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세상은 깨져야 한다.
다석 유영모
가온 찍기는 ‘나’와 세상을 깨트리고 솟아올라 하늘의 숨을 쉬며 하느님과 사귀는 것이다. 숨을 바로 쉬고 시공의 주인이 되어 하느님과 사귀려면, 먼저 사욕에 사로잡힌 ‘내’가 깨져야한다. 몸의 사욕과 물욕에 잡히면 시간과 공간에 붙잡히고 세상에서 ‘옆으로 기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몸뚱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물질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생활이다. 다석은 몸뚱이의 충족뿐 아니라 마음속에 일어나는 욕망의 기대조차도 ‘우상’이라고 하였다. “몸뚱이의 충족은 죄를 낳는다. 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못쓴다. 무엇을 좀 갖겠다든지, 좋은 소식 좀 듣겠다하는 것은 실제 마음이 거기 머뭇거리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니 삼가야 한다. 물질 또는 물질적인 삶에 대한 온갖 집착이나 생각이 ‘우상’이다. 이 우상이 깨져야 참된 삶에 이른다.
다석은 18,888일째 되는 날에 파사(破私), 즉 ‘내’가 깨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또 ‘내’가 깨져 “무사(無私)만 하고 보면, 흑암이나 사망의 두려움이 없음을 알았다.” 다석은 파사의 깨달음을 이렇게 말 하였다. “목숨은 썩 는 거야, 그러나 말씀은 빛나는 거야. ····빛 날려면 깨야지, 깨져야지, 죽어야지.” ‘내’가 깨지고 들어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폭발하여 나타나는 나뿐이다.” 그러므로 깨어져야할 ‘나’를 나타내는 “이름이란 수치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영원자의 아들’이요, 내 속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이 있다. ‘내’가 깨지고 살아난 ‘나’는 ‘나라(國家)와 같은 것이다. 사사로운 ’나‘의 생각이나 의지가 깨져서 사적인 의도 없이 볼 때 분열 없는 절대의 진리에 이를 수 있고, 영원한 평화에 들게 된다.
<다석 유영모> p135-p136
지금 여기의 실천
‘이긋’인 나에게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다석은 예긋(지금 여기의 긋)에서 ‘디긋 디긋(땅에 발을 든든히 딛고)’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1956.11.12.) 그러나 다석은 현실에서의 겸허한 자세를 요구한다. 인간은 영원에 잇닿은 존재이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이며, 형이상도 형이하도 아닌 중간 존재이다. 그러한 존재로서 인간이 직접 형이상의 꼭대기만을 알려고 하거나 태초와 종말을 알려고 하면 위험하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가운데 있는 자기를 찾아들어가 가온 찍기를 성실히 해 가야 한다. 인간은 ”머리에 무엇을 이고 걸어가야 하는“ 존재이다. 하늘을 머리에 이는 존재이고 ”한량없는 과거를 우리의 머리에 인“ 존재이다. 처음과 끝, 맨 꼭대기를 다 알려고 하지 말고 이제 여기의 이 끝에서 가온 찍기를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인생의 점수, 끝수를 따내야 한다.
가온 찍기는 내가 살고 있는 이제의 한 순간 속에서, 이제 숨 쉬는 생명의 숨줄 끝에서 ‘영원한 시간에 중심’에 이르는 것이다. 이 영원한 시간의 중심에서 태초와 종말이 만난다. 가온 찍기는 “태초의 맨 첫 긋과 종말의 맨 마지막 긋이 한 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중심, 지금 여기의 한 가운데, 우주 생명의 중심, 하늘(하느님), 마음의 중심을 찍어 바른 삶을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이다. “하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여 고디 고디 가온 찍기가 인생의 핵심이다.” 내 삶의 중심도 우주 자연 생명의 중심도 내 마음 속에서 잡을 수 있다. ‘이제’, ‘여기’에서 사는 ‘나’의 참 모습은 한 점이나 이 점을 찍어 ‘참 나’의 ‘참 삶’에 이르자는 것이다. 가온 찍기는 나와 세상을 점찍어 버리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끝끝내 ‘내 속알’을 나타내고 표현하고 “‘내’가 ‘나’를 만나보는”데 까지 가야 한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땅을 곧곧하게 딛고 반드시 서야 우리는 산 다” “딱딱한 땅을 딛고” “자기의 생각을 펴 보는 실천”에 이르러야 한다.
가온 찍기를 하고 세상에서 생명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실천을 하려면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의 땅에 굳게 서야 한다. 다석에 따르면 인생이 무력한 이유는 과거사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현재사를 비판하지 않고 장래사에 신념이 없는 탓이다. “과거는 과장하지 말라. 지나간 일은 허물이다. 나도 조상보다 낫다. 순(舜)은 누구요 나는 누구냐? ····죽은 이들은 가만 묻어 두어라. 족보를 들추고 과거를 들추는 것은 무력한 증거다. ···· ”중국에서 특히 유교 전통에서 이상적인 임금으로 여기는 순 임금보다 내가 낫다면서 “죽은 이들을 가만 묻어 두어라.”고 선언한 것은 신분과 족보를 내세운 양반 문화에 대한 통열한 비판이다. 지금 여기 나의 삶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이다. 그러나 현재의 삶은 과거에 매여 있고 세상의 질서에 붙잡혀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비판하라. ····학문을 통해서 현재를 비판하지 않으면 현재는 죽어버린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래는 관을 가져라. 인생관, 세계관, 관념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세밀히 계획을 세워야 한다. 관념이 없으면 미래가 죽는다. 과거에 겸손하고 현재에 비판적이고 미래에 계획적이어야 한다.” 지금 여기의 삶의 중심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삶의 ‘가운데’를 찍고 하늘로 솟아 자유로워지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가온 찍기’가 다석의 삶과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다석 유영모> p141-p143
생각은 ‘나’를 낳는 존재 행위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 한다’는 사실에서 ‘내가 존재 한다’는 사실을 확인 했으나 다석은 내가 생각함으로써 ‘내가 생겨 난다’, ‘존재하게 된 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나온다. 생각의 불이 붙어서 내가 나온다.‘ 다석에게는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자명하지 않다. ’나‘에게서 저절로 생각이 나오는 게 아니다. 나와 생각의 관계를· 다석은 나무와 불로 비유한다. ”나무가 타 불이 나오듯이, 내가 깨나 생각이 나온다.“
존재와 끝을 사름
생각은 한 점인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다석에게 생각은 존재의 불꽃, 생명의 불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생각의 끝머리요 생각의 불꽃이다.” 생각함으로써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훨씬 나아간 나다. 이것은 생각의 불이 붙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석에 따르면 “생각의 끄트머리가 불꽃처럼 자꾸 피어오르기 때문에 ‘나는 존재 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명제가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다석은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다석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다.
다석에게 생각은 순수한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사랑이 있을 때 피어나는 하나의 정신의 불꽃”이다. 생각은 정신의 불꽃인데 정신이 불이 붙으려면 정신이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정신은 거져 깨나지 않고(삶 속에서) 간난고초를 겪은 끝에만 깨어난다.” 또한 “(나의) 정신이 통일 되어야 (생각의)불이 붙는다. 분열된 정신은 생각의 불꽃이 일어나지 않고 연기만 난다.” 정신은 지성적 계몽보다는 인생의 간난고초를 겪음으로써 깨어나고, 자기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향해 위로 솟아오름으로서 통일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