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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부사 윤계 묘갈명(南陽府使 尹棨 墓碣銘) - 김상헌(金尙憲)
아아,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의 난리에 지방을 지키는 수신(守臣)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죽은 자가 몇 사람 없었다. 그런데 남양 부사 윤공(尹公)은 참혹하게 죽고 아주 혁혁하게 충렬을 남겼는데도 조정에서는 그 내용을 밝게 알지 못하여 정문(旌門)을 내려 표창하는 전례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적들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에 대해 죽은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오히려 깜깜하게 몰라, 제 목숨만 보전하고 절개를 상실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자와 구분이 없게 하고 말았다. 그러니 세상을 격려하여 권장하고 징계하는 도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처음에 공이 호서(湖西)에서 며느리를 맞이하였는데, 위금(委禽)하던 날 저녁에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는 경보를 듣고는 날이 밝기도 전에 400여 리를 달려와 사흘도 채 지나지 않아 군에 도착하였다. 상께서 이미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에 적들이 긴 포위망을 구축하고 지켜 내외가 통하지 못하였다.
공은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통곡하고는 충의(忠義)로써 격려하니, 감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음식물을 가지고 세 번이나 갔다가 세 번을 되돌아왔다. 바야흐로 뜻을 같이하는 사대부들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일을 미처
거행하기도 전에 적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탓에 군사들이 궤멸되어 결국 포로로 잡혔다.
적들이 공을 협박하면서 꿇어앉게 하자, 공이 꾸짖기를, “나의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나의 무릎은 굽히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적들이 공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따르도록 꾀자, 다시 욕하기를, “죽어도 네놈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니, 속히 나를 죽여라.” 하였다.
이에 적들이 더욱 노하여 마구 칼을 휘둘러 난도질을 해 온몸에 온전히 붙어 있는 살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종 하나와 심부름꾼 한 명도 함께 따라 죽었다. 이에 대해서는 남양 사람들 가운데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대부분 한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똑같이 말하였다.
아아, 공이 이룬 바가 이와 같으니, 안 상산(顔常山)의 일에 거의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옛날과 지금의 드러내고 감추는 것이 같지 않으니, 세도(世道)가 변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휘는 계(棨)이고, 자는 신백(信伯)이다. 공을 임신했을 때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어려서부터 기도(器度)가 있어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인 집(集)과 유(柔)와 함께 외가에 의탁해 자랐다. 스스로 학문을 하는 데 힘썼는데,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지었다. 학업이 이루어져서는 또 동생들을 잘 가르쳤다. 한 몸으로 사우(師友)를 겸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윤씨 집안에 아들다운 아들이 있다고들 하였다. 만난 시절이 혼란스러운 때라 선비들의 습속이 크게 무너졌다. 이에 공은 그들과 더불어 행동을 같이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자취를 거두어 물러나 자신의 절조를 지켰다.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자 비로소 향시(鄕試)에 응시하였는데, 시험을 볼 때마다 번번이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에 서쪽 오랑캐들이 깊이 쳐들어와 상께서 강도(江都)로 행행하였다.
공은 상소를 올려 화의(和議)의 그름에 대해 논하였다. 그해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서 발탁되어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었으며, 얼마 뒤에 전적(典籍)으로 승진되었다가 형조 좌랑으로 옮겨졌다. 선비들 사이에 명망이 한창 높아지자 공에 대해 좋지 않게 여기고 있던 자가 공을 꺼려 외직으로 내보내 강진 현감(康津縣監)에 보임하였다.
강진현은 산골 고을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명목은 잘 가려 뽑아 보내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외직으로 내친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은 조금치도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온 마음을 다해 직임을 돌보았다. 그러자 호강한 백성들과 교활한 아전들이 모두 위엄과 밝음에 움츠러들어 감히 술수를 부려 버팅기지 못하였으므로, 드디어 크게 다스려졌다.
그러나 얼마 뒤에 어떤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 일은 실로 상사(上司)가 잘못한 것이었는데도 공은 마음 편안하게 받아들인 채 끝내 스스로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그리워하면서 비석에다 치적을 새겼다.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옮겨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조 좌랑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헌납(獻納), 수찬(修撰)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이조로 돌아와 사관(史館)의 기사관(記事官)과 세자시강원의 사서(司書)를 겸대하였다. 공은 자태가 준수하였으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어 조정 반열에 출입할 적에는 사람들이 주목해 보았다.
상국(相國) 오윤겸(吳允謙), 태재(太宰) 정경세(鄭經世) 및 나의 백씨가 평소에 식감(識鑑)이 있다고 자부하였는데, 모두들 공이 후진들 가운데 첫째간다고 말하였다. 공은 윤대(輪對)하는 기회에 다시금 내수사의 폐단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상께서는 이미 질리도록 들어 듣기를 싫어하였다.
내수사가 이조(吏曹)에 소속되어 있어 문서가 작성되면 재결을 받은 다음에 시행되었으므로 공은 문서 가운데 불가한 점이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번번이 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중지(中旨)를 내려 파직하였는데, 언관(言官)들이 극력 간쟁함에 따라 겨우 명이 정지되었다.
정랑으로 승진하였다가 교리(校理)로 옮겨졌다. 왕명을 받들어 사서(四書)의 표제(標題)를 써서 올리고서 마구(馬具)를 하사받았다. 당시에 추숭하는 전례(典禮)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잇달아 배척을 당해 쫓겨났다. 마침 경연(經筵)에서 강의(講義)를 하게 되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작위를 주는 법이 없다.”는 말을 인용해 풍간(風諫)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큰소리로 꾸짖으니 같이 있던 자들이 모두 식은땀을 흘리면서 위축되었다. 그런데도 공은 더욱더 격앙되어 조리가 있게 대답하니,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순무어사(巡撫御史)가 되어 호남 지역에 나가 순시하였는데, 강진(康津)의 백성들이 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말 앞에 모여들어 맞이하였다.
공이 위로하면서 무슨 고통이 있는가를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오랫동안 우리 원님을 생각하고 있다가 지금 다시 보게 되어 기뻐서 나온 것이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공이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돌아와서는 변경을 굳건히 하고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계책을 진달하였는데, 알았다는 내용의 비답을 받았다.
추숭에 대한 의논이 오랫동안 결론나지 않자 상께서 조정의 의논을 배척하고는 두세 명의 신하와 더불어 억지로 정한 다음 위엄으로 억누르면서 따르게 하려고 하니, 언관들이 위축되어 앞 다투어 인피하고 떠나갔다. 공은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항장(抗章)을 올려 그 가운데 특히 나약하여 일을 회피한 자를 탄핵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노하여 중지를 내려 삭출(削黜)하였다. 공은 서교(西郊)에서 두문불출한 채 두 동생과 더불어 독서하고 강학하면서 담박하게 지냈다. 계유년(癸酉年, 1633, 인조 11)에 서용되어 이조로 돌아와 지제교(知製敎)와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와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임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635, 인조 13)에 상기를 마치고 다시 교리가 되었는데, 그대로 문학을 겸임하였다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또다시 어사가 되어 영남 지방을 암행하였다. 탐오한 자를 내쫓고 능력이 있는 자를 천거하였으며, 폐단을 제거하고 곤수(閫帥) 가운데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를 논핵하니, 상께서 가상히 여겨 교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그 곤수는 뒤에 과연 낭패당하였다. 재변을 당해 상소를 올려 천도(天道)를 따르고, 대지(大志)를 세우고, 성학(聖學)을 힘쓰고, 궁금(宮禁)을 엄하게 할 것 등 여섯 가지 조목을 진달하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기면서 장려하는 뜻을 보였다.
병자년( 丙子年, 1636, 인조 14)에 외직을 구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정사를 돌본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무를 봉행하고 백성들을 돌보는 것이 모두 조리가 있었다. 나라에서 오랑캐와의 화친을 끊었는데, 공은 전지(傳旨)에 응하여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득실에 대해 갖추어 논하였다. 그러나 말한 것이 당시에 재상으로 있던 사람을 건드렸던 탓에 기각되어 행해지지 못하였다.
아, 공과 같은 사람은 하늘에서 재주 있는 사람을 내려 주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으며, 이 세상에서 때를 만나지 못했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의견이 음우(陰雨)를 치밀하게 대비하는 날에 기각되었고, 직임이 공사(公私)가 잔폐된 지역에 치우쳐 있었다. 이에 화는 급박하고 일은 위급할 때에 형세는 빼앗기고 힘은 달려서 끝내 무위(武威)를 떨쳐 드날리면서 흉적을 제거하여 어려움을 구제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한갓 자신의 몸으로써 의리를 다하고 분수를 다하다가 적의 칼날에 목숨을 빼앗겨 들판에 시신이 버려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또 임금께서 알아주어 그 혼을 현양해주지도 못하였으니 천도와 인사(人事)가 어쩌면 그리도 어긋났단 말인가.
공이 죽은 것은 12월 27일이었는데, 다음해 정월 1일에 해도(海島)에 대충 장사 지냈다가 4월 신유일에 이르러 비로소 예를 갖추어 다시 염습하여 김포군(金浦郡) 신동(薪洞: 섶골의 漢字로, 오늘날 김포시 북변리이다.) 오향(午向)의 산등성이에 있는 선인의 묘 곁에 장사 지냈다.
공은 본디 남원인(南原人)이다. 후세에 잇달아 사적(仕籍)에 올라 경성(京城)으로 이사해 살았다. 증조의 휘는 우신(又新)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섬(暹)으로, 아무 관직을 지내고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었는데,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에 국사를 위하다가 죽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용양부원군(龍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형갑(衡甲)으로, 재주가 있었으나 오래 살지 못하여 졸할 때의 관직이 서흥 현감(瑞興縣監)이었다. 찬성공 이래로 3대 동안 잇달아 대과에 급제하고 대각(臺閣)의 직임을 역임하여 세상의 명족(名族)이 되었다. 그런데 공의 형제에 이르러서 젊은 나이에 영명함을 드날리며 청화(淸華)한 직에 아울러 나가 혁혁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더욱더 드러났다.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관찰사 황치경(黃致敬)의 따님으로, 3남을 낳았는데, 공은 그 가운데 장남이다.
공의 초취 부인은 부사(府使) 정세미(鄭世美)의 따님으로, 2남을 낳았는데, 이흠(以欽)과 이명(以明)이다. 재취 부인은 정랑 박정원(朴鼎元)의 따님이고, 삼취 부인은 현감 김덕민(金德民)의 따님인데, 모두 자식이 없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다. 1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례를 집행하기를 제도보다 넘치게 하였다.
뒤에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내어 올렸으며, 할머니를 봉양함에 있어서 뜻에 맞추어 드리려 힘썼다. 제매(弟妹)들과 더불어 살면서 재산을 함께 공유하였다. 비록 젊어서부터 능함이 드러났으나 스스로 억제하여 공손하게 하였으며, 교유하기를 일삼지 않았고 논의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공은 몸이 요직에 있게 되어서도 문정(門庭)이 쓸쓸하기만 하였다. 사양하고 받는 즈음에 신중히 하면서도 또한 명예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항상 가득 차는 것을 두려워하여 형제간에 서로 경계하였다. 그러나 사특함과 올바름을 분변하는 데 이르러서는 늠름하기만 하여 아주 엄격하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 어떤 신하가 있어 귀함이 조정을 진동하였는데, 속마음은 음험하고 사특하면서도 겉으로는 흠모하는 척하면서 공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첫째 동생이 모함을 당한 것은 반 정도가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공의 둘째 동생 유(柔)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명(銘)을 지어 주기를 청한 지 대개 몇 년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허물을 진 채 병들어 있어서 응할 수가 없었다. 생각건대 용양공(龍陽公)이 이미 충절(忠節)로써 후손에게 끼쳐 주었는데, 공이 능히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 동생이 또 화친을 배척하고 간사한 자를 공격하였다가 오랑캐의 조정으로 보내져 절개를 굽히지 않고 맞섰다. 한 집안의 세 사람이 이와 같이 표표하게 충절을 수립한 것은 세상에서 드물게 보이는 바이다. 그러니 어찌 명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드디어 사(辭)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깊숙하고 고요함이 그 깊음이고 / 淵然其深而
찬란하게 빛남이 그 빼어남이네 / 燁然其秀而
확고하고 확고함이 그 지킴이고 / 確確乎其守而
뜨겁고도 뜨거움이 그 나감이네 / 烈烈乎其就而
살아남은 자들 모두 부끄러웠고 / 生者忸兮
죽은 이는 도리어 더 영광 있었네 / 死反榮
기러기의 털과 태산 두 가지 중에 / 鴻毛泰山兮
어느 쪽이 더 무겁고 가벼운 건가 / 孰重輕
창졸간에 살신성인 이루었거니 / 倉猝成仁兮
평소부터 정해 둔 뜻 있었던 거네 / 繇素定
성인 내린 가르침에 귀의했거니 / 歸依聖訓兮
착하지가 않은 것이 하나 없어라 / 無不臧
이것으로 명을 얽어 지었거니와 / 用此爲銘兮
또한 역시 그 무엇을 상심하겠나 / 亦何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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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위금(委禽) :
혼례의 납채(納采)에서 기러기를 보내는 일로, 전하여 혼인을 맺는 것을 말한다.
[주02] 안 상산(顔常山) :
당나라 때 사람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 상산군(常山郡)을 지키다가 순절한 안고경(顔杲卿)을 가리킨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이 난을 일으키고는 사사명(史思明)으로 하여금 상산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 성을 지키고 있던 위위경(衛尉卿) 안고 경이 군사가 적어서 성이 함락되어 사사명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동도(東都)로 끌려가
서 안녹산을 크게 꾸짖다가 끝내 처형당했다.《舊唐書 卷187 忠義列傳 顔杲卿》
[주03] 음우(陰雨)를……날 :
위험스러운 사태를 미연에 방비하는 때라는 뜻이다.《시경》〈빈풍(豳風) 치효(鴟鴞)〉에 이르기를,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을 적
에, 저 뽕나무 뿌리를 주워서, 틈과 구멍 튼튼히 얽어매라.〔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4] 첫째 동생 :
병자호란 이후 척화파(斥和派)로 몰려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죽은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인 윤집(尹集)을 가리킨다. 윤집은
병자호란 때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崔鳴吉)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가 화친이 성립된 이후 청나라에 끌려가 항변하다가 심양(瀋
陽)에서 처형당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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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嗚呼! 丙子之難, 守臣死事者無數人。 而南陽守尹公, 死甚酷事甚烈, 朝廷不能明知其故, 旌褒之典不例。 以罵賊死國之人, 死幾年, 尙昧昧, 與全軀喪節不徇職者亡辨, 勵世勸懲之道, 果何在哉?
初公娶婦於湖西, 委禽之夕, 聞虜警, 不待朝馳四百餘里, 未三日至郡。 上已入南漢城, 賊築長圍守之, 內外不通。 公對衆大哭, 激以忠義, 人多感動者。 募授橐膳, 三往三反。 方與同志士大夫, 謀擧兵勤王, 事未集, 賊猝至, 軍潰遂被執。
賊迫之使跪, 罵曰: “頭可斷, 膝不可屈。” 誘使隨從, 復罵曰: “死不從汝, 速殺我。” 賊愈怒, 亂刃交下, 身無完肌。 一奴一傔俱從死。 南陽人脫俘歸者, 類能言之如一口。 嗚呼! 公之所成就若此, 則猶庶幾乎顔常山, 而古今顯晦不同, 無亦世道之變耶?
公諱棨, 字信伯。 在娠異夢, 幼有奇度, 不類凡兒。 少孤, 與弟集、柔, 依外氏。 自勵爲學, 工書善屬文。 業成, 又能敎其弟, 身兼師友, 人謂尹氏有子。 遭時昏亂, 士習大壞, 公恥與爲進退, 斂跡自守。 今上卽位, 始詣公車, 試輒高選。 甲子, 中司馬。 丁卯, 西虜深入, 上幸江都, 公上疏論和議之非。 是年, 擢別試文科, 隷承文院權知副正字。 尋陞典籍, 遷刑曹佐郞。 士望方起, 不悅者忌之, 出補康津縣監。 縣號嵒邑, 名爲遴柬, 而實外之。 公不少見幾微, 悉心營職。 豪民、猾吏咸伏威明, 不敢用其術支梧, 遂以大治。 亡何坐事罷歸, 其失寔繇上司, 而公夷然受之, 終不自言。 百姓追思, 銘其政於石。 拜禮曹佐郞, 移司諫院正言, 請革內需司, 不納。 移吏曹佐郞, 又移獻納、修撰, 復還吏曹, 兼帶史館記事、世子司書。
公姿狀俊偉, 動止有法, 出入朝行, 目屬之。 相國吳公允謙、太宰鄭公經世及我伯氏, 素負鑑賞, 皆以公爲後進第一。 因輪對復陳
內司之弊, 上固已厭聞。 司屬天官, 文書成, 聽裁乃行, 公見其有不可者, 輒不肯署。 中旨譴罷, 言路力爭, 廑寢。 陞正郞, 移校理。 承命寫進《四書》標題, 拜馬飾之賜。 時議追崇典禮, 異議者連被斥逐。 會當經筵講義, 引子無爵父之辭以諷之, 上勵聲折責, 同列汗縮。 公益自激昂, 進對有序, 人以爲難。 以巡撫御史出視湖南道, 康津百姓聞公至, 聚迎馬首。 公勞問何苦, 皆曰: “久思我侯, 今喜再見, 非有所言。” 其見愛如此。 還陳固圉便民之策, 報聞。
追崇議久未成, 上絀廷議, 與二三臣彊定, 欲以威武怵之, 言路氣懾, 爭自引去。 公在玉堂, 抗章劾其尤選愞避事者, 上怒, 中旨削黜。 杜門西郊, 與二弟讀書講學澹如也。 癸酉, 敍還吏曹, 知製敎、兼帶校書校理・世子文學。 丁內艱。 乙亥, 服除, 再爲校理, 仍兼文學, 陞應敎。 又以御史暗行嶺南, 黜貪擧能, 疏弊條瘼, 論閫帥之不勝任者, 上善之, 下敎褒予。 其閫帥後果僨敗。 遇災疏陳, 法天道、立大志、懋聖學、嚴宮禁等六條, 優示嘉奬。 丙子, 乞外得南陽府使, 在政未幾, 其所以奉公恤民者, 皆有條理。 國家與虜絶和, 公應旨上萬言疏, 備論得失。 語觸時宰, 寢不行。
嗚呼! 如公者, 天不可謂不降材, 世不可謂不遭遇, 而言格於陰雨綢繆之日, 任偏於公私凋弊之地。 禍迫事急, 勢奪力屈, 卒不得奮武揚靈, 除兇救難。 徒以身畢義盡分, 棄命鋒刃, 橫尸原野。 而又不爲人主之知, 以顯其魂, 天道、人事, 何其謬耶?
公之死在十二月二十七日, 明年正月一日, 藁葬于海島, 越四年辛酉, 始具禮改殮, 歸窆金浦郡薪洞向午之原, 先人墓側。
公本南原人, 後世聯登仕籍, 徙居京城。 曾大父諱又新, 知中樞府事、贈左贊成。 大父諱暹, 某官, 錄光國勳, 壬辰死事, 贈領議政、龍陽府院君。 考諱衡甲, 有才無年, 卒官瑞興縣監。 自贊成已下仍三世大科, 歷踐臺閣,
爲世名族。 至公兄弟, 妙歲蜚英, 幷列淸華, 聲譽赫赫, 由是益顯。 妣曰昌原黃氏, 觀察使致敬之女。 生三男, 公其長也。 初娶府使鄭世美女, 生二男: 以欽, 以明。 再娶正郞朴鼎元女, 三娶縣監金德民女, 皆無子。
公性孝友。 十六, 父歿, 執喪踰制, 遭母病, 斫指進血。 奉養大母夫人, 務盡順適。 與弟妹同居, 無異財。 雖少顯能, 自抑損爲恭, 不事交遊, 不喜論議。 身居要路, 門庭闃然。 愼於辭受, 而亦不欲近名。 恒以盛滿爲懼, 兄弟相戒, 至於邪正之辨, 凜凜乎其嚴也。 有一倖臣, 貴震朝廷, 內陰忮而陽浮慕之, 迫欲致公而終不得。 仲之見陷, 此爲之半云。
公之季柔, 抱狀請銘, 蓋有年矣, 以余之負累抱痾, 未有以應也。 念龍陽公旣以忠節貽謀, 而公能繼之, 其弟又以斥和攻奸, 送虜庭, 抗節不屈。 一家三人, 如此表表樹立, 世所鮮覯, 顧何可不銘也? 遂爲之辭曰:
淵然其深而, 燁然其秀而。 確確乎其守而, 烈烈乎其就而。 生者忸兮, 死反榮。 鴻毛、泰山兮, 孰重輕? 倉猝成仁兮, 繇素定。 歸依聖訓兮, 無不臧。 用此爲銘兮, 亦何傷?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