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영성 - 김진 박사
예전 장용기 님의 칼럼에서 퍼왔습니다. 시간이 한가로울 때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읽어보면 신앙에 많은 유익이 되겠습니다.
1. 기독교는 말의 종교'다?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은 말이 많다' '기독교인 치고 말 못하는 사람은 드물더라' '기독교인은 말만 잘하기 때문에 죽어도 입만 천국에 갈 것이다' 등등 말과 관련짓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은 기독교-특히 개신교-가 성서말씀을 강조한 프로테스탄트의 전통을 잘못 발전시켜 말(word)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를 강조하려는 의미에서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다' 라는 주장이 기독교가 단순히 말에 대한 친근성으로 발전해 결국 '말씀'은 없고 '말'만 무성한 종교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1) '말씀'을 강조한 요한 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라는 구절을 언급한다. 하나님 당신이 '말씀'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이 말씀의 성육신 사건 표현은 당시 그리스 지성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로고스론을 근거로 성립된 '희랍 토착화신학'의 한 표현이다. 성서구절의 '말씀'(Logos)은 오늘날 의미하는 말(word)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성서구절을 말하기를 지나치게 우선시 하는 현대 기독교의 암묵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지 말의 종교'가 아니다.
2. 침묵과 말
우리는 흔히 침묵을 말과 대립되는 영역으로 취급하기 쉽다. 그러나 그 본질로 다가서면 침묵과 말은 둘이 아니라 존재 드러남의 두 측면임을 알 수 있다. 침묵이 존재(진리)의 깊이를 들어낸다면 말은 그 존재(진리)의 넓이를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양자 모두가 매우 중요하다. 침묵이 그 존재 드러냄의 양식에 있어서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고, 말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 가치는 어느 것 하나에 우선될 수 없다. 이런 본질 때문에 침묵은 말의 중단을 의미하거나, 말하는 것이 침묵의 중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래 모든 말에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침묵이 베어있으며 침묵도 하나의 언어이다.
침묵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의 하나이며 원형상(原現想)이다. '침묵은 사랑, 믿음, 죽음, 생명 등과 같은 다른 원현상들과 마찬가지로 본래적으로 자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침묵은 이미 이 모든 것들 보다 앞서 존재했고 이것들 모두 속에 들어 있다. 침묵은 원현상들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났다.' 2)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가 되었지만 태초 이전에는 침묵이 있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말씀'은 침묵에서 나온 '말씀'이다.
존재와 진리를 드러냄의 한 형태로서의 말은 우리가 흔히 듣는 소리형태로서 말과는 달리 침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말이다. 본래 '말의 세계는 침묵의 세계 위에 세워져 있다. 말이 마음놓고 문장들과 사상 속에서 멀리까지 움직여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밑에 드넓은 침묵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 드넓은 침묵에게서 말은 자신이 드넓어 지는 법을 배운다. 침묵은 말에게는 줄타는 광대 밑에 펼쳐져 있는 그물과도 같다.' 3) 그러므로 침묵이 깊어질수록 말도 깊어지고, 침묵이 넓어질수록 그 말로 넓어진다. 그렇게 침묵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결코 사장(死藏)되지 않고 육화(肉化) 된다. 침묵의 육화가 곧 말이다. 그러기에 침묵의 세계로부터 솟아나지 않는 말, 즉 침묵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말은 진리나 존재의 드러냄과 거리가 번 소리에 불과하다. 말은 침묵에서 나오며 침묵 안으로 들어간다. 말은 침묵과의 연관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참말은 침묵 속에 '뜻'이 차 오를 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이 말에 의미를 부여한다.
노자는 도덕경 56 장에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읊었다. 그러나 노자는 말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지금 '말하고 있는' 노자 자신도 자신의 이 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또 노자 또한 알지 못하고 있음을 자증(自證)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노자가 도(道)와 관련하여 '참 말'이 아닌 '헛말'을 거부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거칠게 재해석하면 '아는 자는 헛소리하지 않고, 헛소리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런데 그 헛소리가 아닌 말, 즉 참 말은 지식의 많고 적음, 혹은 객관적 타당성이 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참말은 진리에 대한 적확함이 판단기준이 된다. 남을 살리고, 진리를 표현하고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는 참말은 침묵으로 말미암는다. 또 그 참말은 침묵을 깨트리지 않으며 그렇다고 침묵을 통역(translate)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말없이는 침묵 없고, 침묵 없이는 참 말이 없다. 참 침묵의 차원은 말을 참말 되게 하며, 참말의 차원은 침묵을 참 침묵되게 한다.' 4)
3. 내적인 침묵과 외적인 침묵
침묵에는 외적인 침묵과 내적인 침묵이 있다. 침묵은 외적인 침묵으로 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내적인 침묵이 동반되어야 한다. 즉 침묵이 단순히 말의 그침이 아니라면 침묵은 내적인 침묵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침묵의 축복에서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입으로 말을 안 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나 생각에 번뇌와 잡념이 요동친다면 그것은 침묵의 세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말의 멈춤은 침묵의 세계로 다가서기에는 아직도 그 길이 멀다. 그래서 외적인 침묵보다 내적인 침묵이 더 중요하며, 내적인 침묵이 동반될 때 외적인 침묵이 의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침묵을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소리의 침묵이요. 둘째는 사고(思考)의 침묵이요, 셋째는 몸의 침묵이다. 소리의 침묵은 입의 소리와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의 끊음을 의미한다. 소리의 침묵은 침묵의 첫 문턱이다. 그 문턱을 넘어서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사고의 침묵'이다. 이것은 말과 소리 뿐 아니라 생각을 넘어서는 침묵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아니할 수는 없다. 말을 해도 침묵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을 해도 침묵이 지속될 수 있다. 그래서 사고의 침묵은 무아지경 속으로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이것은 의식(意識)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초월할 수 있는 상태이다. 비록 생각이 나더라도 그 '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침묵이다. '드는 잡념'이나 '나는 생각'의 내용을 마치 '남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생각은 내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되고 사라진다. 그래서 그것은 생각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생각으로 전락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나는 생각조차 차츰 줄어든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그는 사고의 침묵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명상의 세계에서는 '마음의 활동이 없는 명상'이라고도 말한다.5) 모든 생각을 침잠 시키는 침묵이다. 그래서 침묵은 우리에게 허무가 아니라 신선함과 명료함을 전해준다.6)
세 번째로 '몸의 침묵'이 있다. 내가 아무리 말을 중단하고, 생각을 다스려 침묵의 세계로 들어선다 해도 이 몸에 베어 있는 습(習)으로 말미암은 이 몸의 기억은 부단하게 말을 하고, 또 남에게 무엇인가를 표현한다. 만약 우리 습관화된 잘못된 몸짓의 언어를 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몸의 침묵이 가능해진다. 이럴 때 몸으로부터 새로운 언어가 흘러나온다. 이제 그는 몸으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언어의 침묵이 존재의 침묵으로 이어져 감을 보여준다. 몸의 침묵이 가능한 사람은 말을 해도 침묵이고, 생각을 해도 침묵한다. 언어로 침묵할 때 몸으로 말한다. 말도 몸의 침묵의 일부이다. 몸의 침묵을 통해 말하면서 침묵하고, 침묵하면서 말을 하는 사람이다.
'소리와 생각과 몸'으로 이뤄내는 침묵의 영성이 우리가 지향하는 침묵의 영성이다. 이것은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생각의 침묵을 위해서 우선 소리의 침묵이 필요하며, 생각의 침묵 없이 몸의 침묵 또한 불가능하다. 이 세 차원의 침묵이 하나의 영성으로 이루어진 사람은 가장 강력한 언어를 사용한 사람이다. 그의 침묵은 어떤 강의나 설교 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침묵은 끊임없는 웅변이다.
4. 예수의 침묵
예수의 침묵에서 우리는 내적인 침묵의 강력한 힘과 참 권위를 본다. 그 말, 그의 생각 그의 몸짓 하나 하나가 권위 있는 말씀으로 다가서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그 힘은 그가 다른 한편 진정으로 침묵할 수 있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침묵의 예수 단면 하나 : 예수 앞으로 간음한 여인이 잡혀왔다.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한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쓸 뿐이다. 마치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담담하다. 말보다는 몸이 먼저 자신의 뜻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몸의 침묵에서 나오는 침묵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그쳤다. 그들은 '왜 침묵 하냐고' 항의했으나 예수는 이미 침묵으로 말씀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는 그 몸의 침묵으로 발산된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는 입으로 말을 한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침묵 속에서 몸으로 말한다. 그 몸짓은 침묵에서 나와 침묵으로 돌아갔다. 그 침묵의 힘에 사람들은 압도당했다. 그들이 돌아간 이후 다시 말씀하신다. 깊은 침묵의 바다 위에 떠오른 한마디 생명의 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정적 속에 흐르는 예수의 말을 상상해봐라. 그 여인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치유로 다가왔겠는가? 그 치유와 위로는 이미 예수의 침묵에서 온 치유력이었다. 말보다는 침묵에 더 큰 치유력이 있다.
침묵의 예수 단면 둘 : 예수의 침묵은 빌라도에게 재판 받는 상황에서 절정을 이룬다. 예수를 정죄하는 무리들 앞에서, 그리고 그를 심문하는 빌라도 앞에서 항의하거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오직 침묵으로 그들에게 말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침묵을 기이하게 여겼다.(마27:14) 예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침묵으로 답했다. 그 침묵의 무게에 눌려 빌라도는 사실 예수를 놓아 주려하지 않았던가? 침묵 자체가 진리가 아니지만 침묵만큼 진리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붓다와 염화의 미소'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예수는 침묵의 사람이었다. 그의 말의 권위 또한 이 침묵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침묵에서 흘러나온 말의 권위로 예수는 바다도 잠잠케 하셨고(막:4:39), 그를 공격하는 무리들을 잠잠케 하셨고(눅20:26), 악한 영도 침묵케 하셨다.(눅4:35)
5. 침묵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침묵, 그리고 기도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기계시를 통해 인간과 소통하신다. 그러나 자기계시란 말은 결국 우리 인간에게 보여지지 않은 영역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말해지거나 보여지지 않은 영역이 있기에 '계시'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 영역, 말로 표현되지 않고,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 바로 하나님 침묵의 세계이다.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은 그 자신이 먼저 침묵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자기를 계시하는 만큼 자신의 침묵의 세계도 더 넓어진다. 그래서 계시하는 하나님은 동시에 자신을 감추시는 분이시다.
자기를 감추시는 하나님의 모습의 절정은 그 자신이 자신에게 이름 붙이기를 거부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름 붙이기를 요구할 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의 모습으로 그 모든 외적인 규정을 거부하고 이름 붙이기를 거부한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 침묵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름은 실재를 들어내는 하나의 상징이며, 이 상징은 그 실재를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상징으로 이름이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낼 수 없다. 말의 한계를 극복하는 상징조차 하나님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면 말이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침묵의 세계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 침묵의 세계에서 볼 때 그 스스로 드러내는 자기계시는 존재 표현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모두 우리에게 가려있는 신비의 세계요 침묵의 세계이다. 사실 하나님에게서 침묵과 계시는 같은 말이다. 하나님이 침묵은 아니시지만 침묵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요, 자기계시의 형태이다.7) 침묵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리(The locus of God)이요8), 침묵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모습이다.9)
말이 침묵과 하나의 짝을 이루어 상호 교류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인간의 가장 숭고한 언어표현인 기도와 침묵과의 관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침묵 자체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기도이지만, 우리의 언어로 표현되는 기도조차 침묵의 영성에서 깊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임에 틀림없다. 사실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침묵의 기도밖에 없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그 분 앞에 말로서 무엇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나님 앞에서 침묵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가 아니겠는가? 침묵이야말로 끊임없는 기도이다.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사람, 또는 침묵 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 존재를 모르거나 다른 한편 자신을 모르는 경우이다.
하나님은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침묵과 하나님의 만남은 가장 깊고 사랑스러운 소통의 방법이다. 혼잡한 소음이 오가는 시간, 소리를 동반하지 않는 한 줄기 빛이 비춰진다면 그 빛에 베어 있는 정적은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오겠는가? 기도시간은 이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오는 하나님의 침묵을 듣는 시간이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침묵을 깨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을 흡수하는 것이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62:1)라고 노래하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침묵하며 하나님의 침묵을 흡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드리는 최상의 기도이다. 에크하르트는 '나는 앉아 침묵하며 하나님 당신이 내게 말하는 것을 듣겠나이다'라고 기도했다.10)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시편기자는 말한다. '너희는 잠잠하라.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아라'(시46:10) 우리가 잠잠함으로 하나님의 소리 없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듣는 그의 모든 음성은 그의 사실은 그의 침묵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말함 없이 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들음 없이 듣는다. 침묵이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하게 한다.11)
하나님은 침묵으로 말씀하실 뿐이다. 왜냐하면 침묵이 아니고서는 역설적이게 인간은 그의 본 뜻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 때로 침묵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이다. 만약 그의 침묵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의 말씀이나 행위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하나님이 침묵의 말씀을, 그의 침묵의 뜻을 제대로 받아내는 행위가 바로 기도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찾고 잠잠히 하는 것'(시4:4)이다. 그러기에 기도는 침묵으로 시작해서 침묵으로 끝난다.
6. 침묵의 영성이 지닌 세 차원
우선 다시 한번 침묵의 영성은 비움의 영성과 더불어 기독교 영성의 한 부분이 아니라 본질이요 토대라는 사실을 강조해야겠다. 비움의 영성과 침묵의 영성은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볼 때 이 둘은 하나의 영성으로 통한다. 자기 비움을 향한 여정에서 우리는 침묵의 지대(地帶)를 지나야 하고, 침묵을 향한 항해는 비움의 바다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침묵이 기독교 영성과 신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12)
모든 영성의 내용과 실제 영성수련의 행위 또한 이 침묵의 영성에서 시작되고 침묵의 영성으로 모아진다. 침묵 그 자체가 영성의 내용이자 방법이다. '침묵은 온갖 종류의 (영적인) 부를 얻기 위한 수행이다'13) 그렇다면 침묵의 영성을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까?
앞에서 이해한 대로 만약 침묵이 인간 존재가 지닌 본질이라면 그 침묵의 영성 또한 어떤 특정한 수련이나 방법으로 외부에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의 영성이 기능적인 영성 수련의 많고 적음(多寡)에 비례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침묵의 영성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가 침묵의 영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은총 없이 침묵의 세계에 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침묵의 영성에 대한 갈망과 침묵 그 자체이다.
이제 우리 삶 속에서 실제로 침묵의 영성이 드러나는데 도움이 되는 침묵의 영성의 세 가지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이 침묵의 영성의 대전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제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침묵의 영성이 제의적 침묵(ritual Silence)으로 자기 특성을 갖는다는 것은 이 침묵이 바로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면하게 하는 가장 큰 통로이기 때문이다. 또한 침묵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철저한 자기헌신과 자기 포기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영성이 갖는 제의적 성격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침묵'이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우리가 '잠길 침(沈)'이라고 뜻풀이하는 이 한자의 유래는 소(牛)를 물 속에 집어넣으면서 지내던 중국의 고대제사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이 沈 글자는 소를 물에 잠기게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묵'은 우리가 '잠잠 할 묵'이라는 뜻풀이 할 때 이 '잠잠함'은 단순히 소리의 중단이 아니라 우리 전 존재의 모든 행위의 중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몸의 침묵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잠잠함'이다. 이런 제의적 성격으로서 침묵의 영성은 다음 세 가지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1) 성례전적인 침묵(The sacramental Silence): 골방에 홀로 있음14)
제의적 침묵으로서 침묵의 영성은 우선 성례전적인 특징을 지닌다. 침묵의 영성이 성례전적 특성이 있다함은 이 영성은 거룩함을 향한 성화의 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존재의 밖과 안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끊는 침묵의 세계는 거룩의 세계와 만난다. 처음 침묵의 시간을 가질 때 자신 안에 묻혀 있던 온갖 거짓과 욕망과 미움, 헛된 갈망, 질투 등으로 뒤범벅이 된 추한 내면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침묵의 세계로 향하기 위해 치러야 할 통과의례이다. 이것을 지나 생명을 동반하는 침묵의 기운이 온 영혼에 번져갈 때 침묵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聖所)가 된다.
골방에 홀로 있는 시간 속에서 침묵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침묵의 영성은 하나의 성례전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 골방에서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침묵이 내가 알아 듣을 수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으로 전이되고 육화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례전적 침묵은 계시를 이끄는 침묵이요 동시에 계시를 깨닫게 하는 침묵이다. 성령은 우리의 침묵과 하나님의 침묵을 연결시키는 '침묵의 통로'가 된다.
이 침묵을 위해 우리는 자신의 '골방'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 골방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과 홀로 대면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현대인들은 홀로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갖지 못함으로서 침묵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아니 침묵을 상실한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그 침묵의 자리엔 온갖 잡다한 소리와 이미지가 둥지를 틀었다. 기독교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주위에 조용한 공간에 홀로 침묵의 시간을 갖는 이가 드물다. 심지어 홀로 기도할 때조차 입술 주위에서만 맴도는 말로 기도가 낭비되고 폐기 처분한다. 깊은 침묵의 기도보다는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을 선호한다. 골방은 침묵의 기도가 행해질 때 비로소 골방이 된다. 이 골방을 찾아 나서야 할 때다. 골방을 찾아 홀로 침묵으로 하나님 앞에 앉는 시간을 만들고, 침묵으로 자신의 환경을 골방의 세계로 만들어야 한다. 그 골방에 홀로 있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지 않는 이상 침묵의 영성이 솟아나기는 어렵다.
함석헌은 그의 시(詩)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에서 우리의 참 골방이 어디인가를 보여주고 있다.15)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 이 세상의 냄새가 들어오지 않는 / 은밀한 골방을 그대는 가졌는가? / (중략) / 님이 좋아하시는 골방 / 깊은 산도 아니요 거친 들도 아니요 / 지붕 밑도 지하실도 아니요 / 오직 그대 맘 은밀한 속에 있네./ 그대 맘의 네 문 밀밀히 닫고 / 세상 소리와 냄새 다 끊어버린 후 / 맑은 등잔 하나 가만히 밝혀만 놓면 / 극진하신 님의 꿀 같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네/
여기서 골방은 유형적인 골방의 형태보다는 우리의 맘의 골방을 의미한다. 그곳은 온갖 소리와 냄새가 끊어진 마음의 골방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홀로 있을 공간으로 골방을 갖지 못한다하더라도 그 보다 더 중요한 골방은 이미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조용한 골방을 찾아가는 것이 익숙해지면 요란한 소음이 오 가는 거리나 시장 또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조차 자신을 자연스럽게 침묵으로 인도하고 침묵을 지키게 하는 힘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곳이라고 '극진하신 님의 꿀 같은 속삭임'을 듣는 골방이 될 수 있다. 몸의 침묵에 이르는 골방을 만들라!
2) 기다림의 침묵(The Silence of waiting) :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행위
'주님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자'(시편 37장 7절)
하나님 앞에서의 침묵은 기다림을 동반한다. 우선 자신의 존재가 침묵되기를 기다리고, 침묵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침묵을 방해하는 것은 기다리지 못하는 조바심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것, 잠잠히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소망과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시62:1,5) 이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끊임없는 언어다. 고요히 있는 것은 끊임없이 일하는 것이다.'16) 기다림으로 침묵하는 것은 가장 많고 큰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침묵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말과 침묵이 이원적으로 나눠지지 않듯이 행동과 침묵 또한 분리되지 않는다. 기다림의 침묵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의 행위이다.
기다림의 침묵은 하나님 앞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이와 대화 속에서도 이 기다림의 침묵을 가져야 한다. 이 기다림의 침묵을 갖지 못한 사람이 말을 절제하지 못하고 잘못을 저지른다. 남의 말을 들으며 기다리는 침묵이 동반되지 않는 말은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수하기 쉽다. 야고보는 침묵 없는 말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혀로 표현한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세상살이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 망쳐버리는 악의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혀 자체도 결국 지옥 불에 타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모든 들짐승과 새와 길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을 길들일 수 있고 또 지금까지 길들여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약3:6-8) 야고보의 이 한탄과 절망에 가까운 표현 속에서 말의 절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동감하게 된다. 우리의 혀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은 단순한 의지나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침묵에서 비롯된다. 남의 말을 다 듣기까지 기다려 속단한 말을 삼가고, 자신의 말이 침묵을 통해 의미가 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비결이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운 것(잠10:19)이나 또 '죽고 사는 것이 혀끝에 달렸다'(잠18:21)라는 말씀 또한 모두 기다림의 침묵으로 절제되지 않는 말의 횡포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침묵한다. 잠언 지혜자는 '미련한 자라도 침묵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긴다'(잠17:28)라고 말한다. 또 아모스는 이 세상이 어두울수록 지혜자는 잠잠해야 한다고 말한다.(암5:13) 이것은 불의를 보고 참거나, 또는 현실을 도피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먼저 말하고 행동할 때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때를 분별하고 기다리는 침묵은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이요, 가장 힘있는 저항의 하나이다. 이 침묵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며 무지(無知)의 환상으로부터 구해 준다. 침묵을 기다리고, 침묵으로 기다려라!
3) 연합하는 침묵(The unifying Silence) : 침묵으로 하나됨
침묵은 들려오는 말 너머를 보게 한다. 말하는 이의 입술 너머, 설교하는 이의 음성 너머에 있는 세계를 보게 한다. 그 말이 침묵에서 온 경우는 침묵의 세계가 서로 만남으로 상호 감동이 전달된다. 만약 듣는 이가 말하는 이의 침묵을 보지 못하고, 혹은 그 반대로 말하는 이가 침묵에서 나온 말을 하지 않을 때 진정한 소통은 없다. 독백은 상대방의 침묵을 깨트리고, 진정한 대화는 침묵을 돋군다. 상호 침묵이 돋아 날 때 서로 하나됨을 경험한다. 각 존재의 침묵과 침묵이 만나 하나로 연합되는 상태가 침묵의 가장 고귀한 열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침묵과 나의 침묵이 만나 그와 연합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영혼의 소음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처럼 우리를 그와 연합시키는 신비의 언어다.
인간이 침묵을 배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바로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이 내 뿜는 침묵의 기운을 받아드리면서 자연의 침묵을 배운다. 자연은 우리에게 침묵으로 존재한다. 자연만큼 그 본래적인 존재의 침묵을 깊이 있게 들어내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자연의 침묵 앞에서 인간의 말의 허상을 보게 된다. '자연 속의 침묵이 너무도 농밀해짐으로써 자연 속의 사물들이 다만 침묵을 더욱 심하게 응축한 것처럼 보일 때에는 인간 역시 더 이상 말을 소유하지 않게 된 것처럼 보이고, 말은 다만의 침묵의 갈라진 틈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17) 인간이 자연과 침묵의 교류가 이뤄 질 때 인간 또한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 명확해 진다.
자연의 침묵을 들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 대화를 하게 된다. 나무와 풀과 시내, 그리고 햇빛 등과 소리 없는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이 대화로 우리 스스로 자연임을 자각하는 축복을 경험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침묵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연과 하나됨을 체험한다. 침묵이 소통으로, 소통이 다시 하나됨으로 향하는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실재와 연합하게 하는 침묵을 발견하게 된다. 침묵으로 연합하고, 침묵 안에서 하나 되라!
7.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침묵
이상에서 다룬 성례전적인 침묵과 기다림의 침묵, 그리고 하나로 연합하게 하고, 연합되는 침묵 이 세 가지 종류의 침묵은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며 침묵의 영성 속에서 상호 연결되어 있는 영역이다. 각기 강조하는 한 부분을 위해 다른 두 침묵의 세계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후원한다. 침묵의 영성을 위해 이 세 가지 차원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영역, 즉 예배, 찬양, 기도, 봉사와 선교 모든 영역에서 실천되어야 할 덕목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침묵은 결코 인위적인 강요나 기술적인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강요된 침묵은 참 침묵일 수 없다. 심지어 나 자신의 침묵도 내 스스로 강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침묵은 자발성에서 비롯되는 인간됨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인간을 창조 본래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다. 그리고 묻혀있는 심연(深淵)의 침묵이 되살아나게 하는 것도 우리 인간 능력의 밖에 일이다. 우리 안에 '처음에는 이 침묵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억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침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다 깊은 침묵에서 이끌어 줄 어떤 것이 우리 마음 안에 싹트게 된다.'18) 깊어지는 모든 영성이 그렇듯이 침묵의 영성 또한 성령의 활동하심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 존재 안에 본래적으로 담겨 있는 침묵의 세계에 대한 눈빛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침묵이야말로 오늘 인류가 회복해야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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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말을 중요시하고, 불교는 침묵을 중요시한다는 인식을 갖는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침묵의 세계 없이 성립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인식은 두 종교 태생이후 후천적인 성격 규명에 불과하다. 모든 종교는 침묵의 영역에 뿌리 박고 있다.
2) 막스 피카트로, 『침묵의 세계』(최승자 역), 까치, 1999, p.21
3) 앞의 책, p.36
4) H. Ott, "Silence and Revelation in christianity", in: Pro Dialogo, Bulletin 100 1991, Rome, p.39
5) '말과 생각을 초월한 상태가 침묵인데, 그것은 마음의 활동이 없는 명상입니다. 마음을 조복(調伏) 받는 것이 명상이고, 깊은 명상은 영원한 언어(즉 침묵)입니다. 침묵은 항상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영원한 흐름입니다. 그 것이 말에 의해 중단되는데, 왜냐하면 언어가 이 무언의 '언어'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슈리 라마나스라맘 엮음, 『마하르쉬의 복음』 (대성 옮김), 탐구사 2000, p.29
6) '만약 그 침묵 속에 싱그러움(freshness)과 또렷함이 있다면, 만약 자신의 자각이 빛나되 자신이 즐겁고 완전히 평안함을 느낀다면, 이것은 진정한 침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이러한 자각, 이러한 깨어있음이 없다면 염송(jana)과 명상(dhyana)을 계속하는 것이 낫습니다.' 바가반의 말씀을 따른 삶』, p.431
7) H. Ott, "Silence and Revelation in christianity", in: Pro Dialogo, Bulletin 100 199/1, Rome, p.29
10) “Ich will sitzen und will schweigen und will hoeren, was Gott in mir spreche...", H. Ott, "Silence and Revelation in christianity", in: Pro Dialogo, Bulletin 100 199/1, Rome, p.31 재인용.
11) 토마스 머톤, 『침묵 속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분도츨판사, 1983, p. 55. 참고로 하나님의 침묵을 다른 측면에서 조망한 성서구절이 있다. 아삽은 시편을 통해 하나님께 침묵을 깨시기를 기도한다 :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시83:1) 이것을 문제 글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주되심과 이 땅에 가장 높으신 분을 멸시하는 분'임을 알게 하시리라고 간구하는 기도문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들에 자신을 드러내시라는 기도문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임을 보게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이들이다.
12) H. Ott, “Silence and Revelation in christianity", in: Pro Dialogo, Bulletin 100 1999/1, Rome, p.31
13) 데이비드 가드먼, 『바가반의 말씀을 따른 삶』(대성 옮김), 탐구사 2000, p.326
14) (주: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세 가지 종류의 침묵은 오토의 분류에서 빌어온 것이지만 그 해석과 적용은 필자의 것이다. 다음 글을 참고하라. R. Panikkar, The silence of God, NY Orbis, 1989, p.226, R. Otto, "Sacramentales Schweigen", Die christliche Welt(1929)
첫댓글샬롬 말씀은 참유익한 말씀인데 성경외에 말씀도 많으시네요 골2장20-23사람의 명과 가르침은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말씀들은 굳이 성경책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많은 책들이 있지 않은 건가요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인줄로 압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마음의 표현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지라라고 했듯이 육으로 난자들은 세상의 명과 가르침에 자신의 이성으로 들을때에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게 보이므로 감동도 받고 눈물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말씀을 보더라도 육의 눈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
말씀으로 믿을 수 있고 감동감화 받을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자는 다짐도 얼마든지 할수 있읍니다 그러나 롬8장7절: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수도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다만 요3장6절은 육으로 난것은 육이요 라고 하셨듯이 세상의 명과 가
르침과 육으로 보는성경의 기준은 진리로 이끌게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므로 영혼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세상의 초등학문 입니다 몽학선생의 역할은 실재성과 한도성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머물게 되면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먼저 육으로 나게 하셔서(율법.세
첫댓글 샬롬 말씀은 참유익한 말씀인데 성경외에 말씀도 많으시네요 골2장20-23사람의 명과 가르침은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말씀들은 굳이 성경책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많은 책들이 있지 않은 건가요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인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은 우주에 충만하다 했지요. 한꺼번에 다 읽을 시간이 없어서 몇번에 와서 다 읽고는 메마른 심령에 샘물이 터져 오가는 손님의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한없이 울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고하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침묵이 존재(진리)의 깊이를 들어낸다면 말은 그 존재(진리)의 넓이를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양자 모두가 매우 중요하다.=> 감동적이네요. 개개인이 깊이를 더하여가는중에 이웃간의 사랑이 넓이를 더하여 주는군요. 전하지 않는데 누가 들으리요~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마음의 표현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지라라고 했듯이 육으로 난자들은 세상의 명과 가르침에 자신의 이성으로 들을때에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게 보이므로 감동도 받고 눈물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말씀을 보더라도 육의 눈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
말씀으로 믿을 수 있고 감동감화 받을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자는 다짐도 얼마든지 할수 있읍니다 그러나 롬8장7절: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수도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다만 요3장6절은 육으로 난것은 육이요 라고 하셨듯이 세상의 명과 가
르침과 육으로 보는성경의 기준은 진리로 이끌게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므로 영혼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세상의 초등학문 입니다 몽학선생의 역할은 실재성과 한도성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머물게 되면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먼저 육으로 나게 하셔서(율법.세
상의 초등학문)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영혼의 구원에 다다를수 있도록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게 하시다가 결국은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에 다다를수 있는 영의 말슴을 주셔서 아들로 삼아주셔서 때따라 주시는 말씀으로 온전하게 길러 주시는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