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 쓰신 느헤미야
2024년 12월 22일 느헤미야 1:1-11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이 타고 들어갈 나귀 새끼를 데려오게 했다. 나귀 새끼 주인이 ‘왜 데려가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는 장면이 있다. 이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이 생각할수록 참 좋은 말이었다. 주께 쓰임 받는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나귀 새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어리고 사람을 태워본 경험도 없는데 갑자기 발탁된 것이다. 처음으로 사람을 태우고 뒤뚱거리며 한 발자국씩 걸어갈 때에 이런 저런 불평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열광으로 환호하는 것을 볼 때 그제야 자신이 대단한 분을 태웠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께서 쓰시겠다’고 자신을 찾아주신 것에 무한 감사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작정하시면 우리의 부족한 능력과 자격 없음이 무엇이 문제가 될까? 나귀가 뒤뚱 뒤뚱거리며 걷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손을 놓고 아무 일도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통해 배울 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디모데후서 2:21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공통된 특징은 깨끗한 사람이다. 금그릇이든 은그릇이든, 나무그릇이든 질그릇이든 우선적으로 깨끗해야 쓰임을 받을 수 있다. 세상의 영광과 욕심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께 순전하게 드려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1:25-30 / 그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여,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이 진리를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27)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택한 사람들만이 아버지를 압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본문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느헤미야의 이야기이다. 느헤미야는 BC 444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3차 귀환을 이끌었고,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총독이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가 말라기이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끝자락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참 어두웠던 시기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었고, 그를 통해 배울 점이 무엇인가 살펴보려고 한다.
1. 느헤미야의 직업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1절) 느헤미야의 일터는 수산 궁이었다. 왕의 술 관원으로 재직중이었다. 술 관원을 술 상무나 주방장 정도로 생각하면 안된다. 당시 바사제국, 페르샤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제국의 왕은 정적들에 의해 독살을 당하거나 큰 해를 입을 수 있었기에 술 관원을 두어 술 제조 전과정을 감독하고, 왕이 마시기 전에 미리 안전한지 맛을 보아야 했다. 그러기에 왕이 매우 신임하는 사람에게 맡겨진 직책이다. 왕과 늘 가까이 지냈기에 국사를 함께 의논하는 왕의 총애를 받는 직책이었다.
▶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의 3세~4세였을 것이다.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되어 포로로 잡혀갔고, 느헤미야는 그 후손으로 BC 445년에 수산궁의 술 관원으로 있었으니 약 140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런 외지인이 어떻게 페르샤왕 아닥사스다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술 관원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느헤미야 개인의 실력과 성품도 뛰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다. 느헤미야가 술 관원으로 섬겼던 아닥사스다 왕의 아버지는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아하수에로 왕이었다. 아닥사스다 왕의 어머니가 폐위된 와스디인지, 에스더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에스더와 모르드게의 영향 아래 성장한 것은 분명한다. 이런 배경이 유대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호감과 신뢰를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느헤미야도 자신이 술 관원이 된 것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쓰실 일이 있기에 이 자리에 두셨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위가 높고 낮음을 떠나 우리가 현재 있는 자리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그 자리를 통해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함이기도 했다. 느헤미야는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일반 세상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도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의 왕에게 충성하는 자리로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최적의 자리였다. 하나님은 교회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세상 곳곳에서 일하신다. 그렇기에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직장에 유익한 사람, 신실한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2. 느헤미야의 관심사
느헤미야가 수산궁에서 술 관원으로 재직하는 중 1,300Km나 떨어진 예루살렘을 다녀온 형제 하나니를 만나게 된다. 그에게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예루살렘을 다녀온 하나니로부터 들은 소식은 예루살렘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였다는 것이다.
▶ 과거 바벨론에 멸망해서 포로로 잡혀간 것은 140여년전 일이다. 그리고 바사(페르샤)제국에 바벨론이 멸망하면서 BC 536년경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5만명의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했다. 1차 포로 귀환자들의 첫 임무는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변 민족의 방해로 성전건축이 16년간 중단되었다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으로 건축이 재개되어 4년 만에 완공이 되었다.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진 상태에 있었다. 성벽 없는 성안에 사람들이 모여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부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1차 포로 귀환 후 약 80년이 지나서 에스라가 1,800명을 이끌고 2차 귀환을 하였다. 2차 귀환의 목적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의 영적 회복이었다. 그리고 성벽 재건도 시도했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늘 2차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잘 정착하고 그 목적을 이루었는지 궁금했는데, 하나니가 가져온 소식은 참담한 내용이었다. 여전히 예루살렘 백성들이 환난당하고 능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벽이 허물어졌고, 성문이 불탔기 때문이었다. ‘성벽이 없다’는 것은 늘 위험에 노출된 상태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4절이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그 소식을 듣고 털썩 주저앉아 울었다. 잠깐 울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다.
바벨론 땅에서 태어난 느헤미야는 한번도 예루살렘에 가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페르샤 제국의 고위직에 오른 사람으로 세상적으로 아쉬울 것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 매몰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잘되고 출세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관심이 있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기에 큰 슬픔 가운데 며칠간을 울면서 보내다가 이 문제를 가지고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왜 느헤미야가 털썩 주저앉아 수일동안 울고 금식하고 기도했나? 그것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성벽의 돌 하나 놓을 수도 없고 내 능력은 성벽을 세울 수도 없다. 나는 무능하고 무가치하고 연약한 존재로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털썩 주저앉아 울은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잘한다. 내가 다한다.’ 이러면 하나님께서도 ‘네가 다하냐? 네가 잘할 수 있냐? 그럼 한번 해봐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 전 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일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무능하고 연약합니다.’ 이렇게 나오면 하나님께서 ‘내가 해주겠다. 내가 널 도와주겠다.’ 이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진리이다.
3. 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는 슬퍼하며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금식하며 기도했다. 느헤미야는 문제해결을 위해 자신을 신임하는 왕부터 찾아가 청탁하지 않았다.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기에 엎드려 기도한 것이다.
느헤미야의 기도 내용이 5절부터 기록되어 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있었다.
5절 /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1.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었다.
느헤미야는 거대한 바사제국에서 그들이 섬기는 어마어마한 신전을 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느헤미야는 세상의 거센 위력 앞에 두려울 때마다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다.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신 7:21) 느헤미야가 기도를 시작하며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자신 안에 있는 엄청난 일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내쫓기 위함이었다. 세상의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정말로 크고 두려운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심을 아는 것이다.
▶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말씀이 얼핏 생각난다.
마 8:23-27 / 예수께서 바다를 건너가려고 배를 타시자 제자들도 따라 탔다. 24)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일더니 물결이 배보다 높이 치솟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소리쳤다. ‘주님,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 것 같습니다.’ 26) 그제야 예수께서 일어나시며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그렇게도 겁을 내느냐?’ 하며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폭풍이 그치고 사방이 잔잔해졌다. 27) 제자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순종하는가?’ 하고 모두들 놀라워하였다.
2. 느헤미야가 믿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분이 아니다. 약속하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느 1:8-9 /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와 바사제국에 흩어져 사는 것도 너희가 범죄하면 그렇게 되리라는 말씀대로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신 30:1-10 / 나는 이제까지 여러분에게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멸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이 앞으로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벌을 받아 세계 만민 가운데에 흩어지게 되면 여러분은 거기서 제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 2)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여러분의 후손들과 함께 마음을 다 쏟고 정신을 다 기울여 주께 순종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령한 대로 살아가면 3)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분을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며 주께서 이미 여러분을 흩어 보내셨던 그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다시 데려다가 고국 땅에 모아 놓으실 것입니다. 4) 비록 여러분이 세상끝에까지 흩어져 있어도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거기서도 데려다가 모아놓으실 것입니다. 5) 그러면 여러분이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더 주셔서 여러분의 조상들보다 더 번창하게 하실 것입니다. 6) 주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주셔서 여러분이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입니다. 7) 그리고 이 모든 저주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미워하며 압제하는 원수들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8) 그러나 여러분은 주께로 다시 돌아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주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며 살 것입니다. 9) 그때에는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넘치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많은 자녀를 둘 것이고 여러분의 가축이 번성할 것이며 여러분의 농경지에서도 많은 수확을 거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복 주시는 것을 기뻐하셨던 것처럼 다시 여러분에게 복 주시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이 율법책에 기록된 주님의 계명과 규정을 모두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십시오.
이 말씀을 잡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부르짖었다.
느 1:10-11 / 비록 그들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종입니다. 그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해방시키신 주님의 백성입니다. 11) 오 주님, 나의 호소를 들어주소서! 주님만 섬기려고 작정하며 떨리는 자세로 복종하는 모든 이들의 호소를 들어주소서! 주께서 이 종을 도우셔서 이 나라의 왕앞에서 큰 은총을 입게 하소서!'
느헤미야는 온갖 어려운 여건과 방해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공사를 시작한지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쉬운 공사인 것 같지만 결코 아니다. 성벽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다. 주석을 보니까 성벽의 둘레는 1.6km 정도이다. 성벽의 두께는 120cm이다. 성벽의 높이는 6m이다. 이것은 결코 작은 공사가 아니었다. 또 느헤미야 6장을 읽어보면 성벽공사를 마친 때가 엘룰월이라고 기록했는데 엘룰월은 오늘날 달력으로 보면 8~9월 건기를 말한다. 이때는 기온이 40도 이상 올라간다.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불볕 더위로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오듯 하는 때이다. 이렇게 어려운 공사를 느헤미야가 해냈다. 그야말로 기적이다.
3. 느헤미야의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셨다.
사람들은 힘들고 괴로울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냐? 왜 돕지 않고 외면하셨냐?’고 불평한다. 느헤미야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팔짱 끼고 구경만 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아파하시고 그 아픔에 동참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이에 느헤미야는 긍휼의 하나님께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였다.
느 1:6 / 주님, 이제 이 종을 굽어보시고, 이 종이 호소하는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가 주의 종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렇게 밤낮으로 호소하지 않습니까? 우리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주님을 배반하고 반역하였습니다. 그 죄를 고백합니다. 나와 나의 동족도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다. 거의 본능적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고통의 원인이 내부에 있었음을 알았다. 자신의 죄도 포함되어 있음을 고백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자복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사 1:18-19 /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우리가 이 문제를 상의해 보자! 너희가 아무리 죄악에 찌들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너희의 죄악을 씻어 주리라. 금방 떨어진 눈송이보다도 더 희게 하리라. 너희가 진홍같이 붉게 물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를 양털처럼 희게 씻어 주리라. 19) 너희가 내 도움을 받으려고만 하면, 너희가 내 말을 듣기만 하면, 너희는 땅이 내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으리라.’
▶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느헤미야가 문제를 감지하고 가장 먼저 했던 것은 기도였다. 기도는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며,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순종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렇기에 기도하지 않고 하는 일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주도권을 쥐고 내 마음대로 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잡음이 생기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매일 매일의 삶에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자.
느헤미야는 자신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맡겨진 일을 감당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자신의 일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성벽이 없어 환난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성벽이 되고, 울타리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을 주목하며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간구했다.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 여러분! 느헤미야처럼 있는 자리에서 신실하게 일하며,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자! 어떤 모습이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소망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 6ㆍ25전쟁을 둘러싼 교회 동정을 기록한 문서들을 살펴보면 두 장소에서의 의미 있는 기도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❶ 전쟁 발발 후 불과 81일 만에 낙동강까지 북의 침략에 밀린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300여명의 목사님들이 부산 대신동 초등학교에 모여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회개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그때가 장마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어 B29가 낙동강을 3일 동안 폭격하여 낙동강 전선을 적이 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❷ 부산으로 피난 온 교역자 250여명을 수용했던 부산 초량교회에서 여기에 숙식한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을 위한 또 하나의 구국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이 일어나 전세는 역전되고 극적으로 이 땅의 절반만이라도 자유와 번영의 땅으로 남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부어진 것이다. 그렇게 초량교회에서 밤낮없는 회개기도가 있은 지 3일 후 인간적으로 볼 때는 성공할 확률이 5,0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전쟁 역사에 길이 빛날 전투로 ‘독 안에 든 쥐’가 된 공산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혼비백산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세는 역전됐고 9월 28일에는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았다. 그뿐이 아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군의 한국 전쟁 참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를 소집했다. 당시 중국은 대만의 장개석 정부가 중국의 대표권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당시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고, 그렇게 되면 유엔은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긴장한 분위기 가운데 회의 날이 다가왔다. 그런데 회의 당일 소련 대표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한국 전쟁에의 참전을 만장일치로 가결했고, 한국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의 대표가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그 대표는 회의 시간을 훨씬 지나 모든 결정이 끝난 뒤에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근래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것도 기도의 힘이었다. 당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투표함을 만든 사람이 투표함을 완성하고는 안쪽에 이런 기도문을 쓰고 서명을 했다. ‘이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결정이 되어 인류 역사에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1997년 투표함이 낡아서 바꾸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지만 한국 사람인 나로서는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까지 들어주셨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셨다고 말하고 싶다. 또 택시라도 타면 되지 뭔 고장이 원인이냐? 왜냐하면 소련 대사는 미국의 첩보기관에서 설치한 도청에 신경질적으로 예민했기 때문에 대사관 차량 외에는 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실 그 일은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이 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서 사용하실 것이다. 혹시라도 ‘감히 나 같은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비하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나를 살펴보자. 스스로가 너무 보잘 것 없다고 생각된다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게 무엇이 있나부터 살펴보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한, 나는 하나님이 써나가시는 역사책의 주인공이 되어 사도행전 29장을 써나갈 것이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계속 되어야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