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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바.1 –이탈리아 로마시-
로마 교회에 있는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로 가는 길은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길처럼 아름답다. 하늘 높이 솟은 상록수들이 싱그러움을 더해주는 진입로를 따라, 걸어들어가면 생(生)과 사(死)를 한가지로 염원한 그리스도인들의 불사불멸의 영혼이 살아숨쉬는 지하 공동묘지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가 나온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전, 박해시절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도 쓰였던 카타콤베는 치열하게 피어올랐던 님을 향한 순정을 땅속에서 불태우며 소리없이 박해의 칼날을 받아들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의 안식처이다.
로마에만 60여 개의 카타콤베가 있는데, 총 발굴면적은 900여㎢에 달한다. 그 가운데
예닐곱 개 카타콤베에만 일반인이 들어갈 수 있는데, 관람이 가능한 카타콤베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이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로마 아피아 가도에 있는데, 콜로세움에서 걸어가면 20분, 차로는 금방 닿는다.
교황 비오 9세, 요한 23세,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살레시오 수도회가 관리를 맡고 있는데, 밀려드는 순례객으로부터 성지를 보호하기 위해 사진촬영 등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지하 묘지에 가득찬 성(聖) 상징들
로마에서 가장 크고 비중있는 카타콤베 가운데 하나인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지하 묘역만도 4만 5천 평, 지하 5층까지 이어진 묘역 내 갱도의 총길이가 20㎞가 넘는 거대한 규모의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묘지이다.
바닥은 사암과 용암이 섞여 있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공기가 들어가면 단단해지는 습성으로 인해 묘지 흙으로는 안성맞춤이다.
대낮에도 깜깜하여, 한가닥 낮은 광촉의 전깃불이 없으면 내부를 밝혀준다. 묘역 내부 갱도는 교행이 겨우 가능할 정도로 좁고, 좌우에는 무덤들이 켜켜이 들어서 있다. 카타콤베의 무덤은 다 석관이다.
대부분의 석관에는 순교자, 교황 등의 글씨가 쓰여져 있거나 각종 그리스도교 상징들이 새겨져 있다.
어깨에 양을 메고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한 영혼을 나타내는 선한 목자상,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알파벳 키(Ⅹ)와 로(Ρ)를 합친 모노그램, 하느님께 받은 사명이 두려워 도망가다가 고래 뱃속에 빨려들어갔다가 살아난 예언자 요나의 모습, 그리스어로 물고기 즉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형상인 익투스(ⅠΧΘΥΣ), 세상만물의 처음이자 끝인 주님을 나타내는 알파(Α)와 오메가(Ω), 인생은 죽음이 종말인 슬픈 여정이 아니라 낡은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임을 나타내는 배 그림 등을 거의 모든 석관에서 볼 수 있다.
석관에 그리스어가 많이 쓰여진 이유는 로마 시대 언어는 라틴어이었지만, 지식인은 그리스어를 많이 선호했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련없는 영혼은 순수한 기쁨 몰라
우리나라처럼 위에서 파고들어가서 밑에 매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은 지하 공간을 확보, 드나들 수 있는 길부터 미리 내고 좌우 공간에 석관을 밀어넣는 매장관습을 지녔기에, 묘역을 계속 확장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에는 아주 작은 석관이 40% 가까이 된다. 보통 작은 석관은 어린이 관이거나, 화장하고 난 뒤 남은 유골을 담은 석관이다. 로마 시대에는 매장보다화장을 선호했으나 교우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었기에 매장을 더 선호했다.
카타콤베 내부는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자칫 하다간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박해시절 숨어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뒤쫓아 들어온 로마 병사들을 미로와 같은 카타콤베갱도를 이용해서 따돌리기도 하였다.
이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에는 10여 명의 순교자, 16명의 교황,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 그리스도인이 불멸의 삶을 누리고 있다. 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모이고 죽고 묻힌 이들은 세상 여정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밤하늘의 별처럼, 한포기 들풀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 무에 그리 아둥바둥 허겁지겁 사십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무수한 석관들을 만나면 잊고 살았던 순수한 영혼을 찾게 된다.
시련없는 영혼, 세상사를 좇는 탐욕의 일상은 영성적인 삶의 충만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이 카타콤베에 서면 세속의 영화보다 불멸의 영광을 간절히 원했던 순교자의 불타는 넋을 마주할 수 있다.
성녀 세실리아의 유해 조각상 감동적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에는 교황의 무덤도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무덤은 성녀 세실리아의 무덤이다. 세실리아 성녀는 오른쪽 어깨를 땅에 댄 채 옆으로 쓰러져 있는데, 목에는 도끼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죽는 순간에도 오른손 세 손가락으로 삼위일체를 나타내고 있다. 음악의 수호성인으로 우리나라 가수 인순이도 세례명이 세실리아이다. 세실리아의 노래는 듣기만 해도 성령의 은혜를 듬뿍 전해주기로 유명하다.
동정으로 사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된 세실리아는 혼례와 동시에 남편과 시동생을 개종시켰다.
세실리아의 남편과 시동생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순교를 당하였고, 세실리아역시 얼마 후순교하게 되었다.
예수 이후 기독교계 최초의 순교자는 돌에 맞아 죽은 스테파노이지만, 목이 잘려 순교한 최초의 교인은 세실리아이다. 세실리아는 원래 뜨거운 수증기로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지만, 하루가 지나도 죽지 않아 치명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도끼로 세 번이나 내리쳐도 목이 잘리지 않아 사흘 동안 목숨이 이어졌다.
이 사흘 동안 세실리아는 자기가 살던 집을 교회로 쓰라고 봉헌하였는데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성 세실리아 교회가 바로 그곳이다.
9세기 경에 세실리아의 유해를 이 교회에 안치하였고, 현재의 교회에 세실리아 성녀의 유해가 발견될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세실리아의 유해는 순교한 지 천년이 지나도록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의 조각상은 재현품이다.
[매일신문, 2007년 5월 24일, 글 사진·로마에서 최미화 기자]
카타콤바. 2
*박해(迫害)와 순교자들의 무덤*
원래 로마인들은 모든 종교에 대하여 관대하였습니다. 새로운 정복이 되는 지역과 나라에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의무도 부과하였지만, 정복지에서 믿던 종교의 신을 섬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자들과는 종교적인면에서 바로 문제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진실되고 완벽한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 중인 황제 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로마의 신들을 신으로 받들 길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 대한 박해중 초창기 가장 큰 박해의 시작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혐의로, 네로 황제 시대인 기원 64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로마에 불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요, 전해지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네로 황제 자신이 불을 질렀고 로마의 많은 부분이 화재로 파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끔찍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순교를 하게 됩니다.
베드로 성인이 머리를 아래로 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장소가, 오늘날, 바로 성 베드로 성당 (대 바실리카)이 세워져 있는 곳이고, 성인은 가까이 있는 묘지에 묻히셨습니다. 오늘날, 이 무덤 위에 콘스탄티노 황제(제위 306~337년: 그리스도교 공인)가 세운, 베드로 대성전은 그리스도교와 가톨릭 신자들의 중심입니다. 베드로 대성전의 중심인 중앙 제대 바로 아래에 베드로 성인의 무덤이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곳에서 좀 거리가 있는 오스티엔세 길 (Via Ostiense)에 묻히셨고 콘스탄티노 황제가 그 무덤 위에 대성전을 세웠습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기념하는 대성전(=Basilica:바실리카)들은 이 분들을 모시고 있던 무덤 위에 세워지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건축물을 라틴어로 Ad Corpora(앋 꼬르포라: 무덤에)라고 하며,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이렇게 건축된 기념 성당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네로 황제만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쎕티미오 쎄베로(Settimio Severo: 재위 193~211)황제도 202년에 박해를 하였는데, 이유는 황제의 10년 재위 기념 행사에 참여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93년에서 305년까지는 디오클레지아노 황제가 길고 잔인한 박해를 하였는데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로마 제국에서는 마지막 박해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 그들이 종교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면 순교자, 이탈리아어로 마르티리(Martiro(단수), Martiri(복수))로 불리웠는데요, 이 단어는 원래 그리스말로는 “증거자”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 입니다. 즉 마르티로(순교자)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을 호칭하는 것이지요. 참고로 한국에서도 천주교, 가톨릭이 전해지는 시기에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로마시대의 순교자들은 다른 돌아가신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일반적인 공동묘지에 매장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비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묻히던 신자들은 나중에는 카타콤바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은 그들이 비록 가난했더라도 여러가지 이유로 다른 비 그리스도교 신자들과는 거리가 떨어진 무덤을 사용하게 되었는데요, 왜냐하면 많은 신자들이 이와 같은 신앙의 증거자인 순교자 옆에 묻히고 싶어서 줄을 설 정도였으니까요. 자주 발견되는 것이 순교자가 묻힌 무덤 옆에 묻히면서, 그분이 받는 신의 보호와 축복을 같이 받으려는 기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신앙의 증거자”의 무덤을 찾게 되는 것은 학문적으로도 많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만, 발견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월이 수세기를 지나면서 지반의 붕괴나 수목이 자라나서 카타콤바의 입구를 감추게 되고, 그 자취도 잊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중세기 후반에는 어디에 카타콤바가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카타콤바의 발견은 1500년대 말에 안토니오 보시오(Antonio Bosio)라는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서 죠반니 바티스타 데 로씨(Giovanni Batista De Rossi)라는 그리스도교의 고고학을 창시하신 분으로 여겨지는 분이 로마의 카타콤바에 대한 발굴과 연구에 매진을 하게 됩니다.
카타콤바에 있는 안치소인 로꿀로(Loculo)외에도 귀족들이 묻히던 장소인 아르꼬솔로(Arcosolo, 복수 Arcosoli)가 있습니다. 이 무덤군도 탄화석회(Tufo)층을 파서 만들었지만, 벽안으로 공간을 잘 만들어 앞쪽에는 대리석과 같은 재질로 판을 만들어서 장식과 표식을 해 놓은 곳입니다.
카타콤바 안의 다른 무덤 형태는 포르마(Forma)라는 것인데, 벽면이 아닌 바닥을 이용한 것으로 이미 더 이상 벽면을 이용 할 수 없는 장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것은, 시간에 지남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 크기가 커가는 속도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공동묘지만 갖고 서는 수용하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바닥을 더 파 내려간 지하에 새로운 장소와 통로를 만들어서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할 장소를 더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볼 수 있듯이 지하 묘지는 매우 어둡습니다. 그래서 작은 오일 램프 같은 것을 벽이나 벽에 있는 선반같은 곳에 아니면 벽 마감재 사이에, 어느 곳은 무덤을 막은 대리석 장식에 장소를 마련하여 조명을 만들었습니다.
지하무덤안에 들어가서 좀 살펴 보시면 천정에도 조명을 할 수 있는 램프의 자리가 있었던 것을 찾아 보실 수 있는데, 복도가 합치는 장소이거나 복도가 시작되는 장소 등에서 이러한 조명 장소를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카타콤바(지하무덤)은 현재의 공동묘지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 당시에는 지하에 만들어 졌고 현재는 땅 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로마에서 가장 잘 알려진 카타콤바(지하무덤)들은 아피아 옛길이라고 하는 Via Appia Antica 를 따라서 바로 옛도시 외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무덤을 찾아 보시려면 성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Catacomba di San Sebastiano)나 성 갈리스도 카타콤바 (Catacomba di San Calisto) 그리고 성녀 도미틸라 카타콤바 (Catacomba di Santa Domitilla)가 있습니다. 사실 같이 모여져 있습니다만, 이곳을 모두다 돌아 보기에 하루가 모자라실 겁니다.
카타콤바에 있는 안치소인 로꿀로(Loculo)외에도 귀족들이 묻히던 장소인 아르꼬솔로(Arcosolo, 복수 Arcosoli)가 있습니다. 이 무덤군도 탄화석회(Tufo)층을 파서 만들었지만, 벽안으로 공간을 잘 만들어 앞쪽에는 대리석과 같은 재질로 판을 만들어서 장식과 표식을 해 놓은 곳입니다.
카타콤바 안의 다른 무덤 형태는 포르마(Forma)라는 것인데, 벽면이 아닌 바닥을 이용한 것으로 이미 더 이상 벽면을 이용 할 수 없는 장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것은, 시간에 지남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 크기가 커가는 속도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공동묘지만 갖고 서는 수용하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바닥을 더 파 내려간 지하에 새로운 장소와 통로를 만들어서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할 장소를 더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볼 수 있듯이 지하 묘지는 매우 어둡습니다. 그래서 작은 오일 램프 같은 것을 벽이나 벽에 있는 선반같은 곳에 아니면 벽 마감재 사이에, 어느 곳은 무덤을 막은 대리석 장식에 장소를 마련하여 조명을 만들었습니다.
지하무덤안에 들어가서 좀 살펴 보시면 천정에도 조명을 할 수 있는 램프의 자리가 있었던 것을 찾아 보실 수 있는데, 복도가 합치는 장소이거나 복도가 시작되는 장소 등에서 이러한 조명 장소를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카타콤바(지하무덤)은 현재의 공동묘지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 당시에는 지하에 만들어 졌고 현재는 땅 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로마에서 가장 잘 알려진 카타콤바(지하무덤)들은 아피아 옛길이라고 하는 Via Appia Antica 를 따라서 바로 옛도시 외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무덤을 찾아 보시려면 성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Catacomba di San Sebastiano)나 성 갈리스도 카타콤바 (Catacomba di San Calisto) 그리고 성녀 도미틸라 카타콤바 (Catacomba di Santa Domitilla)가 있습니다. 사실 같이 모여져 있습니다만, 이곳을 모두다 돌아 보기에 하루가 모자라실 겁니다.
다신교를 믿던 로마에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로마로: 카타콤바(지하 무덤)
카타콤바(Catacomba)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Catacumbas(카타쿰바스)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인데 “웅덩이” “파헤친 곳”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의 뜻은 로마에 있는 한 장소를 잘 표현하고 있었는데, 바로 아피아 안티카 길(Via Appia Antica)에 있는 체칠리아 메뗄라(Cecilia Metella)의 무덤을 따라 있었던 무덤군(群)을 말합니다.
이러한 기념비적인 무덤군(群)은 기원전 1세기에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지기 시작하였고, 로마 방향으로 언덕을 오르고 내려가면서 언덕을 따라 현재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 있는 곳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 카타콤바는 지하무덤으로는 3세기 초부터 중세기까지 형성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카타콤바는 원래의 뜻보다는 성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모든 지하 무덤을 지시하게 되었습니다.
카타콤바 (지하 무덤) 소개,
어떤이는 카타콤바 시대는 중세의 로마 이전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중세 로마 초창기에는 아직 박해 시대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공동체의 주검들을 도시 외곽의 지하 묘지를 사용하여 묻었습니다. 이러한 무덤을 사용한 이유는 박해를 피해서 라기 보다는 당시의 시대적 법률을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카타콤바는 그래서 초기에는 신자들을 묻었던 장소에서 성인들의 무덤에서 기도 드리는 장소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도시 로마의 성벽 밖에는 카타콤바가 수 킬로미터를 이어지는 옛길을 볼 수가 있는데, 오늘날 로마에는 67개의 카타콤바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 5개의 카타콤바를 방문 하실 수 있습니다: 성 갈리스도 카타콤바 (Catacombe di San Calisto)- 갈리스도 부제가 무덤의 관리를 맡았었던, 옛 로마의 길인 아피아 길(Via Appia) 위의 카타콤바 입니다. 도미틸라 카타콤바(Catacombe di Domitilla)-베스파시아노 황제의 조카인 도미틸라가 소유하였던 지역으로 3세기에 형성된 카타콤바입니다. 갈리스도 카타콤바와 함께 가장 널리 사용된 무덤입니다. Via delle Sette chiese 길에 있습니다. 성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Catacombe di San Sebastiano)- 디오클레시아노 황제때 순교한 성 세바스티아노의 이름을 갖고 있는 카타콤바로 아피아 길(Via Appia)과 Via delle Sette Chise 길 사이에 있습니다. 이 카타콤바는 언제나 접근 가능하였던 카타콤바이어서, 많이 파손된 부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녀 아녜스 카타콤바(Catacombe di Sant’Agnese)는 순교하여 이 카타콤바에 묻힌 성녀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 지어졌으며 노멘타나(Via Nomentana)길 위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프리실라 카타콤바 (Catacombe di Priscilla)는 살라리아 길(Via Salaria)위에 있으며 아름다운 벽화로 유명합니다.
카타콤바의 입장은 언제나 현장 카타콤바를 잘아는 가이드의 인솔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자료: 바티칸 공식 가이드 윤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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