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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갑 선생 유고집 계속
‘우익 테러단’ 으로 진보진영을 탄압하는 미
군정에 맞선 전평의 투쟁(8)
1946년 8.15 해방 1주년 기념행사가 전국에서 개최되었는데 특히 전남 광주에서 개최되는 기념행사에 미 군정이 전평 노동자들의 참가를
금지하였으나 이를 부당한 간섭으로 규정하고 화순 탄광 전평 노조원 100여 명이 참가하여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미군과 경찰, 테러
단 합동으로 총격을 가하여 30여 명이 사살 당하고 수백여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기념식을 방해하기 위해 군용기와 전차를 동원하여 천인공노할
학살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미 미 점령군은 1945년 12월 6일에 군정청 법령 제33호를 발동하여 남조선 재산 80% 해당하는 일본인 소유
재산을 일본 배상으로 간주하여 접수하고, 이러한
생산시설로 인해 미국의 과잉생산 상품 반입에 악영향을 미치는 산업에 대한 생산을 중단, 또는 그 생산시설을 파괴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으로 인해 남조선의 기업이 43.7%, 노동자 수 59.4% 감소하고, 광업에서는 기업 수 95.6%, 노동자 수 97.4%가 감소하고 운수업에 있어서 기업 수로 97.9% 노동자 수가 87.3%가 감소되고 생산시설의 태반이 가동을 중단하였다.
1946년 9월 철도파업 당시 실업·반실업자 수가 500만 명을 넘고 물가고는 천정부지이고 악성 인플레로 인민생활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었다.
이러한 민중의 생활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군정청은 적산관리 공장과 철도, 운수 등의 직장에서 대량 해고를 단행했다. 특히 그 대상은 전평 노동조합원들이었다.
1946년 8월 20일 ‘노동자
관리 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철도, 운수
부문 노동자의 25% 해고를 단행하고 지금까지의
월급제를 일급제로 일방적으로 개정하여 노동자들의 기본권에 대해 무자비한 정책을 단행하였다.
9.23 철도 총파업 (1946년)
(p205) 해방된 그 해 1945년도는 풍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쌀은 대부분 감추어지고 그 대신 미국산의 옥수숫가루만 배급하였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결식을 하는 날이 많았다. 쌀이
없어지는 이유는, 암거래를
하는 브로커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 미
군정청은 1945년 10월 5일 군정청 법령 제5호로써 소작료를 년 수확의 33%로 하고 수확의 40~60%를 강제 공출을 하게 하였다.
그 강제 공출 과정에서 군정청 직원과 조선인 모리배가 결탁하여 부정 이득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공출 가격은 시가의 10분지 1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6년 9월 전평 총파업의 중요 원인(9)
1945년 12월 6일 미군정청 법령 제33호는 남조선 총재산의 80%에 해당하는 일본인 소유 재산을 일본의 전쟁 배상으로서 (미군정청이) 접수했다.
이 재산의 생산 시설은 미국의 과잉 생산품의 (남한으로의) 반입에 나쁜 영향을 미치면 생산을 정지하거나 또는 그 시설을
파괴했다.
해방 1주년 기념행사를 방해한 미군의 학살 만행
(p207) 미 군정은 9월 30일 전차와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경찰대 3,500명, 대한노총(한국노총), 대한민청, 대한독성청년회 등 우익 테러단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철도 파업 투쟁본부를 습격하였는데 쌍방이 처참한 투쟁이 벌어져, 파업 투쟁본부 쪽 3명이 사살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 중상자가 40여 명이 되고, 서울에서만 1,800여 명이 재판도 없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미 군정은 전평 노동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듯이 무자비한 총격을 가했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10)
(p208) (1946년)
10월 1일, 경북
대구의 400여 개 공장의 노동자들이 전평의 9월 24일 총파업을 지지하며 집회를 가진 뒤 학생, 일반 시민 약 1만여 명과 함께 ‘미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열변을 토하며 항쟁하던 청년이 경찰의 발포로 쓰러지며 죽어가던 현장에서 계속해서 다섯 명의 연사가 다투어 나섰으며
분노의 열변을 토하는 순간 그들 역시 차례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갔다.
군중들은 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의 아성인 경찰서를 때려 부수고 무기를 탈취, 무장하여 100명 내지 200명씩 대오를 지어 시내에 있는 모든 경찰서와 파출소를 공략하고 대구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와 같이 사태가 확대되자 미 군정은 오후 6시경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군과
탱크와 기관 총으로 중무장한 미군을 진입시키며,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사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더욱 분노한 군중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근 중소 도시인
성주, 칠곡, 왜관, 고령, 영천, 군위, 경산 등의 경찰서와 지서를
접수하여 사태를 인민항쟁으로 확대시켰다.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무장 해제 시키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에 왔다는 미군은 조선 사람에게 발포를
하고, 친일파 우익
테러단을 동원하여 조선 인민들을 집단 학살하고 무차별 검거를 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농민들도
미 군정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인근
중소 도시에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여 집회를 열고
1. 미 군정은 쌀 공출을
즉각 폐지하라.
1. 북한에서와 같이 토지개혁을
실시하라.
1. 모든 권력을 인민위원회에
넘겨라.
는 가장 절실한 요구 조건을 내걸고 집회와 시위를 하며 맹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서울에서는 (1946년) 10월 3일 남녀 학생, 노동자들과
애국시민 10,000여 명이 미군정청 청사 앞에 집결하여
1. 쌀을 달라.
1. 식민지 교육 반대
1. 수감 중인 애국자를
즉각 석방하라.
1. 테러를 배격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강력한 항의 집회와 시위를 벌이는 투쟁을 전개했다.
서울과 대전, 마산
등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미국은 그들이 지위하고 있는 경찰, 국방경비대, 정치 깡패 등 온갖 탄압 기구를 총동원하여 사실상 남조선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언론을 완전히 봉쇄하고 시민들이 10명 이상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불가능하게
하였다. 삼엄한 경계
속에 민중 학살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학살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대구 인민항쟁은 연쇄반응적으로 남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1946년)
10월 5일 부산, 마산, 인천, 군산, 목포, 여수, 통영 등 지역 회원 1만 1천여 명이 동정파업을 하고 부산 등지의 시민들의 투쟁을 격려하는 위문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1946년)
10월 7일 경남 마산에서는 미군과 경찰이 시위 중인 애국시민 6,000여 명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그 일대를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학살 만행은 남한의 모든 지역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1,500여 명의 민중이 생명을 잃었고 6,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평의 (1946년) 9월 총파업이 전 민중이 적극 지지하는 투쟁으로 발전하여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졌고, 대구 인민항쟁을 계기로 각지의 새로운 지하 정치투쟁이 발전하고
급기야 무장봉기로까지 발전하였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가운데서 대구 시내의 인민항쟁 희생자 수만 하더라도 미국의 보도에 따르면 군경과 테러단에 의해 살해된 3,000여 명, 행방불명 3,6000여 명, 부상자 26,000여 명, 투옥된
사람이 15,000여 명이었다. 또 이 (1946년) 10월 인민항쟁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사형과 같은 중형으로
죽어갔다.
10월 인민항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알
수 있으며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인민을 얼마나 무참하게 학살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미 제국 주의자들의 살인 만행에 수많은 인민들은 무장투쟁으로 봉기하여 대항했다.
무장봉기 지역은 다음과 같다.
례천, 경주, 연일, 성주, 왜관, 군위, 영천, 약수, 통영, 의성, 상주, 거창, 고성, 마산, 합천, 창녕, 경산, 고령, 양산, 울산, 동래, 청도, 진주, 서울, 개성, 장단, 연백, 인천, 경기도 광주, 강화, 충주, 제천, 홍성, 영동, 례산, 횡성, 삼척, 강릉, 화순, 전라도 광주, 목포, 순천, 함평, 라주 등 43개 지역에서 무장봉기
하였다.
(p212) ‘남로당’ 창립과 미 군정에 맞선 투쟁(11)
(1946년) 10월 인민항쟁에 이어 남조선의 43개 지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미국 제국주의의 잔혹한 탄압과 투쟁이 격화되고
있는 긴박한 때인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3 당이 합당하여 남로당(=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하였다.
(남로당)
중앙위원장 허헌 – 인민당
부위원장 박헌영 – 공산당
부위원장 이기석 – 신민당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은 1947년 3월 1일, “1919년 3.1독립 봉기 기념대회”를 남산공원에서 열었다.
이 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열 예정이었으나 미 군정이 이를 거부하고 우익 진영의 독립선언 기념대회를 열게 하였다.
이날 행사에 미
군정의 후원으로 우익
진영이 연 서울운동장 집회에는 수천 명이 참가한 정도인 반면 민전 주최의 남산 공원에는 불편한 장소임에도 50만 명 이상의 노동자, 농민, 학생, 시민이 모여 대회가 성대히 열렸다.
오후 3시에 폐회를 하고 데모에 들어갔는데 서울운동장 집회 참가자 우익 테러 단과 무장 경찰대가 남대문 근처에 잠복하여 있다가 민전 주최의 시위대를 급습하여 투석전이 벌어져 쌍방 수백 명이 중상을 입고 경찰관의 발포로 16명이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와 같이 남조선 민중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미 제국주의에 맞서 남로당은 한층 명백히 합법투쟁과 비합법 투쟁으로 양면 전술을 취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조선 문제의 유엔 총회 회부와 남한 단독선거 반대투쟁(15)
소련의 스츠코프 중장은 (1947년) 9월 26일에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의 석상에서
1. 모스크바 협정은 연합국이
조선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표명한 기초적 문서였다.
2. 북조선에 있어서 민주적
개혁이 진척되고 있음에도 남조선에서는 미군 당국이 인민 위원회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민주개혁도 하고 있지 않다.
3. 소련이 조선의 병합을
희망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사실무근이다.
4. 모스크바 협정에서는 5년간의 신탁통치를 말하고 있으나 미국은 10년간의 신탁통치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고 진술하고 소련과 미국 두 점령군이 3개월 이내 – 1948년 초두 – 동시에 철퇴할 것을 제안했다.
미소 양군 동시 철퇴의 제안은 국제연합총회에 상정된 조선 문제의 심의를 철회하려는 (소련의) 의도도
있었겠지만 남북 조선의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가진 좌익 세력의 지지를 배경으로 한 소련의 자신감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북조선에서는 북노당을 비롯한 전 정당, 사회단체가 이것을 열렬히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남조선에서도 좌익계의 정당, 사회단체는 물론 중간정당, 사회단체까지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그 뒤 김구, 김규식
등도 미소 양군의 철퇴를 강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미국은 같은 해(=1947년) 11월 14일 국제연합에서 “국제연합감시
아래서 남북 조선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미국 측 제안을 가결하였다.
(p229) 국제연합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화민국(=대만),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불참가) 9개국으로서 국제연합 임시 조선위원회를 구성하여 남조선에 파견하게
되었고, 동 위원회 멤버들은 1948년 1월 8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국제연합 임시
조선위원회는 (1948년) 1월 23일 특히 협의를 구하는 대상으로서 남조선의 이승만, 김성수, 김구, 김규식, 허헌, 박헌영과 북조선의 김일성, 김두봉, 조만식 9명의 정치가를 지명하여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중에서 회담이
실현된 것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4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과 김성수는 남조선 단독선거를 주장하였고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통일
선거를 주장하여 양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 회의 개최를
요망하였다.
특히 김구는 (1948년) 1월 26일의 국제연합
임시 조선위원회와의 회견
석상에서
1.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
2. 남북 정치 지도자의 협상
3. 남북 정치 협상 뒤 총선거
를 실시할 뜻을 밝히고 단독선거 반대 결의문을 제시하였다.
주 반대 이유는
(1) 국제연합 결의에는
조선 민족의 자주적 주권행사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2) 소련과의 합의를 보지
못하였기에 필연적으로 남북 분열을 초래하고
(3) 국제연합 임시 조선위원회의 감시는 내정 간섭이다.
이어서 (1948년) 2월 6일, 김구, 김규식은 국연(=국제연합) 임시
조선위원회를 방문하여 “남조선 단독 선거는 조국 분단의 고장화다” 라고 하고 위의 세 조항의
제안을 또다시 강조하고, 김구는 (1948년) 2월 10일에 “3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호소한다” 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단독 선거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1948년) 2월 27일에도 “나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나는, 조국을 사랑하는 절대다수의 애국자들에게 통일된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하여 정의의 항쟁을 계속한다. 나는, 어떠한 위험한 사태에도 이를
사양하지 않는다.” 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시금 그는 국연(=국제연합) 임시
조선위원회 대표 메논(인도 대표) 과의
협상에서 “귀하는 국연 임시 조선위원회를 신용하라고 하지마는 단독선거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언명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번복하는 그대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귀하는 고국(=인도)에서의 분열의 비애를 알면서 우리 조선에게 분열로 인한 같은 비애를 겪게 하려 하느냐!”라고 말하며 메논이 얼굴을 붉히게 했다.
남로당은 동 위원회가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를 알아채고 동 위원회의 서울 도착(1948.1.8) 이전인 1947년 12월 11일에 “국토를
둘로 나누어 민족을 분열케 하는 단선단정(=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
반대하여 소련의 제안과 같이 미소 양군을 동시에 철퇴시키고 조선 인민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 자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다각도의 구국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라는 서명을 내었다.
남조선 단독선거
안이 발표되자, 조선 인민은 당연히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미국 일변도인 극우세력인 대한독립촉성회(이승만 일파), 지주, 매판자본가, 고급관료의 집단인 한국민주당(김성수 일파, 친일 매국노) 및 그 지배하의 단체를 뺀
모든 정당, 사회단체가 국연 임시 조선위원회 감시 아래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1948년 5월 10일)에 반대했다.
남조선 인민의 남북통일 운동의 기운이 급속도로 형성되어 감에 따라 남로당, 전평, 전농, 청년, 학생 등의 주목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이승만 일파와 한국민주당의
김성수 일파를 남조선의 정계에서 고립시키고,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독립문제는 조선 인민 스스로의 손에 의해서 해결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을 중간, 우익의 각 정당, 사회단체에게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러한 성과뿐만 아니라 중간, 우익 정당의 태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의 신식민주의 정책과 민족분열
정책을 뿌리 뽑게
하며 남북통일 운동을 특진시켰다.
그러한 결과 우익진영에서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이극로 등 다수의 사람들과 남로당, 근로인민당 등 다수가 38선을 넘어 월북하였다.
당시의 남조선 정치가들이 월북한 것은 남북통일 정권을 민족 스스로의 손으로 하루라도 빨리 수립하고 싶은 심정과
민족 통일의 염원을 위해서였으며 남쪽에서 월북한 사람들과 북쪽의 정치가들이 (1948년)
4월 19일부터 평양의 모란봉 극장에서 남북연석 회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의에 남북의 56개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북조선 측에서 300명 남조선
측에서 395명)이 참가하였다. 그 중 245명은 해방 전의 민족해방운동(=독립운동)의 경력을 가진 중요한 인사들이었다. 북조선 측은 북조선노동당, 조선민주당,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 북조선지급동맹, 북조선농민동맹, 북조선 민주 여성동맹, 북조선 미주 청년동맹, 북조선 그리스도교 연명, 북조선 불교 연합회
남조선 측은 남조선 노동당(=남로당), 근로인민당, 조선인민공화당, 신진당, 사회민주당, 민주한독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근로대중당, 농민당, 민주독립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 총연맹, 조선문화단체 총연맹, 남조선 민주여성동맹, 민주애국청년동맹, 자주여성동맹, 전국청년회, 유교연맹, 재일본조선인연맹, 그리스도교민주동맹, 불교도연맹, 불교청년당, 조선어학회, 민주학생연맹, 반파쇼투쟁위원회, 천도교학생회, 민중동맹, 민족대동회, 삼권주의청년동맹, 독립운동자동맹, 학생동맹, 민족해방청년동맹, 남조선신문기자회
이와 같은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가 모여 연 연석회의는 김성수 일파의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일파의 대한독립촉성회를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을 총망라한 것이다.
연석회의 제1일에 의장단에는 김두봉, 김일성, 허헌, 박헌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최용건, 김원봉, 김달현을 선출했다.
김일성이 ‘북조선의
정치 정세’를 보고하고, 박헌영과
백남운이 ‘남조선의
정세’를 보고하고 김구가 견해를 진술하였다.
연석회의는 이러한 보고를 기초로 하여 토의를 진행하였으며 최종일인 (1948년) 4월 23일에는
1. 남조선 정치 정세에
대한 결정서
2. 전 조선 동포에게
격한다 (호소문)
3. 남조선 단독선거와
단독 정부를 반대하는 결의문
4. 미소 양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를 채택했다.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끼리 한 장소에 모여서 이와 같은 결의문과 호소문을 채택한 것은 그 의의가 대단히 크다. 조선 민족의 자주성에 기초하여
남북 조선의 통일이 얼마나 민족적인 비원인가를 말해준다.
남로당과 전평 등은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 위원회를 조직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 위원회는 (1948년) 5월 5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제연합 임시 조선위원회는 (1948년) 4월 28일의 회의에서 5월 10일의 남조선 선거를 감시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정은 그들이 조선을 분할하여 남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하려는 정책을 수행하는 미국의 앞잡이인 것을 또다시 한 번 더 명백히 한 것이다.
(남로당과 전평의 1948년) 5.8 파업에
대해서 이 점령군은 특별경계령을 포고하고 군경과
우익 테러단을 동원해서 파업 참가자 및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자들에게 가혹한 탄압과 테러를 가했다.
미 정부는 (1948년) 5월 10일의 선거에 대비하여 순양함 한 척을 인천에, 구축함 한 척을 부산에 파견하고 지상 부대에게 경계를 담당하게
하고 공군은 남조선 각지의 상공을 비행하게 하면서 위협을 가했다. 마치 전쟁 체제를 방불케 하였다.
그리고 (1948년) 5월 10일에는 마을 주민과 마을 단위로 감시조를 만들고 민중들에게 총검을 휘두르고 짐승을 수렵하듯이 체포를 감행하였다.
미 군정의 “공식발표”에
의하더라도 (1948년) 5월 7일부터 10일까지 나흘간 검거, 투옥된 사람이 5,425명, 살상된
사람이 350명에 달했으며 국제연합 임시 조선위원회가 축소한 발표 숫자에 의하더라도 투표를 거부한 이유로 중상을 입은 사람이 137명, 살해된
사람이 128명에 이르렀다. 또한 제주도에서는 (1948년) 4월 3일부터 전개된 인민항쟁-빨치산 투쟁으로 선거를 실시할 수가 없었다.
이 선거는 좌익, 중간
세력은 물론 김구가 지도하는 한국독립당, 김규식이
지도하는 민족자주연맹 등 남북 정치 협상 회의에 참가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완연한 보이콧
속에 이루어졌으며 국제연합 임시
조선위원회마저 “자유로운
분위기의 선거가 아니었다” 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유혈과 살상에 의해 실시된 투표였다.
이와 같이 미국의 총검과 남조선 반동파의 테러 속에서 부정과 사기로 만들어진 투표였다. 그렇게 유혈과 살상과 부정과
사기가 넘쳐 흐르는 선거에 의해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 이승만 정권이 만들어졌다!
(p240) 이와 같은 인민유격투쟁과
프랙션 공작을 과감히 전개하고 있는 중에 1949년 6월 28일에는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통합하여 조국 통일 민주주의 전선을 결성하여 (1949년) 7월 1일에는 남로당과 북로당을 합해서 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다. 이때부터 남조선에 있어서
투쟁은 조선노동당의 지도 아래 행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남조선의 빨치산 투쟁은 같은 해 9월부터 “아성 공격”을 목표로 하여, 주로 각 지역의 경찰과 군대를
습격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는 한편 조직적인 프랙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선거) 부정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을 했지만, 그 뒤 전 민족적인 조국의
자주 통일 투쟁은 더욱 거세졌다.
1945년 12월 16일에서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회의가
열렸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그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4개국 대표에 의한 신탁통치를 기본 취지로 하는 미국 측의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 취지로 하는 소련 측의 수정안이 토론되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 (1945년) 12월 28일 영국의 동의로 협정이 체결되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표되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내용)
첫째,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 건설하며, 민주주의 원칙 아래서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해를 청산할 조건들을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a provisional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한다.
둘째, 연합국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p242) 총검으로 부정하게
조작된 선거 결과는 이승만 일파가 53명, 김성수
등 친일파 집단인
한국민주당이 29명, 극우단체인
대동청년단이 14명, 민족청년단 6명, 기타
우익 단체가 11명, 무소속이 88명이었다.
이는 무력으로 강행한 선거에서 미국의 패배를 보여줬다.
무소속 88명은 남북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진 않았지만 남북통일을 동조하고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자들도 ‘미소 양군이 철퇴하고,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요구를 하며 남북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가
구국전선을 결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미국 제국주의는 이승만 정권을 발족시켜 미군 군정 때 남조선노동당, 전국노동평의회 등을 탄압했을 때 보다 더욱
가혹하게 잔인한 학살 만행으로 조선 인민을 탄압했다.
약 3만의 미군을 남한에 주둔시키고 6만의 경찰관과 30만의 대한노총(지금의 한국노총)을 비롯한 우익 테러
단과 우익 청년단을
무장시켜 인민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남로당을 비롯한 전평의 핵심 조직들은 이승만 정권의 무력 탄압에 더 이상 정치투쟁으로 맞서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남로당은 ‘5.10 단독선거’ 까지는 정치투쟁에 전 정력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탄압이 더욱 가혹해짐에 따라 당의 일부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남로당은 (1948년) ‘2.7 구국투쟁’에서 일부 지역에 당 중앙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장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긴박한 사태였으므로 이승만 정권 발족 뒤로 각 지방 도당부에 군사부를 설치하고 당 일반 조직과 야산 부대와 조정을 하며 군사 지역을 지리와 행정적 조건에
따라 구분하여 각 도당부가 이를 총괄하였다.
이에 따라 당 중앙은 1948년 말에는 지리적, 행정적 조건에 따라 유격
지구를 편성하였다. 주로
지리산 유격 지구, 호남 유격 지구, 제주도 유격 지구, 5대산 유격 지구, 태백산 유격 지구 등 5개 유격투쟁
지구를 편성하여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또한 남로당은 남조선 군대에 대한 침투 공작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신 남조선의 청년, 학생들은 국방경비대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방경비대가 미국의 외인부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해방 뒤 경제 혼란기였기에 직장이 없는 청년들이 취직하는 의미에서 일부 입대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입대자 대부분은
빈곤한 노동자, 농민
출신이었기에 당연히 인민을 탄압하는 경찰을 미워하고, 대부분 전평을 비롯한 좌익 세력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남로당은 1947년 7월, 당
중앙부에 군사부를 설치하고 국방경비대에 대한 침투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군 침투 공작은 장교와 사병으로 구분하여 장교는 당 중앙 군사부가 담당하고 사병은 원칙적으로 지방 당부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장교의 선발과
교육, 배치 등은
중앙 사령부가 담당하였다. 그것은
침투 공작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 반란 사건, 1948년 11월 대구 6연대 반란
사건, 1949년 5월 해안경비대 월북
사건, 1949년
대대 월북 사건 등 군 반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해방 직후(1945년~1949년) 남한 사회 실상 (4/4) 에서 계속...
2016.11.02 정론직필 씀
첫댓글 1946년 정판사위조지페 사건의 전말은 어디에도 없군요. 다음편에 나올려나?
등신,사대천민들에게 반드시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
미 군정시부터 현재까지 발생하는 이 사회 문제의 근원은, 매국노와 일제의 잔재를 스스로의 힘으로 청산할수 없었으므로 발생했다 봅니다.
한일병탄 이후 시기적으로 어느곳이 좀 더 고통 받았는가 덜 받는가 차이는 있으나, 대다수 국민은 힘든 과정을 격고있고 현재도 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요즘 이 카페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영남인 책임론, 필요합니다 반성할 일입니다. 그러나 신라국, 왜구라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 이를 볼때 답답한 마음입니다. 영남인에 책임 있음을 카페를 찾는이 중 모르는 이가 없을터인데, 이런류의 과도하게 자극적인 글을 지속적으로 올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남북통일에 앞서 동서분리가 먼저 되지 않을까
글 올리는 이는 알고 있겠죠.
영남인에게 책임을 묻는다. 과정 중요합니다.
스스로 무지함에 대해 인식하게 하는 일이 첫째요, 개인의 이득을 추정하여 투표한 잘못을 반성케 하는것입니다.
책임을 묻는 순서는 최우선 매국노와 일제의 잔재의 청산, 그 잔존기득세력에 대한 처벌을 반드시 앞선후 하여야 할것으로, 이는 순서가 바뀌거나, 영남인이 스스로의 과오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 반성전에 책임을 논하게 되면, 매국노와 그 잔존세력은 반발하는 이를 앞서워, 분열을 조장, 새로운 기회를 찾을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의식 바꿀수 있는 기회임을 자각한 스스로가, 자신의 가족부터 의식전환 시키는 범 국민적 운동을 주창하며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카페에서는 영호남 차별 운운은
결단코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 카페 운영진들 중 두 분이 영남 분들입니다.
유성님, 죽돌이님...
만일 우리 카페에서 영호남 차별 운운의 의식을 가졌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정론직필도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각자 개인들의 문제일 뿐....
따라서 영호남 문제를 일반화시키는 짓은
우리 카페에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