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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대건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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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내 앞으로 날아온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반가움을 표현한다.
그 순간 나비는 날 피해 다른 곳으로 피해 날아간다.
나의 반가운 표현이 그 누군가에는 두려움이 되어 다가올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찰나에 든다.
한 여름의 이 길은 땀과 갈증으로 우리를 맞이할까?
아직 56일이 남은 지금 난 이 글을 쓰고 있다.
1821년 8월21일 태어나신 날로 200주년 되는 2021년 8월21날 ‘청년 김대건 길’을 걸을 예정이다.
‘청년 김대건 길’을 직장 친구 셋이서 걷기로 했다. 한 친구는 이예원(루치아) 냉담중이며 하느님을 어려워하는 한 가정의 엄마로써 열심히 살아가는 자매이고, 한 친구는 우정호 아직 정확한 종교는 없지만 불교에 가까운 형제이다.
난 나이가 47살이고 1987년에 영성체를 받고, 2015년에 견진을 받아 지금은 본당에서 레지오 및 복사를 하고 있다. 왜 이 길을 걷고자 하는지, 왜 이 길을 셋이서 걷고자 하는지, 왜 이 길에 이끌리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탄생200주년을 맞아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냥 좋다.
단지 이 길을 걷는 8월21일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두 친구는 이 길에 큰 의미를 담지는 않지만 걷는 것을 좋아해서 나의 제안으로 순례 길을 함께하기로 했다. 이 길을 걸으며 행복함을 같이 느끼기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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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대건 길’ 50일이 남은 지금 난 준비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아침, 저녁으로 만보 이상 걸으며 틈틈이 근력 운동도 시작하며 순례준비를 하고 있다.
과연 친구들과 함께 순례를 완주할 수 있을까? 장마가 시작되었다. 시원한 빗줄기가 대지를 적시며 생기를 넣어준다. 74일 남은 날 일기에 적은 ‘김대건의 꿈’이라는 글을 써본다.
‘꿈이 있었겠지. 15살 나이에 마카오로 신학생이 되기 위해서 떠나야 했던 그 순간에도 진정한 꿈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은 천주를 믿는 이들에게 배교라는 삶과 죽음을 선택하도록 몰아 세웠다. 이 순간 김대건에게는 꿈이 있었을까? 꿈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정 무엇이었을까?
탄생200주년이 되는 지금 김대건 신부님은 성인이 되어있다. 15살 소년이 성장하여 세상에 눈을 뜨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쓰기 전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는 사느냐 죽느냐만 생각났을지 모른다. 천국의 삶을 위해서 지금의 삶을 주님께 봉헌한다는 생각을 하셨을까? ’청년 김대건 길‘을 걸을 것이다. 당신의 꿈과 순교의 길을 가신 것을 조금이나마 알기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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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대건 길을 걷다’ 48일 남았다. 7월4일인 오늘 연중14주일 미사를 본당 40주년 기념미사 겸 주보성인이 김대건 신부님이기에 하루 당겨서 대축일 미사로 했다.
본당 향 복사로 미사에 참여했다. 탄생200주년을 맞아 좋은 일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제대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김대건 신부님의 성화가 벽면에 그려줘 있어서 복사를 설 때면 늘 김대건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사에 참여한다. 성화에 신부님은 십자가를 들고 계신다. 십자가를 보면서 신부님처럼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면 부끄럽다.
김대건 길 순례를 앞두고 좀 더 신부님의 생애를 생각하고 있다. 서간집도 읽으며 조금 더 친숙해지고 싶어진다. 같이 가는 두 친구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정호가 제주도로 금요일 날 친구들과 여행을 가기에 마침 제주도 용수 성지 근처라 성지에 가서 라파엘 호를 둘러보고 오라고 말했다. 가끔 친구랑 퇴근길을 같이 갈 때 30분정도 걸어서 간다. 마침 우리가 다니는 치과 기공소가 수원 성지 근처라 장안문에서 헤어지기도 하고 더 걸어가기도 한다. 그 때 친구에게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박해와 수원 성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서 친구도 천주교에 대해 알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질문도 한다.
정호가 내게 말한다. “친구들은 천주교를 믿지 않아서 성지에 가지는 않을 거야, 천주교 신자들이나 김대건 신부에게 관심이 있지 일반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는 말에 난 “맞아 그나마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뽑히셔서 조금은 유명해지시긴 했는데 말이지”라고 답하고 말았다. 새삼 세상의 벽에 부딪히는 순간이다. 김대건 신부님! 어서 빨리 신부님이 걸으셨던 길을 걸으면서 신부님이 세상의 벽을 뚫고 나아가신 용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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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7일 토요일 ‘청년 김대건 길’ 35일 남아있다. 어느 덧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코로나 19는 더욱 더 심해져서 정부지침 4단계로 거리두기를 하며, 미사도 비대면으로 실시하고 있다. 7월11일 토요일 ‘대건 형제 복사단’ 야유회로 수원성지 성곽 순례를 다녀왔다.
청년 김대건 길 걷기 41일 남은 날 뜻 깊게 순교자들이 가신 길을 걸으며 조금이나마 그 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노력해보았다. 그 날 일기를 조금 남겨본다.
‘동남각루, 동북포루, 용연, 북암문, 방화수류정, 장안문, 화서문, 화성행궁, 수원순교성지 성모자상 앞, 수원순교자 현양비를 마지막으로 수원성지 성곽 순례 길을 완주했다. 주님과 성모님의 안배로 무사히 은총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코로나 19로 힘든 시간이 다가왔지만 공동체의 힘으로 용기를 얻으며 함께 하려한다. 그때
갑자기 예원(루치아)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동대문에 연극을 보러 갔다가 지나는 길에 광희문 천주교 순교자 현양관에 김대건 신부님 탄생200주년 희년 현수막이 걸려 있어서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며, 남은 시간 잘 보내라는 안부 메시지였다. 정말 작은 배려에 고맙고 감사하다,
냉담 중이며 하느님을 어려워하는 예원(루치아)가 천주교에 반응을 보이는 게 참 신기했다.
그 다음 날 직장에서는 예원(루치아)가 성호경을 내 앞에서 웃으며 두 번이나 긋는다. “지금 성호경을 한 거야”하면서 물으니, “평소에 네가 잘하는 거 한 번 해봤다.”라면서 이야기 한다.
나도 모르게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며 외치고 말았다. 순간의 일이었지만 소중한 체험이었다. 예원(루치아)가 선하신 하느님을 알아가길 바래보며 ‘청년 김대건 길’을 무사히 친구들과 함께 순례하기를 성 김대건 신부님께 전구를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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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일 일요일 ‘청년 김대건 길’ 20일 남았다. 7월31일부터 8월4일까지 여름휴가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폭염주의보와 코로나19 재난 문자가 수시로 휴대폰에 울리고, 미사는 2주간 더 거리두기로 중단 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21일 순례 날 날씨가 좋아야하는데 하는 걱정도 조금은 들고 있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 8월의 첫 날을 맞이했다. 그래도 늘 ‘청년 김대건 길’걷기가 나의 중심이다. 아쉽지만 예원(루치아)가 순례 길 동참을 휴가동안 생각해보고 다시 결정한다고 말해주었다.
더운 날씨와 개인적인 건강으로 결정을 미루고 있다. 역시 예원(루치아)에게는 무리인 듯하다.
다행이 정호는 21날 제주도 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는데, 나와의 약속을 지킨다며 여행을 연기하고 함께 한다고 말해주어서 정말 감사했다. 둘 다 소중한 나의 친구들이다.
문득, 은이 성지와 골베마실에 처음 갔던 때가 떠오른다. 아들 석민이가 5학년, 딸 혜미가 주일학교 유치부였을 때 가족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그 때는 지금처럼 김가항 성당도 없었고, 주위는 숲과 나무들이 울창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골베마실로 아이들과 함께 걸어서 갔고 그 곳에서 도화지위에 글자들을 오려서 성모송을 완성하는 게임의 추억도 떠오른다.
두 번째로 성지를 찾은 것은 9년 후인 성모성심 꾸리아 야외행사로 2021년 6월12일 날(꾸리아 4간부 서기인 난 답사도 미리 갔다 오는 기쁨도 갖았다.) 갔었다. 대부분 어르신들이라 골베마실까지 걷기 힘들기에 잠시 차량으로 들렸다 은이 성지로 갔다.
주일 학교 학부모가 아니라 꾸리아 4간부로 찾은 성지는 다름 느낌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뿌듯했다. 김가항 성당에서(답사 때) 첫 미사를 드릴 때 독서를 한다고 손을 들고 1독서를 했었다. 탄생200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 서품을 받으신 성당에서 그 때 그 감격스럽던 순간을 떠올리니 너무나 독서를 하고 싶었다. 은총 가득했던 순간이었다.
20일 남은 지금 김대건 신부님께 간구를 청해본다.
“청년 김대건 길을 친구들과 무사히 순례 할 수 있도록 함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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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1일 오전6시30분 은이 성지 김가항 성당에서 친구 정호랑 기념사진을 찍고 ‘청년 김대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살짝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모기들이 계속 따라와서 처음부터 정신이 없었다. 조용한 산길이 나오고 고갯길이 나왔다. 얼마간 오르다보니 신덕고개가 나왔다. 정호와 같이 “김대건 신부님의 믿음을 떠올리며”(옥중에서 페레올 주교님께 남긴 편지 중 / 1846.08.26.)을 한 단락씩 서로 읽기 시작했다. “당신은 천주교인이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부분을 읽을 때 가슴에서 뭉클한 감동이 몰려왔다. 잠시 쉬면서 정호가 싸온 고구마와 옥수수를 먹고 고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리막길이 끝나자 ‘와우정사’란 절이 나왔다. 정호가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좋아하는 종교가 있지만 친구가 좋아하는 종교에도 거리낌 없이 대해주는 모습에 고마우면서도 난 어떠했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느 덧 큰 길과 마을이 나오니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해서 예원(루치아)가 순례 길 전 날 챙겨준 우비를 정호랑 입고 걸었다. 마을을 구경하면서 걷는데 한가하게 논을 거닐고 있는 강아지를 보면서 참 행복해 보였다. 도심 속에 강아지들은 모두 목줄에 묶여서 다니는데 이 곳 강아지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였기에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자연해실마을이 나오고 골목길로 들어서서 계속 걷다보니 고속도로 건설 현장이 나와서 정호와 놀랬다. 자연이 사라지는 현실에 가슴이 아파왔고 ‘청년 김대건 길’이 훼손되어지는 모습에 숙연해지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걸었다.
건설 현장 틈 사이 간이이정표를 따라서 고개를 오를 때는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사현장에서 들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고개를 오르기가 조금 힘들었다. 더욱 거세지는 빗줄기를 헤치며 정호랑 망덕고개에 도착했다. 안내 표지판에 라파엘 호를 보면서 어떻게 조그만 배로 바다를 건너서 제주도 용수리해안에 표착했는지 놀라웠다.
지금 우리가 라파엘 호에서 풍랑을 맞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빗줄기가 거세졌다. 표지판에 이민식(빈첸시오)가 신부님의 시신을 옮기던 그 순간을 떠올리니 그 용맹함에 숙연해진다. 빗방울이 잠시 잦아들었다. 망덕고개를 내려오면서 5명 정도의 형제님들이 우리를 지나가시면서 인사를 하신다. 갑자기 정호가 내게 말한다. “저 분들은 천주교신자 같아, 얼굴을 보니 분이기가 느껴져”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은이 성지로 순례 가서 우리처럼 미사를 볼 거 같아”라고 난 대답했다. 형제님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겼을까? 순례 길을 걷기 전 날 정호와 예원(루치아)를 위해서 묵주 팔찌를 샀다. 미리내 성지에서 미사 후 신부님께 축성을 받아서 선물하려고 준비한 묵주 팔찌를 정호 팔에 미리 끼어주었는데 순례하는 중에 천주교인이 되었나하는 착각이 들었다.
거센 빗줄기가 약간 줄어들기에 음악 ‘사명’을 들으며 걸었다.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가 이 노래에 담겨있다는 것을 알기에 신부님이 걸으셨던 길을 걷는 것이 너무 나 소중하고 감사했다. 사명을 들으며 김대건 신부님과 정호와 함께 걷는 이 길, 빗줄기, 바람, 나무, 자연의 음악소리가 합해져서 알 수 없는 뭉클함에 마냥 행복한 기분이 들어 나도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생명을 버리면서 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망덕 고개를 내려오니 다시 도로가 나왔다. 걷다보니 성지순례길(청년 김대건 길) 미리내성지 1.8km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와서 정호랑 기념사진을 찍었다, 길을 걷다보니 성지순례길 표지판이 너무 반가운 것이 꼭 고향집을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이미 양말과 등산화는 젖어서 뭉클뭉클해지고 걷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덧 40대 후반에 들어서는 정호와 나는 아이들과 부모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김대건 신부님을 만나보고 얼마 있다가 주님 품으로 보내셔야했던 고 우르술라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우리도 아이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 순간의 심정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이 길을 걸으며, 아이들, 아내, 부모님을 생각하고 날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어느 덧 애덕고개가 나왔다. 이제는 다왔다는 안도감에 빗줄기를 맞으며, 남은 고구마로 간식을 하고 애덕고개 표지석 앞에서 정호와 탄생200주년을 기념하는 숫자를 손가락 모양으로 만들어 사진을 찍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자연스러운 웃음을 웃어보았던지 행복한 기념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오전 10시30분을 조금 넘어서 얼른 미사를 보기위해서 미리내 성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10분 정도 고개를 걸어가는데, 산에 길을 내기위해 산 중턱을 밀어 두 개로 산이 나뉘어져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왔다 다시 올라서 가는데, 표지판이 나와서 이제는 다 왔구나 생각하는 순간 우리가 가는 길은 은이 성지 길이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성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길을 잘 못 들어선 것이었다. 우리가 미사를 못 보게 마귀가 해방을 놓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정호랑 미사를 꼭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에 묵주기도를 하며, 김대건 신부님께 전구를 청했다. 우리는 서둘러 고개를 내려와 다행이도 길을 다시 찾아서 미리내 성지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무엇인가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을 느꼈기에 깜짝 놀라서 멈춰서고 말았다. 그 정체는 두꺼비였다. 빗속에서 초등학교 이후로는 못 보았던 두꺼비를 보다니 좋은 기운이 내 주위를 감도는 것을 새삼 느꼈다. 늘 김대건 신부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확신이 섰다.
눈에 미리내 성지가 들어왔다. 시간을 보니 오전11시, 미사시간은 11시30분이니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김대건 신부 경당’이었다.
그때까지도 빗줄기가 굵어서 젖은 몸으로는 경당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경당 앞에서 “장홍기(대건안드레아)와 정호가 인사드립니다.”하고 인사를 드리고 잠시 머문 뒤에 ‘103위 시성 기념성당’에 도착해서 젖은 몸을 닦았다. 성당을 처음 들어가 보는 정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103위 시성 기념성당’은 처음이었다. 넓고 웅장한 성당 안을 둘러보고 놀랐다. 정호를 자리에 앉히고 고해 성사를 보러 갔다 왔다. 뜻 깊은 날 고해를 보는 은총과 ‘청년 김대건 길’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길을 잃어버려서 미사를 못 볼지 모른다는 두려운 여정 속에서도 무사히 완주하고 정호와 미사를 볼 수 있는 은총에 김대건 성인과 주님께 감사드렸다.
미사를 마치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유해 공경 예식’이 있었다. 정호와 함께 받을 수 있는 은총도 주어져서 기뻤다. 미사 후 정호에게 “미사 어땠어?” 물어보니 “괜찮았어, 불교와 많이 비슷한 분위기라서 좋았다.”다행이었다. 한 번은 꼭 미사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 순간 이루어져서 기뻤다. 미사 후 밖은 햇살이 우리의 얼굴을 보드랍게 달래주며 수고 했어 라고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순레 중 정호에게 “걱정마 내가 성지 순례가면 햇살은 꼭 본다.”라고 말을 했었는데, 나도 놀라고 정호도 놀라며 웃음을 지었다.
‘청년 김대건 길’을 위해 ‘김대건 신부님 순교의 길을 따라 걷는 9일 기도’을 했다고 말해주며 정호에게 “난 날씨 걱정은 안했다.”라고 말해주었다. 김대건 신부님도 늘 변화무쌍한 삶을 살지 않으셨나하는 생각에 오늘 날씨 또한 김대건 신부님이 가신 길을 경험하도록 내려주신 은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P.S 몸이 안 좋아서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우비도 빌려주고 잘 다녀오도록 세심히 신경을 써준 예원(루치아)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것으로 글쓰기를 끝맺으려 합니다.
글 솜씨가 부족하지만 용기를 내어 ‘청년 김대건 길’ 글쓰기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셔서 그 동안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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