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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1]
청하읍성에 서서 해를 맞다
청겸진경(淸謙眞景) = ‘청하’와 ‘겸재’의 줄임말에 ‘진경(진경산수)’을 연결시킨 합성어로 진경산수의 발현지가 포항임을 뜻한다.
“조선 고유의 정체성을 찾아라” 영조의 깊은 뜻 받들고 청하로…
Prologue
‘진경산수’는 가장 한국적인 우리 고유의 산수화풍이다. 조선시대, 중국화풍을 답습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의 멋과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며, 주자학적 자연관과 풍류를 묘사한 것이 ‘진경산수’다. 그러한 진경산수 화풍을 창시한 인물이 겸재 정선(1676~1759)이다. 특히 겸재는 그의 나이 58세 되던 1733년 이른 봄에 청하(지금의 포항시 청하면) 현감으로 부임해 1734년까지 머물렀다. 2년여 동안 청하에 머문 겸재는 내연산 등을 둘러본 뒤 ‘내연삼용추’ ‘내연산폭포도’ ‘고사의송관란도’ ‘청하성읍도’ 등의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겸재 특유의 도끼로 쪼는 듯한 필묵법이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겸재의 진경산수 화풍은 청하에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진경산수의 산실이자 발현지가 포항인 것이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스토리텔링 시리즈 ‘청겸진경(淸謙眞景)의 비밀’을 연재한다. ‘청겸’은 ‘청하와 겸재’를 줄인 말이다. 여기에 ‘진경(진경산수)’을 연결시킨 합성어다. ‘청겸진경’이란 말은 앞으로 진경산수의 발현지가 포항임을 알리고, 브랜드화하는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다. ‘청겸진경의 비밀’은 청하에 2년여 동안 머물렀던 겸재의 이야기를 다룬다. 겸재가 진경산수를 꽃피우게 된 배경과 과정을 스토리에 상세하게 담아낼 예정이다. 1편 ‘청하읍성에 서서 해를 맞다’에서는 겸재가 청하현감으로 부임하게 된 배경과 청하읍성을 거닐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심화시키는 모습을 담았다. 작품에서 ‘선(敾)’이란 인물이 겸재 정선이다. 원고 집필은 스토리텔링 전문작가이자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의 초빙연구원인 이상국씨가 맡았다.
갑인년 새밝이었다. 새밝은 ‘새가 밝았다’는 것이니, 새벽의 원래 뜻이다. 새는 동쪽이다. 샛바람이 동풍인 것은 ‘새’라는 말이 동(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이 튼다는 것은 동쪽이 열린다는 것이다. 동남단(東南端) 청하. 동(東) 중의 동에서 밝 중의 밝을 보는 새밝. 차디찬 새벽어둠을 밀어내는 한 줄기 빛의 기운. 음(陰)의 절정에서 양(陽)은 실낱같은 기운을 내서 한 해의 심지를 돋운다.
선(敾)은 부옹루에 서 있었다. 동해에서 해가 끓어오르는 듯 하늘이 붉게 울먹거린다. 꿈틀꿈틀 생명같은 빛덩어리가 부화한다. 해문(海門)을 가리는 큰 소나무 수백 그루가 서 있는 봉송정 송림 솔잎 사이로 햇살들이 터져 들어온다. 선은 입을 굳게 다물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계축년(1733) 6월에 발령을 받고 청하에 내려온지 여섯 달. 권문세족의 그림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여 붓과 종이를 놓을 새 없었던 한성의 생활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진다. 조선 반도의 동쪽 끝, 백두(白頭) 큰 줄기의 자락에 서서 59년의 생을 돌아보듯 느긋한 기분으로 서 있다.
동쪽 끝으로 와서 돋는 해를 맞는다. 부옹루는 청하읍성의 동문(東門) 겸 정문이다. 이 작은 성은 지세(地勢) 때문에 남북으로는 문을 내지 못했다. 따라서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다. 부옹루는 세종 때 경상감사였던 홍여방(洪汝方)이 지은 누정(樓亭)으로, 그 이름도 그가 지었다. 홍여방도 바로 이 자리에서 바다가 토하는 듯한 붉은 첫 해를 만났으리라. 부옹은 주역에 나오는 말로, 제물로 바칠 포로가 건장한 것을 뜻한다. 하늘을 우러르는 경배의 마음이다. 선은 41세 때 관상감 천문학 겸교수(종6품)의 벼슬을 받아 일한 적이 있었다. 음직(蔭職)으로 벼슬을 나갈 경우엔 종9품부터 시작하는 것이 관례인데, 그는 파격적으로 바로 종6품직에 특채되었다. 화명(畵名)을 떨치며 지식인 사이에서 선풍을 일으킨 그에게 벼슬을 주어야 한다는 의논이 일었고, 그가 특히 ‘주역’에 능통하였기에 천문학 쪽의 일을 맡긴 것이었다. 그는 부옹문 아래서 일출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큰 운명의 기운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관아를 거닌다. 돌아서서 성읍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 동헌 쪽을 보니 건물 너머 진산(鎭山)인 호학산(呼鶴山)이 벌써 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청하읍성은 평지 구릉 위에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축조되었다. 그는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천천히 내아(內衙) 쪽으로 걷는다. 이곳은 그를 비롯해 관속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내아 옆의 연못을 지나 동헌 뒤쪽으로 가면 서문(西門)이 있다. 부옹문 쪽이 에두르는 길인지라, 사실상 서문이 요즘은 정문처럼 쓰이고 있다. 서문 밖엔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동헌으로 쓰이는 칠정헌(七政軒)과 읍창(邑倉) 뒤편으로 걸어가며 정정한 회화나무 아래서 잠깐 머문다.
선은 왠지 이 나무가 의지목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이 나무를 그림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 차례 나무껍질을 어루만진 뒤 그는 시죽(矢竹․활대)으로 쓰이는 대숲이 늘어선 성벽을 따라 걷는다. 대숲은 관아 뒤에서부터 남쪽 성벽까지 돌아가며 둘러서 있다. 남쪽 한켠에는 객사(客舍) 건물들이 있다. 그 중심에 있는 큰 누각은 해월루(海月樓)로, 청하읍성의 자랑거리다. 회재(이언적)의 기문이 있고, 청천 신유한(申維翰․1681~1752)이 다시 세우며 다시 기(記)를 남긴 누각이다. 청천은 그 시대 뛰어난 시인으로, 선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다섯 살 아래인 청천(靑泉)은 나중에 다시 겸재와 만나는 인연이 있다. 8년 뒤인 1742년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하였을 때, 경기감사인 홍경보가 겸재와 함께 인근의 연천현감 신유한을 朔嶺의 羽化亭으로 불러 당대 최고의 시화(詩畵) 뱃놀이를 벌인다. 이때 그린 그림이 ‘연강(蓮江)임술첩’이다.) 동헌의 건물들은 모두 남향이지만, 해월루는 동향으로 서 있다. 그 곁에 있는 객관은 덕성관(德城館)이다. 선은 다시 칠정헌 앞으로 와서 돋아오른 해를 보며 심호흡을 한다. ‘이제 나도 50대의 마지막 해를 맞았구나.’
영남의 끝자락.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선에게는 6년간의 영남시절이 이미 있었다. 1721년(경종 원년)부터 1726년(영조 2년)까지 하양현감으로 있었다. 하양(河陽)은 경북 경산지방이다. 선의 나이 46세 때 시작하여 51세 때까지였다. 그때 그는 영남산수의 진면목을 살짝 맛보았다. 37세 때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그렸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은 당시 조선을 매료시킨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훔치고 싶은 물건 제1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해악전신첩이라고 말하리라.
선은 부동의 스타가 되었다. 특히 김창집의 자제군관으로 따라간 김창업이 겸재의 그림을 중국 연경 화단의 감식안들에게 내놓았을 때, 그들은 당시 조선 최고 화가로 꼽히던 공재 윤두서의 그림보다 정선을 윗길로 쳤다. 공재는 이런 평가에 충격을 받고, 가세(家勢)가 기울었다는 이유를 대고 해남으로 낙향하기까지 한다. 이후 선은 조선 화단을 주도하는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그 이후인 하양현감 시절은 산수화의 변경을 영남까지 확대하는 일대 숙성의 시기였다. 이 시기를 ‘영남 하겸(河謙)시대’라고 부를 만했다.
이 무렵의 그는 지역의 실경을 사생하고 살피면서 금강산도에서 다하지 못했던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1722년엔 그가 어울리던 노론 세가의 자제들이 참화를 입는 임신사화가 일어났으나, 그는 변방에 있는 바람에 피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1725년 화가인 관아재 조영석의 형인 조영복이 경상감사로 내려온다. 선은 이 무렵 영남 66군현을 골골마다 훑으며 명승(名勝)을 스케치하는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그 결과로 남긴 것이 ‘영남첩(嶺南帖)’이다. 그가 한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예술군주 영조가 등극해 세자 때 스승이었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은 한성주부, 의금부도사로 임명된다. 영조는 14세 때 창의궁을 사저로 받은 뒤 겸재에게 그림을 배웠다. 왕이 된 뒤에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겸재’라고만 불렀다.
선이 청하에 발령을 받게 된 것은 영조의 깊은 뜻이었다. 왕은 조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진경(眞景)의 문화를 뿌리내리기 위해 시화(詩畵)의 쌍벽이라 할 수 있는 사천 이병연과 겸재를 조선 최고의 명승지인 관동팔경 지역에 내려보낸다. 두 사람은 평생의 지기(知己)이며, 시와 그림의 호흡을 맞추는 환상의 콤비였다. 이병연은 삼척부사로 발령받았는데 떠나기도 전에 겸재에게 ‘대관령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해서 벽에 걸어놓고, 그곳에 갈 날만 기다렸다. 그는 청하로 떠나오기 직전까지도 서울의 많은 사람들에게 금강산과 북악산 그림들을 그려주고 있었다. 그가 그려주는 그림값은 대개 한성의 집 한 채 값의 절반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굳이 돈을 벌었던 것은 구십이 넘은 노모를 편히 봉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영남 작은 고을의 사또로 부임하면서 선은 비로소 한가함을 찾았다. 한가로이 뜻과 흥에 따라 그림을 그리면 그만이다. 요즘은 고요히 앉아 미친 듯 그렸던 그림들을 펼쳐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림이란 대체 무엇이던가.
작년 가을 선은 해월루에서 신유한과 술자리를 가졌다. 구면이었다. 1719년 한성, 영의정 김창집의 집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신유한은 일본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떠나기 전에 상공댁에 하직 인사를 하러온 것이었다. 선은 스승이었던 김창흡(창집의 아우)이 설악산에서 모처럼 귀경해 그곳에 머물러 있는 때였기에 그 댁을 드나들었다. 67세였던 김창흡은 39세인 신유한에게 정중히 시권(詩卷)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33세로 장원급제한 신유한은 한성에서도 명성을 지닌 빼어난 시인이었다.
김창흡은 유한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남에서 이미 명성이 자자한 사람으로, 이제 일본까지 그 향기가 미치겠구려. 천지가 동남쪽으로 기울어졌으니 그 문장은 굴원(屈原) 송옥(宋玉·두 사람은 고대 중국 초나라의 시인)의 여운을 지녔소.” 돌아가신 스승이 이토록 칭찬한 소객(騷客․시인)이니 선으로선 기억이 새로웠다. 그는 고령 사람이었으나, 청하에 자주 들렀다. 신유한이 청하읍성으로 선을 방문했을 때 일행이 있었다.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배움을 구하는 이 지역의 제자들이었다. 그 중에서 흥해 출신인 최천익(崔天翼)과 오두촌의 승려 오암(鰲巖·속명은 김하(金河))은 놀라운 인재들이었다. 스물네 살 동갑내기. 최천익은 경전과 역사를 줄줄 꿰는 박학다식이었고, 김하는 한 번 읽으면 모두 기억해 내는 일람첩기(一覽輒記)의 장기를 지녔다. (나중에 최천익은 일세를 풍미하는 시인이 되고, 김하는 서산대사의 법손(法孫)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된다.)
그리고 여인이 하나 있었다. 이름을 세오(細烏)라고 했다. 홀아버지 정해일(鄭海日)이 쇠도둑 누명을 쓰고 죽은 뒤 바닷일을 하며 홀로 살아가는 스물여덟 쯤 되는 사람으로, 선비처럼 밤낮으로 책을 읽고 사군자(四君子)를 치며 살아간다 하였다. 최천익과 함께 신유한의 가르침을 받는 동학(同學)이기도 했다. 눈이 맑고 콧매가 깨끗하여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있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신유한은 선에게 말했다.
“내,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어떤 일이오? 그림이라면 어렵지 않소이다만…”
“겸옹(謙翁)의 그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천하의 광영이외다. 허나 지금 제가 말씀드릴 것은…”
유한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실은 저 아이 말이오.”
“저 아이?”
“예. 저기 앉은 세오 말입니다. 세오는 어린 시절부터 회사(繪事․그림그리기)를 즐겨, 중국과 조선의 화첩(畵帖)들을 있는 대로 모두 임모하면서 습작을 해온 아이지요. 사또께서 저 아이를 거두어, 손으로 그리는 기예(技藝) 저 안쪽에 있는 깊은 학덕을 잠깐이라도 베풀어 주신다면 저 아이로선 큰 은혜를 입는 셈이 될 것입니다. 이 고을에선 따를 이가 없다할 만큼 재능을 갖추고 있는지라, 궁벽한 시골살이에서 적적함을 달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허어. 과연 그런 아이란 말이오?”
세오는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며 몸에 지니고 온 종이를 풀었다. 거기엔 해송과 바다를 그린 그림 몇 점이 들어있었다. 아직 습기(習氣)가 가시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기이하고 독창적인 화풍이었다. 세오는 그렇게 선에게로 왔다.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2]
세오(細烏)와 비웃 이야기
조선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동세라 했지요
세오가 펼쳐보인 그림에는 바다가 가득했다. 해 뜨는 바다, 구름 가득한 해면에 출렁이는 물결, 바위의 골기(骨氣)에 맞서 튀어오르는 힘찬 파도, 달빛 내린 바다, 어둠 속의 고깃배들, 물 속에서 헤엄치는 기이한 물고기까지. 세오의 화폭은 너무나도 청하(淸河)다운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선(敾)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산수(山水) 중에서 한 쪽만 취한 듯 수화(水畵)로 가득 차 있구나. 그러나 산이 없거나 간결하게 처리된 가운데서도 전혀 단조롭지 않고 이토록 꿈틀거리는 화의(畵意)가 느껴지니, 공부가 작지 않았겠구나.”
신유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말갈기곶(長串)에서 태어나 바다만 보고 자랐지요. 격암(格庵·남사고)은 조선반도를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동세(動勢)라 일컬으며, 백두산이 있는 곳에 호비(虎鼻)가 있고, 말갈기곶엔 호미(虎尾)가 있다고 했지요. 그 기운을 받은 듯하오이다.”
“그렇구려. 이름이 세오(細烏)인 것은 신라의 일월(日月)고사를 담은 것이던가?”
세오가 나즉히 말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죽은 아비가 생전에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세오녀의 지아비였던 연오랑은 원래 아달라이사금(신라 제8대왕)의 숨은 아들로, 왕이 아주 먼 이방(異邦)에서 올 적에 함께 데려왔던 자식이었다 합니다. 바다 건너에 살던 왕국에서 검은 배를 타고 와서 7척 장신이었던 연오를 납치해 갔습니다. 그는 그곳 소국의 왕이 되었는데, 세오를 몹시 그리워하여 야위어 갔다고 합니다.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다시 흑선을 몰고와서 연오를 태워간 그 자리에 묶어두었습니다. 뱃고물(船尾)에 연오의 신발을 얹어놓았지요. 바닷가에서 울면서 그를 찾던 세오는 다시 그 배를 타게 되었고, 왕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공교롭게도 신라에 일식(日蝕)이 있어 나라가 큰 근심에 잠겼는데, 그것이 연오세오가 사라진 때문이라는 풍설이 돌았습니다. 아달라는 그간의 무심을 크게 후회하면서 두 사람을 찾아나섰다고 합니다. 연오왕은 그러나 귀국을 거부하고, 다만 세오가 짠 비단을 주면서 이것을 가져가면 왕국의 근심이 사라지리라고 말합니다. 이를 본 일본인들은 그들의 주군 부부를 해와 달로 여겼다고 하지요. 저의 아비는 세오처럼 비단을 잘 짜는 여인이 되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빌렸다 하였습니다.”
“그렇구먼. 이곳이 영일(迎日)이나 연일(延日)로 불리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던가.”
신유한이 말했다.
“아마 그러할 것입니다. 이곳엔 오래전 귀비고(貴妃庫)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가져온 세오의 비단을 보관했던 곳이지요. 그것을 바다 앞에 모셔놓고 천제(天帝)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고 합니다.”
“왜 하필 작은 까마귀(細烏)던가?”
“연오(延烏)가 큰 까마귀이니 그렇지 않겠소이까. 연오가 살던 옛 이방에서 모시는 상징이 금빛 까마귀였다고 하더이다. 이것이 우리 고대의 삼족오(三足烏) 신앙과 합쳐지면서 연오로 이름지어진 것 같소. 삼족오는 바로 태양의 정기가 뭉쳐서 생겼다는 세발 달린 까마귀가 아니더이까. 그러니까 연오는 태양을 말하는 것이고, 태양의 전신(轉身)이라고 믿었던 달은 바로 세오가 될 수밖에요.”
“허허. 그렇구려. 달님 세오는 그림의 무엇이 알고 싶은 것인가?”
“사또 나리를 오랫동안 마음속의 사부로 여기며 사모해왔습니다. 이 궁벽한 곳에서도 그 화명(畵名)이 워낙 높은지라 몇 가지를 감히 흉내내면서 종이를 더럽혀왔으나, 산수(山水)를 붓으로 옮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구나. 혹여 안견(安堅)의 그림을 본 일이 있는가?”
“직접 본 일은 없사옵니다. 다만 오래전 아비가 구해준 화보 중에 ‘몽유도원(夢遊桃源)’을 임모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 그랬구나. 안견이 그린 그림이 바로 북송(北宋)의 곽희화풍(郭熙畵風)이다. 안견의 후원자였던 안평대군(李瑢·세종의 삼남)은 곽희의 그림을 15점 수집해서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림공부를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산수화에 대한 이론은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있는 산수훈(山水訓) 4천자에 이미 정밀하게 밝혀져 있노라.”
“곽희의 어떤 면모를 배울 만한 것인지요?”
‘멀리 있는 풍경을 표현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먼 것도 높이 먼 것이 있고, 평탄한 거리에서 먼 것이 있고, 깊어서 먼 곳이 다 다르지 않는가. 곽희는 이것을 한 화폭에다 달리 표현해 넣었다. 이것이 삼원(三遠)의 경지이다. 또 아침과 저녁의 빛이 다른 것을 그림으로 드러낸 것도 이 스승이다. 사계절의 변모하는 자연을 생생하게 붙잡은 것도 이분이다.”
“예, 사또. 그 말씀만 들어도 제 굳은 생각에 큰 충격이 오는 것 같습니다. 대개 북송(北宋)의 그림들은 황하 일대 화북(華北)의 풍경인 까닭에 비가 적고 거칠고 추운 자연환경이 드러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림도(寒林圖·추운 숲 그림)가 많은지라, 우리나라로 치면 겨울 한 계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만.”
“그래. 맞는 얘기다. 그래서 내가 조선에는 조선의 그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보고 또 보고 싫증이 날 만큼 실컷 돌아다니며 자연현실을 들여다보라’(포유어간(飽遊看)). 여러 명가를 섭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두루 보고 널리 연구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신유한이 큰 공명을 표하면서 말했다.
“앞으로 사또의 화맥을 따라 너도 오르거라. 이토록 큰 스승을 모셨으니, 대접을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사또께서는 겨울철의 비웃을 아시는지요?”
“비웃이라면 청어(靑魚)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이곳에선 관목(貫目·과메기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이라고도 부르는데, 추운 시절에 잡은 청어를 배도 따지 않고 소금도 치지 않고 그대로 그 눈을 꿰어 엮어 그늘진 곳에서 얼렸다 말렸다 하면 참으로 꼬들꼬들하면서 비리지 않은 술안주가 되더이다. 여기에 미역과 김 같은 해조류와 파와 마늘, 고추 같은 풋것들을 겸하여 들면 드실 만합니다. 이 고기를 비유어(肥儒魚)라고도 하는데, 가난한 선비를 살찌게 하는 어류라는 의미입니다.”
“허허, 그러냐? 나 또한 성리학에 잠심(潛心)하여 공부하는 선비임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쓰거늘, 겨울철 나를 살찌게 해주는 물고기가 되겠구나. 해풍에 치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호미 일대에서 비웃을 안주 삼아 다시 한 번 화론(畵論) 수업을 하자꾸나.”
“이렇듯 각별한 은혜,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이 가구수 1천가구 인구 7천명의 소읍 청하에 내려온 것에는, 하양에서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영남첩(嶺南帖)>을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영남의 방방곡곡을 사생하여 조선 남쪽의 명승(名勝)들을 일대 정리하겠다는 야심이었다. 이를 위해 하양 시절부터 그는 틈만 나면 영남 일대를 쏘다녔다. 금강산첩인 ‘신묘년 풍악도첩’ 13폭과 ‘해악전신첩’이 30대 후반에 그를 조선 거장의 반열에 올린 출세작이었다면, 40대 후반부터 그의 내부에는 ‘금강산 겸재’라는 자기 브랜드로부터 탈출을 감행하여 진정한 겸법(謙法·겸재화법)을 창시하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청하 시절은 ‘영남첩’이 드디어 66폭의 화보를 이루면서 하나의 화풍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의 시기가 된다.
선은 청하에 머물면서 예안의 도산서원과 영양의 석문입암에 들러 풍경을 스케치한다. 그는 <퇴계집>을 뒤지면서 도산서원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또 읽어 외우다시피 했다. 그곳에 들렀을 때마침 학생들은 모두 수업 중인 듯 고요한 대낮이었다. 수복(守僕) 하나가 쇠스랑을 메고 서원을 내려오다가 서당 쪽 울타리 부근으로 다가오고 있다. 선은 책에서 읽은 것들을 기억해내면서 빠른 속도로 도산(陶山), 퇴계(退溪), 낙천(洛川), 천연대, 천광운영대, 반타석, 서당과 서원, 동취병과 서취병을 그려갔다. 강에 묶은 배도 그렸다. 큰 부채 위에 그린 이 그림은 진경사생의 면모를 보여준다 할 만하다. 영양의 입암은 율곡의 핵심제자이던 서성(徐·1558~1631)이 귀양을 왔던 곳으로, 율곡 성리학을 추종하던 겸재로서는 필히 가보고 싶은 곳이었으리라. 솟아오른 바위의 분기탱천하는 기운은 스스로를 이기지 못한 듯 한 쪽으로 휘어졌다. 그 밑둥을 깎아칠 듯 세차게 흘러내리는 대천수(大川水) 물길이 소용돌이친다. 입암의 거친 묘면 위로 농묵의 점들을 툭툭 쳐나가면서 겸재는 마치 흉중의 분노가 들끓는 듯한 장쾌한 풍경의 기운을 돋우고 있다. ‘도산서원’과 ‘쌍계입암’은 영남첩의 백미일 뿐 아니라, 청겸시대의 빅뱅을 알리는 서곡같은 작품이다. 그에게 영남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화두였다.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3]
청하의 그들, 진경(眞景)논쟁을 벌이다
“진경은 조선 사람이 음미할 수 있는 맛까지 담아내야 하네”
선(敾)은 눈을 감고 멀리 한성의 옥인동 본가를 떠올린다. 탕약(湯藥)을 달이고 있는 아내 연안송씨. 그 뒤로 두 며느리가 들락거리는 부엌 풍경. 장자 정만교(鄭萬喬)는 서른 한 살, 둘째 만수(萬遂)는 스물 다섯. 선의 집은 평온해 보인다. 아내가 수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94세의 어머니(밀양박씨)가 얼마 전부터 몸져누웠기 때문이리라.
선은 소년 시절 외롭고 힘겨웠다. 그가 태어났을 무렵엔 가산이 넉넉했던 큰집에서 도와준 덕에 비교적 걱정 없이 살았으나, 겸재가 6살 때 백부 정시설이 돌아간 뒤 지원이 끊기면서 갑자기 집안이 쪼들리게 된다. 14세 때는 부친 정시익마저 세상을 뜬다. 이후 선은 46세의 홀어머니를 모시고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었다. 몰락한 사대부 가문이었다고 하나, 그게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 박자진이 그의 재능을 보고는 그림을 권했다. 도화서 소속 화원으로 일한 건 아니었고,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려 몇 푼 그림값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잔반(殘班)의 화인(畵人)이었다. 그러나 차츰 화명(畵名)이 높아지면서 그 값도 올라갔다. 마침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신흥 안동김씨인 장김(壯金·장동김씨)들과 이웃하고 있었기에 그림을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학연(學緣)이 맺어졌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대신, 스스로의 특기(特技)를 발판으로 조선 지도층의 이너서클에 진입한 셈이다. 선은 그들과 격(格)을 맞추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시간 이외에는 늘 책을 끼고 다녔다. 그는 김창흡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승, 또 이병연이라는 걸출한 시인 지음(知音)을 둠으로써 쟁쟁한 네트워크를 갖췄다.
이렇게 사회적인 성취를 이루기까지 결혼할 여유도 겨를도 없었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연안송씨와 혼인을 치른다. 그러나 아내를 맞은 뒤에도 바깥으로 돌 수밖에 없었다. 스케치 여행을 다니는 경우도 잦았고, 청하현감처럼 외직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30대 시절에 금강산을 내집 드나들 듯 다닌 것은,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보고 또 보고 싫증이 날 만큼 돌아다니라’는 마음 속 스승 곽희의 말을 새겼기 때문이었다. 지방 관리로 내려가는 일 또한 그에게는 더없이 긴요한 화업(畵業) 수련과정이었다. 그림은 선에게 모든 것이었기에, 아내는 이런 남편을 말없이 이해해주었다. 마침 청하엔 정월대보름 무렵의 달이 환하다. 아내도 천리 먼 곳에서 달을 보고 있을까. 그는 송씨에게 그림편지를 쓴다. 출렁이는 바다에 뜬 달을 그렸다. 그리고 당나라 양사악의 시를 부제한다. ‘가고 싶지만 언제가 될지/ 쓸쓸히 수레 돌려 다리를 내려가네(心期欲去知何日 回車下野橋)’
호미곶 비유어회(肥儒魚會)에는 지난번 해월루에 있었던 신유한, 최천익, 그리고 세오가 왔고, 스무 살 경주기생 하나가 함께 했다. 경기(慶妓)의 이름은 월섬(月蟾)이라고 했다. 월섬은 초충(草蟲) 그림을 잘 치는 아이로, 산수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자 왔다고 했다. 눈썹이 달처럼 곱고 살결이 환하여 시골에선 보기 어려운 미색이었다. 선비를 살찌울 청어가 나오기 전에, 얼린 조홍시(早紅枾)가 나왔다.
신유한이 입을 열었다.
“사또. 가객 박인로의 시조 ‘조홍시가’를 아시는지요.”
“알다마다. 백성들에게 효(孝)를 권면(勸勉)할 때 자주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예. 마침 조홍시가 나왔으니 그 노래를 한 번 부르도록 함이 어떨지요? 월섬이는 거문고 솜씨가 뛰어나니 들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선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월섬은 거문고 앞에 앉아 줄을 매만진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 유자 아니라도 품음즉도 하다마난 /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그를 설워하노라”
“내 먼 객지에서 들어서인지 참으로 마음을 붙잡는 노래로다.”
선은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최천익이 문득 끼어들었다.
“여기에 나오는 조홍감은 그냥 일찍 익은 감이 아니라, 청하의 느티나무 마을인 유천(柳川)에서 나는 쫑감을 말합니다. 쫑감은 조홍감이 변해서 된 말이고요. 영남 가인(歌人) 박인로가 청하의 쫑감을 보고 시조를 읊은 것이지요. 쫑감은 한 달쯤 빨리 익어 9월에 홍시가 되는데, 오직 유천마을에서만 나무가 자란다고 합니다. 딴 곳으로 옮겨 심으면 열매가 제대로 맺히지 않는다지요.”
“아, 그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얘기요.”
이때 겉말린 청어가 접시에 담겨 올라왔다. 쫄깃한 고기맛에 술잔이 자주 돈다.
“이것 참, 바닷 맛이 절로 나는 음식이로고.”
주흥이 무르익었을 때 세오는 자신이 그린 청어도(靑魚圖)를 펼쳐보인다.
“비천한 솜씨지만, 한 번 보아주십시오.”
선은 말없이 오랫동안 화폭을 들여다보고는 나직이 묻는다.
“비웃은 비웃인데, 비웃의 무엇을 그렸는가. 왜 비웃을 그렸는가. 비웃을 본 사람은 비웃의 무엇을 보겠는가.”
세오는 조금 얼굴을 붉히더니 말을 꺼낸다.
“소녀, 비웃을 보이는 대로 그리고자 애썼습니다. 생각이 앞서서 실상을 바꾸지 않도록 비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그렸습니다.”
“실상을 그대로 베낄 셈이면, 실상을 보면 되는 것이지 굳이 베낄 이유가 있겠는가. 실상과 똑같도록 베끼려는 그 욕심이, 그림 그리는 일을 화공(畵工)의 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던가?”
“실상을 그리지 않는다면 무엇을 그려야 하옵니까?”
“그림은 실상의 재현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가상(假相)을 그려 그것을 나누며 즐기는 오랜 전통이 있다. 이것을 우린 관념화라고 하지. 옛 중국인은 산수를 그릴 때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풍경을 그리려고 했다. 산수를 그릴 때 산수의 형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산수가 지닌 뜻을 관찰하라고 곽희는 말했지. 가보고 싶은 곳, 구경하고 싶은 곳, 노닐고 싶은 곳, 그리고 살고 싶은 곳. 그것을 그리면 묘품에 든다고 일러주었다. 이것이 관념산수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기생 월섬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나섰다.
“모든 그림이 다 똑같아지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풍경도 아니고 그저 생각 속에 존재하는 그런 풍경일 뿐인데, 그림을 바라보며 그것을 꿈꾸는 것은 허황함을 키우는 일이 아닐지요?”
“그래서 조선에서 실경(實景)산수를 주창하는 이들이 생겨났지. 하지만 이들이 부딪친 것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범상한 실경을 왜 굳이 그려놓고 들여다보느냐 하는 반론이었지. 그림의 효용이 대체 뭐냐는 것이었지.”
“하오면, 범상하지 않은 실경을 찾아 그리면 되지 않을까요? 산수를 그려놓고 보는 것은 굳이 발품을 팔고 시간을 내서 그 험준한 산으로 찾아가지 않더라도 방안에 앉아 생각의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여행을 대신해주는 것을 맡으면 되지 않을지요?”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금강산 그림 바람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금강산 그림 또한 실경으로 그려보면, 우리가 걸어다니면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각과 기운, 그리고 움직임이 표현되기 어렵더군. 즉 그리는 순간, 산 속을 걷는 느낌이 죽어버리고 그냥 평범한 산, 굳은 사물 같은 산만 남게 되기 쉽다는 것이지.”
“사또께서는 조선에 진경이라는 큰 화풍을 불러일으켰는데, 진경은 대체 실경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그게 말이다. 시간을 두고 파고들수록 더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되더구나. 대체 진경이 무엇인지 점점 더 모르겠어. 단지 중국의 산과 강이 아닌 조선의 산과 강을 그리면 그게 진경인지…. 아니면 중국 관념산수의 관념을 팽개치고 오직 외면에 나타나는 경치를 그리면 그게 진경인지…. 아니면 유학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주역적 사유를 화면 구성이나 표현기법에 도입하면 진경이 되는 것인지…. 실경을 그리면서 관념을 담는 것이 진경인지…. 젊을 때는 내가 나아갈 수 있는 뚜렷한 진경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정체가 오히려 모호하게 되었어.”
“그렇다면 진경에 관한 생각이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인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시대적인 흐름이라면 분명히 어떤 이유와 배경이 있을 것입니다.”
“음…, 그래. 그거 일 리 있는 생각이다. 조선산수화가 중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까닭은 중화가 오랑캐에게 자리를 내준 이후 조선이 그 중화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소중화(小中華)사상이 일어났기 때문이지. 즉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중국 방식의 모든 관행을 재고하도록 각성시키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어. 현실, 현상, 실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다시 철학을 입론(立論)해야 한다는 주체적인 생각이, 시문을 비롯해 사회제도와 음악, 예술 등의 문화 흐름까지도 지배하기 시작한 거야. 금강산은 바로 조선산수의 큰 상징이었고, 그것으로부터 진경산수의 기운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 내가 영남을 비롯해 조선 각지의 그림을 그리는 것 또한 조선 진경문화를 전국으로 확대하여 하나의 중심문화로 만들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이 아닐지?”
그때 세오가 문득 소리쳤다.
“옳사옵니다. 그러니까, 진경은 바로 우리 자연을 우리식대로 즐기는 방식을 창안하는 것이겠군요. 그렇다면 조선의 청어를 그리는 것을 넘어 그 청어 그림이 조선사람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줄 수 있느냐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군요.”
“그래. 금강산 그림들이 큰 호평을 받으면서 우리 산수를 표현하는데 적절한 그림기법(겸재준법)을 도입하면서도, 중국의 관념산수가 지니고 있던 철학적인 깊이와 음미하는 즐거움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를 고민해 왔어. 방향은 잡혔는데,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명쾌하지 않아. 이게 왜 진경(眞景)인지 설명하기 어려워.”
이때 신유한이 말했다.
“청하엔 내연산이라고 깎아지른 바위에 폭포가 장관인 곳이 있소이다. 이곳을 소재로 삼아 진경의 화두를 좀더 면밀히 가다듬는 것은 어떠할지요?”
최천익도 한 마디 거들었다.
“산수화에 있어서 성리학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아리송합니다. 이 문제는 그림을 낮춰보는 풍토 때문에 정작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소홀히 다뤄온 느낌이 있습니다. 음양이나 풍수로 유학이 들러리서는 일이라면 차라리 갖다붙이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산수와 성리가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논변이 필요하겠군요.”
선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일리있는 생각이오.”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4]
내연산 보경사에서 숙종을 추억하다
“선대 왕께서 열두 폭포를 유람하시고 詩를 지어 각판을 남기셨지요”
선(敾)은 월섬(月蟾)을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이 달처럼 보얗고 허리가 버들 같던 그녀는 여윈 손으로 거문고를 타면서 잠깐 눈물을 보이는 듯했다. 몇 년 전 돌아가셨다는 어미를 생각한 것일까. ‘조홍시가’를 들으며 선도 병든 노모를 떠올렸기에 애틋한 기분이 전해졌다. 월섬은 기생인 어미를 따라 기적(妓籍)에 올려졌지만, 어미를 여읜 이후 방면(放免)되어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언젠가 경상관찰사를 따라와 구경했던 내연산에 반해 이곳 청하로 들어왔고, 보경사 절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너는 어찌하여 아직도 기생을 자처하느냐?”
“스님과 보살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 화기(畵妓)라고 하였는지라, 그것이 별호(別號)처럼 되었습니다.”
“월섬이란 기명은 누가 지었는가?”
“저의 어미가 지었습니다. 월(月)은 초승달처럼 허리가 가는 여인이요, 섬(蟾)은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난 항아(姮娥)가 서왕모(西王母)의 노여움을 사서 두꺼비가 되었으니, 역시 달처럼 환한 선녀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옵니다.”
“너 또한 세오(細烏)와 같은 달이로구나. 양편에 달이 둘이나 떴으니 밤이 어둡지 않도다.”
좌중은 웃었다. 흰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리는 월섬은 더욱 아름다웠다. 선의 곁에 와 앉았을 때 그녀는 입가에 손나팔을 하더니 가만히 말했다.
“사실 어미가 저를 부를 때는 달섬이라 하였습니다. 기적에 올리면서 월섬이 되었지요. 하여 월섬이라 부르는 이는 한 번 그냥 안 것이요, 달섬이라고 부르는 이는 제 속을 안 것입니다.”
선이 그녀에게 <영남첩> 사생(寫生)을 위해 해인사 여행을 함께 하자고 한 것은 그 이후였다. 신라 때 지은 대찰로 최치원이 진성여왕의 비정(秕政)에 낙심하여 일가를 이끌고 들어가 숨은 곳이다. 조선 세조 때 중창한 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병화(兵火)를 면했는데, 겸재의 시대인 숙종대에 여러 차례 화재를 만났다. 만월당, 원음루, 무설전이 모두 불에 타 중건을 거듭한다. 선이 이 절을 <영남첩>에다 포함시킨 것은, 명승대찰이 더 이상 소실되기 전에 기록해두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월섬은 안 그래도 꼭 한 번 해인사에 가보고 싶었다면서 기뻐한다. 최천익과 세오도 따라왔다. 선은 150칸 2층짜리 대적광전과 유명한 대장경각을 꼼꼼히 그려넣는다. 최치원의 추억이 숨은 학사대와 사명대사가 기거하던 홍제암도 빼놓지 않았다. 건물을 배치한 뒤 미점(米點)을 힘 있게 두드려 가야산의 부드러움과 가운데 암봉(岩峰)을 조화시키고 있을 때 월섬은 최치원의 시 한 수를 거문고에 실어 읊는다. “세상의 시비 소리 귀에 들어올까 늘 두려워, 물소리 흐르게 하여 꼭꼭 감싸는구나(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가마를 여기 세워라.”
선은 내연산 중턱의 보경사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사또가 지팡이를 짚은 채 성큼성큼 올라간다. 늙은 승려 도암(道巖)과 젊은 오암은 그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일행은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른다.
“여기 보경사엔 선대 왕(숙종)께서 들르지 않으셨던가요?”
선이 묻자 도암이 대답한다.
“예. 이곳 사찰에 오셔서 동종(銅鐘)을 하사하셨습니다. 비길 데 없는 광영이었습죠. 또 선대 왕께서는 내연산 열두 폭포를 유람하시고, 시를 지어 그 각판(刻板)을 남기셨지요.”
“그 얘길 들었소이다. 왜구를 물리치는 영험을 가졌다는 팔면보경(八面寶鏡)을 절터 아래 묻었다지요? 그런 호국(護國)사찰인지라 각별한 관심을 두신 듯하오만.”
“예. 원래 절이 서 있는 일대가 큰 연못이었다고 합니다. 신라 때 지명(智明)이 진나라에서 큰 스승을 만나 그 거울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스승은 오색구름이 이는 곳에 거울을 묻고 절을 지으라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돌아와 전국을 살피다가 내연산에서 오채운(五彩雲)을 발견하여 보경을 묻었지요. 그 뒤 연못을 메워 금당을 지었습니다.”
“왕이 행차하실 때 수종(隨從)하는 많은 이가 왔을 텐데 산골에서 어떻게 귀한 손을 대접하였는가?”
“보경사에는 지금도 비사리구시라고 하는 큰 나무밥통이 있습니다. 쌀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거기 담았지요. 4천명이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허허, 대단했겠구려.”
“왕이 친히 명산을 유람한 예는 워낙 보기 드문 일인지라…. 지금 걷고 계신 이 길은 어로(御路)라고 할 만합니다.”
“그렇군요. 걸음마다 옷깃을 여밀 일입니다.”
조금 더 걷다가 다시 승려가 말을 건넨다.
“愚潭 丁時翰(1625∼1707) 선생이 전국 산천을 유람한 뒤에 그 중에서 내연산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허허, 그건 나도 알고 있소이다만.”
선은 반가운 듯 말을 받았다. 도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선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담의 <山中日記>를 읽었습니다. 내연산 용추(龍湫)는 금강산에도 없는 절경이라고 말했더군요. 놀라운 평가였습니다. 그래서, 나 또한 이곳을 꼭 탐승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금강산 그림으로 화명을 얻었으니,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내연산을 꼭 보러 와야겠다 싶더이다.”
중허대(비하대의 옛 명칭)를 넘어 시명리를 향해 오르다가 선은 월섬에게 물었다.
“이곳은 이름이 무엇이냐?”
그녀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은 뒤 대답했다.
“제8폭포인 은폭(隱瀑)이라고 하옵니다.”
“은폭이라? 가려진 폭포는 아닌 것 같은데 어찌하여 이름이 그렇단 말이냐?”
그러자 갑자기 월섬이 얼굴을 붉힌다. 곁에 있던 최천익이 웃으며 말을 거든다.
“사또. 여인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여 대신 대답하여도 될지요?”
“허허. 그러게나.”
“실은 이 폭포 이름이 음폭(陰瀑)입니다. 형상이 여성의 거기를 닮았다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인조반정 이후에 醉吃(柳潚·1564∼1636) 선생이 청하로 귀양을 왔지요. 자주 여기에 올라와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취흘은 은폭의 양쪽 바위 형상을 보고는 한산대(寒山臺)와 습득대(拾得臺)로 이름을 붙였지요.”
“당나라의 기인 승려였던 한산과 습득에서 이름을 빌렸구먼? 그 두 은(隱)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은폭이기도 하다?”
“예. 그렇습니다. 취흘 선생이 보경사를 오가면서 불교에 심취해 있던 때였습니다.”
“그랬구먼. 월섬은 한산과 습득을 아느냐?”
“이름은 들었지만, 자세히는 모릅니다. 사또께서 무지한 소녀의 눈이 밝아지도록 설명을 조금 해주시면….”
“허허. 한산과 습득, 이 사람들은 괴짜 시인이자 승려였지. 중국 천태산의 국청사(國淸寺)에 있던 풍간이라는 승려의 제자들이었어. 한산은 농민이었는데, 워낙 책만 읽어서 아내와 가족에게 버림받아 국청사 근처의 굴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지. 습득은 강보에 싸여 버려진 아이였는데, 풍간이 절로 데려와 심부름하는 아이로 키웠다네. 습득은 대중이 먹다남은 음식 찌꺼기를 모아서 한산에게 가져다주었지. 습득이 마당을 쓸고 있을 때 한 스님이 이렇게 물었네. ‘너를 습득이라 부른 건 풍간이 너를 주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 성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그때 습득이 빗자루를 놓고는 양손을 마주잡고 우뚝 서 있었다고 하네. 이 대목이 선문(禪門)에선 큰 화두가 되었지. ‘차수이립(叉手而立·양손을 잡고 서있다)’이 그것이라네. 또 한산은 해어진 옷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커다란 나막신을 끌고 다니면서 가끔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지르다가 나뭇잎이나 절의 담벼락에다 시를 썼지. 여구륜(呂丘侖)이란 사람이 병을 앓았는데, 풍간에게 찾아가니 물 한 그릇을 떠놓고 주문을 외워 싹 낫게 해주었어. 그래서 어떻게 고쳤느냐고 물었더니, 한산과 습득을 가리키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했다고 하네. 그래서 여구륜이 두 사람에게 찾아가 다시 물었더니 ‘아니 아미타불도 몰라보고, 우리한테 와서 뭘 알겠다는 건가’하고 대꾸했다지. 그러니까 세 사람은 바로 아미타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화신이었다는 거지.”
말이 끝났을 때 거문고를 잡으며 월섬이 말했다.
“청나라의 화가들이 화제(畵題)로 곧잘 삼는다는 한산과 습득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번 불러봐도 될는지요.”
“허허. 좋고말고.”
“하하하 걱정 않고 웃는 얼굴 번뇌도 적다
이 세상 근심일랑 내 얼굴처럼 바꾸어라
사람들 근심 걱정 밑도 끝도 없더라
큰 진리는 오히려 기쁨 속에서 피는 것
나라가 잘 되려면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야 하고
집안이 즐거우려면 가족이 서로 뜻이 맞아야하지
손발이 맞는 곳에 안 되는 일 하나 없네
부부간에 즐거우면 금실이 좋아지고
손님과 주인도 즐거워야 하는 법
아래 위가 다 즐거우니 기쁨 속에 법이 있네 하하하”
최천익이 나섰다.
“저도 한산의 시를 한 수 읊어보겠습니다.”
“二儀旣開闢(이의기개벽) 하늘과 땅이 이미 열려,
人乃居其中(인내거기중) 이에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사네,
迷汝卽吐霧(미여즉토무) 안개를 토해서 너를 헤매게 하고,
醒汝卽吹風(성여즉취풍) 바람을 불어서 너를 깨어나게 하며,
惜汝卽富貴(석여즉부귀) 부귀를 주어서 네게 아까움을 알게 하고,
奪汝卽貧窮(탈여즉빈궁) 빈천을 주어서 네게 없음을 알게 하나니,
碌碌群漢子(녹록군한자) 허덕이는 무리들아,
萬事由天公(만사유천공) 만사는 하늘에 있느니라.”
이때 세오도 지지 않았다. 그녀는 습득의 시를 하나 읊었다.
“從來是拾得(종래시습득) 원래 습득이란 이 이름이
不是偶然稱(불시우연칭) 우연히 붙여진 게 아니라네.
別無親眷屬(별무친권속) 별다른 부모나 가족 없으니,
寒山是我兄(한산시아형) 한산 그 사람이 내 형이라네.
兩人心相似(양인심상사) 두 사람 마음이 서로 같으니
誰能徇俗情(수능순속정) 누가 사람끼리의 사랑을 말하는가.”
세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선은 다른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삼척부사로 가 있는 벗인 槎川 李秉淵(1671∼1751)이 보고 싶었다. 兩人心相似!(양인심상사), 그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선은 가만히 거문고를 만지고 있는 여인을 향해 말했다.
“월섬아. 너는 성류굴이 보고싶지 않느냐?”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5]
“영남이 진경의 화룡점정처요”
진경산수는 산과 인간의 만남을 그려내는 일…
이제 막 그 깨달음에 눈을 뜬 敾
그의 진경산수 화룡점정처는 바로 내연산이다
선이 인왕곡(仁王谷)에 이사갔을 무렵, 북악산 아래 취록헌(翠鹿軒)엔 槎川 李秉淵(1671∼1751)이 살고 있었다. 화인(畵人) 겸재와 시인(詩人) 사천은 한 동네 사람으로 만났다. 秉淵이 敾보다 다섯 살이 많다. 그림과 시가 어우러져야 당시 조선의 주체적인 문화운동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았을까. 선은 그림으로 말하는 시를 그렸고, 사천은 시로 말하는 그림을 읊었다. 선이 35세 때(1710년) 병연은 금강산 들어가는 길에 있는 마을인 금화(金化)에 현감으로 부임했다. 선이 금강산 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 이듬해다. 초기 최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辛卯年 楓嶽圖帖>은 병연과의 우정이 낳은 예술적 결실이었다. 병연은 선에게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을 보지 않고 금강산을 그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겠지만, 금강산을 보았다고 눈에 보인 금강산만 따라 그리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게 고민입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중국의 대가들이 이룩한 그림의 성취를 모두 버리는 것 또한 능사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중요한 것은 실경을 그리는데 마음을 쓰다가는 우리가 직접 걸어다니면서 보고 느꼈던 그 느낌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점이죠. 우리 마음에 들어와 앉은 금강산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일찍이 趙涑(1595∼1668)은 하늘에 날아오른 새의 눈이 되어 금강산을 한눈에 보는 그림을 비판했지만, 그것은 그가 지나치게 실경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그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형국입니다. 韓時覺(1621∼?)의 ‘칠보산전도(七寶山全圖)’는 함경도 칠보산 전체 풍경뿐 아니라 동해까지 모두 넣었소. 이런 방식이라면 금강산 1만2천봉도 넉넉히 한 화면에 들어가 앉을 수 있지 않겠소?”
“일리 있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집어넣으려고 하다 보면 복잡하고 지저분해지기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잡다해지면 현장에서 느꼈던 우람하고 거대한 산의 동세가 자칫 오글거리는 형세로 죽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생각이오?”
“우선 과감한 생략과 대담하게 부각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듯합니다. 활달한 미점(米點)과 꿈틀거리는 수직준(垂直皴)을 활용해볼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금강산 탐방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는 많은 이에게, 눈으로 보면서 여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명과 위치에 대한 정보를 세밀하게 넣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천은 헤어지는 선을 위해 이런 시를 쓴다.
爾我合爲王輞川(이아합위왕망천) 그대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畵飛詩墜兩翩翩(화비시추양편편)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양쪽이 다 허둥대네
망천은 당나라 시인 王維의 別墅를 가리킨다. 蘇東坡는 왕유의 시를 읽으며 ‘화중유시(畵中有詩)’로 격찬하지 않았던가. 두 사람이 헤어지면 화비시추(畵飛詩墜)의 꼴이 된다면서 상호보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 것이다. 병연은 이런 시도 썼다.
我詩君畵換相看(아시군화환상간) 내 시와 그대 그림 서로 바꿔 보니
輕重何言論價問(경중하언논가문)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나,
詩出肝腸畵揮手(시출간장화휘수)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에서 솟아난다
不知誰易更誰難(부지수이경수난)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를 일일세
선의 금강산 그림이 점차 무르익으면서 명성을 드높이게 된 것은 1712년 또 한 번의 산행이었다. 그해 8월 병연의 아버지인 李涑(1647∼1751)과 아우 이병성(李秉成)이 함께 한 이 금강산행은 겸재 그림을 훌쩍 자라게 했던 계기였다. 이때 그려진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은 병연에게 선물했던 작품이다. 조선의 그림 수집가들은 병연의 그림첩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에 떨었다. <해악전신첩>을 본 三淵 金昌翕은 “畵家三昧融神在 布襪靑鞋更何爲(화가삼매융신재 포말청혜갱하위) 화가 삼매경의 무르익은 정신이 여기 있는데 무명버선 푸른 짚신이 무슨 필요있겠느냐”라고 했다. 굳이 금강산까지 여행갈 것도 없이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산을 돌아본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격찬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바위봉우리. 그 아래에 종유석이 웃자란 고드름처럼 내려와 있는, 2억5천만년이나 된 동굴. 선은 괴물의 두 눈처럼 뻐끔 뚫린 성류굴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사생을 한다. 큰 돌덩이를 감아돌 듯 왕피천이 흐른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저곳엔 聖留寺라는 절이 있었지.”
선이 손으로 가리키자, 월섬의 눈이 그곳으로 따라갔다. 옆에 서 있던 최천익이 설명을 한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저 성류굴 속에는 해신(蟹神·대게의 신)이 있어서 난리 때 숨어든 수백명을 바다로 데려가 먹여 살렸다고 하더군요. 그때 성류사 금당의 거대한 부처도 굴 속으로 옮겼는데, 저토록 좁은 입구를 쉽게 통과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성류굴의 모양이 뒤룩거리는 대게의 눈과도 닮아있네요.”
세오가 문득 감탄하듯 중얼거린다.
사생을 끝낸 선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월섬이 말했다.
“사또, 제 미숙한 소견으로 보아도 지금 그리신 성류굴도는 이전의 해악전신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길목의 그림이라 여겨집니다. 이곳 절경들을 샅샅이 사생하여 <관동명승첩>을 엮어내시면 향후 큰 즐거움이 아닐지요?”
“작년에 완성한 <嶠南名勝帖>에 더하여 오랜 공을 들인 <영남첩>을 마무리하면서 또 하나의 과제가 생기는구려. 관동의 승경에 대한 관심은 임금께서도 지대하셨네.”
이제 <영남첩>은 동해안 일대까지 섭렵하고, 오로지 청하 일대의 절경을 담는 일만 남았다.
“자, 나의 벗이 있는 삼척으로 갑시다.”
선은 오랜 만에 술잔을 기울이며 병연과 시화(詩畵) 얘기를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진경산수는 산과 인간의 만남을 이야기로 그려내는 일입니다. 즉 감각을 넘어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과정을 담는 작업이기도 할 것입니다.”
삼척에서 돌아오면서, 선은 병연이 술을 따르며 꺼냈던 의미심장한 저 말을 거듭 새겨보았다. 산과 인간의 만남을 그림이라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 영남 사생(寫生)을 통해 그가 어렴풋이 정리해 가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산을 그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얽매이면 산 속을 걸어가며 숨 쉬는 인간의 마음과 감각과 눈을 잊어버린다. 진경의 진(眞)은 바로 인간의 고양된 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즉, 진경은 인간 중심의 풍경이다. 그가 이제 막 개안(開眼)한 진경산수의 畵龍點睛處라고 생각한 곳은 바로 내연산이다.
內延山. 낙동정맥의 줄기가 주왕산을 밀어젖히며 내려오다가 동해안으로 고개를 틀어 완만한 능선을 이룬 산이다. 문수산, 향로봉, 삿갓봉, 천령산의 준봉이 반달처럼 둘러쳐 깊은 품속같은 청하계곡을 이룬다. 35리에 달하는 계곡 양쪽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져 폭포와 소(沼)가 널렸다. 선은 열 번도 넘게 이 산을 오가며 사생을 했다. 사자쌍폭(상생폭), 보현폭, 삼보폭, 잠룡폭, 무풍폭, 관음폭, 연산폭까지 일곱 개 폭포가 가장 아름답다. 은폭, 시명폭과 실폭, 복호폭 2개가 합쳐져 열두 폭이다.
연산 사생에서 가장 깊이 있는 조언자는 월섬이었다. 일전에 폭포를 모두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조감(鳥瞰)으로 그려 집어넣은 ‘내연12폭全圖’를 그렸는데, 이는 보경사 주지에게 주었다. 12폭전도는 겸재의 야심작이라 할 만 했다. 겸재의 ‘금강내산(金剛內山)’이 융기하는 봉우리들의 향연이라면, 12폭전도는 추락하는 물의 웅장한 協奏 같은 것이었다. 그림을 보더니 월섬이 말했다.
“사또의 진경은 바로 마음이 움직이는 길이라 할 만합니다. 옛 그림들도 길을 보여주었지만, 사또의 길처럼 마음을 붙잡진 못했습니다. 절절한 구도(求道)가 산수 사이에 있습니다. 산이 곧 사람이며, 물이 곧 인정(人情)입니다.”
또 좀 작은 그림인 ‘갑인년(甲寅年) 내연산도’는 세오를 주었는데, 그 작품을 보더니 월섬은 말했다.
“여기에는 폭포가 많이 드러나지 않았군요. 폭포를 보는 것도 마음이요, 물길이 줄어들면서 간절해지는 것도 마음입니다. 진경산수는 풍경을 보는 이의 마음을 그린 산수이니, 진실로 이 그림 또한 진경일 것입니다. 사또께서 요즘 무엇인가에 목이 마르신 것일까요?”
선은 그 말에 껄껄 웃었다. ‘청하 보경사’는 승려 鰲岩에게 주었는데, 이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보물 거울을 묻어놓은 비밀스러운 기운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건물과 산세에서 느껴집니다. 풍경과 인간의 만남을 이야기로 풀어야 진경이라고 말씀하신 사천 나리의 뜻에 깊이 닿아있는 작품입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로다.”
선은 가을로 접어드는 울긋불긋한 계곡길을 오르다가 두 줄기 사자쌍폭(상생폭)을 만나면서 그렇게 부르짖었다. 쌍폭 왼쪽에 솟은 바위벼랑 위에 열 평쯤 되는 제법 넉넉한 공간이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좀 사생을 하다 가자.”
이 자리엔 오암과 세오, 그리고 월섬이 함께 했다. 가을 경치에 취했던지 세오와 월섬도 술을 받아 마셨다. 선은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기화대(妓花臺)라는 이름을 지녔으니, 기생이 가무를 하기 좋은 곳이 아니겠는가. 월섬아. 향로봉 할무당(姑母)께 화업(畵業) 성취를 비는 마음을 담아, 춤을 한 번 추어보아라.”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6]
기화대의 낙화, 그리고 내연진경의 발견기사내보내기
“그래, 내연산 고사를 그리자…월섬을 생각하는 내 뜻을 담으리라”
월섬은 그림을 그리던 종이를 옆에 제쳐놓고 일어섰다.
“한 잔(盞) 먹새그려, 또 한 잔 먹새그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예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松江 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부르며 그녀는 신명이 난 듯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다닌다. 비단치마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선은 중허대(비하대) 위의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었다.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 제…”
술에 취해서인가, 노래에 취해서인가. 그녀가 살짝 비틀거리는 듯 했다. 잠깐 노래가 끊어졌다. 짧은 정적. 문득 비명소리가 환청(幻聽)처럼 들렸다. 폭포소리인가. 그런데 그 소리와 함께 좌중에서 울음소리가 터졌다.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선은 고개를 돌렸다. 춤을 추고 있던 월섬이 보이지 않는다. 비단신발 한 쪽이 보인다. 그것은 뒤집힌 채 기화대 난간에 놓여있다. 갑자기 앞이 아득해진다.
“월섬아!”
사람들은 폭포 쪽을 향해 저마다 고개를 내밀었다. 두 줄기 사자쌍폭 아래 기화담엔 하얀 물거품만 보인다. 월섬의 실족, 그리고…. 이렇게 가뭇없이 낙화하는 꽃이라니. 선은 현기증이 났다. 내연산 꾀꼬리단풍이 물빛으로 아른거린다.
선은 며칠째 입맛을 잃었다. 이 아이에 대한 마음이 이 정도였던가.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삶에 선물처럼 다가왔던 아주 귀한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빈 자리는 메울 수 없을 만큼 컸다. 화풍을 일대 혁신하려는 선에게 월섬만큼 뛰어난 안목을 가진 조언자는 없었다. 선을 따라다니며 진경(眞景)산수를 부지런히 습작한 그녀의 미완성 작품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쓰려왔다.
세오는 말을 잃었고, 그저 선을 바라보며 펑펑 울기만 할 뿐이다. 보경사에서 다비(茶毘)하던 날 세오는 월섬의 거문고를 함께 태웠다. 생전에 그토록 아끼던 현금(玄琴)을 품에 안고 외롭지 않게 가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은 은폭의 한산대와 습득대 풍경을 월섬에게 주려고 그리고 있던 중이었다. 반쯤 그려놓은 그것을 찢어버렸다. 선은 기화대와 기화담, 그리고 낙화하는 작은 꽃 하나를 며칠째 그리고 있다. 눈물이 흘러 먹물이 번진다. 산수는 그냥 산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이라고 월섬은 말했다. 얼굴이 마음에 따라 표정을 바꾸듯 산수 또한 마음에 따라 그 기운과 기분을 지니는 것이다. 얼굴에 관상이 있듯, 산수에도 생로병사가 있으며 운명과 사랑 그리고 슬픔이 스며들어 있다.
선은 월섬과 함께 내연의 명물인 삼동석(三動石)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서있는 바위는 기이했다. 손가락으로 가만히 밀어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정작 힘을 들여 양손으로 밀어붙이면 꿈쩍도 않는 것이다.
“바위가 생각이 있어서 저러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던 힘이라는 것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인가.”
그때 월섬은 이런 말을 했다.
“때론 부드러움이 큰 것을 움직이고, 때론 약한 것이 더 강한 힘을 내는 게 아니더이까? 진경산수는 골기(骨氣)만으로 채워질 수 없지 않은지요? 부드러운 것, 슬픈 것, 쓸쓸한 것, 먼 것, 옅은 것들이 오히려 동세(動勢)와 적막을 이끌어내는 힘이 될 것입니다.”
“오호, 월섬아. 너는 십만 장을 사생한 나보다 더 깊은 논의를 꺼내는구나.”
세오가 찾아왔다. 동헌 마당을 걸으며 선이 불쑥 말했다.
“관음폭 큰 바위에 각자(刻字)를 하는 것은 어떠냐?”
“내연산에 대한 사또의 마음을 담고 싶으신 것이지요?”
“그래. 그렇기도 하지만, 월섬이의 이름을 새겨놓고 싶구나. 이제 그 아이는 내연산이 된 것이 아니냐?”
세오가 다시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튿날 선은 서각쟁이를 불러 산을 오른다. 바위에 이르러 지필묵을 펼치고, 한 여인의 이름을 쓴다. 몇 번이나 썼다가 찢고 다시 쓴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세오가 묻는다.
“사또, 그 아이 이름은 월섬이온데 어찌 경기달섬(慶妓達蟾)이라고 쓰는지요?”
“나도 모르겠다. 문득 그렇게 써놓고 싶구나. 이 산이 내연(內延)이거나 내영(內迎)으로 불리는 것은, 해를 안으로 깊이 맞아들이는 산이라는 뜻이 있을 것이다. 즉 연일(延日)과 영일(迎日)이란 지명 앞에 내(內)자가 붙은 것이 아니더냐. 달이 해를 받아들이는 형국이니 음양이 조화롭지 않은가. 달섬이는 여기서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선은 눈자위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이제 너를 그냥 한 번 아는 것이 아니로다. 달섬아.’
(관음폭에서 비를 만나면 숨어들기 딱 좋은 바위. 그 암벽면의 왼쪽에 ‘경기달섬’이라고 조금 작은 예서체풍의 글씨가 씌어져 있다. 그 옆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는 힘있는 해서로 이광정(李光正)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광정은 경상감사를 지낸 이휘정(1760~?)의 초명(初名)이다. 그는 대사헌을 거쳐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국가 공헌을 기리는 명예직)를 받은 정치적 거물이었다. 뒷사람들은 이광정과 달섬이 함께 온 것으로 오해하였지만, 실은 달섬의 이름이 먼저 새겨진 것이다. 겸재가 달섬을 새긴지 104년이 지난 1838년에 관찰사였던 광정은 내연산에 들렀다. 그는 당시 청하현감에게서 이 글씨를 새긴 사연에 대해 들었다. 달섬을 새긴 겸재의 애틋한 심사에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 또한 달섬의 장진주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구나. 나의 이름을 달섬 곁에 새겨주시오.”)
선은 쌍폭 위에서 월섬의 춤을 보던 날을 생각하며 ‘내연산 폭포도’를 그렸다. 주변의 잡다한 산세를 다 없애고, 큰 줄기의 폭포 하나만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암봉과 암벽이 단지 바윗덩이가 아니라, 서책을 들고 열심히 토론을 벌이는 학생의 모습과도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너럭바위에 앉아 산의 골기와 폭포를 바라보는 네 사람을 그려넣었다. 인간과 자연이 이토록 장쾌하게 직면할 수 있는 자리가 또 있겠는가. 기화대 절벽바위 위에서의 정경을 떠올리며 붓을 움직일 때 가슴이 떨려왔다. (그림 속의 왼쪽 바위는 선일대이며, 그 위에 그려져 있는 암자는 없어졌다. 기와 파편만 옛 정취를 쓸쓸히 증언할 뿐이다.) 연산폭포 뒤로 中虛臺(1753년 李象靖이 飛下臺로 이름을 바꾼다)가 보이고, 낙락장송이 기세도 좋게 드리워져 있다.
어느 날 신유한이 찾아와 함께 해월루에 앉았다.
“요즘 사또의 모습을 보니 집 앞에 다섯 그루 버들을 심고 은자를 자처한 동진(東晋)의 五柳선생 陶淵明(365~427)같습니다. 오류의 사시시(四時詩)는 오래도록 사람을 감동시킨 시중화(詩中畵)였다 들었습니다. 봄 물은 온 연못에 가득 차고(春水滿四澤) 여름 구름은 기이한 산봉우리들을 연출하고(夏雲多奇峰)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뿜어내고(秋月揚明輝) 겨울 산은 낙락장송을 빼어나게 하는구나(冬嶺秀孤松).”
“과연 그림같습니다. 근자의 일로 추월(秋月)의 밝은 빛이 얼마나 사람을 사무치게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허어, 사또. 그건 이제 잊으시지요. 그런데 저 5언절구가 운우지정(雲雨之情·섹스)을 암시한다는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자연이 인간의 운우지정을 담는 건 만고의 이치가 아니오?”
“그러게 말입니다. 오류선생은 그걸 아셨는지 모르겠는데…. 봄 물은 여자 열여덟이라 건드리기만 해도 철철 넘치는 시절이고, 여름 구름은 서른 사내의 마음이라 울뚝불뚝 때도 없이 서 있으니 사고 치기 좋은 때이고, 가을 달은 여자 나이 마흔이니 쓸쓸하여 온 대지가 허하고, 겨울 산은 쉰을 넘긴 사내로 혼자 자는 밤도 나쁘지 않아지는 때라 하오이다.”
“허허, 대단한 해석이외다.”
그러면서 선은 생각했다. 아! 내연산은 4계절이 모두 한 풍경에 들어있구나. 봄 물과 기봉과 달빛과 고송. 이런 기화(奇畵)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래도 도연명의 절창은 ‘음주’시가 아니겠습니까? 추향아, 네가 거문고를 한 번 타보거라.”
유한은 새로 온 기생에게 이렇게 주문한 뒤 시를 읊는다.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띠풀 엮어 마을에 초막을 지었네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수레소리 말소리 들을 일 없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그대 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은 멀고 사는 곳은 구석이니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 아래 국화를 따면서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멀리 남산 바라보면서 사오
시를 들으며 선은 생각했다.
‘아. 그래 유연견남산이다. 중허대 위의 고송에 기대어 선 내연산 고사(高士)를 그려보자. 거기엔 월섬을 생각하는 내 뜻을 담으리라.’
부채그림인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의 화의(畵意)가 생겨난 밤이었다. 관란(觀瀾)은 맹자의 말, ‘觀水有術 必觀其瀾(물을 보는 법에도 노하우가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들여다보라)’에서 얻은 말이지만, 물거품으로 사라지던 한 여인의 삶을 돌이키며 음미해보는 자화상을 숨겨놓고 싶었다.
이제 선은 청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내연산의 폭포 중에서 가장 동세가 뛰어난 3용추(연산폭, 관음폭, 잠룡폭)를 중심으로 이 남녘산의 빼어난 기운을 표현해내는 일이다. 12폭 중에서 제4폭부터 제7폭까지 가장 헌걸찬 폭포를 골랐다. 제5폭은 무풍폭이긴 하나, 옛 사람들은 무풍계로 다뤄 폭포로 치지 않았다. 금강산에서도 볼 수 없다는 물의 대향연으로 영남첩의 대미를 삼으리라. 그런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7]
추락진경을 발견하다
월섬아、3절의 벼랑 위에 네가 물이 되어 쏟아져내리고 있구나
월섬을 여읜 뒤 敾은 미친 듯 그림을 그렸다. 山水를 화폭에 담는 의미를 붙잡고 고뇌하다가 절벽 아래로 사라져간 꽃 같은 여인, 월섬.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툭 던졌던 한마디가 선의 귀에 또렷이 걸려 있었다.
“이 산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저는 내연산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 이 산의 정령(精靈)이었나 봅니다. 사또를 봬온 것은 산의 뜻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연산이 말하는 소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어리석은 달섬, 나는 그것보다 네가 더 귀중했단 말이다. 문득 마음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그리던 화폭에다 마구 난필(亂筆)을 휘둘렀다. 먹이 번지다만 여백을 멍하니 바라보노라니 문득 그녀가 거기에 나타나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는 듯하다. 왈칵 눈물이 솟는다.
“사또, 괜찮으시옵니까?”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세오였다. 선은 말했다.
“세오야, 우리 내연산에 가보자꾸나.”
“이 빗속에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괜찮다. 화구는 챙기지 마라.”
시복 하나를 데리고 그들은 산을 오른다.
“세오야, 이곳을 왜 용추(龍湫)라고 부르는지 아느냐?”
“폭포의 형상이 용이 승천(昇天)하는 양상을 닮았고, 그 아래에 있는 소(沼)가 부글거려 용의 기세를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요?”
“옳은 말이다. 그런데 조선 땅에는 무려 90여개의 용추가 있단다. 그런데 이곳 내연산 용추가 으뜸인 까닭은 무엇이겠느냐?”
“용추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사옵니까? 그래도 내연산만큼 거듭거듭 굽이치며 돌아흐르는 폭포가 드물지요. 흐르는 물의 용틀임이 장관이니 뭇사람들의 감탄을 얻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바로 그렇다. 나는 여기 와서 관란(觀瀾·물구경)의 도를 느끼는 듯하다. 그것을 겸재 진경의 골수(骨髓)로 삼고 싶다. 금강산에선 山水를 보았지만, 여기선 뒤집어 수산(水山)이라 말할 수 있는 뜻밖의 기세가 있다. 그것을 그리고 싶다.”
“사또, 물을 그리신다면 그냥 물이 아니라 물의 뜻을 그리는 것이겠지요? 물의 뜻은 무엇이옵니까? 낮은 곳으로 머리를 내려 깊이 추락하는 것, 그 끝없는 하심(下心)이 바로 물의 뜻이 아니올지요?”
하심! 이때 선이 세오를 쳐다보았다. 비를 살풋 맞은 머리칼이 곱다. 아름다웠다. 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껴안고 말았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달섬이 죽음으로써 내게 말해준 것도 바로 ‘추락’이었다. 아, 이 여인은 내게 이걸 말하려 하였구나. 물이 떨어지는 저 마음을 그려, 산이 솟아오르는 기운과 깊이 교합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산수의 웅장한 협주(協奏)로 울려퍼지는 그 경지를 내게 일러주려고 하였구나.”
세오가 말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사또. 서른 살 겸재는 일약 솟아오르는 금강산 같은 기세였습니다. 1만2천봉이 모두 저마다의 에너지로 솟아오르면서 비약의 노래를 부르는 그 기개가 오늘의 겸재화풍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쉰에서 예순으로 치닫는 겸재는 무엇일까요? 삶이란 비약으로만 이뤄질 수 없는 것이며, 또 바위 같은 골기(骨氣)에 더하여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겸허와 물같은 유연함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 또한 달섬이 말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선이 말했다.
“내 무슨 뜻인지 이제야 뚜렷이 알겠노라. 젊은 시절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폭포를 그린 적이 있다. 한 번은 금강외산의 ‘구룡폭(九龍瀑)’이었다. 단순 장쾌한 폭포의 동세(動勢)를 담은 것으로, 수십 차례 습작을 해오던 중국의 ‘여산(廬山)폭포도’의 화의(畵意)를 새겼지. 그러니까 관념 산수를 금강산에 응용한 것이었다. 폭포는 단순하지만, 그것을 감싼 산의 형세가 험하고 비장하여 긴장미를 자아내는 힘이 있었어. 그러다가 금강산 길목의 철원에서 ‘삼부연(三釜淵)폭포’를 그리면서 홀연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 폭포는 바로 세 번 꺾이는 3절(三切)의 물길로 기운을 증강하는 형세가 볼 만 했지. 내연폭포도 또한 이 3절의 굽이치는 힘을 활용해 보리라.”
선은 문득 바위 벼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달섬아. 3절의 벼랑 위에 네가 물이 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구나.”
세오가 말했다.
“내연은 12폭이라 하는데 3폭으로 줄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진경은 마음이 받아들이고, 눈이 읽어내고, 감정이 흘러가는 그것을 담는 것이다. 폭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폭포의 정신을 그리는 것이요, 산수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산수의 혼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낙락장송은 빽빽이 늘어서서 천 명의 병사가 줄을 선 듯하고, 성난 폭포는 급히 쏟아지니 만 마리의 말이 울부짖는 듯하다(長松鬱立千兵列 怒瀑急噴萬馬喧). 이 여산(廬山)의 기세를 내연산의 기세에 옮겨보리라.”
“아, 사또. 미천한 저에게도 감흥이 솟아나는 듯합니다. 산경(山景)의 진수는 형상에 있고, 수경(水景)의 골수는 바로 소리에 있다는 뜻이 아닌지요? 물소리를 그려내는 일, 그것이 또 하나의 진경입니다.”
겸재가 소리쳤다.
“화성(畵聲)! 소리를 그린다. 세오가 내 귀를 번뜩 뜨이게 하는구나. 세오야. 얼른 내려가자꾸나. 내연삼용추의 큰 음악을 담아야겠구나.”
상악(霜鍔)준법. 선은 세필 두 자루를 거머쥐고 깎아지른 바위벽을 서릿발같이 혹은 칼끝같이 그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부벽(長斧劈)준법. 붓을 뉘여서 끝을 길게 뻗치게 하는 도끼자국 화법으로 바뀌었다. 깎아지른 암벽이 그려졌다. 절벽 위에는 흙산이 있어서 수림(樹林)이 좋다. 미점(米點). 중국 북송화가 미불이 창안한 점묘법을 쓴다. 붓을 눕혀 쌀알 같은 점을 찍어 촉촉한 기운을 표현한다. 뼈대 같은 암벽을 부드러운 흙산이 감싸고 있으니 음양의 조화가 화폭의 생기를 돋운다. 폭포는 중폭인 두 갈래 관음폭이 부각되었다. 관음폭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오른쪽 벼랑 중턱으로 난간을 흐르는 길이 나 있어, 물과 인간이 서로 동행하며 대화하는 것 같은 기분을 자아낸다. 중폭에는 소(沼)의 꿈틀거리며 휘어도는 물의 형세가 눈에 들어온다. 관음폭 옆에는 세 개의 동굴이 그려진다. 이른바 관음굴이다. 이는 원래 상폭인 연산폭 부근에 있으나, 거기엔 표현하기가 어려우므로 정선은 이곳으로 옮겼다. 흥취를 위해 변화를 준 것이다.
“상폭인 연산폭에 사다리가 보입니다.”
곁에 있던 세오가 가만히 말을 꺼내자 선은 대답한다.
“그래.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풍경 전체를 맛보기도 하지만, 그림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하기도 하지. 우리가 걸어올랐던 저 작은 사다리는 그림 감상자들을 바로 그 자리에 데려가는 구실을 하지. 저 사다리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써 그는 그 위에 있게 되고, 그러면서 폭포소리도 들리게 되며, 산바람도 느끼며, 험준한 바위 기운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
“산 끝에 작은 암자도 보입니다.”
“그래. 지난 날 월섬과 함께 머물렀던 繼祖庵이 아니더냐?”
“아, 그렇군요. 이렇게 보니 정겹습니다.”
“사또, 과연 내연삼용추는 다양한 형상의 폭포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면서 산의 정적 속으로 파고드는 기이한 기운이 생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기절(奇節)한 산세가 두루 표현되어 명승의 한 면목을 전신(傳神·혼을 전함)하고 있는 큰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가? 하지만, 내 마음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 무엇이 있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며칠 뒤 선은 내연산 할무당제(祭)를 보고 돌아온 청천 신유한, 최천익, 오암, 세오를 만났다. 당시 할무당제는 내연산 문수봉과 삼지봉 사이에 있는 할무당재의 백계당(白啓堂)에서 정월대보름과 팔월대보름 두 차례 지내는 제사였다. 선은 웃으며 오암에게 물었다.
“불도를 닦는 이로서, 산신에게 예를 표해서야 되겠소?”
오암은 대답했다.
“할무당은 원래 보경사에서 기거하던 박씨 성을 가진 보살이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지극정성으로 부처에게 빌면서 죽어서도 남을 돕고 싶다고 서원(誓願)하였습니다. 그가 돌아갔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 그 몸뚱이를 할무당재에 물어다 놓았지요. 그 위에 돌들이 저절로 쌓여 무덤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지나다가 우연히 그 앞에 엎드려 기구(祈求)를 하니, 하는 것마다 이뤄졌다 하더이다. 그러하니 내연산 할무당은 부처의 뜻을 펴는 큰 보살이 아닐지요?”
선은 말했다.
“허허, 그건 몰랐구려. 청천은 거기 가보니 어땠소?”
“참으로 내연산이 보통 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저 할무당은 경상도 사투리로 쓰는 할무이라는 말과 ‘무당(巫堂)’이라는 말이 합쳐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당은 물론, 오래전에 신과 통하던 여성 지도자를 가리키는 의미고요. 할무당을 고모(姑母)라고 하는데 조선의 큰 뿌리가 되는 마고(麻姑)할머니가 아니겠습니까. 백두산, 태백산으로 이어진 천제(天祭)의 전통이 여기까지 내려와 할무당 신제로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였소이다.”
“놀랍군요. 천익은 무엇을 보았는가.”
“예. 할무당이 여왕이라면 여왕의 부군이 계시더군요. 대권산왕대신이라는 이름으로 할무당 옆에 패가 모셔져 있더군요. 이 분을 대개 신령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내연산의 원래 산신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선이 말했다.
“산이 물과 바위의 음양을 갖추고 있으니, 그 신령 또한 그런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양이오.”
세오가 웃음을 띠며 거들었다.
“사또께서는 오직 산수 생각만 하시는 분 같습니다.”
“핫핫. 그러냐?”
며칠 뒤 세오에게 ‘내연산 폭포도’를 주었다. 그녀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 보더니 말했다.
“너럭바위 위에 있는 네 사람 중에서 서 있는 사람이 문득 월섬이처럼 느껴집니다.”
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오가 다시 말했다.
“중허대(비하대) 위의 노송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마치 스승 겸재가 천하의 화풍을 섭렵하고 낙락장송으로 거기 세상을 굽어보면서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네가 나를 과하게 추켜세우는구나.”
“아닙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또. 그리고 제가 사또께 간절히 올릴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이라면…?’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8]
깨달음의 저 나무를 겸송이라 부르리라
겸(謙)의 의미를 가르쳐준 나무 오늘은 내가 진짜 겸재로 거듭나게 된 날이다
선은 세오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청이 있다더니…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너무 행복해서 그렇습니다. 감히 여쭙건대 사또와 둘이서 중허대에 한 번 오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는 길에 관음폭에 사또의 이름을 각자(刻字)하고 싶습니다.”
“허허. 왜 그러느냐? 유산(遊山)하는 것은 당연히 반길 일이지만, 굳이 내 이름을 새기고 싶지는 않구나.”
“아닙니다, 사또. 어제 꿈을 꾸었사온데, 사또와 이별하는 꿈이었지요. 지금껏 그런 생각은 없이 그저 사또와 오래 같이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곧 한성으로 떠나실 분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고 눈 앞이 캄캄해지더군요. 그래서 사또께서 떠나시면 각자라도 들여다보며 견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또, 이런 제 마음을 물리치지 마시기를….”
“그것이 네게 위안이 된다면야 내 헛된 이름이 귀한 바위를 조금 깎은들 내연산 할무당이 노하진 않으리라. 허허.”
“은혜가 망극합니다. 사또.”
세오는 교리(校理)를 지낸 명필인 이현망(1688∼?)에게 글자를 부탁했다. 그는 반가워하며 명인(名人) 사또 곁에 자신의 이름을 함께 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선은 그 얘길 듣고는 “훌륭한 이 곁에 숨어서 다행이다”며 껄껄 웃었다. 이현망은 ‘갑인추정선(甲寅秋鄭敾)’과 자명(自名)을 나란히 써주었다. 선과 세오는 연산폭에 들러 각자했다.
“너무 깊이 새기지 말거라. 부질없다.”
글을 새기는 이에게 선은 주문했다. 세오는 옆에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몇 번 정선(鄭敾) 두 글자를 어루만진 뒤, 그녀는 선의 뒤를 따라 중허대로 올랐다. 험준한 길이다. 문득 세오가 물었다.
“사또는 이곳에 오셔서 보람있는 일이 무엇이옵니까?”
“음. 글쎄. 내연산을 발견한 것이 아니겠느냐?”
“내연산도 이 땅의 산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굳이 ‘발견’이라고 하시는 뜻은 무엇이옵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서른 살에 이곳에 들렀다면 아마도 다른 내연산을 보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삼십년의 세월을 겪고 난 다음에 이곳에 왔으니 산이 달리 보이는 것이리라. 결국 경물(景物)의 산을 본 것이라기보다는 마음 속에 있는 산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싶구나.”
“마음속의 산은 어떠하옵니까?”
“아름답다. 장엄하고 처연하다. 계절이 나뭇잎들이 추락하는 가을인지라 그런 기운이 더욱 뚜렷하질 않느냐.”
“그것은 슬픈 산이 아니옵니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인생도 올라가는 시절이 있고 내려가는 시절이 있다. 굳이 따진다면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같은 길이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바뀌었을 뿐이다. 올라가는 산길에선 산꼭대기와 하늘만 보인다. 하지만 내려가는 산길에선 길가에 핀 꽃도 보이고, 비로소 저 먼 땅바닥도 보이며, 졸졸 흐르는 샘물도 마시며 머문다. 길을 음미하며 걸어온 날들을 추억하며 가는 것이다. 이것 또한 산수의 일부가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다른 산에도 내려가는 길은 있을 것이고 계곡 또한 있을 것이니, 굳이 내연산의 진경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지 않을지요?”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무려 열 두 개의 폭포가 있어 하강하는 물이 향연을 펼치는 산이다. 금강산이 상승산수라면 이곳은 하강산수다. 물의 장엄한 추락은 낮은 곳에 처하는 삼엄한 심법(心法)을 일깨우는 게 아니냐? 처연한 물의 낙법. 이것이 인생의 백미이며 산수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이라는 생각을 이 내연산에서 얻었노라. 사방을 돌아보건대 폭포수도 떨어지고 잎사귀도 떨어지며 월섬이도 떨어지고 겸재 인생도 여기 흘러내리고 있도다. 하지만 진실로 이것이 없다면 상승 또한 의미없는 것이지 않겠느냐.”
그들은 숨을 몰아쉬며 중허대로 올랐다. 그 앞에 너른 바위 앞에 서 있는 낙락장송을 보았다.
“세오야. 너 저 나무를 짚고 서있어 보아라.”
선의 주문에 그녀는 소나무에 기대어 서서 발 아래 폭포를 바라본다. 한 줄기 바람이 땀 흐른 귓가를 스치며 생각이 티끌 없이 맑아진다.
“아래를 바라보니, 인간이 사는 일이 작고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래. 네 말이 신선의 기상을 닮았구나. 여기가 초월한 이들의 세상관람처가 아니겠는가.”
선은 대답하며 세오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세오야, 이 그림을 부채에 그려 너에게 주겠노라. ‘의송여인관란도(倚松女人觀瀾圖)’라고 이름하면 좋겠구나. 나 또한 저 나무에 설 테니 내 모습을 한 번 그려보려무나.”
“제가 감히 어찌….”
“허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 또한 영남의 자부심 강한 화인일진대….”
선이 고송에 기대자, 세오는 빠르게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 단풍 몇 잎이 계곡 아래로 팔랑팔랑 날아간다. 선은 세오의 그림을 바탕으로, 얼마 전 화의(畵意)가 솟았던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를 그리기로 마음먹는다.
사생(寫生)을 끝낸 세오가 지필묵을 챙겨 넣으면서 문득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또. 사또의 총애가 워낙 월섬에게로만 향하는지라 감히 말씀 못드렸사옵니다만….”
늙은 나무에 의지해 서 있던 선은 세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소녀는 사또를 처음부터 깊이 사모하여 왔습니다. 화업은 물론이고 인품과 학식, 그리고 예술을 탐구하는 뜨거움까지, 날마다 밤마다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사또께서 벽촌의 어리석은 화생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기에, 그것만으로도 은혜는 넘치지만….”
“세오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사또께서 임기가 끝나 한성으로 올라가시면, 이곳 청하는 제게 캄캄해질 것입니다. 하여 저를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계시다면, 한 번만이라도…깊은 총애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
“한 번만이라도, 제게 터럭 같은 연민이라도 가지고 계시다면….”
“세오야. 이미 월섬의 일만으로도 내가 어지럽고 괴롭다는 것을 너는 알지 않느냐? 어찌 이러느냐?”
“사또. 미련한 소녀, 깊고 아름다운 화인의 길을 이어줄 자식 하나를 갖는 게 소원입니다. 사또가 가신 뒤에 아이를 의젓하고 분명하게 키워 이 땅의 진경산수의 도를 잇도록 하고 싶습니다. 부디 꺾지 말아주십시오.”
“세오야, 그건 아니 될 일이다.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느냐?”
“사또. 며칠 전 제가 꿈 얘기를 드렸었지요? 사또를 보내던 그 꿈에 영조대왕이 나타나셔서 크게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떠난다고 너무 울지 말아라. 그는 너에게 큰 선물을 주고 갈 것이다. 그의 호가 겸재가 아니더냐? 겸재의 겸(謙)은 주역으로 풀면 곤(坤)과 간(艮)으로 이뤄져 있느니라. 곤은 어머니에 해당하는 것이고, 간은 세 번째 아들인 막내자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겸재에겐 이미 장성한 두 아들이 있다. 그러니 세 번째 아들은 네게서 날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시면서 겸재에게 이 말씀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선은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임금이 꿈에 나타나 그런 말씀을 하셨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문득 영조가 선을 청하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던 일이 기억났다.
“겸재는 현감으로 가 계신 동안 영남과 동해안의 승경을 섭렵하여, 조선 산수의 진경을 제대로 갖추도록 하시오. 아마도 진경의 요체는 겸산겸수(謙山謙水)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임금은 겸재 속에 들어있는 겸(謙)을 다시 떠올리게 하셨을까. 눈물이 얼룩진 세오의 뺨을 어루만지며 선은 생각에 잠겼다. 겸(謙)이라…. 갑자기 영감이 번득이며 스쳐갔다.
‘아하! 지산겸(地山謙).’
주역의 지산겸은 아래 맨 위 막대는 온전하고 아래 막대 두 개가 터진 간(艮)이 밑에 있고, 세 막대가 모두 터진 곤(坤)이 위에 있다. 이 형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폭포 두 개가 잇따라 흘러내리는 모습이다. 주역은 겸(謙)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산겸은 하는 일을 완성하는 끝맺음의 궤이다. 하늘의 도는 가득찬 것에서 덜어 겸손한 것에 보태주고, 땅의 도는 가득찬 것을 비우고 겸손한 것에 흘러든다. 겸손한 자는 존귀한 자리에 있으면 빛나고 비천한 자리에 있어도 남이 얕보지 못하니, 군자가 지녀야 할 마지막이다.’ 아, 그러니까 내연산은 바로 스스로를 낮추는 인격도야의 겸산겸수를 천하에 알리는 묘처가 아니던가. 낮은 산 낮은 물. 이제야 알겠구나. 진경(眞景)은, 산수가 지닌 덕을 인간의 도(道)로 삼아 입문하는 빛나는 수행처임을.
“세오야. 네가 깊은 깨달음을 주었구나. 이제 내가 그려야 할 진경은 바로 겸산겸수로다. 우리를 깨우쳤던 저 소나무를 겸송(謙松)이라 이름 짓고 싶구나. 겸(謙)을 가르쳐준 나무. 오늘은 내가 진짜 겸재로 거듭나게 된 날이다. 이제 상승처의 진경과 하강처의 진경을 섭렵하여, 도처 강산에 내재해 있는 큰 정신을 삼엄하게 대면하리라. 다시 그려야겠다. 세오야, 어서 내려가자.”
선은 또 하나의 ‘내연삼용추’를 그린다. 복잡하던 산경의 오른쪽 부분을 과감히 없앴다. 벼랑 갓길도 치워버렸다. 대신 폭포가 세 번 방향을 트는 그 움직임을 힘 있게 표현했다. 그리고 산과 바위 또한 물의 기운에 조응하여 함께 움직이는 듯한 동세를 살려냈다. 관음폭 아래에는 유산(遊山) 나온 선비들이 앉거나 서서, 겸(謙) 한 글자로 내려앉는 산의 깊은 뜻을 음미하고 있다. 그 선비들의 귀로 들려오는 폭포성이 생생하다. 낮아져라! 일대 화두(話頭)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이 소리. 귀가 환하다. 추락의 소리가 상승의 혼을 돋우는 겸(謙)의 노래. 청겸(청하겸재)이 뽑아낸 조선 최고 진경의 비밀이 아니던가. <끝>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9] <끝>
전문가 인터뷰
캐릭터 만들고 옛길 조성…현장에 접목할 2차 스토리텔링 작업 필요
이상국 - 스토리에 등장하는 콘텐츠를 유적화시켜야
이삼우 - 장기적으로 청하읍성 복원해 관광지로 활용
류영재 - 전문연구기구 만들어 체계적인 집대성 필요
겸재 정선은 58세 되던 1733년, 청하(지금의 포항시 청하면)현감으로 부임해 2년간 포항에 머물렀다. 2년간 포항에 머물면서 ‘내연삼용추’ ‘내연산폭포도’ ‘고사의송관란도’ ‘청하성읍도’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겸재 특유의 도끼로 쪼는 듯한 필묵법이 나타난다. 미술계에서는 겸재의 진경산수 화풍이 포항에서 꽃을 피우고 완성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겸재가 머문 포항에서의 2년은 그저 ‘스쳐가는 삶’으로만 인식됐다. 이제부터라도 ‘진경산수의 발현지’가 포항임을 알리고, 포항의 독특한 문화콘텐츠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가운데 영남일보와 포항시는 스토리텔링 시리즈 ‘청겸진경(淸謙眞景)의 비밀’을 공동으로 기획, 지난 1일부터 연재해 왔다. 이번 시리즈는 겸재가 진경산수를 꽃피우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을 상세하게 담아내면서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또 팩트에 픽션을 가미, 드라마틱한 전개로 읽는 재미를 더했다. 특히 스토리텔링 기법을 도입해 향후 문화관광상품 개발의 1차 기반을 마련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영남일보는 전문가 인터뷰를 마련한다. 이번 시리즈를 전체적으로 평가하고, 스토리를 활용한 산업화 방안을 모색해 본다. 인터뷰에는 시리즈를 집필한 이상국 스토리텔링 전문작가를 비롯해 포항에서 오랫동안 겸재 정선을 연구해 온 이삼우 기청산식물원장, 그리고 최근 발족된 ‘겸재 진경산수 발현비 건립추진위원회’ 류영재 위원장이 참여했다.
-지역 문화콘텐츠 활성화를 위해 스토리텔링이 전방위로 활용되고 있다. ‘진경산수 발현지 포항-청겸진경의 비밀’은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시리즈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번 시리즈를 총평한다면.
△이상국 작가= 이번 시리즈는 지자체에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 될 것 같다. 또 겸재 정선이 청하에 머문 2년은 그저 ‘스쳐가는 삶’으로만 인식되었는데, 이번 시리즈를 통해 2년의 시간이 매우 의미 있는 시기로 거듭났다. 특히 겸재라는 인물 때문에 내연산과 청하읍성의 가치가 문화콘텐츠 측면에서 더욱 높아질 수 있음을 보여준 기획이었다. 영남일보의 이번 기획은 ‘겸재 스토리텔링’의 밑그림을 깐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항은 이제 진경산수 발현지라는 이미지가 지역의 독특한 브랜드로 정착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제대로 살을 붙이고 뿌리를 내려 포항의 핵심 문화콘텐츠가 되길 바란다.
△이삼우 원장= 영남일보와 포항시에서 공동으로 기획한 ‘진경산수 발현지 포항- 청겸진경의 비밀’ 시리즈는 그 자체만으로 상당히 고무적이다. 일부 내용에서 지명의 오류가 보이는 것은 아쉽다. 앞으로 이번 시리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포항의 관광산업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류영재 위원장= 스토리텔링은 진실성이 떨어질 경우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이번 시리즈는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미술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작가적 상상력이 조화롭게 이뤄진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가치 있는 기획으로 보인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1차적인 스토리 기반을 마련했다고 본다. 앞으로 스토리를 활용해 포항지역에서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산업화 방안이 절실하다.
△이 작가= 스토리를 상품화할 수 있는 2차 스토리텔링 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체계적으로 유적화하는 것이 급하다. 내연산 폭포 탐방길, 겸재 이름 각자(甲寅秋 鄭敾), 기생 달섬 각자(慶妓達蟾), 겸재 소나무, 할무당 산신제, 청하읍성의 회화나무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지역성 있는 소재를 바탕으로 ‘겸재의 길’을 조성, 2차 스토리텔링 작업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또 지역에 스토리를 입히기 위해서는 겸재라는 캐릭터를 ‘창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겸재의 작품 중 ‘독서여가’에 나오는 인물을 참고해 58세 겸재의 얼굴과 모습을 재연하는 것이다. 캐릭터를 재연할 때는 사실적 이미지와 만화적 캐릭터 두 가지를 병행할 필요가 있다. 재연해낸 캐릭터를 바탕으로 조각상이나 청동상을 포항지역 곳곳에 설치, 포항이 진경산수 발현지라는 이미지를 고착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밖에 포항의 겸재 스토리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뤄, 대중출판도 고려해 볼 만하다.
△이 원장= 겸재의 생애와 이야기가 담긴 스토리보드를 내연산과 청하읍성터가 남아 있는 청하면사무소에 설치하면 좋을 듯하다. 또 겸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겸재 정선 옛길’ 조성도 관광상품화를 위해 필요하다. 전국 규모의 진경산수화 미술대전을 개최하고, 지역 미술관에 겸재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물을 제작하는 것도 장기적으로 검토해 볼 만하다.
△류 위원장= 1차 스토리를 바탕으로 대중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는 참신한 기획이 필요하다. 특히 가족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내연산에는 겸재 정선의 각자(갑인추 정선)뿐만 아니라, 내연산을 거쳐간 옛사람의 각자가 상당히 많다. 이러한 각자를 탁본해 보는 체험행사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또 겸재 정선의 포항시절을 재조명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장기적으로는 겸재 진경기념관을 건립하는 것도 검토되어야 한다.
-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는 관광산업 활성화는 지자체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포항시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 작가= 지금까지 포항이 겸재와 관련있다는 사실은 일반인에게 생소했다. 그 점이 어려운 점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포항이라고 하면 겸재가 떠오르고, 그래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원장= 진경산수 발원지 조성사업을 큰 테두리로 삼아, 민간에서 추진되는 겸재 정선 관련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또 겸재의 작품 중 청하성읍도는 건축과 미술 등 학술적으로 볼 때 엄청난 가치가 있다. 마치 하늘에서 바라본 듯한 독창적인 구도와 세밀하게 그려넣은 조감기법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러한 작품을 참고해 장기적으로 청하읍성을 복원하는 작업도 검토되어야 한다. 또 청하성읍도에 등장하는 회화나무가 아직 청하면사무소 앞마당에 살아 있는데, 이 나무도 천연기념물이나 문화재로 등재해 관광상품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류 위원장= 긴 안목으로 접근해야 한다. 무엇보다 포항시에 전담조직이나 전담인력을 배치하고, 겸재 정선을 깊이 있게 다룰 전문연구기관이 필요하다. 문화재단 같은 기구를 출범시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차곡차곡 쌓아나가야 한다. 물론, 관련 기관과 단체들의 유기적인 협력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 ‘겸재 진경산수 발현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최근 발족됐다. 위원회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은.
△류 위원장= 우선 위원회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경산수 발현비’ 건립에 힘을 쏟을 생각이다. 예산 확보를 위해 지역의 기업 및 시민의 동참을 유도하는 것은 물론, 공모를 통해 비문의 모양·내용·글씨·각자 등을 결정할 계획이다. 또한 ‘진경산수 발현지 포항’을 브랜드화하기 위해 장기적인 종합계획도 마련 중이다. 민간단체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포항시와 시민의 동참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정리=이창남 기자 argus61@yeongnam.com
공동기획 : 포항시
*2011년 영남일보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삭제 요청시 즉시 삭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