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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한월 법장 스님 탑명(蘇州三峰漢月藏禪師塔銘)」과 명말 임제종 쇠퇴
2020년 8월 24일
만봉산
황종희 「한월 법장 스님 탑명(蘇州三峰漢月藏禪師塔銘)」과 명말 임제종 쇠퇴
2020년 8월 24일
명나라 말기에 선종을 대표하는 임제종은 많이 쇠퇴하였습니다. 임제종 제30대 종사 밀운 스님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렵게 살면서 글공부도 하지 못하였고 26살에 출가하였습니다. 그의 종사 환유 정전 스님이 참으로 고생을 많이 시켰다고 합니다. 정전 스님은 당시 불교계에서 어려운 일이 많기에 인내심이 큰 제자에게 종사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한월 법장 스님은 유가 집안에 태어나서 출가할 때 아버지가 땅을 떼어주면서 스님이 되더라도 길에서 구걸하지 말라고 일러주었습니다. 40살에 깨닫고 42살에 각범 스님의 어록을 읽고 깨달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깨달았으나 선종의 어떤 종파에도 귀속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임제종에 귀속하고 싶어서 밀운 스님을 찾아가서 사실상 종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덤볐습니다.
밀운 스님은 임제종의 방할 방법으로 한월 스님을 때리고 욕하여 내쫓지 않고 잘 받아주었습니다. 황종희가 자료를 보고 기록한 대화를 보면 한월 스님이 일방적으로 밀운 스님을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황종희도 두 스님의 사이가 벌어진 것이 아니고 한월 스님이 밀운 스님의 종사를 계승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한월 스님의 제자들이 독립하여 삼봉종(三峯宗)을 세웠다고 합니다.
한월 스님은 기존의 방할 방법으로 깨우치지 않았고 더구나 어떤 종파에 귀속되지 못하여 답답하게 여겼습니다. 이 문제는 법통 계승이 깨달은 사람에게 넘겨주느냐 종사가 개인적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넘겨주느냐 문제가 걸렸습니다. 이것이 명말에 일어난 법통 계승 논쟁입니다.
한월 스님과 밀운 스님 모두 깨닫는 광경을 보면 그다지 높은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둘이 만나 나눈 대화를 보더라고 깊이 있는 토론은 아닙니다. 따라서 명말 불교의 쇠퇴를 잘 보여줍니다.
황종희는 오여필과 진헌장의 사승관계를 들어 스승과 제자가 반드시 똑같은 견해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차라리 학술 발전을 위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 것을 허용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황종희(1610-1695)는 24살(1633) 가을과 겨울에 항주에 가서 독서사(讀書社) 회원들을 만나 당시 국가와 사회 문제를 토론하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독서사 회원들은 각자 스스로 절개를 지키자고 약속하였습니다. 황종희는 이때 한월 법장(漢月法藏,1573-1635) 스님이 정자사(淨慈寺)에 있었고 수제자 일묵 홍성(一默弘成,1574-1641) 스님이 토론에 참여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황종희가 일묵 스님을 만난 것은 확실하고 한월 스님을 만났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월 법장 스님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한월 스님과 일묵 스님은 당시 지식인과 퇴직 관원들의 모임(社)에 참여하여 국가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 모색을 지지하였습니다. 불교 선종의 사회참여입니다. 이들 스님이 어떤 개혁방안을 가졌는지는 현재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월 스님은 명나라 말기 환관 위충현을 반대하는 동림당 회원 또는 복사(復社) 회원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특히 항주에서 독서사(讀書社)를 결성한 회원들과 잘 어울렸고 독사사는 나중에 복사(復社)에 통합되었습니다. 한월 스님은 이들과 함께 국가 문제와 사회 문제를 깊이 토론하고 지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지식인이나 관원 사이에서 지지를 받았습니다. 황종희의 아버지도 그런 관원이었기에 황종희가 한월 스님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황종희가 한월 스님의 임제종 재건과 동림당 결사를 똑같이 구국운동이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황종희가 한월 스님을 지지한 입장에는 정치적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황종희는 일찍부터 당시 지식인과 관원들의 모임에 자주 참여하였고 이들의 정치적 견해를 듣고 입장을 지지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성향은 향촌 지배층의 정치적 여론이 중앙정부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평민들의 정치적 여론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양명 후학 가운데 태주학파의 일부는 평민 출신으로서 배우지 못한 백성을 계몽하는 민간 강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황종희는 태주학파의 민간 강학을 반대하고 오히려 『명이대방록, 학교』에서 지식인과 관원들의 정치적 견해를 중앙정부가 반영하는 여론정치를 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황종희의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밀운 스님과 한월 스님의 다툼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밀운 스님은 가난한 평민 출신이고 한월 스님은 중등 경제수준을 가진 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출가하여서도 용돈을 갖고 있었습니다. 서로 출신 계급이 달랐습니다. 황종희는 한월 스님의 사회참여에 영향을 받았기에 그들의 정치적 성향을 지지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불교계의 정치적 입장입니다.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은 명나라 멸망 원인이 한월 스님, 서양 천주교, 호광지역(湖廣, 楚)의 시(詩) 셋이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한월 스님과 그의 제자들을 큰 요마(大妖魔)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가 비난한 까닭은 한월 스님과 제자들이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함락하고 이듬해 1645년 강남지역을 정복하였을 때 청나라에 항복하고 따랐습니다. 따라서 죽을 때까지 반청운동을 반대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한월 스님의 삼봉종은 반청 운동에 참여하였고 당시 임제종은 아마도 청나라 지배를 인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청나라 옹정제는 옹정 11년(1733)에 『간마변이록(揀魔辨異錄)』을 편찬하여 임제종을 정통이라고 지지하고 한월 스님의 삼봉종을 배척하였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쇠퇴한 불교를 연구하는 목적은 크게 두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중국에서 불교 특히 선종이 어떻게 쇠퇴하였는지 까닭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당시 논쟁한 문제들을 보고 당시 불교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중국에서 불교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여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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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 주굉(蓮池 祩宏, 1535-1615)
영곡사 고심(靈谷寺 古心, 1541-1615)
자백 진가(紫柏 真可, 1543-1603)
감산 덕청(憨山 德清, 1546-1623)
환유 정전(幻有 正傳, 1549-1614) 임제종 제29대 종사
밀운 원오(密雲 圓悟, 1566-1642) 임제종 제30대 종사
한월 법장(漢月 法藏, 1573-1635) 밀운 원오의 제자
오여필(吳與弼, 1391-1469)
진헌장(陳獻章, 1428-1500)
전겸익(錢謙益, 1582-1664)
황종희(黃宗羲, 1610-1695)
출처 : 黃宗羲,「蘇州三峰漢月藏禪師塔銘」(乙巳, 1665), 『南雷文案』,卷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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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한월 법장 스님 탑명(蘇州三峰漢月藏禪師塔銘)」: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고 작은 학술은 스승이 없이 대성한 학자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유가의 학술을 보면 맹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으나 정명도(程明道)는 1,400년 뒤에 태어나서 오경과 사서를 보고 깨달았고, 심지어 경학에 밝았다는 한나라 동중서(董仲舒)와 당나라 왕통(王通)도 누구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남악 혜사(南嶽 慧思, 515-577, 천태종 제3조, 중국 제1조, 湖南省 南嶽) 스님부터 천태종의 계승 관계와 청원 행사(青原 行思, 671-740, 江西省 青原山 淨居寺) 선사부터 선종의 계승 관계를 비롯하여 임제종(臨濟 義玄, ?-867, 河北省 鎮州 臨濟院), 운문종(雲門 文偃, 864-949, 廣東省 韶州 雲門山), 위앙종(溈山 靈佑, 771-853; 仰山 慧寂, 815-891, 湖南省 潭州 溈山、江西省 袁州 仰山), 법안종(法眼 文益, 885-958, 南京 清凉寺), 조동종(洞山 良價, 807-869, 江西省 宜豐縣 洞山寺; 曹山 本寂, 840-901, 江西省 撫州 曹山) 5종의 사승관계와 사제관계가 분명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장자(莊子、庚桑楚)』의 말처럼 “토종벌은 콩벌레를 길러내지 못하고 월(越) 지역의 작은 닭은 고라니 알을 품지 못한다.”는 것처럼 비슷한 사람들끼리 학술과 참선 방법을 전수하여 내려오더니 나중에는 불교를 종파마다 사유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뛰어난 사람이 나오더라도 이들 종파에 귀속하자니 문제가 되고 귀속하지 않자니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느 종파에도 귀속하지 않는 경우,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활동을 잘하였으나 사람들은 아비 없는 고아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어느 종파에 귀속하려니, 깨달은 뒤에 스승을 찾으면서 스승의 학술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스승이 “제자 당신의 학술은 저와 다릅니다.”라고 말하면 제자는 반드시 스승도 모르는 것을 깨우쳤더라도 깨우친 내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이렇다면 스승이라는 이름은 학술을 해치는 가장 나쁜 것입니다.
만력(萬曆, 1573-1620) 연간 이전에 벌써 선종이 쇠퇴하였는데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 셋은 맥이 끊어졌습니다. 조동종은 겨우 밀실에서 몰래 상속을 이어오고, 임제종도 있는 듯 없는 듯 보잘 것 없고 겨우 몇 십명 또는 몇 백명이 모여서 서로 주고 받았으나 결국에는 꼭지 떨어져서 시들어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자백 진가(紫柏 真可, 1543-1603)과 감산 덕청(憨山 德清, 1546-1623)처럼 훌륭한 스님이 독립하였으나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침을 뱉었습니다. 결국 자백 진가 스님과 감산 덕청 스님도 법통 계승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비난은 받았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떤 종파에 귀속되지 않았기에 받은 비난입니다. 만력 연간부터는 엉터리 방할(棒喝)이 크게 유행하고 세상을 들썩였습니다. 자백 진가 스님의 제자 도개 밀장(道開 密藏, 가흥 대장경 편찬을 주도) 스님은 이런 풍조를 비판하고 당나라 천태종 제9조 형계 담연(荆溪 湛然) 선사를 공부하고 추종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도개 밀장 스님도 결국에는 당나라 불교의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도개 밀장 스님은 종파에 귀속하고 싶었으나 귀속하지 못하여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삼봉 한월 법장(三峰 漢月 法藏, 1573-1635) 스님은 도개 밀장 스님의 뒤를 이어 엉터리 방할 풍조를 고치려고 종지를 밝혔으나 비난을 받은 상처가 화살 맞은 자국처럼 많고 컸습니다. 한월 법장 스님은 임제종 법통을 계승하려고 임제종 제30대 밀운 원오(密雲 圓悟, 1566-1642)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하였습니다. 두 스님 사이의 법통 계승 논쟁은 지금까지도 지지자와 반대자가 반반입니다. 이것은 귀속하려다가 받은 비난입니다.
선종의 종지를 말하면, 임제종은 요간(料簡), 빈주(賓主), 현요(玄要), 조용(照用), 사알(四喝) 등 요강을 만들었고, 운문종은 함개(函蓋), 재류(截流), 축랑(逐浪)의 삼구(三句)를 요강으로 만들고 방할이라는 엉터리 속임수를 다 썼습니다. 조동종, 위앙종, 법안종 셋도 사금(四禁), 오위(五位), 육상(六相), 삼매(三昧) 등 요강을 세워서 임기응변의 각가지 속임수를 다 썼습니다.
한월 밀장 스님은 송나라 임제종 황룡파 덕홍(德洪, 1071-1128, 字覺範, 號寂音尊者)의 서적을 읽고 깨달았습니다. 혜강(嵇康, 223-263)이 귀신에게서 배웠다는 악곡 「광흥산(廣陵散)」이 전해지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으나 한월 밀장 스님은 끊어진 학술을 밝히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태창 혜수사(太倉 慧壽寺)와 소주 북선사(吳門 北禪寺)에서 스님께 나와서 설법하라고 부탁하였으나 스님은 자리가 바르지 않아 나가지 않고 “위음왕불(威音王佛) 이래로 스승이 없는 스님에게는 자리에 올라가서 설법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을 불러 설법하라면 앞으로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거짓말하고 세상의 중생을 가르치려고 할 것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뒤에는 감산 스님이 초청하여 강서성 광려현 여산(廬山)에도 올라갔고 호광(湖廣) 지역에도 배를 타고 찾아갔으나 실망하였는데 마치 사자 힘줄로 만든 악기와 독약을 바른 북을 쳤으나 알아듣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임제종 제30대 밀운 원오(密雲 圓悟, 1566-1642) 스님이 절강성 가흥부 금속산 광혜사(嘉興府 金粟山 廣慧寺)에서 주지를 맡고 있을 때 한월 법장 스님이 찾아갔습니다. 밀운 스님을 기뻐하며 단상에 올라가서 여러 사람에게 “한월 스님께서 깨달으신 것은 진실입니다. 출가도 저보다 먼저 하셨습니다.(원오 스님 26살 출가, 한월 스님 15살 출가) 그런데 몸을 낮추어 여기에 오신 까닭은 깨달은 것이 임제종의 원류라는 것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이 종사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한월 스님이 여기까지 오시도록 번거롭게 하였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한월 스님이 단상 아래에서 임제종의 근원을 여쭈었습니다.
밀운 스님은 대답하길 “임제종의 설법은 오로지 방할(棒喝) 방법으로 불제자를 가르쳐왔습니다. 어떻게 대답할지 못하는 사이에 단도직입적으로 본심을 깨우쳐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한월 스님이 임제종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여쭈었습니다.
밀운 스님은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생각한 뒤에 겸손하게 대답하길 “종지가 아주 어려워서 상속하는 데 좋은 계승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억지로 맡았으나) 차라리 비워두는 것만 못합니다.”
한월 스님은 “비워두어서는 안 됩니다. 임제종 황룡파 황룡 혜남(黃龍 慧南, 1002-1069)께서 말씀하시길 ‘공부하려는 사람들을 속이고 속는 병폐는 부처님의 밝은 지혜로 세밀하게 밝히지 못한다면 어떻게 끝나겠습니까?”
그래서 밀운 스님은 한월 스님이 임제종 원류를 찾아왔다는 뜻에서 “원류(原流)”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한월 스님은 거절하고 받지 않고 말하길 “임제종의 삼현삼요(三玄三要)는 궁극적으로 무슨 법입니까? 말씀해주신 법이 저의 생각과 일치한다면 감히 받겠습니다만.”
한월 스님은 떠나는 배를 탔는데 겨울에 눈이 내려서 잠시 출발하지 못하였습니다.
밀운 스님은 사람을 시켜 말하길 “우리 임제종은 지팡이와 지휘봉을 전해주어 상속의 징표를 나타내는데 너는 다른 방법으로 전해왔다고 주장하는가?” 그렇다면 “삼현삼요를 뭐라고 설명하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한월 스님이 대답하길 “‘눈 내려 춥고 강물을 꽁꽁 얼어붙었습니다.’(먼저 깊은 寂定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가 첫째 구절입니다. 둥근 방석이 둥글지 않고, 도끼로 쪼개도 쪼개지지 않고, 뾰족한 쇠뿔이라는 모순에 넘어지고, 혓바닥도 없는데 말을 많이 하는 혀가 길고, 깊고 깊은 곳에는 옛길조차 끊어져서 가지 않는 것이 대문인데, 길을 가려는 것은 피상속인 아들이 상속인 아버지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다음 한 줄을 읊어주세요.”
밀운 스님은 묻기를 “송나라 분양 선소(山西省 汾陽 善昭, 947-1024) 스님은 ‘임제종의 삼현삼요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이해하기 어려운가?”
한월 스님은 대답하길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 이런 멍청이와는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설사 이해하였더라도 여전히 천 개 산에 가로막혔으니 머리와 발끝을 꽁꽁 묶어서 뒤엎어야 합니다. 큰 눈이 내려 호수와 하늘에 가득하여 아직 출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밀운 스님이 다시 묻기를 “분양 선소 스님의 둘째 구절 ‘뜻을 이해하고 언어 개념을 잊으면 도(道)에 가까이 갈 수 있다.’에서 뜻을 이해하고 언어를 버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한월 스님은 원상(동그라미 안에 점 셋을 찍은 그림)을 그려서 보낸 뒤에는 배의 끈을 풀고 떠났습니다.
밀운 스님은 다시 사람을 보내 원상(圓相) 그림(圓伊三點)의 뜻을 묻기를 “이것이 원상이냐? 점 셋이냐?”
한월 스님은 답신을 보내길 “임제종이 세운 삼현삼요의 깊은 뜻은 천년만년 오랜 세월이 지나도 틀렸다고 쉽게 부정당하지 않습니다. 삼현삼요 종지가 틀렸다고 무너지지 않았다면 임제종의 종지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제가 어찌 임제종에 잠시 추천하기 쉽지 않다고 계승할 사람이 없다고 임제종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북송시기 혜홍 각범(慧洪 覺範, 107l-1128, 又名德洪,字覺範,自號寂音) 스님이 말씀하시길 ‘이렇게 유가의 복장을 하고 공자 제자라고 말하면서 공자가 공부하였다는 『주역、계사전』을 비방한다면 어린이도 웃는다.’고 하셨습니다.”
밀운 스님은 한월 스님의 제자 일묵(一默, 江寧 柏氏)에게 서신을 보내며 말하길 “입적하신 환유 정전(幻有 正傳, 1549-1614) 스님께서 삼현삼요를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한월 스님은 알고 스스로 공부하였습니다.”
일묵 스님은 밀운 스님께서 한월 스님이 깨달은 종지를 실천하는 것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원류(源流)’라는 이름을 받고 돌아와서 한월 스님께 보고하였습니다.
곧이어 소주 북선사(蘇州 北禪寺)의 초청을 받고 떠났다.
한월 스님은 밀운 스님께 서신을 올려 말하길 “저(漢月 法藏)는 남송시기 고봉 원묘(高峰 原妙, 1238-1295, 南宋 臨濟宗 楊岐派) 스님의 참선 방법으로 깨달았고 북송시기 혜홍 각범 스님의 서적을 보고 깨달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밀운 스님께서는 출가하셔서 매를 맞아 피를 흘리셨고 세 번 기절하시면서 깨달아 임제종 제30대 종사가 되셨습니다. 저는 꽃잎처럼 둥글고 커다란 향을 살라 올리면서 스님께서 건강히 오래 사시길 빕니다.”
밀운 스님은 답신을 보내 말하길 “아마도 저는 임제종 종사에 어울리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적임자는 당신 같이 뛰어난 스님이어야 합니다.”(사실상 종사 자리를 물려줄 뜻이 있다는 것을 밝힘)
이때 밀운 스님은 한월 스님에게 아쉬운 감정이 있었으나 한월 스님이 뛰어나고 박식하게 변론도 잘하는 것을 따라갈 수 없다고 여기고 잠시라도 꼭 붙들어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밀운 스님의 제자들은 한월 스님이 잘났다고 떠드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고 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월 스님의 거짓을 비판하는 「벽망 7서(闢妄七書)」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밀운 스님과 한월 스님의 사제관계가 물불처럼 갈라섰다고 여겼습니다.
요즘도 진헌장(陳獻章, 1428-1500)의 학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진헌장이 오여필(吳與弼, 1391-1469)을 스승으로 모셨으나 배운 것이 없었다. 진헌장 혼자 고향에서 10년 동안 정좌하여 어느 날엔가 마음을 휘어잡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여필을 진헌장의 스승이라고 여길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유가와 불가에 똑같은 사례가 있는데 스승과 제자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것이 어찌 학술발전에 해악이 되겠습니까?
한월 스님은 이름이 법장(法藏)이고 호가 어밀(於密)이고 늙어서 천산(天山)이라고 고쳤습니다. 강소성 무석(無錫) 소씨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소란(蘇蘭)이고 어머니는 주씨(周氏)입니다.
어려서 지방 학교에 들어가서 다녔고 비가 많이 내려 물에 떠내려가서 선생님을 놓쳤는데 얼마 뒤에 큰 거북이를 타고 나타나서 동네 어른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15살에 무석에 있는 덕경원(德慶院)에서 출가하여 동자승이 되었습니다.
3년 뒤에 집에 돌아와서 성인식에 참여한 뒤 머리를 깎으면 말하길 “출가가 작은 일처럼 쉽게 결정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답니다.
방안에 글을 써서 걸어놓았는데 “나는 40살까지 깨우치고 60살 넘어서 죽겠다.”고 하였답니다.
고봉 선사의 어록을 읽더니 마치 내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이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였답니다.
스님은 29살(1601)에 연지 주굉(蓮池 祩宏, 1535-1615) 스님에게서 사미계를 받고, 37살(1608)에 영곡사 고심(靈谷寺 古心, 1541-1615) 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아 정식으로 출가하였습니다.
강소성 상숙현 해우진(江苏省 常熟縣 海虞鎭)에 있는 삼봉산(三峯山)에 들어가서 목장에 초막을 짓고 잠시도 모로 눕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습니다. 한밤중에 졸릴 때는 어린 스님에게 향판(香板)으로 때리고 큰소리로 부처님을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탄식하길 “나는 일찍이 40살에 깨닫겠다고 말하였는데 벌써 39살이다. 이렇게 허송세월하면 내 약속을 내가 어기는 것이다.”고 말하고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답니다.
이듬해(40살)에 삼봉산에 계신 낭천(朗泉) 늙은 스님과 함께 폐관하였습니다. 절을 올리고 방석에 앉자마자 어지러워서 가래를 많이 토하고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닷새만에 깨어났는데 마침 창문 밖에는 울타리를 치느라고 큰 대나무를 쪼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스님은 대나무 쪼개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마음속에서 하늘(空際)이 끝(斷)까지 보였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책을 꺼내보니 하얀 종이와 까만 글자만 보이고 글뜻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정좌하였는데 아주 잠깐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동안에 갑자기 조주 스님의 “청주 포삼 7근(靑州布衫七斤)” 공안과 종고 선상의 제자 미광 선사(彌光禪師)가 읊은 “콧구멍도 눌려서 뭉개졌다.(打失鼻孔)” 공안이 떠올라서 깨달았다는 노래를 지어 “관뚜껑에 못 3개를 박는데 못 박는 소리마다 한평생을 보내는구나. 슬픈 장송곡(薤露)이 끝나면 묘지에 심은 잣나무는 날마다 푸르르겠지.”라고 읊었습니다. 이때가 만력 임자년(1612년, 40살) 2월 초닷새입니다. 스님은 만족하지 않고 임제종의 삼현삼요 종지를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2년이 지난 뒤 매화꽃이 질 때에 폐관하고 정좌하였는데 등에서 종기가 나는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하루는 창문을 열고 노란 매화꽃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마음의 모든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는 것은 느꼈습니다. 그래서 각범 스님이 직지인심, 교외별전, 불립문자(直指人心、教外別傳、不立文字)를 강조하려고 지은 『지증전(智證傳)』을 꺼내서 읽어보니 마치 방안에서 각범 스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수기(授記)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스님의 평판이 날로 높아져서 자백 진가(紫柏 眞可) 스님의 상좌 한회(寒灰) 스님과 문곡(聞谷, 1566-1636)은 경산사(徑山寺) 주지 자리가 비어 스님을 초빙하였고 감산 덕청(憨山 德清, 1546-1623) 스님은 계승자로 삼으려고 불렀으나 모두 (法統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10년이 지난 뒤에는 임제종 밀운 스님을 계승하였습니다.
천계 연간(1621-1627) 말기에 문진맹(文震孟, 1574-1636, 文徵明 증손), 요희맹(姚希孟, 1579-1636), 주순창(周顺昌, 1584-1626) 등이 환관 위충현(魏忠賢, 1568-1627)에게 미움을 사서 관직을 사퇴하고 사회교류를 끊었습니다. 한월 스님은 가흥부 북선사에 있으면서 이들과 서로 평창하고 국론을 깊이 토론하였습니다. 항주 안은사(杭州 安隱寺)에서는 용이 허공으로 차고 오르듯이 설법하여 당시에 유명하였습니다. 여덟 곳 절에 머물며 설법하였는데 상숙현 삼봉산(常熟 三峰), 장주현 대자사(長洲 大慈), 성은사(聖恩), 오강현 성수사(吳江 聖壽), 항주 안은사(杭州 安隱), 정자사(淨慈), 무석현 금수사(無錫 錦樹), 가흥부 진여사(嘉興 真如)입니다.
숭정 을해년(1635) 4월 그믐날 하얀 지팡이(白椎, 白槌)를 들어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하였고 7월 21일 바람 불고 비 내려 법당 안에 큰 나무들이 뽑혔습니다. 초저녁에 시자 제엄(濟嚴) 스님이 병간호를 하면서 “스님께서 입적하시면 뒷일을 어떻게 할까요?” 여쭈었더니 스님께서는 “머리맡에 늙은 쥐가 남은 약을 훔쳐가고 담벽에는 등불이 여전히 비추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분 정도 지난 뒤에 시자 스님이 당나라 분양 선소 스님의 「분양송고(汾陽頌)」 “‘긴 세월 동안 수양하지 말고 곧바로 옛날 황제 앞으로 가야 한다.’ 구절에서 옛날 황제가 무슨 뜻입니까?” 여쭈었더니 스님은 “풀로 옷 지어 입고 나무 열매를 먹는 시절이란다.”라고 대답하시고 잠시 뒤에 앉아서 입적하셨습니다. 세상 나이는 63살이고 법수는 45년입니다. 4월에는 원나라시기 임제종 제21대 종사 만봉 시울(萬峰 時蔚, 1313-1381) 스님 조탑의 왼쪽에 모셨는데 그날 저녁에 탑 위에 무지개가 떴다고 합니다.
한월 스님께서 입적하신 뒤에 제자들이 어록 16권을 편집하고 출판하였습니다. 한월 스님의 법통을 계승한 14명 제자는 범이 홍치(梵伊弘致, ?-1628), 일물 홍성(一默弘成, 1574-1641), 문석 홍승(問石弘乘, 1585-1645), 재가 홍증(在可弘證, 大樹, 1588-1646), 정목 홍철(頂目弘徹, 1588-1648), 담여 홍원(澹予弘垣, 1581-1643), 부석 홍벽(剖石弘壁, 1598-1669), 어반 홍홍(於槃弘鴻, ?-1639), 구덕 홍례(具德弘禮, 1600-1667), 퇴옹 홍저(退翁弘儲, 繼起, 1605-1672), 예인 홍설(慧刄弘舌, ?-1649), 담길 홍인(潭吉弘忍, 1599-1638), 석기 홍성(碩機弘聖, ?-1658)과 속세 제자 유도정(劉道貞, 墨僊居士)가 있습니다. 현재는 재전 제자들이 중생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한월 스님은 체구가 크고 늠름하며 절강성 항주 남병산(南屏山) 정자사(淨慈寺)에 계실 때 찾아와서 배운 거사에는 문계상(聞啟祥, 字子將, 錢塘人), 엄조어(嚴調御), 풍종(馮悰), 장기연(張張岐然), 강호(江浩)가 있고 저(黃宗羲)는 이들과 글을 주고받았으며 모두 만나보았습니다. 이들이 『논어』와 『주역』을 토론하면서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였으며 저는 밤늦도록 들었습니다.
한월 스님이 입적하신 뒤 29년에 저는 영암에서 저공(儲公)을 뵈었을 때 스님의 『연보』와 『도행록』을 보여주셔서 읽었습니다. 저공은 저에게 “임제종 제30대 밀운 원오(密雲圓悟, 1566-1642) 스님의 탑명은 앞서 어떤 사람이 지었으나 당신이 발의하여 다시 전종백(錢一本? 錢謙益?)이 고쳤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월 스님의 탑명은 동종백이 지었으나 완전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하였던 것처럼 다시 발의하여 고쳐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굵은 줄거리를 모아 고쳐 지었습니다.
명문을 지었습니다.
옛날 송나라 원나라 시기에는 스님에게 시험을 보아 합격자에게 도첩을 주었습니다.
불교 종파가 높이 존중받았던 까닭은 이것 때문입니다.
명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시험을 폐지하였기에 가난한 배고픔을 면하려고 불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1백년 동안에 스님은 있으나 불교는 시들었습니다.
밀운 원오 스님이 나타나서 불교를 중흥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부녀자와 아이들은 스님의 설법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한월 법장 스님은 강소성 소주 삼봉산에서 깨우치셨고 임제종의 문제점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임제종의 원칙이 느슨하여 대낮에도 백성을 착취하는 늑대와 여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월 스님이 이런 폐해를 없애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임제종의 일부 스님들이 뭉쳐서 한월 스님을 비방하였습니다.
강소성 소주 등위산(鄧尉의 은거지)에는 임제종 밀운과 한월 두 스님이 다투었습니다.
태호에는 이빨 빠진 것처럼 임제종이 온전치 못하였습니다.
한월 스님은 오종(五宗)을 계승하겠다고 맹세하였고 피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못된 쥐들이 고양이를 마주치자 쥐들의 욕심이 줄었습니다.
한월 스님이 주장한 임제종의 강령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욕심 많은 쥐들은 법문을 세우지 못합니다.
저는 한월 스님이 지은 『오종원(五宗原)』을 보고 감탄합니다.
양명학은 만력 연간에 무너졌으나 동림당 사람들이 복구하였는데 강소성 무석(無錫) 사람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고헌성(顧憲成, 1550-1612, 諡端文), 고반룡(高攀龍, 1562-1626, 諡忠憲), 전씨(아마도 錢一本, 1539-1610) 세 분이 동림서원(東林書院, 1604-1625)을 창립하였습니다.
세 분은 훌륭한 유학자입니다.
한월 스님은 무석에서 동림당이 활동할 때 무석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한월 스님은 불교 임제종을 지키려고 하셨는데 마침 동림당이 활동하였으니 하늘의 뜻입니다.
어떤 산이 숭산보다 높겠습니까? 무석의 산이 높습니다.
누가 바다보다 깊겠습니까? 무석의 양계 계곡이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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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宗羲,「蘇州三峰漢月藏禪師塔銘」(乙巳)
『南雷文案』,卷6。
古今學有大小,蓋未有無師而成者也。然儒者之學,孟軻之死,不得其傳,程明道以千四百年得之於遺經。董仲舒、王通顧亦未聞何所授受。
釋氏之學,南嶽以下幾十幾世,青原以下幾十幾世,臨濟、雲門、溈仰、法眼、曹洞五宗,皆系經語緯。奔蜂而化藿蠋,越雞而伏鵠卵,以大道為私門。豪傑之士生於其間者,附不附皆不可。擎拳撐腳,獨往獨來於人世,則指為失父之零丁。不然,道既通而後求師,何關於學?為師者又不曰︰“弟子之學,於吾無與。”而必欲其舍吾所未及之學,若是乎師之為害於學甚大也。
萬曆以前,宗風衰息,雲門、溈仰、法眼皆絕。曹洞之存,密室傳帕,臨濟亦若存若沒,什百為偶,甲乙相授,類多墮窳之徒。紫柏、憨山別樹法幢,過而唾之,紫柏、憨山亦遂受未詳法嗣之抹殺,此不附之害也。其後胡喝亂捧,聲焰隆盛,鼓動海岳,開先從而厭之,既飲荊溪,而野祭無祀之鬼,開先亦遂為唐子逋人,此附而不附之害也。三峰禪師從而救之,宗旨雖明,箭瘢若粟。師弟之訟,至今信者半,不信者半,此附之之害也。
所謂宗旨者,臨濟建立料簡、賓主、玄要、照用、四喝等綱宗。雲門建立函蓋、截流、逐浪等綱宗,以竭棒喝之欺偽。曹洞、溈仰、法眼建立四禁、五位、六相、三昧等綱宗,以竭機語之欺偽。
師從寂音遺書悟之,廣陵散之絕久矣,師欲推明絕學,太倉慧壽、吳門北禪請師出世,師不正位,不登座,曰:“威音以後,不許無師儼然而踐其位,則未證得,謂證得者,將接跡於世矣。”已而登匡廬,泛沅湘,獅弦毒鼓,寥寂無聞。
密雲悟公以臨濟第十三(三十)世開法金粟,師徘徊而就之。
雲大喜,上堂告眾曰:“漢公悟處真實,出世先我,所以屈身來此者,為臨濟源流耳。老僧從來不易安第一座,今累漢公。”
師請來源。
雲曰:“臨濟出世,惟以棒喝接人,不得如何若何,只貴單刀直入。”
請言堂奧。
雲不應,良久曰:“宗旨太密,嗣續難乎其人,不若已之。”
師曰:“不然,黃龍有言,學者欺詐之弊,不以如來知見之慧密煆之,何由能盡?”
雲以“源流”付師。
師不受,曰:“三玄三要,究竟是何等法?法若相符,方敢祗受。”
時師已登舟,雨雪未行。
雲傳語曰:“吾家以拄杖、拂子標題種草,汝將謂別有實法口耳相傳耶?”
因問云︰“玄要且置如何是”一句。
師答以偈︰“雪寒江水冱”,此是第一句。團也團不圓,劈也劈不破,滾倒牛角尖,無舌舌頭大,深深深處絕古路,若不行,是門戶,若要行,子非父。問取和尚道一句。”
雲又問︰“汾陽道‘三玄三要事難分’,如何是難分處?”
師又偈︰“若落難分處,顢頇未足談。若還分得是,依舊隔千山,粘頭綴尾倒掀翻。大雪滿湖天。”
雲又問︰“‘得意忘言道易親’,如何是得意忘言處?”
師畫[圓內三點]相答之,解纜而行。
雲又遣人問[圓內三點]︰“此是圓相耶?三點耶?”
師答書曰:“法門建立之密,千古萬古不能撲破。宗旨未破,則臨濟猶生也。豈可以一時舉揚之不易,承接之無人,便欲越過此宗?覺范曰:‘此如衣冠,稱孔門弟子而毀『易、繫辭』,三尺童子皆笑之。’
雲謂賫書一默曰:‘我先師不曾說起,彼既知此,彼自行之。’
一默謝,行宗旨,受‘源流’以復師。
未幾,應北禪之請。
師又上書於雲曰:“藏得心於高峰,印法於寂音。和尚一棒血流,三番大滅,瓣香總炷一爐。”
雲答:“祇恐不是玉,是玉真太奇。”
當是時,雲雖有憾於師,心服其英偉辨博,非及門所及,姑且牢籠之。而及門者多惡其張皇,讒構間作。於是有「闢妄七書」,天下視其師弟子之間若水火焉。
今之議新會(陳獻章)者,謂其從聘君(吳與弼)無所得,獨坐十餘年,恍然覺如馬之有勒,其不宗聘君明甚。儒釋同例,則師之齟齬於師門,又何害耶?
師諱法藏,字漢月,號於密,晚改天山,無錫蘇氏子也。父蘭,母周氏。
少入鄉校,雨水暴至,失師所在,已而乘大龜出沒濤中,父老奇之。
年十五,從德慶院僧為童子。
三年歸家,行冠禮,而後落髮,曰︰“出家豈細事,可輕易為之耶?”
嘗自為懸記曰:“吾四十悟道,逾六十而死。”
既而讀「高峰語錄」,入手恍然如出己口,始破心參究。
受小戒於蓮池(紫柏眞可),受大戒於古心。
入海虞三峰,茇舍鹿場,脇不沾席,中夜為昏沈所苦,小師分香擊板,佛號徹天。每嘆曰:“吾嘗言四十悟道,今三十有九,徒勞若是,豈終負此語乎?”泣不能禁。
明年,同朗泉閉關,交拜之次,痰眩擲身,一睡五日不醒,適窗外植楦(楥),屈竹有聲。師聞若震雷,蹶起枕上,心空際斷。從前文字,但見紙墨,義理了不關懷。端坐終夜,如彈指頃,無思惟中,忽於青州布衫、打失鼻孔,即頌曰:“一口棺材三隻釘,聲聲斧子送平生,自從「薤露」悲歌斷,贏得朝朝墓柏青。”則萬曆壬子之二月初五日也。師猶不敢自足,深研玄要之旨。
又二年,梅花初謝,掩關危坐,不知疽之發背。一日,推窗見黃梅墮地,千門萬戶,即時劃然。取寂音『智證傳』讀之,不異室中摩頂受記。師道價日高,方外諸老寒灰、聞谷以徑山迎之,憨山亦以歸宗招之,俱謝不往。又十年而後嗣法於密雲。
天啟末,文文肅、姚文毅、周忠介皆得罪奄人,絕交避禍。師在北禪,相與鉗錘評唱,危言深論,不隱國是,直欲篆向鞭背,身出其間。其在安隱,龍象蹴踏,號為一時之盛。凡八坐道場,常熟三峰、長洲大慈、聖恩、吳江聖壽、杭州安隱、淨慈、無錫錦樹、嘉興真如。
崇禎乙亥四月朔,白椎辭眾。七月二十一日,風雨,法堂大木皆拔。初夜,侍者濟嚴侍疾,問︰“如何是和尚身後事?”師曰:“床頭老鼠偷殘藥,壁上孤燈照舊衣。”漏下二刻,僧問:“「汾陽頌」直出古皇前,如何是古皇?”師曰:“草衣木食。”頃之跏趺而逝。世壽六十三,僧臘四十五。後四月,窆其全身於萬峰祖塔之左,是夕白虹貫於塔所。
門人集其語錄十六捲行世。其得法弟子梵伊致、一默成、問石乘、在可證、頂目徹、澹子垣、剖石壁、於磐鴻、慧刃銛、潭吉忍、具德禮、繼起儲、碩機聖、劉道貞凡十四人,今再傳者亦皆為世津梁矣。
師儀觀甚偉,其在淨慈時,一時參請入室者聞子將(聞啓祥)、嚴印持(嚴調御)、馮嚴公(馮悰)、張秀初(張岐然)、江道暗(江浩),皆羲文字之交,逐隊見之。說『論語』、『周易』,鑿空別出新意,每聽至夜分。
師卒後廿九年,羲見儲公於靈岩,出師之『年譜』、『道行錄』讀之,謂羲曰:“天童師翁塔銘,前有作者,自子發之,改撰於錢宗伯。吾師之塔銘,董宗伯所撰亦未備,子可引前例為一通乎?”羲曰:“敢乎哉?昔柳子厚為「大鑒碑」,劉夢得繼之,遂書第二。無已,則有斯例在。”乃掇其大者言之。
銘曰:
在昔宋元,試經得度。法幢相望,系此之故。
有明罷科,所聚貧子。百年粥飯,香燈而止。
間生天童,中興象教。婦人孺子,禪悅喜笑。
師起三峰,乃獨優之。綱宗不立,白晝狐貍。
遂拔趙幟,立漢赤幟。趙人未盡,環壘而詈。
鄧尉偏衣,太湖金玦。五宗之哭(師有哭五宗詩),血淚無竭。
黠鼠逢貓,偷心不起。所曰綱宗,亦復如是。
維彼黠鼠,不生法門。今始讚歎,有『五宗原』。
聖學宗傳,亂於萬歷。東林救之,實維無錫。
端文、忠憲,錢氏啟新,巍巍三公,儒者大醇。
師生是鄉,亦生是時,砥柱釋氏,天心可知。
孰為嵩高?錫山高只,孰為海深?梁溪深只。
참고자료:
『莊子、庚桑楚』:“奔蜂不能化藿蠋,越雞不能伏鵠卵。”
宋、陳亮,「甲辰答朱元晦書」:“亮非假人以自高者也。擎拳撐腳,獨往獨來於人世間,亦自傷其孤零而已。”
廣陵散:
『晉書』:此曲乃嵇康遊玩洛西時,爲一古人所贈。『太平廣記』:有一則神鬼傳奇,說的是嵇康好琴,有一次,嵇康夜宿月華亭,夜不能寢,起坐撫琴,琴聲優雅,打動一幽靈,那幽靈遂傳「廣陵散」於嵇康,更與嵇康約定:此曲不得教人。263年,嵇康爲司馬昭所害。臨死前,嵇康俱不傷感,唯歎惋:“袁孝尼嘗請學此散,吾靳固不與,「廣陵散」於今絕矣!”
獅弦毒鼓:
如塗毒鼓:值佛性常住之說,能壞滅生煩惱業障。《涅槃經》卷九雲:「譬如有人以雜毒藥用藥大鼓,於大中 擊之發聲,雖無心欲聞,聞之皆死,唯除一人不橫死者,是大乘典。
宋、善昭 禪師:
三玄三要事難分,得意忘言道易親。
一句明明該萬象,重陽九日菊花新。
宋、覺範 禪師:
宋、瑞州、清涼寺、寶覺禪師,名德洪,字覺範,初名慧洪。就真淨克文禪師而得悟。著『禪林僧寶傳』三十卷及『林間錄』。高宗建炎二年(1128)五月入寂,壽五十八(1071-1128)。賜寶覺圓明之號。見『稽古略』四,『佛祖通載』二十九。
漢月法藏,『三峰藏和尚語錄』,卷第十四
吳虎丘山、雲巖寺、嗣法門人、弘儲編
漢月法藏,「復金粟老和尚(密雲圓悟)」︰
竊惟法門事大,任荷自心者,苟非湥得祖宗的骨之髓,那可承虛接響,喪我兒孫?若於授受之際,稍涉鹵莽,如指南倒置,豈獨千里萬里之謬而已?此藏所以褰裳濡足於法門有臨岐至再之請耳至若中外洶洶之議何足知此血心哉今去臨濟五百餘年之遠而其堂奧之旨猶未狼藉藏嘗走問諸方老宿無有能應其請者,蓋以法門建立之密,千古萬古不能撲破耳。藏謂宗旨未破,則臨濟猶生也,那可一時以舉揚之不易,承接之無人,便欲越過此宗,別行坦路耶?覺範曰︰此如衣冠,稱孔門弟子,而毀『易、繫辭』,三尺童子皆笑之。其言痛切,可為寒心,此又藏之所不敢不告者也。惟望和尚洞此至愚之誠,鑒其玄要之請,俾後世興起之人,確有本據,勿使狐狼野豻溷同獅吼,則佛祖幸甚,法門幸甚。
漢月法藏,「上金粟老和尚(密雲圓悟)」︰
無上正法自威音一圈七佛交截四七二三雙頭獨結而馬駒腳下三頓棒頭橫開豎合賓主之機愈玄愈實所以有雪巖之英特高峰之出群代代智過於師霆震火烈至今綿遠振起為萬世則師承法印之力所持也法藏夙緣何幸得獲上傳憶廿九歲揭高峰語錄宛若自語因發大心參禪言我若大徹之後誓紹此宗萬苦千辛至四十歲於折竹邊捉得落地枕子那時心肯早已承嗣雙髻了也及參濟上玄要賓主湥見祖道不可草草愈入愈湥既透濟宗旁參四家兼搜河洛因見寂音尊者著臨濟宗旨遂肯心此老願宏其法自謂得心於高峰印法於寂音無復疑矣乃復發願弘兩枝法脈合起臨濟正宗凡遇埽宗旨者力為諍之不獨負荷滹沱將使雲門溈仰曹洞四家遙承近續令五宗再燦願世世生生為接續斷脈之種所以醞釀有年搜披不滿提持之暇屈指諸家知和尚乃高峰嫡骨正傳敢不一探堂奧向於金粟山前叨承委付然尚苦攻力辯往復數四種種具諸語錄流布諸方茲因吳門北禪之役舊參新學一時來集咸勸乘時拈出不昧先宗藏不獲辭謹以生平願力披肝膽於侍者之前倘和尚一棒血流三翻火滅藏敬將高峰一脈與寂音臨濟佛祖威音併老和尚向北禪堂前連瓣香炷作一爐燒卻免見貽害諸方用報法乳之恩不揣下愚敬陳陋劣伏惟大慈照亮不勝企仰之至。
竊惟法門事大,任荷自心者,苟非深得祖宗的骨之髓,那可承虛接響,喪我兒孫?中外洶洶之議,何足知此血心哉?蓋以法門建立之密,千古萬古不能撲破。藏謂宗旨未破則臨濟猶生也,那可以一時舉揚之不易,承接之無人,便欲越過此宗,別行坦路耶?覺範曰:此如衣冠稱孔門弟子,而毀易繫辭,三尺童子皆笑之。其言痛切可為寒心。唯望和尚洞此至愚之誠,鑒其玄要之請,俾後世興起之人,確有本份之據。勿使狐狼野犴溷同獅吼,則佛祖幸甚!法門幸甚!子孫幸甚!
厲鶚,『東城雜記』,上卷 ,「聞子將、嚴印持結社」︰
杭州,明季先有讀書社,創自聞孝廉子將啟祥(聞啟祥)、張文學天生元(張元)、馮公子千秋延年、暨嚴印持調御、忍公武順無勅,勅後乃合於吳中復社。子將中萬曆壬子鄉試,天啟壬戌與嘉定李長蘅同上公車,聞警報踵至,未及國門而返,著有自娯齋集。千秋為具區祭酒之孫,祭酒秀水人,娶於武林沈氏,遂家焉。愛西湖之勝,築快雪堂湖上,千秋因入籍錢唐,中崇禎己卯副榜,貢入太學,歸隠秋月菴,有煮鶴稾、秋月菴稾三。嚴自餘杭家錢唐,高隠不出,兄弟有作朋集。天生工書法,遺文多散逸,東里有報國院,在慶春門城隅,舊為香林廨院,天啟初重建。仁和錢宫贊曽作碑記,其辭云︰余與聞子將、嚴印持諸公結社,其中即讀書社舊地也,復社名流數丁陽九標榜太盛,幾罹黨禍,而數君子蟬蛻自全,龍潛不見,多以山水禪喜為託,比之申屠蟠、郭林宗有足多者焉,碑有不野而望超不山而聞寂二語,狀境殊勝。
黃宗羲,『南雷文定』,卷二,「鄭玄子先生述」:
君諱鉉,字玄子,鄭氏浙之錢塘人,孔肩先生之子也。崇禎間,武林有讀書社,以文章風節相期許,如張秀初(岐然)之力學,江道闇(浩)之潔淨,虞大赤(宗玫)、仲皜(宗瑤)之孝友,馮儼公(悰)之深沉,鄭玄子之卓犖,而前此小築社之聞子將(啟祥)、嚴印持(調御),亦合併其間。是時四方,社事最盛,然其人物固未之或先也。癸酉(1633)秋冬,余至杭,沈崑銅、沈眉生至自江上,皆寓湖頭,社中諸子皆來相就。每日薄暮共集湖舫,隨所自得,步入深林,久而不返,則相與大叫尋求以為嗢噱。月下汎小舟,偶豎一義論一事,各持意見不相下,鬨聲沸水,蕩舟霑服,則又鬨然而笑。三峰(漢月法藏,1573-1635)開堂淨慈,一默(一默弘成,1574-1641)為首座,君機鋒相觸,奪其竹篦欲打,擬議不果,余曰:“鴨子早已過新羅也。”君為之一笑。明年(1634),余過湖上,崑銅又在,江右劉進卿、秋浦吳次尾亦至。夕陽在山,余與崑銅尾舫觀劇,君過余不得,則聽管絃所至,往往得之,相視莞爾。
黃宗羲,『南雷文定』,「附錄」,「錢謙益이 黃宗羲에게 보낸 서신」:
湖上接手教,為之盱衡擊節,嘆賞稱快,不謂高明意見與鄙人符合如此!自國家多事以來,每謂三峰之禪、西人之教、楚人之詩,是世間大妖孽。三妖不除,斯世必有陸沈魚爛之禍,今不幸言而中矣。邇來,則開堂和尚,到處充塞,竹篦拄杖,假借縉紳之寵靈,以招搖簧鼓。士大夫掛名參禪者,無不入其牢籠。此時熱喝痛罵,斥為魔民邪師,不少假借者,吳越間只老夫一人耳。何幸而又得一太冲(黃宗羲, 字太冲),德必有鄰,法無孤起,寥寥宇宙,從此不至形單影隻,自傷孤別良可喜也。
秀初(張岐然,字秀初)近來相語:“一沙彌扶杖,數比邱侍行,裝成一善知識模樣,正眼熟視之,幾欲發狂大笑。略交一二語,渠見我滿口鄙穢,掩耳而去,去而各覆思之,不禁其啞然失笑也。”第不可因此輩可笑可鄙,遂哆口謗佛謗僧,譬如一輩假道學大頭巾,豈可歸罪於孔夫子乎?斯世中,豈無一二高僧,精通佛說,禪律交修者?彼不欲聚徒領眾,蕭然於空山古寺之中,人亦無從物色耳。
陽明、龍溪(王畿)得禪門之精,改頭換面,自出手眼。學佛而知儒,學儒而不知佛,徐六擔板,只見一邊,總使成就只是一家貨耳。太沖於此處想已,大有杷柄,放開兩眼光明,爍破三千大千世界,勿但拾儒門餘唾,寄身在宋元諸儒儲胥虎落之內。
老夫雖衰遲失學,尚能執鞭弭棒,槃盂以從事邾莒之後也。注『楞嚴經』,正要宣明此一部經,殺盡天下妖魔和尚,若待殺盡和尚,然後注經。孔夫子近不能殺季孫,遠不能殺陳恆,何以成『春秋』,而亂臣賊子懼乎?放筆及此,料太沖必以吾為知言也。
近有人談及杭城二僧,一是活佛,一是妖僧,戲作判斷一篇,大為叢林傳誦,惜已失其稿,無從博一噴飯耳。
『楞嚴』“流變三疊”,雖畫圖見示,覽之尚自茫然。乞將『』長水注文詳細疏解,如何是一橫一豎,如何是進動算位。圖形指事,確實訓詁,使鈍魯人一見了了,方可了此段公案。不妨以名世大儒暫現,村夫子老學究身,掀開『兎園冊』子教寫,上大人讀“都都平丈我”,方是老夫,真切領教處也。覿面未能,郵筒可達,勿憚勞勿吝教,望之望之!
敬此九頓以請仁規便郵信筆滿紙,即日返櫂。敬俟德音清和,廿日燈下,通家老生,錢謙益頓首奉啟於昭慶僧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