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아이슬란드 가려고.” “거긴 왜 또 가?” “…그냥.” 갈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거니 했던 그곳은 어느덧 네 번째가 되었고, 가장 친숙한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언제나처럼 여행을 마치며 언제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했지만, 언젠간 아이슬란드의 한 숙소에서 이 글을 꺼내 읽으며 회상하고 있을 날이 오리라 확신한다.
대학 생활 대미를 장식하는 졸업전시회가 끝나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젠 길게 여행 갈 시간은 없을 거야. 내 대학 생활을 마무리할 최고의 장소가 필요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사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신이 지구를 만들 때 시험 삼아 만들었다는, 바로 그 아이슬란드다. 2015년 첫 여행 이후 두 번을 더 다녀왔음에도 어쨌든 아이슬란드여야만 했다. 좋은 기억만 가득한 곳에서 마침표를 찍고 싶었으니까.
내가 빌린 자동차는 어디에?
렌터카 회사에 도착해 300만 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내자마자 들은 한 마디. “자동 변속 자동차가 한 대도 없어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오면 차를 드릴게요.” 아프리카에서도 온갖 고초를 겪으며 여행했었지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려 아이슬란드에서! 지금까지 겪었던 아이슬란드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억울한 마음에 계속 따지자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수동 변속 자동차를 제안한다.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수동을 받으면 보통 오토가 더 비싸니까, 차액을 날로 먹겠다는 거 아닌가. 이건 상도덕과 자존심 문제다. 완강히 거부하며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압박하자 직원들끼리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내 차를 주겠단다. 방금까지 차가 없다더니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니 그냥 있단다. 잠시 후 온갖 화산재와 흙탕물을 뒤집어쓴 회색 레니게이드가 등장했다. 타이어 공기압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등도 들어와 있었다. 아무래도 준비가 안 된 차를 준 것 같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두 시간이나 지체되었고, 비바람에 차 상태를 확인하느라 외관 사진만 후다닥 찍고 그 지옥 같은 장소를 떠났다. 그렇게 새벽 세 시, 첫 숙소에 체크인 했다.
레니게이드, 생각보다 별로잖아?
여행을 떠나기 전 자동차 업계에 몸담은 선배에게 레니게이드는 어떤 차인지 물어봤다. 잠시 생각하던 선배는 ‘덜덜덜, 타보면 안다’고 말해주었고, 시동을 걸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 설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보다 더 적절한 수식어는 없었다. 차량용 햇빛 가리개는 너무 짧아 남은 틈 사이로 자외선을 선사하고, 좌우 색과 모양이 다른 테일램프는 날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운전하는 내내 자갈 밟는 소리와 엔진 소리, 떨리는 의자의 삼박자가 피로감을 더했다. 지프에 대한 로망은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지난해 1월에 탔던 포드 쿠가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프를 타고 아이슬란드의 링로드(아이슬란드를 한 바퀴 크게 도는 1번 국도) 여정을 시작했다.
회색빛 나라
수도인 레이캬비크를 지나 골든서클을 둘러보고, 남부의 스코가포스(포스란 아이슬란드어로 폭포라는 뜻)로 향하는 길이다. 하늘을 보니 여전히 먹구름이다. ‘나아지겠지’하는 순간 하늘에 구멍이 뚫리더니 한 치 앞도 안 보일 만큼 비가 쏟아진다. 하지만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맑은 구름이 우리를 반긴다. 저 멀리 지평선을 보니 비가 내리는 구역이 명확하게 보인다. 이게 바로 아이슬란드다. 날씨가 맑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구름이 몰려오고, 폭우가 퍼붓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이 걷힌다. 이 모든 일이 단 10분 만에 일어난다. 온몸이 젖을 각오로 차로 달려가면 차 문을 여는 순간 비는 그친다.
스코가포스 공터에 차를 대고 뷰포인트까지 계단을 올랐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계단을 올라가 가쁜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 바로 포인트다. 끝없는 지평선과 평야는 하늘이 만든 회색 커튼과 때때로 보여주는 푸른빛에 둘러싸여 시시각각 전혀 다른 분위기를 선사한다. 하늘에 작은 구멍이 뚫리고 폭포에 무지개가 생기는 바로 그 순간 여기는 다른 나라, 아니 다른 행성이다. 스코가포스에는 바이킹이 폭포 뒤에 보물을 숨겨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어떤 게 숨겨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굳이 그 보물을 찾아 애쓸 필요는 없겠다. 먹구름이 이렇게 기대되는 여행이 또 있을까? 그러니 만약 아이슬란드 여행 날씨 예보가 회색빛일지라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떠나라. 하늘을 덮은 먹구름과 그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이 뒤섞여 지금껏 보지 못한 회색 풍경을 보여줄 테다.
‘ICE’LAND
스코가포스를 지나 비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동쪽으로 140km를 더 달리다 보면 드디어 링로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스카프타펠이 나온다. 무언가 익숙한 분위기라고? 그렇다면 영화 <인터스텔라>를 떠올려보자. 바로 만박사가 홀로 억겁의 시간을 보냈던 그곳이다. 여기서는 스카프타펠 국립공원 내에 있는 바트나요쿨 빙하를 하이킹할 수 있는데, 곳곳에 위치한 크레바스와 안전상 문제로 반드시 가이드와 함께 가야 한다.
집결지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모여 설명을 듣고 장비를 지급받는다. 트래킹을 시작하면 검은 화산재와 함께 긴 시간 잠들어 있던 푸른 빙하가 펼쳐진다. 이 외에도 ‘아이슬’랜드라는 명성에 걸맞은 곳이 또 있다. 호수에 빙하가 떠내려 오는 요쿨살론과 바다가 합쳐지는 다이아몬드 비치다. 요쿨살론에는 푸른 빙하가, 맞은편 다이아몬드 비치에는 바다에서 다시 육지로 떠내려 온 작은 빙하들이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 누군가에게는 장노출 사진을 찍을 최고의 장소이자 깊은 생각에 잠겨있을 장소이면서,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는 자연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에게 영감과 경험을 주니, 참으로 ‘다이아몬드’ 비치라는 이름이 걸맞지 아니할 수 없다.
화합의 장
동부 세이디스 피요르드를 지나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데티포스로 향한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외계인이 검은 액체를 마시고 분해됐던 바로 그 폭포다. 경치를 감상하며 산 넘고 물 건너다보니 어느덧 주행거리는 700km를 돌파했다. 도로 상황을 보여주는 앱을 켜보니 데티포스로 향하는 한쪽 길은 통제 되었고, 다른 길은 열려있지만 미끄럽다는 표시가 뜬다. 아이슬란드의 자연은 혹독하다. 겨울은 특히 그렇다. 강풍으로 하나밖에 없는 1번 국도가 통제되는가 하면, 내륙 지방은 눈이 오는 10월 초면 통행이 금지된다. 대부분 사람은 무사히 여행을 마치지만 어떤 사람은 사고를 겪곤 하는데, 대표적으로 차로 눈길을 지나다 미끄러져 구석에 처박히는 것이다. 평지일지라도 한번 빠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견인차를 불러야 하는데, 한번 부르면 비용이 20~50만원을 호가한다. 하지만 비용을 내지 않고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다른 여행자의 도움을 받는 것.
데티포스가 가까워졌을 무렵 여러 대의 차가 앞에 멈춰 서있었다. 추돌사고라고 생각했다. 비상등을 켜고 주위를 살폈는데 사람들이 한 군데에 모여 있었다. 사고가 났다. 그런데 추돌사고가 아니라, 한 차가 눈길에 빠져서 사람들은 그 차를 밀어주고 있었다. 심지어 운전석에 앉아 열심히 가속 페달을 밟던 여자는 차주가 아니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뒤에서 밀고 끌어준 덕에 차는 무사히 밖으로 나왔다. 생면부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몸을 기꺼이 내준다. 언어가 통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감정을 공유하니까. 이윽고 차가 나오면 다 같이 한바탕 웃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 제 갈 길 간다. 유럽 최대의 폭포와 함께 지구 화합의 장을 보았다. 그 감동을 가슴에 안은 채 북부로 향했다.
무너진 동경
그렇게 오늘의 목적지인 아퀴레이리를 향해 가다 풍광에 취해 차를 잠시 세우고 그 순간을 즐겼다. 그런데 차를 보니 뭔가 이상하다. 며칠 전 전조등 하나가 고장 났으나 나머지 하나로 달릴 수 있어 일단 여행을 계속했는데, 나머지 전조등까지 망가진 것이다! 아,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생겼다. 일단 무엇을 해야 하지? 정비소에 가야 한다. 정비소에 가려면, 그래. 렌트 업체에 연락하자! 그렇게 네 번의 통화 시도 끝에 긴급 지원부서와 연락이 닿았고, 미바튼이란 곳에 있는 정비소를 찾아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자로 주소를 받은 후 눈이 멀어버린 레니게이드와 함께 정비소로 향했다. 도착하니 커다란 창고형 정비소에 세 명의 아이슬란드인이 작업을 하고 있다. 들어가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고 묻자 자기는 모르겠다고 그냥 기다리라고 한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재차 들어가 언제쯤 가능한지 물었더니, 이번엔 화를 내며 나가 있으라고 윽박지른다. 그동안 만난 아이슬란드인은 전부 친절했기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빨리하라고 재촉한 것도 아니고, 언제쯤 가능한지 물어볼 수는 있지 않은가! 아이슬란드인에 대한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기 시작한다. 아이슬란드는 모든 것이 완벽한 내 꿈의 장소였기에 그 실망감은 더 컸다. 그렇게 30분을 더 기다려 정비공이 나오더니 보닛을 열고 전조등을 살핀다. 30초 정도 봤을까, 자기네 정비소에는 맞는 전구가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란다. 아니! 해가 짧아 돌아다닐 시간도 부족한데, 이 렌트 업체는 자기네 차를 어디서 정비할 수 있는지조차 파악이 안 된다는 말인가. 분노를 삭이며 상향등과 비상등을 이용해 주행을 시작했다. 속칭 긴급 지원부서는 다음 도시에서 갈수 있는 정비소를 알려주겠다며, 내일 다시 연락하라더니 퇴근해버렸다. 아이슬란드에 대한 동경이 또다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알고 먹어도 맛있고, 모르고 먹으면 더 맛있다
그렇게 차를 달려 북부 제2의 도시 아퀴레이리에 도착했다. 삼면 이상이 바다인 나라에 가면 반드시 해산물을 먹어봐야 한다. 맛집으로 소개된 피시 앤 칩스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청난 튀김 냄새가 코를 강타한다. 마치 이 집은 맛집이 확실하다는 말을 코로 듣는 기분이랄까? 무엇을 시킬지 고르던 중 특이한 게 있어 설명을 보니, ‘크리스피 도리토스 코드’라는 게 아닌가. 도리토스가 내가 아는 그 도리토스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일단 신기한 메뉴가 있으니 시켜보기로 한다. 십여 분 후, 아주 크고 두꺼운 피시 앤 칩스가 나왔다. 마치 그 두께가 스테이크만큼 두툼하고 살이 부드러워 한 입을 베어 무니 마치 고기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더라. 필자가 시킨 음식은 겉보기에는 마치 돈가스처럼 생겼는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게 치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맛있었다. 한참을 먹다가 이 고소함과 바삭함의 근원이 궁금해 동행에게 물어봤는데, 겉면을 감싼 조각이 도리토스란다. 응? 도리토스? 내가 아는 그 과자 도리토스? 그렇다. 내가 도리토스 같은 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일부로 말을 안 했다고 한다. 과자랑 생선을 함께 튀기다니. 찰나의 침묵이 흐른다. 그제야 입안에 도리토스 냄새가 난다. 아,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보았을 때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역시 아이슬란드
다음 날 아침, 가득한 먹구름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나를 맞이한다. 먼지 한 톨 없는 맑은 공기를 원 없이 들이켠 후 다시 정비소를 찾아 떠난다. 정비소는 10시에 연다고 했고 짧은 거리에 있어 마음 편히 출발했으나, 역시 우리의 렌트 업체는 또다시 내 여행에 흠집을 냈다. 10시에 연다는 업체는 11시가 되어도 열지 않았고, 커피를 마시며 차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0분을 더 기다렸더니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아무리 봐도 직원이라기보단 손님 같았지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다가갔다. “혹시 여기서 일하세요?”, “아니요. 혹시 도움 필요한가요? 그럼 따라오세요.” 아, 이유는 없지만 한줄기 따스한 빛이 내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것 같다. 건물 뒤편으로 들어가니 한 남자가 우리를 멀뚱히 바라본다. 둘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차를 가지고 들어오란다. 빙고! 들어가며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니 12시에 오픈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지금은 열한 시 반이다. 기쁘면서 화가 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지금이 바로 그때다. 문 앞까지 다가가자 그는 나를 차에서 내리게 하더니, 내 운전을 못 믿겠다며 직접 차를 가지고 정비소 안으로 들어간다. 내리면서 농담이라며 너스레를 떠는데 아마 그보다 더 편안한 농담은 세상에 없을 거다. 보닛을 열고 전구를 간다. 이 모든 작업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작업은 금방 끝났지만,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많은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키우는 개와 함께 뛰놀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이별의 악수와 함께 자리를 뜨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잃어버렸던 아이슬란드에 대한 내 감정은 그새를 못 참고 다시 활짝 만개했다. ‘그래, 역시 아이슬란드야.’
오로라, 제발 내게로 오라
산 넘고 물 건너 링로드 한 바퀴가 어느덧 끝나간다. 수도인 레이캬비크에 다시 도착할 때까지 불행히도, 오로라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구름 앱을 켠다. 보아하니, 일부 지역에 구름이 별로 없고 오로라 지수도 꽤 높았다.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는 오로라가 필요했다. 기대와 불안을 안고 그로타 등대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했다. 날이 어둑해지자 신의 커튼, 오로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씩만 일정을 미뤘어도 매일 오로라를 봤을 텐데. 떠나온 날 그 지역에 엄청난 오로라가 떴다는 이야기를 9일 동안 들었으니 마음속에 얼마나 맺혔겠는가. 그래서 더 간절하고 더 아름다웠다.
오로라를 보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보기 힘들다는 얘기다. 아이슬란드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경악할만한 구름의 양 덕분에 난이도는 몇 배로 올라간다. 역대 최고의 오로라가 뜬 날에 동부에선 구름에 가려서 못 보고, 남부에선 인생에 남을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구름 없는 지역을 찾아 이동하는 게 중요하다. 한참을 달려 구름 없는 지역에 도달하고, 하늘에서 초록빛 커튼을 펄럭이는 순간 인생에 다시없을 황홀함을 맛보게 된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거나, 또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순간을 음미한다. 혹시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보지 못했더라도 너무 슬퍼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당신이 아이슬란드를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