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상인동 낙동서원(덕동서원)에는 의병장 5분의 위폐가 모셔져 있습니다.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880, 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로7길 32 (상인동).
진덕문
1708년(숙종 34)에 단양우씨의 현조인 우현보(禹玄寶)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우배선(禹拜善)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입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65년에 후손들이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낙동서원
우현보와 우배선을 향사하기 위해 덕동서원(德東書院)이라는 명칭으로 1708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건물도 없어졌으나 1965년 단양우씨 판서공파 17대손인 우종식, 우종묵 형제가
사비로 다시 건립하여 낙동서원(洛東書院)으로 명칭을 변경한 후 향내 유림에 헌납하였습니다.
현재는 우현보와 우배선 외에 우탁(禹倬), 신현(申賢), 우길생(禹吉生)을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그 중 우탁은 본래 예안의 역동서원에서 향사하였으나 역동서원이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자
낙동서원에서 다시 모신 것입니다.
낙동서원 안에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나무가 있는데요.
바로 이 고목 향나무 입니다.
정교당
3칸의 강당에는 ‘낙동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동쪽 재실은 ‘처인헌(處仁軒)’, 서쪽 재실은 ‘지경재(持敬齋)’라 당호를 붙이고 편액을 걸었습니다.
전면으로 돌출된 부분은 2칸의 누마루이고 나머지 2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강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재실을 배치한 조선시대 일반 서원의 강학 공간 배치와 달리,
낙동서원은 ‘ㄱ’자형의 건물 안에 강당과 두 개의 재실을 배치한 것이 특징입니다.
백승각
조선 후기 문중서원의 현대적 변천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입니다.
특히 1967년에 낙동서원의 건립을 기념하기 위해 간행한 『낙동서원건립시집』은
단양우씨 후손들의 숭조의식을 잘 보여준답니다.
통정문
낙동서원은 신위를 모신곳인데 곡우절(양력 4월 21일)날 5분을 향사합니다.
이때는 대구 경북 유림단체 사람들 100여분이 모여 제를 올리고
역사문화재 관련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서 방문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대부분 관리를 위해 출입할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요청에 의해서 출입문을 열고 입장 할 수 있다고 하니,
관람을 위해서는 미리 연락을 하고 개인보다는 단체로 관람하는 것이
서원들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될것입니다.
숙청문
낙동서원 (洛東書院)은 본래 이 인근에는 우배선(禹拜善)을 제향하기 위하여
1708년(숙종34)에 건립되었던 덕동서원이 있었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건물도 없어졌습니다.
현재 낙동서원은 최근 1965년 단양우씨 판서공과 종인의 협조와 17대손인 종식, 종묵 형제가
상인동 885번지에 사비로 건립하여 향내 유림에 헌납한 것입니다.
이 서원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던
우배선과 우탁(寓倬), 신현(申賢), 우길생(寓吉生), 우현보(寓玄寶) 5분을 모시고
향사를 매년 음력 3월에 봉행하고 있답니다.
계현사
서원안의 사당인 계현사(啓賢祠) 입니다.
계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맞배지붕이며,
이익공 형식의 건물로 매 칸마다 사분합문의 문을 달고 단청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정교당은 정면 8칸, 측면 2칸의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어
강당과 더불어 동서재의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답니다.
겹벚나무(겹왕벚나무)
대구 낙동서원 정문앞에는 4월15일경에 분홍색의 겹왕벚꽃이 만개합니다.
연못 뚝에는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평소에는 철재 펜스가 설치되어 출입을 통제하는데,
겹왕벗꽃이 만개할때 일요일 날은 1년에 딱 한번 시민에게 개방됩니다.
※겹왕벚꽃 사진 2장은 4월15일 찍었습니다.
연못
겹왕벚나무길 옆의 작은 연못에는 지금 노란 붓꽃이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또한,여름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만발 한답니다.
월곡 우배선 장군상
우배선(1592∼1620)은 성주 화원현 월촌리에서 출생,
조선중기의 의병장·문신으로 1592년 왜구의 침입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쌍산역 달성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습니다.
임란 당시 24세란 젊은 서생으로 한미한 가세에서 창의, 1백명 안팎의 소규모 의병진을 갖추고
성주와 대구, 현풍과 칠곡사이의 화원현에서 낙동강과 금호강, 비슬산과 최정산을 무대로
왜적을 기습, 야작, 추격등 참급63명, 사살604명, 작살110명에 이르는 혁혁한 공적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따라서 그의 의병활동과 그 의병진이 성취한 군공을 미루어 보아
임란 때 대구· 성주지방을 대표한 제일의 의병장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지산
잘 생긴 소나무의 언덕은 장지산 입니다.
언덕처럼 보이지만 어엿한 이름을 지닌 산입니다.
우씨 집안이 공원부지로 제공한 땅은 서원 부지와 장지산의 송림을 포함하고 있답니다.
이 장지산에는 월곡 선생이 타고 다니던 말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의마탑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400여 년 전, 인근 들판에는 야생마가 살았답니다.
그중 성질이 사나워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말이 있었는데
오직 월곡 선생만을 순순히 따라 애마가 되었답니다.
임진왜란 때도 선생은 애마의 덕으로 수차례 위기를 면했답니다.
그리고 훗날 월곡 선생이 세상을 뜨자 말은 먹지 않고 슬피 울다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답니다.
사람들은 장지산에 말을 매장하고 ‘의마총’이라 했습니다.
월곡역사박물관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역사박물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1등 선무원종공신에 봉해진 우배선(禹拜善, 1569~1621년)과
관계된 유물, 단양 우씨 월촌 종중 소장품, 각종 생활용품과 농기구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1층 전시실 농경시대생활관에는 우씨 문중에서 수집한 500여 점의 각종 생활용품과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 전시실은 월곡공자료실과 역대선조자료실, 장서실, 현대자료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월곡공자료실에는 우배선의 유품인 <화원우배선의병진군공책 및 관련자료(보물 제1334호)> 등과한
선조의 교지 홍패 등 유품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상으로 낙동서원(덕동서원). 달서구 사적탐방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