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양재역 벽서의 옥(壁血書)>/<양재동 성당>
옛날의 양재역은 서울(한양땅)을 떠나 첫날밤을 자는 지점이 이자, 한양으로 드는
마지막 밤을 자는 지점이어서 무척 붐비는 곳이었다.
<구룡산> 북서쪽 기슭과 양재천 남북의 구릉 및 평야지대로서 <말죽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었다. 먼길을 걸어 한양땅으로 입경하려는 여행자들 또는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고 자신도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다.
<양재동 주모>란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이 역마을의 주모가 어찌나 간사하고 요염했던지
추파에 말려들면 알거지가 된다는 그런 뜨내기 마을이었다.
조선시대 몸을 팔아 삶을 이어가는 여인네를 <작부> 또는<들병이>라고 했다.
기생들도 더러 몸을 팔았지만 주로 <삼패기생>들의 몫이었다.
조선의 기생은 등급이 엄격했다. 소위 일패,이패,삼패기생으로 등급이 나뉘었다.
그녀들은 춤과 노래, 기악, 학문, 시와글, 그림에 대한 이해도가 만만치 않았다.
용모와 화술도 대단한 종합 예술인이요 지식인이었다.
<기방오불>이라고 기방에서 하지 말아야 할 다섯가지가 있다.
1. 기생의 약속을 믿지 말 것.
배비장전에 나오는 애랑이라는 기생은 정표로 받은 양반들의 이빨만 해도 소쿠리로
하나 가득 했다.
2. 문자를 읊고 자랑하지 말것.
어설프게 문자를 읊다가는 되려 망신을 당한다.
3. 꽃을 선물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다른 말로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이다.
4. 자기 마누라 자랑하지 않는다.
5. 가문의 열녀 자랑하지 않는다.
두 항목 모두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말이다.
걸왕의 <말희>나 주왕의<달기>는 악녀로 유명하며, 주나라는 <포사>로 인해 멸망된다.
이렇듯 중국의 미녀들은 국가의 운명을 말아먹는 色女로 연상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조선의 미녀인 기생들은 나라를 구하고져 하는데 한 몫을 했다.
조선의 기생들은 요염하되 품격이 있었고, 때론 비장한 여인들이었다.
<어우야담>에 기록된 진주 관기 <논개>나 평양성에서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를
죽인 <계월향>은 조선을 구한 의기(義妓)로 기억되고 있다.
평양기생/ 오산월, 일지매, 황진이.....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추(醜)함 보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다.
평양 기생학교 출신으로 최초의 미스 조선 진으로 뽑힌 여인은 박온실이다.
박온실이 거리를 지날 때 빼어난 미모로 눈웃음을 한번 흘려주면 감격해서 자지러지는
남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양재역 지하철 3번 출구로 나와서 200미터 쯤에 국민은행(켐코타워)가 있다.
그곳에서 우측으로 조금 걸으면 <양재동성당>이다.
<나를 넘어 보편적 가치로 대화하고 공감을 이루는 삶을 지향한다>
뜻만으로 보면 <양재동성당>의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양재동성당은 1912년 게리(양재리) 공소로 출발하였다.
1965년에 정식으로 성당으로 승격 설립되어서 서초 강남지역에 7군데의 성당을 분가를 시켰다.
1971년 서울시 구역 정리 사업으로 옛날의 성당 건물이 헐리고 73년 착공하여 75년에 준공 되었다.
<양재동성당>은 평신도 단체의 생태운동을 위한 모임이 활발하고 인상적이다.
-----<하늘.땅.물벗>-----
<느리고 불편하고 답답해도 지구를 보호하는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모임이다>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고한 良才洞......성당을 나와서 은광여고에서 양재 사거리 쪽으로
향하여 뒷골목길을 걸었다.
뒷골목은 작은 커피집과 떡볶이집들이 한집 건너 하나씩 담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젊은이들과 학생들의 발길이 잦은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작은가게 (홍팥집)에서 빙수와 팥빵 맛을
보며 잠시 더위를 식혔다.
양재2동 사무소가 위치한 부근을 게리마을(거여마을)이라고 했다.
옛날 역사(驛舍)는 마굿간이 딸려 있어 말똥의 구린내가 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양재역 터를 <말똥구리>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규태의 <역사산책>은 주모들이 판을 치고 또 인간 냄새가 물씬나는 이곳을 진원으로 하여
일어났던 한국인의 비극과 심성을 더듬고 있다.
명종 원년인 1546년 부제학 정언의는 시집간 딸을 배웅하고자 이 양재역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그는 역사의 벽에 붙어 있는 몇줄의 글을 발견하였다.
비난 글은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들이 권력을 농하고 있으니 이는 곧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리는 격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세는 험악한 때였다.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왕후의 친동생인 <윤원형>의 세도정치로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민심은 흉흉했다.
이무렵 <양재역의 벽혈서(壁血書)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정미사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익명의 저항인 <벽서>와 같은 습속은 사실 신라 때부터 있어 왔다.
나라에 변고가 생기고, 백성의 공감을 휘어잡을 수 있는 사연이면 글돌(書石)에다 사연을 써서 길바닥에
던져둔다. 기와장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행인들은 그것을 보고는 다시 제자리에 엎어 놓았다.
버리거나 파손시키거나, 제자리에 놓지 않으면 반드시 <액>이 따라 붙는 것으로 알았다.
아무도 귀신 붙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돌은 그 자리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이자 유튜브 역할을 한 셈이다.
이제는 간사하고 요염한 <양재역주모>도 없는 말죽거리..... 나는 안심하며 그 길을 걷고 있다.
말죽거리는 나에게 바둑이나 당구의 聖地가 되었고, 놀이터의 중심이 되었다.
사이드미러(side-view mirror)를 통하여 본 지나온 과거의 <양재동>의 모습이다.
스쳐가는 바람의 무게가 어제와는 완연히 다르다.
나는 눈을 들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그길은 멀고도 아득하기만 하다.
내가 가야 할 길이다.
고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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