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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황하 문명)
상나라는 한랭 건조하고 홍수와 가뭄이 빈번한 중원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왕조로, 농업이 기후 변화에 크게 의존했고 자연재해가 곧 생존의 위협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상나라인들은 자연과 조상을 동시에 신격화했다. 조상과 신, 자연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초월적 의지로 여겨졌으며, 그들은 인간의 운명과 재난을 직접 통제하는 '두렵고 예측 불가능한 힘'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신에게 가장 귀한 제물, 즉 '사람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신의 기분을 달래고 재난을 막으려 했다. 인신공양은 이 같은 신관의 산물이며, 갑골점을 통해 그 정당성이 의례적으로 보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타국과의 전쟁이 늘고 포로가 늘어나면서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포정치의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도 일정 부분 있었으나, 사실 동아시아 국가 대부분의 제사의식은 상나라에서 기원한 것이기도 하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역시 상당기간 상나라의 인신공양 풍습을 이어간 것을 생각하면, 후대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상나라 멸망의 원인을 인신공양의 폭정으로 단순화시키기는 어렵다. 상나라의 신관은 주나라로 넘어가며 인간은 자연과 조상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천명(天命)'의 위계질서로 정제되었고, 그렇게 동양 문명에서 '하늘'은 영웅에게 왕권을 부여하고 폭군으로부터 그것을 빼앗기도 하는 궁극의 심판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인신공양은 점차 의례화·상징화되고, 한나라 시기 유교가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생명을 바치는 제사는 조상에게 예를 다하는 제례로 전환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인신공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이 지역 역시 가뭄과 홍수가 존재했지만,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이용한 관개농업의 발달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농업 기반이 마련되었고, 인간은 자연을 통제 가능한 대상, 즉 질서의 일부로 인식했다. 이로 인해 신 역시 인간처럼 감정과 의지가 있으나 '협상 가능한 존재'로 여겨졌고, 제사 역시 동물, 곡물, 노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신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계약을 통해 교섭 가능한 상대였고, 이는 법률 중심의 도시국가 체계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더불어 도시국가 간의 끊임없는 전쟁은 신들을 각 도시의 정치적 수호자이자 경쟁자로 형상화하게 만들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는 혼돈을 질서로 바꾸고, 적을 굴복시키는 신들의 법적 승리의 이야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렇게 신들은 인간처럼 흥정하고 싸우며 법을 만들고 도시를 다스리는 존재로서,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는 자연과 전쟁을 모두 '교섭 가능한 현실'로 바꾼 개척자들의 대서사시가 되었다. 이러한 신화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지와 사고를 촉진하여 최초의 법전들이 탄생함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의 통합 왕조이자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아카드 제국과 바빌로니아 제국의 형성에 핵심 기반이 되었고, 이 구조는 고대 근동을 넘어 히브리 율법, 로마법, 이슬람 율법 등 후대 문명들의 법과 신관, 정치 체계 형성에도 장기적인 구조적 영향을 남겼다.
인더스 문명
고대 인도인들은 계절성 몬순에 기반한 자연환경 속에서 정기적인 비와 가뭄, 농경의 풍요와 재해가 매년 순환되는 기후 구조를 경험하며 살아왔고, 이러한 자연의 반복성과 순환성은 인간의 삶과 행위 역시 순환하는 우주 질서 속에 놓여 있다는 사상, 즉 윤회와 카르마라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토대를 형성했다. 상나라처럼 재난과 홍수도 자주 닥쳤기에 초기에는 인신제사와 희생을 통해 자연과의 교환을 시도했지만, 점차 고도화되는 제사의식의 흐름은 브라만 계층의 해석 전통과 산스크리트어의 추상적 사유 능력을 통해 타 문명권과 다른 독특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는 '내면의 깨달음'과 '세상을 구성하는 신'들을 동일시하는 철학적 종교, 즉 힌두교로 체계화되었다. 이후 소가 '인간이 넘볼 수 없는 가장 신성한 제물'로 받아들여지며 신에게 바치는 최고 가치가 반드시 인간일 필요가 없다는 사고방식이 굳어졌고, 점차 "무엇이 참된 희생인가", "자연은 인간의 행위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대한 사유가 쌓이면서 인신공양은 도덕적 책임과 내면의 정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불교, 자이나교, 우파니샤드 철학으로 분화되며 '열반'이라는 형이상학적 신비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집트 문명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이 자연의 파괴적 힘보다는 질서와 균형의 수호자로 인식되었으며, 이는 나일강의 주기적이고 예측 가능한 범람, 비교적 안정된 기후, 그리고 농업 중심의 생존 구조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집트인에게 자연은 위협보다 풍요를 주는 질서의 근원이었고, 신은 그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로 숭배되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매년 되풀이되는 나일의 범람은 이집트인들에게 시간마저도 순환하는 질서로 느껴지게 했고,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닌 영원히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되었다. 이 영원의 관념 안에서 오시리스, 라, 이시스와 같은 신들은 창조와 부활, 순환의 개념과 결합되었으며, 인간은 신의 뜻에 조화를 이루며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제사는 사후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신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의례로서 발전했으며, 인신공양은 거의 없고, 대신 미라, 무덤, 장례의식 등 죽음 이후의 질서와 재생을 강조하는 의례가 중심을 이뤘다. 이는 이집트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된 이후에도 후대 그리스-로마 세계에 흡수되어 헬레니즘 시대의 신비주의와 영혼 불멸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로마 시대의 황제 숭배와 결합해 황제의 신성과 권위를 정당화하는 종교 장치로 활용되었다. 이는 낭만적인 세계관에 비해 사후세계와 권력을 연결짓는 관념이 다소 부족했던 로마 종교의 단점을 보완하며 서구 역사에서 죽음과 신성, 권력의 상징 구조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문화적 토양으로 작용했다.
아즈텍 문명
아즈텍 문명에서는 또 다른 방식의 신관이 나타난다. 고산열대의 불안정한 기후와 농업 불균형, 불의 고리로부터 비롯된 끝없는 기근과 지진 속에서, 아즈텍인들은 신들의 죽음을 막고 우주의 순환을 유지하기 위해 태양에 끊임없는 에너지를 공급해야 한다고 믿었다. 재난에 의해 끊임없이 무너지고 재건되는 메소아메리카의 역사 속에서 아즈텍의 신들은 영원불멸한 창조주가 아닌, 세계의 붕괴와 함께 죽고 다시 피로 되살아나는 순환의 희생자로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곧 인간의 운명이기도 했다. 그들이 존재를 유지하는 에너지는 인간의 피와 심장이었고, 그래서 인신공양은 단순히 신을 달래는 행위가 아니라, 신과 세계가 유지되기 위한 필연적 계약으로 인식되었다. 심장 적출이 주된 공양 방식으로 존재했으며, 아즈텍을 비롯해 모든 국가와 부족들에서 희생자는 오히려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종교교리가 인신공양 중심으로 매우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제물 당사자들 역시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주변국에 공포정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던 타 문명권의 '하향식 인신공양'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지점이다. 특히 아즈텍의 황제가 관직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검투사 제의에서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영광을 택한 틀락스칼라의 전사 '틀라위콜레'의 일화는, 인간이 신과 세계의 순환을 위해 비장하게 희생해야만 한다는 당대 메소아메리카인들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고대 일본
고대 일본인들은 태풍, 지진, 전염병, 장마와 같은 습윤하고 으스스한 기후와 예측 불가능한 자연재해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이러한 환경은 자연 자체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존재, 곧 요괴와 카미(神)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초창기의 카미는 특정한 신격이 아니라 강, 산, 나무, 불, 바람, 짐승, 인간 등 모든 것에 깃들 수 있는 살아 있는 정령이자 그들이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된 힘으로 여겨졌고, 그 기분을 달래기 위한 희생과 교섭이 공동체의 생존 방식이 되었다. 이는 자연, 인간, 신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를 넘나드는 일본 고유의 순환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제방이나 건축물의 초석에 산 자를 묻는 '히토바시라(인간 기둥)', 통치자의 무덤에 하인이나 측근을 함께 묻는 순장 풍습, 재난 시 인신공양 전설 등이 나타났으며, 이는 카미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빌기 위한 극단적이지만 신성한 계약 행위로 여겨졌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자연을 극복한 영웅들에 대한 신격화 문화도 형성되었다. 스사노오는 재난과 요괴들을 퇴치했다는 점에서 상호의존의 조화(和)를 깨는 악동인 동시에 경외로운 영웅으로 여겨졌고, 야마토타케루와 같은 군주들은 카미에 맞서 자연을 극복하고 질서를 확립한 개척 영웅으로서 수호령화 되었다. 이들은 '재난과 으스스한 자연'을 표상하는 요괴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신성한 존재들로서 신사에 모셔져 숭배되었다.
고대 영국(켈트-브리튼 문명)
고대 영국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유사한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유사한 신관을 보인다. 고대 영국은 안개와 비, 불규칙한 기온, 안개 속에 펼쳐진 광활한 초원과 평야 속에서 자연을 경외와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켈트족은 산과 늪, 나무, 숲과 동물, 하늘 등 자연의 모든 곳에 요정(엘프), 정령, 괴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이 세계관에서 신은 자연 그 자체이자 인간의 영혼과 연결된 존재로 여겨졌으며, 이를 중재하는 드루이드는 제사, 예언, 교육을 주관하는 신성한 사제 계층이었다. 늪지에 매장된 '보그 바디' 등의 고고학적 발견은 죄인이나 전사, 포로를 신에게 바쳐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던 의례적 인신공양의 흔적으로 해석되며, 이는 신과 인간이 맺는 신성한 계약의 일부였다. 동시에, 일본의 영웅 신격화 문화처럼 쿠 훌린이나 브란, 아서왕 같은 전사 영웅들은 죽음 이후에도 신성과 연결된 수호령으로 부활하는 영속적 존재로 기억되었고, 그들의 전설은 특정 장소와 결합해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앙의 축으로 작동했다. 이처럼 고대 브리튼에서는 자연과 신, 인간, 영웅이 하나의 연속된 세계 속에서 교감하며 존재했으며, 이후 로마화와 기독교 전래로 인해 인신공양은 사라졌지만, 영웅 숭배와 자연 중심 영성은 장기간에 걸쳐 그 신관의 핵심으로 남았다.
고대 한반도
고대 한반도는 산이 많고 사계가 뚜렷하며, 홍수와 가뭄, 추위와 전쟁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자연환경, 중국 대륙과의 교류와 정치적 외압 속에서 자연과 인간, 조상과 신이 긴밀히 연결된 신앙 구조를 형성했다. 또 산악과 계곡이 많고, 소규모 공동체가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존재하는 자연적·사회적 다핵 구조 속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지역마다 산신, 수신, 조상령 등이 각각 다르게 숭배되는 다중 신관이 형성되었다. 이는 상나라처럼 신권과 왕권이 결합한 위계적 통치 체계가 일찍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제사권 또한 특정 중앙 권력이 독점하기보다 부족과 지역 단위에서 실천 중심으로 공유되었다. 이렇게 천신과 산신, 조상령, 토착 정령 등이 공존하며, 제사와 점복, 주술이 통치와 밀접히 결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천신과 전쟁신들은 자연스럽게 재난을 주관하는 두려운 존재이자, 단군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왕권을 정당화하는 도구로도 기능했다. 부여에서는 순장 제도가 존재했고, 고구려에서도 국가 제사에 말과 사람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 초창기에도 왕실 무덤에 순장이 행해졌다. 특히 고구려는 산천신과 전쟁신을 숭배하면서, 주몽, 을지문덕, 연개소문같은 영웅적인 왕이나 장수를 신적 존재로 승격해 제사했다. 이는 '사계를 통치하는 하늘'과 '외적에 맞선 장군들의 비장한 죽음'을 통해 위엄을 확립하려는 한반도 특유의 정치적 신관과도 연결된다. 이후 불교 수용과 유교적 제례 체계의 정착으로 인신공양은 점차 사라지고, 국가의례와 조상제사 중심의 제사 구조로 전환되었다.
그리스(서지중해) 문명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신은 인간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었으며, 이는 서지중해의 예측 가능하고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도시국가 중심의 분산된 정치 구조, 해양 활동과 예술 중심 문화 등 환경적 요소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스인에게 자연은 두려움보다는 이해와 조화의 대상이었고, 제사는 복종보다 '축제와 공동체 통합의 의미'를 지녔으며, 인신공양은 드물거나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리스 신관은 감정과 개성을 지닌 인간형 신들로 구성되었고, 신과 인간의 관계는 상호 교류와 드라마적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다. 온화한 바다와 계절이 순환하는 환경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두려움이 아닌 이해와 예술로 해석할 수 있는 세계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신은 자연의 지배자이면서도 전장을 누비는 위대한 영웅으로, 때로는 욕망과 오만에 무너지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운명이란 무대 위에 함께 오르는 배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형 신관은 그리스인의 삶과 정신에 깊이 스며들어, 신화와 역사가 맞닿는 정복과 원정의 이야기로 계승되었다. 트로이아 전쟁의 아킬레우스나 오디세우스처럼, 그리스의 영웅들은 신의 후손이자 도전자로서 운명과 싸우며, 모험과 개척, 비극과 명예를 동반한 서사를 만드는 존재로 형상화되었다. 이 신화적 상상력은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과 자신을 '제우스의 아들'이라 칭한 정치적 신격화에도 반영되어, 그리스 문명의 확장 자체가 신적 드라마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그리스 문명을 계승한 로마의 정신적 토대로도 자리잡았다.
가나안-페니키아(동지중해) 문명
카르타고가 위치한 페니키아의 인신공양적 신관은 궁극적으로 도시국가 경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강화된 구조였지만, 그 기원은 가나안-페니키아 문명의 자연 환경, 특히 건조하고 불안정한 강우, 가뭄과 토양 한계 등 생존 기반의 위협적 기후에 뿌리를 둔다. 계절성이 뚜렷하고 안정적인 서지중해와 달리, 동지중해의 짧고 불규칙하며 가뭄이 자주 발생하는 강우 환경에서 물과 풍요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고, 이는 신이 주는 축복이 조건부이며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조건적 신관은 점차 '신은 대가를 요구하는 존재'라는 교환 중심 종교관으로 발전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상업도시의 위기, 공동체 질서, 가문의 명예와 결합해 제도화된 희생 의례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이 신관은 단지 사회 구조만이 아니라, 자연환경과 생존 조건이 만든 심리적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인간과 신의 관계는 일방적 복종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교환과 헌신을 통한 신뢰 회복 구조로 설정되었고, 위기 시에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공동체 전체를 살리기 위한 극단적 신앙적 책임 수행으로 정당화되었다. 즉, 이와 같은 신관은 불안정한 국제 환경 속에서 신과 도시 사이의 처절한 생존 계약을 믿었던 사회적 구조물이었다. 그 무게감을 대표하는 사례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의 일화다. 그가 신 앞에서 피를 흘리며 로마 멸망을 맹세했고, 그 서약이 신과 가문 사이에 맺어진 신성한 계약으로서 그가 눈을 잃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 맹세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일화는, 고대 페니키아 문명에서 신 앞의 맹세란 목숨보다 무거운 절대적 서약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북유럽 문명
바이킹으로 대표되는 게르만 및 노르드 신화에서 신은 인간과 유사한 성격과 한계, 즉 영속적인 죽음를 맞을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며, 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거칠고 가혹한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장기간 지속되는 겨울, 불규칙한 기후, 농업보다는 해상 활동과 전투에 의존한 생존 방식 속에서 바이킹은 신을 절대적 통치자라기보다는 동료이자 전투적 세계에서 함께 싸우는 존재로 인식했다. 오딘, 토르, 로키와 같은 신들은 불사하지 않으며, 최후에는 '극심한 겨울' 핌불베트르와 '신들의 황혼' 라그나로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을 공유한다. 이는 자연과 죽음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용기와 명예로 그것에 맞서는 문화와 연결된다. 제사의 경우 동물 희생과 함께 인신공양의 흔적도 있으며, 이는 공동체의 위기 시 신과의 직접적 계약을 맺으려는 행위로 해석된다. 이 제사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신과 함께 싸우기 위한 초대장의 의미를 가졌다. 죽는 순간까지 명예를 잃지 않는 전사들은 오딘의 부름을 받아 발할라에서 라그나로크를 대비하는 그의 영광스러운 동료가 된다고 여겨졌다. 후대 기독교화된 게르만계 통치자들은 바이킹 전사의 이미지를 기독교 기사와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이러한 신관은 후대 게르만 전통의 야성적인 기사도 정신, 스칸디나비아 민족주의, 나아가 근대 유럽의 영웅주의 서사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유대교
유대교의 경우는 또 매우 다르다. 팔레스타인과 시나이 반도 등 반건조 사막지대에 살았던 히브리인들은 비가 거의 없고 자연환경이 극단적으로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삶을 유지해야 했다. 그들은 희망이 없는 자연 안에서 신을 찾기보다 자연을 초월하는, '형상 없는 절대자'를 구도했다. 따라서 야훼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그 너머에서 도덕적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였고, 제사도 인신공양이 아닌 윤리적 법칙과 규율에 기반을 두었다. 기후적으로 불확실성이 극단화될수록, 신은 조작 가능한 대상이 아닌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는 훗날 가나안 지역에서 예언자 전통과 이스라엘의 중앙집권화를 통해 유대교의 신관이 바알이나 몰렉을 대체할 수 있던 원동력으로도 작용했다. 대가를 요구하고 분노를 달래야만 은총을 베푸는 기존 가나안 신들과는 달리, 유대교의 신은 자발적 은혜와 도덕적 계약을 강조하는 초월적 유일신 개념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가졌다. 야훼는 인간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신과의 철회되지 않는 언약'과 그에 대한 믿음을 요구했다. 이는 당시 불안정한 기후와 외부 침략 속에서 공포와 대가 중심의 종교에 피로감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심리적 위안과 대안적인 신앙의 길을 제시했다. 이러한 초월적이고 도덕 중심적인 유일신 신관은 훗날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이어지는 아브라함계 종교의 기반이 되었으며, 자연의 기분에 좌우되지 않는 절대 윤리와 신의 언약이라는 개념은 서구 문명의 법, 도덕, 인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신이 공포가 아닌 믿음과 정의를 요구하는 존재라는 관념은 이후 반복되는 종교 개혁, 인권 사상, 근대적 주체 의식의 형성에도 중요한 사상적 자양분이 되었다.
결국 고대 문명에서의 신관은 단지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생존 조건의 반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이 위협적이면 상나라와 페니키아처럼 신은 '두려운 존재', 혹은 아즈텍과 바이킹처럼 '절박하게 운명을 같이해야 할 동지'가 되고, 인간은 더 많은 제물을 바쳐야 한다. 자연이 예측 가능하면 메소포타미아처럼 신은 '협상 가능한 경영자' 혹은 그리스와 이집트처럼 '유희와 조화의 지배자'가 된다. 또 기후의 불확실성이 매우 극단적이라면 유대교처럼 '현실을 초월하는 절대자'로서 인식되었다. 기후는 신의 형상을 결정하고, 그 신은 다시 인간의 사회와 윤리를 형성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문명마다 서로 다른 신의 성격과 제사의 구조를 낳은 근본적인 이유다.
아래는 초기 야훼의 '언약과 유목민의 신'이라는 정체성이, 이후 남부 레반트와 시나이 반도의 구리 광산 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케나이트 및 밀교적 소수 전통의 영향을 받아, 야훼가 '금속과 제련의 신'이라는 속성을 흡수하게 되었음을 밝히는 고고학적 연구이다. 이를 통해 야훼 신앙 안에서 초월성 관념의 기반이 형성되었고, 이후 우가리트의 엘(El)이나 가나안의 바알(Baʿal)과의 신화적 경쟁 및 상호 융합하며 '신들의 왕'이자 '전쟁과 폭풍의 신' 속성을 흡수함으로써 '초월적 단일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또 후술하겠지만, 이 과정에서 바벨론에게 점령되는 이후까지 이어지는 예언자 전통을 거쳐 야훼는 완전히 초월적이고 도덕적인 유일신으로 변화한다. 케나이트 가설은 아직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예언자 전통이 성립되기 이전 단계에서 야훼의 복합적 속성과 초월성을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시기의 '단일신(Henotheismus)' 개념은 종교학적으로 여전히 다신적 세계관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특정 신(이 경우 야훼)에게만 모든 숭배와 권위를 집중시키는 형태로, 이는 이후의 '유일신(Monotheismus)'으로의 이행 전 단계로 이해된다.
Consequently, the singular nature of the man-god relationship encountered in the Bible may not be an invention of the Israelites. Rather, the Israelite religion appears to be an attempt to extend to an entire nation (and, subsequently, to the whole world) values originally belonging to a small congregation of Canaanite metalworkers and threatened by the rise of a new epoch in which metallurgy lost its prestige and even sustained a demotion. From a theological perspective, the birth of Israel represents the democratization of esoteric traditions founded on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divine reality that was experienced around the furnace. The abolition of the cult of the intermediate deities, the most blatant singularity of the Israelite religion, should therefore be seen as an extension of the circumvention of secondary deities’ power pursuant to human participation in an activity, metalworking, that belongs to the supreme deity.
그 결과, 성경에서 발견되는 ‘신과 인간 사이의 독특한 관계’는 이스라엘이 새롭게 발명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 종교는 원래는 가나안 지역의 소규모 금속공 집단이 유지하던 밀교적(esoteric) 전통을 전체 민족에게 확장하려는 시도였고, 더 나아가 전 세계를 향한 보편화 시도로 이해될 수도 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은 용광로(furnace) 주변에서 경험된 신적 실재(divine reality)와의 긴밀한 관계에 기반한 밀교 전통을 대중화한 사건이다. 이스라엘 종교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중간 신(intermediate deities) 숭배의 폐지는, 인간이 금속공이라는 최고신의 영역에 직접 참여하게 됨에 따라, 이차적 존재들의 권한을 우회하거나 무력화하는 신학적 연장선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However, if YHWH’s origins are rooted in the copper mining areas (Arabah, Sinai), the god should be likened with smelting (not smith) gods (e.g., Aten in Egypt),whose outstanding position emanates from the symbolism attached to this activity. In antiquity, the production of copper was approached as an act of creation of matter (the metal) from a sandstone (the ore) where it is apparently absent. This feature promoted the smelting god to the status of ultimate master of the powers of creation.The ability to recycle the copper of old rust artifacts in a furnace without any loss of matter added the attribute of rejuve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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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rael’s adoption of this Midianite/Kenite smelting God as their patron deity was an unprecedented move. From its very beginning, Israelite YHWH worship was based on the transformation of an esoteric belief system reserved for metalworkers and their followers into a public doctrine addressed to a whole people. This metamorphosis helped spawn the outstanding creativity characterizing the relig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way YHWH is presented in the Bible.야훼(YHWH)의 기원이 아라바(Arabah), 시나이(Sinai) 등 구리 광산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 신은 대장장이(smith)의 신이 아니라, 제련(smelting)의 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고대 이집트의 아텐(Aten) 과 같은 신들과 유사한 성격이며, 이들 신들은 제련이라는 행위에 부여된 상징성 덕분에 탁월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고대 세계에서 구리 생산은 광석(모래돌)에서 금속이라는 새로운 물질을 창조하는 행위로 여겨졌으며, 이는 금속이 눈에 보이지 않는 돌에서 ‘창조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제련의 신을 ‘창조 능력의 궁극적 주재자’ 로 격상시켰다. 또한, 녹슨 구리 유물을 용광로에서 재활용하여 손실 없이 새로운 금속으로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은 그 신에게 영속적 재생(rejuvenation) 이라는 속성을 부여하였다.
인용에서 주목할 또 한 가지는 원시 야훼가 전사의 신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먼저 사사기 5장이 드보라가 가나안 연합군에 맞서 싸우는 문맥임을 기억하자. 인용 구절은 그 싸움에 참여하는 전사 야훼를 혼돈 세력과 싸우는 근동의 풍우신들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전사로 등장할 때 천둥으로 땅이 흔들리고 폭우가 내린다.127 <에누마 엘리쉬>에 따르면 바빌론의 풍우신 마르둑이 혼돈의 바다 신 티아맛(Tiamat)을 물리칠 때 번개와 바람을 사용한다(제4토판, 35-44열). 가나안의 풍우신 바알이 혼돈의 바다 얌무(Yammu)와 싸울 때는 명시적으로 번개와 바람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지만(KTU 1.2 IV), 바알이 사용한 두 개의 무기 야그루슈(ygrš)와 아야미리(aymr)가 모두 새처럼 비행하여 적의 이마와 가슴에 꽂힌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두 무기가 번개와 바람에 대한 은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128 이렇게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신 야훼가 (이집트의 사막 신 세트가 아니라)129 바빌론의 도시 주신 마르둑이나 우가리트의 도시 주신 바알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하는 것은 성경의 야훼는 도시에 신전을 가진, 특정 국가이나 왕조의 신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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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야훼가 '다신교 전통을 배제하지 않는 초월적 단일신’으로 이해되던 초기 단계에서, 히브리인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토착민들과 융합함에 따라 일시적으로 '뚜렷한 다신교 체제'로 전환되었다가, 점차 가나안 토속 종교와의 경쟁 및 융합 과정을 거치며 다시 변화하는 과정을 다룬 연구이다. 이 과정에서 야훼는 '약속·심판·정의의 신'으로 재해석되었고, 예언자 전통과 요시야 왕의 중앙집권화 정책, 그리고 율법서의 편찬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초기 유일신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후 바벨론 유수를 거치면서 유대교는 비로소 완전한 유일신 종교로 정착했다.
The body of ancient texts during late Bronze Age (when the conquest began) is vast, however, not all of them are translated or accessible to the average person. Nevertheless, a number of very important text are readily available in English and are discussed below. One remarkable feature of texts from Canaanite locations is the rise of the deity called Yahweh. Once virtually unknown, Yahweh becomes a deity that nearly everyone in Canaan recognizes or worships. Another interesting feature is the migration of Semitic groups like the Hyksos, who were a dominant power in Egypt, into southern Canaan. This migration appears to be recorded in the Egyptian records. Both Josephus and Apion (1st century historians) believed the Hyksos migration to be the source of the exodus stories. The last feature of the ancient texts that deserves mention is the repeated mention of Canaanite infiltration by a group called the Habiru (also ‘apiru, ‘abiru, or hapiru). The Habiru were another Semitic group that arose to power during the later part of the late bronze age (3300 – 1200 BC) and the start of the iron age (1200 500 BCE). Whether or not these two groups were merged at any given time seems unknown.
청동기 후기 시대(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시작된 시기)의 고대 문헌 자료는 방대하지만, 그 중 모든 문헌이 번역되어 있거나 일반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쉽게 접할 수 있고 매우 중요한 일부 문헌들이 아래에서 논의된다. 가나안 지역에서 발견된 문헌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은, 원래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신인 '야훼(Yahweh)'가 점차 부상하여, 가나안에서 거의 모든 이들이 인지하거나 숭배하는 신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특징은, 힉소스(Hyksos)라 불리는 셈족 집단이 이집트에서 세력을 형성한 뒤 남부 가나안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이다. 이 이주는 이집트 기록에서도 나타나며, 1세기 역사가들인 요세푸스(Josephus)와 아피온(Apion)은 힉소스의 이주가 성경의 출애굽 이야기의 기원일 수 있다고 보았다. 고대 문헌에서 언급할 만한 또 하나의 요소는, '하비루(Habiru, 또는 ‘아피루, ‘아비루, 하피루 등으로도 표기됨)'라 불리는 집단에 의해 가나안이 반복적으로 침투당했다는 기록이다. 하비루는 셈족의 또 다른 분파로, 청동기 후기 말기(기원전 3300–1200년)와 철기시대 초기(기원전 1200–500년)에 세력을 떨쳤다. 이 두 집단(힉소스와 하비루)이 어떤 시점에서 합쳐졌는지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갈멜 산 대결에서 이스라엘의 ‘바알’ 야훼가 페니키아의 바알을 이김으로써 야훼는 그의 속성을 흡수하게 된다. 이것은 야훼의 승리를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에 잘 나타난다: “야훼 후 하엘로힘(39(”)האלהים הוה יהוה절). 이것은 “야훼가 그 신들이다”로 직역될 수 있다. 즉 야훼가 풍우신 바알을 비롯한 다른 만신전 신들의 능력을 흡수하여 최고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스만의 신성의 번역 가능성 개념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야훼가 단일신이 되는 과정에서 다른 신들의 신격이 그에게 흡수되었다. 사마리아의 야훼의 경우 바알의 신격을 흡수했지만, 예루살렘의 야훼는 태양 신과 여신의 신성을 흡수하게 된다.151 시리아-팔레스타인의 만신전의 주신들이 여명에 그친다는 점에서 야훼가 흡수한 신들이 제한된 것은 이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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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명기적 역사서가 전제하는 유일신 사상에서 이런 다신교적 선택 개념에 변화가 생긴다. 야훼가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유일신이라면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가 특정되어야 한다. 다른 민족들을 납득시킬 보편적 이유여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이 ‘율법서’이다. 신명기 사가의 관점에서 율법서는 보편적 가치를 담은 지혜서이다.
“내가 나의 하나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와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있는 백성이로다 하라”(신명기 4:4-6).
인용 본문에서 율법은 ‘지혜’와 ‘지식’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담은 책으로 소개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인 이유는 그들이 유일신의 보편적 도덕을 가장 잘 실현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율법에 불순종하는 순간 유일신에게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지위가 위태롭게 된다. 이처럼 신명기 사가는 다윗 왕조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율법에 대한 불순종에서 찾는다. 이 때 유일신의 신격도 재정의 된다. 즉 유일신은 모든 신들의 능력을 흡수한 가장 강력한 신일 뿐 아니라 보편적 도덕—정의와 사랑—의 신이다.https://irec.study/assets/files/IREC-conf2024-proceedings-final.pdf
Another example of an explicit polemic revolves around the issue of child sacrifice. In the context of Yahweh’s stern critique of Jerusalem for her fashioning of idols representing other deities, Ezekial 16.20–1 reads: “You took your sons and your daughters, whom you had borne to me, and these you sacrificed to them to be devoured. As if your whorings were not enough! You slaughtered my children and delivered them up as an offering to them.” Further, in Ezek. 20.25–6 Yahweh states: “I gave them statutes that were not good and ordinances by which they could not live. I defiled them through their very gifts, in their offering up all their firstborn, in order that I might horrify them, so that they might know that I am Yahweh.”8 Since both the subject (child sacrifice) and the stance (child sacrifice is wrong) are explicit, these statements are examples of an explicit pol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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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regard to the invectives directed against Baal’s cult in the Book of Hosea, Day writes that “polemic can sometimes involve taking up one’s enemies’ imagery and reutilizing it for one’s own purpose.”20 Noting that “Israelite religion incorporated some of the characteristics of other deities into the divine personage of Yahweh,” Smith clearly sees that polemic against deities other than Yahweh goes beyond mere condemnation. “For although polemic rejected other deities, Yahwistic polemic assumed that Yahweh embodied the positive characteristics of the very deities it was condemning.”21 Day and Smith mention polemics in passing, mainly in connection with Baal, though Smith notes they exist “to a lesser extent for asherah and the sun.”22 I take these comments from Smith and Day to their logical end, contending that polemics were a means of displaying appropriation, and advancing monotheism, not only for Yahweh’s appropriation of Baal’s characteristics but also for his appropriation of the domain of all other deities formerly worshipped in Israel and Judah.인신공양 문제를 둘러싼 명시적 논박의 또 다른 예는 예루살렘이 다른 신들을 형상화한 우상들을 조형한 행위에 대해 야훼가 강하게 질타하는 맥락 속에 등장한다. 에스겔 16장 20–2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너희가 나에게 낳아 준 아들들과 딸들을 데려다가 그들을 위하여 희생 제물로 바쳐 먹히게 하였도다. 네 음행이 아직 부족하더냐! 너는 내 자식들을 죽여 그들에게 넘겨주어 불사르게 하였도다." 또한 에스겔 20장 25–26절에서는 야훼가 이렇게 말한다.“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좋은 법이 아닌 율례들과, 그들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규례들을 주었고, 그들의 모든 맏아들을 불살라 제물로 바치게 함으로써 그들을 더럽혔도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경악하게 하고, 내가 야훼임을 알게 하려 함이었느니라.”여기서 인신공양이라는 주제(논박의 대상)와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드러내는 입장(논박의 태도)이 모두 명확히 제시되므로, 이 본문들은 명시적 논박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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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서에서 바알 숭배에 대한 격렬한 비난을 언급하면서, 데이(Day)는 이렇게 말한다. “논쟁은 때때로 적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이스라엘 종교는 다른 신들의 속성 일부를 야훼의 신격에 통합시켰다고도 언급한다. 스미스(Smith) 역시 “논쟁이 다른 신들을 거부하는 한편, 야훼가 바로 그 신들의 긍정적인 특성들을 체현하고 있다는 전제 위에 논쟁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논쟁은 단순한 비난 이상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데이와 스미스는 주로 바알과 관련해 이러한 논쟁적 본문을 언급하며, 스미스는 아세라와 태양신에 대한 논쟁도 “좀 더 약한 형태로나마 존재한다”고 본다. 나는 스미스와 데이의 주장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논리적으로 전개한다. 즉, 논쟁은 야훼가 단지 바알의 특성을 흡수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예전에 숭배되던 모든 신들의 영역을 차용하며 단일신 사상을 강화해나가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The research concluded that the Hebrews did practise child sacrifice to Yahweh in the early days. Even under the so-called good king Josiah, child sacrifice was an acceptable form of worship for the first 18 years of his rule (2 Kings 23:4-20). According to the text, Josiah found the Book of the Law in the 18th year of his reign. He read the Book of the Law and called for a reformation. This suggests that in the first 18 years of Josiah’s reign, the people were offering their children to their God as an acceptable form of worship. That implies that child sacrifice was an acceptable form of worship among the people until they read the law of Moses. This also reveals that even King Josiah was not aware that child sacrifice was not something acceptable to their God until he himself read it in the law. When they read the law, they realised the evil nature of child sacrifice and then Josiah removed the Topheth from the Valley of Ben Hinnom and from other places (2 Kings 23). According to the text, even the worship at the temple was polytheistic and syncretistic in nature,705 with Josiah then trying to insist on monotheism in this context. Whether or not this describes the actual historical situation in Josiah’s reign, it indicates that the biblical writers acknowledged a tradition of allowable child sacrifice and that the books of the law brought about a change in practice.
The writings and arguments of the biblical authors more reflect their own understanding of child sacrifice at the time of writing than any attempt to provide an objective history of the practice of child sacrifice and how it had been perceived by the people. They considered child sacrifice to be an abhorrent practice and thus the writers were trying to halt it by describing it as something alien to Israel. Yet they cannot deny that the sacrifice of children was practised in earlier periods and even continued at the time of writing. People thought of it as an acceptable form of worship to Yahweh. If child sacrifice had been recognised as syncretistic, Ezekiel would not have argued that ‘these are the laws given by their God to punish them.’ People were engaging in child sacrifice without any fear or reluctance because they regarded it as a traditional part of the cult of Yahweh. Perhaps it was surprising for the audience to discover that their normal form of worship was illegiti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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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uthors of the Hebrew Bible very successfully articulated stories about their founding father, deliverance from bondage and the great law giver Moses in order to emphatically oppose child or human sacrifice. They were also successful in introducing redemption and substitutionary theology to the religious system. Thus, the demand for the firstborn by Yahweh had a connection with child sacrifice in the pre-Hebrew Bible period, but was then opposed by its the authors. However, skilful reworking means that the demand itself should not be interpreted as a call for sacrifice, but rather as a call to stop the existing practice of child sacrifice. This ultimately resulted in the abolition of the practice among the followers of the Hebrew Bible.이 연구는 히브리인들이 초기에는 야훼에게 자녀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관습, 즉 자식 희생(child sacrifice)을 실제로 실행했음을 결론지었다. 심지어 이른바 ‘선한 왕’ 요시야 통치하에서도, 그의 통치 초기 18년 동안은 자녀 희생이 일반적이고 받아들여진 예배 형태였다(열왕기하 23:4–20 참조). 본문에 따르면, 요시야는 자신의 통치 제18년에 율법서를 발견하게 되며, 이를 읽은 후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는 요시야가 율법서를 읽기 전까지는 자식 희생이 백성들 사이에서 야훼에게 드리는 정당한 예배의 형태로 여겨졌음을 시사한다. 즉, 모세의 율법을 읽기 전까지는 자녀 희생이 비난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통적 예배 방식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요시야 왕 본인조차도 자녀 희생이 야훼에게 부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가 율법서를 읽고 나서야 이 희생이 악하다는 것을 인지하였고, 이에 따라 요시야는 힌놈 골짜기(게헨나)의 토펫(Topheth) 및 기타 제의 장소들을 제거하였다(열왕기하 23장). 본문에 따르면, 성전 내 예배조차도 다신적(polytheistic)이고 혼합주의적(syncretistic)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며, 요시야는 바로 이 혼합주의적인 종교 형태를 배제하고 참된 야훼 숭배(일신론적 예배)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 내용이 실제로 요시야의 통치 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 성경 저자(예언자)들이 자식 희생을 허용하던 전통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율법서들이 도입됨으로써 그 관행에 변화가 생겼음을 나타낸다.
성경 저자들의 글과 논증은 자식 희생에 대한 그들의 동시대적 이해를 더 잘 반영하고 있으며, 자식 희생의 역사나 그것이 백성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성경 저자들은 자식 희생을 혐오스러운 관습으로 간주했고, 이런 이유로 그들은 이 관습을 이스라엘의 것이라기보다는 외래적인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중단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자식 희생이 과거에 실제로 시행되었으며, 그들의 저술 당시에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한다. 당시 사람들은 자식 희생을 야훼께 드리는 정당한 예배 방식으로 여겼다. 만약 자식 희생이 혼합주의적(이방 종교와의 혼합) 행위로 여겨졌다면, 에스겔이 “이것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주신 율례들로써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식 희생을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실행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야훼 종교의 전통적인 예배 요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일상적인 예배 방식이 부정당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당시 청중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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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의 시조(아브라함), 이집트에서의 해방, 위대한 율법제정자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능숙하게 구성하여, 인신 제사(특히 자식 희생)에 강하게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또한 ‘속전’(구속 개념)과 ‘대체 제물’ 신학을 종교 체계에 도입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따라서, 야훼가 맏아들을 요구했다는 명령은, 히브리 성경 이전 시대의 자식 제사 관행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었지만, 히브리 성경의 저자들은 이 관행을 명확히 반대했으며, 이를 능숙하게 재구성함으로써 그 요구(맏아들을 바치라는 명령) 자체가 제사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자식 희생을 멈추게 하기 위한 요청이었다는 식으로 해석되도록 했다. 결국 이는 히브리 성경 공동체 내에서 자식 희생이라는 실천이 폐지되는 결과를 낳았다.
성서가 고대 세계의 다른 종교 문서와 구분되는 지점은 그것이 마르둑, 바알, 제우스 등과 같은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성서의 독특한 주장은 야훼가 모든 다른 신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데에 있다. 즉 야훼는 (다른 신들보다) 무한히 강하다. 따라서 유일신교는 다른 모든 존재들에 절대적 주권을 가지는 최고 신에 대한 믿음이다. 다른 모든 존재들에는 하늘에 거처를 두는 불멸의 존재들도 포함한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최고 신에게 종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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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텐과 야훼 유일신교가 “혁명적”으로 불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유일신의 신성을 추상적으로 재정립하고 다른 신들의 제의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텐 종교와 야훼 종교가 그런 혁명적 성격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것들이 발생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으로 소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고신교와 같은 포용적 유일신교도 정치 사회적 조건에 반응한 다신교의 특수 형태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유일신교의 발생에는 정치 사회적 조건들에 반응한 사상가들의 개성이나 종교적 창의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굳이 비교한다면, 아텐 종교보다 이스라엘의 야훼 종교가 좀더 특수한 현상처럼 보인다. 유일신 사상이 국력의 정점에서 도출된 다른 유일신교들에 비해 이스라엘의 유일신교는 국가가 망한 상황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인 그룹이 협업한 결과라는 점도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유일신 사상을 꾸준히 문서화한 것(요시아의 신명기 율법, 신명기 역사서, 선지서 편집, 제사장 문서)이 야훼 유일신 종교가 다신교 사회에서 생존해 오늘날 까지 영향을 주는 결정적 이유인 듯 하다.https://irec.study/assets/files/IREC-conf2024-proceedings-final.pdf
이를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초기에는 야훼가 초월적 속성을 지닌 신으로 여겨지면서도, 이스라엘이 형성되던 시기에는 몰렉, 바알, 아세라 등 토착 다신교적 신앙과 융합되어 인신공양이 실천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식인 계층인 예언자들은 야훼를 점차 '우주를 창조한 초월적이고 법칙적인 신'으로 도덕화하였고, 이를 근거로 인신공양을 강력히 비판하고 반대하였다. 그들은 모세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근거로 삼아 왕과 백성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요시야 왕 시대에 이르러 인신공양은 부도덕의 상징으로 격하되며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동시에 이 과정은 도덕적 권위와 제사권의 독점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작용하였다.
흥미롭게도 이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공자와 유학자들이 당시 성행하던 순장 등 인신공양 풍습을 강력히 비판하고, 결국 이를 폐지한 장기적인 역사적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유교에서의 '천(天)' 개념 역시 초기에는 '왕실 조상령들의 집단적 질서'를 의미했으나,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성현(聖賢)들의 혼백(魂魄)과 융합한 우주의 윤리적·도덕적 질서'로 추상화·도덕화되었고, 이것이 인신공양 폐지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신공양의 흔적은 현대 튀르키예의 자외뉘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기원전 6천 년대의 흔적이라고 추정한다.
카르타고로 대표되는 동지중해의 페니키아 지역은 바알, 다곤, 그모스, 몰렉을 숭배하면서 인신공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몰렉은 페니키아인들이 믿는 유력한 신이었는데 폭풍과 풍요의 신이던 바알-함몬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페니키아 문명은 동지중해의 해양성 기후 속에서 무역과 해양 활동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국가형 문명으로, 일반적인 제사는 곡물, 향, 동물 등을 바치는 고대 근동형 다신교 체계를 따랐다. 그러나 특정한 맥락에서는 인신공양, 특히 유아 희생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고대 사료와 고고학에서 제기되어 왔다. 성경과 그리스·로마 작가들은 페니키아인, 특히 당시에는 식민지 카르타고에서 몰렉 또는 바알에게 아이를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가 행해졌다고 기록하였고, 카르타고 유적지에서는 유아의 뼛조각과 ‘토펫'이라 불리는 제사 공간이 발견되었다. 전쟁, 가뭄, 국가 위기 시에 자식을 바쳐 신의 분노를 진정시켰다고 해석된다.
페니키아, 특히 카르타고에서 발생한 유아 희생은 서지중해에 비해 불안정한 기후로 인해 형성된 신과의 '계약적·조건적' 관계와 더불어, 전쟁과 기근 같은 극단적 위기 상황에서 비롯된 대응적 제의였다. 또한 가문 중심 사회의 강한 명예 의식과 도시국가 체제 하에서 종교적 권위가 사회를 통제하는 구조가 맞물리며 이러한 관습이 유지될 수 있었다. 바알이나 몰렉 같은 신은 인간에게 생명과 보호를 주는 대신 가장 귀한 제물을 요구한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거나 전쟁에서 도시가 포위당하는 등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식을 바치는 행위는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위한 신성한 의무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단, 카르타고의 유아 인신공양은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것이 일상적인 제사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현대 학계에서는 주로 전쟁, 기근, 포위 등 극단적 위기 상황에서 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시행된 특수한 의례였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토펫 유적의 유골 분포와 정비된 비문 등을 근거로 정기적 제사였다고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고대 문헌은 인신공양이 도시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귀족 가문 중심으로 이루어진 비상 의례였다고 전하며, 이는 신과의 계약적 신관과 공동체 구원을 위한 희생 개념에 뿌리를 둔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페니키아인들은 몰렉에게 인신공양을 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기록에는 이 제사가 매우 무시무시하게 묘사되었는데, 몰렉은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신상 형태였고, 양팔은 마치 제물을 받기 위한 손바닥을 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상의 내부에는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가 있어, 신체 전체를 붉게 달군 후 그 손 위에 갓난아이, 특히 맏아들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불에 달궈진 금속 위에 놓인 아이는 타 죽으며 손에서 미끄러져 아궁이로 떨어졌고, 이때 아기의 비명과 부모의 울부짖음을 덮기 위해 의도적으로 북을 크게 울렸다는 전승도 남아 있다. 다만 이러한 묘사는 주로 로마와 그리스 사가들의 기록에 기반한 것으로, 실제 의식이 이처럼 연극적이었는지는 학계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풍습은 페니키아의 식민지 도시들에도 전승되었고, 특히 고대 카르타고에서는 전쟁과 재난 같은 극단적 위기 상황에서 인신공양이 다시 수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사료에 따르면, 카르타고가 전투에서 대패했을 때 처음에는 평민과 노예 계층의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지만, 효과가 없자 귀족 계층의 자식들을 제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부 문헌은 그 수가 최대 300명에 달했다고 전하나, 실제 수치는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카르타고 유적에서 발견된, 상기한 토펫이라는 제사 공간에서는 수천 구의 유아 유골과 함께 몰렉이나 타니트 신에게 바쳤다는 비문이 다수 발견되어, 이 전통이 단순한 전설이 아닌 실제 종교 의례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이는 이 모든 유아들이 모두 인신공양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유아 장례와 종교적 인신공양이 뒤섞인 복합적 성격의 공간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현재 다수설이다. 유골 옆에 새겨진 비문에는 "신에게 바친다", "서약을 지켰다"는 문구가 반복되며, 일부 유골에서 불에 탄 흔적이 발견되는 등 실제 의도적 희생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높은 유아 사망률과 반복된 종교 장례 관습이 중첩되었을 수도 있어, 단순한 희생 제사장이 아니라 종교적 장례와 희생이 공존한 의례적 장소로 보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균형 잡힌 해석이다. 즉, 평상시에는 자연사한 유아들을 신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매장하고, 전쟁이나 재난 같은 위기 시에는 실제 인신공양이 이루어진 공간으로 평가된다.
또 카르타고의 토펫은 주로 귀족 가문이 자신의 유아를 종교적 서약과 명예의 표시로 바친 장소였다는 고고학적 해석이 우세하지만, 상술한 전승은 특수한 위기 상황에서의 정치적·종교적 판단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평상시의 가뭄과 전염병 등 일반적 위기에서 토펫 희생은 귀족의 자발적 헌납 중심이었지만, 외적에 의해 도시가 멸망할 대규모 위기 상황에서 유아희생을 큰 규모로 치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자 정치 권력까지 혼란에 빠지면서 평민 자녀를 먼저 희생시켰다가, 신의 응답이 없다고 판단되어 귀족 자녀의 희생으로 전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은 귀족층 내부에서도 논란과 갈등을 낳았을 가능성이 크며, 후대 사가들이 이를 도덕적 교훈이나 잔혹성의 상징으로 강조해 과장해서 서술했을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모순된다기보다, 일반적 제사의 전통 구조와, 비상시의 집단적 종교·정치적 반응이 병존한 사례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접근이다.
페니키아인들의 이러한 풍습은 로마인들이 3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의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급하는 소재이기도 했다. 즉, '이런 악독한 민족은 멸망당하고 노예로 팔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다. 물론, 정작 고대 로마 역시 특정한 역사적 위기 상황에서는 예외적으로 제의적 인신공양 또는 인신 희생에 준하는 의례를 실행한 기록이 존재한다.
고대 로마에서도 초기에는 인신공양 풍습이 존재했다. 특히 풍요와 질서를 상징하는 신 사투르누스(Saturnus)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전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흉년, 전염병, 전쟁과 같은 집단적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신의 은혜를 구하고자 했던 보편적인 종교적 관습의 일환이었다.
다만 위의 '종교와 기후의 관계'에서도 서술되어 있듯, 로마와 같은 서지중해 사회는 비교적 온난한 기후로 인해 제도적 인신공양이 상대적으로 드물었으며, 따라서 다른 지역처럼 이를 명예화하거나 체계화하는 전통도 발전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로마의 인신공양은 제의적 관습이라기보다 제한적이고 비일상적인 행위로 남았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 로마의 인신공양은 제도화된 관습이라기보다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운 강제적 성격을 띠었으며, 주로 전쟁 포로나 외부인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가 한니발 바르카에게 대패했을 당시를 들 수 있다. 패전 이후 원로원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특별한 인신공양 의식을 시행했는데, 그리스인 남녀와 갈리아인 남녀 각 두 명씩을 포로로 잡아 포룸 보아리움(Forum Boarium) 인근 지하에 생매장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는 포로를 "외래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간주해 신들의 도움을 청하는 의례였다. 이 의식은 포로들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에게 바치는 '특별한 속죄 제물'의 의미를 가졌으며, 포로들은 일종의 국가적 의례의 일부로 강제로 희생된 것이다.
또한 로마 공화정 말기에 벌어진 킴브리 전쟁(Cimbrian War, 기원전 113~101년)에서도 인신공양을 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는 당시 게르만족 킴브리인과 테우토니족의 대규모 이동으로 촉발된 일련의 전쟁으로, 로마군은 초기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전례 없는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기원전 105년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은 약 8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는 대참사를 겪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로마인은 신의 분노로 인해 재난이 임했으며, 이를 달래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 포로를 사용한 인신공양을 선택했다. 그들은 이베리아인, 갈리아인, 리비아인 남녀 각 한 명씩, 총 네 명을 포로로 잡아 도시 중심의 신성한 장소에 묻는 등의 생매장 방식으로 실행했다. 이러한 로마의 '포로 생매장 의식'은 신의 도움이 절실한 비상시기에만 허용된 형태의 인신공양 제례였다고 추정된다. 해당 의식은 포로의 자발성과 무관하게 제물로 희생시킨 강제적 행위였으며, 제물들은 패전 상황에서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한 '특별 희생'으로 선택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로마가 이런 인신공양을 할 때 제물의 '합법적 소유권'을 갖추기 위한 형식적 절차를 밟았다는 것이다. 즉, 의식 전에 포로를 '구입'하는 절차를 거쳐 그들을 공식적으로 '국가의 소유물'로 만든 뒤 신에게 바쳤다. 다만 이는 제물에게 실제 보상을 주기 위한 것은 아니고, 로마 특유의 법치주의 전통 속에서 법적·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형식의 일종이었다. 따라서 로마의 인신공양은 서지중해적 온난 기후와 비교적 안정된 생태환경 속에서 제도화된 명예 의식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시행된 강제적이고 일회성인 의례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 사회 역시 인신공양을 점점 상징적 제사로 대체했다. 예를 들어 죽은 자의 혼을 달래는 제사인 레무리아(Lemuria)는 초기에는 실제 인간 희생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동물, 콩, 밀랍 인형, 곡식 등을 제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또 다른 형태에서는 젊은 남녀를 가죽이나 짚으로 만든 인형(Argei)처럼 대체하여 제물로 바치는 방식도 있었다. 이러한 인형들은 종교 의례 속에서 비밀스럽게 티베르 강에 던져지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인신공양의 실질적 행위를 상징화하여 이어간 셈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기원전 97년, 로마 원로원은 인신공양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칙령을 제정했다.
한편, 초기 로마의 검투 경기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종교적·희생제적 성격을 띠는 의례였다. 기원은 로마 이전의 에트루리아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에트루리아인들은 전사 계급의 명예와 조상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장례 의식의 일부로 검투 경기를 열었다. 전사들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치는 행위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신성한 제의로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제의에 희생되는 포로 전사들 또한 일정한 명예를 보장받았다. 이러한 제사 방식은 이후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로마 역시 이를 수용했으며, 공화정 초기에는 검투 경기가 주로 전쟁 포로나 범죄자를 희생 제물로 삼아 진행되었다. 에트루리아 전통에서 포로를 존중하는 관습은 로마 시대로 오면서 다소 약화되었지만, 검투 경기에서 패배한 자의 죽음과 흘린 피는 여전히 신과 조상에게 바치는 제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검투 경기는 단순한 오락이나 피의 유희가 아니라, 전쟁 승리를 기리고 신에게 감사하는 의미를 담은 국가적·종교적 행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와 제정 로마에 접어들면서 검투 경기는 점차 성격이 변질되었다. 원래의 장례 의식적 의미는 희미해졌고, 황제와 정치가들은 대규모 경기장에서 열리는 검투 경기를 대중 선동과 권위 과시의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뿐 아니라 노예, 범죄자, 심지어 기독교인과 자유민까지 검투사로 동원되었고, 검투 경기는 점차 제사에서 대중 오락으로 전환되었다.
즉, 검투 경기의 기원이 에트루리아의 종교적 제사였으며, 초기 로마에서도 전쟁 포로나 범죄자를 희생제물로 삼는 종교적 의례였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로마 제정기에 들어서면서 검투 경기는 종교적 의미를 상실하고 정치적 선전과 대중 오락의 장으로 변화했다는 점 역시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 상무적 성격의 로마 사회 내에서는 장군의 명예로운 자발적 희생, 즉 devotio 의례도 존재했다. 이는 일반적 인신공양이 아니라 장군이 자신의 목숨과 적군 전체를 하데스에게 바치겠다는 서약의 의미로, 자신과 적을 국가를 위한 제물로 여긴 고결한 행위로 여겨졌다.
게르만족에서도 인신공양을 행한 기록이 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족 전사들에게 습격당해 궤멸당한 바루스 예하 로마군 3개 군단의 포로들 가운데 장교급 인물들의 해골들은 예외 없이 나무에 꽂혀 있었는데 이들은 게르만족의 부족들에게 붙잡힌 뒤 산 채로 나무에 꽂혔다는 목격담을 전하였다. 9세기 무렵 프랑스를 침략한 바이킹들도 붙잡은 포로들을 모두 나무에 매달아 죽였는데 이는 전쟁신 오딘에게 바치고자 일부러 인신공양을 한 흔적이었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독일의 슈토름이 쓴 <백마의 기수>에는 사람 대신 강아지를 제방에 묻으려다 주인공의 제지로 구해지지만 인부들은 영 못마땅해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방 같은 걸 세우려면 인신공양은 아니더라도 생명 하나 정도는 바쳐야 한다는 풍습의 반영으로 읽히기도 한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제6권의 16절에 켈트족이 나무를 엮어 만든 거대한 사람 모양 우리에 사람과 가축 등을 집어넣고 불에 태웠다는 내용이 언급된다.[1] 저 기록을 기반으로 1973년 위커맨이란 영화가 개봉했다. 근세에 이르러 고대 켈트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과 동시에 당시의 인신공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상상도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카이사르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1세기에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도 켈트족의 인신공양 풍습을 저서에서 짤막하게 언급했다. 다만 사람을 나무인형에 넣고 태우는 방식의 제사가 있었는지는 로마 측의 언급 외에 묘사나 증거가 일절 없다시피해서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슬라브족, 발트족도 기독교가 전래될 때까지 성숙한 처녀나 청년들을 대지나 풍요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 풍습을 유지했다. 이를 토대로 제작된 발레가 봄의 제전이다.
유럽에서 과거에 실제로 인신공양을 하였다는 구전설화들 중에는 과거 이민족에게 당한 납치나 약탈 등을 비유하거나 은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폴란드의 도시 크라쿠프의 건립과 관련하여 '바벨의 용' 전설이 있다. 옛날 그 땅을 그락(Grakch)이란 임금이 통치하였는데 그락 시절 바벨 언덕 아래 동굴에는 무시무시한 용(Smok Wawelski)이 살았다. 이 용은 매일 기어나와 집을 파괴하고 가축들을 잡아먹었는데 이 용을 달래기 위해 왕은 어쩔 수 없이 용이 좋아하던 처녀들을 용에게 제물로 바쳤으먄서도 전국의 용사들에게 용을 물리치는 자에게 큰 상을 주고 공주와 결혼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용사들이 용을 상대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쿠바(Skuba)라는 신발 제작공이 임금을 찾아와 양가죽과 유황을 부탁했다. 스쿠바는 유황을 양가죽에 넣고 용의 동굴 앞에 두었다. 용이 동굴에서 나와 이것을 잡아먹자 엄청난 갈증과 고통이 엄습했다. 그래서 동굴 앞에 있던 강물을 허겁지겁 퍼마셨는데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그만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한다. 왕은 약속대로 신발장이에게 공주와 결혼을 허락했고, 그 뒤 스쿠바는 장인의 이름을 따 크라쿠프라는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2] 이 이야기가 암시하듯 초기에 이 마을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현재의 해석으론 이 이야기의 용은 6세기 후반 이 일대를 침입했던 아바르 칸국을 상징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3]
참고로 이와 비슷한 처녀를 용, 뱀, 지네 등에게 바치는 구전 전승은 동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에도 흔하다. 대개 유럽이나 동아시아의 인신공양 설화는 주인공이 괴수를 무찌르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과 다르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소닝케족의 인신공양 설화에서 보듯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근세까지 인신공양 풍습이 존재했다. 물론 아메리카 대륙은 현생 인류가 정착한 시기와 고대국가 수준의 사회 체계가 형성된 것이 유라시아 대륙보다 훨씬 늦었음은 염두에 둬야 한다.
특히 메소아메리카에서 인신공양은 보편적인 풍습이었다. 이런 경향은 중남미 문명을 한 번 리셋시킨 거대한 가뭄 이후 급격히 늘어났는데 가뭄으로 말미암은 기근의 공포가 인신공양을 지속하게 한 요인이었던 듯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선 대형 가축이 전무했다. 따라서 재해에 대비하여 신에게 바칠 만하다고 여겨질 게 인간밖에 없었기에 인신공양이 1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말과 낙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1만여 년 전에 멸종했고 가축이라고 해봐 야 토끼, 칠면조, 개 정도였으며 남미 한정으로는 라마와 알파카가 전부였다. 단적으로 라마와 알파카라는 대형 초식동물을 가축화하는 데 성공한 잉카 제국은 근세까지의 아메리카 대륙 국가들 중에선 인신공양의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잉카 제국은 선택된 대상을 절벽에서 떨어뜨려서 신에게 바치는 방식을 사용했다.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는 카파코챠(capacocha)라는 의식도 있었는데 요한 라인하르트(Johan Reinhard) 등 학자들이 미라를 연구하여 여러 가지가 알려졌다. 1년에 2명 정도씩 성스럽다고 여겨진 산꼭대기 제단에서 어린이들을 교살하거나 둔기로 머리를 강타해 죽이거나 잔뜩 취하게 한 후 산 채로 파묻는 방법으로 살해했으며 취하게 한 후에 산꼭대기 제단에 그대로 방치하여 얼어죽게 하기도 했다.
1999년 아르헨티나 룰라이랄코 화산에서는 잉카 제국 시기 제물이 된 걸로 추정되는 어린이의 미라 3구가 발견되어 연구가 크게 진척되었다. 해당 미라들을 연구한 결과, 미라들에게 다량의 알코올, 마약 성분과 평상시에는 영양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지만 사망하기 얼마 전부터 상류층들이 먹는 것과 같은 식사를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하층민 아이들을 제물로 선택하여 한동안 매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게 해 주었으며 공양의 순간에는 취하게 만들었다고 추측된다. 미라들의 머리카락이 짧았는데 잉카에는 신분이 바뀌면 머리카락을 자르는 관행이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제물로 선택된 뒤 신분이 상승한 것 같다.
미라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15세 가량 소녀의 미라에서는 다른 미라들에 비해 매우 많은 알코올과 마약 성분이 발견되었는데 죽기 직전이 아니라 무려 1년쯤 전부터 복용한 것이었다. 다른 제물들은 어려서 몰랐지만 이 소녀는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았고 소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유독 많은 알코올과 마약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마야 문명에서는 국왕이 자신의 위엄을 높이고 신의 존엄을 드러내고자 스스로 출혈을 하거나 혀에 구멍을 뚫는 식으로 자해했다고 한다.[4] 건장한 전사들을 뽑아 3kg 남짓한 무거운 고무공을 허리와 허벅지로 쳐 내는 마야 공놀이(pitz)를 하고 그 선수를 제물로 바치곤 했다. 인터넷에서는 패자를 제물로 바친다거나 승자를 제물로 바친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승패에 관련 없이 제물로 찍힌 쪽을 바쳤다고 한다. 마야 유적지에는 마야 공놀이를 하는 장소와 함께 이들을 인신공양한 연못(Cenote)을 발견할 수 있다. 마야의 공놀이에서 공양된 사람의 숫자는 제물의 머리로 벽을 쌓을 정도였다.[5] 이런 사혈 의식은 신대륙 다른 지역과 고대 문명에서 흔한 형태의 의식이었다.
북아메리카의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선 중남미의 마야나 아즈텍, 잉카에 비해 인신공양은 적었지만 미시시피 문화권 대도시에는 제례 목적의 희생 및 순장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평원에 살았던 포니족[6] 등 일부 부족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인신공양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한 인신공양 관련 다큐에 따르면 흙을 쌓아 만든 거대한 산 모양의 제단에서 행했다. 제물로 선택된 인간은 말뚝에 묶인 채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이때 흘러내린 피가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희생자를 곧바로 처형하지 않고 몸 곳곳에 화살을 쏘아 고슴도치로 만들며 천천히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급소를 맞혔다. 이들이 인신공양을 행하던 제단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사실 토목공사판엔 인신공양류 루머도 제법 있는 편인데, 기술이 발전하고 노동자 안전에 대한 관심이 훨씬 커져 이전 시대에 비해 사망자가 크게 줄어든 현대에도 토목 판에는 간간히 희생자가 나오고 다양한 루머와 미신들이 존재하는 마당에 근대 이전엔 더 심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이게 여러 억측과 겹쳐서[7] 이런저런 인신공양류 루머로 발전한 것 아니냔 말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즈텍 제국/인신공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국에서는 희생의 제물로 사람을 쓴 적이 있는데 사람을 팽(烹)[8]하거나 칼로 죽여 그 피를 희생의 제물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상나라 시대에는 주변국에서 포로를 잡아 인신공양을 하는 일이 팽배했고 상나라 건축물 유적지에는 건물의 안정을 기원하고자 기둥마다 사람 머리를 수십 개씩 묻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상나라의 왕묘 유적에는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나서 제물의 뼈를 파묻은 흔적인 제사갱이 발견되는데, 이런 제사갱에서도 다량의 인골이 발굴됐다.[9] 사마천이 사기에서 전하는 상 왕조 마지막 왕인 주왕(제신)이 달기와 함께 행했다는 포락(불에 달군 쇠기둥)이니 돈분(뱀구덩이)이니 하는 갖가지 해괴한 형벌들이 상의 인신공양 풍습을 설화적으로 각색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상나라의 멸망 원인은 인신공양으로 인해 원한이 쌓인 주변국의 불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蔡, 難 등 몇몇 한자는 인신공양의 풍습에서 유래한다고 추측한다.
순장 풍습도 있었는데 금지와 부활이 반복되다 청나라 중반기 대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사라졌다.[10] 물론 순장을 악습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공자도 순장[11] 풍습을 천벌받아 자손이 끊어질 일이라고 저주했고, 춘추전국시대 인물인 서문표가 인신공양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착취하는 무당과 지배세력을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인신공양을 하던 강물에 던져넣어 인신공양 풍습을 없앤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중국 사회에서도 오래 전부터 지식인들은 이를 혐오하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한족 이외에도 거란족, 만주족 등 순장 풍습을 유지하고 있던 유목민족들이 계속 유입되어 쉽게 없어지지 않은 듯하다. 물론 이는 순장이라는 풍습이 지닌 의외의(?) 정치적 유용함도 한몫했다. 순장 항목 참조.
오죽하면 당태종이나 당현종의 치세에도 "궁을 짓는데 어린 남녀를 기둥 밑에 묻어서 압승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서 사람들이 집집마다 자식을 숨기는 지경에 이르렀고, 황제가 이를 알고 불쾌하다며 관에 명령해 엄금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이런 동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고전적 토착 인신공양 풍습이 외래 종교인 대승 불교와 오랜 기간 결합하여 동아시아 대승 불교 내에서 독특한 풍습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런 풍습들 중 하나를 소신공양이라고 한다.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광범위하게 전해지는 불가 승려들의 자기 희생 설화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인신어공(人身御供(ひとみごくう), 히토미고쿠)라고 부르는데, 御供은 공양할 때 바치는 공양물을 의미한다. 고대까지 일본에서는 '히토바시라(人柱)[12]'라 하여, 큰 공사인 성 쌓기, 다리 놓기 등을 할 때 사람(주로 포로나 하층민들)을 산 채로 묻거나 기둥에 묶어 화장시키거나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닌 덴노 재위 28년(기원전 2년?)에 천황이 직접 순장을 금한다는 지시를 내렸다는[13] 기록이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고대에는 순장이 자주 이뤄진 것으로 보이며, 실제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를 보면 247년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망하니 무덤을 크게 만들었는데 지름이 100여 보이고, 매장된 노비가 백여명이었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다 중세와 근세를 거치며 고대부터 이어진 순장 금지령과 불교, 유교의 도입, 그리고 국가에 의한 법치 체제가 강화되며 비인격적, 미신적 제도도 점차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신공양을 없애고자 정치가들도 애썼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12세기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송나라와 교역하려는 거점으로 삼고자 지금의 고베에 신도시 후쿠하라를 건설하면서 앞바다에 인공섬 쿄가시마(経が島)라는 섬을 조성할 때 매립공사가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아서 오래된 미신에 따라 동자 서른 명을 제물로 바다에 던져서 공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키요모리는 '사람 먹고 살자고 하는 공사인데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불경을 적은 돌을 매립부지에 던져넣어서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도쿄 천황 거처인 황거(옛 에도 성)의 입구에는 1628년에 세운 망루인 후시미야구라(伏見櫓)가 있었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수리하고자 성문 아래를 파냈는데 1925년 6월에 시신 16구가 발견되었다. 당시 풍문에 따르면 시신은 똑바로 선 상태에서 머리 위에 옛날 동전 한 닢씩을 얹은 채 묻힌 기괴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전술한 '히토바시라'로 바쳐진 시신이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지자[14] 이에 궁내성은 도쿄제국대학의 문학박사 쿠로이타 카츠미(黒板勝美) 교수에게 조사를 의뢰하였는데 조사 결과 '시신이 똑바로 서 있지도 않았고 여러 가지 요소들을 봤을 때 그냥 옛날 무덤의 흔적'이라는 결론이 나와 발견된 시신을 수습하고 일을 마무리했다.
구체적인 조사 결과 및 현재의 학설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사찰 경내에 무덤을 쓰기도 하는데 16세기 말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 성을 접수하고 거대하게 확장할 적에 해당 부지에 있던 신사와 사찰들을 이전시켰는데 이들이 이전하면서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은 무덤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덤들을 관리하던 사찰이 사라지고 시간이 흐르자 이 무덤들의 존재가 잊혔고 후대에 이를 모르고 평탄해진 무덤들 위에 망루를 지었다고 한다. 인신공양을 금지하고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에도 막부가 히토바시라를 썼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이들이 히토바시라였다는 것은 오늘날 부정된다. 이처럼 인신공양의 흔적임이 부정되었지만 우연의 일치로 후시미야구라에서 시신이 발견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두고 두고 남아 '인신공양 아니었겠느냐.'는 도시전설로 이어진다.
1970년 조몬 신호장 근방의 유명한 심령스폿 조몬터널의 벽 내부에서 똑바로 선 시신이 발견되어[15] 히토바시라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더 나아가 다이쇼 시대까지도 야만적인 인신공양 풍습이 남아있었냐는 논란이 발생했지만, 진실은 현장 감독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삽으로 때려죽이고 본보기 삼아 시체를 벽에 세워둔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이후 조사에서 이렇게 가혹한 강제노동의 희생자의 유해를 10구 더 수습하였다고.
한반도 측 기록 중 중세 일본인들의 인신공양에 관련해 언급하는 고려사 변안열 열전 기록이 있다. 고려 말 고려를 침공한 왜구가 1380년 진포 해전으로 고려 해군에 의해 돌아갈 선박을 망실하자 육지로 피신해 내륙을 휩쓸던 와중에 두 세 살 정도 된 여자아이를 죽이고 배를 갈라 그 시체를 씻어서 뱃속에 쌀을 넣고 제사를 지낸 후 그 쌀을 먹고 점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통해 고대 한국의 인신공양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부여에는 흉년이 들었을 때 왕을 죽이는 인신공양 풍습이 존재했고, 가야에는 권력자가 사망했을 때 하인 등을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이 있었으며[16] 신라도 순장 풍습이 존재했다. 그러다 신라는 지증왕 때인 6세기 초반에 법으로 순장을 금지했고, 6세기 중반 진흥왕 때 가야를 정복하면서 가야 일대도 순장 풍습이 사라진다.[17]
2000년에 현 국립경주박물관 터를 발굴하면서 남북국시대의 신라 왕실에서 직접 관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에서 아이의 뼈가 발굴되었다. 아이가 사고로 죽은 뒤 폐쇄된 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학자들은 우물에서 발견된 동물의 종류가 15종이라는 점, 밑에 함께 묻힌 토기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점, 가장 위쪽에 아이의 인골이 엎어져 있던 점, 인골 위에 바로 덮인 우물 상석과 그 위를 흙과 자갈로 매립한 흔적이 남아 있는 점, 아이가 우물에 빠졌음에도 그 시체를 건져내지 않은 점을 들어 인신공양을 행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언제, 무엇을 목적으로 인신공양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해당 내용을 다룬 KBS 역사스페셜 영상
2017년에는 경주 월성 터에서 성벽 아래에 묻힌 인골 두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같이 묻힌 제사용인 듯한 토기나 인골의 위치 등을 보아 일본, 중국처럼 인주(人柱)를 한 사례라고 추정한다. 만약 인주가 맞다면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사례. 신라시대 인신공양의 흔적은 2021년에도 추가로 발굴되었다. # 발굴조사 결과 월성의 축조시기가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어 6세기 지증왕 때 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과 모순되지 않는다.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은 전설에서도 종을 만들기 직전 쇳물에 살아있는 아이를 넣고 만들었다는 인신공양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적인 조사 결과, 인체와 관련된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사실 생명을 중요시하여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서 종을 만들기 위해 살아있는 아이의 희생을 승려가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다. 실제로 쇳물에 아이를 넣으면 잔혹성을 떠나 불순물이 섞여 제대로 주조되지 못하고 금이 가거나 심하면 깨졌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에 쓴 소설 내용이 잘못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삼국시대 후기부터는 지배 계급이 순장을 포함한 인신공양을 적극적으로 금지했고, 만약 걸리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하게 처벌했다. 고려 중기 이후로는 불교와 유교가 자리잡으면서 민간에서도 인신공양은 천벌받을 악행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된다. 고려시대 들어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신공양이 사라졌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악인 권력자들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인신공양을 한다는 소문으로 떠돌게 된 듯하다. 대표적인 일화로 고려의 권신 최충헌이 집을 지을 때 어린아이들에게 오색 옷을 입혀서 네 귀퉁이에 묻어 재앙을 피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백성들이 두려워 아이들을 숨겼고, 최충헌은 놀라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방을 붙여 소문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권력자를 비난하는 유언비어 중 하나가 '왕이 궁을 짓는데 기둥 밑에 어린아이를 잡아다 묻는다 하니 아이가 있는 사람은 멀리 도망가야 한다.'였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일반 백성까지 인신공양을 끔찍한 악습으로 받아들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민간에서 인신공양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조선 전기 문신 신숙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오는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자 뱃사람들이 해신의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면서 어린 여자를 바다에 산제물로 바치려고 하자 신숙주가 못하게 막았다고 쓴 기록이 있다. 해당 내용은 민간에서의 잡담 및 만담을 모은 야사집인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있는 기록으로 신빙성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당대 민간에서 이런 설화가 떠돌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이뤄졌다고 해도 이는 전근대 국가의 한계로 통제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특수한 사례일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강계군 곡하면에는 여진족이 처녀를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냈다는 옛터인 인제원(仁濟院)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18]
인도에서는 과부를 불살라 죽이거나 본인이 뛰어드는 사티라는 인신공양이자 악습이 힌두 사회에서 꾸준히 반복되어 금지와 부활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근현대 사회 들어선 많이 줄어들었지만, 21세기에도 관련 기사가 종종 뜰 정도로 질기게 남아있는 풍습이며 19세기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이 배경인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도 관련 묘사가 나올 정도다.[19] 여담으로 인도의 마피아라고 할 수 있는 범죄 조직 터기는 무굴 제국 시절 칼리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여행객들을 살해하던 광신도 집단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금품을 노린 노상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죽음의 사원 편이 터기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인신공양하는 광신도들이 믿는 신도 칼리다. 심지어 현대에도 인신공양 사건은 오지에서 꾸준히 발생하고 있으며,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총 103건의 인신공양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2019년에도 여성을 마체테로 참수한 뒤 종교 의식을 치른 사건이 발생했으며,[20] 2022년에는 오지도 아니고 수도인 뉴델리에서 어린아이를 죽이고 제물로 바친 일당 2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
네팔에서는 쿠마리라는 어린 여자아이를 여신의 화신으로 바치는 풍습이 존재한다.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인신공양의 범주 안엔 든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월경이나 상처 등 피를 흘리게 되어 은퇴한다면 이후로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는 등 어느정도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엄연한 일종의 아동 학대라서 선진국에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쿠마리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개선이 이뤄지고 있으며, 쿠마리들도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의 쿠마리만 제외하면 자유롭게 사는 편이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불교, 유교에서는 모두 인신공양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이 종교들의 초기 역사는 인신공양 타파와 도덕적 인식 개선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에서도 설명하지만 소신공양 및 순교는 인신공양으로 치지 않는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인신공양에 대한 혐오가 어마어마하다. 오죽하면 고대 근동, 유럽, 아즈텍 등 여러 지역의 인신공양 근절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겠는가? 구약에서도 인신공양의 예가 언급되면 기본적으로 비판하고 혐오감을 드러내며 非이스라엘인 이민족을 비난하는 데 자주 쓰이는 레퍼토리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술한 대로 유대교가 초기 다른 근동 다신교와 완전히 분리되기 전에 교리에 무지한 평신도들이 타 신들에게 바치던 방식으로 인신공양을 벌인 흔적이 있긴 하다.
예외적으로 야훼에 대한 인신공양이 묘사되는 경우가 있는데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확인하기 위해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인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내용[22]이 대표적이다. 그나마 이 경우에도 이사악이 희생되기 전에 야훼가 천사를 보내 아브라함을 말린다.
판관기에 입다가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일화 자체는 인신공양을 정당화하는 일화가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의 연례 행사에 얽힌 전설을 설명한 것이다. 일화에서도 입다가 섣부른 맹세를 했다가 딸을 잃는다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섣불렀을 뿐 아니라 애초에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에 인신공양을 금하는 내용이 있었음에도 인접국의 악한 문화를 따라했다는 점에서 레위 지파에 의해 율법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았던 사회 전반의 타락상을 보여준다. 그나마 주의 대리자로서 나라를 구한 입다의 수준이 이랬으니 나머지 백성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왕이 없어서 각자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는 본서의 테마에 부합되는 행태였다.[23]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 성체성사가 일종의 인신공양으로 오해를 사기도 했다.[24] 다만 유일신 그 자체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이 박힘으로써 스스로를 희생해 인류를 구원했다는 일화는 신이 원죄를 지고 살아가는 인류를 가엾이 여겨 스스로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의 몸을 인신공양했다고 해석하기 충분하다. 가톨릭, 정교회 등에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러한 예수의 피와 살을 취함으로서[25] 그를 내면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체성사를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는 인신공양이라고 여겨도 딱히 오해만은 아니다. 이런 신앙은 상술한 아즈텍 지역과 같이 인신공양이 남아있던 문명에서 교리의 유사성을 통해 원주민 개종에 기여했다.
불교에선 소신공양이 인신공양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생명과 불살을 중요시하는 불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자살을 금지하고 있으나 묘법연화경 '약왕보살 본사품'에 따르면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앞에서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 한다. 경전은 이를 찬양하여,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이다."라고 하는 주장에서 유래한 논란이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등신불 같은 소설 때문인지 불교가 분신자살과 인신공양으로 깨달음을 얻거나 인신공양을 조장한다는 왜곡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있지만 소신공양 '퍼포먼스'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고 지속적으로 행해지지도 않았으며 '바친다'는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공양'이라는 말은 엄밀히 따지면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법화경에 묘사되는 소신공양도 '분신자살' 그 자체보다는 '자기 희생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려는 정신'을 강조하는 내용이며, 정작 소신공양의 출처가 되는 법화경에서도 소신공양이라는 말은 사용되지도 않았다.
즉신불도 육신을 부처에게 바친다기보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최종적으론 육신마저 포기하는 고행에 가깝다.
현대에 와선 불교가 과거 국교였던 독재 국가 등에서 탄압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 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와 종교 탄압에 맞서 소신공양으로 불의에 저항한 틱꽝득 승려의 사례가 있다. 틱낫한은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틱꽝득의 소신공양은 서구 사회가 기독교의 도덕 관념에 따라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며, 그것은 서구 사회가 이해하는 것처럼 '자살'이나 '저항'의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의 티베트 탄압에 맞서 소신공양을 택한 티베트 승려들의 소신공양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자살의 정의는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음.[26]'이므로 목적이 어떻든 문자 그대로는 자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가 '부처를 위해서 목숨 바쳐야지'가 아니므로 자살은 맞지만 인신공양은 아니다.
야사나 민담, 동화 등에서는 드래곤 등의 환상종이 마을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마을에서 처녀를 선발하여 보내는 등의 예가 자주 언급된다. 이런 경우는 지나가던 사람에 의해 환상종이 퇴치되면서 처녀가 구출되는 플래그가 성립된다.
한국에 남아 있는 민속설화들을 살펴봐도 인신공양의 피해자가 어떤 신성한 사람이나 동물의 힘으로 구원을 받고 인신공양을 받는 악역을 물리치는 형태로 인신공양이 악당의 한 가지 클리셰로 자리잡았다. 대표적으로는 개성의 지네산 전설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마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처녀나 어린아이 등의 제물을 바쳐서 그 짐승을 달래어 왔다.
여기서 분기가 둘로 나뉜다.
제물이 된 처녀와 친하던 동물, 또는 처녀가 기르던 동물[27]이 용감하게 지네 또는 뱀과 맞서 싸워 이기지만 짐승이 내뿜은 독기 때문에 자신도 같이 죽고 만다. 드물게 살아남는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에는 하늘에서 귀양 온 천상인이란 설정이 붙고 천상계로 다시 돌아간다고 나온다.
타지에서 여행 중이던 젊은이가 짐승을 처치하러 가겠다고 나선다. 마을 사람들이 다 말리지만 결국 젊은이는 짐승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이후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젊은이는 처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고, 둘은 결혼을 한다.
그 이후로 그 마을은 더이상 인신공양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영웅 설화와는 달리 일개 미물이 은혜를 갚기 위해 싸워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특징이 있으며 문제의 해결에 있어 남성의 역할이 사실상 거의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도 특징이다. 다만 간혹 새로 부임한 판관이나 벼슬아치가 직접 내려와서 그 괴물을 응징하는 스토리도 소수이지만 있는데 이런 예로 대표적인 것은 제주도 김녕사굴 구렁이 전설이다.[28] 이 전설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박우근 작가의 소설 「구렁이놀음」이 있다.
이는 먼 옛날에는 알 수 없는 자연현상이나 재해에 대해 인신공양으로 대처하려 했으나 점차 문명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부정됨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타난 설화인 듯하다.
심청전에서도 주인공인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져 파도를 가라앉히는 제물로 쓰이는데 동화가 되면서 순화가 되었을 뿐 심청이 인신공양으로 희생될 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인간을 사용한 XXX라는 점에서 고독이나 무당방울과도 비슷하다. 다만 이쪽은 목적이 사리사욕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대장장이가 만드는 전설적인 무기 중에는 사람을 쇳물에 녹였다거나 혹은 피로 담금질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언급되는데 실제로 대장장이가 주술사를 겸했던 시기에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비교적 최근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모비 딕에서도 에이허브 선장이 자신의 새로운 작살을 선원 셋의 피로 담금질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선원들을 죽여서 피를 낸 건 아니고 팔을 좀 그어서 약간 낸 정도다.
도자기와 관련된 인신공양 이야기도 있다. 전술한 대장장이 이야기와 비슷한데 도자기를 구울 때 희생자를 가마에 넣는다거나 반대로 자꾸만 도자기를 굽는 데 실패하자 낙담한 도공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가마에 던지고 그 결과 걸작인 도자기가 나온다는 형태다. 연극 '아라 아라'가 이 스토리 플롯대로 각본이 짜여 있고 마지막에 도공이 가마 안으로 몸을 던진다. 1990년대 토요미스테리 극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각색되어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29]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한 도공이 평론가들로부터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예술혼이 부족하다"는 혹평을 듣고 순수한 영혼을 담기 위해[30] 병으로 죽은 어린아이의 무덤을 파서 시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마 불에 넣어 구워내 도자기를 완성하였고[31] 이 도자기는 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이 도자기를 사간 자산가의 집에서 아이의 혼령이 나타나는 등 불길한 일이 계속되는 바람에 자산가가 도자기를 돌려보냈고 자신을 도자기에서 내보내 달라는 아이의 영혼과 갈등을 빚던 도공은 결국 자신의 혼을 도자기에 불어넣기 위해 그 앞에서 자살한다. 해당 에피소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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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가면라이더 히비키와 7인의 전귀 - 극 초반이 마화망이 마을을 계속 공격하니까 마을의 소년소녀를 바치고 있었다.
괴담 동아리 - 인신공양을 통해 죽은 자식을 되살리는 괴담 에피소드가 등장했던 적이 있다.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 초승섬 원주민들이 매년 찾아오는 베히모스들을 신이라 칭하며 '순환'이라는 명분으로 부족민들을 먹이로 던졌다. 이후 베히모스들이 초승섬에 찾아오지 않게 되면서 의식은 끝나게 된다.
대탈출/태양여고 -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더 보이드 - 리처드 박사와 광신도들이 병원에서 인신공양을 하고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연다. 물론 그러한 주술 의식 때문에 시신들이 괴물로 변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벌어진다.
댐즐 - 오레아 왕국에서 용에게 세 명의 공주를 바친다고 속인 뒤 다른 왕국의 공주들을 왕자의 신붓감으로 삼는다고 속여 그 신부들을 용의 제물로 바치는 짓을 해왔다. 주인공 엘로디도 인신공양에 희생당할 뻔했다.
둥지 짓는 드래곤 - 주인공이 인신공양을 받는 입장이나 그러나 주인공도 인신공양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돌려보낸다. 하지만 돌아가도 죽은 사람 취급해서 자진해서 눌러 살며 주인공의 밤일 연습상대가 되기도 한다. 후에 엔딩에서는 둥지를 나와서 근처에 마을을 만들어 사는게 나온다.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 이름이 없는 태아가 울면 부서 직원들에게 복합피해를 입혀 패닉에 빠지게 만들고 같은 부서 환상체의 클리포트 카운터를 감소시켜 회사를 개판으로 만드는데 울음을 멈출 유일한 방법이 추첨으로 당첨된 직원을 먹이는 인신공양이다.참고로 태아 외에도 검열삭제와 미등장 환상체 노리노리에게 인신공양을 바칠 수 있다. 구버전에서는 당당히 인신공양이라 나왔지만 현재는 제물이라고 부르는 편.
류타로 전기 ~고궁 마을 편~ - 주인공인 '타치바나 류타로'가 멀리 있는 고향집에 가려다가 고궁 마을이라는 곳에 잠깐 머무르게 되는데 그곳은 외부인들을 '오곡풍양 의식'이라는 이름의 인신공양을 하는 마을이었고 결국 그곳에 갇히게 된다. 산사태라고 하나 실제로는 핑계이다.[32] 그 때 당시 희생된 '유즈리하 레이코'의 유령과 현재 살아있는 그녀의 동생인 '유즈리하 하야토'의 도움을 얻어 진실을 알게된 후, 이 마을을 탈출하고 레이코가 마을 사람들 앞에 나타나 인신공양이 아닌 축제를 벌이라며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이제 인신공양 의식을 그만두게 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 소울 스톤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르미르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떨어뜨려 죽여서 산제물로 바쳐야 한다.
마이트 앤 매직 7 - 어둠 마법으로 '제물희생'이 있는데, NPC를 인신공양해서 플레이어를 회복시키는 마법이다. 당연히 시전시마다 평판이 깎인다.
마법천자문 - 작중 이랑이 어릴 때 머리색이 녹색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에게 빌어 자연을 되돌린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산 제물로 몰려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 이때 구해준 사람이 천세태자.
메이플스토리 - 벨룸을 신으로 모시는 도마뱀 일족이 벨룸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산 제물을 바치는 입장으로 공포에 떨며 살아왔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아니라 도마뱀이긴 하지만 엄연히 지적능력을 지니고 대화도 할 수 있는 도마뱀들이 강제로 희생되므로 인신공양이라 볼 수 있다.
미스터리 수사단/악마의 사제 -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바이오하자드 4, 바이오하자드 RE:4 - 원작 바하4의 세퍼레이트 웨이즈에서는 에이다 웡이 마을 주민들에게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될 뻔하지만 직전에 빠져나오는 QTE 액션 장면이 있다. 리메이크 작인 RE:4의 세퍼레이트 웨이즈에서는 다른 전개[33]로 변경되었다. 대신, 본편 오프닝에서 한 여자가 제물로 바쳐져 살해당하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블랙 앤 화이트 - 게임 내에서 중요한 스킬로 작용하는 기적을 발동시키는 데는 신앙력이 필요한데, 주민을 들어다 제단에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산제물로 바칠 수 있다. 남자<여자<어린아이 순으로 획득 신앙력이 커서 상당히 섬찟한 행동. 일시에 큰 신앙력이 제공되는 대신, 게임상에서 할 수 있는 행동 중 가장 악한 행동으로 취급되므로 선 성향의 신을 지향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플레이다. [34]
사이렌 마을 - 흑마법사인 돌만의 환생을 자처하는 시골 마을 촌장 하이야마가 마을 성당의 신부를 죽이고 성당에 봉인되어있던 악마들을 해방시켜 노인이 대부분인 마을 주민들을 악마화시킨 다음(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세뇌되어 악마의 하수인이 된 상태이며 여자들은 밤마다 악마의 날개가 돋아난다) 이들로 하여금 전국에서 아기들을 납치해와 인신공양을 통해 마왕을 부활시킨다.[35]
사신소년 - 작중 최종보스 후보인 JA그룹 회장 주안이 히로인인 한채연과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통해 어떤 사람을 살리려고 2번이나 시도했으나 이신-이경호 부자에게 저지되어 실패했다. 그리고 가공된 유물들이 전부 해당 위인들의 후손들을 용광로에 산채로 녹여 "영혼의 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서 위인들의 혼을 이끌어내는 끔찍한 방법이었음이 오르가누스전에서 밟혀졌다.
새크리파이스 - 게임의 이름(sacrifice, 희생/제물)답게 인신공양이 밥먹듯이 일어나는 게임이다. 인신공양을 해야만 아군 유닛을 소환할 자원(영혼)을 얻을 수 있기 때문. 참고로 장르는 RTS. 적군 유닛을 죽이면 붉은 영혼이 몸 위에 피어나는데 이는 이단의 상징이므로 바로 재활용할 순 없고 일단 개종을 해야 한다. 마법사(플레이어)가 색 닥터라는 유닛을 소환하여 영혼을 다시 시체에 강제로 집어넣어 살려낸 후 곧바로 제단으로 끌고 가게 한다.[36] 그리고 다른 색 닥터들과 함께 제단에서 본격적으로 의식을 진행한다. 색 닥터들이 제단 안에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이따금씩 적 유닛을 고문하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유닛이 산산조각 나버린다. 그러면 곧바로 마법사(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영혼이 된다.
소울 새크리파이스 - 역시 게임의 이름답게 인신공양이 밥먹듯이 일어나는 게임 2. 이 게임의 적으로 나오는 '마물'은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 욕망에 의해 변한 것들인데, (정식 스토리상으로는) 이 마물들을 물리치고 원래 모습이 된 생물들을 앞뒤 안 가리고(설령 인간이라고 해도!) 모조리 제물로 '희생'시키는 게 주인공의 임무다. 물론 이에 반발하여 마물이 되었던 생물들을 '구원'하는 세력 또한 존재하며, 확장판인 소울 새크리파이스 델타에서는 '운명'에 모든 걸 맡기고 희생과 구원이 랜덤하게 결정되는 세력이 추가된다.
심청전 - 이야기 전체적으로 인신공양이 주된 소재이다.
스사노오 - 후에 아내가 되는 쿠시나다 히메가 원래 오로치의 제물로 바쳐질 예정이었으나 스사노오가 여장을 하고 오로치를 물리쳤다고 한다.
시의 묘지기 -The Good People- - 인신공양의 제물로 선정된 소녀가 주인공이다.
에밀레종 설화
에빌리오스 시리즈 탐욕, 분노 시대의 클라리스 수도원
엘도라도 - 미겔과 툴리오에개 저지되어 무산되었지만 아즈텍의 인신공양을 나름 잘 묘사했다.
용형호제 - 맨 첫 장면이 원시 부족이 자기 부족 여자를 인신공양하는 장면이다. 이 때 잭키(성룡)가 나타나서 이 부족의 성물인 검을 훔쳐 도주하는데 이 부족은 잭키를 맹렬히 추격하지만 잭키는 경비행기를 타고 날아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본 부족 전사들은 인신공양을 하다 말고 잭키가 탄 경비행기에 절을 한다.
원신 - 이나즈마 지역에서 인신공양과 관련된 사례가 나온다.
츠루미 섬의 고대 부족은 뇌조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있었다. 관련된 월드 임무 역시 과거 그 의식으로 희생됐던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연하궁 월드 임무에는 연하궁 지역이 과거 '백야국'으로 번성했던 시절 '태양의 아이'를 뽑아 모시는 풍습이 있었는데 사실상 권력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이 태양의 아이가 성년 나이에 가까워지면 마음대로 조종하기 힘드니 의식을 빙자하여 불태워 죽이고 새 태양의 아이를 뽑았다는 언급이 나온다. 제사나 주술적 목적의 인신공양이라기 보다는 순장처럼 정치적 위험을 제거하는 목적에 가깝다.
원피스 - 하늘섬 편의 샨도라의 과거 에피소드. 샨도라에 '수열'이라는 역병이 돌자 주민들은 전사 카르가라의 딸 무스를 카시 신(샨도라에서 숭배하는 큰 뱀)에게 제물로 바치려하지만, 이를 목격한 몽블랑 노랜드가 단숨에 카시 신을 베어버리고 "인신공양은 수열을 연구한 학자들을 모욕하는 행위"라며 카르가라를 꾸짖는다.
위커맨 - 고대 갈리아 지방에서 행해졌다고 전해지는 인신 공양을 소재로 다루었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사다 - 사실 용사다 시리즈 세계관은 신수에게 신체 일부를 공양하는 대신 용사의 힘을 받는 제도가 있다.
유희왕 시리즈
은혜 갚은 두꺼비 - 두꺼비를 기르던 처녀.
이누야샤 - 작중에서는 요괴들이 강력하면서 불길한 원념을 주입한 요도를 만들기 위해 인간의 시신의 피와 기름 등을 섞기도 한다. 이런 인간의 피와 타액을 주입하는 것이 일종의 인신공양이라 볼 수 있다. 카이진보의 경우 과거에는 토토사이의 제자였으나 검을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 10명을 죽여 그 피와 기름으로 검을 만들었다가 파문당했다. 애니 한정으로 건곤언월도는 요괴 222구의 시체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토슈라는 인간이 만든 탈귀는 평범한 검이었으나 용인을 죽여 요도가 되었으며 반코츠의 만룡은 일반 장정 여럿이 들기도 벅찬 대검이라는 점을 빼면 무기 자체는 평범한 편이었으나 생전부터 인간 1000명, 요괴 1000마리를 베어 원념을 흡수하고 사혼의 구슬 조각까지 박아넣으면서 흉악한 요도가 되었다. 이런 요도는 살상력은 좋지만 무기에 일종의 사념이 깃들어 시덥잖은 이가 사용자가 되면 오히려 사용자에게 해를 끼친다.[38] 작중에서 몇몇 요괴들 사이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만든 무기는 불길하게 여긴다.
이코노클라스트!의 희무녀 - 이세계에 소환된 구세주에게 비밀결사 조직 레니게이드의 다섯 가문에서 바치는 다섯명의 아름다운 소녀들. 어릴적부터 오직 구세주만을 섬기도록 훈련을 받고 필요하면 잠자리까지 하도록 시킨다. 물론 이는 희무녀로 하여금 구세주를 농락해서 자신들이 좌지우지 하려는 레니게이드 상층부의 책략. 주인공 쇼고는 이러한 희무녀 제도를 구세주에 대한 인신공양이라 생각하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 이모텝과 비슷하게 생긴 사제가 칼리 신에게 바칠 제물로서 사람의 심장을 맨손으로 꺼내며, 몸은 지옥불로 보내버린다.
인챈트-나람이야기: 여기선 제사장과 제기, 제물이 어우러저 힘을 쓰는데 가장 강한 제물이 인신공양이라는 설정이다. 작중 제물로 죽임당해 제기와 하나가 된 인간들도 나온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 과거 프레데터를 숭배하던 남미 부족원 몇몇이 자발적으로 제물이 되는 장면이 나온다.
전생검신: 이 소설의 세계관에서는 심심하면 인신공양이 일어난다. 스케일도 쓸데없이 커서 중국 세계 성 단위로 크툴루 신화에 나오는 분들에게 인신공양을 해댄다.
캐빈 인 더 우즈: 전 세계적으로 일정 주기마다 인신공양을 통해 무언가를 진정시켜 인류의 안녕을 유지하는 설정. 지부가 여러 개인 것은 만약 어딘가가 실패했을 때를 위한 보험이지만 영화의 시점에서 모든 지부가 동시에 실패하는 바람에 인류멸망테크를 타게 된다.
쿠마미코/애니메이션 - 마지막화인 12화에서 주인공 아마야도리 마치의 사촌인 아마야도리 요시오가 '곰에게 바쳐진 처녀'라는 인신공양 설화를 예로 들어 마치에게 마을을 위해 아이돌 콘테스트에 나갈 것을 권유하는 장면이 있다. 원작에는 없는 애니메이션만의 장면으로, 방영 직후 큰 논란이 되었다.
크루세이더 킹즈 2 - 바이킹으로 플레이하면 그레이트 블로트 디시전을 선택하여 포로를 제물을 바칠 수 있다. 전쟁포로를 제물로 바칠 수도 있지만 내정에 사용하는 것도 좋은데 반란군 포로 등을 합법적이고 불만없이 깨끗하게 처리 할 수 있는데 신앙심도 올라가고 관계도까지 올라가는 1석 3조의 강력한 효과를 보여준다.
크툴루 신화: 주로 강대한 괴물들이나 이종족들에게서 힘이나 재물을 받는 대신 사람을 먹을 것이나 노리개, 아니면 성노예로 바친다. 좋아하는 건 동정 인 듯하다. 딥 원이나 차토구아같은 존재들이 대표다.
킹콩: 해골섬 원주민들은 킹콩을 신으로 여기며 여자를 제물로 바쳤다.
투 러브 트러블 다크니스: 조연 중 하나인 오시즈가 젊은 나이로 요절한 이유가 대기근을 끊기 위한 기우제를 위해서 이하 생략.
황혼소녀×암네지아: 카노에 유우코의 죽음이 인신공양으로 인한 결과임을 암시하는 내용이 많다.
C&C 레드얼럿 2 유리의 복수: 유리군의 '그라인더' 라는 건물은 보병유닛을 집어넣으면 자금이 올라간다. 헐리우드 미션에서 세뇌된 시민들을 집어넣어 자원으로 써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더블샤크: 극중 샴 쌍둥이상어가 근육남을 찢어먹자마자 힘이 넘쳐나는지 폭주한다.
MAO: 177화에 나오며, 인신공양 당한 여자의 동생이 죽기 전에 인신공양을 한 마을을 없애려고 고코 가에 의뢰한다.
SCP 재단: SCP 특성상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SCP 격리에 인신공양이 포함된 것과 SCP가 일으키는 사건에서 인신공양이 발생하는 경우다(예:SCP-2852, SCP-3004)
VS기사 라무네&40염에 등장하는 라무네스의 검. 이 검의 힘을 사용하려면 동료 미트 너트와 드럼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Warhammer 및 Warhammer 40,000의 인신공양
DEAD BY DAYLIGHT - 다른 시공간에 살면서 인간의 감정을 먹는 악마 엔티티가 현세로 넘어오기 위해 각기 다른 시대의 살인마가 될 만한 자질을 가진 이들을 잡아서 살인마로 조교하거나 이미 살인마가 된 이들을 데려왔고, 이들에게서 도망치면서 감정을 제공하는 생존자들을 잡아왔다. 살인마가 생존자들을 잡아 갈고리에 걸어 엔티티에게 바치고 생존자들은 살인마를 피해 발전기를 돌리고 문을 열어 도망치는 걸 반복하는 희생제를 열어 이들의 감정을 먹어 치운다.
파워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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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아닌 짐승만 나무에 엮은 바구니에 넣어 죽이는 일은 17세기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루이 14세 시절의 프랑스 왕국에서는 커다란 바구니 안에 여우와 토끼와 들쥐 같은 짐승들을 집어넣고서 불에 던져 그 짐승들을 태워죽이면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렀다.[2] 바벨 성 아래에는 진짜로 동굴이 있다. 성벽의 구석 모퉁이에 자리한 조그마한 문을 지나 아주 폭이 좁은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갈 수 있다. 성에 입장할 때 설명을 읽지 않고 무심코 들어갔다가 바깥으로 나와버리면 다시 그 길로 돌아갈 수 없고 얄짤없이 다시 정문으로 돌아가야하니 성의 모든 관광을 마치고 들어가도록 하자. 동굴을 나오면 쇠로 만든 재미있게 생긴 용의 동상이 있는데 이 녀석은 매 시간마다 하늘을 향해 불을 뿜는다. 한편, 중세 시대에 이 동굴에서 메머드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뼈 3점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진짜 용의 뼈라고 믿고 이것들을 바벨 성당의 정문 위에 걸어두었다. 지금도 이 뼈는 문 위에 남아 있는데 뼈가 땅으로 떨어지는 날엔 세상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3] 그 증거가 아바르족 기마병들이 들고 다녔던 깃발인 드라코인데 마치 용의 머리처럼 생긴 두상에 배너가 달린 모습이었다.[4] 간혹 흉년이 들면 왕과 왕비는 스스로 성기를 찢어(!) 피를 종이에 적셔 태우고 그 냄새를 맡았다.[5] 공놀이가 발생된 초기에는 순전히 친선과 놀이 목적으로 행해진 장식들이 발견되지만 중남미를 덮친 가뭄 이후에는 공놀이에도 인신공양이 도입되었다.[6] 포니족의 조상 역시 미시시피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7] 예전엔 노동 인권도 열악하다 보니 특히 아메리카에서 비백인계 노동자들은 사고로 죽으면 제대로 된 형식의 장례도 안 치러주고 묻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을 텐데, 이게 수장이나 화장 등처럼 간단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확대해석되어 소문나 버리면 딱 인신공양처럼 보일 수도 있긴 하다.[8] 끓는 기름이나 뜨거운 물에 던져넣어 죽이는 방법이다. 조선 시대에 이를 형벌로써 다루는 팽형이 실존했는지의 여부는 논란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관련 기록이 없으나 명예형으로 다루어져 당사자는 공식적, 행정상으로 사망자로 기록된다는 조선총독부 출신 서대문 형무소장을 역임한 일본인의 설만이 있을 뿐이다.[9] 이는 순장 풍습과 관련은 있으나, 순장과는 별개의 것이다. 매장이 완료된 뒤에도 계속 제사를 지내며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다.[10]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공자님도 깐 미개한 순장 풍습이 명나라에 아직도 있다.'는 식으로 비판한 기록이 있다. 자세한 건 순장 항목 참조.[11] 공자는 순장뿐 아니라 사람 대신 인형을 같이 묻는 것조차도 사악하다고 비판했다. 애초에 유교 등 여러 인류애적 사상이 이런 풍습을 없애기 위해 나왔다고 봐도 될 정도다. 보통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인과 예이고 괴력난신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12] 직역하면 사람기둥. 만화 나루토의 인주력, 인주 앨리스의 그 인주다.[13] 노미노스쿠네가 대신 하니와(土輪)라는 흙인형을 묻는 방법을 제안하여 천황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는 전승이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하니와의 등장은 노미노스쿠네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라고 한다. 실제 일본서기의 고대 덴노들 연대는 신뢰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당장 후술된 히미코(비미호)가 기록상으론 후대 사람인데도 순장 잘만 하고 있다.[14] 후시미야구라를 세우는데 자꾸 무너지니까 건물을 튼튼히 하고자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다.[15] 1968년 M7.9의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벽이 손상되었고 수리 과정에서 내부의 유골이 드러났다.[16] 특히 대가야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17]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순장이 유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발굴조사에서 순장에 대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중천왕이 재위하던 시기인 3세기 중반, 동천왕 사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사(자사 순장)가 벌어지자 이에 놀란 중천왕이 이를 금했다고 전해진다.[18] 사실이라면 이 지방이 여진족의 땅이었던 고려 시대의 일일 것이다.[19] 당시 이를 보고 주인공인 필리어스 포그가 이 풍습 영국에서 금지시킨 거 아니었냐고 묻자 현지에서 근무하는 영국 군인 크로마티 경이 대부분의 지역에선 없어졌지만 일부 지역에선 손도 못 쓴다고 알려주는 장면이 있다. 여담으로 이때 사티에 희생될 뻔한 여인인 아우다 부인은 포그의 하인인 파스파르투가 극적으로 구조해내며 이후로도 포그를 따라다니다 영국까지 와서 포그와 결혼하게 된다.[20] 범인들은 4년이 지난 2023년 검거되었다.[21] 열왕기에는 궁지에 몰린 모압 왕이 자기네 신에게 자기 왕세자를 제물로 바쳐 이스라엘인들을 물리치는 내용이 있다. 신명기 12장 31절, 레위기 20장 3절, 열왕기하 3장 27절, 16장 3절, 21장 6절 등을 참조할 것.[22] 제물로 바치기 직전에 하느님이 보낸 천사가 만류하여 이사악은 죽음을 면했고 옆에 지나가던 숫양이 대신 제물로 바쳐졌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예수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사악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숫양은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23] 입다의 딸의 최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정말 번제로 바쳐졌다는 해석과 신녀로서 평생 야훼를 모시며 정결한 삶을 살았다는 해석으로 나뉜다.[24] 혹은 인신공양을 번제로, 번제를 다른 것으로 순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런 흔적이 남았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겠다.[25] 비유, 상징적인 의미라거나 영적으로 성체에 강림하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 정교회 등에서는 성체와 성혈이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실체변화설을 따른다.[26] 표준국어대사전[27] 가장 유명한 사례는 역시 두꺼비이다.[28] 이 이야기의 결말은 판관이 구렁이의 저주를 받고 죽는 배드 엔딩인데 이걸 두고 조정에서 내려온 중앙세력(서판관)과 제주 유력자(김녕리 토호) 세력의 갈등이 '육지부 조정에서 온 지방관의 구렁이 퇴치' 설화로 은유되어 전해져오는 게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다.[29] 한 재일 한국-조선인 시청자가 제보한 내용을 드라마로 각색하였다.[30] 극중에서는 평론가들의 혹평이 예술혼과 순수함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그 집착이 뒤틀린 광기로 변했다고 언급된다.[31] 도자기를 구울 때 가마 불에 어린아이의 신체 일부를 넣으면 순수한 아이의 영혼이 깃들 것이라고 믿어 한 행동이었다.[32] 만약 막고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면 그 사람들과 같이가던 중에 그 사람들한테 잡혀서 죽게된다.[33] 알버트 웨스커가 직접 등장해 에이다를 구해준다.[34] 희생 없이 신앙력을 얻으려면 백성들을 데려다 제단 앞에 내려놓아서 숭배의식을 진행하게 하고, 숭배의식 중 굶지 않도록 급식을 해 주면 된다. 이쪽은 성향에 변동이 없는 대신 신앙력이 일시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올라가는 형식이며, 숭배의식을 진행하는 노동력이 될 사람들도 여럿 필요하다.[35] 주인공의 친구도 결국 악마로 변한뒤 마왕에게 잡아먹힌다. 아이러니하게도 친구는 전 촌장의 딸이었는데, 촌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 세뇌당하지 않은 대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죽고 말았다.[36] 이때 색 닥터가 죽으면 유닛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37] 사람을 참수해 그 수급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자 제갈량은 돼지고기를 밀가루 반죽에 감싸서 만든 떡으로 사람의 수급 대신 올려서 제사를 지냈다.[38] 건곤언월도는 자기보다 역량이 낮은 호시요미를 홀려 그의 성향을 변질시켰으며 탈귀 또한 자신을 만든 토슈를 조종했고 마지막에는 누적된 데미지로 인해 자신이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토슈에게 자신의 데미지를 전달해 죽게 만들었다. 만룡은 요기를 얻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폭류파에 제대로 얻어맞아 산산조각나며 주인 반코츠와 함께 패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