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30권 / 신우 1(辛禑一) / 정사신우 3년(1377), 대명 홍무 10년
○ 봄 정월에 왜적이 회원창(會原倉)의 품미(品米)를 약탈하였다. 이때에 군량이 부족하여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직품에 따라 차등 있게 쌀을 내게 하고, 그것을 '품미(品米)'라고 하였다.
○ 지용기(池湧奇)를 양광도의 부원수로 삼았다.
池奫門客金允升等七八人
○ 익명서를 이인임의 문에 붙이기를, “지윤의 문객 김윤승 등 7ㆍ8명이 문하사인 정목(鄭穆)을 사주해서 인임을 탄핵하여 쫓아 버리고 지윤을 시중으로 삼으려 하는데, 일이 절박하니 빨리 도모하라." 하였고, 그 끝에 또 말하기를, “내 관직은 판사(判事)이고, 내 성(姓)은 이(李)이고, 내 이름은 11획이라." 하였다. 인임이 숨기고 발설하지 않았는데, 대호군(大護軍) 구성로(具成老)가 또 그런 글을 얻어서 인임에게 보였다. 인임이 비밀히 지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공과 내가 교분이 대단히 두텁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을 이간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니 지윤이 말하기를, “이것은 장령(掌令) 김상(金賞)의 글씨다." 하였다. 김상은 바로 인임의 족질(族姪)이다. 이때에 판전교시사 이열(李悅), 좌상시 화지원(華之元), 우부대언 김승득(金承得)이 지신사(知申事) 김윤승(金允升)과 함께 붕당을 만들어서, 지윤에게 아첨하고 섬기며 영전을 바라면서 '지윤 문하의 사걸(四傑)'이라 자칭하였다. 自謂池門四傑
인임이 지윤의 당을 제거하려 하나 틈을 얻지 못하였는데, 지원과 승득이 이열의 집에 모여 말하기를, “원 나라 사신을 후대하고, 홍무(洪武) 연호를 쓰지 않고 선광 7년(宣光七年)을 시행하는 것이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였다. 인임이 염탐하여 알고 드디어 3명을 순위부(巡衛府)에 가두었다. 지윤이 이때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 있었다. 그러므로 인임이, 지원 등이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였다 하여 심하게 국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근일에 이열의 집에 모여서 무슨 문서(文書)를 만들어서 세월을 보냈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천하가 어지러워 전쟁이 종식되지 않아 선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남쪽을 섬겼는데, 이제 선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갑자기 선광 연호를 쓰는 것이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여 다만 의논하였을 뿐이요, 문서로써 이 말을 낸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한략(韓略)도 지윤의 당이었기에 함께 옥에 가두었다가, 드디어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다. 이열ㆍ지원ㆍ한략ㆍ승득ㆍ김상은 귀양보냈지만, 윤승은 그대로 둔 것은 인임이 지윤의 위태롭고 의심하는 마음을 위로하려 함이요, 또 사변이 급히 발발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었다. 지윤이 몹시 두려워하여 인임에게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일 공을 해치려 한다면 하늘이 반드시 벨 것이라." 하였다. 그 아들 익겸(益謙)을 시켜 최영에게 구제해 주기를 청하다가 되지 못하니, 군사를 엄하게 단속하여 스스로 호위하였다.
○ 3월에 이인임이 대간을 사주하여, 김윤승이 당파를 만들고 주색에 빠져 있다고 탄핵하였다. 윤승이 밤에 지윤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지원ㆍ승득ㆍ이열이 이미 모두 귀양갔으니 공의 우익(羽翼)이 제거된 것인데, 이제 또 저까지 탄핵하니 화(禍)가 장차 공에게 미칠 것입니다. 일찍 도모하소서." 하였다. 지윤이 말하기를, “내일에 내가 왕에게 청하여 그대로 하여금 나와서 일을 보도록 명령하겠다." 하고, 드디어 우(禑)에게 아뢰기를, “경복흥과 이인임은 역신 홍윤(洪倫)의 일가인데, 전하께서 그 족속을 베어 멸하는 것을 보고 큰일을 도모하고자 하니, 급히 군사를 출동시켜 잡게 하소서." 하였다. 약속을 정하고 나서, 또 그 아들 익겸을 시켜 목인길에게 용맹한 군사를 청하여 다음날 아침에 궁문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인길이 말하기를, “없애려는 것은 인임뿐인가." 하니 익겸이 경복흥ㆍ최영ㆍ이희필(李希泌)ㆍ이임(李琳)ㆍ도길부(都吉敷) 등을 열거하였다. 인길이 달려가 인임 등에게 고하여 다른 데 피하여 자면서 사태를 관망하도록 하였다. 익겸이 몰래 교주도(交州道) 군사 20여 명을 이끌고 비밀히 인임의 동정을 엿보고 있었다.
○ 이튿날 지윤이 도당에 이르러 복흥ㆍ인임에게 말하기를, “김윤승이 지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대간의 탄핵을 당하였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으로 대신한다면 과거를 보이는 것이 지체되어 반드시 농사 시기와 겹칠 터이니, 김윤승으로 하여금 일을 보게 하자." 하였다. 복흥이, 지윤이 나간 틈을 타서 최영과 의논해서 지윤을 제거하고자 하여, 거짓 꾸며서 말하기를, “공이 스스로 대궐에 가서 아뢰는 것이 좋다." 하였다. 지윤이 드디어 나가서 대궐에 이르러 왕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서 대관(臺官)을 불러 윤승으로 하여금 일을 보도록 재촉하였다. 마침 지평(持平) 이길조(李吉祚) 등이 상소하기를, “지윤이 널리 붕당을 결성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행하며 총재(冢宰)를 죽이려고 꾀하는데, 윤승은 지윤의 목구멍과 혀 노릇을 하니, 반드시 그 모의를 알 것입니다. 옥에 가두어 국문하소서." 하였다. 상소문을 장차 올리려 하는데, 복흥ㆍ인임ㆍ최영ㆍ희필ㆍ길부ㆍ박임종(朴林宗)ㆍ조민수ㆍ임견미ㆍ인길 등이 궐내로 들어왔다. 지윤이 그 도당 빈천익(賓天翊) 등 20여 명을 시켜서 옷 속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궐하에 모여 인임 등이 나오는 것을 엿보아 치려 하였다. 복흥ㆍ인임 등이 인길을 시켜 우(禑)에게 아뢰기를, “노신(老臣)이 변란이 있음을 듣고 아뢰지 않으면, 신도 역시 죄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지윤이 익겸을 시켜 신에게 군사를 청하니,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윤이 곧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그런 일이 있습니다. 복흥ㆍ인임ㆍ임은 홍윤의 처족이고, 희필은 홍윤의 처부(妻夫)인데, 신이 역당을 베고자 하는 것을 꺼려서 장차 신을 죽이려 하기 때문에, 군사를 청하여 방비한 것입니다." 하고는, 최영이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뜨고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와 빼앗을 것같이 하였다. 최영이 칼집을 잡고 몸으로 우(禑)를 가리며 지윤에게 말하기를, “신하로서 왕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면 그에 해당한 나라에서 정한 형벌이 있다. 또 네가 두 시중만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지윤이 말하기를, “어찌 시중뿐이랴." 하며, 자리에 있는 여러 재상을 열거하며 항변하기를 마지않았다. 우가 지윤에게 나가기를 재촉하니, 지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째서 신만 먼저 물러가라 하십니까." 하며, 옷자락을 떨치고 달려나와서 문에 이르러 말에 오르려 하니, 임견미가 붙잡았다. 지윤이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지윤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지윤이 견미에게 말하기를, “그대와는 평소의 교분이 있으니 빨리 나를 죽여라. 내가 죽은 뒤에는 그대가 또한 내 뒤를 따라 죽을 것이다." 하였다.
이전에 윤승이 비밀리에 지윤에게 말하기를, “공이 총재(冢宰)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지윤이 말하기를, “인임이 있다. 더군다나 내 운명이 무오년이 되어야 운수가 길하다." 하였다. 윤승이 말하기를, “운수가 있다면 어찌 무오년을 기다릴 필요가 있소. 다만 나의 계교나 들어 보라." 하고, 드디어 변란을 꾀하여 말하기를, “황상(黃裳)은 어름어름하는 사람이니 좌시중이 되어야 하고, 공은 수시중(守侍中)이 되고, 익겸은 응양군(鷹揚軍) 상호군이 되고, 지원은 대사헌이 되고 저 윤승은 정당문학이 되고, 승득은 첨서밀직(簽書密直)이 적당하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지윤이 말하기를, “윤승의 계교를 듣다가 이 모양이 된 것을 후회한다." 하였다. 지윤ㆍ익겸ㆍ윤승이 드디어 참형을 당하였다. 지윤은 군졸 출신으로 여러 번 종군하여 공이 있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또 우(禑)의 유모를 간통하여, 그것을 연줄로 왕에게 총애가 있게 되었으며 마음대로 발호하고 아부하는 자는 쓰고 저와 다른 자는 배척하며, 그 심복들을 대간에 배치하여 크게 권력을 부렸다. 첩이 많아서 거의 30명이나 되었는데, 오직 부자(富者)만 취하고 얼굴의 예쁜 것은 따지지 않았다. 따로 문호(門戶)를 세운 첩이 12명이나 되었다.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간사하고 속이어, 벼슬을 팔고 옥사를 팔아서 남의 노비를 얻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또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요수(遙授)하고, 대신으로 녹을 받았다. 참형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또 그 도당 빈천익 등 20여 명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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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節要 卷之三十 / 辛禑[一] / [丁巳 辛禑三年○大明 洪武十年] 정사신우 3년(1377), 대명 홍무 10년
○斬金承得,華之元,李悅于淸州,傳首于京,初,遣體覆崔仁哲鞫之,之元,首服曰,奫及允升,謀殺大臣,我實與聞,悅曰,前日匿名書,實吾所爲,吾名乃十一畫也,請原之,仁哲,問之元曰,悅亦與聞否,之元曰,有之,悅不服,及鞫訊甚慘,遂服,承得,被榜掠,垂死猶不服,然,之元,悅,證驗甚明,乃服,李仁任,謂慶復興,崔瑩曰,旣誅其魁,可釋此輩,復杖流何如,況罪不可以再加乎,瑩曰,前日杖流,以其議朝政也,今日之誅,以其害大臣也,皆罪之重者,豈宜釋之,仁任曰,何以處悅,若無悅書,吾儕其得有今日乎,瑩曰,果悅所爲,當奫在時,可以言矣,見竄而後,猶不言,是誣我也,宜幷誅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