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52) 미녀 초선(貂蟬) <중편>
이윽고, 동탁과 초선을 멀리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왕윤이 내실에 앉아 여러가지 감회에 젖어 있는 바로 그때,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포 장군이 대감을 찾아 왔습니다."
집사의 말을 듣고 왕윤이 밖으로 나오니, 횃불을 밝혀든 십여 명의 호위병 가운데 여포가 앞에 보인다.
"아니 이거 여 장군 아니오?"
왕윤이 짐짓 놀랍고, 반가운 음성으로 여포를 맞이했으나, 여포는 왕윤을 보기가 무섭게 멱살부터 움켜 잡으며 부르짖듯 고함을 지른다.
"이 늙은 것아! 너는 초선이를 이미 나에게 주기로하고, 이제 또 태사에게 보냈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왕윤은 급히 손을 들어 여포을 진정시키며 말한다.
"이렇게 밖에서 말씀드릴 일이 못 되니 안으로 들어가서 애기하십시다."
왕윤은 여포를 후당으로 데리고 들어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장군은 나를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니오.
내 자세한 말씀을 드릴 테니 들어 보시오.
오늘 태사께서 불시에 우리 집에 오셨기에 내가 소연을 베풀었는데, 태사께서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더니, 나더러 너희 집에 초선이라는 미녀가 있다고 하던데, 그 아이를 한번 불러 달라고 하시더구려.
분부를 거역할 수가 없어서 초선이를 잠깐 나와서 인사를 올리게 하면서, 초선이는 이미 여포 장군과 가약을 맺기로 약속하였다 했더니 태사는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그러면 이 애는 내 며느리나 다름 없으므로 당신이 데리고 갔다가 장군에게 친히 보내 주신다 하시면서, 데리고 가겠다고 하시니 태사의 말씀을 내가 어찌 거역하겠소.
그래서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혀서 조금 전에 초선이를 전송하고 들어왔던 것이오."
여포는 그 소리를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왕윤앞에 엎드렸다.
"내가 사연을 잘 모르고 크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천만의 말씀, 그 애가 가지고 갈 예물이 있는데, 그것은 그 애가 여포 장군의 집에 도착하는 대로 보내 드리리다."
왕윤의 이 같은 말을 듣게 된 여포는 크게 기뻐하며 호위 군사를 몰고 돌아갔다.
그 다음날이었다.
여포는 양부 동탁에게 기쁜 소식이 있을 것을 아침부터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한낮이 다 되도록 동탁에게는 아무런 기별이 없는 것이 아닌가?
기다리다 속이 탄 여포는 집에서 기다리다못해 당중(堂中)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동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태사는 여태 안 나오셨느냐?"
여포는 시종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아직 침실에서 기침(起寢)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주무신단 말이냐?"
그러자 시종은 남의 눈을 꺼리는 듯 사방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여포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태사께서는 어젯밤, 왕윤 대감 댁에서 초선이라는 미인을 데리고 오시더니 여태까지 주무시는 것을 보면 어젯밤에 재미를 단단히 보셨는가 보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여포는 눈알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왕윤의 딸 초선은 분명히 여포 자신의 첩이 되기로 약속한 미인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동탁으로 말하면 여포의 양부(養父)가 아니던가?
부자의 인연을 맺고 있는 처지에 동탁이 설마 초선을 어찌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여포였다.
그런데 시종의 말에 의하면, 동탁은 분명히 어젯밤 초선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서는 여태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여포는 시종의 말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동탁의 침실이 있는 내정(內庭)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방안을 유심히 살피며 동정을 엿보았는데, 때마침 아리따운 여인이 침실 창가에 기대 서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틀림없는 초선이 아니던가?
이제 여포로서는 동탁과 초선의 관계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침실 창문 앞으로 다가서니, 마침 침대에 누워있던 동탁이 여포를 발견하고 괴이하게 여기며, 몸을 일으키며 묻는다.
"여 장군이 여기는 웬일인고?"
"네, 별일은 없사오나 태사께서 늦게까지 기침하지 않으시어 웬일인가 싶어서 들어와 보았습니다."
여포는 원한을 머금은 채 거짓말을 하였다.
"음 ... 별일 없으니 물러가 있으라."
여포는 마지 못해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창자를 끊어 낼 듯이 괴로웠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그날도 동탁이 늦게까지 당중에 나오지 아니하므로, 여포는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동탁의 내실로 들어와 보았다.
그리하여 방안에 들어와 보니 동탁을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데, 초선은 잠옷바람으로 일어나 머리를 빗고 있다가 여포를 보더니 원한과 연민의 정이 가득한 슬픈 시선으로 머리를 빗다 말고 그윽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여포는 자신을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 보는 초선에게 와락 덤벼들어 병풍 뒤로 잡아 끌었다.
초선은 손목을 붙잡힌 채 병풍 뒤로 끌려오면서도 원한이 넘치는 시선으로 여포를 그윽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 시선은 마치 말없는 가운데,<장군은 어째서 나를 이꼴이 되도록 내버려 두느냐?> 하고 책망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여포가 초선을 힘차게 끌어 안으려하는데 별안간 동탁의 노기에 찬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놈, 여포야! 네가 감히 내 애희(愛姬)를 희롱 한단 말이냐!"
동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청을 세우고 크게 소리쳤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저놈을 당장 밖으로 끌어내어라!"
한순간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여포를 끌어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여포는 순간 화가 극도로 치밀었으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무 소리도 하지 아니하고 제발로 동탁의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이렇게 화가 난 모습으로 중문을 나서는데 때마침 이유가 들어오고 있으므로, 여포는 이유를 붙들고 억울한 사정을 말하였다.
이유는 여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동탁에게로 달려 들어왔다.
"장차 천하를 얻으시려는 태사께서 어찌 그만한 과실로 여 장군을 책망하시나이까? 만약 여 장군의 마음이 변하면 천하 대사를 그릇치기 십상이옵니다."
"나의 애희를 희롱하는 놈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니옵니다. 계집 하나로 인해 명장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천하 대사를 그르치는 결과가 되옵니다,."
"음 ...그렇다면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천자의 야망을 품고 있는 동탁은 천하 대사가 그릇치게 될 것이라는 이유의 말을 듣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내일이라도 여 장군을 불러 금은을 후하게 내리시면서 좋은 말로 위로하시어 울분을 풀어주소서."
동탁은 그 다음날, 이유의 말대로 여포를 불러서 많은 금은 보화를 안겨주면서,
"어제는 내가 말이 좀 지나쳤으니 그대는 너무 노여워 마라!"
하고 위로의 말을 하였다.
여포는 그제야 분이 약간 풀렸다.
그러나 초선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에는 궁중에서 동탁을 위시로 하여 여러 고관들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던 자리에서 여포는 슬며시 빠져나와 초선의 거처로 달려갔다.
비밀리에 초선을 만나 보려는 것이었다.
초선은 여포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아니, 태사께서 아시면 어쩌시려고 오셨나이까?"
초선은 기대반 걱정반의 말을 하면서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렸다.
"나는 네가 그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만나는 것을 태사께서 아시면 큰일이옵니다. 장군께서는 후원에 있는 봉의정(鳳儀亭)에 먼저 가 계시옵소서. 제가 곧 가겠나이다."
여포는 봉의정으로 가서 초선을 기다렸다.
잠시후 초선은 수려한 꽃밭을 헤치며 버들가지를 휘어잡으며 하늘하늘 걸어오는데 그 아리따운 자태는 선녀와 같았다.
이를 보다 못한 여포가 초선을 힘차게 끌어 안자, 초선은 여포에 품에 와락 안기며 얼굴을 파묻고 이렇게 호소한다.
"첩은 장군을 한번 뵈온 이후로 오늘날까지 장군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태수께 금수와 같은 일을 당했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나이까.
첩이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장군님을 뵙고 억울한 하소연이나 하고 죽으려하였는데, 다행히 오늘 이렇게 뵙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첩의 몸은 이미 더렵혀졌으니 이제는 장군님 앞에서 깨끗이 목숨을 끊어 장군을 향한 일편단심을 밝히겠사옵니다."
초선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눈앞에 있는 연못으로 뛰어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여포는 황망히 초선의 몸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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