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낱갑이 열두 갑 치마 밑에 감추어서 정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서 XXX이 다 탓네. 아아! 성냥공장 아가씨는 XXX XXX
80년대 이전까지 군생활을 한 사람 치고 위의 잡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른바 쪽노래이다, 쪽노래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쪽 팔리는 노래이다. 대중 앞에서 딱 한 번만 불러도 쪽이란 쪽은 다 팔려 노래 방가 이후로는 인격 따위는 주장하지 않는 것이 합당한 그런 류의 막가는 노래이다. 술이 한 잔 취해 집단으로 고래 고래 부르고는 현장을 떠나기만 하면 내가 언제 그런 노래를 불렀냐며 시치미를 뚝 떼고는 다시 인품을 잡는 그런 성격의 노래를 이름하여 쪽노래라고 하는 것이다.
쪽노래의 특징은 몹시도 통속적이고 외설적이고 저속하며 직관적이다. 또한 시니컬하고 자조적이며 그 행간에는 풍자와 해학과 뒤틀림과 비꼼의 묘수가 잔뜩 도사렸다. 노래에 등장하는 대상은 강약자를 불문한 전 계층이다. 억압된 상태에서 발산하는 극단적인 카타르시스도 엿보이며 작사자 미상에다 거의 천재적인 가사작법의 경지까지도 흘낏 엿보이는 짙은 대중성을 확보한 노래이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미니 세 명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 미니 파란 미니 찢어진 미니 좁다란 골목길을 미니 세 명이 왔다껌을 딱딱 씹고 걸어갑니다.
위의 노래가사는 동요 우산을 개사한 쪽노래 가사이다. 곡조를 붙여 가만히 불러 보시라. 시니컬함과 풍자와 해학과 절묘한 전개 그리고 꿈에도 안고 싶은 젊은 여성에 대한 다소 공격적인 메시지까지 고루 갖춘 쪽노래 중에서도 수작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위의 노래는 허현의 젊은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자 마자 조교가 가르쳐 주었는데 단 한 번만 듣고 그 자리에서 가사를 다외어 버렸다.
그만큼 대중친화적인 요소를 갖춘 노래이기 때문에 즉시 기억에 저장되었다고 본다. 바쁜 세상에 굳이 왜 저 따위 노래를 등장시켜 글을 길게 만들까? 그것은 독자 여러분께 쪽노래가 지니는 본질을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간단하게 단 일합으로 끝내고 본론으로 진행하고자 함이다. 잘 인지가 되었을 줄 알고 본론으로 넘어가겠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위의 인천의 성냥공장 노래가사를 해왈하자면 인천에 소재한 성냥공장에 다니는 아가씨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성냥 한 갑을 절취하여 치마 밑에 감추어서 퇴근하다가 그만 그 성냥이 발화하여 치마밑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는 내용이다. 화재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화재가 발생하여 다 타버려 아주 어찌 되었다는 뜻이다.
기 노래는 병영 뿐만 아니라 5-60년대를 거쳐 70년대까지 학교는 물론 주먹나리들이 웅거하는 뒷골목 세계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득한 노래이다. 천하의 남성 중에서 꼴샌님을 빼고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일세를 풍미한 작품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성 독자 여러분께서 이 노래를 모르는 분이 계시거든 필히 부군에게 넌지시 물어보시라. 백이면 백 아주 확실하게 곡까지 첨부하여 의기양양하여 매우 진실되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제 기 노래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에 돌입하기로 하자.
1. 왜 노래의 무대가 인천인가? 2. 왜 성냥공장에 다니는 아가씨가 주인공인가? 3. 비싼 물건도 아닌 성냥 한 갑을 훔쳐 나오다가 왜 그 지경을 당했을까. 성냥에 그렇게까지 목이 말라야 할 이유가 있는가? 4. 성냥이 든 성냥갑은 불을 붙이기 전에는 화재에 대해 그런대로 안정적이다. 그런데 왜 치마 밑에서 불이 났을까. 5. 하루에 한 갑을 훔치면 한 달만 지나도 30갑이다. 1년이면 365갑이다. 그런데 왜 12갑인가?
며칠간 여러 자료를 뒤지니 결론은 쉽게 나왔다.
1의 해왈.
우리나라에 성냥이 보급된 이력을 말하자면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이가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에까지 수행하여 일을 마치고 귀국하다가 가지고 온 것이 시초이다.
이후 서민들에게까지 보급하는데는 한일합방 이후인 1910년대에 왜인들이 인천에 제일 먼저 상업적인 생산회사 조선성냥(朝鮮燐寸)을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부산 마산 군산 수원 영등포에까지 공장이 생기게 되고 대중에게도 판매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성냥을 생산한 인천이 무대가 된 것으로 본다.
2의 해왈.
일제강점기 이후 90년대까지 싼 임금으로 그야말로 묵묵히 나라경제에 이바지한 노동인력 중 여성인력의 노고와 희생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그들의 노동력은 그간 방직공장 신발공장 봉제공장 등 저임금을 기초로 한 경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체에 주로 투입되었다. 그런데도 이런 대중성을 확보한 공장들이 아니고 성냥공장이다. 왜인가. 그것은 그 많은 공장 중에서 성냥공장이 이땅에서 제일 먼저 생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3의 해왈
한국의 성냥시장을 독점한 왜인들은 그것이 생필품 중에서도 생필품임은 자국에 성냥이 대량으로 보급될 때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이땅에 성냥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독점하고자 총독부에서 한국인에게는 일체 성냥공장 설립을 허가하지 않았다. 또한 성냥제조기술을 배우지도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비싼 값으로 판매하였다.
일제강점기 시 성냥 한 갑은 쌀 한 되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성냥은 생활필수품이다. 아무리 거액이라도 사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 비싸다 보니 일제강점기 한국의 시골에서는 성냥 한 갑을 사서 1년을 넘게 사용하였다. 즉 최초의 불씨는 성냥으로 지피고 그 다음은 불씨를 화로나 아궁이에 묻어 필요할 때는 마른 잎이나 짚 따위에 다시 지펴 사용하였다. 당시 성냥은 서민들의 염원이자 애환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인이 최초로 성냥공장을 설립한 것은 인천의 대한성냥이 시초였다. 이때부터 성냥의 가격은 많이 내려갔으나 그래도 성냥은 귀한 물건이었다. 성냥이 본격적으로 대중화한 것은 자동화시설이 등장한 70년대 이후이다. 60년대만 하더라도 보리고개에 짓눌린 민초의 삶은 간고했다. 대부분의 생필품을 자급자족하고 극단적으로 절약하던 당시 도저히 자급자족이 안되는 성냥은 그래도 돈을 주고 사야하는 생필품이었다.
저임금 근로자인 아가씨는 성냥 한 갑이라도 모아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드리고 싶었을 것이다.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절약에 절약을 거듭하여 단 한 푼이라도 모아야 한다. 이것만 하더라도 성냥에 목을 매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4의 해왈
서구에서 제일 먼저 생산된 성냥은 마찰성냥(속칭 딱성냥 : 딱딱한 면에 성냥을 확 그으면 딱 소리와 함께 발화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마찰성냥은 성냥의 끝에 발화성 재료를 붙인 것을 뜻한다. 황이 아닌 딱딱한 면이면 면을 가리지 않고 발화가 되는 성냥인 바 황린성냥 적린성냥 황하인성냥이 이 장르에 해당된다.
마찰성냥은 황린을 발화연소제로 사용한 것으로써 독성과 자연발화의 위험이 있으므로 일찌기 국제적으로 제조가 금지되었다. 19세기가 배경인 서부영화에서 악당이라면 결단코 물리치시는 우리들의 클린트이스트우드 무법자께서 등장하신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장화 구두굽에 이 마찰성냥을 확 그어 발화시켜 시거에 불을 붙인다. 또 그리고는 조용히 씩 웃으며 한 똥폼 잡는 장면을 기억해 보시라. 그것이 마찰성냥이다.
해방 이후까지 이 마찰성냥은 더러 생산되었다. 원래 젊은 아가씨들은 기계공학 내지 화학적 소양에 대해서는 다소 무지한 것이 특징이다. 즉 마찰성냥인지도 모르고 넌지시 한 갑을 치마 밑에 감추어서 나오다가 인정도 없는 마찰성냥께서 멋대로 발화해 버린 것이다. 4의 해왈은 필자의 주관이 상당히 개입되었다. 따라서 객관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말을 만들자니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합의 여부는 독자 여러분께서 판정하시면 된다.
5의 해왈
가정용 성냥 큰 통은 모습 자체만 해도 중후장대하여 치마밑에 감출 수가 없다. 그래서 휴대용 작은 갑을 감추어서 나왔다고 보는데 이 작은 갑 365개를 큰 갑에 나누어서 담으면 열두 갑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래서 하루에 한 갑 내지 두 갑 정도 지니고 나왔다고 보는데 이것이 1년치가 되니 수량은 365개요. 갑으로 환산하면 열두 갑이 된 것이다. 이 사항도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이다. 365개이든 12갑이든 수량이 제법되는 것은 확실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결어
6-70년대의 군바리는 사람이 아닌 군바리였다. 필자도 70년대 초반에 육군군바리로 34개월을 쌔가 빠지도록 빡빡 기고 제대했다. 보리밥에 말짱 도루묵국 하나. 운이 좋으면 반찬 한 두 가지인 못먹을 짭밥 2,800여 그릇을 울며 겨자 먹기로 상식하다가 사회로 방출되었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나 6-70년대의 군바리나 공히 불쌍한 동포인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불쌍한 군바리가 더 불쌍한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를 희롱한다?
정녕 아니다. 외설이기에는 부끄럽고 카타르시스이기에는 참혹하다. 이것은 못살았던 한 시대에 대한 우리들의 파라독스이며 따뜻히 감싸야 할 우리들의 힘든 자화상이었다. 아직도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인가? 이제 이 쪽노래는 병영 안에서도 거의 소멸된 것으로 안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필자는 어떤 반성의 지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옛날 군복무 당시 술이 한 잔 거나하게 들어가면 세상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고래고래 목청껏 이 가공할 노래를 연주했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세월이 흘렀다지만 기억 저편에 이 멜로디는 부끄럽고도 깊게 착색되어 있다.
나는 그 옛날 가장 사병틱한 군졸이었으며 타락했던 군졸이기도 했다. 군복무시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이 쌍욕이었으며 그 모든 제행마다 캐세라세라였다. 외출외박시 서울의 시내버스를 타면 차비를 준 기억은 아예 없고 술집에서도 안주를 시켜 본 일이 없다. 다 먹지 않고 남긴 남의 안주를 무전취식했을 뿐이다. 군대시스템에 결코 협조하지도 않았고 요령을 피웠으며 어떤 업무라도 사고 안날 만큼만 성의없이 해치웠다.
군대는 요령과 형식과 눈가림과 구타와 비리와 그 모든 악덕보다 더한 어설프고도 강요된 유치한 애국심 따위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입대후 그 썩어빠진 군대문화를 접하고는 결단코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제대말년까지 이하동문으로 살았다. 덕분에 해당 군졸은 반 고문관이 되어 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얻어터지고 깨어지고 골병이 든 다음 겨우 제대를 하였다. 대단히 죄송스러우나 인천의 성냥공장은 그 곤고했던 생활을 잠시마나 위무하는 카타르시스였다. 그렇고 말고. 암 그렇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