임금 옆에서 왕명출납을 맡아
수행할 인재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자진해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결국 운명에 막혀 쌓아 놓은 재주를 아무도 사지 않아 저 대궐의 풍부한 책들을 접할 수 있는 높은
벼슬은 남에게 넘겨주고 말단 관리로 머물면서 늘그막에는 자포자기하여 오직 사부(辭賦)와 시율(詩律)로서
스스로 무료함을 보내고 적적하고 우울하고 평온치 못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니 어찌 이리도 어그러진 일이
있겠는가.
이번에 그의 이 작업도 무료한 가운데 소일거리로 보낸 것의 하나이지만 한 나라의 풍속을 모두 기술하고 모든
세시의 문헌을 갖추었기 때문에 종름 등 여러 사람들이 한 것처럼 엉성한 기록과 일방적인 견문에 그친 것보다는
나은 점이 많다.
내가 이 글을 감상하는데 빠져 며칠을 두었으므로 이제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이에 이 글을 적어 보답하는
바이다.
기유년 중양 후 4일(1849년 9월 13일)
곡양만객(縠瀼漫客) 이자유(李子有) 서(序)
余嘗於元朝及上元各賦數十絶句略述土風見者以爲道得該備至或解頤擬更逐節有述要成一國歲時之故實而因循未
遑者今已有年寔緣衰懶筆退不能如前者之有思輒書也一日陶厓洪友抽丌上一編書示之曰此所述東國歲時記也中州
則自宗懍以來作此書者不爲不多而吾東則至今闕如故聊爾效嚬以誌土風之各異焉便一信書不可無弁首之文試爲我
裁之也余乃受而卒業自元月訖臘月凡爲目者二十有三如事在某月而不可繫日者逐朔之末區別而揭之最下方附以閏
朔之所需而近自京都遠曁窮陲苟有尋常一事之稱於當節者雖涉鄙俚無遺悉錄東俗之下必博采傳記中襯合者以證其
所由出考据旣洽錯落俱載沿流而溯源由條而達本是不但爲描寫一國之俗尙並與中華之舊而觸類長之儼然爲一統文
字富哉言乎其足徵於來後也必矣雖然此特全鼎之一臠烏足與論於嚌胾之眞味也嗚呼洪君之少日所期者自謂何如人
亦孰不詡之以世掌絲綸之池上鳳毛也竟乃局於命途蘊而莫售彼金閨蘭臺之上高文大冊之煥黼黻而被管絃7)者付與
他人棲遲末宦白首濩落惟以辭賦詩律自遺無聊以瀉其牢騷不平之鳴一何其舛也若此等所述亦從無聊中消遺者而盡
一國之謠俗備每歲之文獻殆有勝於宗氏諸家之粗記一方見聞而止者多矣耽於玩賞留之屢日今不可以白還於是乎書
此以復焉己酉重陽後四日縠瀼漫客李子有序
정월
원일 元日
설날이 되면 의정부 대신은 모든 관원을 인솔하고 대궐에 나아가 임금에게 새해 문안을 드리고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올리며8) 정전 앞 뜰에 모여 조하(朝賀) 의례를 행한다.
외관직인 전국 팔도의 관찰사, 병사, 수사,부사, 목사도 전문과 토산물을 진상하며 주, 부, 군, 현의 호장과 아전도
모두 와서 반열에 참석한다. 동짓날에도 전문을 올리는 의례를 행한다.
서울 풍속에 설날 집안사당에 배알하고 제사지내는 것을 차례라고 한다. 남녀 어린이들은 모두 새 옷으로 단장
하는데 이것을 설빔[歲粧]이라고 하고, 집안 친척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을 세배(歲拜)라고 한다.
이날 시절음식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세찬(歲饌)이라고 하며 대접하는 술을 세주(歲酒)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 후한시대 사람인 최식(崔寔)의 월령(月令)9)에 “설날 조상에게 깨끗한 제사를 올리고
산초와 잣을 넣어 빚은 술을 마신다.”고 했고, 또 종름(宗懍)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10)에는 “설날 길경
등을 넣어 만든 도소주(屠蘇酒)와 엿을 드린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세주와 세찬의 시초다. 부인들은 사돈집에
단장을 한 계집종을 서로 보내어 새해 문안을 드리는데 이를 문안비(問安婢)라고 한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인 참봉 이광려(李匡呂)11)의 시에 “뉘 집 문안비가 뉘 집으로 문안하려 들어가는가(誰家問
安婢問安入誰家).”라는 구절이 있다.
육조, 한성부 등 서울 각사(各司)에 속한 서리와 종들, 그리고 각 영문(營門)의 장교와 군졸들은 접은 종이에
자기 이름을 써서 현직 관원과 퇴직 관원의 집에 바친다. 관원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한 쟁반을 놓아두고 이를
받는데 이것을 세함(歲銜)이라고 한다. 각 지방관청에서도 그렇게 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 명나라 사람인 왕기(王錡)가 쓴 우포잡기(寓圃雜記)12)에 “서울 풍속에는 매년 설날이면
주인들은 모두 설을 축하하러 나가고 다만 백지로 만든 장부와 붓과 벼루만 책상 위에 배치해 두면 하례객이
와서 이름만 적고 가기 때문에 영접하고 전송하는 일이 없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세함의 시초다.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 위에 놓고 떡메로 무수히 쳐서 길게 늘려 만든 가래떡을 흰떡[白餠]이라고 한다.
이것을 얇게 엽전 두께만큼 썰어 장국에다 넣고 끓인 다음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후추가루를 쳐서 조리한 것을
떡국[餠湯]이라고 한다. 이것은 제사에도 쓰고 손님접대에도 사용하므로 세찬에 빠져서는 아니 될 음식이다.
국에 넣어 삶으므로 옛날에 습면(濕麪)이라고 부르던 것이 바로 이것인것 같다. 저자거리 가게에서는 이것을
시절음식으로 판다. 세속 언어로 나이 몇살 먹었다는 것을 떡국 몇 그릇 째 먹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송나라 문인인 육방옹(陸放翁)13)이 쓴 검남시고(劒南詩稿) 권38 「세수서사시(歲首書事詩)」
주해(註解)에 “지방 풍속에 설날에는 반드시 끓인 떡을 쓰는데 이를 동혼돈(冬餛飩)이나 연박탁(年餺飥)이라고
한다.”고 한 것을 보면 떡국 먹는 것도 아마 옛 풍속인 듯하다.
멥쌀가루를 시루에 찌는 중에 삶은 붉은 팥을 켜로 까는데 멥쌀가루의 두께는 시루의 크기를 보고 정한다.
혹은 찹쌀가루를 켜로 넣어 찌기도 한다. 이것을 시루떡[甑餠]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새해에 귀신에게 빌기도
하고, 초하루와 보름 또는 아무 때나 귀신에게 빌 때도 올린다.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서는 시종(侍從)과 당하(堂下)의 문관들을 미리 선발하여
일종의 축하시인 연상시(延祥詩)를 지어 올리게 한다.14)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및 규장각(奎章閣)의
제학(提學)들에게 명하여 오언(五言)이나 칠언(七言) 율시 절구를 짓게 하며 그것을 채점해서 등수 안에 든
것은 대궐 안의 기둥과 문 상방에 붙인다. 입춘날의 춘첩자(春帖子)나 단오날의 단오첩(端午帖)도 모두 이 예를
따라 한다. 내 생각에는 송나라사람 온공(溫公), 즉 사마광(司馬光)15)이 쓴 일록(日錄)에 “한림원 서대조
(書待詔)16)가 임금에게 봄맞이시[春詞]를 청하고 그것을 입춘날 대궐 문가리개[門帳]에 붙인다.”고 했고,
또한 송나라 사람 여희철(呂希哲)17)이 쓴 세시잡기(歲時雜記)에 “학사원(學士院)에서 단오 되기 한 달 전
에 궁전 정문에 붙일 단오 첩자를 지어 두었다가 단오날 황제에게 올린다.”고 하였는데, 대개 이러한 것들이
옛날 부터 있던 법규다.
서화에 관한 임무를 맡고 있는 도화서(圖畵署)에서는 수성선녀도(壽星仙女圖)와 직일신장도(直日神將圖) 그림
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고 또 서로 선물하는데 이것을 세화(歲畵)라고 하며 축하하는 뜻을 나타낸다.
또 금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는데 키가 한 길이 넘는 장군들은 각각 천자의 신임을
상징하는 도끼와 절월(節鉞)18)을 들고 있다. 이 그림을 대궐문 양쪽에 붙이는데 이것을 문 , 배(門排)라고 한다.
또 붉은 도포를 입고 까만 사모를 쓴 화상을 그려 편전의 겹 대문에 붙이기도 하고, 사악한 귀신을 잡는 종규
(鍾馗)19)라는 귀신상을 그려 문에 붙이기도 하며, 또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 상방에 붙이는 등의 방법으로
사귀와 전염병을 물리친다. 모든 왕실 내외척들의 문간에도 이런 것들을 붙이며 일반 백성 집에서도 이를 많이
따라 한다. 금갑옷을 입은 두 장군은 사천왕(四天王)20) 신상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나라 태종 때의 명장인
울지공(尉遲恭)21)과 진숙보(秦叔寶)22)라고도 하며, 진홍색 도포를 입은 자는 당나라 때 학자인 위정공(魏鄭公)
23)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송나라 사람 송민구(宋敏求)24)가 쓴 춘명퇴조록(春明退朝錄)에 도가(道家)
에서 상소를 올려 천문(天門)을 지키는 금갑옷을 입은 두 사람 중 갈장군(葛將軍)25)은 기를 잡고 있고 주장군
(周將軍)26)은 절월을 잡고 있는 것으로 그린 것을 보면 지금 우리나라 문배에 나오는 그림은 이 갈․ 주 두 장군인
듯 하며, 세속에서 괴담소설에 나오는 당나라 태종27) 때의 일이라고 한 것은 억지로 붙여낸 말이다.28)
議政大臣率百官詣闕新歲問安奉箋文表裏朝賀於正殿之庭八道方伯閫帥州牧進箋文方物州府郡縣戶長吏亦咸來參
班冬至又行進箋之儀京都俗歲謁家廟行祭曰茶禮男女年少卑幼者皆着新衣曰歲粧訪族戚長老曰歲拜饋以時食曰歲
饌酒曰歲酒按崔寔月令正日潔祀祖禰飮椒栢酒又按宗懍荊楚歲時記元日進屠蘇酒膠牙餳此卽歲酒歲饌之始姻親家
婦女相送靚粧少婢問新年平安曰問安婢李參奉匡呂有詩曰誰家問安婢問安入誰家各司胥吏隸各營校卒摺紙列名來
呈單子於官員及先生家門內置髹盤受之曰歲銜外道衙門亦然按王錡寓圃雜記京師風俗每正朝主人皆出賀惟置白紙
簿並筆硯於几賀客至書其名無迎送也此卽歲銜之始蒸粳米粉置大板上以木杵有棅者無數擣打引作長股餠名曰白餠
因細切薄如錢和醬水湯熟調牛雉肉番椒屑名曰餠湯以供祀接客爲歲饌之不可闕者入湯烹之故古稱濕麪者似是物也
市肆以時食賣之諺稱添齒者謂吃餠湯第幾椀按陸放翁歲首書事詩註鄕俗歲日必用湯餠謂之冬餛飩年餺飥盖古俗也蒸
29)粳米粉於甑中以熟赤豆隔鋪之隔粉多積視甑大小或用糯米粉隔甑之名曰甑餠以歲時禱神又於朔望及無時禱神亦
如之承政院預選侍從堂下文臣製進延祥詩命館閣提學出韻五七言律絶考第入格者題貼于闕內各殿柱楹門楣立春日
春帖子端午帖子俱用是例按溫公日錄翰林書待詔請春詞以立春日剪貼於禁中門帳又按呂原明歲時雜記學士院端午
前一月撰閤門帖子及期進入30) 盖古規也圖畵署畵壽星仙女圖直日神將圖獻于公亦相贈遺名曰歲畵以寓頌祝之又
畵進金甲二將軍像長丈餘一持斧一持節揭于闕門兩扇名曰門排又以絳袍烏帽像揭重閤門又畵鍾馗捕鬼貼戶畵鬼頭
貼楣以辟邪瘟諸宮家戚里門扇亦皆揭之閭巷又多效之俗以金甲者謂四天王神像或以爲尉遲恭秦叔寶絳袍者爲魏鄭
公按宋敏求春明退朝錄道家奏章圖天門守衛金甲人葛將軍掌旌周將軍掌節今之門排似是葛周二將軍而世俗乃以傳
奇中唐文皇時事傅31)會之爾
서울과 지방의 조관(朝官)32)과 품직을 가진 명부(命婦)33)로서 나이가 70세 이상 된 사람에게는 새해에 쌀과
물고기, 소금 등을 내리는 것이 관례다. 조관으로서 나이가 80세이거나 일반 선비나 평민으로서 나이가 90세가
되면 각각 한자(資)34)를 올려주고, 나이 100세가 되면 특별히 한 품계35)를 뛰어 올려준다.
이렇게 매년 초에 가자(加資)를 신청한 노인들에게 직급을 올려주기 위해 이를 임금에게 아뢰어 비답(批()36)을
내리게 하는 것은 모두 노인을 우대하고 존중하는 성대한 의식이다.
일반 백성들은 바람벽에 닭그림과 호랑이그림을 붙여 액을 물리친다. 내 생각에는 후한시대 학자인 동훈(董勛)의
문례(問禮)에 “세속에 초하룻날 닭을 그린다.”고 했다.37) 또 생각건대 형초세시기에 “정월 초하루에
닭을 그려 창호 위에 붙인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풍속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호랑이를 그리는 것은 인월
(寅月), 즉 호랑이달이란 뜻을 취한 듯하다.38)
남녀 모두 나이가 삼재(三災)39)에 든 자는 매 세 마리를 그려 문 상방에 붙인다. 삼재법(三災法)이란 사(巳) ․
유(酉) ․ 축(丑)이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해(亥) ․ 자(子) ․ 축(丑)이 되는 해에, 신(申) ․ 자(子) ․ 진(辰)이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인(寅) ․ 묘(卯) ․ 진(辰)이 되는 해에, 해(亥) ․ 묘(卯) ․ 미(未)가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사(巳) ․ 오(午) ․ 미(未)가 되는 해에, 인(寅) ․ 오(午)․ 술(戌)이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신(申) ․ 유(酉) ․ 술(戌)이
되는 해에 각각삼재가 든다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이 복설(卜說)40)을 믿고 매 그림을 사용하여 액을 예방한다.
태어난 해로부터 9년 만에 삼재가 들기 때문에 이 삼재의 해에 해당하는 3년 안에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삼가고 꺼리는 일도 많다.
친구나 젊은이를 만나면 “올해는 꼭 급제하시오.”, “관직에 나아가시오.”, “득남하시오.”, “돈 많이 버시오.” 등의
말을 덕담(德談)으로 건네며 서로 축하한다.
꼭두새벽에 거리로 나가 어떤 방향에서 들려오든지 상관없이 처음 듣는 소리로 한 해의 운세를 점치는데 이를
청참(聽讖)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 북경 풍속 중에 섣달 그믐밤에 부엌 조왕신 앞에서 방향을 일러달라
고 빈 다음 거울을 품에 넣고 문밖으로 나아가 거리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는 새해의 운세를 점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풍속도 그와 같은 것이다.
오행점(五行占)을 던져 새해의 신수를 점쳐 본다. 오행에는 각기 점사(占辭),즉 점괘가 있다. 나무에 금(金) ․
목(木) ․ 수(水) ․ 화(火) ․ 토(土)를 각각 새겨 장기알 같이 만든다. 그것들을 일시에 던져 자빠지고 엎어진 상태를
보고 점괘를 얻는다.
남녀 모두 일년 동안 머리를 빗으면서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빗접 안에 넣어 두었다가 반드시 설날 해질 무렵을
기다려 문밖에서 태우는데 이는 전염병을 물리치는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의약에 정통했던
당나라 사람 손사막(孫思邈)41)이 쓴 천금방(千金方)에 “정월 인일(寅日)42)에 백발을 태우면 길하다.”고
하였는데, 설날에 머리카락을 태우는 풍속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속설에 야광(夜光)이란 이름을 가진 귀신이 이 날 밤에 인가에 내려와 두루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보고 자기 발에
맞으면 곧바로 신고 가버린다고 하며, 그렇게 되면 신발 주인은 불길하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귀신을
두려워하여 신발을 감추고 불을 끄고 잔다. 그리고 체를 마루 벽에 달아놓거나 섬돌 사이에 걸어 두면 야광이란
귀신이 와도 체의 구멍 수를 세다가 다 세지도 못하고 신발을 신을 생각도 잊고 있다가 닭이 울면 그만 가버린다
고 한다. 야광이란 어떤 귀신인지 모르겠으나 혹 약왕(藥王)43)의 음이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교에서
의약을 맡고 있는 부처인 약왕의 형상이 아이들을 두렵게 할 정도로 추하여 이러한 속설이 생긴 것 같다.
중들이 북을 치며 시가를 돌아다니는 것을 법고(法鼓)라고 한다. 혹은 시주(施主) 내용을 적어놓는 모연문(募緣文)
을 펴놓고 바라를 치며 염불을 하면 사람들은 다투어 돈을 던진다. 또는 속세의 떡 두 개를 중의 떡 한 개와 바꾸
는데, 풍속에 중 떡을 얻어 이를 어린아이에게 먹이면 마마, 즉 두종(痘腫)을 잘 넘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중들을 도성(都城)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성 밖에서나 이런 풍속이 남아있다.
모든 절간의 상좌 중들이 도성 안 오부(五部)44)로부터 재(齋)에 올릴 쌀을 빌어 가는데, 새벽부터 바랑을 메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문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 인가에서는 각기 새해에 복을 맞이하 는 뜻으로 쌀을 퍼준다.
경상도 경주(慶州) 지방 풍속에 이 날은 서로 경축하며 일월신(日月神)에게 절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 참조.
제주도 풍속에 산 ․ 숲 ․ 냇물 ․ 못 ․ 언덕 ․ 분묘 ․ 나무 ․ 돌 등이 있는 곳에 신사(神祀)를 차려 놓고 매년 설날부터
정월 보름까지 무당과 박수가 신장 깃발을 들고 나와 나례굿[儺戱]을 행하는데, 징과 북을 울리면서 앞을 인도
하여 마을 거리를 드나들면 사람들이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내놓으며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이것을 화반(花盤)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京外朝官命婦年七十以上歲首賜米魚鹽以爲例朝官年八十士庶年九十各加一資年百歲特超一品階每歲首以應資老
人授資入政稟下批皆優老尊年之盛典也閭巷壁上貼鷄虎畵以禳之按董勛問禮俗一日爲鷄又按荊楚歲時記正月一日
畵雞帖戶45) 今俗昉此畵虎似取寅月之義也男女年値三災者畵三鷹貼于門楣三災法巳酉丑生亥子丑年申子辰生寅
卯辰年亥卯未生巳午未年寅午戌生申酉戌年俗信卜說用此以禳之生年隔九而入三災三年之內不干人物多愼忌之事
逢親舊年少以登科進官生男獲財等語爲德談以相賀曉頭出街巷間無定向以初聞之聲卜一年休咎謂之聽讖按燕京俗
除夕禱竈前請方向抱鏡出門聽市語以卜來年休咎東俗亦然擲五行占以卜新年身數五行各有占辭木刻金木水火土如
碁子一時擲之觀其俯仰而得占男女一年梳頭貯退髮留梳函中必待元日黃昏燒於門外以辟瘟按孫思邈千金方正月寅
日燒白髮吉元日燒髮昉於是俗說鬼名夜光是夜降于人家徧穿兒鞋足樣合則輒穿去鞋主不吉故羣兒畏之皆藏鞋滅燈
而宿懸篩於廳壁或階庭間謂以夜光神數篩孔不盡仍忘穿鞋鷄鳴乃去夜光未知何鬼而或藥王之音轉也藥王像醜可令
怖兒耳僧徒負鼓入街市擂動謂之法鼓或展募緣文叩鈸念佛人爭擲錢又用一餠換俗二餠俗得僧餠飼小兒以爲善痘朝
禁僧尼不得入都門故城外有此風諸寺上佐乞齋米於五部內自曉荷帒巡行沿門唱聲人家各出米給之盖新年徼福之意
也慶州俗是日相慶拜日月神見輿地勝覽46) 濟州俗凡於山藪川池邱陵墳衍木石俱設神祀每自元日至上元巫覡擎神
纛作儺戱錚鼓前導出入閭里民人爭捐財穀47)以賽神名曰花盤見輿地勝覽48)
입춘 立春
이날 대궐 안에 춘첩자(春帖子)를 붙인다. 재상집, 양반집, 일반 민가 및 시전에서도 모두 춘련(春聯)49)을 붙
이고 한 해 일이 잘되기를 기원한다. 이것을 춘축(春祝)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입춘날에는 「의춘(宜春)」50)이란 두 자를 문에다 붙인다.”고 하였
는데, 지금의 춘련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상감(觀象監)51)에서 주사(朱砂)52)로 재앙을 쫓는 벽사문(辟
邪文)을 찍어 대궐에 바치면 그것을 문 상방에 붙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갑작(甲作)은 흉직한 것을 잡아
먹고, 필위(胇胃)는 호랑이를 잡아먹고, 웅백(雄伯)은 도깨비를 잡아먹고, 등간(騰簡)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잡아
먹고, 남저(攬諸)는 허물을 잡아먹고, 백기(伯寄)는 환상을 잡아먹고, 강량(强梁)과 조명(祖明)은 둘이 함께
책사(磔死)53)에 기생하는 귀신을 잡아먹고, 위수(委隨)는 관(觀)을 잡아먹고, 착단(錯斷)은 거(巨)를 잡아먹고,
궁기(窮奇)와 등근(騰根)은 둘이 함께 벌레를 잡아먹는다. 무릇 이 열 두 신을 시켜 흉악한 것들을 내쫓기 위해
네놈들을 위협하여 몸뚱이를 잡아다가 허리뼈를 부러뜨리고 네놈들의 살을 찢고 내장을 뽑으려 한다.
네놈들 중 빨리 서두르지 않고 뒤에 가는 놈들은 열 두 귀신의 밥이 될 테니 율령을 시행하듯 빨리 나가도록
하라.” 이것은 즉 속한서(續漢書)54) 「예의지(禮儀志)」에 있는 내용으로 납일(臘日)55) 전날 대나(大儺)56)
행사 때 역질 귀신을 쫓는 장면에서 진자(侲子), 즉 초라니가 화답하며 부르던 가사다.
초라니란 나이가 열 살에서 열두 살 정도 먹은 남녀 아이들로서 행사 때 선발되어 악귀 쫓는 소리를 낸다.
그런데 이 가사를 입춘날 부적으로 만들고 단오날에도 이것을 붙인다. 정조 임금 때에는 은중경(恩重經)의
진언(眞言)을 인쇄하고 반포하여 문 상방에 붙여 액을 물리치도록 했는데 그 진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 [曩謨三滿多沒駄喃喃言我言我曩娑口縛訶]
또 이것으로 단오 부적도 만든다. 문에 붙이는 첩자에는 “신도 울루(神荼鬱壘)” 라고 네 글자를 쓴다.
옛 풍속에 설날에 복숭아를 그린 부적[桃符]에다 동해 복판의 도삭산(度朔山)에서 못 귀신을 다스린다는 신도
(神荼)와 울루(鬱壘)두 귀신의 화상을 넣어 문간에다 붙여 흉귀를 막았다. 이 제도는 중국 황제 때부터 시작되었
는데 지금은 춘첩(春帖)로 사용한다. 또한 연구(聯句)로 쓰는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대구어(對句語)가 있다.
◦문신호령(門神戶靈) 가금불상(呵噤不祥): 집에 깃든 신령이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평안하니 집집마다 넉넉하다.
◦우순풍조(雨順風調) 시화세풍(時和歲豊): 비바람이 순조로워 시절이 평화롭고 풍년이 오라.
일반 사람들의 집 기둥이나 문 상방에 붙이는 대련(對聯)으로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두루 사용된다.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수명은 산 같이 재물은 바다 같이 되라.
◦거천재(去千灾) 래백복(來百福): 온갖 재앙은 가고 모든 복은 오라.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입춘에 대길하고 계절따라 다경하라.
◦요지일월(堯之日月) 순지건곤(舜之乾坤): 요 임금 세월이고 순 임금 세상이어라.
◦애군희도태(愛君希道泰) 우국원년풍(憂國願年豊): 임금을 섬겨 큰 정치 희망하고 나라를 염려하며 풍년을
기원한다.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 부모님 오래 사시고 자손만대 번영하라.
◦천하태평춘(父母千年壽)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 천하는 태평한 봄이고 사방에 아무 일 없다.
◦국유풍운경(國有風雲慶) 가무계옥수(家無桂玉愁): 나라에 풍운의 경사 있고 집안에 땔거리 먹거리 걱정
없으라.57)
◦재종춘설소(灾從春雪消) 복축하운흥(福逐夏雲興): 재난은 봄눈처럼 사라지고 복은 여름구름처럼 일어나라.
◦북당훤초록(北堂萱草綠) 남극수성명(南極壽星明): 어머님 근력 푸른 풀처럼 좋으시고 아버님 오래오래 사시라.
◦천상삼양근(天上三陽近) 인간오복래(人間五福來): 하늘은 정월 봄이 되었으니 인간세계에 오복이 온다.
◦계명신세덕(鷄鳴新歲德) 견폐구년재(犬吠舊年灾): 닭 울음소리에 새해 덕이 들어오고 개 짖는 소리에 묵은해
재앙이 나간다.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생기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온다.
◦봉명남산월(鳳鳴南山月) 인유북악풍(麟遊北岳風): 봉황은 남산 달 아래서 울고 기린은 북악산 바람을 따라
노닌다.
◦문영춘하추동복(門迎春夏秋冬福) 호납동서남북재(戶納東西南北財): 대문으로는 사계절의 복을 맞이하고 방문
으로는 사방의 재물을 받아들인다.
◦육오배헌남산수(六鰲拜獻南山壽) 구룡재수사해진(九龍載輸四海珍): 여섯 마리의 자라는 만수를 바치고 아홉
마리 용은 사해의 재물을 실어 온다.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춘만건곤복만가(春滿乾坤福滿家): 세월이 감에 인간 수명이 더 해지고 봄이
천지에 가득함에 집안에 복이 가득하다.
방문 상방에는 다음과 같은 단귀의 첩[單貼]을 붙인다.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봄이 문앞에 오니 부귀가 늘어난다.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到吉人家): 봄빛은 길한 사람 집에 먼저 온다.
◦상유호조상화명(上有好鳥相和鳴): 하늘에는 길한 새들이 서로 조화롭게 운다.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氣滿門楣): 봄날의 화기가 문 위에 가득하다.
◦일진고명만제도(一振高名滿帝都): 이름을 높이 날려 장안에 가득하라.
사대부 집에서는 대부분 새로 글을 짓거나 혹은 옛 사람들의 아름다운 글을 따서 사용한다.
경기도 산골지방 여섯 고을58)에서는 움파[蔥芽] ․ 산겨자[山芥] ․ 승검초[辛甘菜] 등을 임금에게 진상한다.
산겨자는 이른 봄에 눈이 녹을 무렵 산 속에서 자생하는 겨자다. 더운물에 데쳐 초장에 무쳐 먹으면 맛이 매우
맵기 때문에 고기를 먹은 뒤에 먹어야 좋다.
승검초는 움집에서 키운 당귀(當歸)의 싹인데 은비녀 가락같이 맑으며 꿀을 그 사이에 끼워 먹으면 맛이 매우
좋다. 내 생각에는 척유(摭遺)59)에 “동진(東晋) 사람 이악(李鄂)이 입춘날에 무와 미나리 싹으로 채반
(菜盤)을 만들게 하여 선물로 서로 주고받았다.”고 하였고, 또 척언(摭言)60)에 “송나라 사람 안정군왕(安定
郡王)이 입춘날에 다섯 가지 매운 음식으로 채반을 차렸다.”고 하였고61),
또 두보(杜甫)의 시에 “봄날 봄채반에 가는 생나물이라.”고 하였으며62),
소동파(蘇東坡)의 시에도 “퍼런 쑥과 누런 부추가 올라 온 봄채반을 먹어보자.”63)고 한 것을 보면,
이것들은 모두 옛날부터 내려오는 풍속인것이다.
관북지방64) 풍속에 이 날이 되면 나무소[木牛]를 만들어 관가에서부터 민가 마을에 이르기까지 두루 길에다
내놓는다. 대개 이것은 토우(土牛)를 만들어 내보내는 제도를 본뜬 것으로, 농사를 장려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大內貼春帖子卿士庶民家及市廛皆貼春聯頌禱名曰春祝按荊楚歲時記立春日貼宜春二65)字于門今之春聯昉此觀
象監朱砂搨辟邪文進于大內貼門楣其文曰甲作食歹匈胇胃食虎雄伯食魅騰簡66)食不祥攬諸食咎伯寄食夢强梁祖
67)明共食磔68)死寄生委隨食觀錯斷食巨窮奇騰根共食蟲凡使十二神追惡凶嚇汝軀拉汝幹節解汝肌肉抽汝肺腸汝
不急去後者爲糧急急如律令此卽續漢書禮樂志先臘一日大儺逐疫侲子所和之詞而今作立春符端午日亦貼之健陵印
頒恩重經眞言貼楣禳之其文曰曩謨三滿多沒駄喃唵誐誐曩娑嚩訶亦作端午符門帖有神荼69)鬱壘四字古俗元日桃符
畵神荼鬱壘像置之門戶以禦凶鬼其制自黃帝始今用於春帖又有門神戶靈呵噤不祥國泰民安家給人足雨順風調時和
歲豊等對語閭巷柱楣通用對聯壽如山富如海去千灾來百福立春大吉建陽多慶堯之日月舜之乾坤愛君希道泰憂國願
年豊父母千年壽子孫萬代榮天下太平春四方無一事國有風雲慶家無桂玉愁灾從春雪消福逐夏雲興北堂萱草綠南極
壽星明天上三陽近人間五福來鷄鳴新歲德犬吠舊年灾掃地黃金出開門百福來鳳鳴南山月麟遊北岳風門迎春夏秋冬
福戶納東西南北財六鰲拜獻南山壽九龍載輸四海珍天增歲月人增壽春滿乾坤福滿家戶楣單貼春到門前增富貴春光
先到吉人家上有好鳥相和鳴一春和氣滿門楣一振高名滿帝都士夫多用新製或揀古人佳語畿峽六邑進蔥芽山芥辛甘
菜山芥者初春雪消時山中自生之芥也熱水淹之調醋醬味極辛烈宜於食肉之餘辛甘菜者窨養當歸芽也淨如銀釵股夾
蜂蜜噉之甚佳按摭遺東晋李鄂立春日命以蘆菔芹芽爲菜盤相饋貺又按摭言安定郡王立春日作五辛盤又按杜詩春日
春盤細生菜東坡詩복蒿黃韭試春盤盖遺俗也關北俗是日作木牛自官府達于閭里遍出于路盖倣出土牛之制而所以示
勸農祈年之意也
인일 人日
정월 초이렛날인 인일에 임금은 각신(閣臣)들에게 동인승(銅人勝)을 나누어 준다. 이것은 작고 둥근 거울 같은
것으로 자루가 달려있고 신선을 새겨 넣었다.
내 생각에는 세시기70)에 “수나라 유진(劉臻)71)의 아내 진(陳)씨가 인일에 인승을 올리는데 혹은 비단을
끊어 만든 것도 있고 혹은 금박을 새겨 만든 것도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인승도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
임금은 제학(提學)들에게 명하여 과거를 실시하게 하는데 이를 ‘인일제시(人日製試)’라고 한다.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식당에 갈 때마다 원점(圓點) 1점을 찍어주는데, 30일을 꼬박 원점을 받으면 비로소
과거를 보게 한다. 시험과목으로는 시(詩) ․ 부(賦) ․ 표(表) ․ 책(策) ․ 잠(箴) ․ 명(銘) ․ 송(頌) ․ 율(律) ․ 부(賦) ․
배율(排律) 등 각 문체별로 마음대로 제목을 선택하게 하여 시험을 보이고 그것을 심사하여 장원을 한 자에게는
과거에 정식으로 급제한 사람과 똑같은 자격을 내리고 그밖에 시험을 잘 본 자에게도 초시(初試) 합격자격을
주거나 상을 내리는 등 차등을 두었다. 시험은 성균관에서 시행하는데 혹 대궐 안에서 임금이 친히 임한 가운데
보이기도 하며 또 혹 지방 유생들도 칠 수 있게 자격을 개방하기도 한다. 명절날 선비들에게 시험을 치게 하는
것은 인일로부터 시작하여 3월 삼짇날, 7월 칠석, 9월 중양절에 행하는데 모두 인일제시(人日製試)와 같은 방식
으로 한다. 이런 것들을 절제(節製)라고 한다.
頒銅人勝于閣臣如小圓鏡有柄鏤仙人按歲時記隋劉臻妻陳氏人日上人勝或剪綵或鏤金薄爲之人勝倣此命招提學設
科曰人日製試太學圓點儒生參食堂滿三十日爲圓點始許赴試以詩賦表策箴銘頌律賦排律等各體隨意命題考取居魁
者或賜第發解施賞有差設行於泮宮或親試於闕內又或通方外儒生節日試士自人日始三日七夕九日皆倣此曰節製
상해일 ․ 상자일 上亥上子日
정월의 첫 번째 해(亥) 자가 들어가는 날은 돼지날이라고 하고 첫 번째 자(子)자가 들어가는 날은 쥐날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의 오랜 행사로서 궁중에서 낮은 지위의 젊은 관리들 수백 명이 잇달아 횃불을 땅에 끌면서 “돼지
그슬리자, 쥐를 그슬리자.” 하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임금은 태운 곡식을 주머니에 넣어 이것을 재상들과 근시들
에게 나누어 주며 풍년을 기원하는 뜻을 표시하였는데, 이 이후로 돼지주머니(亥囊)나 쥐주머니(子囊)라는 말이
생겼다. 이 주머니들은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돼지주머니는 둥글었고 쥐주머니는 길었다. 정조 임금이 등극하자
이 옛날 제도를 복구하여 주머니를 하사하였다. 쥐날에 여항에서는 또한 콩을 볶으면서 주문을 외는데 “쥐주둥이
지진다. 쥐주둥이 지진다.”고 주문 외우듯이 한다. 호서지방 풍속에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횃불을 사르는데 이를
쥐태우는 불[燻鼠火]이라고 한다. 돼지날에 콩가루로 얼굴을 씻으면 얼굴색이 희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돼지
빛깔이 검기 때문에 그 반대의 뜻을 취한 것이다.
上亥爲豕日上子爲鼠日國朝故事宮中小䆠數百聯炬曳地呼爋豕爋鼠燒穀種盛于囊頒賜宰執近侍以眎祈年之意始有
亥囊子囊之稱用錦製亥囊圓子囊長及健陵御極復古制頒囊上子日閭巷亦炒豆呪云鼠嘴焦鼠嘴焦湖西俗燃炬成羣謂
之燻鼠火上亥日作豆屑澡面黑者漸白豕色黑故反取其義也
묘일 ․ 사일卯日巳日
묘일을 토끼날이라고 한다. 이 날 뽑은 무명실을 토사(兎絲)라고 하며 이 실을 차고 다니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이 날에는 외부사람과 나무로 만든 물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여자가 집에 먼저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 사일에 이발 하지 않는 것은 뱀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卯日爲兎日繅綿絲謂之兎絲佩而禳灾不納人口木物忌女先入巳日不理髮忌蛇入宅
보름날 上元
이 날은 찰밥을 짓는데, 대추 ․ 밤 ․ 기름 ․ 꿀 ․ 간장 등을 섞어 다시 쪄서 잣과 버무린 것을 약밥[藥飯]이라고
하여 보름날의 좋은 음식으로 여기며 이것으로 제사를 지낸다. 대개 이것은 신라의 풍속이다. 내 생각에는 신라
때 서울인 경주의 지리와 풍속을 적은 책 동경잡기(東京雜記)72)에 신라 소지왕 10년(488) 정월 15일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까마귀가 날아와 왕을 일깨워주어 그 덕에 왕이 화를 면하게 된 일이 있었
으므로 우리나라 풍속에 보름날을 까마귀 제사날로 삼아 찰밥을 만들어 까마귀에게 제사지냄으로써 그 은혜를
보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지금 풍속에 찰밥이 시절음식으로 된 것이다.
시골 사람들은 보름 하루 전날에 짚을 군대깃발인 둑기[纛旗] 모양으로 묶고 그 안에 벼 ․ 기장 ․ 피 ․ 조의 이삭
을 넣어 싸고 목화를 그 장대 끝에 매달아 집곁에 세우고 새끼를 사방으로 벌려 고정시킨다. 이것을 벼 낟가리
[禾積]라고 하며 이것으로 풍년을 기원한다. 산골 풍속에는 가지가 많은 나무를 외양간 뒤에 세우고 곡식 이삭
과 목화를 걸어두면 아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해가 뜰 때까지 나무 주위를 돌면서 노래를 부르며 풍년을 기원한다.
조선시대 옛 행사 중에는 시경(詩經) 「빈풍(豳風)」칠월(七月)조73)에 나오는 내용인 경작하고 수확하는
형상을 본 따 정월 보름날 대궐 안에서 좌우로 나누어 승부를 겨루었다. 이것도 아마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항간에 볏가릿대[禾竿]를 세우는 일도 바로 이와 같은 행사의 일종인 것이다.
남녀의 나이가 사람의 운수를 맡고 있다는 나후직성(羅睺直星)74)을 만나면 풀로 만든 허수아비인 추령(芻靈)을
만든다. 이것을 방언으로 제웅[處容]이라고한다. 제웅의 머리통에 동전을 집어넣고 보름날 하루 전, 즉 14일
초저녁에 길에다 버려 액막이를 한다. 이때 아이들은 두루 집집마다 몰려다니면서 문밖에서 제웅을 달라고
외치고 그것을 얻게 되면 즉시 머리통을 파헤쳐 다투어 돈을 꺼낸 다음 제웅을 길바닥에 끌고 다니면서 두들기
는데, 이것을 제웅치기놀이[打芻戱]라고 한다.
처용이란 말은 신라 헌강왕 때 동해 바다 용왕의 아들 이름에서 나온것이다. 지금 장악원(掌樂院)의 향악부
(鄕樂部)에서 하는 처용무(處容舞)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추령을 제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처용이란 말
에서 빌은 듯하다. 세속에서는 점쟁이 말을 믿어 나이가 일월직성(日月直星)을 만난 사람은 종이로 해와 달 모양
을 만들어 나무막대기에 끼워 지붕 용마루에 꽂아 두었다가 달이 뜰 때 횃불을 밝혀 그것을 맞이한다.
나이가 수직성(水直星)을 만난 사람은 종이에 밥을 싸서 밤중에 우물 속에 던져 액막이를 한다.
세속에서는 처용직성을 가장 꺼린다.
남녀 어린이들은 겨울부터 작은 나무 조롱박 세 개를 차고 다닌다. 그 빛깔은 푸른 색 ․ 붉은 색 ․ 누런 색 등으로
모양은 마치 콩알 같은데, 이것에다 비단실로 수를 달아 차고 다니다가 보름 전날 밤중에 몰래 길에다 버린다.
이것 역시 액막이가 된다고 한다.
정월 보름 전에 붉은 팥죽을 쑤어 먹는다. 내 생각에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마을 풍속에 정월 보름날
문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버들가지를 문에 꽂은 후 팥죽에 숟가락을 꽂아 놓고 제사지낸다.”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에 팥죽을 차리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서울 도성의 북문을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하는데 문은 항상 닫아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그곳은 물과 계곡이 무척
맑고 그윽하여 보름 전에 여염집 부녀들이 이곳에서 세 번 놀고 가면 액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꼭두새벽에 종각 네거리에서 흙을 파다가 집 네 귀퉁이에 뿌려 묻거나 부뚜막에 바르는데, 부자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75)
炊糯米拌棗栗油蜜醬再76)蒸調海松子名曰藥飯爲上元佳饌用以供祀盖新羅舊俗也按東京雜記新羅炤智王十年正
月十五日幸天泉亭有飛烏警告于王國俗以上元日爲烏忌之日作糯飯祭烏報賽今俗因爲時食鄕里人家以上元前日束
藁如纛狀包禾黍稷粟之穗又懸木綿花冒於長竿之首建屋傍張索把定稱禾積以祈豊峽俗立多枝木於牛宮之後掛穀穗
綿花小兒曉起繞樹而行歌以祝之至日出國朝故事正月望日大內象豳風七月耕穫狀分左右各勝盖亦祈年之意而閭巷
禾竿卽其一事爾男女年値羅睺直星者造芻靈方言謂之處容齎銅錢於顱中上元前夜初昏棄于塗以消厄羣童遍向門外
呼出處容得便顱爭錢徇路以打擊之謂之打芻戱處容之稱出於新羅憲康王時東海龍子之名今掌樂院鄕樂部有處容舞
是也以芻靈謂處容盖假此也俗信卜說年値日月直星者剪紙象日月鉗以木揷屋脊月出時或燃炬迎之水直星者以紙囊
飯夜半投井中禳之俗最忌處容直星男女幼少者自冬佩小木葫蘆복紅黃三枚如荳狀用綵絲爲綬上元前夜半潛捐于道
亦謂消厄望前煮赤小豆粥食之按荊楚歲時記州里風俗正月望日祭門先以柳枝揷門仍以豆粥揷箸而祭之77) 今俗設
食似沿于此都城北門曰肅淸恒閉而不用澗壑淸幽上元前閭巷婦女三遊此門謂之度厄曉頭掘取鍾閣十字街上土散埋
家中四隅又傅竈以求財聚
보름날 이른 아침에 날밤 ․ 호두 ․ 은행 ․ 잣 ․ 무 등을 깨물면서, “일 년 열두달 동안 아무 탈 없이 평안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축원한다. 이를 부럼깨물기[嚼癤]라고 한다. 혹자는 이것이 이를 튼튼히
하기 위한 방법이 라고도 한다. 평안도 의주(義州) 지방 풍속에 어린 남녀들이 이른 아침에 엿을 깨무는데 이를
이빨겨루기[齒較]라고 한다. 청주(淸酒)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하는데 이 술을 귀밝이술
[牖聾酒]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송나라 사람 섭정규(葉廷珪)78)가 쓴 해록쇄사(海錄碎事)에 “사일(社日)
79)에 귓병을 낫게 하는 치롱술을 마신다.”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에는 이를 보름날이라 한다.
박 ․ 오이 ․ 버섯 등 각종 채소 말린 것과 콩, 호박 및 순무 등 각종 무를 저장해 둔 것을 묵은 나물[陳菜]이라고
하며, 이 날 반드시 이 나물들을 만들어 먹는다. 오이꼭지 ․ 가지껍질 ․ 무잎 등도 모두 버리지 않고 말려 두었다가
삶아서 먹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채소 잎이나 김으로 밥을싸서 먹는데 이것을
복쌈[福裹]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인일(人日)에 일곱 가지 채소로 국을 끓
인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지금 풍속에는 정월 보름날로 옮겨졌으며 또한 시경 「패풍(邶風)」에 “좋은 채소를
모아 저장하는 것은 겨울철에 먹을 채소가 없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80) 라는 뜻과 통하는 것이다.
이 날 오곡밥을 지어먹고 또 서로 나누어 먹는다. 영남 지방의 풍속이 또한 이러하다. 종일 이 오곡밥을 먹는데,
이는 제삿밥을 서로 나누어 먹던 옛 풍습을 답습한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보면 갑자기 상대방을 불러보고 상대방이 대답을하면 곧 “내 더위 사라.”고 하는데,
이것을 더위팔기[賣暑]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더위를 팔면 그 해에는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온갖 방법을 다써서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아 이것 때문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서로 즐겁게 놀게
된다. 내 생각에는 송나라 사람 석호(石湖) 범성대(范成大)의 「매치애(賣癡獃)」라는 시에 “섣달 그믐날 밤이
늦도록 사람들이 자지 않고 …… 나의 어리석고 못생긴 점을 사가라고 남을 부른다.”고 하였고,81) 또 생각건대
육방옹(陸放翁)의 「세수서사시(歲首書事詩)」에 “정원에서 주사위로 놀고 떠들며 새해맞이가 한창인데 춘곤
(春困) 파는 아이들은 새벽같이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그 시의 주석에 “입춘날 새벽에 서로 불러 춘곤을 판다.”
고 한 것을 볼 때, 지금 풍속인 정월 보름날의 더위팔기도 이런 종류인 것 같다.
봄이 올 때마다 봄을 타느라 얼굴빛이 검어지고 야위는 아이는 미리 정월 보름날 남의 집 밥을 백 군데에서 빌어
다가 절구를 타고 개와 마주앉아 개에게 한 술먹이고 자기도 한 술 번갈아 먹으면 다시는 그런 병을 앓지 않는
다고 한다.
이 날은 개에게 밥을 먹이지 않는다. 개에게 밥을 먹이면 파리가 많이 끓어 야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속담에 우스갯소리로 굶는 것을 “개 보름 쇠듯 한다.”고 한다.
과일나무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두면 과일이 많이 열리는데 이것을 과일나무 시집보내기[嫁樹]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명나라 사람 서광계(徐光啓)82)가쓴 농정전서(農政全書)83)에 오얏나무에만 이 방법을 쓴다고
하였고, 또한 유종본(兪宗本)은 종수서(種樹書)84) 「종과(種果)」항목에 대한 세부 설명에서 오얏나무 시집
보내는 시기는 정월 초하루 또는 보름이라고 하였으며, 또 진호(陳淏)의 화력신재(花曆新栽)85)에 오얏나무
를 시집보내는 방법으로 섣달 그믐날 오경(五更)에 장대로 오얏나무 가지를 두들기면 결실이 많다고 하고,
또 석류나무를 시집보내는 방법은 설날에 돌멩이를 갈라진 가지 사이에 얹어두면 열매가 크게 열리며 혹 섣달
그믐날 밤에 해도 좋다고 하였는데, 과일나무 시집보내기는 섣달 그믐밤, 설날, 그리고 정월 보름날 중 아무 때나
좋으며, 지금의 우리 풍속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아이들이 집안식구대로 “○○○ △△生身厄消滅”86)이라는 문귀를 연 등에 써서 연이 날아가는 데까지 띄우다가
해질 무렵에 액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로 연줄을 끊어 날라 가게 놓아버린다. 연을 만드는 방법은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발라 마치 키 모양처럼 만든 다음 오색으로 칠하면 된다. 연 바탕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늬를 넣는데 그
무늬에 따라 바둑판 무늬를 넣은 기반연(棊斑鳶), 이마 부분에 검은 칠을 한 묵액연(墨額鳶), 접시처럼 둥근 모양
의 쟁반연(錚盤鳶), 방패 모양의 방혁연(方革鳶), 고양이 눈을 그린 묘안연(猫眼鳶), 까치날개 모양의 작령연
(鵲翎鳶), 물고기비늘 모양의 어린연(魚鱗鳶), 용꼬리 모양의 용미연(龍尾鳶)등으로 연 이름을 붙인다.
또 얼레[絲車]를 만들어 연줄을 붙들어 맨 다음 공중에 띄워 바람 부는 대로 날리며 노는 것을 연날리기[風錚]
라고 한다. 중국에서 만드는 연의 모양은 기이하고 정교하다. 중국 사람들은 연날리기를 겨울에 시작하여 늦봄
까지 즐긴다. 우리나라에서도 겨울부터 연날리기를 시작하지만 정월 보름 까지만 한다.
연은 직접 만들지만 시장에서 사기도 한다. 고려 말에 최영(崔瑩)장군이 탐라(제주도)를 정벌할 때 연을 이용하
여 사방이 절벽인 섬에 상륙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때 연날리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계속 행하고
있다.
연줄을 만들 때는 실을 겹친 다음 아교를 먹여 흰말의 말총같이 말쑥하게 한다. 혹은 노랗게 치잣물을 들이기도
한다. 연이 정처 없이 이리저리 날다 보면 다른 연과 서로 교차하여 어느 한 쪽 연줄이 끊어지게 되는데 남의 연
줄을 많이 끊을 수록 더 통쾌하게 여긴다. 바람을 타고 윙윙 소리를 내는 연줄이 남의 연줄을 잘 끊는다.
심지어는 남의 연줄을 잘 끊을 수 있고 반대로 자기 것은 잘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금파리 가루나 구리 가
루를 연줄에 바르기도 한다. 그러나 연줄에다 교차시키는 방법이 능숙한 가에 따라 승부가 좌우된다.
서울의 젊은이들 중에는 연싸움 잘하기로 유명한 자들이 있어 가끔 부잣집이나 지체가 높은 집에서 이들을 초대
하여 연 날리는 재주를 구경한다. 매년 정월 보름 한 이틀 동안은 수표교(手標橋)87) 개울 위 아래로 연싸움을
구경 온 사람들이 담을 쌓은 듯이 빽빽이 늘어선다.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끊어진 연줄을 쫓아 하늘만 쳐다보고
물결처럼 분주히 달리다 보면 담장을 뛰어 넘고 지붕 위를 마구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으
며 이를 보고 겁을 내고 놀래는 사람들도 많다. 보름날이 지나면 다시는 연을 날리지 않는다.
댓가지에 풀로 오색 종이를 붙이는데 종이 모양은 모가 지기도 하고 둥글기도하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여 일정
하지 않다. 자루를 그 한 가운데에 꽂아 이를 아이들이 들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거슬러서 달리면 종이가
돌아간다. 이것의 이름을 바람개비[回回兒]라고 한다. 시장에서도 많이 판다.
아이들이 한 가닥 풋솜 실로 거위의 털을 붙들어 매어 바람에 날리는 것을 꼬꼬매[姑姑妹]라고 한다.
이 말은 몽고어로 봉황이란 뜻이다. 연을 띄우다 남은 연줄에 돌멩이를 붙들어 매고 서로 걸어서 세게 잡아당기는
놀이도 한다. 줄이 끊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땅을 파서 구멍을 만들어 놓고 어른이나 아이들이 편을 갈라 동전을 던져 그 구멍을 맞힌 다음 그 중의 하나를 정
하여 큰 동전을 던져 맞춘 사람이 돈을 갖고 이긴다. 만일 잘못 맞추었거나 맞추지 못한 사람은 지는 것이다.
정월 보름날에 이 놀이가 더욱 성하다. 아이들은 혹 사금파리를 동전으로 삼아 이와 같은 놀이를 한다.
淸晨嚼生栗胡桃銀杏皮栢子蔓菁根之屬祝曰一年十二朔無事太平不生癰癤謂之嚼癤或云固齒之方義州俗年少男女
淸晨嚼飴糖謂之齒較飮淸酒一盞不溫令人耳聰謂之牖聾酒按葉廷珪海錄碎事社日飮治聾酒今俗於上元行之畜匏瓜
蔈蕈諸乾物及大豆黃卷蔓菁蘿葍謂之陳菜必於是日作菜食之凡瓜顱茄皮蔓菁葉皆不棄曬乾亦爲烹食謂之不病暑以菜
葉海衣裹飯啗之謂之福裹按荊楚歲時記人日採七種採作羹88) 今俗移於上元而抑亦邶風89)御冬之旨畜也作五穀雜
飯食之亦以相遺嶺南俗亦然終日食之盖襲社飯相饋之古風也早起見人猝然呼之有應者輒曰買吾暑謂之賣暑賣之則
謂無暑病百計呼之故不應以爲謔按范石湖賣癡獃詞除夕更闌人不睡云有癡獃召人買90) 又按陸放翁詩呼盧院落譁
新歲買困兒童起五更註立春未明相呼賣春困今俗上元賣暑卽此類也小兒春病黧瘠者乞上元百家飯騎臼對犬而坐與
犬一匙自噉一匙不復病是日不飼犬飼之則多蠅而瘦故也俗戱餓者比之上元犬果樹歧枝閣石子則果繁謂之嫁樹按徐
光啓農政全書惟李樹用此法又按兪宗本種果疏嫁李法正月一日或十五日又按陳淏花曆新栽嫁李除夕日五更以長竿
打李樹椏則結實多又云嫁石榴元朝以石塊安榴椏枝間則結實大除夜亦可盖嫁果之法除夜元朝上元無不宜焉今俗沿
此兒童列書家口某生身厄消滅字於紙鳶之背任其所飛日暮斷其線而放之鳶制竹骨糊紙徵91)似箕狀五色或棊斑墨
額錚盤方革猫眼鵲翎魚鱗龍尾名色特繁作絲車繫絲而運投之空中隨風戱之謂之風錚中國則製樣奇巧自冬而始爲晩
春之戱東俗亦自冬天市上賣之至于上元諺傳昉自崔瑩伐耽羅之役國俗至今行之合絲淬膠淨如白馬尾或染梔黃飛無
定處縱橫掃盪與他相交以多割爲快凌風而呌者最善割甚者傅以磁末銅屑然在交法之能否都下年少有以善交鳶噪名
者豪貴家往往廷致觀之每上元前一兩日手標橋沿河上下觀交鳶者簇如堵墻羣童候斷搶絲或追敗鳶睨空奔波踰垣越
屋勢莫可遏人多怖駭過上元不復飛鳶糊貼五色紙於竹骨左右方圓大小制樣不一以柄中揷小兒弄之當風而轉號曰回
回兒市多賣之用獨繭絲繫鵞毳小兒順風而颺之號曰姑姑妹蒙古語鳳凰也以放鳶之餘絲兒童繫石相對交絲牽92)引
以戱被斷者負穴地爲窩壯幼分隊擲錢以中窩後擲王大錢中其賭中者收其錢以爲勝誤中與不中者爲負上元日此戱尤
盛小兒輩或用破陶爲錢而擲之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달맞이[迎月]라고 하며 남보다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재수가
있다고 한다. 나아가 달빛으로 한 해의 기후 상태를 예측하는데, 달빛이 붉으면 그 해에 가뭄이 들 징조이고 희면
비가 많이 올 징조라고 한다. 또 달이 뜰 때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뜨는 위치의 높고 낮음 등을 보고 점을 치기
도 한다. 달의 윤곽과 네 방향의 두께를 보고 각각 그 방향에 해당하는 지방의 일년 농사를 점치기도 하는데,
그 둘레가 두터우면 풍년이 들고 엷으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하며 이러한 예측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날은 순라(巡邏)93)를 맡고 있는 군문(軍門)에서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한다.
내 생각에는 당나라 사람 위술(韋述)94)이 쓴 서도잡기(西都雜記)에 “정월 보름날 밤에 의금부에서 황제의
명을받아 보름날 전후로 각 하루씩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였는데 이것을 방야(放夜)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도 이를 본 뜬 것이다.
이 날 밤 서울 장안의 주민들은 신분이나 남녀 구분 없이 모두 몰려 나와 열운가(閱雲街)95)의 종각(鍾閣)에서
저녁 종소리를 들은 후 흩어져 여러 곳의 다리로 가서 왕래하는데 밤이 새도록 행렬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다리밟기[踏橋]라고 한다.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교(橋)와 각(脚)이 우리나라 뜻 새김으로발음이 같기
때문에 속담에 다리[橋]를 밟으면 일 년 내내 다리병[脚疾]이 나지않는다고 한다.
다리밟기는 주로 대․ 소광통교96) 및 수표교에서 가장 성했으며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은 퉁소를 불고 북을 쳐
일대가 굉장히 소란하였다. 옹락영이록(雍洛靈異錄)97)에 “당나라 조정에서는 정월 보름날 밤에 한하여
삼경(三更), 즉 자정 전후의 늦은 밤에도 통행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남녀가 모두 거리에 나와 수레와 말로 거리가
막힐 정도였다.”고 했다. 육계굉(陸啓浤)의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98)에는 “정월 보름날 밤 부녀자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다리로 달려간다.”고 했다.
또 명나라 사람 우혁정(于奕正)이 쓴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99)에는 “정월 보름날 밤에 부녀자들이 서로
이끌고 나와 돌아다니면서 질병을 없앤다고 하는데 이것을 백병쫓기[走百病]라고 한다.”고 했다. 심방(沈榜)의
완서잡기(宛署雜記)100)에는 “정월 16일 밤에 부녀자들이 떼를 지어 놀았으며 대개 다리가 있는 곳에서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리를 건너갔는데, 이것을 ‘액을 건넜다[度厄].’고 한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다리밟기 풍속의 유래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101)에는 정월 보름날 “ 밤 다리밟기는 고려 때
부터 내려오는 풍속인데 매우 성행하여 남녀들이 길거리를 메워 밤새도록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법관이 이를 금지하고 체포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는
다리밟기하는 일이 없어졌다.
삼문(三門)102) 밖의 주민들과 아현(阿峴) 주민들이 떼를 이루어 편을 가른 다음 몽둥이를 들거나 돌을 던지며
고함을 치면서 달려들어 만리동 고개 위에서 접전하는 모양을 하는데, 이것을 편싸움[邊戰]이라고 하며 변두리
로 도망가는 편이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속설에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경기 일대에 풍년이 들고 아현 편이 이기
면 팔도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용산과 마포에 사는 불량소년들 중에는 패를 지어 와서 아현 편을 돕는다.
바야흐로 싸움이 한창 심해지면 고함소리가 땅을 흔들 정도가 되며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는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죽거나 상처가 나도 후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명을
보상하는 법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돌이 무서워 피하고 금지시켜야 하는 관에서 특별히 이를 금하는 조치
를 취하지만 고질적인 악습이 되어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다.
성안의 아이들도 이를 본받아 종각 거리나 지금의 종로 3가에 있던 비파정(琵琶亭)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였고
성 밖에서는 만리현과 우수현(雨水峴)103)에서 주로 편싸움을 하였다. 경상도 안동 지방의 풍속 중에는 매년
정월 16일에 주민들이 읍내 복판을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삼아 좌우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하며 싸워 승부를
결정했다.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풍속에도 정월 보름날 돌팔매질하는 놀이가 있다. 내 생각에는 당서(唐書)
「고려전(高麗傳)」104)에 “매년 정초에 군중들이 패수(浿水) 가로 모여 노는데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며 밀고
밀리기를 두세 번 하다가 그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우리의 돌팔매싸움[石戰] 풍속이 시작되었다.
이 날 온 집안에 밤새도록 기름불을 켜 놓는데 마치 섣달 그믐날 밤 수세(守歲)하는 것과 같다.
장님을 보름날 전부터 불러다가 안택경(安宅經)을 읽히며 밤을 지새운다. 이는 액을 막고 복을 빌기 위한 것
이며 정월 안에 이러한 일을 다 한다.
한 자가 되는 나무를 뜰 가운데다 세워놓고 자정에 그 나무에 비치는 달빛 그림자의 길이로써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 흉년이 들것인가를 점친다. 그 그림자길이가 여덟 치면 바람과 비가 성하고, 일곱 치나 여섯 치면 모두
길하며, 다섯치면 불길하고, 네 치면 수해와 병충해가 있으며, 세 치면 곡식이 여물지 않는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이 법은 중국 전한 때의 사람인 동방삭(東方朔)105)에게서 나온 것이고, 또 생각건대 진호(陳淏)의
화력신재(花曆新栽)에 “정월 보름날밤에 한 길이 되는 장대를 세워놓고 자정에 생긴 달그림자를 보아 6~7
자가 되면 풍년이 들고, 8~9자면 수해가 나며, 3~5자면 반드시 가뭄이 든다.”고 했으므로,
보름날 밤 그림자를 재는 것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밤중에 재를 주발에 담아 지붕 위에 올려놓는데, 이것은 어떠한 곡식 씨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가를 보기 위해
서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그 주발 안에 떨어진 곡식 씨를 보고 그 해 어떤 곡식이 풍작이 될 지를 점친다.
初昏持炬登高謂之迎月以先見月者爲吉仍占候月色赤徵旱白徵水又占月出時形體大小湧浮高低又以輪郭四方厚薄
占四方年事厚則徵豊薄則徵凶無少差忒巡邏軍門弛夜禁按唐韋述西都雜記正月十五夜勅許金吾弛禁前後各一日謂
之放夜106) 國制倣此都人士女傾城而出廳夕鍾於閱雲街鍾閣散至諸橋往來達夜不絶謂之踏橋或云橋方言與脚同釋
音俗說如是則終年無脚疾大小廣通橋及手標橋最盛人海人城簫鼓喧轟按雍洛靈異錄唐朝正月十五夜許三夜夜行士
女無不夜遊車馬塞路107) 又按陸啓浤北京歲華記正月十五夜婦女俱出門走橋于奕正帝京景物略元夕婦女相率宵行
以消疾病曰走百病沈榜宛暑雜記十六夜婦女羣遊凡有橋處三五相率以過謂之度厄此卽東俗踏橋所沿也李睟108)光
芝峯類說云上元踏橋之戱始自前朝在平時甚盛士女騈闐達夜不止法官至於禁捕今俗婦女無復踏橋者矣109) 三門外
及阿峴人成羣分隊或持棒或投石喊聲趕逐爲接戰狀於萬里峴上謂之邊戰以退走邊爲負俗云三門外勝則畿內豊阿峴勝
則諸路豊龍山麻浦惡少結黨救阿峴方其酣鬪呼聲動地纏頭相攻破額折臂見血不止雖至死傷而不悔亦無償命之法人
皆畏石回避掌禁該司另行禁戢而痼習無以全革城內童竪亦效而爲之於鍾街琵琶亭等處城外則萬里峴雨水峴爲邊戰
之所安東俗每年正月十六日府內居民以中溪分爲左右投石相戰以決勝負兩西俗上元亦有石戰之戱按唐書高麗傳每
年初聚戱浿水之上以水石相濺擲馳逐再三而止此爲東俗石戰之始渾舍張油燈達夜如除夕守歲之例邀瞽者自上元前
誦安宅經達夜以度厄祈福限月盡行之立尺木於庭中月色當午以其木影占年穀豊凶影八寸風雨榮七寸六寸俱吉五寸
不吉四寸水蟲行三寸穀不實按此法出於東方朔又按花曆新栽云上元夜竪一丈竿候月午影六七尺稔若八九尺主水三
五尺必旱元宵測影有自來矣夜半鋪灰於盂置之屋上以驗穀種之自隕明朝視之以所隕之種占其豊熟
꼭두새벽에 첫닭이 몇 번 우는 지 세어보아 열 번 이상 울면 그 해 풍년이 든다고 점치는데, 이것은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풍속이다.
황해도와 평안도 풍속에 정월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표주박을 들고 앞다투어 정화수를
길어오는데 이를 용알건지기[撈龍卵]라고 한다.
물을 맨 먼저 긷는 사람이 그 해 농사를 제일 잘 짓는다고 한다. 또 콩 열 두 개에다 각각 열 두 달을 표시하여
수수깡 속에다 넣고 묶어 우물 속에 빠뜨린다. 이것은 달불이[月滋]라고 하는 것으로 이튿날인 보름날 새벽에
그것을 꺼내 보아 콩이 물에 불어있는 정도에 따라 해당하는 달에 홍수 피해가 있을 지 가뭄 피해가 있을 지를
점쳐 보는데 예측이 잘 맞는다고 한다. 또 동네의 홋수만큼의 콩을 골라 그 각 콩에다 호주를 구별할 수 있게
표시를 해놓고 짚으로 묶어 우물에 빠뜨린다. 이것은 집불이[戶滋]라고 하는데 다음날 아침 꺼내어 콩이 불은
상태를 보고 해당하는 콩의 집이 그 해에 풍년이 들어 잘 살 수 있을 지를 점쳐 본다.
충청도 풍속에는 횃불싸움[炬戰]이 있다. 또 편을 둘로 갈라 마주서서 동아줄을 서로 잡아당기게 하여 상대에게
끌려가지 않고 끌어당겨 이긴 편이 그 해 풍년이 든다고 점치는데 이는 곧 옛날의 결하희(絜河戱)110)와 같은
것이다. 경기지방에도 이러한 풍속이 있으며 중들도 이러한 놀이를 한다. 강원도 산간지방 풍속 중에는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일제히 온갖 새 이름을 부르면서 새 쫓는 시늉을 하는데 여기에도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춘천 지방 풍속에 수레싸움[車戰]이 있다. 외바퀴 수레를 만들어 이것을 동리별로 편을 나누어 앞으로 밀고 나가
면서 서로 싸우는 것으로, 승패의 결과로써 해의 일을 점치는 바 패하여 쫓기는 편이 흉하다.
가평 지방 풍속에도 이러한 것이 있다.
영남 지방 풍속에 칡으로 하는 줄다리기[葛戰]가 있다. 칡으로 동아줄을 만드는데 굵기가 크게는 40~50줌 된다.
이것을 편을 갈라 서로 당겨 승부를 결정짓는데 이를 점풍(占豊), 즉 풍년을 점친다고 한다.
안동 지방 풍속에는 동네 여자들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밤에 떼를 지어 성밖으로 나간다.
이들은 물고기를 꿰어놓은 모양으로 줄을 서서 엎드려 가는데, 뒷사람이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서로 끊임없이 잇
대어 나간다. 그리고는 어린 계집아이 한 명을 엎드린 여자들의 등위로 걸어가게 하고 좌우에서는 그 아이를
부축하는데,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그 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마치 다리밟기를 하는 것 같다 .
위에 있는 어린 계집아이가 “이것이 무슨 다리지.” 하고 선창(先唱)하면 엎드려 있는 여자들이 “청계산 놋다리
[銅橋]지.”라고 화답한다. 큰길을 따라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밤이 샌 뒤에야 그친다.
풍기 지방 풍속에 정월 보름날 고을의 수리(首吏)가 검은 소를 거꾸로 타고 거문고를 안고 동헌에 들어가 원님
에게 절을 한 다음 일산(日傘)을 받쳐 들고 나오는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으나 필시 복을 비는 행사
의 하나일 것이다.
曉頭候雞初鳴算其鳴數過十鳴卽占歲豊卽鄕里之俗也兩西俗上元前夜待鷄鳴家家持瓢爭先汲井華水謂之撈龍卵先
汲者占其農功又以大豆十二枚爲十二月標納于稈以綯束之沈於井中謂之月滋晨出驗之以其滋不滋徵其月之水旱而
不忒又以里中戶數用大豆幾枚各爲戶主之標納稈沈井謂之戶滋厥明驗之滋者其戶年內豊足湖西俗有炬戰又以綯索
分隊把持相牽引不被引者爲勝以占豊卽古之絜河戱也畿俗亦然緇徒又有此戱關東峽俗羣童齊唱百鳥之名作驅逐之
狀亦是祈穀之意也春川俗有車戰以獨輪車各里分隊前驅相戰以占年事逐北者爲凶加平俗亦然嶺南俗有葛戰以葛作
索大可四五十把分隊相引以決勝謂之占豊安東俗村女老弱成羣夜出城外魚貫伏行後前相續連亘不絶令一幼女子步
行其上左右扶掖唱喏來往若踏橋狀女兒先唱曰是何橋伏者齊應曰淸溪山銅橋遵大路而或東或西達宵而止豊基俗上
元日邑首吏倒騎黑牛抱琴而入衙庭拜于官擎日傘而出未知何意而必是祈福之事也
기타 정월 행사 月內
관의 인가를 받은 상설점포인 시전(市廛)들은 설날 이후의 휴업을 마치고 좋은날을 택하여 새해 첫 가게문을
여는데 반드시 털짐승과 관련된 날[毛蟲日]에 연다. 그 이유는 짐승들의 솜털같이 장사가 잘 되라는 상징적인
뜻을 취했기 때문이며, 그 중에서도 범날[寅日]을 최고로 여긴다. 성균관인 태학(太學)과 서울 동 ․ 서 ․ 남 ․
북의 사학(四學)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는 유생[居齋儒生]들은 식당에 밥 먹으러 갈 때마다 출석부에 기록하는데
이것을 「식당도기(食堂到記)」라고 한다. 이 출석부를 회수하여 그것에 기록된 수가 규정에 이른 유생들을 대상
으로 임금이 친히 과거를 보인다. 시험과목은 경전을 소리 내어 외우는 강(講)과 주어진 주제에 대해 작문을 하는
제술(製述)로서, 강 시험은 삼경(三經)111) 중 하나를 외우게 하고 제술 시험은 명절 때 여는 과거와 같은 방식
으로 한다. 강과 제술에서 장원을 한 자에게는 모두 급제(及第)를 내리는데 이때의 과거를 춘도기과(春到記科)
라고 하며 가을철에도 이렇게 하는데 이 과거를 추도기과(秋到記科)라고 한다.
경주 지방 풍속에 정월의 첫 쥐날, 첫 용날, 첫 말날, 첫 돼지날 등의 날에는 온갖 일을 꺼리고 삼가며 감히 함부로
움직이거나 만들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날들을 신일(愼日), 즉 조심하는 날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개 그 기원을 보면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488) 정월 보름에 까마귀 ․ 쥐 ․ 용 ․ 말 ․ 돼지 등이 이상한 조짐을
보여 왕이 금갑(琴匣), 즉 거문고를 넣어두는 갑 속에 숨어 궁녀와 간통하는 중을 죽여 화를 면했으므로 나라
백성들이 위의 날들을 신일이라고 한데서 나온 것이다. 속담에 달도(怛忉)라는 말은 슬프고 근심스러워 금하여
꺼린다는 뜻이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달도가(怛忉歌)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16일은 시골 풍속에 대부분 활동하지 아니하고 나무로 만든 물건을 집안에 들이지 않는 등 기일(忌日)로 여긴다.
이것도 아마 경주 지방의 옛날 풍습을 답습한 듯하다.
24일은 해마다 날씨가 흐리고 음산하다. 이는 임진왜란 때 왜병에게 서울이 함락된 이후 명나라 군사가 왜병을
격파하고 그 승세를 타서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들을 압박하자 이들이 놀라 밤중에 도망하면서 불을 지르고
노략질과 살육을하는 등 만행을 감행하여 온 성안의 누구도 화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날이 되면 원한에
찬 기운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8일을 잘못 발음하여 패일(敗日)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팔(八)과 패(敗)의 중국 발음이 ‘배’로 같기 때문이다.
이 날 남자들은 외출하지 않아 민속에서는 기일(忌日)로 여긴다. 내 생각에는 고려시대 풍속에 매월 8일에 부녀
들이 성 안팎으로 나가 놀기 때문에 남자들이 집에 있으면서 나가지 못했던 것인데 이 풍속이 잘못 전해져 지금은
남자들이 나가서는 안 되는 날로 여기게 된 것 같다.
상현일(上弦日)과 하현일(下弦日)을 조금[潮減日]이라고 한다. 매달 인가에서 꺼리거나 궂은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 날이 지나고 나서 서로 내왕하며 꺼리는 일이 있는 사람과도 이 날을 지나서야 만난다.
5일 ․ 14일 ․ 23일을 삼패일(三敗日)이라고 한다. 매달 이 날에는 모든 일을 꺼려서 감히 행동하지 않고 밖에 나
가는 것도 안 되는 것으로 안다. 이는 고려시대 이래로 풍속에 이 세 날을 임금이 사용하는 날로 삼았으므로 신하
와 백성들이 이 날을 사용하지 않고 기일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므로 본래가 패일은 아닌 것이다.
市廛擇日開市必用毛蟲日取其繁氄而寅日爲最收太學四學居齋儒生食堂到記親試講製講則三經中一經製則如節製
之例講製居首並賜第曰春到記科秋節又行之曰秋到記科慶州俗正月上子上辰上午上亥等日忌愼百事不敢動作以爲
愼日盖新羅炤智王十年正月十五日有烏鼠龍馬猪之異王免琴匣之禍國人以子辰午亥日爲愼日俚言怛忉言悲愁而禁
忌也金宗直有怛忉歌見輿地勝覽112) 十六日鄕俗多不動作不納木物爲忌日似襲慶州之遺風也二十四日每年陰曀盖
倭亂時倭兵陷京城天兵乘勝進逼倭賊驚遁半夜焚蕩盡屠一城百無一脫乃是日而怨氣使然也八日謬稱敗日八與敗華
音同也是日男子不出門爲俗忌日按高麗俗以每月八日婦女出遊城內外故男子在家不出此風訛傳今俗作不宜出行日
上弦下弦日稱潮減日每月人家有拘忌事必過是日始相通涉人物之有所忌者亦過是日而接之初五十四二十三日稱三
敗日每月忌百事不敢動作不宜出行盖自麗俗以此三日卽君上所用之日故臣民不用爲忌日云本非敗日也
2월
초하루 朔日
임금이 재상들과 옆에서 모시는 시종(侍從)들에게 중화척(中和尺)이라고 부르는 자를 내리는데, 이 자는 점이
박힌 대나무[斑竹]나 향나무[赤木]로 만든다. 이 제도는 정조 20년(1796)에 세운 것으로 중국 당나라 때의 옛
중화절(中和節) 행사를 본뜬 것이다. 내 생각에는 당나라 이필(李泌)113)이 올린 정월 상소에“그믐날을 명절로
삼은 것은 옳지 않으니 청컨대 2월 초하루를 중화절로 삼아 백관들로 하여금 농사를 권장하는 글이나 책을
올리게 함으로써 힘써야 할 근본이 농사임을 나타내게 하십시오.” 하였는데, 자를 내리는 것도 이런 뜻에서다.
정월 보름날 세워 두었던 볏가릿대[禾竿]에서 벼이삭을 떨어서 흰떡을 만드는데, 크기는 큰 것은 손바닥만
하게, 작은 것은 계란만 하게하며 모두 반달 옥 같은 모양을 낸다. 콩을 불려 만든 떡소[饀]를 떡 안에 넣고 그것
들 사이에 솔잎을 겹겹이 켜를 지어 넣어 시루에 찐다. 푹 익으면 꺼내어 물로 씻은 다음 참기름을바른다.
이것을 송편[松餠]이라고 한다. 이 송편을 노비들에게 나이 수대로 먹인다.
그래서 이 날을 속칭 노비날[奴婢日]이라고 한다. 농사일이 이때114)부터 시작되므로 이렇게 노비들을 먹이는
것이라고 한다. 떡집에서는 팥 ․ 검은 콩 ․ 푸른콩을 떡소로 넣거나 혹은 거기에 꿀을 버무려 만들기도 하고,
혹은 찐 대추나 삶은 미나리를 떡소로 넣어 떡을 만들기도 한다. 이 달로부터 이 떡을 시절음식으로 친다.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종이를 잘라 ‘향락각시속거천리(香娘閣氏速去千里)’115)라고 여덟 자를 써서 서까래
끝에 붙인다. 각씨라는 말은 우리말에 여자라는 뜻이며 ‘향랑각시’라고 하는 것은 노래기라는 벌레를 예쁘게
불러주는 것이나 실은 노래기가 싫어서 물리치려는 말이다.
영남지방 풍속에 집집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신을 ‘영등신(靈登神)’이라고 한다. 신이 내렸다고 하면서
무당이 동네 거리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은 다투어가며 불러들여 즐겁게 해 준다. 그리고는 이 달 초하루부터
사람을 꺼려 만나지 않는데 이것이 보름 혹은 20일까지 간다.
제주도 풍속에 2월 초하룻날 제주도 북쪽 해안지대인 귀덕(歸德), 김녕(金寧)등 지역에서 나무장대 12개를 세워
놓고 신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낸다. 동쪽 해안의 애월(涯月)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떼나무 중에서 말머리 모양을
골라 비단으로 장식하여 말놀이[躍馬戱]를 하면서 신을 즐겁게 해주다가 보름날에 이르러 그만 두는데 이것을
‘연등(然燈)’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頒中和尺于宰執侍從尺用斑竹赤木制之健陵丙辰盖修唐中和節故事也按李泌正月奏曰以晦爲節非也請以二月朔爲
中和節令百官進農書以示務本頒尺用此意也卸下上元禾竿穀作白餠大者如掌小者如卵皆作半璧樣蒸豆爲饀隔鋪松
葉於甑內蒸熟而出洗以水塗以香油名曰松餠饋奴婢如齒數俗稱是日爲奴婢日東116)作伊始故饗此屬云賣餠家用赤
豆黑豆복豆爲饀或和蜜包之或以蒸棗熟芹爲饀自是月以爲時食灑掃堂宇剪紙書香娘閣氏速去千里八字貼於椽上閣
氏者東語女子也香娘閣氏盖指馬陸也惡而辟之之辭也嶺南俗家家祭神名曰靈登神降于巫出遊村閭人爭迎之而樂之
自是月朔日忌人物不接之至十五日或二十日濟州俗二月朔日歸德金寧等地立木竿十二迎神祭之涯月居人得槎形如
馬頭者飾117)以彩帛作躍馬戱以娛神至望日乃止謂之然燈見輿地勝覽118)
기타 2월 행사 月內
삼성(參星)은 하늘 서쪽에 떠있는 별 세 개를 말하는데 초저녁에 이것이 달 앞에서 고삐를 끄는 것 같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해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최식(崔寔)이 쓴 농가언(農家諺)119)에 “2월 저녁은 곧 삼성 저녁(二月昏參星夕)”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인 것 같다.120)
태조의 묘에 얼음을 바친다. 내 생각에는 예기(禮記)121) 「월령(月令)」에 “2월에 천자가 빙고를 열고 먼저
종묘에 얼음을 바친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도 역시 그러하다.
이 달 20일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들 징조이며 날이 흐려도 좋다고 한다. 제주도 풍속에 이 달에는 배타는 것을
금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初昏見參星在月前如牽轡遠則徵豊按崔寔農家諺二月昏參星夕是也薦氷于太廟按禮記月令仲春之月天子乃開氷先
薦寢廟122) 國制亦然二十日雨占豊徵123)陰亦吉濟州俗是月禁乘船見輿地勝覽124)
3월
삼짇날 三日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갈라 붙여 둥근 떡을 만든 다음 참기름에 지진 것을 화전(花煎)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옛날의 지짐이 떡[熬餠], 또는 기름에 지진 중국 음식의 하나인 한구(寒具) 같은 것이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 물에 띄우고 꿀을 넣고 잣을 곁들인 것을 화면(花麵)
이라고 한다. 혹은 진달래꽃을 녹두가루와 섞어 만들기도 한다. 또 녹두로 국수를 만들기도 하고 이것을 붉게
물들인 다음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모두 시절음식으로 제사에 쓴다.
충청도 진천(鎭川) 지방 풍속에 3월 3일부터 4월 8일까지 여자들이 무당을 데리고 우담(牛潭)이라는 연못가에
있는 동(東) ․ 서(西) 용왕당(龍王堂)과 삼신당(三神堂)에 가서 아들을 점지해 해 달라고 비는데 그 행렬이 끊어
지지 않고 사방의 여인들이 모두 와서 기도하므로 마치 장을 이룬 것 같다. 해마다 이러한 일이 늘 벌어진다.
採杜鵑花拌糯米粉作圓餻以香油煮之名曰花煎卽古之熬餠寒具也又拌菉豆粉熟而細切澆五味子水和蜜調海松子名
曰花麵或二杜鵑花拌菉豆屑爲之又造菉豆麵或染紅色澆蜜水名曰水麵幷以時食供祀鎭川俗自三月三日至四月八日
女人率巫祈子於牛潭上東西龍王堂及三神堂絡續不絶四方女人亦皆來禱而觀者如市歲以爲常
청명 淸明
이 날 임금은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서 불을 일으켜 각 관사에 하사한다. 이는 곧 주례(周禮)125)에 하관
(夏官)이 했다는 출화(出火)나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사화(賜火) 등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도다.
농가에서는 이 날부터 봄갈이[春耕]를 시작한다.
取楡柳之火頒賜各司卽周官出火唐宋賜火之遺制也農家始春耕
한식 寒食
서울 풍속에 이 날 조상의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설날 ․ 한식 ․ 단오 ․ 추석의 네 명절에 술 ․ 과일 ․ 포 ․ 젓 ․
떡 ․ 면 ․ 탕 ․ 지짐이 등의 음식으로 지내는 제사를 절사(節祀)라고 하는데, 선대로부터의 전통과 집안 형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식과 추석에 가장 성하다. 이 때는 사방 교외에 남녀들의 행렬이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을 정도다. 내 생각에는 중국 당나라 사람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祠享儀)126)에 “옛날에는 산소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었는데 공자께서 절기를 따라 묘를 보고 망제(望祭)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나오므로
묘제(墓祭)는 대체로 이로부터 시작된 듯하다. 또 생각건대 당나라 현종(玄宗, 재위기간 : 713~741) 때에 칙명을
내려 한식날 성묘하는 것을 허락했고 그 전 시대인 오대(五代) 때 후주(後周)에서는 한식날 야외에서 제사를
지내고 지전(紙錢)을 살랐다고 한 것을 보면 한식날 묘제 지내는 풍속은 당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들은 이 날을 ‘냉절(冷節)’이라고 불렀고 혹은 이 날 불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음식을
미리 익힌다는 뜻으로 ‘숙식(熟食)’이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그 당시 개자추(介子推)127)가 이 날 불에 타서 죽은
것을 가엾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여 불 사용을 금하던 유속(遺俗)인 것이다. 지금 한식 이 설, 단오 및 추석과 함께
네 명절로 된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이다. 관가나 궁에서는 여기에 동지를 더하여 다섯 명절로 제향을 거행한다.
농가에서는 이 날을 기해 밭에 씨를 뿌린다.
都俗上墓澆奠用正朝寒食端午秋夕四名節以酒果脯醢餠麵臛炙之羞祭之曰節祀有從先稱家之異而寒食秋夕最盛四
郊士女綿絡不絶按唐鄭正則祠享儀云古者無墓祭之文孔子許望墓以時祭祀墓祭盖出於此又按唐開元勅許寒食上墓
五代後周寒食野祭而焚紙錢寒食墓祭自唐而始也齊人呼爲冷節又曰熟食盖以子推焚死傷憐禁128)火之遺俗也今之
與正朝端午秋夕爲四節祀卽東俗也朝家則幷冬至爲五節享農家以是日下田圃種子
기타 3월 행사 月內
녹두묵[菉豆泡]을 만들어 잘게 썰고 여기에 돼지고기, 미나리, 김 등을 넣고 초장을 쳐 양념하면 매우 시원한
것이 늦은 봄날 먹을 만한데 이것을 탕평채(蕩平菜)라고 한다. 계란을 깨서 끓는 물에 넣어 반숙이 되게 한
다음 초장을 친 것을 수란(水卵)이라고 한다. 황조개[黃苧蛤]와 조기[石首魚]로 국을 끓여서 이것을 먹기도
한다. 밴댕이[蘇魚]는 경기도 안산 지역의 안쪽바다에서 나고 웅어[鮆魚]는 속명으로는 위어(葦魚)라고 하는데
한강 하류인 고양군 행주에서 잡힌다. 늦은 봄이 되면 대궐 음식을 준비하는 사옹원(司饔院)의 관리들은 그물을
던져 이것을 잡아다가 임금에게 진상하며 생선장수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횟감 사라고 소리치며 이것을
판다. 복사꽃이 떨어지기 전에 복어[河豚]에 미나리, 기름, 간장을 넣어 국을 끓이면 그 맛이 매우 좋은데 복어
중에는 노호(露湖)라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 제일 먼저 시장에 들어온다. 복어의 독을 꺼리는 사람은 도미[禿尾
魚]로 대신 끓이는데 이 도미 역시 시절생선으로서 가품(佳品)이다. 마[薯蕷]를 캐다가 쪄서 먹기도 하고 혹은
이것에 꿀을 발라 썰어 먹기도 한다. 술집에서는 과하주(過夏酒)를 빚어 판다. 술 이름으로는 소국주(小麴酒),
두견주(杜鵑酒), 도화주(桃花酒), 송순주(松荀酒) 등이 있는데 모두 봄에 빚는 좋은술들이다.
소주(燒酒)로는 서울 마포 공덕동에서 대흥동 사이에 있는 독막[甕幕]129)주변에서 만드는 삼해주(三亥酒)130)
가 최고 좋은데 수천, 수백 독을 빚어 낸다. 평안도 지방에서 쳐주는 술로는 감홍로(甘紅露)와 벽향주(碧香酒)가
있고, 황해도 지방에서는 이강고(梨薑膏), 호남 지방에서는 죽력고(竹瀝膏)와 계당주(桂當酒), 충청도 지방에는
노산춘(魯山春) 등을 각각 가장 좋은 술로 여기며 이것 역시 선물용으로 서울에 올라온다.
떡집에서는 멥쌀가루를 반죽하여 방울 모양의 희고 작은 떡 조각을 만들어 그 속에 콩으로 소를 넣고 머리 쪽을
오므린 다음 오색 물감을 들여 다섯 개를 구슬을 꿴 것처럼 붙여 놓는다. 혹은 청백색으로 반원형의 떡을 만들
어서 작은 것은 다섯 개를, 큰 것은 두세 개를 이어 붙인다. 이것들을 총칭하여 산병(散餠)이라고 하고 속칭 꼽장
떡이라고 한다. 또 오색을 넣어 둥근 떡을 만들기도 하고 소나무 껍질과 쑥을 섞어 둥근 떡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들을 고리떡[環餠]이라고 하고 이 중 큰 것을 말굽떡[馬蹄餠]이라고한다. 찹쌀에 씨를 뺀 대추를 섞어 찐
것을 시루떡[甑餠]이라고 한다. 이상의 것들은 모두 봄철에 먹는 시절음식이다. 내 생각에는 여희철(呂希哲)의
세시잡기에 “두 사일(兩社日, 즉 춘사일春社日과 추사일秋社日)에 떡 먹기를 좋아하며 떡에 대추를 꼭 넣는
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우리나라 풍속도 그러하다. 서울 남산 아래에서는 술을 잘 빚고 북부에서는 맛좋은 떡을
많이 만들기 때문에 서울속담에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생겼다.
네 번의 오일(午日)을 이용하여 술을 거듭 빚으면 봄이 지나야 익게 되는데 해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술을 사마주(四馬酒)라고 한다. 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131)이 남궁적(南宮績)이 준 사마주를 마시고
지은 「음남궁적사마주(飮南宮績四馬酒)」라는 시에 “그대 집의 이름난 술은 해를 지나도 변하지 않으니 응당
옥해주(玉薤酒)132) 빚는 법을 따랐나보다.”라는 구절이 있다.
농가에서는 이 달부터 뽕을 따다가 누에를 친다. 채소를 파는 남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햇배추를 지고 다니면서
채소 사라고 외치는데 이들을 무장수[복根商]라고 한다. 이들은 순무[蔓菁]가 새로 나오면 역시 소리치며 판다.
이것도 시절음식이 된다.
造菉豆泡縷切和猪肉芹苗海衣用醋醬衝之極凉春晩可食名曰蕩平菜入鷄子於滾湯半熟和醋醬名曰水卵以黃苧蛤石
首魚作湯食之蘇魚産安山內洋鮆魚俗名葦魚産漢江下流高陽幸洲春末司饔院官網捕進供漁商遍街呼賣以爲膾材桃
花未落以河豚和복芹油醬爲羹味甚珍米産於露湖者最先入市憚其毒者代以禿尾魚蒸禿尾亦時鮮之佳品採薯蕷蒸食
或和蜜作片食之賣酒家造過夏酒以賣酒名小麴杜鵑桃花松荀皆春釀之佳者燒酒則孔德甕幕之間三亥酒甕釀千百最
有名稱關西甘紅露碧香酒海西梨薑膏湖南竹瀝膏桂當酒湖西魯山春皆佳品亦有餉到者賣餠家造粳米白小餠如鈴形
入豆饀捻頭粘五色於鈴上連五枚如聯珠或造복白半圓餠小者連五枚大者連二三枚摠名曰饊餠又造五色圓餠松皮복
蒿圓餠名曰環餠大者稱馬蹄餠又以糯米和棗肉造甑餠皆春節時食也按歲時雜記二社尙食糕以棗爲之133) 今俗亦然
南山下善釀酒北部多佳餠都俗稱南酒北餠用四午日重釀酒經春乃熟周歲不敗名曰四馬酒李東岳安訥飮南宮績四馬
酒詩曰君家名酒貯經年釀法應從玉薤傳人家伐桑養蠶賣菜漢負菘根新芽成羣呌賣謂之복根商蔓菁新出又呌賣以爲時
食
서울 풍속에 산언덕 물굽이를 찾아 놀러 다니는 것을 화류(花柳)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곧 삼짇날 답청(踏복),
즉 처음 돋은 풀을 밟는다는 풍속에서 유래한것이다. 필운대(弼雲臺)134)의 살구꽃, 북둔(北屯)135)의 복사꽃,
흥인문 밖의 버들 등이 경치가 가장 좋은 곳으로 화류놀이꾼들이 주로 여기에 모인다. 서울과 지방의 무사들 및
동리사람들이 모여 과녁을 세우고 편을 나누어 활쏘기대회를 열어 승부를 겨룬다. 그런 다음 술을 마시며 즐기
는데 가을철에도 똑같이 한다.
어린 처녀들은 풀을 뜯어 한 줌 되면 이것을 가지고 쪽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그것에 붙인 다음 붉은 치마를 입히
는데 이것을 각시(閣氏)라고 한다. 이들은 이부자리, 베개, 머리병풍 등을 차려놓고 ‘각시놀음’을 한다.
아이들이 버들가지를 꺾어서 피리를 만들어 분다. 그 피리를 버들피리[柳笙]라고 한다.
강원도 강릉 지방 풍속에 노인을 공경하는 뜻으로 매년 좋은 절기를 잡아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명승지
로 모셔다가 위로한다. 이를 ‘청춘경로회’라고 한다. 비록 종이나 하인 같은 천한 신분의 사람이라도 일흔이 넘으
면 모두 모임에 나오도록 허락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경상도 경주 지방 풍속에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 따라 돌아다니며 노는 곳을 사절유택(四節遊宅)이라고 하는데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양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전라도 남원 지방 풍속에는 고을 사람들이 봄철을 맞이하여 부근 지역인 진안의 용담(龍潭)이나 광한루 남쪽의
율림(栗林)에 모여 술을 마시며 활쏘기대회하는 것을 예(禮)로 삼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전라도 익산 지방의 용안(龍安) 지역 풍속에 읍내 사람들은 봄철을 맞이하여 절차를 갖추어 향음주례(鄕飮酒禮)
136)를 행한다. 나이가 80~90세 된 분을 한자리에 , 60~70세 된 분을 다른 한 자리에, 50세 이하 된 자들을 또
한 자리에 나 이대로 앉힌 다음 한 사람을 시켜 다음과 같은 맹세문[誓文]을 낭독하게 한다.
부모에게 불효한 자는 내쫓으며
형제간에 화목하지 않은 자도 내쫓으며
친구에게 신의가 없는 자도 내쫓으며
나라 정책을 비방하는 자를 내쫓으며
수령을 훼방하는 자를 물리친다.
첫째, 덕행으로 서로 권면하고
둘째, 잘못을 서로 바로 잡으며
셋째, 예속을 서로 도와 이루고
넷째, 환란에 서로 구제할 것인 바,
무릇 같은 고을 사람들은 각각 효성과 우애와 충성과 신의를 극진히 하여 모두
후덕한 풍속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이렇게 맹세문 낭독이 끝나면 모두 두 번씩 절을 한 다음 술을 마시며 활쏘기 의식을 행한다. 가을철에도 이와
같이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제주도 풍속에는 매년 봄철에 남녀가 무리지어 광양당(廣壤堂)과 차귀당(遮歸堂)에 모여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또 그 지방에는 뱀, 독사,지네 등이 많은데 만일 회색 뱀을 보게 되면 그것을 차귀당의
신으로 여겨 죽이지 못하게 한다. 가을철에도 이와 같이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충청도 청안(淸安)137) 지방 풍속에는 3월 초가 되면 그 고을의 우두머리 아전이 읍내 사람들을 이끌고 동면
(東面)에 있는 장압산(長鴨山) 위의 큰 나무로부터 국사신(國師神) 부부를 맞이하여 읍내로 들어와서 무당들을
시켜 술과 밥을 갖추어 놓고 징과 북을 요란하게 치면서 동헌과 각 청사에서 제사를 행한다. 그런 후 20여 일
후에 그 신을 본래의 나무로 도로 돌려보내는데 이런 행사를 2년만에 한 번씩 행한다.
都俗出遊於山阿水曲謂之花柳卽上巳踏복之遺俗也弼雲臺杏花北屯桃花興仁門外楊柳其最勝處多集于此京外武士
及里民張侯分耦爲射會以賭勝負飮酒爲樂秋節亦然女娘採取복草盈把者作髻削木而加之着以紅裳謂之閣氏設褥席
枕屛以爲戱兒童折柳枝作篥以吹之謂之柳笙江陵俗敬老每値良辰請年七十以上會于勝地以慰之名曰복春敬老會雖
僕隸之賤登七旬者皆許赴會見輿地勝覽138) 慶州俗自春以四時遊賞之地爲四節遊宅春東野宅夏谷良宅秋仇知宅冬
加伊宅見輿地勝覽139) 南原俗州人當春會于龍潭若栗林飮酒射侯以爲禮見輿地勝覽140) 龍安俗邑人當春節辦具
爲鄕飮酒禮年八九十者一位六七十者一位五十以下一位序以齒令人讀誓文曰父母不孝者黜兄弟不和者黜朋友不信
者黜謗訕朝政者黜非毁守令者黜一曰德業相勸二曰過失相規三曰禮俗相交141) 四曰患難相恤凡同鄕之人各盡孝友
忠信咸歸于厚讀訖俱再拜以行飮射之禮秋節又如之見輿地勝覽142) 濟州俗每於春節男女羣聚廣壤堂遮歸堂具酒肉
祭神又地多蛇虺蜈蚣若見灰色蛇則以爲遮歸之神禁不殺秋亦如之見輿地勝覽143) 淸安俗三月初縣首吏率邑人迎國
師神夫婦於東面長鴨山上大樹入于邑內用巫覡具酒食錚鼓喧轟行神祀於縣衙及各廳至卄餘日後還其神於樹而間二
年行之
4월
초파일 八日
8일은 곧 욕불일(浴佛日)144)로 석가가 탄생한 날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이 날 등불을 켜기 때문에 등석(燈夕)
이라고 한다. 수 일 전부터 각 가정에서는 각기 등장대[燈竿]를 세우는데, 맨 위에 꿩장목을 세우고 색을 넣은
비단으로 만든 깃발을 매단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는 장대 꼭대기에 대개 오래된 솔가지를 맨다.
각 집에서는 자녀 숫자대로 등을 달아 주위를 밝히면 길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9일이 되어서야 그만둔다.
사치를 부리는 집에서는 큰 대나무 수십개를 묶어 세우기도 하고 한강까지 가서 말짐으로 돛대를 실어다가
시렁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혹은 해와 달 모양을 한 일월권(日月圈)을 장대에 꽂아 바람을 받아 현란하게 돌아
가게 하며 혹은 빙빙 도는 전등(轉燈)을 매달아 마치 탄알이 날라 가는 것처럼 불빛이 왔다갔다 하게 한다.
혹은 화약을 종이에 싸서 새끼줄에 매어 승기전(乘機箭)145)처럼 쏘아 올리는데, 이렇게 하면 불줄기가 마치
비처럼 흩어져 내린다. 혹은 장대 끝에 수십 줌 되는 긴 종이쪽들을 매달아 용 모양으로 펄럭이게 하며, 혹은
광주리를 매달기도 하고, 혹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바지 저고리를 입혀 새끼줄을 매어 놀리기도 한다.
줄지어 늘어선 시렁들은 높게 보이도록 각각 새끼줄 수십 가닥을 벌려 끌어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만드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시렁이 낮고 작으면 사람들이 모두 빈정거리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고려사(高麗史)
에 “왕궁이 있는 서울(송도)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정월 보름에 이틀 밤씩 등불을 켜는데 최이(崔怡, ? ~
1249)는 4월 8일에 등불을 켰다.”고 하였는데, 정월 보름의 연등행사는 원래 중국의 제도이며 고려 때까지 있
었던 이 풍속도 이제는 없어졌다. 또 생각건대 고려사에 “우리나라 풍속은 4월 8일이 석가탄신일이라고
하여 집집마다 등불을 켠다. 이보다 수십일 전부터 아이들은 종이를 잘라 깃발처럼 장대에 매달아 서울 거리를
외치고 돌아다니면서 쌀과 포목을 얻어 그날 비용으로 쓰는데 이를 호기(呼旗)라고 한다.” 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에 등 장대에 깃발을 다는 것은 과거 호기의 유습이며 이것을 반드시 4월 8일에 행하는 것은 최이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등의 이름에는 수박등․ 마늘등 ․ 연꽃등 ․ 칠성등 ․ 오행등 ․ 일월등 ․ 공등[毬燈] ․ 배등[船燈] ․ 종등 ․북등[鼓燈] ․
누각등 ․ 난간등 ․ 화분등 ․ 가마등 ․ 머루등 ․ 병등 ․ 항아리등 ․ 방울등 ․ 알등 ․ 용등 ․ 봉등 ․ 학등 ․ 잉어등 ․
거북등 ․ 자라등과 수복(壽福) ․ 태평(太平) ․ 만세(萬歲) ․ 남산(南山) 등의 글자를 넣은 등이 있는데 모두 그
모양을 종이로 만들어 등에 바른다. 혹은 붉고 푸른 갑사에 운모(雲母)를 박아 날아가는 신선이나 꽃, 또는 새를
장식하며 등의 면과 모마다 삼색 종이를 길게 오려붙여 바람에 너울너울 나부끼게 한다.
북등[鼓燈]에는 주로 말 탄 장군이나 삼국지(三國志)의 내용을 그렸다. 또 그림자등[影燈]이 있는데 안에다
회전하는기구[鏇機]를 장치해 놓고 말을 타고 매와 개를 데리고 호랑이 ․ 이리 ․ 사슴 ․노루 ․ 꿩 ․ 토끼 등을 사냥
하는 모습을 종이에 그려 오린 다음 그 기구에 붙인다. 그러면 바람결에 그 기구가 돌면서 바깥으로는 이것들의
그림자가 비쳐 나오게된다. 내 생각에는 중국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여오군채서(與吳君采書)」146)에“영등을
아직껏 보지 못했으나 그것을 보는 것보다는 삼국지를 한 번 읽는 것이어떠한가.” 하였으니 이것은 곧 삼국지
의 고사로 그림자를 만들었음을 지적한것이다.
또 생각건대 중국 송나라 시인 석호(石湖) 범성대(范成大)의 「상원기오중절배해체(上元紀吳中節俳諧體)」시에
“그림자가 돌아가니 말을 타고 종횡으로 달린다.”라고 하고 그 주석에 이것을 마기등(馬騎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송나라 때부터 이런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시내 저자거리에서 파는 등은 천태만상으로 오색찬란하고 값이 비싸
며 기이함을 자랑한다. 종로 거리에는 이 등불을 보려고 구경꾼들이 담장처럼 둘러선다. 또 난새[鸞鳥]147) ․ 학 ․
사자 ․ 호랑이 ․ 거북 ․ 사슴 ․ 잉어 ․ 자라 등에 신선들이 올라 탄 형상을 인형으로 만들어 팔면 아이들은 다투어
구입하여 장난감으로 가지고 논다. 영등 행사가 있는 날 저녁에는으레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때문에 온 장안
의 남녀들은 초저녁부터 남산과 북악의 산기슭에 올라가 등을 달아 놓은 시내 광경을 구경한다.
혹 어떤 이들은 퉁소나 거문고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논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은 사람으로 바다를 이루고
불야성이 된다. 그렇게 떠들기를 밤새도록 한다. 장안 밖의 시골 노파들까지도 서로 이끌고 와서는 반드시 잠두봉
(蠶頭峯)148)에 올라가 이 장관을 구경하고야 만다. 아이들은 각각 등 대 밑에 석남(石楠)149) 잎을 넣은 시루떡
과 삶은 검정콩, 그리고 삶은 미나리 등의 음식을 차려 놓는데, 이것은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소한 음식으로 손님
을 맞이해 즐기는 뜻이라고 한다. 또 물동이에다 바가지를 엎어놓고 빗자루로 두드리면서 진솔한 소리를 내는데,
이것을 물장구놀이[水缶戱]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 송나라 때 장원(張遠)150)이 쓴 오지(隩志)에 “서울 풍속에 염불하는 사람들은 염불할 때
마다 콩으로 그 횟수를 헤아리며, 4월 8일 석가탄신일에 이르러 그 콩을 볶아 소금을 약간 쳐서 길가는 사람을
맞이해 다 먹기를 권하여 인연을 맺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 풍속에 콩을 볶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또 생각건대 제경경물략에 “정월보름밤에 아이들이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북을 치며 노는 것
을 태평고(太平鼓)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에 물장구[水缶]는 태평고의 뜻과 유사한바가 있고 부처의
탄일에 연등 행사를 하므로 결국 정월 보름에 하던 것을 4월 8일로 옮겨 하는 것이다.
八日卽浴佛日東俗以是日燃燈謂之燈夕前數日人家各竪燈竿頭建雉尾色帛爲旗小戶則竿頭多結老松計家內子女人
口懸燈以明亮爲吉至九日乃止侈者縛大竹累十又駄致五江檣桅而成棚或揷日月圈隨風眩轉或懸轉燈往來如走丸或
紙包火藥而繫於索衝上如乘機箭火脚散下如雨或繫紙片幾十把飄揚如龍形或懸筐9或作傀儡被以衣裳繫索而弄之
列㕓之棚務勝競高張數十索邪許引起矮小者人皆嗤之按高麗史王宮國都以及鄕邑正月望燃燈二夜崔怡於四月八日
燃燈上元燃燈本是中國之制而麗俗今已廢矣又按高麗史國俗以四月八日是釋迦生日家家燃燈前期數旬羣童剪紙注
竿爲旗周呼城中街里求米布爲其費謂之呼旗今俗燈竿揭旗者呼旗之遺也必以八日肇自崔怡也燈名西苽蒜子蓮花七
星五行日月毬船鍾鼓樓閣欄干花盆轎子山樏甁缸鈴卵龍鳳鶴鯉龜鼈壽福太平萬歲南山等字燈皆象形紙塗或用紅碧
紗嵌雲母飾151)飛仙花鳥面面稜稜皆粘三色卷紙片紙旖旎聯翩鼓燈多畵將軍騎馬三國故事又有影燈裏設旋機剪紙
作獵騎鷹犬虎狼鹿獐雉兎狀傅於機爲風炎所轉外看其影按東坡與吳君采書云影燈未嘗見與其見此何如一閱三國志
耶此必以三國故事作影也又按范石湖上元吳下節物俳體詩轉影騎縱橫註云馬騎燈盖自宋時已有此制也市燈所賣千
形百狀五彩絢爛重價衒奇鍾街上觀者如堵又造鸞鶴獅虎龜鹿鯉鼈仙官仙女跨騎之狀羣童競買而弄玩至燃燈之夕例
弛夜禁士女傾城初昏遍登南北麓觀懸燈或携管絃沿街而遊人海火城達夜喧闐鄕外村婆提挈爭來必登蠶頭觀之兒童
各於燈竿下設石楠葉甑餠蒸黑豆烹芹菜云是佛辰茹素廷客而樂又泛瓢於盆水用帚柄叩而爲眞率之音謂之水缶戱按
張遠隩志京師俗念佛號者輒以豆識其數至四月八日佛誕生之辰煮豆徵152)撤以鹽邀人于路請食之以爲結緣夜今俗
煮豆盖昉於此又按帝京景物略元夕童子撾鼓旁夕向曉曰太平鼓今俗水缶似是太平鼓之意而以佛日爲燈夕故移用之
也
기타 4월 행사 月內
떡집에서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납작하게 뗀 조각들을 여러 번 발효시켜 방울모양으로 만든 다음 술을 넣어
찌고 삶은 콩에 꿀을 버무려 소를 만들어 그 안에넣는다 . 그리고 그 위에 씨 바른 대추를 붙여 찌면 시루떡이
된다. 푸른 것과 흰것 두 가지가 있는데, 푸른 것은 당귀(當歸) 잎 가루를 섞은 것이다.
내 생각에는 예원자황(藝苑雌黃)153)이란 중국 책에 “한식날 밀가루로 시루떡을 만들어 그 위에 대추를
붙인 것을 대추떡[棗餻]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풍속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는 방울같이 부풀어 오르지 않게 쪄서 먹기도 하고 누런 장미꽃을 따다가 떡을 만들어 기름에 지져 먹기도
하는데 마치 3월 3일 삼짇날 해먹는 화전(花煎)과 같다. 생선을 가늘게 썰어 익힐 때 고미나물 ․ 국화잎 ․움파 ․
석이버섯 ․ 익힌 전복 ․ 계란 등을 섞은 것을 어채(魚菜)라고 한다. 또 생선을 두껍고 넓게 썰어 조각을 만들어
고기 소를 넣고 익힌 것을 생선만두라고하여 초장에 찍어 먹으며, 데친 미나리에 파를 넣고 회를 만들어 후추
가루를 탄 간장으로 양념하여 술안주로 먹는데 이것들이 모두 첫여름의 시절음식이다.
처녀들과 어린아이들은 모두 봉숭아를 따다가 백반을 섞어 짓찧어 손톱을 물들인다.
경상도 웅천 지방 풍속에 그 지역 사람들이 매년 4월에 웅산신당(熊山神堂)으로부터 신을 영접하여 내려와
풍악을 벌리고 온갖 놀이를 하는데, 이때가 되면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다투어 와서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10월에도 똑같이 이렇게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賣餠家用糯米粉打成一片累累起酵如鈴形以酒蒸溲豆饀和蜜入於鈴內粘棗肉於鈴上名蒸餠有복白兩色복者用當歸
葉屑也按藝苑雌黃寒食以麵爲蒸餠樣團棗附之名曰棗餻今俗沿于是又不起鈴而蒸片食之採黃薔薇花作餻油煎以食
如三日花煎以魚鮮細切熟之雜苽菜菊葉葱芽石耳熟鰒鷄卵名曰魚菜又厚切作片包肉饀而熟之名曰魚饅頭幷和醋醬
食之以烹芹和葱作膾調椒醬爲酒肴食之皆初夏時食也女娘及小童皆以鳳仙花調白礬染指甲熊川俗熊山神堂土人每
四月迎神下山陳鍾鼓雜戱遠近爭來祭之十月又如之以爲常見輿地勝覽
5월
단오 端午
5월 5일 단오에 임금은 규장각(奎章閣) 신하들에게 쑥으로 호랑이 모양을 만든 애호(艾虎)를 하사한다.
애호는 짧은 지푸라기와 비단 조각으로 꽃을 만들어 갈대 이삭처럼 주렁주렁 감아 묶은 것이다.
내 생각에는 세시기154)에 “단오에 쑥으로 호랑이 모양을 만들거나 혹은 비단을 오려 작은 호랑이를 만들고
쑥잎을 붙여서 머리에 인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도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
공조(工曹)에서 단오부채를 만들어 바치면 임금은 이것을 궁중의 재상들과 시종들에게 하사한다.
부채 중에 매우 큰 것은 대나무로 된 흰 살이 40개 내지 50개나 된다.
이것을 백첩선(白貼扇)이라고 하고 옻칠을 한 것을 칠첩선(漆貼扇)이라고 한다.
이것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금강산 1만 2천봉을 그린다. 혹 광대나 무당들이 이것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는 부채에다 꺾은 가지 ․ 복사꽃 ․ 연꽃․ 나비 ․ 은붕어 ․ 해오라기 등을 그리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에는 중국 명나라 사람 이후(李詡)가 쓴 계암만필(戒菴漫筆)155)에 “단오에 임금이 서울 관리들에게
궁중 부채를 하사하는데 그 부채는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바르고 새나 짐승을 그리며 오색 천으로 애호를 감는다.”
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도의 감사와 통제사는 임금에게 명절부채[節扇]를 진상하고 예에 따라 조정의 대신들과 친척,
친우들에게 선사하며, 부채를 만드는 고을의 수령들도 역시 임금에게 진상하고 친우들에게 선사한다.
부채는 전라도 전주와 남평156)지방에서 만든 것이 가장 좋다. 부채의 종류로는 승두선(僧頭扇) ․ 어두선(魚頭扇) ․
사두선(蛇頭扇) ․ 합죽선(合竹扇) ․ 반죽선(斑竹扇) ․ 외각선(外角扇) ․내각선(內角扇) ․ 삼대선(三臺扇) ․ 이대선
(二臺扇) ․ 죽절선(竹節扇) ․ 단목선(丹木扇) ․ 채각선(彩角扇) ․ 소각선(素角扇) ․ 광변선(廣邊扇) ․ 협변선(狹邊扇) ․
유환선(有環扇) ․ 무환선(無環扇) 등 만든 모양이 각기 다르고 오색 외에도 자색 ․ 녹색 ․ 검푸른색 ․ 운암색 ․ 석린색
등 없는 색이 없이 모든 빛깔의 부채가 갖추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는 백색과 흑색의 두 빛깔과
황칠 또는 흑칠을 한 것, 그리고 기름 바른 것을 좋아한다. 청색 부채는 신랑을 위한것이고 백색 부채는 상제를
위한 것이며 기타 여러 빛깔로 된 것은 부인들과 아이들이 갖는다.
단선(團扇: 방구 부채)에도 오색이 있고 또 오색을 섞어 붙인 알록달록한 아롱 부채도 있는데 그 모양에 따라
오동잎 ․ 연잎 ․ 연꽃 ․ 파초잎 등과 비슷하다. 혹은 기름을 바르기도 하고 혹은 누런 칠이나 검은 칠을 하기도
한다. 남자들은 집에 있을 때 부채를 부치며 색을 넣은 단선은 부녀자나 아이들이 갖는다.
또 대나무 살에 색종이를 발라 넓고 큰 둥근 부채, 즉 윤선[輪扇]을 만드는데 자루를 달아 이것을 펼쳐 들면 마치
일산과 같아서 아이들을 위한 볕가리개[遮陽之具]로 사용한다. 또 자루가 길고 큰 윤선은 잠자리에서 파리나
모기를 쫒는 도구로 사용한다. 혹은 반죽 껍질을 살에 붙이고 생초 비단을 바르고 구슬과 자개로 장식하여 시집
가는 신부들의 얼굴가리개로 사용한다. 혹은 큰 파초잎 모양으로 만든 것도 있는데 이것은 대신들의 차림새에도
필요한 의식(儀飾)이다.
장사꾼들이 만들어 파는 부채는 정밀하게 만든 것, 엉성하게 만든 것, 교묘하게 만든 것, 질박하게 만든 것 등 그
만듦새가 똑같지 않다. 중국 사람들이 “고려 사람은 겨울에도 부채를 쥔다.”고 한 것은 부채와 관련된 풍속이
많고 다양함을 기록한 것이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주사(朱砂)로 천중절, 즉 단오절 부적을 만들어 대궐에 바치면 대궐에서는 그것을 문 위에
붙여 좋지 못한 귀신들을 물리친다. 양반 집에서도 이것을 붙인다. 그 부적의 내용을 보면 “5월 5일 천중절에
위로는 하늘의 녹을 받고 아래로는 땅의 복을 받아라. 치우(蚩尤)157)의 신은 구리 머리에 쇠 이마에 붉은 입과
붉은 혀를 가졌다. 404 가지의 병을 일시에 없앨 것이니 율령을 시행하듯 빨리빨리 행하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한나라 제도에 복숭아인장[桃印]으로 악한 기운을 멈추게 한다고 하였으며, 포박자(抱朴子)158)
에는 적령부(赤靈符)를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단오의 옛 제도요 지금의 부적 제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임금의 약을 관리하는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여러 약초가루를 꿀에 넣어 끓인 제호탕(醍醐湯)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며 또 구급약인 옥추단(玉樞丹)을 만들어 금박을 입혀 바친다. 그러면 임금은 그것을 오색실에 꿰어차고 다님
으로써 액을 제거하며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에게도 나누어준다. 내 생각에는 중국 한나라 말엽의 책인 응소(應劭)
의 풍속통(風俗通)159)에 “5월 5일 단오 때 오색 명주실을 팔에 매는 것은 귀신과 난리를 물리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장명루(長命縷)라고 하고 일명 속명루(續命縷), 또는 벽병증(辟兵繒)이라고 한다.” 고 하였
는데, 지금 풍속에 옥추단을 차는 것도 이런 종류일 것이다.
남녀 아이들은 창포를 끓인 물로 얼굴을 씻고 모두 붉은 색과 녹색의 새 옷을 입는다.
부녀자들은 창포 뿌리를 깎아서 비녀를 만들고 혹은 그 끝에 연지로 ‘수(壽)’ 자나 ‘복(福)’ 자를 새겨 쪽에 꽂아
전염병을 예방한다고 하는데, 이것을 단오 치장[端午粧]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 한나라 사람 대덕(戴德)
이 편찬한 대대례기(大戴禮記)에 “5월 5일에 난초 우린 물[蓄蘭]로 목욕한다”160)고 했고,
또 세시잡기에 “단오에 창포와 쑥 뿌리를 다듬어 작은 인형이나 조롱박 모양으로 만들어 몸에 참으로써 액을
물리친다.”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에 창포로 목욕하고 창포뿌리를 꽂는 것이 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생각건대 심방의 완서잡기에 “중국 연경에서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사이에 규중 처녀들을 매우 곱고
맵시 있게 꾸며주며 이미 출가한 여자들도 각기 친정으로 근친(覲親)을 가는 풍속이 있어 이 날을 여아절(女兒節)
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우리나라 풍속도 북경과 서로 비슷하므로 여자들이 몸을 꾸미는 것도 북경의 풍속을 답습한 것으로 여겨진다.
항간에서는 남녀들이 그네뛰기를 많이 한다. 내 생각에는 고금예술도(古今藝術圖)161)를 보면 북방 오랑캐
들이 한식날 그네뛰기를 하며 가볍게 뛰어오르는 연습을 하는 그림이 있어 후에 중국여자들이 그것을 배운 것
같으며, 또 생각건대 천보유사(天寶遺事)162)에 “궁중에서 한식 때가 되면 다투어 그네를 매는데 이것을
반선놀이[半仙之戱]라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이 단오로 옮겨졌다.
이 날 청장년들은 서울 남산의 왜장(倭場)이나 북악산의 신무문(神武門) 뒤에 모여 씨름을 하여 승부를 겨룬다.
그 방법은 두 사람이 맞붙어 무릎을 꿇고 각자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 상대편의 오른편 넙적
다리를 잡은 다음 일시에 일어나면서 상대를 들어 메치는데 넘어지는 자가 지는 것이다. 씨름기술에는 안걸이,
밭거리, 둘러치기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 중에 힘이 세고 솜씨가 민첩하여 여러 번 내기하여 자주 이기는 사람
을 판막음[都結局]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이 이를 본받아 고려기(高麗技)라고 하기도 하고 요교(撩跤)라고 하기도 한다.
이 경기는 단오 때 제일 많이 하며 서울과 지방이 차이가 없다. 내생각에는 예기「월령」에 “초겨울이 되는 달
에 장수들에게 명하여 군사훈련을 시킬 때 활쏘기, 말달리기, 힘겨루기(角力) 등을 연습한다.” 고 하였는데, 지금
의 씨름이 바로 이 힘겨루기로 곧 군사들의 힘내기인 것이다. 또 생각건대 중국 동한시대 사람인 장평자(張平子)
의 서경부(西京賦)163)에 “각저(角觝)의 묘기를 드러냈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나라 때도 이런 것이 있었으니 오늘날의 씨름과 비슷한 것이다.
頒艾虎于閣臣用小稈纏束綵花蔌蔌如蓼穗按歲時雜記端午以艾爲虎形或剪綵爲小虎粘艾葉以戴之國制昉於此工曹
造進端午扇頒于宮掖宰執侍從扇之絶大者竹幅白矢滿五十四十名曰白貼着漆者名曰漆貼得此者多畵金剛一萬二千
峯或爲倡巫所把近俗喜寫折枝桃花芙蓉虎蝶銀鯽鷺鷥按戎菴漫筆端午賜京官宮扇竹骨紙面俱畵翎毛五色綿纏繞艾
虎者是也湖南嶺南兩道伯及統閫進上節扇例送於朝紳曁親知間造扇邑守令亦有進上贈遺全州南平之制爲佳僧頭魚
頭蛇頭合竹斑竹外角內角三臺二臺竹節丹木彩角素角廣邊狹邊有環無環製樣各殊五色及紫綠鴉복雲暗石磷等諸色
無不備焉俗尙白黑二色黃漆黑漆兩貼及着油者복爲新郞素爲喪人諸色爲婦人小兒所把團扇有五色又有五色交貼斑
斕者有似桐葉蓮葉蓮花蕉葉者或着油或黃黑漆男子在家而搖色扇爲婦女兒童所持又有色紙竹幅闊大爲輪扇有柄張
之如傘作小兒遮陽之具又有長柄大團扇作枕蕈揮蠅蚊之具又以斑竹皮色綃紗飾珠貝爲新婦遮面之具或倣大蕉葉形
亦爲大臣儀飾之物又有商賈扇賣買者精麁巧樸不一其制中國人稱高麗人冬執扇記其俗也觀象監朱砂榻天中赤符進
于大內貼門楣以除弗祥卿士家亦貼之其文曰五月五日天中之節上得天祿下得地福蚩尤之神銅頭鐵額赤口赤舌四百
四病一時消滅急急如律令按漢制有桃印以止惡氣抱朴子作赤靈符皆端午舊制而今之符制盖出於此內醫院造醍醐湯
進供又製玉樞丹塗金箔以進穿五色絲佩之禳灾頒賜近侍按風俗通五月五日以五綵絲繫臂者辟鬼及兵名長命縷一名
續命縷一名辟兵繒今俗之佩丹盖此類也男女兒童取菖蒲湯頮面皆着紅綠新衣削菖蒲根作簪或爲壽福字塗臙脂於其
耑遍揷頭髻以辟瘟號端午粧按大戴禮五月五日蓄蘭爲沐浴又按歲時雜記端午刻菖艾爲小人或葫蘆形帶之辟邪164)
今俗之浴蒲揷菖盖昉於是又按宛是日爲女兒節165) 東俗與燕相近其靚粧似襲燕風也閭巷男女盛爲鞦韆戱按古今藝
術圖北方戎狄至寒食爲鞦韆戱以習輕趫後中國女子學之又按天寶遺事宮中至寒食節競築鞦韆呼爲半仙之戱今俗移
於端午丁壯年少者會於南山之倭場北山之神武門後爲角力之戱以賭勝負其法兩人對跪各用右手挐對者之腰又各用
左手挐對者之右股一時起立互擧而抨之倒臥者爲負有內局外局輪起諸勢就中力大手快屢賭屢捷者謂之都結局中國
人效之號爲高麗技又曰撩跤端午日此戱甚盛京外多爲之按禮記月令孟冬之月乃命將帥講武習射御角力今之角戱卽
此而乃兵勢也又按張平子西京賦呈角觝之妙戱在漢時亦有之與此相類
단오를 속칭하여 수리날[戌衣日]이라고도 하는데 ‘수리’란 우리 나라 말로 수레[車]다. 이 날 쑥을 뜯어 짓찌
어서 멥쌀가루에 넣고 초록색이 나도록 반죽을 하여 수레바퀴 모양으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 그래서 이 날을
수리날 이라고 하는것이다. 떡집에서는 이것을 시절음식으로 판다. 이 쑥을 본초강목(本草綱目)166)에서는
천년애(千年艾)라고 나오고 중국사람들은 구설초(狗舌草)라고 한다.
쑥잎 중 겉이 흰 것을 볕에 바짝 말려 비벼서 부싯깃[火絨]을 만드는데 이것을 수리치[戌衣草]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의 무규(武珪)라는 사람이 쓴 연북잡록(燕北雜錄)167)에 “요(遼) 지방 풍속에 5월 5일
발해(渤海)의 주방에서 쑥떡을 올린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풍속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 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익모초(益母草)와 진득찰[豨薟]을 뜯어다가 볕에 말려 약으로 쓴다.
또 대추나무를 시집보낸다. 내 생각에는 진호의 화력신재에 “대추나무 시집보내는 것은 단오날 오시가 좋다.
또한 단오날 오고(五鼓=五更), 즉 날이 밝을 무렵에 도끼로 과일나무를 여러 번 쳐 두면 과일이 많이 달린다.” 고
하였는데, 지금의 풍속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해 지방 풍속에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이들이 성 남쪽에 모여들어 돌팔매싸움[石戰]연습을 한다.
그러다가 단오날이 되면 장정들까지 모두 모여 좌우로 편을 갈라 깃 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고 날뛰
면서 마치 비가 오듯 돌을 던지다가 승부가 난 뒤에야 끝난다. 이 때 비록 죽거나 다친 자가 나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며 고을 수령도 이를 막지 못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충청도 금산 지방 풍속에 단오날이 되면 소년 무리들이 직지사(直指寺)로 모여 씨름대회를 갖는다.
이 때 원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누가 이기는지 내기를 건다.
이 소문을 듣고 구경나온 사람이 수천 수백을 헤아리며 해마다 이렇게 한다.
경상도 군위 지방 풍속에 효령현(孝靈縣)의 서쪽 산에 김유신사당(金庾信祠堂)이 있는데 속칭 삼장군당(三將
軍堂)이라고 한다. 매년 단오날에 그 고을의 우두머리 아전인 이방이 읍내 사람들을 인솔하여 역마를 타고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며 사당으로 올라가서 신을 모시고 내려와 마을 거리에서 논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 참조.
강원도 삼척 지방 풍속에 읍내 사람들이 오금(烏金)으로 만든 비녀를 조그만 함에 담아 관아의 동쪽 모퉁이에
있는 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다가 매년 단오에 아전과 읍민들이 함께 그것을 꺼내어 제사를 지내고 다음날 도로
가져다가 감추어 둔다. 속설에 그 오금비녀는 고려 태조 때의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제사 지내는 까닭은
알지 못하고 그냥 전래 행사가 되어버려 관에서도 이를 금하지 않는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함경도 안변(安邊) 지방 풍속에 상음신사(霜陰神祠: 상음현에 있는 신사 이름)가 있는데 속설에 선위대왕(宣威
大王: 안변도호부의 성황신)의 부인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한다. 매년 단오날이 되면 성황사의 선위대왕신을
이 신사로 모셔 부부를 함께 제사지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端午俗名戌衣日戌衣者東語車也是日採艾葉爛搗入粳米粉發綠色打而作餻象車輪形食之故謂之戌衣日賣餠家以時
食賣之本草千年艾華人呼作狗舌草是也艾葉之背白者曝乾碎作火絨亦號戌衣草按武珪燕北雜錄168)遼俗五月五日
渤海169)廚子進艾餻東俗似沿於是午時採益母草豨薟曬爲藥用又嫁棗樹按花曆新栽嫁棗宜於端午日午時又端午五
鼓以斧斫諸果木數下結實多今俗昉此金海俗每歲自四月八日兒童羣聚習石戰于城南至端午日丁壯畢會分左右竪旗
鳴鼓呌呼踊躍投石如雨決勝負乃已雖至死傷無悔守令不能禁見輿地勝覽170) 金山俗端午日羣少會於直指寺爲角力
戱遠近咸聚以賭勝負聞風而觀光者以千百計歲以爲常軍威俗孝靈西岳金庾信祠俗稱三將軍堂每歲端午縣首吏率邑
人以驛騎旗鼓迎神遊於村巷見輿地勝覽171) 三陟俗邑人盛烏金簪小函藏於治所東隅樹下每遇端午吏民172)取出奠
而祭之翌日還藏諺傳高麗太祖時物然未審其所以祭之之意遂成故事官亦不禁見輿地勝覽173) 安邊俗霜陰神祠諺傳
宣威大王之夫人每以端午迎宣威並祭之見輿地勝覽174)
기타 5월 행사 月內
이 달 초열흘날은 태종 임금의 제삿날이다. 매년 이 날에 반드시 비가 오므로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한다.
태종이 운명할 때 아들 세종에게 말하기를 “지금 가뭄이 바야흐로 심하니 내가 죽어도 이를 안다면 반드시 이 날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 과연 이 날이면 비가 왔다.
임금은 보리 ․ 밀 ․ 고미(菰米)로써 종묘에 천신 제사를 지내며 재상집과 양반집에서도 이를 행한다.
내 생각에는 예기 「월령」에 “초여름에 농가에서 천자에게 보리를 올리면 천자는 (고기보다는) 보리를 먼저
맛보시며, 시식하기 전에 종묘에 천신한다.”고 했고, 또 최식(崔寔)의 월령에 “초복에 보리와 고미를 조상의
사당에 천신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도 마찬가지다. 서울 풍속에 콩을 삶아 소금 간을 맞추어 항아리에
장을 담가 겨울을 날 계획을 세운다. 온갖 꺼리는 날 중에 신일(辛日)이 있는데 ‘신’이라는 발음이 맛이 시다는
것을 연상시키므로 장 담그는데 맞지 않다고 하여 이 날을 피해 장을 담근다.
初十日太宗忌辰每年必雨謂之太宗雨太宗臨薨敎世宗曰旱災方甚死若有知必使是日得雨後果然薦大小麥苽子于太
廟卿士家亦行之按禮記月令孟夏之月農乃登麥天子嘗麥先薦寢廟175)又按崔寔月令初伏薦麥苽于祖禰國制亦然都
俗以燻豆調鹽沈醬于陶甕爲過冬之計百忌日辛不合醬忌辛日
6월
유두 流頭
이 달 15일을 우리 나라 풍속에서는 유두날[流頭日]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고려 명종 때의 학자 김극기
(金克己)가 쓴 문집(文集)176) 중에 “경주의 옛 풍속에 6월 보름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들을 씻어 버리고, 그 자리에서 재앙을 물리치는 제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데 이것을 유두잔치[流頭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조선 풍속에서도 이것을 이어받아 속절(俗節)로 삼고 있다. 경주에는 아직도 이런
풍속이 남아 있다.
이 날은 멥쌀가루를 쪄서 둥글고 긴 가래떡을 만든 다음 그것을 구슬같이 잘게 썰어 꿀물에 담갔다가 얼음을
채워 먹으며 제사에도 쓴다. 이것을 수단(水團)이라고 한다. 또 건단(乾團)이라는 것도 있는데 수단같이 만들
지만 물에 넣지 않은 것으로 곧 냉도(冷: 찬경단)와 같은 종류다. 혹 찹쌀가루로 만들기도 한다. 내 생각에는
천보유사 책에 의하면 “궁중에서 매년 단오에 분단과 각서(角黍: 고미잎에 기장쌀 가루를싸서 찐 떡)를
만들어 금쟁반 가운데에 친 못에 고정시켜 놓고 작은 활로 쏘아 그 분단을 맞힌 사람이 그것을 먹는다.”고
했고, 또 세시잡기에 “단오 때 수단을 만드는데 다른 말로 백단이라고도 하며, 가장 정밀하게 만든 것을
적분단(滴粉團)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며, 중국 북송시대 사람 문잠(文潛) 장뢰(張耒)177)의 시에 “수단을
얼음물에 넣고 사탕으로 싼다.”라고 하는 등 옛사람들은 각서나 [粽]같은 떡을 단오절 음식으로 삼아 서로
주고받고 하였다는데, 모두 이런 종류인 듯하며 다만 모양이 모나고 둥근 것이 서로 다를 뿐이다. 그리고 지금
은 그 풍속이 유두날로 옮겨진 것도 다른 점이다. 또 밀가루를 반죽하여 꿀에 버무린 콩이나 깨를 그 속에 넣어
찐 것을 상화병(霜花餠)이라고 하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다음 고미로 만든 소를 넣거나 콩과 깨에
꿀을 섞은 소를 넣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므려 만든 것을 연병(連餠)이라고 하며, 또 나뭇잎 모양으로 주름을
잡아 고미로 만든 소를 넣고 채롱에 쪄서 초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이것들이 모두 유두날의 시절음식으로 제사에 쓰기도 한다. 내 생각에는 육방옹(陸放翁)의 시에 “쟁반을 씻고
연전(連展)을 쌓아놓는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주석에 “회수 지방 사람들은 보리떡을 연전이라고 한다.”고 했
으니 그것이 바로 연병 같은 것인 듯하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슬 모양의 누룩을 만드는데 이것을 유두 누룩[流頭麯]이라고 한다.
거기에다 오색 물감을 들여 세 개를 이어서 색실로 꿰어 차고 다니며, 혹 문 위에 걸어 액을 막기도 한다.
十五日東俗稱流頭日按金克己集東都遺俗六月望日浴髮於東流水祓除不祥因爲禊飮謂之流頭宴國俗因之爲俗節慶
州尙有此風焉蒸粳未粉打成長股團餠細切如珠澆以蜜水照氷食之以供祀名曰水團又有乾團不入水者卽冷飠匋之類
或用糯米粉爲之按天寶遺事宮中每端午造粉團角黍釘金盤中以小小角弓架箭射中粉團者得食又按歲時雜記端午作
水團又名白團最精者名滴粉團178) 又按張文潜詩云水團氷浸砂糖裹179) 古人以角黍粽爲端午節物相餽送盖此類
而角與團異形也今俗移於流頭以小麥麵溲而包豆荏和蜜蒸之曰霜花餠又碾麵而油煮包苽饀或包豆荏和蜜爲饀卷摺
異形名曰連餠又皺作葉形包苽饀籠蒸浸醋醬以食之並以時食亦供祀按放翁詩拭盤堆連展註淮人以麥餌謂連展似此
類也用小麥麵造麯180)如珠形名曰流頭麯染五色聯三枚以色絲穿而佩之或掛於門楣以禳之
삼복 三伏
개고기를 파와 함께 푹 삶은 것을 개장[狗醬]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닭고기와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
또 개장국을 만들어서 산초가루를 치고 흰밥을 말면 시절음식이 된다. 그것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도 물리
치고 보신도 된다. 저자에서도 이것을 많이 판다. 내 생각에는 사기(史記)에 “진나라 덕공(德公) 2년에
처음으로 복 제사를 지내는 사당[伏祠]을 짓고 사대문에서 개를 찢어 죽임으로써 충재(蟲災)를 예방했다.”181)
고 한 것을 보면, 개를 잡는 일이 곧 옛날 복날의 행사이며 지금 풍속에도 이것으로 인해 삼복 더위 때 좋은 음식
이 된 것이다.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먹는데 삼복, 즉 초복 ․ 중복 ․ 말복에 다 그렇게 한다.
烹狗和葱爛蒸名曰狗醬入雞笋更佳又作羹調番椒屑澆白飯爲時食發汗可以祛暑補虛市上亦多賣之按史記秦德公二
年初作伏祠磔狗四門以禦蟲災磔狗卽伏日故事而今俗因爲三伏佳饌煮赤小豆粥以爲食三伏皆如之
기타 6월 행사 月內
이 달에 피 ․ 기장 ․ 조 ․ 벼 등 햇곡식으로 종묘에 천신 제사를 지낸다. 내 생각에는 예기 「월령(月令)」에
“5월에 농가에서 천자에게 기장을 올리면 천자는(꿩고기보다는) 기장을 먼저 맛보시며 시식하기 전에 종묘에
천신 제사를 올리고,7월에 농가에서 햇곡식을 올리면 천자께서 새 곡식을 맛보시는데 먼저 종묘에 올린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도 마찬가지다.
임금은 얼음을 각 관서에 나누어주는데, 나무로 패(牌)를 만들어 주어 얼음 창고에서 받아가도록 한다.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거기에 오이와 닭고기를 넣어 가지고 어저귀국[白麻子湯]에 말아먹으며, 또 미역국을
사용하여 닭고기를 조리한 다음 면을 넣고 물을 약간 따라 넣어 익혀 먹는다. 또 호박과 돼지고기를 섞은 데에다
흰떡을 썰어 넣어 삶기도 하고, 혹은 거기다가 굴비 대가리를 넣어 함께 삶기도 한다. 또 호박을 썰어 밀가루에
반죽하여 기름에 부치기도 한다. 이것들이 모두 여름철의 시절음식으로서 계절에 맞는 좋은 반찬들이다.
참외와 수박은 더위를 씻는 먹을거리다. 서울 동부(東部)인 동대문 부근의 채소와 과일, 그리고 서부(西部)인
남대문 밖 칠패(七牌)의 생선은 이때가 한창이다.
서울 서대문 밖 천연동에 있는 천연정(天然亭)의 연꽃과 삼청동의 탕춘대(蕩春臺)와 정릉의 수석(水石)에는
술과 문학을 즐기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옛날 중국 하삭(河朔)182) 지방에서 했다는 식으로 술을 마시며 피서
를 한다. 서울 풍속에는 또 남산과 북악 골짜기에 흐르는 물에 발담그기[濯足]를 하는 놀이가 있다.
경상도 진주 지방 풍속에 이 달 그믐날에는 남녀들이 강가로 나가 함성불제(陷城祓除), 즉 성이 함락 당한 데 대한
상서롭지 못한 것을 씻어버리는 행사를 한다. 이 때 원근사람들이 모여들어 보느라고 구경꾼들로 시장을 이룬다.
이는 옛날 임진왜란 때 이 날 성이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이 행사는 해마다 한다.
薦稷黍粟稻于太廟按禮記月令仲夏之月農乃登黍天子嘗黍先薦寢廟183)孟秋之月農乃登穀天子嘗新先薦寢廟國制
亦然頒氷于各司造木牌俾受去於凌室以小麥造麵調복苽鷄肉澆白麻子湯又用甘藿湯調鷄肉以麵點水熟而食之又以
南苽同猪肉切白餠爛煮或入乾鮸魚頭同煮又以小麥麵拌南苽切片油煮皆爲夏月時食眞率之饌甜苽西苽爲滌暑之需東
部菜果七牌魚鮮是時最盛天然亭荷花三淸洞蕩春臺貞陵水石觴詠者多集于此以倣河朔之飮都俗又於南北溪澗爲濯
足之遊晋州俗是月晦日士女出江邊爲陷城祓除遠近來會觀者如市盖昔倭亂以是日陷城故也歲以爲常
7월
칠석 七夕
이 날 인가에서는 옷가지를 밖으로 내어 햇볕을 쪼이는데, 이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풍속이다.
人家曬衣裳盖古俗也
중원 中元
이 달 15일은 우리나라 풍속에 백중날[百種日]이라고 하여 중들은 재를 올리고 불공을 드리며 큰 명절로 여긴다.
내 생각에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중원일에는 중, 도사, 세속인 모두 우란분을 차려 제각기 절에 공양
한다.”고 했고, 또 생각건대 우란분경(盂蘭盆經)184)에 “부처 제자인 목련(目連)이란 비구가 각종 음식과
백가지 과일을 구비하여 쟁반에 담아서 시방대덕[十方大德]185)에게 공양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말하는
백중날이라는 것은 이 백가지 과일을 의미하는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부처를 숭상하여 해마다 이 날이면 우란
분회(盂蘭盆會)를 열었는데 지금 재(齋)를 여는 풍속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이 날로 망혼일(亡魂日)
을 삼는데 대개 항간의 백성들이 이 날 달밤에 채소 ․ 과일 ․ 술 ․ 밥 등을 차려놓고 죽은 어버이의 혼을 불러
모신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에 “시장에 채소와 과일이 많은 것을 보니 도성사람들이 오늘 도처에서 죽은 혼을
위해 제사지내겠구나.”라고 하였다.
충청도 풍속에 이 날 노소를 막론하고 저자에 나아가 마시고 먹는 것을 즐긴다.
또 씨름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十五日東俗稱百種日僧徒設齋供佛爲大名節按荊楚歲時記中元日僧尼道俗悉營盆供諸寺院又按盂蘭盆經目連比邱
五味百果以著盆中供養十方大德今所云百種日似指百果也高麗崇佛是日每爲盂蘭盆會今俗設齋是也國俗以中元爲
亡魂日盖以閭閻小民是几186)月夕備蔬果酒飯招其亡親之魂也李東岳安訥有詩云記得市廛蔬果賤都人隨處薦亡魂
湖西俗以十五日老少出市飮食爲樂又爲角力之戱見輿地勝覽187)
기타 7월 행사 月內
재상과 양반 집에서는 이 달에 올벼로 제사를 지내는데 대부분 초하루와 보름에 지낸다.
卿士家薦早稻多因朔望行之
8월
추석 秋夕
이 달 15일을 우리 나라 풍속에서 추석 또는 가위[嘉俳]라고 한다. 신라 때부터 있던 풍속으로 시골 농촌에서는
일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로 삼는데 그것은 새 곡식이 이미 익었고 가을 농작물을 추수할 때가 멀지 않았기 때문
이다. 이 날 사람들은 닭을 잡고 술을 빚어 온 동네가 취하고 배부르게 먹으면서 즐긴다.
경주 지방 풍속에 신라 유리왕 때 여섯 부(部)를 둘로 똑같이 나누어 두 편을 만들고 왕녀(王女) 두 사람을 시켜
각각 부 안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편을 갈라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여
밤 을야(乙夜: 이경)가 되어 파했다. 이렇게 8월 보름까지 하여 그 간의 길쌈한 공의 많고 적음을 보아 진 편에
서는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했다. 이 때 노래와 춤 등 온갖 놀이를 다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가위라고 했다. 이 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하니 그 소리가 애처롭고
우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래를 회소곡(會蘇曲)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풍속에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제주도 풍속에 매년 8월 보름날에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좌우로 편을 갈라 커다란 동아
줄의 양쪽을 서로 잡아당겨 승부를 겨룬다. 이 때 줄이 만약 중간에서 끊어져서 양편이 모두 땅에 엎어지면
구경꾼들이 크게 웃는다. 이를 줄다리기[照里之戱]라고 한다. 이 날 또한 그네도 뛰고 닭잡기놀이[捕鷄之戱]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十五日東俗稱秋夕又曰嘉俳肇自羅俗鄕里田家爲一年最重之名節以其新穀已登西成不遠黃鷄白酒四隣醉飽以樂
之慶州俗新羅儒理王時中分六部爲二使王女二人各率部內女子分朋秋七月旣望每日早集大部之庭績麻乙夜而罷
至八月望考其功之多少負者置酒食以謝勝者於是歌舞百戱皆作謂之嘉俳是時負家一女起舞歎曰會蘇會蘇其音哀
雅後人因其聲而作歌名會蘇曲國俗至今行之見輿地勝覽188) 濟州俗每歲八月望日男女共聚歌舞分作左右隊曳大
索兩端以決勝負索若中絶兩隊仆地則觀者大笑以爲照里之戱是日又作鞦韆及捕鷄之戱見輿地勝覽189)
기타 8월 행사 月內
충청도 시골 풍속에 이 달 16일에 씨름을 하고 술과 음식을 차려 먹고 즐겁게 노는데, 이는 농사가 끝나 농민
들이 피로를 푸느라고 하는 것으로 매년 그렇게 한다.
술집에서는 햅쌀 술을 빚어 팔며 떡집에서는 햅쌀 송편과 무와 호박을 넣은 시루떡을 만든다. 또 찹쌀가루를
찐 다음 그것을 쳐서 떡을 만들고 거기에 볶은 검은 콩가루나 누런 콩가루 혹은 참깨가루를 묻혀서 파는데 이것
을 인절미[引餠]라고 한다. 이것은 즉 옛날의 자고(粢餻)나 한나라 때의 마병(麻餠)과 같은 종류다.
또 찹쌀가루를 쪄서 계란같이 둥근 떡을 만들고 거기에 꿀에 버무린 삶은 밤을 붙인 것을 밤단자[栗團子]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세시잡기에 “봄 ․ 가을의 두 사일(社日)과 중양(重陽: 9월 9일)에 밤으로 떡을 만든다.”
라고 하였는데,190) 지금의 풍속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토란단자라는 것도 있어 밤단자 만드는 법과
똑같이 만든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가을철의 시절음식이다.
十六日湖西鄕俗以角力戱設酒食爲樂盖因農歇息力而然也每年如之賣酒家造新稻酒賣餠家造早稻松餠菁根南苽
甑餠又蒸糯米粉打爲餻以熟黑豆黃豆芝麻粉粘之名曰引餠以賣之卽古之粢餻漢時麻餠之類也蒸糯米粉成團餠如
卵用熟栗肉和蜜附之名曰栗團子按歲時雜記二社重陽以栗爲餻191)今俗昉于此又有土蓮團子如栗團子之法皆秋
節時食也
9월
중양절 九日
이 날 노란 국화 꽃잎을 따다가 국화 찹쌀떡을 만드는데 방법은 3월 삼짇날의 진달래 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다.
또 이름도 화전(花煎)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 양나라 사람 오균(吳均)이 지은 서경잡기(西京雜記)192)에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궁녀
가패란(賈佩蘭)이 9일에 이(餌) 떡을 먹었다.“고 하였는데, 방언에 이는 경단[餻]떡을 말하는 것이다.
또 생각건대 송나라 사람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193)에 “도시 사람들이 중구(重九: 9월
9일)에 가루로 떡을 쪄서 서로 선물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국화떡이 여기에서 유래한것이다.
잘게 썬 배와 유자(柚子)와 석류(石榴)와 잣 등을 꿀물에 탄 것을 화채(花菜)라고 하는데 이것들 모두 시절음식
으로 제사에 쓴다.
서울 풍속에 이 날 남산과 북악에 올라가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노는데 이것은 등고(登高)하는 중국의 옛
풍습을 따른 것이다. 청풍계(복楓溪) ․ 후조당(後凋堂) ․ 남한산 ․ 북한산 ․ 도봉산 ․ 수락산 등 여러 곳에 단풍
놀이를 할 만한 좋은 경치가 있다.
採黃菊花爲糯米餻與三日鵑花餻同亦曰花煎按西京雜記漢武帝宮人賈佩蘭九日食餌方言餌謂之餻又按孟元老東京
夢華錄都人重九以粉麵蒸餻相遺今之菊餻盖沿于此細切生梨柚子與石榴海松子澆以蜜水名曰花菜並以時食供祀都
俗登南北山飮食以爲樂盖襲登高之古俗也복楓溪後凋堂南北漢道峯水落山有賞楓之勝
10월
오일 午日
십이지의 하나인 오(午)가 들어가 있는 오일(午日)을 속칭하여 말날[馬日]이라고 한다. 팥을 넣어 만든 시루떡
을 마굿간에 차려 놓고 신에게 말의 건강을 기원한다. 그러나 병오일(丙午日)은 이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병(丙)’ 자와 ‘병(病)’ 자의 발음이 같으므로 말에 병이 날까 꺼리기 때문이다. 무오일(戊午日)을 가장 좋게
여긴다.
午日俗稱馬日作赤豆甑餠設廐中以禱神祝其馬健丙午日則不用丙與病音相似忌馬病也以戊午日爲貴
기타 10월 행사 月內
내의원(內醫院)에서는 10월 초하루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발효우유를 만들어 임금에게 바친다.
또 기로소(耆老所)194)에서도 발효우유를 만들어 여러 기로소 신하들을 봉양하다가 정월 보름에 가서 그친다.
인가에서는 10월을 상달[上月]이라고 하여 무당을 불러다가 성주신[成造神]195)을 맞이하여 떡과 과일을
차려놓고 집안이 편안하기를 기원한다.
이 달 20일에는 해마다 큰바람이 불고 추운데 그것을 손돌바람[孫石風]이라고한다. 고려의 왕이 바닷길로
강화도에 갈 때 뱃사공 손돌[孫石]이 배를 저어 가다가 어떤 험한 구석으로 몰고 가자 왕이 그의 행위를 의심
하여 노해서 명령을 내려 그의 목을 베어 죽였고, 잠시 후에 위험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곳을
손돌목[孫石項]이라고 한다. 손돌이 죽임을 당한 날이 바로 이 날이므로 그의 원한에 찬 기운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서울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석쇠[燔鐵]를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기름 ․ 간장 ․ 계란 ․ 파 ․ 마늘 ․
후춧가루 등으로 양념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데, 이것을 난로회(煖爐會)라고 한다. 숯불구이는
추위를 막는 시절음식으로 이 달부터 볼 수 있으며, 난로회는 곧 옛날의 난난회(煖暖會)와 같은 것이다.
또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무 ․ 오이 ․ 채소 ․ 나물 등 푸성귀와 계란을 섞어 장국을 만들어 먹는데 이것을 열구
자탕(悅口子湯), 또는 신선로(神仙爐)라고 부른다.
내 생각에는 세시잡기196)에 “서울 사람들은 10월 초하룻날에 술을 준비해 놓고 저민 고깃점을 화로 안에
구우면서 둘러 앉아 마시며 먹는데 이것을 난로(煖爐)라고 한다.”고 했고,
또 동경몽화록에 “10월 초하루에 유사(有司)들이 난로에 피울 숯을 대궐에 올리고 민간에서는 모두 술을
가져다 놓고 난로회를 갖는다.” 고 하였는데, 지금의 풍속도 그러한 것이다.
메밀가루로 만두를 만드는데 채소 ․ 파 ․ 닭고기 ․ 돼지고기 ․ 쇠고기 ․ 두부 등으로 소를 만들어 넣어 장국에
익혀먹는다. 또 밀가루로 세모 모양을 만든 것을 변씨만두(卞氏饅頭)라고 한다. 아마 변씨가 처음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긴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중국 북송시대 고승(高承)이 지은 사물기원(事物記原)197)
에 “제갈공명이 맹획(孟獲)198)을 정벌할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랑캐의 풍속은 반드시 사람을 죽여 그
머리로써 제사를 지내면 신이 이를 흠향하고 음병(陰兵)을 보내준다.’고 했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그의 말을 좇지 않고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 밀가루로 싸서 사람 머리모양으로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 그랬더니 신이 역시 흠향하고 군사를 내보내 주었다. 뒤에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만두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만두는 소쿠리에 넣어 찌므로 증병(蒸餠) 또는 농병(籠餠)이라고도 하며 당나라
예천 사람 후사지(侯思止)가 반드시 파를 줄이고 고기를 더 넣어 먹었다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또 멥쌀떡 만두, 꿩고기만두, 김치만두 등이 있는데 그 중 김치만두가 가장 수수한 시절음식이다. 그 근원을
살피면 제갈공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지금은 음식 중 훌륭한 것으로 친다.
두부를 얇게 썰어 꼬챙이에 꿰어 꼬치를 만들어서 기름에 부친 다음 닭고기를 넣어 끓인 국을 연포(軟泡)라고
한다. 여기서 ‘포’란 두부를 말하며 이는 중국 한나라 고조(高祖)의 손자인 회남왕(淮南王)199)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내 생각에는 육방옹(陸放翁)의 시에 “가마솥을 닦고 여기(黎祁)를 지진다.”는 대목이 있는데, 그의 주에 “촉
(蜀)나라 사람은 두부를 여기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연포라는 것이 곧 이것이다.
겨울 쑥의 연한 싹을 뜯어다가 쇠고기와 계란을 넣고 끓인 국을 쑥국[艾湯]이라고 한다. 또 쑥의 연한 싹을
찌어 찹쌀가루에 섞어 동그란 떡을 만든 다음 삶은 콩가루와 꿀을 바른 것을 쑥단자[艾團子]라고 한다.
또 찹쌀가루로 동그란 떡을 만들어서 삶은 콩과 꿀을 이용하여 붉은 빛이 나게한 것을 밀단고(蜜團餻)라고
하는데, 이것들 모두 초겨울의 시절음식이다. 찹쌀가루를 술에 반죽하여 크고 작게 썰어 햇볕에 말렸다가
기름에 튀기면 고치같이 부풀어 오르는데 속은 비게 된다. 이것에 흰 깨 ․ 검정 깨 ․ 누런 콩가루 ․ 파란 콩가루
등을 물엿을 이용하여 붙인 것을 강정[乾飣]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송나라 남전(藍田) 사람 여씨(呂氏)200)의 집 식품 이름에 원양견(元陽繭)이라고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생각건대 병이한담(䭉餌閒談)201)이란 책에 “수병(䭉餅)은 콩가루에 엿을 섞어 만들고 또 이
것에 참깨를 묻히는데 그 이름을 호병(胡餅), 혹는 마병(麻餠)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이런 종류다.
강정은 이 달부터 시절음식으로 시장에서 많이 판다. 또 오색을 넣은 강정도 있으며, 또 잣을 박거나 잣가루를
묻힌 잣강정[松子乾飣]이 있으며 찰벼를 볶아 꽃 모양으로 튀겨서 엿을 묻힌 매화강정이라는 것도 있는데
홍색과 백색 두 가지다. 이것들은 이듬해 설과 봄철에 이르도록 일반 민가의 제수물품으로 과일 줄에 같이
들어가며, 또한 설음식[歲饌]으로 손님을 대접할 때도 없어서는 안될 음식이 되었다.
서울 풍속에 무 ․ 배추 ․ 마늘 ․ 고추 ․ 소금 등으로 장독에 김치를 담근다. 여름의 장담그기[夏醬]와 겨울의
김장[冬菹]은 민가에서 일년을 보내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충청도 보은 지방 풍속에 속리산 정상에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라는 사당이 있어 그 신이 매년 10월의
인일(寅日)에 법주사(法住寺)로 내려온다고 하여 산중에 사는 사람들이 음악을 베풀고 신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신은 45일간 머물다가 사당으로 돌아간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內醫院造牛乳酪以進自十月朔日至正月又自耆老所造酪以養諸耆臣至正月上元而止人家以十月爲上月邀巫迎成
造之神設餠果祈禱以安宅兆二十日每年有大風寒謂之孫石風盖麗王由海路入江華船人孫石進舟入一險口麗王疑
怒命斬之未幾脫險至今稱其處曰孫石項孫石之被害卽是日而怨氣使然也都俗熾炭於爐中置煎鐵炙牛肉調油醬鷄
卵葱蒜番椒屑圍爐㗖之稱煖爐會自是月爲禦寒之時食卽古之煖暖會也又以牛猪肉雜菁苽葷菜鷄卵作醬湯有悅口
子神仙爐之稱按歲時雜記京人十月朔沃酒乃炙臠肉於爐中團坐飮㗖謂之煖爐又按東京夢華錄十月朔有司進煖爐
炭民間皆置酒作煖爐會202) 今俗亦然用蕎麥麵造饅頭包以蔬葱鷄猪牛肉豆腐爲饀醬湯熟食又以小麥麵作三稜樣
稱卞氏饅頭盖始於卞氏而得名也按事物記原諸葛公之征孟獲人曰蠻俗必殺人以其首祭則神享爲出陰兵公不從因
雜用羊豕之肉而包之以麵象人頭以祀神亦享焉而爲出兵後人由此爲饅頭入籠而蒸故亦曰蒸餠籠餠侯思正所食必
令縮葱加肉者是物也又有粳餠雉肉菹菜饅頭而菹菜最爲眞率之時食究其原則肇自武侯而今爲饌饍佳品用豆腐細
切成串油煮調鷄肉作羹曰軟泡泡是豆腐而始自淮南王也按放翁詩洗甗煮黎祁註蜀人以豆腐謂黎祁203)今之軟泡
卽此採冬艾嫩芽調牛肉鷄卵作羹曰艾湯又搗入糯米粉作團餻以熟豆粉和蜜粘之曰艾團子又糯粉成團餻用熟豆和
蜜發紅色曰蜜團餻皆自初冬爲時食也用糯米粉酒拌切片有大小晒乾煮油起酵如繭形中虛以炒白麻子黑麻子黃豆
복豆粉用飴粘之名曰乾飣按藍田呂氏家品名元陽繭者卽是物也又按餅餌閒談䭉餅以豆屑雜糖爲之又以胡麻着之
名胡餅麻餠亦類此也自是月爲時食市上多賣之又有五色乾飣又以海松子粘附松子屑塗粘曰松子乾飣炒糯稻起作
花樣飴粘曰梅花乾飣有紅白兩色至于正朝春節人家祭品參用果列亦以歲饌供客而爲不可廢之需都俗以蔓菁菘蒜
椒塩沈菹于陶甕夏醬冬菹卽人家一年之大計也報恩俗俗離山頂有大自在天王祠其神每年十月寅日下降于法住寺
山中人設樂迎神以祠之留四十五日而還見輿地勝覽204)
11월
동지 冬至
동짓날을 작은 설[亞歲]이라고 하여 팥죽을 쑤며 찹쌀가루를 쪄서 새알 모양으로 만든 떡을 그 죽 속에 넣어
심(心)을 삼는다. 이것에 꿀을 타서 시절음식으로 먹으며 제사에도 쓴다. 팥죽 국물을 문짝에 뿌려 액을 막기도
한다.
내 생각에는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공공씨(共工氏)205)에게 바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질 귀신이 되었다.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했으므로 동짓날 팥죽을 쑤어 물리치는 것
이다.”고 하였고, 중국 송나라 사람 유자휘(劉子翬)206)의 동짓날에 관한 시에 “팥죽으로 귀신을 눌러 형(荊)
나라 풍속을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도 또한 그러하다.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임금에게 역서(曆書)
를 올린다. 그러면 임금은 모든 관원들에게 황색표지를 한 황장력(黃粧曆)과 백색표지를 한 백장력(白粧曆)을
반포하는데 ‘동문지보(同文之寶)207)’란 네 자가 새겨진 옥새(御璽)를 찍는다. 각 관서에서도 모두 분배받는
몫[分兒]이 있다. 이 날은 각 관서의 아전들이 각기 친한 사람을 두루 문안하는 것이 관례다. 이조(吏曹)의
아전들 중에는 각기 벼슬을 많이 하는 집안과 단골 관계를 맺어 관리임명장인 고신(告身)을 써 주는데,
그 집안에서 지방 수령으로 나가는 자가 있으면 고신을 써 준 아전에게 당참전(堂參錢)208)을 준다. 그러면
그 아전은 관례에 따라 청색표지를 한 청장력(복粧曆) 한 권을 그 사람에게 바친다. 대개 서울의 옛 풍속에
단오의 부채는 관원이 아전에게 나누어주고 동짓날의 달력은 아전이 관원에게 바친다고 하여 이것을 ‘하선
동력(夏扇冬曆)’이라고 하며 이러한 선물 관행이 고향의 친지와 묘지기 마을, 그리고 농장의 농민들에게까지
파급된다.
내의원(內醫院)에서는 계피 ․ 산초 ․ 엿 ․ 꿀 등을 쇠가죽에 싸서 응고 상태를 만든다.
이것을 전약(煎藥)이라고 하여 임금에게 진상하며, 각 관서에서도 이것을 만들어 나누어 가진다.
冬至日稱亞歲煮赤豆粥用糯米粉作鳥卵狀投其中爲心和蜜以時食供祀灑豆汁於門板以除不祥按荊楚歲時記共工氏
有不才子以冬至死爲疫鬼畏赤小豆故冬至日作粥以禳之劉子翬至日詩云豆糜厭勝憐荊俗今俗亦然觀象監進曆書頒
黃粧白粧于百官安同文之寶諸司皆有分兒各司吏胥又有遍問所親家209)之例吏曹吏各於仕宦家有句管掌寫告身者
若出宰則給堂參錢故例獻복粧一卷盖都下舊俗端午之扇官分于吏冬至之曆吏獻于官是謂夏扇冬曆波及鄕曲親知墓
村農庄內醫院以桂椒糖蜜用牛皮煮成凝膏名曰煎藥以進各司亦有造出分供者
기타 11월 행사 月內
이 달에 임금은 청어를 종묘에 천신한다. 재상집과 양반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천신제를 행한다.
내 생각에는 예기 「월령」에 “늦겨울에 천자가 친히 왕림하여 물고기를 맛보시는데 먼저 종묘에 천신한다.”
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도 그와같다. 청어 출산지로 통영(統營) 지방과 해주(海州) 지방을 드는데 이 두
곳에서 가장 많이 잡힌다. 청어는 겨울과 봄에 진상한다. 고기를 실은 배가 한강에 와서 정박하면 청어는 즉시
온 시내에 두루 퍼지며 생선장수들은 거리를 따라 청어사라고 소리친다.
통영에서는 껍질이 단단한 전복[甲生鰒]과 대구[大口魚]가 잡히는데 이것도 역시 진상한다. 진상하고 남은
것은 으레 재상들에게 선물로 보내진다.
제주도에서는 귤 ․ 유자 ․ 감귤 등을 진상한다. 그러면 임금은 이것을 종묘에 진상하고 궁중의 가까운 신하들에게
하사한다. 옛날에 탐라의 성주(星主)가 이것들을 바칠 때면 이를 치하하기 위해 과거 시험을 보이는 일이 있었다.
조선에 들어 와서도 이 제도를 따라 태학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감귤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과거
이름을 감제(柑製)라고 하였으며, 시험을 치는 방법은 절일제(節日製)의 그것과 같다. 장원으로 합격한 자에게는
반드시 급제(及第)를 내려 준다.
충청도 홍주 지방의 합덕지(合德池)라는 곳에서는 매년 겨울마다 용이 땅을 가는[龍耕] 듯이 언 못이 갈라지면서
그 위로 긴 금이 생기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
그 금이 남쪽으로부터 북쪽 방향으로 세로로 언덕 부근까지 나면 다음 해는 풍년이 들고, 서쪽으로부터 동쪽 방향
으로 복판을 횡단하여 나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혹 동서남북 이리저리 종횡으로 가지런하지 않게 나면 흉년과 풍년이 반반이라고 한다.
농사꾼들은 이것으로 이듬해의 농사를 추측하는데 잘 맞는다고 한다. 경상도 밀양 지방의 남지(南池)에도 용이
땅을 가는 듯한 얼음 갈라지는 현상이 있어 이듬해 농사일을 예측한다.
메밀국수를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 또 잡채와 배 ․ 밤 ․ 쇠고기 ․
돼지고기 등을 썰어 넣고 기름간장을 쳐서 메밀국수에 비빈 것을 골동면(骨董麵: 비빔냉면)이라고 한다.
평안도 냉면이 제일이다. 내 생각에는 소동파가 쓴 구지필기(仇池筆記)210)에 “나부(羅浮)의 영노(潁老)가
여러 가지 음식을 얻은 다음 모두 섞어서 끓여 먹었는데, 이것을 골동갱(骨董羹)이라고 불렀다.”고 한 것을 보면
‘골동’이란 여러 가지를 섞는다는 뜻으로 지금의 비빔냉면과 같다. 중국의 강남 사람들은 반유반(盤遊飯)이란
음식을 잘 만드는데, 이것은 젓갈 ․ 포 ․ 회 ․ 구운 고기 등 없는 것 없이 밥 속에 넣은 것으로 곧 밥의 골동이며
옛날부터 이런 음식이 있었던 것이다. 작은 무로 김치를 담근 것을 동치미[冬沈]라고 한다. 곶감을 넣어 끓인
물에 생강과 잣을 넣은 것을 수정과(水正果)라고 한다. 모두 겨울철의 시절음식이다. 새우젓국을 깔아 앉힌 후에
무 ․ 배추 ․ 마늘 ․ 생강 ․ 고추 ․ 청각 ․ 전복 ․ 소라 ․ 굴 ․ 조기 ․ 소금 등을 버무려 독에 넣고 묻어 한 겨울을 지내면
그 맛이 얼큰하게 매워 먹음직하다. 또 무 ․ 배추 ․ 미나리 ․ 생강 ․ 고추 등을 장에 절여 김치를 담가 먹는다.
薦복魚于太廟卿士家亦行之按禮記月令季冬之月天子嘗魚先薦寢廟211) 國制亦然有복魚之産統營海州最盛冬春
進供魚舡來泊京江卽遍市上漁商沿街呌賣統營則有甲生鰒大口魚亦爲進上並以封餘例饋卿宰濟州牧進貢橘柚柑
子薦于太廟頒宮掖近侍之臣昔耽羅星主貢獻時稱賀設科本朝因之試太學四學儒生頒柑科名曰柑製考取如節製之
例居魁者必賜第湖西洪州合德池每年冬有龍耕之異自南而北縱而薄岸則歲穰自西而東徑斷其腹則荒或西或東或
南或北橫縱不整則荒穰半農人推之來歲輒驗嶺南蜜密陽南池亦有龍耕以驗年事用蕎麥麵沈菁菹菘菹和猪肉名曰
冷麵又和雜菜梨栗牛猪切肉油醬於麵名曰骨212)董麵關西之麵最良按羅浮潁老取諸飮食雜烹之名曰骨董羹骨董
雜之義也今之雜麵類此江南人好作盤遊飯鮓脯膾炙無不埋在飯下此卽飯之骨董而自古已有此食品也取蔓菁根小
者作菹名曰冬沈以乾柿沈熟水和生薑海松子名曰水正果皆冬節時食也用蝦鹽汁候淸沈蔓菁菘蒜薑椒복角鰒螺石
花石首魚鹽作雜菹儲陶甕和淹經冬辛烈可食又以蔓菁菘芹薑椒沈醬菹食之
12월
납일 臘
납일(臘日)은 원래 동지 후 세 번 째 오는 술일(戌日)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지 후 세 번 째 미일(未日)
로 정하여 종묘와 사직에 큰제사를 지낸다.
내 생각에는 지봉유설에 중국 후한 사람인 채옹(蔡邕)213)의 설을 인용하여 “청제(복帝)는 미일(未日)로
납일을 정하고, 적제(赤帝)는 술일(戌日)로, 백제(白帝)는 축일(丑日)로, 흑제(黑帝)는 진일(辰日)로 각각 납일
을 정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납일을 미일로 한 것은 대개 동방이 목(木)에 속하기 때문이다.”라고하였다.
이 날 내의원(內醫院)에서는 각종 환약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린다. 이것을 납약(臘藥)이라고 하며 임금은 그것
을 측근 신하와 지밀나인(至密內人) 등에게 나누어 하사한다. 청심원(淸心元)은 근심이 많고 소화가 안될 때 잘
듣고, 안신원(安神元)은 신열을 다스리는 데 효과가 있으며, 소합원(蘇合元)은 곽란을 치료하는 데 주효하여
이 세 가지 환약을 가장 요긴하게 여긴다.
정조 임금 때인 경술년(1790년)에 새로 제조한 제중단(濟衆丹)과 광제환(廣濟丸) 두 종류의 환약은 실로 백성에
대한 임금의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으로 소합원보다 효력이 더욱 빠르다. 그것들을 모든 영문(營門)에 나누어
주어 군졸들을 치료하는 데 쓰도록 했다. 또 기로소(耆老所)에서도 납약을 만들어 여러 기신(耆臣)들에게 나누
어주고 각 관서에서도 납약을 많이 만들어 나누어주며 또 서로 선물하기도 한다.
납일 제사에 쓰는 고기로 멧돼지와 산토끼를 쓴다. 경기도 내에 산간 고을에서는 예로부터 납일 제사에 쓰는
돼지를 바치기 위해 그 지방 백성들을 동원하여 멧돼지를 수색하여 잡았으나 정조 임금의 특명으로 이를 폐지
하고 서울 장안의 포수를 시켜 용문산(龍門山), 축령산(祝靈山) 등 여러 산에서 사냥하여 바치도록 했다.
또 이 날 참새를 잡아 어린아이를 먹이면 마마를 잘 넘어갈 수 있다고 하여 항간에서는 그물을 치거나 활을 쏘아
잡았으며 나라에서도 총을 쏘아 잡는 것을 허락하였다.
납일에 내린 눈을 녹인 물은 약으로 쓰이며, 그 물에 물건을 적셔 두면 좀이 슬지 않는다.
本朝用冬至後第三未日置臘行廟社大享按芝峯類說引蔡邕之說복帝以未臘赤帝以戌臘白帝以丑臘黑帝以辰臘我
國臘用未皆以東方屬木云內醫院造丸劑各種以進名曰臘藥頒賜近密淸心元主憫塞安神元主熱蘇合元主癨三種爲
最要健陵庚戌新製濟衆丹廣濟丸二種寔出睿思比蘇合元效尤速頒示諸營門俾爲軍卒救療又自耆老所造臘劑分諸
耆臣各司亦多造出分供又相送遺臘肉用猪用兎畿內山郡舊貢臘猪發民搜捕健陵特罷之以京砲手獵龍門祝靈諸山
以進又捕黃雀飼小兒善痘閭巷間是日張羅挾彈又許放銃以捕之臘雪取水爲藥用漬物則不生蛀
섣달그믐날밤 除夕
조정에 나가는 신하로서 2품 이상과 시종(侍從)들은 대궐에 들어가 묵은해 문안을 드린다. 양반들의 집에서는
사당에 배알한다. 연소자들은 친척 어른들을 두루 방문한다. 이러한 것들을 묵은세배[拜舊歲]라고 하며 이것을
하느라고 이 날은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골목마다 등불이 줄을 이어 끊어지지 않는다.
대궐 안에서는 섣달 그믐 전날부터 대포를 발사하는데 이를 연종포(年終砲)라고 한다. 불화살[火箭]을 쏘고
바라와 북을 치는 것은 곧 옛날에 대나(大儺)를 열어 역질귀신 [疫鬼: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을 쫓던 제도의
흔적이며 또한 섣달 그믐밤과 설날 아침에 폭죽을 터뜨려 귀신을 놀라게 하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중국 북경 풍속은 세밑부터 치고 두드리는 소리로 떠들썩하다가 관등절(觀燈節) 정월 보름 을 지낸 후에야 그치
는데 이것을 연라고(年鑼鼓)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북경의 풍속은 도시 시민들의 풍속을 기록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궁중 안에서만 이를
행한다.
섣달 그믐 하루 이틀 전부터는 우금(牛禁)214)을 완화한다. 형조와 한성부 등 이를 담당하는 관서에서는 단속
관리가 차고 다니는 「우금패(牛禁牌)」를 회수하여 두었다가 설날이 되면 내준다. 이는 서울 사람들에게 이 때
한 번 설고기[歲肉]를 실컷 먹는 기회를 준다는 뜻으로 시행하는 것이지만 간혹 그렇게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인가에서는 섣달 그믐밤에 집집마다 다락 ․ 마루 ․ 방 ․ 부엌에 모두 기름 등잔을 켜놓는다. 등잔은 흰 사기접시
에 실을 여러 겹 꼬아 심지를 만든 것이다. 이것을 외양간과 변소에까지 대낮같이 환하게 켜 놓고 밤새도록
자지 않는데, 이를 수세(守歲)라고 하며 이는 곧 경신일을 지키는 옛 풍속이다[守庚申].215)
내 생각에는 중국 송나라 사람 온혁(溫革)216)의 쇄쇄록(瑣碎錄)에 “섣달 그믐밤에 신당과 불상 앞 및 마루,
방, 변소 등에 모두 등불을 켜서 새벽까지 온 집안을 환히 밝힌다.”고 하였고, 또 동경몽화록에 “도성 사람
들은 섣달 그믐밤에 부엌에 불을 켜놓는 것을 조허모(照虛耗)라고 하며 양반 집이나 일반 백성 집에서는 화롯가
에 둘러앉아 아침이 되도록 자지 않는데, 이것을 수세라고 한다.”217) 고 하였으며, 또 소동파가 촉나라 풍속을
기록하면서 “술과 음식으로 서로 초청하는 것을 묵은해를 전별한다는 뜻으로 별세(別歲)라고 하고 섣달 그믐에
날을 세는 것을 수세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지금 우리의 풍속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속담에 섣달 그믐에 잠을 자면 두 눈썹이 모두 센다고 하여 어린아이들은 대개 이 말에 속아 잠을
자지 않는다. 혹 자는 아이가 있으면 다른 아이가 분가루를 자는 아이 눈썹에 발라놓고 다음날 거울을 보게 하여
놀려주고 웃는다.
붉은 싸리나무 두 토막을 각각 반으로 쪼개어 네 쪽으로 만든 것을 윷[柶]이라고 한다. 길이는 세 치 가량(약
9cm)인데 혹 콩윷이라고 하여 콩같이 작게 만들기도 한다. 윷을 던져 내기하는 놀이를 윷놀이[柶戱]라고 한다.
윷을 던져서 네쪽이 다 엎어지면 모(牟), 네 쪽이 다 잦혀지면 윷[流], 세 쪽이 엎어지고 한 쪽이 잦혀지면 도(徒),
두 쪽이 엎어지고 두 쪽이 잦혀지면 개(開), 한 쪽이 엎어지고 세 쪽이 잦혀지면 걸(杰)이라고 한다. 윷판에는
29개의 동그라미 점을 그린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던지는데 각각 말 네 개씩 쓴다. 도는 한 밭씩 가고, 개는 두
밭, 걸은 세 밭, 윷은 네 밭, 모는 다섯 밭씩 각각 간다. 밭 중에는 돌아가는 길과 질러가는 길이 있어 말이 빨리
가는가 늦게 가는가에 따라 내기를 결정한다.
이 놀이는 정초에 가장 성행한다. 내 생각에는 설문(說文)218)에 사(柶)는 비(匕)라고 하였는데, 특히 네 개
의 나무라는 뜻을 취하여 ‘柶’라고 했다. 또생각건대 지봉유설에서는 윷은 내기놀음[攤戱]이니 즉 저포
(樗蒲: 백제 때 나무로 주사위를 만들어 놀던 놀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윷놀이는 즉 저포의 일종이다.
세속에 섣달 그믐과 정초에 윷을 던져 얻은 괘(掛)로 새해의 길흉을 점치는데 그 방법은 윷사위로 64괘 중의
하나를 정해 그 괘에 해당하는 주사(繇辭: 점괘를 설명하는 말)로써 앞날을 풀이한다. 대개 세 번 던져서 “어린
아이가 젖을 얻는 괘”나 “쥐가 창고에 들어가는 괘”가 나오면 길하다. 어떤 이는 세 번 던지는 중에 첫 번째 던
지는 괘로 지난해의 운수를 보고 새해 설날부터 정월 보름까지 연이어 윷을 놀아 얻은 점괘로 올해의 운세를
본다.
항간의 부녀들은 색칠하지 않은 맨 널빤지를 짚단 위에 횡으로 올려놓고 그 양끝에 마주 올라서서 서로 오르
내리면서 몇 자씩 뛰는데 힘이 빠져 지칠 때까지하며 즐긴다. 이 놀이를 널뛰기[跳板戱]라고 하며 정월 초까지
이 놀이를 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 청나라 사람 주황(周煌)219)의 유구국기략(琉球國記略)에“그 나라 부인들이 널빤지 위
에서 춤추는 것을 판무(板舞)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 풍속과 서로 비슷하다.
함경도 풍속에는 이 날 빙등(氷燈)을 설치하는 것이 있는데 아름드리 기둥 같은 초롱 속에 기름 심지를 안전
하게 놓고 불을 켠 채 밤을 새워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나례굿[儺戱]을 한다.
이를 청단(복壇)이라고 한다.
평안도 풍속에서도 빙등을 설치하며 각 도의 고을에서도 각기 그 고유 풍속대로 한 해를 마치는 놀이를 행한다.
의주(義州) 지방 풍속에는 각 마을에서 딱총[紙砲]을 놓는데 중국 북경의 풍속을 모방한 것이다.
朝官二品以上及侍從之臣詣闕舊歲問安士夫家謁廟年少者歷訪姻親長老曰拜舊歲自昏至夜街巷行燈相續不絶闕內
自除夕前日發大砲號年終砲放火箭鳴鑼鼓卽大儺驅疫之遺制又倣除夕元朝爆竹驚鬼之制也按燕京俗年底喧闐至燈
節上元日後方止曰年鑼鼓燕俗記都下之風而我國只於禁中行之自除夕前一二日弛牛禁諸法司藏牌至正朝而止爲都
民歲肉一飽之意而或不行人家樓廳房廚皆張油燈白磁一盞紮絮爲心以至廐溷晃如白晝達夜不睡曰守歲卽守庚申之
遺俗也按溫革瑣碎錄220)除夜神佛前及廳堂房溷皆明燈至曉主家室光明又按東京夢華錄都人至年夜竈裏點燈謂之
照虛耗221) 士庶之家圍爐團坐達朝不寐謂之守歲又按東坡記蜀俗云酒食相邀呼爲別歲除夜不眠爲守歲今俗昉於此
諺傳除夜睡兩眉皆白小兒多見瞞不睡或有睡者他兒以粉抹其眉攪使對鏡以爲戱笑赤荊二條剖作四隻名曰柶長可三
寸許或小如菽擲而賭之號爲柶戱四俯曰牟四仰曰流三俯一仰曰徒二俯二仰曰開一俯三仰曰杰局畵二十九圈二人對
擲各用四馬徒行一圈開行二圈杰行三圈流行四圈牟行五圈圈有迂捷馬有疾徐以決輸嬴歲時此戱最盛按柶說文云匕
222)也特取四木之義謂之柶又按芝峯類說以爲儺戱卽樗蒲也柶戱者便是樗蒲之類也世俗除夜元朝以柶擲卦占新歲
休咎占法配以六十四卦各有繇辭凡三擲如兒得乳鼠入倉之類則吉或云三擲內初擲觀舊歲至歲初上元連擲柶卦觀之
閭巷婦女用白板橫置藁枕上對踏兩端相升降而跳數尺許以困頓爲樂謂之跳板戱至歲初如之按周煌琉球國記略其婦
舞於板上曰板舞與此俗相類關北俗設氷燈如圍柱中安油炷以達夜鳴鉦鼓吹喇叭設儺戱號복壇關西俗亦設氷燈諸道
州邑皆以其俗行年終之戱義州俗閭里放紙砲效燕京之俗也
기타 12월 행사 月內
이 달 초하룻날 이조에서 조정 관리 중에 파면되었거나 품직이 강등되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것을 세초(歲抄)라고 한다. 임금이 세초의 관리명단 아래에다 점을 찍으면 해당자는 서용(敍用),
즉 다시 기용되거나 감등(減等), 즉 벌이 감해진다. 6월 초하루에도 그렇게 하는데 시기를 이렇게 정하는 것은
대체로 이와 같이 관리를 평가하는 대정(大政)223) 행사를 6월과 12월에하기 때문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어서 사면을 하게 될 때는 별도의 세초를 작성하여 바치는데, 이러한 것들은 대개 임금이 관대
한 정치를 하고자 은전을 베푸는 데서 나온 것이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두 절도사(節度使)는 으레 조정의 벼슬아치와 친지의 집에 세찬(歲饌)을 보내며 각 도의 감사 ․
병사들과 군 ․ 현의 수령들도 세궤(歲饋)의 예에 따라 세찬을 보낸다. 이 때 편지 봉투 안에다 각종 토산물의 목록
을 열거한 작은 별지(別紙)를 접어 넣는데 이 별지를 「총명지(聰明紙)」라고 한다. 각 관서의 아전들도 살아있는
꿩이나 곶감 등을 자기와 친한 집에 선물하며 문안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 진(晉)나라 때 사람인 주처(周處)224)의 풍토기(風土記)에“촉나라 지방 풍속 중 연말에
서로 선물하고 문안하는 것을 궤세(饋歲)라고 한다.”고 하였고, 또 소동파의 시에 “상을 차리니 큰 잉어가 가로로
놓이고, 소쿠리를 여니 토끼 두 마리가 누워 있네.”225) 라고 한 것을 보면 이 풍속은 옛날부터 그러했던 것이다.
장년 또는 그보다 어린아이들은 제기차기[蹴鞠] 놀이를 한다. 제기 모양은 큰탄환 같은데 그 위에 꿩 깃을 꽂아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다리 힘을 겨루는 것이며,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해서 많이 차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중국 전한(前漢) 시대 학자인 유향(劉向)226)의 별록(別錄)에 “한식날 차는 제기는 황제가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고, 혹 어떤 이는 “제기차기는 전국시대에 시작되었는데 곧 군대의 힘이 되었으며 다른 말로는
백타(白打)라고도 한다.”고하였는데, 지금 우리의 풍속도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겨울부터 시작되며 새해가 되어
서는 더 많이 찬다.
강원도 동북부에 위치한 고성(高城) 지방 풍속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해당 관가에서 군사당(郡祀堂)에 제사
를 지내는데, 비단으로 신의 탈을 만들어 사당안에 보관해 두었다가 이 달 20일이 지나 그 신이 고을로 내려오면
고을 사람들은 그 탈을 쓰고 춤을 추며 관아 안과 읍내와 촌을 돌아다니며 논다. 그러면 각 집에서는 그 신을 맞
이하여 즐겁게 놀린다. 그러다가 이듬해 정월 보름날 이전에 그 신은 사당 안으로 돌아간다. 이 풍속은 해마다
행해지며 대체로 나신(儺神)227)의 일종인 것이다.
朔日自選部抄啓朝官中罷削人名曰歲抄點下者敍用或減等六月朔亦然盖因大政在於六臘故也因有慶赦別歲抄入啓
盖出䟽蕩之典也關西海西兩節度例送歲饌於朝紳曁親知家各道藩閫守令亦歲饋之例書緘中另具小搨紙列錄土産諸
種謂之聰明紙各司胥隸亦有228)以生雉乾柿等物饋問於所親家按周處風土記蜀俗晩歲相饋問謂之饋歲又按東坡詩
寘229)盤巨鯉橫發籠雙兎臥此風自古而然矣丁壯年少者以蹴鞠爲戱鞠230)如大彈丸上揷雉羽兩人對立脚勢相交以
連蹴不墜爲善技按劉向別錄寒食蹋蹴黃帝所造或云起於戰國之時乃兵勢也一曰白打今俗沿于此而自冬爲始至歲時
尤盛高城俗郡祀堂每月朔望自官祭之以錦緞作神假面藏置堂中自臘月念後其神下降於邑人着其假面蹈舞出遊於衙
內及邑村家家迎而樂之至正月望前神還于堂歲以爲常盖儺神之類也
윤달
세속의 관념에는 윤달에는 장가가고 시집가기에 좋다고 하고, 또 죽은 자에게 입히는 수의(壽衣)를 만들기에도
좋다고 하는 등 모든 일에 꺼리는 것이 없다.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는 봉은사(奉恩寺: 현재 위치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는 매번 윤달을 만날 때마다
장안의 여인들이 다투어 와서 불공을 드리며 부처 앞에 돈을 놓는다. 이러한 일은 윤달 한달 내내 끊이지 않고
계속되며, 이렇게하면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면서 사방의 노파들이 물밀 듯이 분주히 달려와 다투어 모인다.
서울과 지방의 대부분의 절에서 이런 풍속을 볼 수 있다.
俗宜嫁娶又宜裁壽衣百事不忌廣州奉恩寺每當閏月都下女人爭來供佛置錢榻前竟月絡續謂如是則歸極樂世界四方
婆媼奔波競集京外諸刹多有此風
1)
「뒤쪽 계보도(系譜圖)」참조.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저자 홍경모(洪敬謨, 1774~1851)는 홍양호의
손자로 홍석모와는 6촌간이다. 일제 때 신간회를 주도하고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남긴 홍명희(洪命憙)와
국어학의 대가인 그의 아들 홍기문(洪起文)도 이 추만공파(秋巒公派) 계보(系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계보는
풍산홍씨대동보(豊山洪氏大同譜)(1985年刊) 및 풍산홍씨추만공종문세계도(豊山洪氏秋巒公宗門世系圖)
(1987年刊)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2)
“給前府使洪錫謨衣資食物以入參華城內宴之人回巹已過也.” 철종실록(哲宗實錄) 권7,철종(哲宗) 6년 3월
정묘(丁卯).
3) 자세한 내용은 韓國服飾 12호(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1994) 참조.
4)
예컨대 「수곡양이학사주갑서(壽縠瀼李學士周甲序)」및 「제곡양이자유교영문(祭縠瀼李子有敎英文)」(도애시
문선(陶厓詩文選)) 등이 있다.
5)
사고전서(四庫全書) 사부(史部)10 시령류(時令類) 「세시광기(歲時廣記)」제요(提要)및 예기(禮記) 권6
월령(月令) 등 경부(經部) 월령류(月令類) 참조.
6)
중국 북주시대 사람으로 초나라 풍속 36종을 수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지었다.
7) 연세대학교 소장본(앞으로‘연대본’이라고 함)에는 “弦”으로 되어 있다.
8)
전문(箋文)은 하례(賀禮)의 내용을 담아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고, 표리(表裏)는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下賜)
하는 포상품 중에 관복(官服)을 만들 겉감과 속감을 말한다.
9)
최식(崔寔)은 중국 후한 때 사람으로 사농공상 사민(四民)의 연중행사를 사민월령(四民月令)에 담았는데,
예기(禮記)를 모방한 월령체제로 이들의 생산과 생활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고금사문류취(古今事文類
聚)에 나오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元日進椒柏酒椒是玉衡星精服之令人身輕能走柏是仙藥進酒次第以年少者
為先.”
10)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는 초나라 풍속 36종을 수록한 세시기(歲時記)다. 중국 육조시대 후베이(湖北)와
후난(湖南) 지방의 연중행사와 풍속을 기록한 책으로, 6세기 중엽에 양나라 종름(宗懍)이 편찬하였다.
현존하는 중국 세시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초나라 특유의 세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풍속도 기술되어
있다.
11)
이광려(李匡呂)는 조선 영조 때의 사람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월암(月巖), 칠탄(七灘)이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천거를 받아 참봉이 되었다.
12)
우포잡기(寓圃雜記)는 모두 10권으로, 중국 명나라 홍무(洪武)에서 정통(正統) 연간의 조야(朝野) 사적을
실었다.(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참조.) 왕기는 중국 명나라 장주(長州) 사람으로 자는 원우(元禹),
별호는 몽소도인(夢蘇道人)이다.
13)
육방옹(陸放翁)은 중국 송나라 산음(山陰) 사람으로, 이름은 유(游)이며, 방옹은 그의 호이다. 보장각(寶章閣)의
대제(待制)를 지냈고 85세를 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14)
시종(侍從)은 옥당(玉堂) ․ 대간(臺諫) ․ 검열(檢閱) ․ 주서(注書) 등 임금 곁에서 일을 보는 관직을 말하며,
당하(堂下) 문관(文官)은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의 문관직을 말한다.
연상시(延祥詩)는 상서로움을 맞이하는 시다.
15)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자는 군실(君實), 호는 제물자(齊物子), 시호는 문정(文正)
이다. 저서에 자치통감(資治通鑑), 독락원집(獨樂園集), 서의전가집(書儀傳家集) 등이 있다.
16)
서대조(書待詔)는 중국 당나라 때 만들어진 한림원(翰林院) 관직명으로 문사(文詞)와 경학(經學)에 밝은 선비가
이 직을 맡아 사방의 표(表), 소(疏), 비답(批(), 문장(文章)등을 정리하였다.
17)
여희철(呂希哲)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자는 원명(原明)이다. 저서에 여씨잡기(呂氏雜記)가 있다.
원문은 고금사문류취(古今事文類聚)를 참조하였다.
18)
절월(節鉞)은 부절(符節)과 부월(斧鉞)로 이것을 장수에게 내려 권력을 더하는 뜻을 나타내었다.
19)
종규(鍾馗)는 역귀(疫鬼)나 마귀를 쫓는다는 중국의 신으로, 이것의 형상을 문에 붙여 악귀를 막는 풍속이
당송(唐宋) 때 성행했다고 한다.
20)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있는 네 신(神)으로 사방을 진호(鎭護)하는 주신(主神)이다.
21)
울지공(尉遲恭)은 중국 당나라 선양(善陽) 사람으로 울지는 성이고 공은 이름이며 자는 경덕(敬德)이다.
태종을 도와 전공을 올린 공로로 악국공(鄂國公)에 봉해졌다.
22)
진숙보(秦叔寶)는 중국 당나라 역성(歷城) 사람으로 울지공과 동시대인이며 태종을 도와 전공을 올린 공로로
익국공(翼國公)에 봉해졌다.
23)
위정공(魏鄭公)은 중국 당나라 태종 때의 학자이자 재상인 위징(魏徵)을 말한다. 자는 현성(玄成)이다.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24)
송민구(宋敏求)는 중국 송나라 때 학자로 자는 차도(次道)이다. 당의 무종(武宗) 이후의 실록을 사찬(私撰)하였
고 용도각(龍圖閣) 직학사(直學士)를 지냈다. 유명한 장서가다. 춘명퇴조록(春明退朝錄), 당대조령집
(唐大詔令集), 장안지(長安志) 등이 있다. 춘명퇴조록은 상중하 3권으로 구성되어있다.
25)
갈장군(葛將軍)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사(謀士)인 제갈량(諸葛亮)을 말한다. 제갈량이 장(杖)과 절(節)을
군문(軍門)에 세워 상대방을 이긴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26)
주장군(周將軍)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서(舒) 지방 사람인 주유(周瑜)를 말한다. 자는 공근(公瑾)이다.
27) 본문의 문황(文皇)은 중국 당나라 태종을 말한다.
28)
문황 때의 괴담이란 당시의 재상 위징(魏徵)이 남해의 용왕에게 해를 가한 이후 용왕이 문황을 자주 괴롭히자
이를 울지공과 진숙보가 막아주었다는 내용이다. 경도잡지(京都雜志) 원일(元日)조에 같은 내용이
나온다.
29) 연대본에는 “鋪”, 광문회본에는 “餔”로 되어 있다.
30)
세시잡기(歳時雜記)의 원문은 “學士院端午前一日撰皇帝皇后夫人閤門帖子送後苑用羅帛製造及期進入”이다.
31) 연대본과 광문회본에는 “傳”으로 되어 있다.
32) 조관(朝官)은 조정에 출사(出仕)하는 관원을 말한다. 조신(朝臣)이라고도 한다.
33)
명부(命婦)는 궁중에서 일하는 여관(女官)인 내명부와 종친이나 문무관의 처로 작(爵)을 받은 외명부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34)
자(資)는 자급(資給)이라고도 하며 관원의 위계를 말한다. 정3품 이상의 품계를 올릴때 가자(加資)라고 한다.
35) 품계(品階)는 직품(職品)과 관계(官階)로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계급이 있다.
36) 비답(批()은 상소(上疏)에 대한 임금의 하답(下(), 즉 답변을 말한다.
37)
동훈(董勛)은 중국 후한시대 사람이다. 문례(問禮)란 한위유서초소록문예속(漢魏遺書鈔所錄問禮俗)
이란 책의 약칭이다. 이 책에 나오는 그가 한 말 중에 설날 도소주(屠蘇酒)를 나이 어린 사람부터 마시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린 자는 나이 먹는 일이 축하할 일이지만 늙은 자는 세월을 잃었으므로 벌을 주는 의미라고
하였고, 설 다음날부터 서로 불러 음식을 나누어 먹었는데 이것을 전좌(傳座)라고 하였다.
38)
각 달은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은 계절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1월부터 12월까지 각각
맹춘(孟春), 중춘(仲春), 계춘(季春), 맹하(孟夏), 중하(仲夏),계하(季夏), 맹추(孟秋), 중추(仲秋), 계추(季秋),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등으로 부른다. 12간지의 동물을 붙인 이칭(異稱)도 있는데, 동지가
들어있는 11월부터 다음해 10월까지 각각 쥐달[子月], 소달[丑月], 호랑이달[寅月], 토끼달[卯月], 용달[辰
月],뱀달[巳月], 말달[午月], 양달[未月], 잔나비달[申月], 닭달[酉月], 개달[戌月], 돼지달[亥月]로 부른다.
그 밖에도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는 달의 별칭이 있는데, 1월은 원월(元月), 동지가 들어있는 11월은 지월(至月),
12월은 납월(臘月) 등이 그 예다.
39) 삼재(三災)는 수재(水災) ․ 화재(火災) ․ 풍재(風災)를 말한다.
40) 복설(卜說)은 미래의 운세나 길흉을 알기 위해 치는 점에 관한 설명체계를 말한다.
41)
손사막은 중국 당나라 화원(華原) 사람으로 백가(百家)의 설에 통했으며 특히 의약에 정통했다. 벼슬에는 나아
가지 않고 100여 세를 살았다. 천금요방(千金要方), 복록론(福祿論), 섭생진록(攝生眞籙),
은해정미(銀海精微) 등의 저술이 있다.
42)
인일은 범날이라고도 하며 갑인일(甲寅日), 병인일(丙寅日), 무인일(戊寅日) 등과 같이 일진의 지지(地支)가
인(寅)으로 된 날이다.
43)
약왕이란 약왕보살(藥王菩薩)로 중생들에게 좋은 약을 시여(施與)하여 심신의 병고를 고쳐주는 보살이다.
44) 오부(五部)는 중부, 동부, 서부, 남부, 북부의 5개 부를 말한다.
45)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의 원문은 “帖畵雞或斲鏤五采及土雞於戶上”이다.
46)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풍속(風俗)」
47) 연대본, 광문회본에는 “錢”으로 되어있다.
48)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풍속(風俗)」
49) 춘련이란 입춘 날에 집 기둥이나 바람벽에 붙이는 시구(詩句)를 말한다.
50) 의춘(宜春)이란 풍우가 고른 봄이라는 뜻이다. 유사한 말로 적춘(適春)이 있다.
51)
관상감은 조선시대에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수(曆數), 점산(占算), 측후(測候), 각루(刻漏) 등에 관한 사무를
받아 보던 기관이다.
52) 주사는 붉은 물감이다.
53) 책사란 죄인을 찢어 죽이는 참형(斬刑)으로 시체는 시정 거리에 버린다.
54)
속한서(續漢書)는 사마표(司馬彪)가 편찬한 것이다. 사마표의 자는 소통(紹統)이며 진(晉)나라 종실(宗室)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전체로 광무(光武)에서 헌제(獻帝)까지 200년간 12세를 80권으로 엮어 속한서
를 편찬하였다. 후에 망실된 것을 후한서(後漢書)로 복원되면서 「십지(十志)」는 「팔지(八志)」만 남았다.
그중 두 번째가 「예의지」다.
55)
납일(臘日)이란 납향(臘享)하는 날이다. 원래는 동지 후 셋째 술일(戌日)이었으나 조선태조 이후에는 셋째
미일(未日)로 정하였다.
56)
대나(大儺)는 고려ㆍ조선조 때 섣달 그믐날 전날 밤에 악귀를 쫓기 위해 궁중에서 베푸는 의식으로 관상감
(觀象監)이 주관한다. 창수(倡首) 1인ㆍ방상씨(方相氏) 4인ㆍ지군(持軍) 5인ㆍ판관(判官) 5인ㆍ초라니 2인ㆍ
조왕신(竈王神) 4인ㆍ십이신(十二神) 12인ㆍ악공(樂工) 10여 인 등 40여 명이 궁중 뜰에 서면 창수가 주문을
외면서 십이신을 쫓아내고 초라니는 머리를 짓찧으면서 복죄(伏罪)하며, 여러 사람은 소리 소리쳐서 악귀를
각 방위에 따라 사문(四門) 밖으로 몰아내는 식으로 진행된다.
57)
계옥(桂玉)은 계수나무보다 비싼 장작과 옥보다 귀한 밥이라는 뜻으로, 생활고를 비유한 말이다.
58) 여기서 여섯 고을이란 산이 많은 동북부 지역의 포천(抱川), 연천(漣川), 적성(積城),양근(楊根), 삭령(朔寧),
마전(麻田) 등지를 말한다.
59)
척유(摭遺)는 18권으로 되어 있으며, 6책으로 이루어진 남강역사(南疆繹史)에 있다.
중국 청나라 이요(李瑤)가 편찬하였다. 이요의 자는 임익(臨翼),호는 신원(哂園)이며 절강 사람이다.
척유는 모두 열전(列傳)으로 왕실부터 간신까지 18목(目)으로 구성 되어 있다.
60)
척언(摭言)은 중국 오대 시기 사람인 왕정보(王定保)가 지은 책으로 원래 명칭은 당척언(唐摭言)이다.
61)
다섯 가지 매운 음식이란 자극성 있는 다섯 가지 채소류, 즉 오훈채(五葷菜)로 파(蔥),달래(小蒜, 茖蔥), 마늘
(大蒜), 염교(薤), 무릇(興渠) 등을 말한다. 도가에서는 부추, 염교, 마늘, 운대, 고수풀 등을 든다.
62)
두보의 「입춘(立春)」시다. 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권13에 있다. “春日春盤細生菜忽憶兩京梅發時盤出髙
門行白玉菜傳纎手送青絲巫峽寒江那對眼杜陵逺客不勝悲此身未知歸定處呼兒覔紙一題詩.”
63)
소식(蘇軾, 1036~1101)은 중국 송나라 때 시인으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동파(東坡)는 그의 호이다.
시 제목은 「송범덕유(送范德孺)」로 동파전집(東坡全集) 권29에있다. “漸覺東風料峭寒青蒿黄韭試春盤遙想慶
州千嶂裏暮雲衰草雪漫漫.”
64) 관북지방은 마천령(摩天嶺) 북쪽에 있는 지방으로 함경남 ․ 북도를 총칭하는 말이다.
65) 연대본에는 “二”가 빠져 있다.
66) 연대본에는 “簡”이 “間”으로 되어 있다.
67) 연대본에는 “祖”가 “粗”로 되어 있다.
68) 연대본에는 “磔”이 “桀”로 되어 있다.
69)
연대본, 광문회본에 신다(神茶)로 표기되어 있으나 잘못된 표기이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繪二神貼户
左右左神荼右鬱壘俗謂之門神”라고 하여 신도(神荼)라 하였다.
70)
여기서 세시기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말한다. 그러나 “7일에 인승을 올린다(七日上人勝于人).”
는 글은 유진의 처 진씨의 「진견의(進見儀)」에 나오고, “혹은 비단을 오려 만든 것도 있고 혹은 금박을 새겨 만든
것도 있다(或剪綵或鏤金箔爲之).”는 글은 동훈의 문예속(問禮俗)에 나온다.
71)
유진(劉臻)은 중국 수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선지(宣摯)다. 그의 처 진씨는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정월 초하루
와 동지에 「진견의(進見儀)」를 지었는데, 이것이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72)
동경잡기는 경상도 경주부(慶州府)의 지지(地誌)이다. 작자미상으로 전해오던 동경지(東京誌)를
1669년 민주면(閔周冕) 등이 향중인사와 함께 편집, 보완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라고 개칭, 간행하였다.
이후 1711년 첨보(添補)하여 재간하였다.
73)
시경 「빈풍」은 8권에 있으며 7월편은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시(天時)를 따라 민사(民事)가 주어진다는
내용이다.
74)
나후직성(羅睺直星)이란 제웅직성이라고도 하며 나이에 따라 그 해의 운수를 맡아보는 아홉 직성, 즉 일요(日曜),
월요(月曜), 화요(火曜), 수요(水曜), 목요(木曜), 금요(金曜),토요(土曜), 나후(羅睺), 계도(計都)의 구요(九曜) 중
하나다. 이중 나후와 계도의 운행이 다른 것들과 역행하여 교차의 정도가 심하면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각기 1주에 18년이 걸리며 개인에게는 9년마다 한번씩 이 직성에 걸리는데 남자는 10세 때,
여자는 11세 때 처음 든다고 한다.
75)
이것은 재력가들이 밟고 다니는 시전거리 흙을 옮겨옴으로써 재복도 함께 옮겨지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뜻이
담겨있다.
76) 광문회본에는 “再”가 “幷”으로 되어 있다.
77)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의 원문은 “正月十五日作豆糜加油膏其上以祠門戶按齊諧記曰正月半有神降陳氏之
宅云是蠶室若能見祭當令蠶桑百倍疑非其事祭門備之七祠今州里風俗是一作望日祠門戶其法先以楊枝插於左右門
上隨楊枝所指乃以酒脯飲食及豆粥餻糜插箸而祭之”이다.
78) 섭정규(葉廷珪)는 중국 송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사충(嗣忠)이다.
79) 사일(社日)은 입춘이 지난 뒤 다섯 번째 오는 무일(戊日)이다.
80)
이것은 시경(詩經) 권2 「패풍(邶風)」곡풍(谷風)조에 나오는 내용으로, 본문에는 “御冬之旨畜”으로 나와
있으나 원문은 “我有旨畜亦以御冬”이다.
81)
범성대(范成大)의 자는 치능(致能), 호는 석호거사(石湖居士)다. 석호집(石湖集), 남비록(攬轡錄) 등의
저서가 있다. 「매치애사(賣癡獃詞)」는 더위를 팔 듯 멍청함을 사가라는 당시의 풍속을 읊은 시다.
매치애(賣癡獃)란 “너의 어리석음과 못생김을 팔아라(賣汝癡賣汝獃)”란 뜻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오(吳)나라에
못생긴 사람들이 많아 아이들이 이를 꺼려 팔려고 하였다고 한다.
82)
서광계(徐光啓)는 중국 명나라 때의 학자로 자는 자선(子先), 호는 현호(玄扈)다. 마테오릿치로부터 천체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역법에 정통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1639년에 간행된 농정전서(農政全書)가 있는데,
이 책에 실린 수리시설에 관한 지식은 조선 정조 때 화성 경영에 적용된 바 있다.
83)
농정전서는 1639년에 간행된 서광계의 저서로 전 60권이다. 한나라 이후로 발달해 온 농가의 설을 총괄 하고
수력학과 지리학을 참조한 중국 최고의 농정서(農政書)다.
84)
유종본(兪宗本)은 당나라 사람으로 종수서(種樹書)를 지었다. 그의 생몰년이나 출신지 등은 미상이다.
85)
화력신재(花曆新栽)는 중국 청대에 주요 화훼식물을 소개한 책이다. 작자 진호(陳淏)는 절강(浙江) 항현
(杭縣) 사람으로 자호는 서호화은옹(西湖花隱翁)이다. 1612년에 태어났으며 70세가 넘은 나이에 책을 냈다.
화력신재는 그의 전서(全書) 6권 중 1권으로 월별로 꽃의 종류를 소개하였다.
86) ○○○은 성명, △△은 “干支”, 즉 누구의 몸에 있는 액운이 소멸되라는 뜻이다.
87)
수표교(手標橋)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물의 깊이를 재는 수표(手標)가 서울 중심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개천의 마전교(馬廛橋) 서쪽(현재의 청계천 2가)에 세워진 후 수표와 관련하여 붙여진 돌로 만든 다리 이름
이다.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현 위치인 장충동 장충공원 입구로 옮겼다.
88)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의 원문은 “正月七日為人日以七種菜為羹”이다.
89) 연대본에는 ‘衛風’이라고 되어있으나 시경(詩經)의 내용이므로 ‘邶風’으로 하였다.
90)
「매치애사(賣癡獃詞)」의 원문은 “除夕更闌人不睡厭禳鈍滯迎新歲小兒呼呌走長街云有癡獃召人買”이다.
91) 연대본에는 “微”으로 되어 있다.
92) 광문회본에는 “牢”로 되어 있다.
93)
순라란 도둑이나 화재 등을 경계하기 위해 밤에 통행금지 시간을 정하고 궁중과 도성둘레를 순시하는것을 말한다.
94) 위술은 중국 당나라 때 사람으로 국사(國史)를 40년간 관장하고 20년간 사관(史官)을 맡았다.
95) 운종가로 현 보신각이 있는 곳에서부터 종로 3가까지의 길을 말한다.
96)
대소 광통교는 대광통교(大廣通橋)와 소광통교(小廣通橋)로 현재 서울의 광교 부근 청계천에 설치된 다리가
대광통교이고 아래로 을지로 쪽에 설치된 다리가 소광통교다.
97)
옹주(雍州)와 낙주(洛州)에서 일어났던 영이(靈異)한 일들을 기록한 책으로 옹주와 낙주를 포함한 9개 대주
(大州)의 일들이 10권으로 된 영이록(靈異錄)에 들어 있다.
98)
북경세화기는 중국 청대에 우씨(尤氏)가 서문을 쓴 예문지(藝文志) 안에 수록되어 있으나 작자와
출처는 미상이다.
99) 제경경물략은 유동(劉侗)과 우혁정(于奕正)이 편찬하였다. 유동은 명나라 마성(麻城)사람으로 장관을
지냈다. 우혁정은 명나라 완평(宛平) 사람으로 초명은 계로(繼魯), 자는 사직(司直)이다.
효심과 우애가있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형제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시골에 거하면서 종일 독서하고 시
짓고 명산을 유람하였다. 남긴 책으로는 금석지(金石志),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 등이 있다.
100) 심방(沈榜)은 중국 명나라 때 사람이다. 완서잡기는 20권으로 된 책이다.
101)
지봉유설은 이수광의 학문세계가 집약된 저술로서 20권 10책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주로 고서와 고문에서 뽑은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이면서 유서(類書)의 성격을 지닌다.
수록된 주요 내용은 총 25분야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은 조선중기의 유학자이자 문학자로 본관은 전주
(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이다.
102)
여기서 삼문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및 그 중간의 소의문(昭義門: 서소문)을 말한다.
103) 우수현(雨水峴)은 현재의 남대문 밖 도동 부근이다.
104)
신당서(新唐書)는 전체 225권으로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송기(宋祁) 등이 편찬한 것이다.
권210 열전(列傳) 145에 「고려전(高麗傳)」이 있다.
105)
동박삭(東方朔)은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천(曼倩)이고 시중(侍中) 벼슬에 올랐다가 장수하였다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삼천갑자 동방삭’의 주인공이다.
106)
서도잡기(西都雜記)의 원문은 “西都京城街衢有金吾曉暝傳呼以禁夜行惟正月十五日夜敕許金吾弛禁前後各
一日”이다.
107)
옹락영이록(雍洛靈異錄)의 본래 서명은 옹락영이소록(雍洛靈異小錄)으로 원문은“唐朝正月十五夜許三
夜夜行其寺觀街巷燈明若畫山棚高百餘尺神龍以後復加嚴飾士女無不夜遊車馬塞路有足不躡地浮行數十步者”이다.
108) 연대본, 광문회본에 “晬”로 되어 있다.
109)
지봉유설 권1 「시령부」절서(節序)조에 실린 원문은 “俗以上元月出占歲豐稔又是夜爲踏橋之戱始自前朝在平
時甚盛士女騈闐達夜不止法官至於禁捕”이다.
110)
결하희(絜河戱)란 줄다리기를 말한다. 결하는 중국 창주(滄州) 남피현(南皮縣)에 있는 하천 이름이다.
111)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이다.
11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제영(題詠)」
113) 이필(李泌)은 중국 당나라 덕종 때 사람으로 자는 장원(長遠)이다.
114) 봄을 의미한다.
115)
“향랑각시야. 속히 천리 밖으로 가라.”는 뜻이다. 향랑각시는 노린 냄새가 나는 노래기를 미화하여 지은 말이다.
노래기는 음습한 곳에 산다.
116) “東”은 봄을 의미한다.
117) 연대본에는 “餙”라고 되어있으나 여기에서는 광문회본의 “飾”을 따랐다.
118)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풍속(風俗)」
119)
농가언(農家諺)은 농가에서 쓰는 속담을 모은 책이다. 저자 최식은 중국 후한 때 사람으로
사민월령(四民月令)을 지었다.
120) 본문은 “二月昏參星夕杏花盛桑葉白.”이다.
121) 예기는 주나라 말기 이래 고례(古禮)에 관한 설을 정비한 책이다.
122) 예기(禮記)의 원문은 “天子乃鮮羔開氷先薦寢廟”이다.
123) 연대본, 광문회본에는 “徵”이 “微”로 되어있다.
12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풍속(風俗)」
125)
주례는 주나라 때 작성되고 후대에 증보한 중국 최고(最古)의 법전으로 당대 이후부터 이렇게 불렸다.
일반적인 풍속도 기술되어 있다.
126)
정정칙(鄭正則)은 당나라 시어사(侍御史)로 사향의 1권을 지었다. 본문은 고금사문류취(古今事文類聚)
의 「묘제지시(墓祭之始)」에 나온다.
127)
개자추(介子推)는 중국 춘추시대 은사(隱士)로, 진나라 문공을 19년 모셨는데 봉록을 받지 못해 산에 숨었는데
문공이 뒤늦게 이를 깨닫고 그를 나오게 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으나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
128) 연대본, 광문회본에는 “焚”으로 되어 있다.
129) 독막[甕幕]을 ‘동막’이라고 발음하여 동막(東幕)으로까지 변하였다.
130)
정월 상해일(上亥日), 중해일(中亥日), 그리고 하해일(下亥日)의 3해일에 단계적으로 빚어 익힌 술 이름이다.
131)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덕수 이씨로 자는 자민(子敏)이고 동악은 호다. 60세가 넘어 말년까지도 줄곧
외직으로 전국을 다니다시피 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세시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기마다 표현하고 있어서 이를 모은 문집 동악집은 27권의 자료로 가치가 높다.
132) 옥해주(玉薤酒)는 중국 수나라 양제(煬帝)가 만들었다는 술이다.
133) 연감류함(淵鑑類函)의 원문은 “二社重陽尚食糕而重陽為盛大”이다.
134)
필운대(弼雲臺)는 현재 종로구 필운동 배화여중고 뒤편에 있다. 선조 때 이항복이 장인 권율 집에 있을 때
그곳 석벽에 새긴 글씨이기도 하다.
135) 북둔(北屯)은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마을로 과거 어영청(御營廳)의 북둔이 있었다.
136)
향음주례(鄕飮酒禮)는 고을 유림들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시는 군현단위 의례의하나다.
137) 청안(淸安)은 과거에 현이었으나 지금은 충청북도 괴산군 소속 면이다.
138)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강원도(江原道)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풍속(風俗)」
13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고적(古跡)」
14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풍속(風俗)」
141)
연대본, 광문회본에 “禮俗相成”으로 되어있다.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네 가지는 향약(鄕約)의 4가지 덕목으로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鄕約)의 4조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4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 용안현(龍安縣) 풍속(風俗)」
14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풍속(風俗)」
144) 욕불일(浴佛日)은 불상에 향수를 뿌리며 관불 의식을 거행하는 날이다.
145) 승기전(乘機箭)은 화살에 불을 붙여 당기는 병기(兵器)이다.
146) 「여오군채서(與吳君采書)」는 소동파의 시 제목이나 출처는 미상이다.
147) 난새[鸞鳥]는 봉황의 일종이다.
148) 남산 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누에머리처럼 생긴 바위다. 반적인 풍속도 기술되어 있다.
149) 석남(石楠)은 상록활엽관목으로 녹나무로 부른다.
150) 장원(張遠)은 중국 송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행지(行之)이며 산에 은거하였다.
151) 연대본에는 “飾”이 “餙”로 되어 있다.
152) 연대본, 광문회본에는 “徵”이 “微”로 되어 있다.
153)
예원자황(藝苑雌黃)은 20권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한나라 헌제(獻帝)때 그릇되고 거짓된
지식들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만든 책으로 20개 목(目)에 각 20조(條)씩 400조로 이루어 졌다.
154)
본문은 세시잡기(歲時雜記)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사문류취(事文類聚) 등에는 단지 작자
미상의 세시기(歲時記)로 표기되어 있어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155)
계암만필(戒菴漫筆)은 8권이다. 저자 이후의 자는 후덕(厚徳), 호는 계암노인(戒菴老人)이다.
강음(江隂)사람으로 생활이 어려워 과거에 나가지 못하고 80여 세를 살다가 죽었다.
156) 남평은 과거 전라도 현 이름으로, 현재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이다.
157) 치우(蚩尤)는 고대 중국 황제시대의 제후로 신농씨 때 난을 일으켰으나 패전하였다.
158)
포박자(抱朴子)는 신선의 법을 설명하고 도덕과 정치를 논한 책 이름이며, 이 책을 지은 중국 진나라 도가
(道家) 갈홍(葛洪)의 호이기도 하다.
159)
풍속통은 중국 한말에 국자박사지례의(國子博士知禮儀)로 있던 양(梁)나라 무강(武康) 사람 심문아(沈文阿)
등이 황제의 지시로 지은 풍속에 관한 책이다.
160)
이 내용은 대대례기 전 13권 중 제2권 「하소정(夏小正)」에 있다. 편저자인 대덕의 자는 연군(延君)이다.
예기(禮記) 214편을 줄여 대대례기(大戴禮記) 85편을 구성하였다.
청나라는 기존의 13경(經) 외에 대대례기(大戴禮記)를 비롯하여 국어(國語) ․사기(史記) ․
한서(漢書) ․ 자치통감(資治通鑑) ․ 설문해자(說文解字) ․ 구장산술(九章算術) ․
주비산경(周髀算經)등 8책을 추가하여 21경(經)이라고 하였다.
161)
고금예술도(古今藝術圖)는 역대 명화를 모아 그리고 그림과 관련한 사실을 기록한 책으로 50권이다.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찬(撰)하였다.
162)
천보유사(天寶遺事)는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기록으로 당시의 특별한 일이나 기이한 소문 등을 기록하였다.
163)
장평자(張平子)는 후한 때 학자 장형(張衡)이다. 평자(平子)는 그의 자다. 저서 중에 사치한 세상을 풍자한
『이경부(二京賦)가 유명하다. 서경부는 전한 때 서울 장안을 읊은 글이다.
164)
사문류취(事文類聚)의 원문은 “端午刻菖艾為小人子或葫蘆形帶之辟邪.”로 “小人”과 “或”사이에 “子”가 있다.
165) 원명사류초(元明事類抄)의 원문은 “各歸寧俗呼是日為女兒節”로 “寧”과 “是” 사이에 “俗呼”가 있다.
166)
본초강목(本草綱目)은 중국 책으로 약물(藥物)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7개 항목으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167)
연북잡록(燕北雜錄)은 사경(思卿) 무규(武珪)의 기록이다. 송나라 인종 때인 1061년에 무규가 거란에서
도망하여 돌아온 사실이 있어 이 책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168) 연대본, 광문회본에는 연북잡지(燕北雜志)로 되어 있으나 연북잡록(燕北雜錄)이 맞다.
169) 연대본, 광문회본에는 “渤海”가 “勃海”로 되어 있다.
17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풍속(風俗)」
17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상도(慶尙道) 군위현(軍威縣) 사묘(祠廟)」
172) 연대본, 광문회본에는 “民”이 “人”으로 되어 있다.
17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강원도(江原道)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풍속(風俗)」
17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함경도(咸鏡道)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사묘(祠廟)」
175) 예기(禮記)의 원문은 “農乃登麥天子乃以彘嘗麥先薦寢廟”이다.
176) 문집은 김거사집(金居士集)을 말한다.
177)
장뢰(張耒, 1054~1114)의 자는 문잠(文潛), 호는 가산(柯山)이다. 강소(江蘇) 청강(清江) 출신으로 시인(詩人)
이며, 소동파에게 배웠다.
178) 사문류취(事文類聚)의 원문은 “端午作水團又名白團或雜五色人獸花果之狀最精者名滴粉團”이다.
179) 사문류취(事文類聚)의 원문은 “水團冰浸砂糖裹透明角黍崧兒和”이다.
180) 광문회본에는 “麯”이 빠져 있다.
181)
이것은 사기(史記) 권28에 나오는 내용으로 원문은 “磔狗邑四門以禦蠱菑”로 묵힌 밭의 해충인 고치(蠱菑)를
예방하였다고 하였다. 사기는 중국 한나라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이 찬(撰)하였다.
182)
하삭은 황하 북쪽으로 후한 말기에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자제들과 술을 마시며 피서했다는 고사가 있다.
183) 예기(禮記)의 원문은 “農乃登黍天子乃以雛嘗黍羞以含桃先薦寢廟”으로 되어 있다.
184)
우란분경(盂蘭盆經)은 옛날 목련(目連)의 어머니가 죄를 짓고 죽어 아귀도에 떨어져있을 때 목련존자가
석가의 도움으로 시방대덕에게 공양을 올려 어머니 영혼을 구제한일을 담은 불경이다.
185) 시방대덕[十方大德]이란 각 방위의 높은 덕을 가진 중들을 말한다.
186) 연대본에 “几”으로 되어있으나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187)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 여산군(礪山郡) 산천(山川)」
188)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풍속(風俗)」
18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풍속(風俗)」
190) 이 내용은 앞의 3월 월내(月內)에 인용된 것과 같다.
191) 세시잡기(歲時雜記)의 원문은 “二社重陽尚食糕而重陽為盛大率以棗為之或加以栗亦有用肉者”이다.
192)
서경잡기(西京雜記)는 양나라 오균이 한 무제 전후에 이어났던 놀랍고 기이한 일들을 기록한 책으로 6권
이다.
193)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의 작자 맹원로는 중국 송나라 때 사람이다. 금의 침입으로 남송으로 온 후 북송의
수도인 변경(汴京)의 문물과 풍속을 기록한 책으로 10권으로 구성되었다.
194)
기로소(耆老所)는 조선조 때 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실직(實職)에 있는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禮遇)하기 위하여 마련한 처소다.
195)
성주신[成造神]은 집안의 으뜸 되는 신으로 집을 완성한 다음 마루에 설치한다. 성조신(成造神)으로 표기한다.
196) 여기서 세시잡기는 여원명의 세시잡기이다.
197)
사물기원(事物記原)은 20권으로 북송시대 개봉국(開封國) 사람 고승(高承)이 지었다. 처음에는 270가지
일을 10여 권에 기술하였는데 후에 20권으로 늘었다.
198) 맹획(孟獲)은 중국 삼국시대 남주 종족의 추장이다.
199)
회남왕(淮南王)의 이름은 유안(劉安)이다. 아버지를 이어 회남왕이 되었다. 회남자(淮南子)라는 신선도
술에 관한 책을 지었다.
200) 여씨 이름은 대림(大臨)으로 정호, 정이 형제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201)
병이한담(餅餌閒談)은 연감류함(淵鑑類函)에 ‘병(餠)’ 항목에 인용된 책이나 저자나 시대 등은 미상
이다.
202)
송나라 맹원로가 찬한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録) 권9 「十月一日」條에 수록된 원문은“十月一日宰臣已下受衣
著錦襖三日士庶皆出城饗墳禁中車馬出道者院及西京朝陵宗室車馬亦如寒食節有司進煖爐炭民間皆置酒作煖爐㑹
也”이다.
203)
육방옹(陸放翁)의 시(詩) 원문은 “拭盤堆連展洗釡煮黎祁自註連展淮人以名麥餅黎祁蜀名豆腐”으로 연대본, 광문
회본에 “黎祈”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黎祁”의 오기인 듯하다.
20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충청도(忠淸道) 보은현(報恩縣) 사묘(祠廟)」
205) 공공씨(共工氏)는 요순시대에 형벌을 맡았던 관명에서 비롯한 성씨다.
206)
유자휘(劉子翬)의 자는 언충(彦冲)으로 음사로 벼슬에 올랐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무이산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주희(朱熹)의 아버지가 그에게 아들을 맡겨 주희의은사가 되었다.
207) 동문지보(同文之寶)의 동문(同文)는 중용에 ‘今天下車同軌書同文行同倫’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208) 당참전(堂參錢)은 새로 벼슬을 얻어 부임할 때 수고한 서리에게 주는 인정전이다.
209) 광문회본에는 “家”가 빠져 있다.
210)
구지필기(仇池筆記)는 송나라 소식(蘇軾, 1037~1101)이 지은 책으로 2권이며 동파지림(東坡志林)
의 자매편이다. 내용은 당대 인물에 관한 기사와 개인생활에 대한 기록 등이다.
211) 예기(禮記)의 원문은 “命漁師始漁天子親往嘗魚先薦寢廟”이다.
212) 연대본에는 “骨”이 “滑”로 되어 있다.
213) 채옹(蔡邕, 133~192)은 중국 후한 때 학자로 자는 백개(伯喈)다. 저서로 채중랑집(蔡中郞集) 등이 있다.
214) 우금(牛禁)은 고기를 먹을 목적으로 소를 잡는 일을 못하게 하던 제도이다.
215)
수경신(守庚申)은 경신수야(庚申守夜)라고 하며 60일마다 한 번 오는 경신일(庚申日)에 밤을 세는 민간도교
신앙의 하나다.
216) 온혁은 중국 송나라 혜안(惠安) 사람으로 자는 숙피(叔皮)다. 쇄쇄록은 그의 저서다.
217)
동경몽화록 10권 「十二月」條에 나오는 내용으로 원문은 “都人至夜請僧道看經備酒果送神燒合家替代錢紙
帖竈馬於竈上以酒糟塗抹竈門謂之醉司命夜於牀底㸃燈謂之照虛耗.”로 상 밑에 점등하는 것을 ‘조허모’라고
하였다.
218) 설문은 중국 후한시대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말한다.
219)
주황(周煌)은 중국 청나라 부주(涪州) 사람으로 자는 경원(景垣), 호는 해산(海山)이다. 유구부사(琉球副使)를
지낸 바 있다.
220)
연대본, 광문회본에 쇄쇄록(碎瑣錄)으로 쓰고 있으나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쇄쇄록(瑣碎錄)으로
되어 있다.
221)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録) 원문에는 “二十四日交年都人至夜請僧道看經備酒果送神燒合家替代錢紙帖竈馬於竈
上以酒糟塗抹竈門謂之醉司命夜於牀底㸃燈謂之照虛耗”이라고하였다.
222)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원문은 “柶凡匕之屬皆从匕”이다.
223)
대정(大政)은 해마다 음력 12월에 행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를 말한다. 도목정사란 관원을 성적에 따라 강등
혹은 승진시키는 일로 6월과 12월에 두 차례 행하는데 12월의 정사가 규모가 크며, 대대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224)
주처(周處)는 중국 진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자은(子隱)이다. 오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진나라에 다시와서 어사
중승(御史中丞)이 되어 공을 세웠다.
225)
이 대목은 소동파시집 권3 「세만삼시기자유(歲晩三詩寄子由)」중에 궤세(饋歲)란 시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226)
유향(劉向)은 중국 전한시대 학자로 자는 자정(子政)이다. 설원(說苑), 신서(新序),열녀전(烈女傳)
등이 있다.
227) 나신은 나례(儺禮) 때 모시는 신이다.
228) 연대본에는 “有”가 빠져있으나 광문회본에는 있다.
229) 광문회본에는 “置”로 되어 있다.
230) 광문회본에는 “鞠”이 빠져 있다.
(국립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