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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 성혼선생 묘 지난 연말에 파주지역 묘지답사를 후배와 함께 했다. 그동안 가보지 못한 곳 위주로 했는데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다. 그런데 새해들어 풍수 학우님들과 파주답사를 한 곳은 널리 알려진 성현들 묘역이다. 그런데도 이 분들조차 블로그에 올려있지 않아 나로서도 의아스럽다. 성혼 선생은 동방18현에 속한 대유학자인데 이번에 함께 답사한 조선의 정승 황희정승조차 동방18현에 들지 못한 것을 보면 참으로 영광스러운 문묘 배향인 것이다. 문묘(文廟) 종사(從祀) 인물을 배출한 각 가문(家門)은 대대손손(代代孫孫) 더 없는 영예(榮譽)로 안고 살았던 것이다. 성혼선생 묘역은 서향 언덕에 부친 보다 위에 모셔진 소위 역장인데 율곡 묘역에서도 말했지만 그 당시에는 역장의 개념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이곳은 앞쪽이 넓게 펼쳐져 바람으로부터 부담이 되는 곳이다. |
동방18현 성혼(成渾)선생 1535(중종 30)∼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현령 성충달(成忠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세순(成世純)이고, 아버지는 현감 성수침(成守琛)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 윤사원(尹士元)의 딸이다. 서울순화방(順和坊: 지금의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 해 겨울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즉, 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중용(中庸)』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1573년 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 해 12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모두 사임하였다.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은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이어 내섬시첨정·풍저창수(豊儲倉守)를 역임하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했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典設司守)·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성혼은 경연석상 또는 상소로 계속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도리어 겨울용 신탄(薪炭: 땔감의 하나)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龍驤衛上護軍)에 승진되었다. 그 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에는 다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사옹원정(司饔院正)·사재감정(司宰監正) 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성혼의 관계 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 후 이이가 죽자 사양하면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다. 그 해 7월에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 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자신을 공격했으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하였다. 15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 자신이 죽은 뒤에 성명이나 행적 등을 밝힌 글)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성혼은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억울하게 죽자 동인의 화살이 성혼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실 성혼은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성문준(成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자신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였다. 이 후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駐蹕)하면서 불러들여 전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다.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 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성혼이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성혼은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편의시무9조(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永柔)·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했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곁에서 호위하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 『우계집(牛溪集)』 6권 6책과 『주문지결(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爲學之方)』 1책이 있다.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 관작이 회복되고 제향의 허락이 내려짐)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 배향에서 삭출됨)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廡)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문화재지정 | 경기도 시도기념물 제59호 |
문화재명칭 |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 묘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산8-2번지 |
관리자(연락처) | 창녕성씨 |
▼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 묘 안내판
▼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 홍살문과 묘역
▼ 우계(牛溪) 사당
▼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 묘 안내판
▼ 성혼(成渾)선생 신도비... 왼쪽 것은 부친 성수침의 신도비
▼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 신도비
▼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 묘 전경.... 묘역이 아주 단촐하다.
▼ 성혼(成渾)선생 묘
▼ 성혼(成渾)선생 묘
▼ 성혼(成渾)선생 묘 상석
▼ 성혼(成渾)선생 묘석물... 그 흔한 망주석, 문인석도 없다.
▼ 성혼(成渾)선생 묘비와 동자석
▼ 성혼(成渾)선생 묘비... 관직도 없이 깔끔하게 썼다.
▼ 성혼(成渾)선생 묘비 뒷면...
▼ 성혼(成渾)선생 묘 측경
▼ 성혼(成渾)선생 묘 후경... 앞쪽 높은 건물은 엘리베이터 시험장이다. 낮으막한 산이 청룡을 감싸고 본신 안산을 이루고 있는데 묘역에 비해 용호, 안산이 너무 낮고 서향을 하면서 바람길에 노출되어 있다.
▼ 성혼(成渾)선생 묘 아래에는 부친 성수침 묘가 있다.
▼ 성혼(成渾)선생 부친 성수침 묘비
▼ 성혼(成渾)선생 부친 성수침 묘비는 앞뒤가 구분이 안간다.
▼ 성혼(成渾)선생 부친 성수침 묘 동자석
▼ 성혼(成渾)선생 부친 성수침 묘 후경... 부친 묘에서는 앞쪽이 그리 낮아보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