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나드리 성지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배나다리
삽교천가에 형성된 박해시대의 교우촌
배나드리 순교사적지는 예산군 삽교읍 북쪽 용동 3리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하였다. 이곳은 삽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1.3km)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리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명칭 또한 바로 이런 지형적 위치에서 연유되었다.
1817년 10월 이곳에 밀고자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갔다. 체포되어 간 신자는 20-30명가량인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며, 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1880년대 초까지도 신자가 한 집도 없었으니 아마도 배교하여 석방된 신자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생각되며 또한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하고 철저하였었나를 짐작케 한다.
박해시대 교우촌인 배나드리 마을 풍경. 현재는 용동 3리(배나다리)로 부르고 있다.민 첨지는 결성(結成) 출신으로 목천 소학골(지금의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서 살다가 배나드리로 이주하였고, 손연욱은 홍주 출신인 것으로 보아 배나드리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으로 추정된다.
현재 삽교 성당 관할구역인 용동 3리의 배나드리 교우촌 인근 용동 2리에는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가 있다. 이곳은 본래 예산 본당 관할의 주례 공소 강당이 있던 곳이었다. 1967년 예산 본당에서 삽교 본당이 분가되면서 공소가 폐지되고 강당이 헐리게 되자 공주에서 체포되어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를 기념하는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용동리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출처 :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성지순례사목소위원회 편, 한국의 성지 순교자의 발자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일부 내용 추가 및 수정(최종수정 2014년 8월 20일)]
손연욱(孫--) 요셉(?-1824)
신앙 증거자. 세례명은 요셉. 성인 김 데레사의 남편이자 희생자 손여심의 아들. 성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부.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태어나 1796년에 김 데레사와 혼인하였다. 성격은 양순하고 겸손하였으나,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 일에는 지극히 엄격하였다고 한다. 1817년 10월(음) 충청도 덕산(德山) 배나다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3구)에서 같은 마을의 신자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해미 진영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무수한 고문을 당하면서 6-7년 간 옥살이를 하다가 관장의 허락을 얻어 근처의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몇 주일 동안 동생과 함께 살다가 1824년 어느 날 새벽 철야 기도와 삼종 기도를 바친 후 그만 사망하였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7권]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1737-1800년)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그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인 마르티노는 장남 요셉을 주 신부 곁에 남겨 두었으며, 얼마 뒤에는 차남을 유명한 교우의 딸과 혼인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친척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그는 이주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인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에 있는 감옥에서 인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 프란치스코를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면서,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 마르티노에게 가져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인언민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인언민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