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일선물 *
후덥지근한 날씨가 이어지는 6월 끝자락. 공연 시간이 점차 다가오자, 마음이 급해진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애마인 스타렉스에 몸을 싣었다. 비가 갠 남쪽 하늘에 목화솜 같은 뭉게구름이 두리둥실 삼악산 자락을 휘돌아 하늘로 머리를 풀어 올리니 마음까지 쾌청하다.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길옆 호수의 물빛이 잔잔한 파문을 그리며 저녁 햇살에 반짝인다. '무지개다리'를 건너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며 " 엄마~, 빨리 옷 갈아입어야지~!" 유니폼을 벗어버리고 샤워실로 향하는 등 뒤로 "진짜 어디로 가는 게야. 얘들이 몰려올 텐데... "
아침밥을 먹으며 살짝 귀띔만 해 둔 이야기를 엄닌 그냥 우스갯소리로 흘려 들으셨나 보다.
춘천 문화방송에서 국립국악원 초청 공연이 있어 엄니에게 좀 더 즐겁고 기억될 만한 마음의 생일 선물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국악공연을 보기로 했다. 공연 안내 담당자에게 엄니 생신을 강조하며 특별히 부탁하니 맨 앞자리로 주신단다.^^ (무한 감사의 마음을 보냄)
↗ 집 앞 호수. 푸르름 가득한 여름날엔 더욱 진한 쪽빛으로 물들어 마음까지 푸른빛으로 물든다.(이젠 나무들이 안아줄 만큼 컸다. 사진은 04년 당시 모습)
드디어 아침부터 설렘으로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다. 현관문에 '할머니와 예술회관 놀러 감. 고모에게 연락해 문 열어달라고 할 것 010-000-0000'. 메모지를 현관문에 붙여 놓고 문화예술회관으로 향했다. 공연장인 예술회관에는 이미 많은 인파가 북적였다. 공연장 앞마당에 차를 세우고 휠체어를 꺼냈다. 휠체어는 아버지가 잠깐 타시던 건데 엄니를 모시고 나들이나 여행을 떠날 때면 힘드실까 봐 태워드린다. 엄니는 쑥스럽다고 굳이 걷겠다고 하시지만, 나 또한 원조 최씨(부모님 모두 최씨라ㅎ)라 고집을 피우면 엄니는 마지못한 척 휠체어에 올라 좋아하신다. 휠체어를 밀고 다니는 것이 정형외과 모시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절약(돈+시간)되기 때문이다.ㅋㅋ
눈인사를 나누며 공연장 안내데스크에 다다르자, 자주 만난 안내 도우미들이 좌석까지 친절하게 안내한다.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미소로 인사를 받는 울 엄니 참 살갑다. 맨 앞자리인 가열 8, 9번 좌석을 부여받아 자리에 앉았다. 이미 방송 카메라가 설치되어 시험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 테레비에도 나오는 거야." 울 엄닌 카메라를 보자 흥분된 어조로 묻는다.
" 응~, 테레비에 나와, 오늘 울 엄마 스타 됐네~ㅎㅎ "
엄니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싶어 그렇다고 하자, 엄니는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띄운다. 드디어 사회자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잠시 후 막이 오른다.
↖09.08.15 광복 60주년 기념공연 때, 춘천에서 의병 활동을 지원했던 '윤희순 여사'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당시 자료가 손실되어 대체 자료임. ^^)
막이 열리며 먼저 손끝에 한삼을 두르고 족두리를 쓴 무용단이 태평무를 선보인다. 어찌나 그 모습이 우아한지 정신이 혼미하다.ㅋ 치마폭을 살짝 치켜올려 핑그르르 원을 그리듯이 돌아가며 하얀 꽃신의 코끝이 보일 때마다 실버들이 하늘거리듯 여린 손짓과 교태가 흐르는 눈빛 표정은 보는 이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정말 우리 고유의 춤사위가 이렇게 인간의 감성을 울리는 오묘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니! 무대 바로 아래 정면에서 무용수를 바라보는 그 느낌은 지금까지 엄니랑 보았던 그 어느 공연보다 훨씬 아름답고 색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행복 만땅)
" 엄마~ 정말 멋지지. 하나같이 대견하고 예쁘고... "
" 정말 잘한다. 지금까지 본 구경보다 아주 잘하네."
국악 장단에 맞춰 손뼉을 치고 어깨를 들썩이며 흥겨워하시는 울 엄니. 아주 귀한 생일선물을 골라 드린 것 같아 내 마음도 덩달아 흥겨워진다. 걸쭉한 판소리... 아낙네들의 강강술래... 퓨전 국악가요... 화려한 부채춤... 취바리의 봉산 탈춤... 민요 메들리... 모듬북 연주... 풍물놀이 등 두 시간 동안 이어진 공연 내내 엄니와 나는 우리 국악 예술의 진수를 맛보며 연주단의 장단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며 손뼉을 쳤더니 온몸의 기가 하늘로 솟는 듯하다.ㅎㅎㅎ
울 엄닌 봉산탈춤 줄거리를 나보다 이해를 잘한다. 역시 세대에 어울리지 않는 멋쟁이다. 팔순 기념으로 97년 여름 나랑 중국 북경을 거쳐 가는 일주일 여정의 백두산 여행에서도 엄닌 405060 일행들에게 '언니'라는 애칭을 얻어 인기가 절정을 이르더니, 04년 봄에는 강릉 단오마당에서 벌어진 국제민속축제 한마당에서 울 엄니, 울 조카, 울 조카의 딸, 나 4대가 농악놀이 마당에 나가 손을 잡고 흥겨운 춤사위를 뿌리며 놀자, 외국인들이 카메라 플래쉬를 터트리며 다가와 엄니의 연세를 물어보며 인사를 해왔다. 엄닌 흥이 많아 모든 공연을 즐긴다. 집에서도 아이돌이 나와 춤을 추며 노래할 때면 티브 앞에 바짝 다가 앉아 덩달아 좋아 어깨를 들먹이신다. 그런 엄니의 피를 받아 태어났는데, 아직도 왈츠를 추며 놀아줄 파트너가 없다니! 당췌~^^ ㅋㅋ
↗09.08.15 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을 보며 손뼉 치는 울 엄니^^
(당시 자료가 손실되어 대체자료로 올려드림.부채춤 아쉬움)
멋들어진 국악 공연을 관람하고 집에 돌아오니 우르르 몰려나오는 꼬맹이 손님들이 현관을 가득 채운다. 손자손녀 증손자 형 누나들...
" 어이구~ 울 엄니 무슨 구경을 하길래 식구들이 몰려왔는데도 집도 비우고 다니셔~ " 큰누나가 엄니를 향해 농담 삼아 던지자
" 아주 좋~은 구경하고 왔구나, 막내 덕분에... "
" 할머니~ 안녕하세요? " "할머니~ 저희들이 왔어요~ 구경 잘하셨어요? "
고개를 꾸벅이며 달려드는 손자 손녀와 증손들에게 둘러싸인 울 엄니 아주 흐뭇한 표정이다. 며칠 전 내가 드린 쌈짓돈이 좀 풀릴 듯하다.ㅎ 엄니~, 대신 아들딸 손자 손녀들이 조금씩 슬쩍 찔러준 거 있잖우, 그거 다 풀지 말고 꼼쳐 두었다가 막내 좀 보태주구랴~! ㅋㅋ
엄니~ 부디 오래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 주세요. 당신은 우리 육 남매의 정신적 지주이십니다. 평생 올곧은 마음으로 살아오신 울 엄니. 오늘 여기 모인 꼬물이와 성체들이 모두 절대자의 부름에 순응한 어머니 당신의 피와 육신을 받아 그 은혜로 이 땅에 때어난 선물입니다.^^
엄니~, 늦둥이 막내 하나는 잘 낳쥐~ 생일 축하혀유~ㅋㅋ
울 아부지 하늘에서 배 아파 호령하시네! 에구구 죄송혀유
아부지 공연 본 날 밤에 나가서 청하 네 잔 드렸잖여유~ *^^
(아~! 이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디...우쨔~)
2005년 6월 29일(음 5월 23일)(수)흐림 후 비
***봄내지기***
↗ 70년대 내 초등학교 시절 생전의 울 엄니 울 아버지. 전형적인 컨츄리문화에 흑백사진의 묘미까지 느껴진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요즘 아이들은 할머니라고 부를 듯하다. 당시에는 사회적 인프라 등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화장품이란 이름도 낯설었던 시절이다. 내가 175 안팎의 키를 갖고 있는데, 울 아버지는 나보다 좀 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셨다. 엄마는 당시 세대로는 보통 몸집의 키였고... 울 엄마 열네 살, 울 아버지 열일곱 살에 혼례를 올렸다. 당시 문화는 부모님들끼리 정략결혼을 할 때여서 혼례를 올리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 는 정신 무장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울 아버지가 처음 사주를 갖고 외가를 찾아왔는데, 엄닌 윗방에서 기다리다가 외할아버지가 불러 안방으로 내려와서도 아버지 얼굴을 못 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아버지가 외할아버지를 따라 나와 외양간 옆에서 소여물을 써는데, 엄마가 부엌에 나와 불을 지피는 척하며 뒤꼍에서 몸을 숨겨 몰래 훔쳐보니 "키가 미출하니 괜찮더라"라고 해서 얼마나 웃었던지. 당시 지금보다 영양학적으로 많이 불균형의 식생활을 했기에 요즘 아이들보다 훨씬 키가 작았을 테고 발육도 많이 떨어졌을 텐데, 그래도 마음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엄닌 고백하듯이 나에게 들려주셨다.(그해 가을 혼례를 올리고 나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서 할머니의 각별한 사랑(막내며느리라)을 받으며 초야를 치르기까지 줄다리기하던 이야기도 들려주셔서 얼마나 웃으며 재밌게 들었던지...이 이야기는 따로 일기로 남겨 두었다.ㅋㅋ) (바로 위 막내 누나를 낳고 산후풍을 맞아 안면마비가 와 엄니 입술이 왼쪽으로 돌아갔다가 풀어진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런 모진 고생을 하시고도 늘 긍정적이다. ㅠㅠ)
첫댓글 수선화오유미
2010.06.05 23:11 신고
그림같은 모습들 잘 보고 갑니다~
봄내지기
2010.06.06 17:33
글쎄요~ 그리 보이셨다니 감사합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볌한 일상입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닉네임이 아름다워 불로그에 들려보려했는데... 친구등록 블로그군여 아쉽습니다 ^^
봄내지기
2022.07.24 00:30
다음 블로그를 폐쇄한다고 하여 지난 일기글을 옮기다가 수선화님이 남긴 흔적을 보고 답글 남깁니다. 늘 건강하시고 하루하루 소박한 일상에서 행복한 일 이어지길 바랍니다._(*)_ (인사 남김. 톡 주소랑) 풀릇 연주하는 플필 사진 있음
우주공간
2010.09.12 20:21 신고
어머님이 흐뭇하시겠어요 효자 막내아들의 사랑에~~~
봄내지기
2010.09.13 10:42
자식들은 다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다만 그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봄내지기
2016.08.17 12:14
이젠 하늘에 계신 울엄니. 이 날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막내는 일기를 읽을 때마다 슬며시 미소짓다가 울컥 눈물을 쏟는다. 엄마, 기다리고 계세요. 저도 언젠가는 꼭 엄니 곁으로 갈거에요.^^
♡ 사랑의 꽃지게에 마음을 담아 어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기원합니다 ^^
2006-02-14 20:30:34
facezzang- 효자십니다...행복해 하는 님 생활 엿보고 갑니다...음악도 제가 다 좋아하는 곡이네여...즐음해요~~고운밤 되세요...^^ 2006-02-14 20:30:34
봄내지기 2006-02-15 20:53:11
효자이긴요...팔순을 넘기신 연세에 아직 부억일을 하시는 어머니께 늘 죄를 짓는 마음입니다...다만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하여 희생하신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제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시간들 그리고 함께 하는 시간들은 깨알에 불과합니다...페이스짱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를...*^^
2024.09.17 수정 후 이 게시판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