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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陰山)=백산(白山)=천산(天山)=천지(天池)을 찾아가 볼까!
○ 음산(陰山)은 조선사(朝鮮史)와 대륙 사(大陸史)에서 참말로 헷갈리게 만드는 산(山)의 이름이다. 하투(河套)지방에 있다【중원(中原)서북(西北)을 흐르는 하(河)의 남안(南岸)에 있다고 한다.】고 하지만, 산(山)의 실체(實體)가 없는 유명한(?) 산(山)의 이름이며, 지도(地圖)에 조차 표시(標示)되어 있지 않다. 【고지도(古地圖)마다 달라서 표시(標示)되어 있는 것도 있지만 아예 표시(標示)가 없는 것도 있다.】고전(古典)에서는 흉노(匈奴)와 관계(關係)되는 곳엔 어김없이 등장(登場)하는 산(山)의 이름이 “음산(陰山)”이다.
대륙(大陸)의 지형도(地形圖)를 보면, 중원(中原) 북방(北方)의 황하(黃河)북안(北岸)의 산맥(山脈)을 보면, 〔랑산(狼 山). 양산(陽山)산맥(山脈) 또는 음산 산맥(陰山山脈), 대청(大靑)산맥(山脈)등등으로 어떤 이름이 정식(正式)이름인지 조차 알 수 없으며, 내몽고(內蒙古) 세부(細部)지도(地圖)를 보아도, 음산(陰山)은 아예 없다.〕
또한 대륙(大陸)왕조(王朝)들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여러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들이 이곳을 중심(中心)으로 흥성(興盛)했다고 하며, 청(淸)나라에 끌려간 “조선(朝鮮)의 왕자(王子)”들이 청(淸) 황자(皇子)들과 “음산(陰山)”에서 수렵(狩獵 : 사냥)을 했다고 하는 등, 반도(半島)와는 관계(關係)없는 곳이나,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찾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重要)한 산(山)의 이름이며, 대륙(大陸)왕조(王朝)들의 흉노(匈奴)와의 전쟁(戰爭)때 등장(登場)하는 “음산(陰山)”은 그 강역(疆域)의 실체(實體)를 찾는데 매우 긴요(緊要)한 자료(資料)가 된다.
○ 전회(前回)에, 「음산(陰山)은 금산(金山)을 말한다.」고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편을 인용(引用)하여, 설명(說明)하였다. 그러나 해국도지(海國圖志)에는 또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 위치(位置)가 남쪽 산(山)이냐? 북쪽 산(山)이야? 하는 차이(差異)일 뿐, 중요(重要)한 것은 「“음산(陰山)”은 현 신강 성(新疆省)지방(地方)에 있었으며, 이곳이 이민족(異民族)이었던 흉노(匈奴)들과의 접경(接境)지역이었다.」는 이야기다.
➥ 현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말하는 “음산【陰山 : 하투(河套)지방】”에서,「약간(若干) 서북(西北)쪽 방향(方向)으로 1,800-1,900km【약 4,800 리 – 5,000 리】를 더 가야하는 곳【현 신강 성(新疆省)의 금산(金山 : 독사방여기요)과 천산(天山 : 해국도지)이다.】에 있다」는 얘기다.
음산(陰山)의 실체(實體)만 찾는다고 하면,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절반(折半)의 성공(成功)은 한 셈일 것이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음산(陰山)의 실체(實體)가 해국도지(海國圖志)속에 숨어 있었다.” 비록 찜찜한 구석은 있으나, 해국도지(海國圖志)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음산(陰山)은, 곧 천산【天山 : 박격달산(博格達山) : 세대의 봉우리가 있다고 한다.】이러고 못 막고 있다. 음산(陰山)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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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國圖志 / 西 南 洋(沿革)
〔邱 長 春 西 遊 記 / 真 人 長 春 子, 姓 邱, 名 處 機, 登 州 棲 霞 人 : 구 장춘서유기(邱 長 春 西 遊 記) / 진인(眞人)으로 장 춘 자 , 성은 구(邱)이며, 이름은 처기(處 機)로 등주(登州)서하(棲霞)인이다.〕【진인(眞人) 구 장춘(邱 長 春)은 몽고(蒙古) 황제(皇帝)의 요청(要請)으로 서역(西域)을 여행(旅行)한 기행문(紀行文)인데, 음산(陰山)과 관계(關係)되는 기록(記錄)을 발췌(拔萃)한 것임.】
<본문(本文)> / (中略).八月傍大山西行,約三日,複東南行,過大山,經大峽. : 8월 큰 산(山) 서(西)쪽으로 약 3일을 가다가, 다시 동남(東南)쪽으로 가, 큰 산(山)을 지나, 큰 골짜기를 지났다. 中秋日,抵金山東北,其山高大,深穀長阪,車不可行. : 중추(中秋)일, 금산(金山) 동북(東北)에서 가로막혔는데, 그 산(山)은 대단히 높고 커, 깊고 긴 비탈길이어서 거마가 갈 수 없었다. 三太子出軍,始辟其路,縣轅以上,縛輪以下,約四程連度五嶺,南出山前臨止泊 : 3태자가 군(軍)을 나와, 처음 길을 피해, 수레 양쪽위에 줄을 매달고, 수레바퀴 아래에 끈을 매달아, 약 4정(程)을 연속하여 오령(五嶺)을 넘었는데, 남쪽의 산 앞의 물가에 임해 정지하였다.【傍大山者,即傍阿爾泰山之東大幹也,乃向西南行,當取道於今科布多,再西南,乃科布多河及額爾齊斯河發源處,為阿爾泰山之脈脊,故曰經大峽抵金山東北也. : 큰 산은, 곧 아이태산(阿爾泰山)의 동쪽 큰 줄기인데, 서남(西南)쪽으로 뻗어있으며, 이번에 취한 과포다(科 布 多)길이다, 재차 서남(西南)으로 향하는데, 과포다하(科布多河)와 액이제사하(額爾齊斯河)의 발원처이며, 아이태산(阿爾泰山) 산맥의 등성마루인데, 큰 골짜기를 지나면 금산(金山)에 막히는 동북(東北)쪽이다. 南出山臨河,當是烏隆古河,劉鬱西使記謂之龍骨河): 남쪽의 산을 나오면 하(河)에 닿는데, 당시(當是) ‘오륭고하(烏隆古河)’인데, 유울 서사기(劉鬱西使記)에서 말하는 용골하이다.】渡河而南,經小童山七十裏,又鹵地三十裏,宣使與鎮海議曰:此地最難行,前至白骨甸,行二百裏,達沙陀北,頗有水草,更涉沙陀百餘裏,方及回紇城. : 하를 건너 남쪽으로, 조그마한 동산을 지나 70 리에, 또 로지(鹵 地) 30리를 지났는데, 선사 진해의가 말하기를 : 이곳 땅은 가장 어려운 길인데, 백골 전(白骨 甸)에 앞에 이르러, 2백리를 가, 사막(沙漠)의 비탈진(沙陀)곳이 북쪽으로 달해 있는데, 수초(水草)가 조금 있을 뿐이며, 재차 사막(沙漠)의 비탈진 길 백여(百餘)리를 건너면, 회흘(回紇)성이다. 所謂白骨甸者,古之戰場.疲兵至此,百無一還. : 소위 백골 전(白骨甸)이며, 옛 전장 터인데, 병사들이 이곳에 이르면 병들고 지쳐버려, 한 번 돌아오는 것이 어렵다. 頃者乃滿部大敗於此,須暮起夜渡其半,明日向午方得水草,但黑夜魑魅為祟,當塗血馬首以厭之. : 근래 들어서 만부(滿部)가 크게 이곳에서 패하였는데, 날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밤에 기동하여 그 반수가 건너가, 명일(明日) 낮을 향해 가 수초(水草)를 득했는데, 다만 어두운 밤에는 이매【魑魅 : 얼굴은 사람모습을 가지고, 몸은 짐승모양을 한 귀신으로 사람을 흘린다고 한다.】를 숭배해야 하는데, 말의 피를 얼굴에 바르고 이를 막아야 한다. 師笑不答翌日過沙陀,南望天際若銀霞,疑為陰山. : 미소도 대답도 아니 하고 익일(翌日) 사타를 건넜는데, 남쪽을 바라보니 하늘 사이에 아득하게 은빛이 보이는데, 음산(陰山)인 것 같다.【徐鬆曰:金山東北與烏魯木齊所屬之古城南北相直,今自科布多赴新疆驛路,南抵古城之鄂倫布,之<古立>克台,之蘇吉台,之噶法台,皆沙跡,即白骨甸也. : 서 송(徐鬆)이 말하기를 : 금산(金山) 동북(東北)의 오노목제(烏魯木齊)에 속한 옛 성(城)은 남쪽과 북쪽이 서로 곧바른데, 이번 길은 과포다 신강의 역로(驛路)이며, 남쪽은 옛 성(城)에 막혔는데 악륜포이며, ‘고립’ 극태로, 소길태이며, 갈법태인데, 모두 사적(沙跡)으로, 곧 백골 전(白骨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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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음산(陰山) : 현(現) 신강 성(新疆省)의 오노목제(烏魯木齊) 주위에 있다. 이는 곧 천산(天山)을 말한다. 아래 기록(記錄)에 자세(仔細)하다.
➋ 백골 전(白骨甸) 과 사타(沙陀)는 모래사막의 비탈진 특이지형(特異地形)지대(地帶)를 일컫는 말로 준갈이(準喝爾)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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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本文)> / 八月二十七日抵陰山後,回紇交迎至小城北,告曰:此陰山前三百裏和州也. : 8월 27일 음산(陰山) 뒤에 다다라, 회흘(回紇)이 조그만 성(城) 북쪽에서 서로 맞았는데, 고하기 말하기를 : 이 음산(陰山) 전(前) 3 백리(百里)가 화주(火州)입니다 하였다. 翌日,沿州西行,禾麥初熟.西即鱉思馬大城,回紇王部族勸葡萄酒,供花果. : 익일(翌日), 고을을 따라 서행(西行), 벼와 보리가 처음 익었다. 서쪽 곧 별사마대성이다. 회흘(回紇)왕과 부족(部族)들이 포도주(葡萄酒)를 권하며, 화과(花果)를 제공했다. 告曰:此大唐時北端州府,景龍三年,楊公何為大都護,有龍興西寺,二石刻紀其功德.其東數百裏,有西涼府.其西二百餘裏,有輪台縣. : 고하여 말하기를 : 이곳은 당나라 때의 북(北) 서주 부(瑞州府)로, 경용(景龍)3년, 양공(楊公) ‘하(何)’가 대도호(大都護)로, 용흥서사(龍興西寺)가 있는데, 두 개의 돌에 그 공덕을 새겨 놓았다. ►唐之邊坊,往往尚存.此陰山非河套之陰山,乃天山也.博克達三峰,去古城北數日程,即見之。: ►당(唐)의 변방 마을로,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이 “음산(陰山)”은 하투(河套)의 음산(陰山)이 아니며, 천산(天山)이다. 박 극 달(博克達)의 세 봉우리로, 옛 성(城)의 북쪽 수일(數日) 정(程) 떨어져 있는데, 곧 보인다. 故 長 春 詩 有 “三 峰 並 起 插 雲 寒” 之 句. : 장춘(長春)의 시(詩)에, “ 세 개의 봉우리가 구름과 추위를 일으킨다.”는 구절이 있다. 其陰山前三百裏和州者,謂天山以南吐魯番為古火州地,訛火為和耳. : 그 음산(陰山) 앞 3 백리에 있는 것이 화주(火州)인데, 천산(天山)의 남쪽 토 노 번(吐魯番)이 옛 화주(火州)로, 화(火)가 화(和)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唐北庭大都護府,在今濟木薩之北.端州者,端即都護字之合音。輪台縣治,在今阜康縣西五六十裏,縣治在博達克山背,故南望陰山。: 당(唐)나라의 북정도호부는 지금 ‘제 목 살(濟 木 薩)의 북쪽에 있다. 서주(瑞州)의, 서(瑞)는 곧 도호부(都護府)의 자(字)로 합친 음(音)이다. 윤대 현(縣)에서 다스렸으며, 지금 부강 현(縣) 서쪽 5, 60리에 있다. 程同文曰:鱉思即別失,歐陽圭齋曰:北庭今別失八裏也,則元時別失八裏,正在於此. (中略) : 정 동문(程 同文)이 말하기를 : 별사(鱉思)는 곧 별실(別失)로, 구양규제가 이르기를 : 북정(北庭)은 지금 별실 팔리(別失八裏)이며, 원(元) 때 별실 팔리(別失八裏)로, 이곳에 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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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本文)> / 翌日並陰山而西約十程,又度沙場,一晝夜方出,蓋白骨甸大沙分流也。: 익일(翌日) 음산(陰山)에서 서쪽으로 약 십정(十程)정도에서 또 사막(沙漠)을 건너, 하루 낮과 밤을 나왔는데, “백골 전(白骨甸)”의 대 사막이 나누어져 갈라진 곳이다. 南際陰山之麓,逾沙又五日,宿陰山北,詰朝南行,長阪七八十裏,翌日又西南行二十裏,忽有大池,方圓幾二百裏,雷峰環之,倒影池中. : 남쪽 음산(陰山)의 산기슭 사이로, 사막을 넘어 또 5일을 가, 음산(陰山)의 북쪽에서 묵고, 아침에 남쪽으로 가, 긴 비탈 7, 80리를 가, 익일에 또 서남(西南)쪽으로 20 리를 가, 돌연 큰 못이 있는데, 그 방원(方圓)이 2백리에 이르는 것 같고, 사나운 봉우리에 둘러싸여, 못 가운데 거꾸로 비쳐있다. 師名之曰天池,沿池正南下左右峰巒,眾流入峽,曲折六七十裏. : 그 이름이 “천지(天池)”이다. 못(천지)의 곁 정남(正南) 아래 좌우(左右)에는 산꼭대기가 뾰족뾰족하고, 골짜기로 무리들이 들어오는데, 굽고 꺾인 것이 6, 70리이다. 【徐鬆曰:沙場者,晶河城東至托克多積沙成山,東距阜康千一百裏,故雲十餘程,其間當過數小河,此不言者。: 서 송(徐鬆)이 말하기를 : 모래사막은, 정하(晶河)성 동(東)으로부터 ‘탁 극 다(托 克 多)’에 이르는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산(山)이며, 동쪽으로 부강(阜康)에 1천1백리 떨어져 있는데, 십여(十餘)정에 이르며, 그 사이는 불과 조그만 소하천이 있는지 이것은 말할 수 없다. 夏雪融則漲,冬則涸,此九月過之故不知有水也,自托克多至晶河,山行五百餘裏,至賽喇木泊.東岸泊正圓周百餘裏,即天池海. : 여름에는 눈이 녹아 물이 넘치고, 겨울에는 마르는데, 이 9월에 이곳을 지나가는데 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탁극다(托克多)”로부터 정하(晶河)에 이르기까지, 산(山)으로 5백 여리를 가면, 새라목박(賽喇木泊)에 다다르는데, 동쪽 언덕에 있는 못 주위가 백여(百餘)리이며, 곧 천지 해(天池 海)이다.】 二太子扈從西征,始鑿石理道,刊木為四十八橋,橋可行車翌日方出,入東西大川,次及一程,至阿裏馬城. : 둘째태자가 서정(西征)에 따라갈 때, 처음으로 뚫어 돌로 길을 만들고, 벌목하여 목교 48개를 만들었는데, 다리는 거마가 통행이 가능하여, 익일에 나가, 동서(東西)에 있는 대천(大川)에 들어가, 다음 1 정(程)에, 아리마성에 닿았다. 鋪速滿國王暨蒙古塔剌忽且來迎,宿於西果園.土人呼果為阿裏馬,因以名城. : 포속만국의 왕인 몽고 탑랄홀이 이미 나와 영접하여, 서과원에서 묵었는데, 토인(土人)들이 과(果)를 아리마로 부르는데, 이것으로 인해 성(城)의 이름이 되었다.【東西大川,即今阿裏瑪圖河也,阿裏馬,元史作阿力麻裏,即伊犁城也. : 동서(東西)대천(大川)은 지금의 아리마도 하(阿裏瑪圖河)인데, “아 리 마”는 원사(元史)의 아 력 마리(阿力麻里)로 곧 이리(伊犁)성(城)이다. 元史又作葉密裏,又作葉密立,皆即此城.本朝名之曰伊犁.以唐書伊列河得名,恐亦即葉密立之音轉。: 원사(元史)에서 또 엽밀리(葉密裏)이며, 또 엽밀립(葉密立)이다. 모두 곧 이 성(城)이다. 본조(本朝)에서는 이리(伊犁)라 한다. 당서(唐書)에서는 이열 하(伊列河)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또한 곧 ‘엽밀립’의 음(音)이 변한 것이다. 又西行四日,至答剌速河,土人呼河為沒輦雲.水勢深闊,從東來抵西北,截斷陰山,河南複是雪山. : 또 서쪽으로 4일 가면, 답랄속하(答剌速河)에 이르는데, 토인(土人)들은 하(河)를 몰련(沒輦)이라 부른다. 수세(水勢)는 심히 넓게 통하고, 동쪽을 따라 내려오다가 서북(西北)에서 막히는데, 음산(陰山)의 단애에 끊긴다. 】
※ 위의 번역(飜譯)은, 지형지리(地形地理)적인 면(面)을 강조(强調)한 것이며, 그 나머지 문제(問題)는 등한시(等閑視)한 것임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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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산(陰山)」에 대한 실체(實體)는 그 위치(位置)가 아주 중요(重要)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보아진다.
연도기행(燕途紀行) /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 〔1630년(인조 8) 인평대군으로 봉해졌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扈從)했다. 먼저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 林 大 君:뒤의 효종) 두 형을 이어 1640년 심양[瀋 陽]에 끌려가 다음해 귀국했다. 그 뒤 1650년부터 4차례 사은사(謝恩使)로 청에 다녀왔다. 〕을 것을 미리 알고 본문을 보면 쉽지 않을까?
본문(本文) /〔曁昭顯.從淸人獵於建州之牛毛嶺.嶺卽渡遼時吾東營將金應河死節地.陰山大獵.縱云壯觀.露宿霜雪.驅馳氷路.喫盡苦狀.還到瀋陽。 : 10월에 나는 금상(今上) (효종이 잠저에 있을 때임) 과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장남)를 호종, 청인(淸人)을 좇아 건주(建 州) 牛 毛 嶺에 가서 사냥을 했다. 이 고개는 곧 요동(遼東)을 건너갈 때 우리나라 영장(營 將) 김응하(金 應 河)가 절사(節 死)한 곳이다. 음산(陰山)에서 하는 큰 사냥이 비록 장관이라고는 하나, 서리와 눈 위에서 노숙(露宿)하며 얼음길을 달려 다니노라니 고생이 심하였다. 심양으로 돌아왔다.〕〔仲秋.昭顯及今上.復從淸主.轉向燕山.余則惆悵東歸. : 중추(仲秋 : 음력 8월) 소현세자와 금상은 다시 청주(淸 主)를 좇아서 다시 연산(燕山)으로 향했고, 나는 쓸쓸하게 동쪽으로 돌아왔다. 〕고 하였다.
● 음산(陰山)
1) 중원(中原) 서북(西北) 황하(黃河) 연안(沿岸)에 있다고 하는데, 그 실체(實體)가 없는 산(山)의 이름이다.
2) 현(現) 신강 성(新疆省) 토 노 번(吐魯番) 서북 300 리에 있는 천산【天山 : 천지(天池)가 있는 박격달산(博格達山)】이 곧 “음산(陰山)”이다.
이럴 때, 위의 연행(燕行)기록(記錄)을 살펴보면서, 지형지리(地形地理)적으로 논해보자. 과연(果然) 무엇이 진실(眞實)일까?
○ 하나하나 예를 들자면 끝도 없는 이야기가 계속될 것이니, 예를 하나 들어본 것이다. 조선사의 실체(實體)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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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朝鮮王朝)가 황제 국(皇帝國)이요, 천자 국(天子國)이라는 것에 초점(焦點)을 맞추다 보면, 조선(朝鮮)의 실체(實體)가 가려지게 된다. 조선(朝鮮)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었는가? 이것에 따라 천자 국(天子國)이나 황제 국(皇帝國)도 될 수 있으며, 사대(事大)하던 제후(諸侯)인 “전하(殿下)”도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봉건왕조(封建王朝)시절엔 국경(國境)은 무의미(無意味)하다는 분도 계시는데,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철통(鐵桶)같은 의미(意味)의 국경(國境)은 아닐지라도 변방(邊方)을 지키는 요새(要塞)와 진(鎭)이 있고, 성(城)이 있으며, 나라의 융성(隆盛)으로 확장될 때는 당연(當然)히 그 변방(邊方)지방 역시(亦是) 확장(擴張)되어, 변방(邊方)지방은 더욱 넓어지게 되며, 왕조(王朝) 말기(末期) 상황(狀況)이 오면 영역(領域)은 더더욱 축소(縮小)되어 절반(折半) 이하(以下)로 줄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주(主) 영역(領域)이 어디였느냐? 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 카페에서 대륙(大陸)지방의 “물”문제를 갖고, 강역(疆域)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곳의 서(西)쪽 지방은 더더욱 심하며, 유럽지방이나 가야 좀 나은 편이며, 중국(中國)이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에 왜 “차(茶)문화(文化)”가 발달(發達)되었는가? 이런 문제(問題)는 사실 상식적(常識的)인 이야기에 속하는 것인데........툰드라지대에도 수만(數萬)년 전(前)이나 지금이나, 때가 되면 새싹이 나고, 또 꽃이 핍니다. 한두 가지 문제(問題)를 가지고 전체(全體)를 논(論)하는 우(愚)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有意)했으면 좋겠습니다.
2013년 09월 15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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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동여지전도의 한문애 ,,,, 산이 삼층으로 되어있고 천지는 2백리'''' 라고 하였으니 문무님 의 이글에서 말하는 박격달산 밝달산에 둘레 이백리의 천지가 있으므로 백두산은 이산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산이 삼층으로 되어있다는 말은 신강성에서 보면 천산이 골륜산 과 기련산을 거느리고 있기에 삼층이라고 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수당이 반란을 했고 원이 반란을 했고 왜가 호가 반란을 했지여.... 당연한 것 아닌가여, 수 천년 반란이 없을 수 없고 자신들도 천자의 지위를 누리고 싶겠지요. 인간의 당연한 심리입니다.
서방의 조그마한 제후였던 "진"은 문공이후, "영"에 의해 처음으로 황제를 칭했으나, 결국 이세들의 바보같은 짓으로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시골 향 출신의 유방에게 황제자리를 넘겨주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올바른 역사 곧 진실인가? 천자가 하늘의 뜻에 반하면, 곧 정의의 제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천리입니다. 수많은 반란과 내란등이 있었으나, 잘 견뎌냈다고 보아지나, 결국 무너진 것입니다. 앞으론 과거와 같은 영광은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 정론일 것입니다. 그래도 진실은 찾아야겠지요!
자치통감, 통전, 독사방여기요, 해국도지, 당회요, 태평어람등등의 25사 외의 역사서가 그래도 덜 교정이 된 것 같습니다. 25사는 확연하게 왜곡된 것이 보입니다. 비교를 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더군요. 음산은 곧 백두산, 곧 장백산이란 믿음이 강하게 듭니다. 성원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길.......바랍니다.
음산이 백두산이 되려면 백산말갈이 있어야 하는데 백산 말갈이 음산에 살았을 가여. 말갈의 7부족은 상당히 넒은 지역에 분포 했다고 하지만 전 아니라고 봅니다.
<망국의 한>님의 말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 장백산=백두산=백산의 위치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확한 곳을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 정황과 기록을 가지고 추적, 추정하는 것 뿐입니다. 여기서 말갈은 곧 옛 숙신이라고 했다는 고전을 인용해보면, 그들은 <서쪽과 북쪽>사이에 살던 종족이라는 "산해경이나 회남자전"등, 자치통감, 통전등의 기록을 상기할 필요가 있지요. 백산=장백산=백두산은 여러 가지 인용문으로 보아 현 신강성지방에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러한 곳에 숙신과 말갈이 이어 살았다면 "소위 중원왕조"라고 하는 <한, 수, 당>등은 신강성의 서남지방에 있어야 합니다.
소위 중앙아세아와 그 남부지방등이 "옛 중원왕조(현 역사해설 상)"라는 자들이 있던 곳이며, 그 동쪽지방은 바로 "조선(구분 상)" 왕조의 영역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주강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통상 말할 때 "조선은 1만리"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곳으로부터 동쪽이 일만리 영역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일만리라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조선(통칭)의 조정이 어디에 자리잡고 있었는가" 이겁니다. 물론 조선의 여러 왕조가 서른 다른 곳에 있었으나, 옛 조선의 적장자격인 나라들을 말하는 것이며, (1) 반도냐 (2) 북방삼성이냐 (3) 대륙의 황하 황축선 상이냐 (4) 중앙아세아지방이냐 하는 것인데, (3)번의 황하 횡축 선상에 있었다는 것은 문헌으로 고증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4)의 중앙세아지방은 도무지 문헌상의 고증이 없으며, 이곳은 초 불교지역이었으나, 12-13세기경에 이슬람으로 개종됩니다. 이슬람과 조선! 만약 이슬람과 조선이 한 몸이었다면,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역사가 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