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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화두는 개혁과 통일이다. 누구나 열망하는 통일이기에 통일이 선진한국의 필수적 과제이면서도 합리적 통일의 논의는 어려워지고 있다.
통일지상주의는 경직된 사고체계다. 따라서 관념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토론을 불허한다.
이념과 사상의 갈등에 포용적이지 못한 우리 사회는 통일의 건전한 의견이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통일이냐는 물음에 정답이 없다. 통일문제는 남북의 통일에 앞서 남남(南南)간의 합의와 통일이 우선해야 한다.
통일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형태(形態)적 통일과 실질(實質)적 통일이다. 여기서 형태적 통일은 중앙집권적 단일정부의 형태를 말한다.
실질적 통일은 상이한 체제 속에 자유통행과 이주의 자유 등 실제 행동이 보장되는 관계라 하겠다.
통일은 오랜 시간의 통합과정을 거친 결과다.
이 말은 남북이 평화적 공존과 체제경쟁의 시공(時空)을 거쳐 살아남는 어느 한 체제가 통일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통일은 과정의 ‘종착역’이기에 거쳐야할 정거장이 있기 마련이다. 경유해야 할 역(station)이 있다는 것은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경유해야 할 중간역을 지나칠 때 문제는 엉킨다. 때문에 통일지상주의가 반통일 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을 낳게 된다.
민족의 지상과제, 지상명령에 누가 반대할 수 있는가? 특히 정치인에겐 더욱 그렇다. 70년대 판문점에서의 적십자회담을 보자.
당시의 북한적십자 수석대표인 김태희는 “남의 김서방, 북의 박서방 찾아 가자는데 무슨 사대주의적인 적십자사의 심인(尋人)사업절차가 필요한가?”
하며 남북 자유 왕래를 주장했다. 중간역을 완전히 건너 뛴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통일의 당위성만을 내세울 때 통일 방안의 구체적 실현성이 도외시되기 때문이다.
남한 자체의 내부문제, 예를 들어 지역갈등, 빈부격차, 세대 간의 갈등구조의 해소보다 통일정책이 쉽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산일 것이다.
대북협상이 여야협상 보다 쉽게 느껴진다면 남북대결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파악이 안됐다고 할 수 있다.
왜 통일인가? 우리가 단군의 자손, 배달민족 때문일까?
무엇이 타자(他者)인 너와 나라는 아(我)가 우리라는 1인칭 복수(吾等)가 되어 한민족, 동포라는 울타리 안에 살 수 있다는 것인가?
분명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이지만 현실적 힘을 발휘할 때는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공동체의 경계는 수없이 조정되어 왔다. 오늘의 우리에겐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합의도 되지 않은 상태다.
단군의 자손이 기준이라면 단군상의 훼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모든 문제 해결에 당위성을 앞세운 접근논리는 언제나 실천상의 문제를 동반하게 된다.
때문에 당위론이 우세한 분위기 속에선 머리 아픈 실천론이 그 시대적 반역아로 매도되기 쉽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일고 있는 모든 통일운동이 한결같이 당위성 논리에 편향되면서 실천가능성(Feasibility)은 도외시되었다.
앞서 지적한 김태희 수석대표의 주장은 옳다.
내 부모 형제 찾아가는데 웬 적십자의 ‘심인사업‘ 절차냐? 백번 옳지만 휴전선을 한 발짝도 넘나들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당위성은 감정에 치우치게 되고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이다.
헤겔은 “합리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합리적이다.”고 했다.
이산가족 찾기가 민족적 숙원의 해결이 되려면 이벤트성 성격을 벗어나 자유왕래란 합리적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우리는 통일 논의에서 무엇보다 ‘시대정신’을 물어야 한다.
이 시대, 2005년 10월, 지금 이 순간 한민족에게 역사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통일은 평화적 과정의 산물이다. 통일로 가는 이 길목에서 우리가 해야 일이 무엇인가?
자문해야 한다. 통일은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학문의 대상도 종교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민족의 생활의 문제요. 인간생명의 목마름의 문제다. 따라서 통일은 정치적 결단의 대상이며 실천적 덕목의 우선 과제다.
우리나라엔 통일의 문제를 학문적 대상으로 즐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매명(買名)과 역사적 수자상(壽者相)을 위해 통일문제를 이용하는 사람 또한 너무 많다.
인간생명의 목마름의 간절함이 없었기에 통일의 논의는 항상 허공에 뜬 조각달이며 그래서 통일의 길은 갈수록 멀어만 갔다.
남북은 연방제나 한민족 공동체를 최종 목표로 설정했지만 어느 쪽에서도 연방제나 한민족공동체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회담제의가 없었다.
연방제 제안의 모순은 무엇인지, 왜 북의 연방제를 수용할 수 없는지? 이런 것이 의제로 남북대화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러면 지금은 평화적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어떤 단계에 진입한 상태인가?
지금 우리 사회의 통일 논의는 가을이 오기도 전에 단풍이 붉게 물든 것과 같다.
김정일 위원장의 현재 고민은 한말 흥선 대원군의 고민인 개방과 그로 인한 기득권 상실에 대한 불안일 것이다.
‘하나의 조선’ 정책은 김일성, 김정일 정권의 불변의 정치 개념이자 정권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지키는 정치 이념이다.
북한의 권력 내부에서 ‘남조선해방이 필요 없다’며 ‘하나의 조선’ 정책을 포기했다고 상상해 보자.
과연 북한의 권력 내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북한의 개방은 남한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만 남한과의 개방교류는 체제붕괴라는 위험 때문에 쉬운 문제는 아니다.
교류는 시각적 비교를 유발한다.
따라서 교류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남북한에 대한 시각적(視覺的) 비교가 던질 북한사회의 파장에 대한 우려가 교류의 활성화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통일정책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통일은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에 통일운동 그 자체가 평화적이어야 한다.
평화적이지 못한 과정에서 성취된 통일은 평화로울 수 없다. 남북 예멘의 통일이 그 좋은 예다.
때문에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은 제2의 6.25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억제와 예방을 통한 평화적 통일이야 말로 한민족에게 내려진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과제다.
평화는 선언이나 조약 등 문서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일러 준 교훈이다.
통합의 의미에서의 통일논의는 시기상조다. 통일은 먼 훗날 평화적 체제경쟁에서 살아남는 자에게 넘겨야 한다.
지금은 정치적으로는 ‘복수안전공동체(Pluralistic security community)’를 추구할 때다.
이 단계도 못 미친 상태에서 통일논의는 과정의 비약으로 문제만 꼬이게 된다.
‘복수안전공동체’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와의 관계에 비교 될 수 있다.
한중, 한일 관계의 수준에도 못 미친 남북관계에서 통일이란 과정을 무시한 정책이기 때문에 실패는 자명하다.
그렇다면 ‘복수안전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는 정치적 가치관의 양립성(Compatibility of major political values)이다.
예컨대 사상, 종교, 정치체제나 제도 등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는 폭력에 의존치 않고 대응할 수 있는 해당 정부와 정치적 관련 계층의 정치적 역량이다
(capacity of the governments and politically relevant strata of the participating countries
to respond to one another's messages, needs, and actions quickly, adequately, and without resort to violence).
셋째는 상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행동에 대한 상호 간의 예측능력(Mutual predictability)이다.
달리말해 상생과 조화의 규칙을 지켜가는 훈련과정이라고도 하겠다.
단일화된 안전공동체가 성공하려면 보다 많은 그리고 어려운 사회적, 경제적 배경 조건이 필수적으로 충족돼야 한다.
따라서 현 단계의 남북관계는 복수안전공동체의 예비단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남북관계의 현주소다.
상호간의 대사관은 고사하고 연락사무소 하나 설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관계 정상화 없는 통일이 가능한 것일까?
남북 분단의 성격은 군사적이다. 그래서 군사적 적대관계와 상태를 청산, 해소가 평화적 통일정책의 제1의 의(義)다.
어떤 경우도 동족상잔의 비극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내려진 역사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남침의 위협도 북침의 위협도 없는 평온한 남북 관계를 우리는 열망하고 있다.
민족이요, 한 형제 동포이면서, 다 같은 유엔회원국이면서도 다른 국가와의 관계만큼도 서로 우호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은 한민족의 수치다.
중앙 집권식 권력통합이 통일의 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요원한 장래에 있을 통일구상 속에서나 생각할 문제다.
지금 우리 세대는 휴전선을 남북의 질서를 지켜 주는 평화의 선으로 발전, 정착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다음의 세대가 통일의 주역이 되도록 하는 무대 제공으로 끝나야 한다.
여행의 자유, 이민과 거주의 자유가 보장되는 상태, 그것은 성격적으로 이미 통일이다.
통일은 민중의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중심철학이 없이 사상적 부초현상이 팽배한 지금이다.
남북민중의 합의 없는 통일은 성공할 수 없다.
남북을 하나 되게 할 홍익인간정신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진리가 있음에도 우리는 통일의 사상적 대안을 밖에서 찾고 있다.
통일의 과정은 남북 모두에게 혹독한 인내력과 실천력을 요구할 것이다.
평화적 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역사적 비전(vision) 없이는 보다 빠르고 쉬운 선택의 유혹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군사적 대결은 안보 제일주의를 낳고 안보 우선의 사고는 수성(獸性)이 이성(理性)을 지배한다.
이런 사고는 무력 통일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
왜 통일이냐? 그것은 분단대결이 한민족의 에너지를 유실케 함으로서 세계사의 무대에서 한민족의 역할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세계사 속에서 우리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평화적 통일은 꼭 이뤄져야 한다.
이승헌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총장
출처: 월간 길벗 2005년 10월 p7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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