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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쉬 카푸어의 '림보로의 하강'과 죽음에의 욕망
올해 가을에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전시가 있어서 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은 평소에
관심있는 금기에의 욕망과 맞닿는 부분이 있어서 관심을 갖는 작품들이다
아니쉬 카푸어의 반타블랙은 개인이 독점화한다는 비판을 받는 작가다.
그러나 그가 거액을 들여서 그 물질을 독점화하는건
반타블랙이라는 특수안료가 인간이 가진 죽음에의 동경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다
검정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여 검정색이다. 검정색은
특수하게 가진 색이 없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면서 보여지는 색으로 고유한 색이 아니다
그런면에서 고유성이 없는게 검정색이다
Anish Kapoor's "Cloud Gate" (2006) following the artist's recent recoating in Vantablack (photo courtesy City of Chicago)
이런 특징은 '죽음' 이라는 키워드가 가진 특징이기도
하다. '죽음'은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존엄성 뭐든 다 흡수하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백인, 흑인 등등 개인이 가진 어떠한 특성도 이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죽음'앞에서 숭고해진다
아니쉬 카푸어는 그런 면에서 특수물질을 독점화한 건 작가로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니쉬 카푸어의 '림보로의 하강(descent into
limbo)'은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입구처럼 숭고하다
ANISH KAPOOR descent into limbo
그 작품앞에서 신기하다는 표현보다는 죽음으로 발을 디디고 싶은 욕망과 피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살려는 욕망'과 '죽음으로의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간다.
이런 나의 생각과 일치된 미술작품이 아니쉬 카푸어의 '림보로의 하강(descent into limbo)'이다
현대미술에서 '숭고함'을 전해주는 작가는 2명이다
마크 로스코와 아니쉬 카푸어다
이 작가들의 작품은 종교 이상의 숭고함을 전해준다
그래서 이들 작품앞에서는 인간이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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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보(고성소)의 개념
**림보(Limbo)**는 가톨릭 신학에서 지옥(Infernum)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요 개념이 있다.
1. 조상들의 림보(Limbus Patrum):
구약 시대의 의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이전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머물렀던 곳.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사흘 동안 머물렀던 장소로 해석되기도 함.
2. 유아의 림보(Limbus Infantium or Limbus Parvulorum):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이 원죄로 인해 천국에는 가지 못하지만, 지옥의 형벌은 받지 않는 상태.
교리적으로 확정된 개념은 아니며, 현대 가톨릭 교리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취함.
https://naver.me/5ZunAa08
1. 개요
고성소Limbo는 가장자리Limbus에서 유래한 말로, 다음 두 가지를 가리키는 가톨릭 신학의 표현이다.
1. 구약 의인들의 내세 (그리스도교 신학 공통의 개념)
2. 원죄만 있고 본죄는 없는 상태에서 죽은 유아의 내세 (가톨릭 신학 특유의 개념)
지옥의 가장자리라는 의미에서 '변옥(邊獄)'이라 부르기도 한다. 간혹 연옥이라고 표현하는 창작물도 있지만, 이건 명백한 오역이다.
2. 일러두기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전통적으론 내세를 공간적 표상으로 즐겨 표현하지만) 엄밀하게는 그리스도교에 공간적 내세 교리는 없으며, 사후의 '상태'를 천국(과 연옥), 지옥으로 표현한다.
그렇기에 교리적으로 천국이란 하느님과의 영원한 지복직관 상태를 말하고,[1] 지옥이란 하느님과의 단절 상태를 말하며,[2]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연옥(Purgatorium, 정화)이란 지복직관(천국)에 앞서 일부 인간이 겪는 정화(Purgatorium)의 상태를 말한다.[3] 곧, 천국(과 연옥), 지옥은 사람이 사후에 겪는 어떤 중대한 실재적 상태를 분명히 가리키지만, 공간적 이미지 자체는 어디까지나 비유이다.
그러므로 림보의 경우도 상태 개념이다. 림보는 가장자리Limbus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말 자체는 굉장히 공간적인 표상이지만, 이러한 공간적 표상을 통해 (구약 의인의 림보이든, 유아 림보이든) 내세의 어떤 상태를 가리키고자 하는 것이다.
3. 구약 의인의 고성소
신약 이전의 고성소는 구약에서의 성조(聖祖)들을 포함한 조상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뜻한다. 즉 원죄로 인해 궁극적인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강생하여 구원을 이룰 때까지 지속되었다.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함으로써 이들은 모두 천국에 들어갔다. 즉 더이상 이러한 의미의 고성소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고성소Limbo라는 표현을 쓰는 건 가톨릭 신학뿐이지만, 구약시대 의인들이 천국에 있지 않다가 그리스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다는 건 그리스도교 전체의 믿음이다.
사실 예수의 지옥 체험은 그분의 존재와 본질의 최종적인 내적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분의 이타존재(Pro-existentia), 우리를 위하심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분의 자기비움과 낮춤(Kenosis)이 어느 끝까지 이르는지, 그에 대한 결정적 대답이 바로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기 때문이다. 이타존재로서 예수는 이 절대적 케노시스의 하강을 죽음이라는 깊은 심연 속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실현한다. 이로써 그분이 인간과 어느 지점에 이르기까지 연대하셨는지 하는 구원 경륜의 신비가 밝혀진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인간과 연대하셨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 묻힌 뒤의 현실이 가리키는 죽음 그 자체의 상태마저도 남김없이 맛보심으로써 인간의 운명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신다.
...예수의 지옥 체험은 따라서 온전히 죽은 이로서 죽은 이들에게 가심,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온전히 겪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십자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성금요일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곧 마지막으로 영을 아버지께 내어드림으로써(요한 19,30 참조)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정점에 도달했다면, 이제 성토요일[6]에 그분은 죽은 다음의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남김없이 맛보셔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이제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의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 지옥 체험은 밀도에서 보면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지옥을 질적으로 넘어선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체험하는 하느님 단절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단순히 죄인들이 자초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너머 그 아래에 있는 무엇을 겪으신다.”[7] 그리고 그 너머의 무엇은 발타살에 따르면, 임의의 어떤 상실이나 단절이 아니라 그 상실과 단절의 “본질적 근거”, “죄 자체”(Sünde an sich)[8]를 말한다. 여기에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 갖는 유일무이한 특성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들만이, 아버지의 품에 계신 분으로서 십자가 죽음과 그 모든 귀결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다 비우신 아들만이 아신다.”[9]
...하느님의 아들이 지옥에 내리심으로써 신적인 구원을 인간 운명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가져오신다. 그분이 남김없이, 그 이상으로 하느님 상실, 하느님 부재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그 자리가 이제 하느님께 이를 수 있는 열린 자리로 반전을 이룬다.
김혁태. 〈예외 없는 희망? 발타살의 ‘지옥’ 담론과 그 종말론적 귀결에 대한 고찰〉 신학전망 no.179(2012)
하지만 '저승'이라는 공간적 표현은 그저 공간적 표현일 뿐, 지복직관의 상태인지 '하느님을 볼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인지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제3의 '공간'이라는 신화적인 언어만이 남을 뿐이며, 그리스도가 편안히 사후세계를 관광하고 온 것 같은 이상한 어감만 남는다.
죄 없는 예수가 지옥의 상태를 맛보았다는 그 '부조리'에 그리스도인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건 정당하다. 그러나 예수가 당한 바로 그 '부조리'가 파스카 희생의 핵심이며, 사실 십자가 부터가 바로 그 '부조리'의 자리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지옥의 고통이 없는 내세 관광'으로 희석해버리는 것은, 아무리 그 의도의 정당함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어리석음이다. 십자가와 지옥이라는 부조리, 바로 그 부조리를 겪고서 영광 속에 들어가는 것이 예수의 메시아성이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루카 복음서 24,25-26
4. 유아 림보
물론 림보 개념의 거부가 가톨릭 신자에게 강제된다는 건 당연히 극단적인 결론이다. 위에서도 한 번 말했듯이 여전히 림보 개념을 둘러싸고 신학자들간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믿을 교리(dogma)로 확정되어 장엄선포된 상태가 아닌 신학적 가설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각 신학자들의 의견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성 아우구스티노파(派):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학자들로, 즉 림보 따윈 없으며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은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그 수가 소수에 불과한 상태이다.
림보 지지파: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학자들로,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들은 구원은 받을 수 없지만 림보에서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제외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산다고 주장한다. 이 의견이 상대적으로 다수를 이루었다.
구원 긍정파(?): 림보와 무관하게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들의 구원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주장한다. 근대 이후,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사실상 대세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또한 이 의견을 지지했다.
림보 지지파의 의견이 아직 다수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위에도 말했듯이 '세례'의 의미 때문이다. 사도 시대부터 교회는 세례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역설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그 '세례'의 의미는 점차 확대되고 있으나, 그 확대된 의미조차도 태어나자마자 죽은 유아들의 구원을 보증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수많은 가설들이 오가고는 있으나, 아직 어떤 것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림보 개념은 오히려 가톨릭 신학자들간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현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애초에 애매모호한 상태에 빠뜨리지 말고 가능한 한 태어나자마자 유아 세례를 줘라.
2007년, 국제신학위원회는 "교회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구원에 대하여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이 일반적으로 어떠한지는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고, 교회는 계시된 것과 관련해서만 가르치고 판단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세례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구원을 희망하며, ... 교회는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신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는 문서를 발표하였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를 승인하여 유아들의 림보 개념에 대해 기존 견해보다 더 넓은 천국으로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5. 기타
이슬람에도 바르자크(برزخ)와 알 아라프(الأعراف)라는 기독교의 림보 내지는 연옥 비슷한 교리가 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과 타 종교권·문화권의 현인들이 머무는 장소로 묘사된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현인들은 물론 살라흐 앗 딘도 머물고 있다. 어떤 형벌도 받지 않으나 천국에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