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위안 여행12 - 이갱 마을에서 가정집 벽에“福(복)” 글자를 보고는 5복을 떠올리다!
10월 24일 우위안 婺源(무원) 리캉 李坑(이갱) 에서 차로 장쩌민의 선조가 살았던 강씨마을
장완전 江弯镇(강만진)에 도착해 옛마을을 구경하고 샤오치 (晓起 효기) 촌을 찾아
마을을 보고는 유씨 집성촌 왕구촌 (汪口村)을 구경한후 리캉 李坑(이갱) 으로 돌아옵니다.
호스텔에서 휴식후 다시 나와 개울을 따라 양쪽에 들어선 가게와 객잔이며 식당을 보면서
북쪽으로 걸어서 다리를 스쳐 지나 대부제와 신명정 을 보고 통제교를 지나 우른쪽에
초천과 이지성 고거 를 보고 대나무 우거진 언덕에 올라 고산정 에서 마을을 내려다 봅니다.
그러고는 언덕에서 다시 마을로 내려와 골목길을 걸으니 관광객들은 심심치 않을 정도로
보이는데 가정집의 벽 에 "사슴과 두루미" 로 “福(복)” 글자를 표현한게 재미있네요?
중국 에서 "五福(오복)" 이라고 하면 첫째가 壽(수) 이고 다음으로는 富(부),
그리고 康寧(강녕), 攸好德(유호덕) 에 告終命(고종명) 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마지막이 告終命(고종명) 인데... 고종명이란 자식들에게 유언 을 남기고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함 을 말하니 자식은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최고의 불효" 로 여겼습니다만..... 그렇다면 나는 불효자식 입니다.
오래전인 1970년대에 휴전선 부근에 주둔한 군대에 근무할때 부산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연락을 받고는 휴가를 가기위해 대여섯 시간 걸려 철원 화지리
연대본부 에 도착하고도 하루 이상을 무료하게 기다려야 했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지요?
집에서 관보를 쳐야했는데 일반 전보 를 쳤으니 연대본부에서 동사무소에 전보 대신 관보 를
쳐달라는 전보를 치고, 동사무소 직원이 전화가 없는 우리집을 찾아가서, 가족이 병원에
가서는... 사망진단서를 끊어 동사무소에 제출해 관보 수속 을 밟은후 그게 연대본부에
도착해 비로소 출발해 철원에서 서울을 거쳐 부산 까지 내려가니 장례식은 벌써 끝났더군요?
죽음 이야기가 나왔으니“인간은 삶이 힘들어 사회 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 를
만들었다고 했던가요?”요즈음 "자기 부고" 를 미리 스스로 쓰는게 유행이라던데...
1,974년 2월 8일 동아일보에 언론인 진학문 씨가 사전에 자기가 쓴 부고 가 실렸습니다.
“ 그동안 많은 총애를 받았사옵고 또 적지 아니한 폐를 기쳤습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가니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또 2,007년 1월 18일 뉴욕타임스에는 전날 죽은 칼럼니스트 가 스스로 제작한 육성 동영상
부고 가 올라 왔으니“안녕하세요? 아트 부크월드 입니다, 제가 조금전에 사망했습니다”
일본 에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자신의 부고나 유언을 미리 써 놓는 사람이
대폭 늘었다는 데..... 몇년전에 개봉한 일본 영화 “엔딩 노트”는 딸이
위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앞둔 아버지 의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한 다큐멘터리 입니다.
정년퇴직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스나다 도모아키 는 건강검진을 통해 말기암 판정을 받게
되는데.... 예상치 못한 죽음 앞에서도 다른 사람들 처럼 망연자실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실하고 꼼꼼하게 자신만의 “엔딩노트”를 준비하는데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믿어보기”, “한번도 찍어보지 않았던 야당에 표 한번 주기”.....
그리고 “일만 하느라 소홀했던 가족들과 여행가기” 등 위트 있고
솔직한 마음을 담은 리스트 를 작성하며 아빠는 가족들과 소중한 추억 을 쌓습니다.
그렇게 “엔딩 노트”가 채워질수록 가족들과의 긴 이별의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이
과정을 지켜보는 딸이자 감독인 마미 스나다 의 시선... 그러니까 이제는 “웰빙”을
넘어“웰다잉”의 시대일런가? 죽는 것도 본인에게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프로젝트 일진대?
얼마전에는 미국 시애틀 타임스에 여성 작가 제인 로터 가 자신의 부고 를 올렸으니...
“나 자신의 부고를 쓸수 있는 시간을 가질수 있는 것이 암투병의 장점”이라고 했네요?
교통사고나 다른 급사에 비해 암은 죽을날을 어느 정도는 미리 예견할수 있다는 것일러나?
그녀는 삶이라는 선물 을 받았고 이제는 이 "선물을 돌려주고자 한다" 고 말하네요?
또 계로록의 저자 소노 아야코 는 “재미있게 살았으니 어느때 이승을 떠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심리적 결재”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유명 부호가 죽었다는 신문 기사가 오보로 났는데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돈에 집착한
수전노 라고 평을 한 기사를 읽고는 놀라움에 깨달아서 자선 재단 을 만들었다고 하던가요?
그런 사람 중에 한명이 알프레드 노벨 이니 형이 죽었는데 언론에서 착각해“죽음의 상인
저승으로 떠났다”는 비판 기사를 보고 깨달아서 만든게 바로 “노벨상” 이라던가요?
이런저런 상념에서 깨어나 옆 골목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옛 휘주 건축물 이 보이는데
예사롭지 않아 문패 를 확인하니 역시나... 여기가 바로 李书麟古居
(이서린고거) 이니 안쪽에는 집 안에 사당인지 存德堂(존덕당) 이란 글귀가 보입니다.
청나라 동치제때 지었다는 집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인지 건물은 쇠락했고 보수 유지가
안되어 흐름해 보이기는 하지만.... 고택 의 문과 벽에 돌을 새겨 장식한 것
중에 일부는 아직도 남아 옛 영화 를 말하고 있는데 이 집도 가훈 을 새겨 두었네요?
다시 큰 길로 나와 개울을 따라 걸으니 집을 지으려는지 기와가 담에 기대어
있고 밀짚 모자를 파는 가게를 지나 식당이 보이는데... 李坑农庄
(이갱농장) 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니 누구 여행기에서 한번 본 이름 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으니 처마끝이 하늘로 들여 올려진 멋진 건물이 나타나는데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아 마을 지도를 살펴보니 이 건축물이
바로 古娥台(고아대) 이니..... 그럼 옛날 연극을 상연하던 극장 인가 봅니다?
그러고보니 대문 안쪽에 용이 배경으로 그려진 무대 가 보이는데....
이런 작은 마을 에 연극 극장 이 다 있었다니 놀랄 일입니다?
연극 극장 을 보노라니 떠오른게 몇년전 "중국에 연극같은 일" 이 일어났으니....
등소평이 만든 집단 지도체제 를 근본에서 바꾼 시진핑의 종신집권 을
가능케해 시황제 로 불리는 헌법개정 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찬성율 99.8% ???
“찬성 2,958, 반대 2, 기권 3, 무효 1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장기집권의 길을
터준 개헌안이 중국 전국 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통과됐다. 찬성률 99.8%."
"과거 북한의 ‘100% 투표에 100% 찬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황당한 찬성률 이야말로
아직도 중국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사회로 가려면 멀었다는 점을 웅변한다.”
“표결이 진행된 베이징 인민대회당에는 26개의 투표함이 설치됐다. 그러나 가림막이
쳐진 비밀 기표소는 없었다. 전국인대 대표들은 자신의 자리 에서 투표용지에
찬반을 표기한 뒤 순서에 따라 걸어나가 투표함에 넣었다. A4 용지
크기의 투표용지를 접지 않은채 그대로 투표함에 넣는다. 사실상의 공개투표 였다. ”
“중국의 최고권력기구인 전국인대는 지역별 조직별 계층별 소수민족별 엘리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홍콩과 마카오의 대표자도 참석하는데 대부분 공산당원 이다. 그렇다 보니
중국 공산당 정치국과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안건을 전국인대가 거부한
사례는 없다. 대표를 선출할때 시 주석에 대한 충성심을 자격 요건으로 따졌다고 한다. ”
“시 주석이 국가주석에 취임한 2013년 전국인대에선 사안에 따라 반대표가 적잖게 나왔다.
정부 예산안에 대해 509표, 최고인민법원 검찰원의 업무보고에 대해 각각 605표,
485표의 반대 가 나왔다. 그러나 시 주석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반대표가 다시 실종됐다. ”
“이번 개헌안에는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규정 폐지 외에 ‘공산당 영도(領導)’ 원칙도
포함되었다.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에 삭제했던 이 원칙을 다시 살린 것은 공산당
일당체제 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번 개헌안이 단순히 시 주석
개인의 장기 집권을 넘어 과거의 전체주의 회귀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명천지에 99.8% 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개탄하는데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는 격이라? 100% 에 가까운 찬성율은
북한 에서는 늘 있는 일이고..... 과거 이라크에서 소수파인 수니파의
후세인 대통령 도 이룩했으며 "대한민국도 100% 라는 대 기록(?)" 을 갖고 있습니다.
박정희씨는 1961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후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에게 1.5%
불과 15만표 차이로 승리했으며, 1967년에는 윤보선씨에게 160만표로 이겼으니 극심했던
"부정선거" 를 감안하면 윤보선씨는 자기가 “정신적 대통령”이라 한 말이 수긍이 됩니다.
1971년 김대중에게 94만표 차이로 이긴후 유신쿠데타를 단행해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해 이들이 1972년 대통령을 선거하는데, 2,359명이 100% 장충
체육관에 출석해 찬성 2,357표 반대 0표, 무효 2표로 박정희씨는 100% 로 당선되었고
1978년 선거 역시 100% 로 당선되었는데, 우리 한국인이 중국을 나무랠 자격 이 있는건지...
박정희 대통령이 3선만 하고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개헌은 하지않고 물러나 고향 구미로 내려
갔으면 그 일가와 이후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며 광주 비극등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대한민국이 안정될수 있었을까요? 전두환시대에 아스팔트에서 최루탄을 마셨던 나로서는
안타까운데... 하기사 "권력이란게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 과 같으니 내릴수 없는 것일까요?
그러고는 좀 더 걸어 내려오니 개천에 천으로 둘러싼게 보이는데 짐작컨대 물고기
를 넣어서 보관 내지 길러서는 식당에서 요리 하는게 아닌가 짐작됩니다?
길가에 오골계 인 것 같지는 않은데, 검은 닭이 노니는 것을 구경하다가 발걸음을 옮기니
또 멋진 건물이 보이니 바로 銅錄坊(동록방) 인데 안에 액막이 호랑이 그림이 보이고
봄 春(춘) 자 종이가 붙은걸로 보아 분위기상 점치는 곳 일까요? 아님 무슨 사당 일까요?
그러고는 큰 길을 버리고 왼쪽 골목길을 한참 걸어 마을을 빠져나오니 밭인데....
옥수수와 수세미 며 농작물들이 자라고.... 그 옆 큰 개울에는
오리 들이 먹이를 찾는데 길에는 큰 세파드 같은 검정색 개 가 어슬렁 거립니다.
그러고는 다시 개울가의 길을 걸어서 부채등 가게들을 구경하는데 나룻배를 젓는 여인 이
있으니 관광철에는 손님을 태우고 마을을 도는가 봅니다? 아님 어디 일하러 가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