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경업 장군이 망해 가는 나라 형편을 보고 견디다 못해 나라에 올렸던 애끓는 진만상편의군무소(陳灣上便宜軍務疏) 중에 그때 나라 꼴을 형용해서「오래 앓는 사람이 원기는 이미 닳고 백 가지 병이 한꺼번에 일어나 기침이 나고 가래가 떠오르고 숨이 턱에 닿아 헐럭헐럭 아침 저녁으로 숨 넘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했다.
같이살기 운동을 일으키자
함석헌
다급해진 현실
지금 우리는 일이 아주 다급해졌다. 330여년 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누구 보다도 더 애절한 나라 사랑의 뜻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썩어진 정치 악당들의 고약한 꾀에 몰려 뜻을 펴지 못하고 의주 한 구석에 쫓겨가 울분의 날을 보냈던 임경업 장군이 망해 가는 나라 형편을 보고 견디다 못해 나라에 올렸던 애끓는 진만상편의군무소(陳灣上便宜軍務疏) 중에 그때 나라 꼴을 형용해서「오래 앓는 사람이 원기는 이미 닳고 백 가지 병이 한꺼번에 일어나 기침이 나고 가래가 떠오르고 숨이 턱에 닿아 헐럭헐럭 아침 저녁으로 숨 넘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했다. 오늘도 그와 꼭 같다.
60년 전 나라가 일본에게 먹히려 할 때 마음이 좀 먼저 깨어서 아직 자고 있는 씨알들을 불러 일으키려 애를 태웠던 지사들이 울부짖던 때도 다급해진 현실을 그리려고 흔히 썼던 비유가 큰 집 서까래 끝에 둥지를 들고 새끼를 친 제비란 놈들이 그 집이 불이 나서 타죽게 됐는데 그런줄은 모르고 밝고 따뜻해 좋다고 지지재재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그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330년 전에 임경업의 피끓는 애소를 들었더라면 우리 운명이 오늘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듣고, 아니 들었을 뿐 아니라 그 말이 미워서 잡아다 난장질로 때려죽였기 때문에 300 년 동안 청의 종노릇을 하지 않으면 아니됐고 그 종살이에 씨알의 속 힘이 다 빠지고 말았기 때문에 서양에서 민족주의의 새 문명의 바람이 불어올 때에 그것을 탈 수가 없었다.
60년 전에 지사들의 눈물 섞인 경고를 듣기만 했어도 일본의 간악에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래서 이 60년을 씨알을 길러왔더라면 오늘의 이 참혹한 운명이 왜 있었겠나?
300년 전에도 원인은 정치악에 있었고 60년 전에도 역시 죄는 정치악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지금은 과학시대요 기술 문명의 시대이다. 이 정치악의 악독한 정도는 그때 정도가 아니다.
어떻게 하려나?
이러다가는 그때 간신히 살아났던 민족의 이름조차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민족의 이름이 없어질 때 인간의 이름도 없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 끝에서 불이 붙어오고 있는 두개의 단청한 서까래 아닌가? 그 집이 무너지고 그 서까래가 불이 될 때 그 두 사이에 틀었던 네 집이 어찌될 것이며 그 속의 네 새끼는 어찌될 것이냐?
어서 바삐 도망해라!
그 멸망의 정치 화재에서 빠져나와서 자유의 살길로 가는 것이 이 같이살기 운동이다.
그 멸망하는 국가주의 대연각(大然閣)의 멸망의 광채와 몰락의 음향과 죽음의 향기를 좋다고 하는 색칠한 서까래 같은 정부들과 정당들과 정치 악당들은 어서 그 속에서 미쳐 춤추다가 죽으라고 해라!
너는, 너 씨알은 민족과 인류의 유전과 변화의 신비를 품은 알갱이만을 속에 품고 알몸으로 모든 것을 내버리고 푸른 동산으로 도망해라! 그 동산이 같이삶의 동산이다.
오직 하나의 사는 길
나는 지금 우리가 이 다급해진 현실에서 살아나려면 어서 바삐 전체의 씨알이 하나로 하나되어 일어나 힘있게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확신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기 때문에 하기만 하면 반드시 사는 길이다.
같이살기란, 예수의 말씀을 빌어서 하면,「옷이 두벌 있는 이는 그 하나를 벗어 없는 이에게 주자」는 말이요.「있고 없는 것을 서로 나눠 쓰잔 말이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주자」는 말이다. 그가 했던 것같이 눈먼 자의 눈이 돼주고 벙어리의 입이 돼주고 병신의 팔 다리가 돼주며 불행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자는 말이다. 넝마주이에게는 친구가 되고, 갈보에게는 애인이 되며 죄수에게는 그 죄짐을 나눠지는 사람이 되고, 대적에게는 복을 빌어 주어 일체 사회적 도덕적 계급주의 차별주의를 깨뜨려 없이하고 하나된 살림을 하자는 말이다. 예수처럼 같이살기 운동을 철저히 한 이는 없었다. 그만 아니라 이날까지 인류를 늘 멸망에서 건져낸 위대한 종교가들은 다 같이살기 운동자 들이었다.
한마디로 해서, 이것은「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잔」말이다. 가이사란 정치란 말이요, 하나님이란 참과 사랑이란 말이다. 언제나 세상은 압박적인 정치 때문에 타락하고 멸망에 빠진다. 그들에게 달라는대로 다주고 누르는대로 눌리 면서라도 씨알은 그 마땅히 지켜야 하는 사랑과 참은 지키자는 말이다. 그 처음은 육체적 정신적 불행에 빠진 이웃을 돕고 돌봐줌에서 시작해서 그 나중은 네것 내것의 구별이 없고, 높음 낮음의 차별이 없으며 우리와 원수의 갈라짐이 없는 한 삶에 이르기를 목표로 하는 일이다. 마치 겨자씨가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산 씨이기 때문에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학과 올빼미 비둘기와 독수리가 다 같이 그 가지 속에 깃들여도 아무 문제가 없으리만큼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씨알은 참의 씨요 사랑의 알이다.
그것으로만 살잔 것이 같이 살기 운동 이다.
지금은 우리가 인생을 한 번 뜻있게 써볼만한 때다.
어떻게 쓸 것이냐?
전체를 위해 쓸 것이다.
「인생이 자고(自古)로 수무사(誰無死)요, 류취단심조한청(留取丹心照汗靑)이라」죽지 않는 놈 있느냐? 쓸데없는 욕심 어리석게 부려 뭣하느냐? 죽는다, 죽는 바에는 숨이 목에 있는 동안 보람 있는 일에 바친다. 보람이 어디 있느냐? 전체에 있다. 하나님이라, 부처라,道라, 진리라 하는 말을 역사사회적으로 하면 전체다. 그 전체를 위하는 것이 의무다. 善이다.
신문은 파리에 가 있는 대사 이수영(李壽榮)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자살이라기도 하고 타살이라기도 한다. 타살이거나 자살이거나 한을 남긴 죽음이다. 그가 만일 그렇게 죽을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보람 있는 죽음의 길을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왕 죽는 바에는 이 정치의 악을 바로잡다 칼을 맞았으면 얼마나 빛스러웠을까?
저즘께 일본의 노벨 문학 수상자 가와바다가 자살을 했다. 나는 듣고 인생의 사치라고 생각했다. 미라면 미의 죽음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인류는 지금 그보다는 좀 더 보람진 것 을 요구하고 있다.
오직 하나의 사는 길, 누구만이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참 삶의 길이 사람을 부르고 있다. 제물을 부르고 있다.
대장부란 말이 있다. 사나이, 혹은 서나, 혹은 선아, 나는 그 뜻이 선아 이 곧 나선 아이, 사사의 나대로 집에 가두어 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일을 위해 나선 공적인 사람이란 뜻으로 생각한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남이가 벌써 부르지 않았던가? 혹 글 토론을 하는 사람들이 진(盡)이요, 무라 했다 해서 불길하다느니 단명구라느니 하지만 쓸데없는 평이다. 글로는 그럴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벌써 대장부로 후세를 살고 있지 않나?
전체를 위해 한번 나서 볼만한 때다. 같이살기 운동은 곧 혁명 운동이다. 폭력으로 하는 거짓 혁명이 아니라 참 혁명, 글자 그대로 명(命)을 새롭게 (革)하는 운동이다.
끝장에 올은 정치악
왜 혁명을 하자나?
이 정치악이 끝장에 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이 시점에서 같이 살기운동을 부르짖는 이유의 첫째는 지금 우리를 못살게 구는 안과 밖의 정치 세력의 악이 그 끝장에 올라서 지금까지 와 마찬가지의 싸움 방법으로는 도저 히 당해낼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라 위해서 양심을 가지고 일을 할 만한 때는 나가서 일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직접 정치에 관계하여 악과 협조하지는 않는 것이 옳은 일이요, 물려와서도 그저 보고만 있는 것 아니라 바른대로 비평을 해주어야 한다. 정당하게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면 글을 통해 말을 통해 의견을 내놓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면 데모로라도 항의해야 한다. 그래서 이 날까지 많은 사건이 있었다.
요새 우리는 4·19 의 열두 몫을 맞고 있고 4·19 의 정신을 우리 헌법에 까지 밝히고 있지만 그 까닭은 여기 있다.
그러나 5·16 이후 우리 역사는 뒷걸음하기 시작했다. 많은 피를 흘리고 간신히 살려낸 자유의 정신인데 그것이 그만 폭력에 의한 독재주의로 다시 목을 졸리우는 처지에 빠졌다. 그래서 한일회담 월남참전 사건 이후 학생, 시민의 여러 차례의 항의가 있었다. 그러나 4·19 때만해도 정치악은 그 떡잎 시절이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옛 도덕이 통하는 때였으므로 그 악독했던 자유당으로서도 물러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에 세상은 달라졌다. 문명은 급속도로 기술적으로 돼버렸고 한편으로 세계 정국은 새로 긴장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흐린 밤과 강한 무기는 도둑놈에게 좋은 법이다. 정권을 쥔 정치자들은 온갖 기회와 수단을 다 이용해서 국민의 자유를 구속하는 정치악을 조직적으로 과학적으로 고도화 시켰다. 5·16이 4·19와 정신적으로서도 180도의 반대 방향에 선 것을 국민학교 아이들인들 모를까? 그런데 헌법에다가 4·19를 억누르고 거기 5·16을 써 넣었다. 이것은 분명히 사상적 강간이다. 이리가 양 보고 같이 앉자 하니 그 어찌 될 수 있는 일일까? 양이 죽는 것 밖에 다른 결과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양에게 그 이리에게 항거할 수 있는 아무 능력이 없다. 6·3사태 이후 모든 데모는 실패했다.
학생들이 잘못이어서도, 민중이 마음이 무디어서도 아니다. 악이 지나치게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럼 어떻게 할까?
자유의 싸움을 내버릴 수는 없다. 자유를 위한 싸움을 내버리는 순간 민중은 죽어버린다. 그러나 싸우다 죽으면 틀림없이 다시 살아난다.
대적의 무기와 전술이 달라졌으면 우리의 전술과 무기도 그보다 더 강하게 고등하게 달라져야 한다. 이제 4·19식으로는 못 이긴다. 180여명 죽는 것보고 양심이 살아나서 나 물러나겠다 했던 이승만은 태고 순민이었다. 오늘의 정치 심장은 목석이나 강철 정도가 아니다. 옛 사람은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치한다고 했더라, 지금 사람은 차마 할 수 있을만한 무심장이야만 지도자라고 하더라.
그러니 같이 살기 운동이란 양처럼 죽일 터면 다 죽이셔요, 죽어도 좋습니다 하고 다 죽을 각오를 하고 양이 되자는 말이다. 우리의 심정과 생명은「다」에 있다. 이제 데모 흉내 낸 댓자 몇은 죽고 남은 것은 짐승으로 변형할 것이다. 다 죽으면 다 살아난다. 살아서 다를 할 수 있다면 해서 좋지만 살아서 못하겠거든 죽음으로 해야 한다. 재주가 아무리 비상하고 악독이 털끝까지 올랐다 하더라도 다는 못죽인다. 맹자에「주지칙불가승주(誅之則不可勝誅)」 라는 글귀가 있다. 포악해서 배성을 풀같이 배이던 전국시대의 임금으로도 반항하는 민중을 다 죽일 수는 없어서 뱉은 항복의 소리다. 이루 다 죽일 수 없단 말이다. 왜? 다는 전체기 때문이다. 수야 백이거나 천이거나, 혹 열, 스물 밖에 아니된다 해도, 씨도 아니 남기고 다 죽였다면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하늘이 노하는 일이다. 전체는 곧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다. 절대이기 때문이다. 같이 살기란 사실은 같이 죽기다. 죽이기 좋아하는 몰록에게 실컷 먹도록 밥을 제공하잔 말이다. 어떤 칼도 날이 있는 법이다. 날은 떨어지는 날이 있다. 그렇지만 생명은 영원한 거다. 날로 영원을 짤라 봐라! 어떤 배도 창자가 있다. 창자는 밑창이 나는 때가 있다. 생명은 무한하다. 먹을 대로 먹어 보란 말이다. 창자가 밑창이 나는 날 삼키웠던 씨알은 일순간에 해방이 될 것이다.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
같이만 한다면 갇히진 않을거다.
(오해하지 마셔요. 익살이나 역정의 소리가 아닙니다. 정말 억누르고 싶은 대로 기름이 다 빠지도록 누르셔요, 고스란히 눌리우렵니다. 짜먹으셔요 얌전하게 불평하나 아니하고 짜 먹힐 것입니다.)
그러고 우리끼리는 같이 살자는 말이다. 불에 태워도 남는 것이 있고 물에 빠쳐도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이 정말 우리 차지, 곧 하나님의 차지란 말이다.
네 원수를 사랑해서 달라는 대로 다 줄 각오를 해라!
그럼 참이 산다, 참으로 산다, 참이 너를 살리신다.
같이 살기는 혁명운동이라 했지만 이제부터 시작하잔 말 아니다. 벌써 진행되고 있는 혁명이다. 참 혁명은 간디의 말과 같이 누가 꾸며낼 것이 아니요, 누가 계획하고 누가 지도하 는 것도 아니다. 참 혁명은 그 일으키는 것도, 하나님이요, 설계하고 지도하는 것도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면 전체가 한단 말이요, 역사 자체가 한단 말이다. 우리는 혁명 도중에 있다.
그럼 왜 새삼 말하나?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더러 설명하라 하자 행역지난(行易知難)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쉽지만 알기는 어렵다. 이미 하고 있는 혁명을「우리는 혁명군이다, 혁명 도상에 있다」깨달을 때 정말 놀라운 힘이 속에서 솟음친다.
민족의 고질을 고치는 길
둘째로 우리가 이 운동을 일으키는 이유는 민족의 성격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우리는 임장군의 말 같이 병이 골수에 든 민족이다. 정치를 고치려면 필연적으로 우리 자체를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을 책망하지만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사실은 그들에 게 나라를 망칠 능력이 없다. 그들도 전체의 한 대표다. 씨알이 그 선한 것을 지키고 있는 때에 그들은 불행히 그 악한 것만을 대표 했을 뿐이다. 민족을 고치지 않는 한 악한 정치가 는 없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우리 민족의 병을 알지만 그것을 능히 고치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씨알을 내버리고 구식적인 지도의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천하는 천하로써 주고 천하로써 받는다는 격으로 민족은 민족으로야 고친다. 선도 전체의 선, 악도 전체의 악, 그러므로 전체를 동원하지 않고는 하나의 악을 제거 할 수도 없고 하나의 선을 이룰 수도 없다. 한마디로 해서, 오늘의 어려움은 이 이치를 모르고 선은 제가 한 것으로만 알고 악은 누가하는 것으로만 아는 잘못에서 오는 것이다. 지배자란 다른 것 아니고 선을 제 것으로 득점하고 악은 민중의 것으로 미루려는 자들이다. 그렇게 하고 그들은 그 사이에서 자기네의 특권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 민중의 정신 연령이 낮은 때에 그것으로 한 때 임시적인 지도가 될 수 있었다. 이제 아니된다. 이제 구두닦기 소년도 자기와 대통령 사이에 아무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은 민중의 공복이라면서 부귀만 아니라 도덕까지도 독점 하려는 그런 가엾은 낡아빠진 사상을 집어치워라!
따지고 보면 이 민족이 이렇게 타락이 된 것은 사람대접 못 받았기 때문이다. 계급주의의 나쁜 것은 인간에게서 자존심을 뺏아버리는 일이다. 선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지는 데서 나온다. 나도 사람이다 할 때 스스로 의무를 다하려는 고상 엄숙한 마음이 나온다. 반대로 나 같은 거야 사람이라 할 수 없지 할 때 할 수 있는 선도 아니하게 된다. 지배자들은 밤낮 하는 소리가 너희는 모르기 때문에 내말을 들어야 한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긴 세월을 가면 정말 자기를 잃고 없신여겨 버린다. 우리 민족은 이 악독한 정치에서 여러 백년을 자기를 뺏기고 잊고 학대해 왔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치는 것은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민중 스스로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새 역사라면서 정치는 반대로 점점 더 구속 압박적으로 나가니 어떻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이 10년 이래 민심은 더 타락하고 사회 정의가 더 내려간 것은 전혀 잘못된 정치 때문이다. 이따금 종교인 지식인 문인에게 호소하는 말도 있으나 그것은 마치 발을 묶어 놓고 뛰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학원에 자유가 없고 종교에까지 정보망이 가고 신문에 보도 비판의 자유가 없는데 무엇으로 국민을 개조하란 말인가? 허리가 끊어질 일이, 아무 것도 모르는 군인이 칼을 빼들고 인간 개조 세대교체를 하겠다고 했다. 그랬던 그 사람 지금 땅 위에 살았나 죽었나? 가엾어라!
그것은 역사를 모르는 무식에서 나온 말이다.
지극히 작은 씨알에도 제 자격을 주라, 제 자격이 무엇인가? 나라의 주인이요 민족의 후사다. 그렇게 대접하면 천년 묵은 체증이 일순간에 내려갈 것이다. 사회악이 느는 것은 마땅히 가져야 할 자격을 뺏기고 무시당하기 때문에 그 비뚤어진 감정으로 하는 일이다. 세상에 우리 민중 같이 불쌍한 것이 어디 있나? 선을 할 수 없이 타락하게 만들어 놓고는 또 그 잘못을 비웃고 책망하고 벌하고 선한 것은 자기네만이라고 하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나?
우리 이제 그런 생각을 말고 우리 끼리 서로 대접. 서로 동정하는 마음으로 나가자. 그러 면 마치 가는 장작 가치가 한데 모여 탈 때 천하를 삼킬 무서운 불길이 일어나듯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선의 물결이 저 잘못된 정치까지도 삼켜 씻고 말 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우리 민족의 가장 깊은 고질은 당파심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당파심은 곧 이기주의, 제 생각만하는 버릇의 다른 이름인데 그것 이 개인만이 아니 고 단체적으로 될 때 그 해가 더 크다. 우선 첫째 단체가 되면 개인보다 더 큰 힘이 생기니 무섭고, 그만 아니라 단체에는 개인 심리와는 따로 단체심리가 있어 그 힘에 휘말려 들어가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으면 상당히 판단력이 강하던 사람도, 그 속에 들면 그만 냉정을 잃고 바른 판단을 못하기 때문에 단체는 언제나 개인보다는 도덕 수준이 내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단체의 정말 위험한 것은 그것이 전체의 이름을 도둑하여 우상 노릇을 하고 개인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단체란 전체와는 다르다. 엄정히 구별해야 한다.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 아니라 그 관계하는 마음의 태도에 있다. 저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모이면 그것은 수가 아무리 많아도 전체는 아니다. 다수면 다수일수록 전체에서는 먼 도둑이다. 그 분명한 실례가 전체주의 국가다. 사실 엄정한 의미에서 볼 때는 전체주의 아닌 국가 없다. 혼동해서는 아니된다. 전체주의 국가는 정말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일부의 이기주의를 대표하는 것이다. 사회 정의가 서지 않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요 어떤 한 파가 결속하고 들어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집단주의다. 오늘의 모든 국가는 거의 예외 없이 집단주의에 빠져 있다. 우리가 국가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그 집단주의의 폐해가 가장 심한 나라의 하나다.
우리는 여러 백년 두고 나라가 전체의 나라노릇을 못하고 어떤 당파의 나라가 되어 왔다. 그것이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그냥 있다. 그냥 있을 뿐 아니라 과학적인 방법을 쓰기 때문에 전보다 더해졌다. 이제 이것을 고쳐야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역사적 과제다. 이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옳은 발전을 할 수 없다. 깊이 보면 남북의 대립도 이 버릇 때문에 온 것이고, 여기 남한에서 오늘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도 그 뿌리는 다 거기 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의 정권에는 기대할 수 없다. 그 자체가 하나의 당파주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민중의 자각으로만 될 것이다. 해방 이후, 더구나 한일 문제 이후 범국민 운동 소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국민운동이라니 다른 말 아니고 정부나 정치인에는 기대할 수 없으니 정말 나라를 건지는 일은 정부는 돌려놓고 순전히 민중 자체의 손으로 해 야겠다는 말이다. 정부가 들으면 나무랄 일이지만 사실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정부는 이날까지 국민운동이 일어나려면 매양 방해했다. 또 그러기 때문에 정말 국민운동은 실패해 버리고 말았고 그 때문에 역사적 과제는 하나도 해결한 것 없고 사회는 타락으로만 내리달았다. 이제 파탄에 직면하기 때문에 강력으로 묶어서 그것을 면해 보려 하나 그것으로 될 리가 없다.
정말 해결은 민중의 손에 있다. 민중전체가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의 결심으로 일어날 때 집단주의자들의 방해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면 잘못된 생각으로 전체의 이름을 도둑 해서 나라의 가면을 쓰고 씨알을 무시 하던 그 당파주의 자들도 살수가 있다. 전체의 바다 속에서 당파의 흙덩어리가 이미 풀어져 해방이 되고 본래의 씨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체 운동이 못 일어나고 끝내 집단주의의 정부가 그 횡포를 계속한다면 민족의 운명은 암담하다. 모든 씨알 속에 있던 역사 창조의 가능성 의 알갱이 가 아주 싹트는 힘을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무서워라!
정신을 살려내는 길
셋째 이유는 지금 시들고 숨 막혀 거의 죽게 된 정신을 살려내기 위해서다.
정말 문제는 정신에 있다. 전술을 고쳐 정치악과 싸우는 일도, 민족 스스로의 성격을 고치는 일도, 정신에 있다. 최후에 믿을 것은 우리 속에 들어 있는 바탈이다. 그것만이 스스로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는 것만이 자기를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다.
몸은 죽어도 다시 날 수 있지만 이 정신은 전체의 것이기 때문에 한번 죽으면 큰일이다.
5·16 이후의 큰일은 일본의 식민지가 다시 되어가고 있는데 있는 것도 아니요, 세계정세에서 개밥에 도토리가 된데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놈들은 잘 사는데 일반 씨알은 먹고 입을 것조차 넉넉지 못한데 있는 것조차도 아니다. 그런 것도 불행이 아닌 것 아니지만 그것은 마음만 있으면 이제라도 쉽게 고칠 수 있다. 정말 큰 문제는정신이 썩어진 점이다. 야별한 사람은 고통 중에 있어서도 양심을 지린 수가 있지만 보통 사람은 고통이 심하면 정신마저 시들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정신은 몸과 달 라 한번 잘못되면 다시 바로잡기가 참 어렵다. 이것이 예로부터 진 어진 정치하는 사람들이 민심 풍속에 뜻을 많이 썼던 이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의 풍조와 민심이 어떠한가? 사람마다의 입에서 나오는 부정, 불신, 불안이라는 그 탄식 소리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임 이 뉘게 있으며 그 원인이 무엇인가? 5·16 이후의 정치와 그 정치를 고집해 오는 사람들임을 누가 감히 부정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장 걱정 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여러 백년 악독한 정치 밑에서 썩고 삐뚤어지고 오물이든 이 국민성인데, 그것을 가지고 갑자기 주어지는 세계무대 위에 올라와 그 맡은 책임을 하려면 비상한 결심을 하여 민족적 성적 개조부터 하기를 힘썼어야할 것인데, 그래도 어려울 것인데, 이제 5·16 이전은 그 정권을 세운 자신들이 큰 글자로「불정부패를 일소한다」는 것을 표방하여 국민 앞에 맹세하고 나섰던 이만큼 문제 삼을 것 없고, 그 이후의 10년 넘는 정치를 볼 때 그 부정부패를 없애기는 고사하고 그것을 열백곱 더 길러 놓지 않았나? 양심 있는 사람이 공화당 안에 하나라도 있거든 여기 같이살기 운동을 일으키자! 대해 대답하기 바란다. 이제 어느 학자의 말대로 부정부패가 제도화했다. 제도화한 것만 아니라 성격화한 것을 어찌하겠나? 성격화 하지 않고야 그것을 지적하는 신문 잡지를 어찌 그렇게까지 구속하며 그 말하는 사람을 그렇게까지 비인도적으로 탄압하겠나? 단속 이라는 이름 아래 아주 계급 심리적으로 감정 풀이를 하고 있다.
그러니 이 심리 이 버릇이 계도를 가지고 나라를 어찌하겠나? 어느 시대도 성인만 사는 것이 아님은 안다. 그러나 적어도 대체의 방향 대체의 기틀은 바로 놓여 있어야하지 않나? 선전은 날로. 교묘해 가는데 나라꼴은 날로 위급해마 가는 것이 결코 우 연이 아니다.
이 나라가 망해서는 아니된다.
사람이 다 죽어버리는 것이 멸망 아니다. 정신이 썩어지고 도리가 죽는 것이 멸망이다. 발달한 이 시대에 나라가 망해도 적어도 대부분 사람은 살아남기는 할 것이다. 소위 강대국 은 자기네가 잘 살기위해 우리를 죽이지도 않고 짐승마냥 부려 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인간이겠나? 인간은 보람에 사는 것이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독특한 개성을 가지는 문화 창조를 해서만 사람이다. 외국 무기를 가져다가 외국의 이해를 위해 전쟁을 하며 기계와 공장을 외국자본으로 세워 외국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업을 하며 그 삯으로 설혹 약간의 맛있는 것을 얻어 먹는단들 그것이 어찌 나라요 민족이라겠나? 나는 월남 참전을 크게 역사상에 씻지 못할 민족적 부끄러운 죄악으로 알지만, 그런 중에서 라도 어떤 의미를 찾는다면 그 참혹한 월남의 꼴을 보고 우리 스스로의 모양을 반성해서 고치라는데 있지 않겠나? 그런데 지금까지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종교의 지도자들 까지도 그저 썩어빠진 세상 풍속대로 가서 이기고 오라는 기도나 할 줄 알지 언제 한번 민족적 뉘우침의 권면을 한일이 있던가? 그런 정신 가지고 민족이고 문화고 어디서 찾겠나?
요새 와서는 소위 안보니 국민총화니 하는 이름 아래 자유정신 비판적 양심의 마지막 한 가닥까지 긁어버리려 하고 있는데 지성인은 숨도 크게 쉬려하자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민족정신 인간성이 아주 질식해 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아무 것도 없다. 지배하는 맹수류와 지배 받는 비겁한 짐승 무리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이나 문화는 없다. 민족적 개성도 문화도 없을 때 생존 이유를 잃어버린다. 생존 이유 못가진 짐승은 학대해도 좋고 죽여도 좋다. 이 정치는 무슨 변명을 하려나?
그러나 나라는 정치인의 것이 아니다. 머슴놈이 아무리 무책임해도 주인은 집을 지켜야 하지 않나? 주인이 누구냐? 씨알이다. 정치악이 지독해 갈수록 씨알은 기가 죽어서는 아니된다. 짐승과 같은 싸움을 할 수는 없다. 짐승을 제어 할 수 있을 때는 제어하지만 그놈이 미친 때는 피하는 것이 이기는 일이다. 우리가 같이 살기 운동을 하잔 것은 확실히 기술로 볼 때는 하나의 물러감이다. 그러나 비겁해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짐승을 잡기 위한 작전적인 후퇴다. 칡넝쿨 얽힌 골짜기에서 승냥이를 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놈을 유인해 동리로 내려오면 틀림없다. 우 리는 미치는 정치를 이기는 것은 정의와 평화의 정신 밖에 없음을 안다. 저즘께 정치 투쟁을 한 것은 그들도 양심이 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 양심의 마지막 한 가닥조차 없어지려는 그들을 보고 우리 할 일은 정의와 평화에 사는 이 인간의 마을로 돌아오는 일이다. 그러면 그들의 짐승적인 발광은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고 이 나라의정신은 살아 날 것이다.
사람은 아무래도 사람이다. 인정 도리 의식이야말로 끝까지 남는 인간 본성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낙망에 빠지고 위축되고 비틀어졌던 인간도 누가 자기를 사람으로 대접하여 동정하고 알아주는 것을 보면 대번에 잠자던 선심이 살아나고 용기를 얻는다. 악독한 정치 밑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결코 군대나 경찰의 힘이 아니고, 옆집에서, 옆집으로 오고가는 인정 인심의 주고받음 때문이다. 관리들의 형식적으로 하는 천만 마디 훈시 축사 천만금 상금보다는 진정으로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이웃의 한마디 위로의 말 한 조각 떡이 더 고난을 이기고 보람 있는 문화를 낳게 하는 감격 영감의 샘이 된다. 쥐고 있는 흉기, 불상지기(不祥之器), 칼만 알고 이것을 모르는 소위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마음의 참 답답하고 가엾음이여!
정치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나쁘면 나쁠수록 우리는 서로 살고 죽기를 같이 하고 인정을 살려내야 한다. 그러면 잘못 먹고도 배가 부르고 잘못 입고도 가슴이 따뜻하고 학대를 받으 면서도 마음이 바다 같이 넓을 수가 있다.
4천년 넘어 이 고난을 겪으면서도 제 개성을 지키고 양심을 살려 독특한 문화를 창조해 온 우리 속에는 분명히 영원히 키워갈 만한 가치 있는 무엇이 있다. 그것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뿐 아니라 이 정신은 앞으로 오는 세계에 쓸만한 데가 있다.
반만년 역사에 사람도 많아 오고 갔고 일도 많이 일어났다 꺼졌지만, 그 모든 것을 제하고도 영원히 남는 것이 무엇일까? 요약하고 쪼려 한 알의 진주에 이른다면 선죽교를 피로 물들이던 鄭圃隱의 단심가 한 절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마음 하나를 닦아내자고 고난의 긴 역사였고, 또 이 마음 하나 때문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가 있었다. 인류 전체인들 그 살리는 정신이 이것 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오늘의 정치란 것이 무엇인가? 결국 역사의 사나운 물결 속에서 진주처럼 닦기어 나온 이 정신 하나를 잡아먹자는 것 아닌가? 그러지 않고야 그 가혹한 언론 구속 그 더러운 매수 정책 그 간악한 조작 은폐 선전의 모든 가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돌아간 月南이 잘 말했것다.
『일심상조불언중(一心相照不言中)』
말하지 않는 씨알이 서로서로 동정으로 없는 가운데서 나눠먹고 좁은 데서 넓게 살며 길러내는 이 일심을 이 한 정신을 빼앗을 놈이 없을 것이다.
감옥에 서로 가서 손을 잡을 수 없어도 서로 한번 건너다만 보자 그럼 된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남아, 볼 수조차 없다 해도 눈을 감고 생각만 하자. 그럼 대번에 살아난다. 그래서 그 생전에 악독하던 정치배들을 다 잡아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원수 갚잔 것이 우리 목적 아니다. 씨알에서 어찌 원수가 있을 수 있겠나? 거기서라도 그들이 한번 솔직히 진정한 마음으로 뉘우치는 시선만 한 가닥 보낸다면 우리는 대번에 그 지옥 밑으로 뛰어 내려가 손을 잡고 올라와 우리 대열 중에 세우고 그 고난의 역사의 무거운 짐을 졌던 것을 치하해 주기를 서슴지 않을 것이다.
세계구원의 길
넷째,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운동을 부르짖는 것은 이것이 우리만 아니라 세계 전체의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위기에 빠진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세계 전체가 어떤 극한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후진국이라는 구호로 민중을 몰아치면서 그 거짓 애국주의의 댓가로 한 때의 쾌락을 누리며 소위 선진국이라는 앞차를 아무 분별없이 따라가는 이 나라의 지배자들은 아무 생각도 할 줄 모르고 있지만, 그 앞차에서는 벌써 야단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의 전문 연구가의 의견에 의하면 역사가 도저히 이대로 갈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날까지 과학과학하고 발달발달 하며 문명은 끝없이 진보돼 갈 줄만 알고 서로 생존경쟁을 완전한 진리로 알고 다름질을 해왔는데, 이제 알고 보니 천연 자원도 무진장으로 개발할 수 있는 것 아니고, 공업도 무한정으로 발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공해 문제가 이정도로 그칠 것만이 아니고, 사람을 나 아라 키워라해도 이 이상 더 갈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1세기 초에 가면 세계 인구는 70억이 될 것이고 이대로 가다가는 문명의 모든 활동은 갑자기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돌발 사건으로 모든 것이 파탄에 빠지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 그 들이닥치는 시기에는 이르고 늦은 차이가 있으나 하여간 이대로 가지 못하고 어느 극한점에 이르고야 말 것이라는 데는 의견이 같다. 그 말을 들으며 이 나라의 정치 현상을 보면 마치 암초를 향해 달리는 배 위에서 서로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꼴을 보는 것 같아 가엾기 짝이 없다. 일순간 후에 다 같이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싸움이 무슨 소용 이냐? 이제라도 모든 싸움을 그치고 전체를 구하도록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이요, 그러지 못해 이왕 죽는 경우라면 죽더라도 사람다운 위의와 마음의 평안을 보이다 죽도록 하는 것이 어질고 아름답지 않을까? 그러면 죽어도 그 혼이 살아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더럽게 서로 싸우다 죽으면 정말 멸망이요, 살아난다 해도 영혼이 되지 못하고 모진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 걱정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역사의 대세 인류의 운명에 대해 생각을 게을리 할 수가 없다. 엎어진 둥지에 성한 알이 어찌 있겠나 인류의 걱정을 먼저 하는 것이 내 걱정을 하는 일이다. 나 있고야 남이 있다느니 우리나라 생각을 먼저 하고야 세계 생각을 할 것이라느니 국가 있고야 종교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는 얼핏 듣기에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속된 귀에 아첨하는 말을 해서 한때의 향락을 누리는 것만을 아는 협잡 정치배들의 하는 말이다. 속아서는 아니된다.
새 길은 언제나 불행에 빠진 자가 먼저 찾아낸다. 우리 역사의 의미도 인류 구원의 길을 발견해 내는데 있을 것이다. 새 문명의 길잡이를 소위 강대국들은 아마 못할 것이다. 가진 것이 있기 때문에, 가진 것이 없는 우리는 없기 때문에 새 길을 찾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멸망의 길은 뭐고 새 길은 뭔가? 생존 경쟁을 원리로 삼는 국가주의의 가는 길이 곧 멸망의 길이요, 사랑으로써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같이 삶의 길이야말로 새 길이다. 우리가 능히 이것을 성취하여 새 시대 새 문명의 모델이 된다면 우리와 저들의 이날까지의 지은 죄를 한꺼번에 다 속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이 지치고 타락된 씨알에게 우주적 비전을, 이상을, 사명을 주는 일이다.「참을 해라, 참이 너희를 놓아줄 것이다」우주적 비전 우주사적 사명감이야말로, 민족을 개조 하고 부흥시키는 능력이다. 비전 없이 일어난 민족어디 있던가? 사명감 없이 살아남은 나라 어디 있던가?
미래는 우리 것이다. 가진 것이 없고 다만 품은 것은 영원한 생명의 알갱이 뿐인 씨알만이 이 막다른 골목에든 문명을 건질 수 있다. 이제 홋으로 문명만이 아니다. 진화의 새 단 계가 나와야 한다. 극도에 달한 물질문명이 극한점에 다 달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가 번성하다 못해 너무 많아 못살겠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물질에 붙어 있지 않는 생명, 정신의 또 정신, 초정신적인 것이 나오려는 진통 아니겠나? 물질문명에선 학대만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지 않겠나?
그 선거니, 영구 집권이니, 정보, 사찰이니, 언론 압박이니 그런 따위 코딱지 같은 문제로 우리의 숨구멍을 제발 막지 마라 !
아니다, 좋다, 그래 좋다, 어서 더 막아라, 더 눌러라, 더 짜라, 이 숨통이 터지는 날이 뼈가 가루가 되고 핵분열을 하는 날 그 폭발에 우주에 구명이 뚫려 정신 아닌 정신, 인간 아닌 인간, 그래 새 인간의 씨가 나올 것이다.
새마을 운동과는 다르다
마지막으로 이 운동을 제 창함에 있어서 한 가지 부쳐 말할 것은 요새 정부에서 일으키고 있는 새마을 운동과 이것과의 관계다. 둘 사이에 비슷한 듯이 보이는 점이 있고 따라서 정부가 새마을 운동을 내세우고 있는 이때에 같이 살기운동을 말하는 것이 한편으로 보면 그것을 모방하는 것도 같고 또 한편으로 보면 그것을 시기 하고 반대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절대로 아니다. 나는 못났어도 독자적으로 하는 자주성 독창성을 생명으로 여긴다. 새마을 운동이 옳다 보면 전적으로 가담 협력할지언정 비슷한 것을 또 만들어 흉내를 내거나 경쟁하는 것은 죽어도 아니한다. 씨알은 그러지 않는다.
나는 아직 여기 대해 구체적인 방안도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광주 단지의 참혹한 현상을 보고 와서 생각 하는 중 어느 새벽의 기도 시간에 모른척 할 수없는 어떤 말씀을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감추어 둘 수 없고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기에 아무 준비 없는 이대로를 씨알 전체 앞에 내놓아 전체의 지혜와 능력을 기다릴 뿐이다. 이것이 씨알자체의 혼에 느껴지는 직감이라면 씨알 자체가 해결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이 내 마음 속에 비친 것은 새마을 운동 소리가 나기 훨씬 전이었다. 그러므로 모방이나 경쟁 같은 시시한 감정은 전혀 없다.
사실은 같이 살기라는 이 생각이 처음 비쳐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 1964년 정월 남가좌동의 어떤 불쌍한 아버지가 생활고에 쪼들리다 못해 비관하고 제 손으로 세 어린 자녀를 빵에 독약을 넣어 먹여서 독살하고 자기도 산에가 나무 가지에 목을 매고 죽던 사건이 난 때였다. 그때 나는 매우 큰 충격을 받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조선일보에 그 소감을 발표했었다. 그보다 전에 1963년 여름 외국 여행에서 돌아와서 시국을 보고 느끼는 바 있어「삼천만 민중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는 제목으로 글을 낸 일이 있었으므로 이것도 같은 문제라는 의미에서「삼천만 앞에 또 한번 부르짖는 말씀」이라고 제목을 부쳤었다. 같이 살기라는 문귀는 그때 처음으로 생겼다. 내가 했는지 다른 어느 독자가 했는지 그것조차도 모른다.
내가 왜 그 문제를 그렇게 크게 다루었나 하면 외양으로 보면 한 불행한 가정의 일이지만 깊이 생각할 때는 거기 벌써 이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근본적인 악의 징조가 나타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보면 그런 따위 사건은 매일 같이 있어서 거의 문제도 아니되지만 그때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더구나 그 아홉살난 어린 것의 일기까지가 나왔을 때 나는 이 사회가 들어붙어서 그것을 죽인다는 끔찍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아비가 제 자식을 하나도 아니고 셋씩 계획적으로 독살을 했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언뜻 보면 그를 무지하다 무정하다 나무래고 싶지만 낳은 아비가 그만 생각 없었을 리 없다. 다 알면서도 생각 끝에 생각 끝에 찢어지는 심정으로 했을 것이다. 무정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랑의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의 재주로는 아비된 책임을 다해 길러낼 수도 교육할 수도 없다. 그러니 죽기로 결심 한다. 그렇지만 자기 죽은 후의 그 세 어린 것들의 모양을 생각할 때 그 애끓는 사랑의 마음이 참아 그냥 있을 수 없다. 이집 저집의 문간을 찾아다니면서 빌어먹는 그 모양, 그러다가 비웃음을 받고 학대를 받고 인간의 찌꺼기 노릇을 하는 모양, 죄를 짓고 형무소로 가는 모양이 역역히 보였다. 살아서 길러내지는 못해도 그 불행 고통 업신여김을 덜어나 주자는 생각에 아비는 일변해서 악마가 되기로 결심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항의요, 분풀이요, 원수 갚음이다. 누구에게 대해서? 이 무정 무책임한 사회에 대해서다.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사람이 무엇으로 사나」라는 소설이 있다. 하나님이 어떤 아기를 갖 낳은 엄마의 영혼을 불러 오라고 천사를 내려 보냈더니 천사가 그 어린 것이 어미 없이는 죽을 것을 생각하고 그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 죄로 인간에 떨어져 내려와 구두 직공 노릇을 하며 시련을 당해서 자기 잘못을 깨닫고 나서 용서를 받아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이야기인데, 그 요점인즉 사람의 사는 것은 자기네의 지혜로 하는 염려나 계획으로 되는 것 아니라 인간본성 속에 들어 있는 사랑으로 인해 된다는 것이다. 어미 죽은 아이는 못살 것 같지만 뜻도 아니한 이웃 여자의 불쌍히 여기는 사랑으로 무사히 살아서 자랐다. 남가좌동의 그 불쌍한 아비도 그 이치를 알았더라면 그런 끔찍한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그것을 깨달을 기회가 없었다. 그가 배운 것은 제 부모 없이는 거지 되는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사실 뿐 이었다. 그에게는 이 사회는 동정도 불쌍히 여김도 없는 냉냉하고 남의 것도 훔치고 날치기 해먹는 악독한 사회였다. 믿을 놈이 하나도 없었다. 그 분함 그 슬픔 그 무시당함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항의 복수가 자살이요 제 새끼를 악마처럼 죽임이었다.
그러고 보면 심판 받은 것은 이 사회다. 목을 매고 죽는 그 아비만이 악마가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아비 어미가 제 자식을 잡아먹는 악마라는 선고를 받았다. 내 자식만이 내 자식이 아니다. 모든 자식이 내 자식이다. 사랑이 없는 사회 인정이 없는 사회 저 밖에는 남은 전혀 모르는 사회 그런 인면수심의 사회에는 그런 것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보슬비냐? 폭풍우냐?
그러나 나는 또한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회는 왜 그렇게 됐을까? 아니다 본래가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예로부터 인정미 담은 얼마든지 있다. 착한 백성이요, 친절한 민중이다. 만일 오늘날 같이 이렇게 믿을 수 없고 매마르고 살벌한 종자들이라면 천년 고난의 역사에서 살아남았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중간에 잘못된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주로 정치 때문이다. 생명은 그 나가는 길이 열렸을 때는 순하고 아름답지만 그 길이 한번 막힐 때는 그만 비꼬이고 흉악해진다. 해방 때에 활짝 열려서 선심에 웃음 짓던 민중이 오늘 같이 이렇게 된 것은 더러운 정치 싸움 때문에 가슴을 열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5·16 이후는 더구나 그렇다. 일부 사람 저희끼리는 늘 노래 춤에 싱글벙글이지만 직업을 잃고 친구를 잃고 나라의 나가는 길까지 잃어 답답한 심정에 빠진 일반 대중에게는 언제나 흐린 날이다. 그러므로 본래 착하던 그 마음도 착할 수가 없어졌다.
「삼천만 앞에 또 한번 부르짖는 말씀」할 때는 이런 심정으로 썼었다.
그랬더니 사회의 반응이 의외로 컸다 편지를 보내 주는 이도 있었고 돈을 보내서 같이 살기 운동을 힘 있게 일으키자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 정성이 모자랐다. 이날까지 잊지는 못하면서도 아무것도 못하고 어물어물 왔다. 그러는 동안에 세상은 더 잘못되어 오늘에 왔다. 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는 중에 사회의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징조를 보여주는 여러 사건이 일어났고 위에서 말했듯이 어느 새벽에 못 들은 체 할 수 없이 들려온 소리가 있어 드디어 이것을 전체 앞에 내놓기로 결심했다. 그런지 얼마 있다 정부에서 새마을 운동을 발표했다.
그러나 같이 살기 운동과 새마을 운동은 하늘이 땅에서 먼 것 같이 서로 다르다. 하나는 이름 없는 씨알이 하는 것인데 하나는 대통령이 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아래서 위로 피어오르는 생명의 운동인데 저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씌우는 권력의 운동이다. 먼저 것은 보람에 살자는 일인데 뒤에 것은 이해에 살자는 일이다. 씨알엔 차별이 없어 하나로 하나를 살리자는 것 인데 새 마을이란 데서는 내 말 들으면 살아라 아니 들으면 죽어도 좋다 하는 차별주의다. 비유를 한다면 하나는 봄비인데 하나는 폭풍우다. 요새 같은 봄비를 두고 읊은
옛 시에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 시절 알고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봄되니 잘도 오네
隨風潜入夜(수풍잠입야) 밤사이 바람 따라 살그머니 들어와서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보드럽게 적셔주는 소리도 없네』
라는 귀절이 있다. 씨알의 운동은 그렇다. 소리도 낼 것 없고 서두를 것도 없다. 그저 보슬보슬 적시는 줄 모르게 스며든다. 그래야 생명이요 그래야 전체다. 주인도 지도자도 필요치 않다. 흙과 씨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봄비다. 그래야 싹이 튼다. 그래야 뿌리를 박는다. 새마을 운동처럼 북 치고 나팔 불고 아니 들으면 팔 비틀고 들으면 어서어서하고 몰아치는 것 은 소낙비 폭풍우지 봄비가 아니다. 종자가 떠나가고 밭이 흘러 나가 몹쓸 돌밭만 남을 것이다. 그저 비면 다 생명이 아니다 그 오는 방법에 따라 생명을 줄 수도 있고 죽음을 줄 수도 있다.
분명히 해주고 싶은 말은 선은 강제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해서만 선이다. 그러므로 급히 서둘러서는 못쓴다. 서두는 것은 받는 저 쪽을 위해서가 아니고 내 공로를 나타내자는 심리에서다. 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줌이 아니라 뺏음이요 선이 아니라 도둑질이다. 씨알은 덤비지 않는다. 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요. 생명 그 자체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다. 믿기 때문에 평화요 즐거움이다. 씨를 심는 농부는 하늘을 믿는 마음이요 하늘을 믿기 때문에 마음이 화평하고 일하기가 즐겁다. 권력으로 남을 시키는 자는 늘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항상 불평이요 불만이요 초조다. 그 심리로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참 화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고서야 겉에 어떤 발달이 있건 무엇을 새 마을이라 하겠나? 정말 새것은 서로 싸우던 것이 하나 되고 네 것 내 것이란 생각 없이 협력하게 되는 데 있다.
공을 세우려는 속된 지혜가 항용 쓰는 방법은 잘하는 놈 상주고 못하는 놈 벌주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새 세상 절대 아니된다. 반드시 분열을 일으키고야만다. 새마을 운동의 북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농촌의 분열이다. 이때까지 인심은 야박해졌어도 농촌만은 못살지만 못 사는 이만큼 옛날의 자치 협동의 인정이 살아있어 후한 데가 있었는데 이제 생각 없고 아첨만 일삼는 관리들이 운동 성적 낸답시고 농촌의 마음을 가만두지 않고 건드려 놓으면 그것이 그만 깨져버리기 쉽다. 이것이 한번 깨지면 몇십년이 가도 고치기 어렵다. 길이 좀 반듯해지고 라디오 깨가 생긴 유가 아니다. 수입이는다지만 돈이 많아진 대신 인정이 없어지면 무얼 하나?
그것과는 반대로 같이 살기 운동은 반드시 이기는 길이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다. 미운 사람이 없는데 어찌 아니 이기겠나? 너 나가 없는데 어찌 미운 사람이 있겠나? 가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무엇을 빼앗기겠나?
모든 씨알이 다 하나로 일어나기를 바란다.
씨알의소리 1972. 4 10호
저작집; 3- 191
전집; 1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