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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노인전 초록(崔老人傳 抄錄)
박 태 원
최노인이 매약행상(賣藥行商)을 다니기도 이미 삼십 년이 가까웁다. 스스로 경오생(庚午生)이라 일컬으니까 올에 예순아홉이 분명하거니와, 그 얼굴은 볕과 바람에 까맣게 타고, 또 가난과 고생으로 하여 주름살은 깊고 굵었으므로, 모르는 이들은 그가 자기네들 곁을 지나도, 그저 세상에 흔하디흔한 그러한, 약장수거니―― 하여,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모양이나, 한번 알고 보면, 분명히 그들은 신기하게 놀라고 말 것이, 이 최노인은 정녕한 한국시대(韓國時代)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까짓 거, 지금 와선, 뭐어, 자랑이 될 것두 없는 게지만, 머리 하나래두 남버덤 먼점 깎긴 했지.”
그도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조선 안에 삭발령(削髮令)이 내린 것이, 그게 을미년(乙未年)이었으니까, 갑오년(甲午年)에 일본으로 건너가자 즉시 머리를 깎은 노인은, 그것만으로도 남들보다 일 년 먼저 개화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관비유학생으로 뽑힌 사람이 도합 백여 명 인데, 박영효에게 인솔받아 서울을 떠날 때가 장관이었습니다. 시방 같으면야, 뭐어, 노조미*니, 히까리*니 허구, 급행차가 있는 세상이라, 타기만 허면 그대루 뚜루루 부산까지 데려다주구 게서 배 타면 그만인 게지만 그때루 말허면 경부선은 이를 것두 없구 경인선두 개통 안됐을 때니, 천생 제물포까지 걸어가야만 헐 백게…… 그래 백여 명이 팔십 리 길을 걸어가는데, 노돌강변 백사장에 이르자, 박영효가 우릴 삥 둘러 세놓구, 일장 훈시가 바루 다음 걸앴으럿다. ‘여러분 중에는 양반의 자제두 있구, 중인의 자제두 있구, 또 서민의 자제두 있구, 그렇게 형형색색이겠지만, 지금 세상은 개화허는 세상이라, 예전같이 반상이나 가리구, 문벌이나 찾구, 그러던 때와는 다르단 말이야. 누구든지 그저 학업에 힘써 저만 잘허구 볼 말이면 그 사람이 곧 양반인 게요, 비록 좋은 가문에 태어난 자제래두, 원래 타구난 재주 없구, 학업에 힘쓰지 않을 말이면, 그게 곧 상민이라, 여러분은 이걸 명심해야만 되우.’ ……·그러지 않었겠소? 지금은 누구나 헐 줄 아는 말이지만, 당시에 이처럼 말허기가, 그게, 쉰 일이 아니거든. 박영효가 그이가, 그, 인물입니다.”
‘인물’이기로 말하자면, 노인의 기억 속에 복택유길(福澤諭吉)의 존재가 또한 뚜렷한 것이었다.
“동경으루 건너가자, 한국유학생은 모조리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을 했는데, 알아보니까, 지금두 그 학교가 있다드군그래. 헌데, 호옥 아는지 모르겠소마는, 당시 총장이 복택유길이라, 이이가 또 인물이거든. 우리 백여 명을 차례루 하나씩 불러다가 성명 삼 자에 자(字)까지 묻고 나서, 다음에 ‘무엇을 배우러 오셨오?’ 그러드란 말이야. ‘예에, 정치학을 배우러 왔지요.’ ‘예에, 나두 정치과에 들어가겠소.’ ‘예에, 정치과요.’. ……·허구, 백여 명 유학생이 여출일구*루 정치과를 지망허는데, 복택선생두 일변 어이가 없구, 일변 딱허구, 그랬든 모양이라, 후우 한숨을 쉬고 나서, ‘그야 나라 정살 해나가는 사람도 물론 있어야 되겠지만, 당신네들같이 모처럼 뽑혀온 유위한* 청년들이 모조리 정치가가 되기만 원한다는 건 옳지 않은 생각이오. 사농공상이라 하여, 자고로 선비를 그중 으뜸에 놓고, 장사치를 그중 뒤로 돌렸으니, 선빈즉슨 말하자면 정치가라, 그래 모두 그 까닭에 그걸 원하나보오마는, 우리 일본이나, 귀국이나, 다 함께 구미선진국(歐米先進國)을 따라가려면, 정치만 가지고는 안될 말이라, 똑 크게 공업을 일으키고, 실업 방면으로도 활약을 해야 할 노릇인데, 자아, 경제과 같은데 들어가 공부할 생각은 없소?’ … … 일껀 일깨줘두, 그저 한결같이 ‘난 정치과유.’ ‘나두 정치과유.’ ……·지금 생각허니, 딴은 복택선생의 말이 옳은 말이라, 당시에 그처럼 아무것두 모르구 날뛰든 걸 생각헐 말이면, 지금두 제풀에 낯이 다 뜨겁습니다.”
그래, 모조리 정치과에 학적을 두었으나, 명색이 대학생이지, 우선 ‘아이우에오, 카키쿠케코’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들에게 선생의 강의가 이해될 턱이 없었다. 그래 대부분의 학생은 학업에 흥미를 못 가진 채, 툭 하면 학교로 향할 발길을 공관(公館)으로 돌리고 그랬다.
“당시의 한국공사가 고영희렸다. 우리가 가면 반갑게 맞어주지. ‘별고들 없었우? 공부들 잘 허시오?’ ……·똑 ‘허우’지, 해라는 안허는 것이, 우리가 벼슬은 못했지만, 그래두 선비들이니까……· 그래 인사가 끝나면, 과일 깎어 내오구, 차에다, 나마까시:*에다, 아주 대접허는 품이 대단허거든. 그래, 그통에 툭허면 공관으루들 놀러가는데, 그게 온, 한 달에 한 번이든, 보름에 한 번일세 말이지. 이건 거의 연일 가다시피 허니, 누가 좋아 헐께야. 그래, 나중에는 그러드구면. ‘본국에서 무슨 별난 소식이래두 있으면 기별을 해주께스리, 그때나 오지, 별일 없이 이렇게 매일 올 껀 없소’ 허구……·.”
물론 본국에서 별난 소식이 그처럼 쉽사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그래 도무지 공관으로 놀러갈 수가 없게 된 유학생들은, 그 대부분이 이번에는 전혀 주색에 탐익 하였다.
“때가 어느 때라구, 나라에서 모처럼 뽑혀 간 몸으로서 주색에만 빠져, 도무지 학업에는 힘을 쓰지 않었든 겐지, 온, 참, 참괴허기* 짝이 없소.”
하고, 최노인은 한숨을 쉬는 것이나, 그 생활도 일 년 이상을 더 가지 못하여 그들의 대부분은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본국에서 ‘별난 소식’으로 을미정변(乙未政變)을 전하여 오기 때문이다.
그때나, 이때나 주변이 없고, 약삭빠르지 못한 최노인이다. 유학이라고 단지 일 년에 지나지 못하였고, 그나마 교실에는 별로 나가지를 않았던 터이라 생각하면 사실 우스운 것이었어도, 그래도 수많은 청년들 속에서 특히 선발되어, 관비로 일본에까지 보냄을 받은 몸으로서, 돌아오자 다시 경무청의 일개 순검*이 된다는 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최노인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다시 순검 복색을 하고, 이번에는 경무청 에보다도 오궁골 갈보집에를 좀더 빈번히 드나들었다.
당시, 순검하면 갈보집에서 세도가 바로 대단한 터에, 최노인은 더욱이 일본 유학을 다녀나온, 이를테면 ‘신지식’이라, ‘화륜선’ 탄 이야기, ‘기차’ 탄 이야기만 하여주어도 갈보들은 아주 미쳤다.
특히 기차를 설명함에 있어, 그것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한 쾌속도의 것인가를 표현하여,
“기차길 가루, 쭈욱 전봇대가 늘어섰는데, 전봇대와 전봇대 상거*가 여러 수십 간이거든. 헌데, 기차가 한참 신이 나게 빨리 달릴 때, 창에서 이만침만 떨어져 앉아가지구 밖을 바라볼 말이면, 흡사 기차창이 촘촘허게 창살을 해 낀 것 겉다니까. 웨 그런구 허니 기차가 하두 빨리 달리는 통에, 그 여러 수십 간씩 떨어져 섰는 전봇대가 그렇게 그냥 자주자주 뵈니까.”
그러한 황당무계한 말로 갈보들의 정신을 현황하게* 하여놓던 최노인이었 다.
그 이야기와, 또 한 가지, 일본 유학시대에, 밤중에 방 안에가 요강은 없고 그렇다고 낭하 저 끝까지 변소를 찾아가기는 싫고 하여, 곧잘, 다다미를 쳐들고 그 밑에다 오줌을 누던 이야기와, 그러한 것으로 오궁골 갈보를 녹이던 최노인은 경무청 순검생활 십구 년 후에, 경성감옥 간수를 다시 이태 다니고는, 방향을 돌리어 ‘노돌정거장’의 ‘출찰괘’가 되었다.
“출찰게면 게지, 웨 괘는 괩니까?”
하고, 모르는 이가 물으면,
“어디 게라구 곈(係) 줄 아슈? 괘야, 괘(掛). 시대가 다르니까. 지금은 게라구 헐 것두, 그 당시는 괘거든.”
하고, 당시와 지급이 다르다는 예로, 대신의 칭호로부터 동리 이름에 이르기까지, 대체 섣불리 물은 이가 그만 진절머리가 나도록 늘어놓는 것이었다.
출찰괘를 한 일 년 다니다가, 노인은 이번에는 ‘나무시장’ 표 파는 사무를 잠시 맡아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반년 남짓에 그만두고, 다음에 들어선 매약행상업으로 어언간 삼십 년 가까이 지내오는 그다.
“가만히 둘러보면 나만 이 꼴이지, 당시 유학생이 거개 잘된 모양이거든. 아, 참, 중추원의 모모헌이라든지, 실업계의 모모헌이가 왕시*에 다아 내 동창이니·…‥”
자못 감개가 무량하여 하는 것을,
“아, 지금이래두 서루 왕랠 허시면 좋지 않으세요?”
하고, 듣는 이가 다시 객쩍은 말을 하기라도 한다면, 노인은 금시에 정색을 하고 타일렀다.
“아, 누가? 내가? 내가 그 사람들허구 상종을 헌다?……· 온, 어림두 없는 말……· 여보. 사람이 서루 상종을 헌다는 게, 그게 그렇습니다. 둘이 다아, 권세가 있으면 권세가 있다든지, 부자면 부자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한편은 돈이 있구 또 한편은 지위가 당당허다든지……· 어떻게 그렇게 서루 저울질을 해서 저울대가 핑핑해야만 상종이 되는 게지, 한편이 무엇으루든 너무 기울고 본즉슨 상대가 안된단 말이야. 가만히 두구 보구료. 세상형편이 꼭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연히 막걸리사발을 기울이는 것이다.
막걸리를 자시기로 말하면, 최노인은 이제는 오직 그것이 그의 앞에 남아 있는 유일한 낙인 것이었다.
“내, 경오생이오. 살 만큼은 살었지, 기 쓰구 더 살면 뭐얼 해? 그저 얼핏 죽어 없어져야지. 사실, 오래 살려면 오래 살 수나 있나? 오늘 아니면 낼이구, 낼 아니면 모렌데……·.”
하고 입버릇같이 뇌는 최노인으로서 매일같이 부지런히 약가방을 들고 문밖으로 나서는 것은, 오로지 막걸리값을 벌기 위하여서이었다.
그는 이미 알코올에 중독이 되었다 할밖에 없는 것이, 새벽에 동편만 훠언히 트고 볼 말이면 곧 약방을 나서 털보집에서 우선 해정술을 한잔 마시는 것을 위시하여, 거의 정확하게, 반 시간만큼씩 술집을 찾는 것이다.
물론, 최노인이 가는 곳은 새문 밖에만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나, 가령 오늘도 구파발 방면으로 향할 말이면, 그는 새문턱을 넘어서부터 단골처 약방과 단골처 술집을 번갈아 들르기에 바쁘다.
“안령하시요오? 온, 올해두 가물려나? 웬 날이 이렇게 연일 푹푹 찌기만 허누·……· 약 논 지 오랜데, 오늘은 아주 가방 털어놓구 가리까?……· 우선, 영신환, 아주 쉰 봉만 받아두지. 이렇게 덥구야 어른 아이 헐 것 없이 탈들 안 나구 배기나?……· 백고약두 없나본데…… 글쎄 받어두면 팔린다니깐 그러는군. 당장 안 팔려두 구색은 맞춰놔야만 헌다니까……· 돈이야 이따 줘두 그만이구 후제* 줘두 그만이지……· 그럼, 이따 들어갈 길에 뵙시다.”
한편으로는 외상으로 우선 약을 놓고, 조금 가노라면 무학재고개 못 미처 선술집이 눈에 익어, 이번에는 노인 편에서 취하느니 외상술이다.’
막걸리 한 사발에, 간장에 졸인 퓻고추나 한 개 집어 먹고,
“꾸다요오. 내, 이따 들어갈 길에 다시 들르지.”
손등으로 입을 쓰윽 씻고, 다시 가는 길이 바쁘다. ‘꾸다’란, 노인의 설명에 의하면, 외상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찌하여 그러한고 하니,
“술은 먹꾸, 돈은 없다.”
그래 ‘꾸다’라는데, 이것은 전혀 자기 혼자서 생각하여낸 말이라 한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외상약을 놓고, 한편으로는 외상술을 먹으며 무학재고개를 넘어, 홍제 내리, 외리로 하여, 녹번이 고개를 또 넘어 구파발까지 가면, 오후 두어 시가 착실히 된다.
이제는 게서부터 되돌아 들어오는데, 외상약 놓은 집에서는 외상값을 받고, 외상술 먹은 집에서는 다시 한 사발 탁배기를 들이켜고 동시에 아까 먹은 ‘꾸다’값까지 얼러서 술값을 치르고…… 그러며 분주히 종로에 있는 약방까지 돌아오는 것이다.
최노인은 이처럼 아침에 약방에서 나와 밤에 약방으로 돌아갈밖에 없었던 것이, 그에게는 돌아갈 집도 맞하줄 처자도 세상에 있지 않았던 까닭이다.
딸은 있었다. 그러나 최노인에게 있어서 딸은 자식이 하나었다. 그는 기회 있는 대로 딸의 욕, 사위 욕을 하였다. 그것도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이 맹랑하기는 한 것이, 애초에 그는 딸만 형제를 나서 기르며, 늙은 마누라와 후사를 걱정하던 끝에 마침내 큰딸에게 데릴사위를 구하여 집안에 끌어들였던 것이라 한다. 그래, 몇 해고 지내왔던 것이, 일곱 해 전에 마누라가 그만 돌아가고 말자, 어떻게 주객이 전도되어, 집안에 주장 서는 것은 원래 남이었던 사위요, 자기는 슬그머니 붙어먹고 사는 늙은이처럼, 그렇게 자리가 뒤바뀌어진 사실이다. 그도 그럴밖에 없는 것이, 딸년도 그냥 딸년일세 자기 어버이 위할 줄도 아는 것이지, 서방이 생기고 볼 말이면, 어버이보다 제 서방 알기가 더하여, 그래, 눈꼴사나운 일도 많이 당하고, 나중에 홧김에 견디다 못하여, 너희들끼리 재미나게 살아라, 난 이 집에 다신 안 들어오겠다―한마디로 집을 나서, 이내 종로 양약국으로 찾아들어왔던 것이 아주 늘러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툭하면 사위를 욕하고, 딸을 괘씸히 생각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면 또 그와 동시에 죽은 마누라 생각이 간절한 것도 어쩌는 수 없는 일이라,
“옛말이 다아 옳지, 다아 옳아. 어느 효자가불여악처(孝子不如惡妻)라니……·효도스런 자식이 고약한 아낙만 못하다. 옳은 말이지 옳은 말이야. 사실 제아무리 효자, 효자, 해두, 그래, 그놈이 제 애비 술취해 자는데 오줌 마려운 눈치채구, 이불 속에다 요강 밀어넣어준답띠까? 어림두 없지 어림두 없어. 그저, 마누라밖엔 없습니다. 없에요.”
밤낮 약주만 자시는 이라. 드는 예도 그러한 것이 많았으나, 하여튼 그러하였던 까닭에, 큰딸은 이를 것도 없이, 작은딸이, 그럼 제 집에 와 있으라 그렇게 입이 아프게 말하여도 그는 종시 듣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작은딸네 집에는 옷을 갈아입으러, 달에 한두 차례는 들렀다. 작은사위는 영등포에 집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노인은 그곳을 나가기 위하여서는 하루 장사를 쉬어야만 하였다.
약가방을 안 들고 나간 그가, 새 옷을 번듯하게 입고, 술이 얼근히 취하여 저녁에 돌아올 때, 약방의 젊은 점원은 으레 한마디 하였다.
“따님한테 다녀오시는 길이시로군요.”
대개 이 화제가 노인에게 불쾌한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응, 그, 근처 들를 데가 있어서……·.”
하고 최노인은 어름적거리러* 드는 것이나. 밤에 자리에 누울 때, 노인에게 당치 않은 양말대님이 그의 마른 장딴지에 걸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점원은 다시 짓궂게 한마디 한다.
“그, 웬 겁니까?”
“뭐얼, 저어……·.”
“새건 아닌가 본데……· 오오, 서랑*이 자기가 허든 걸 디린 게로군요?”
그럼,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대신에 최노인은 그것을 가지고 다시 둘째 사위마저 욕하러 든다.
“그눔이 아주 날탕이지, 날탕이야. 양말대님이 어디 이거 하난 줄 아우? 멀쩡헌 게 세 개 네 개씩 방바닥에가 뒹굴지. 있건만 또 사구, 또 사구……· 사실 그눔이 어디 그럴 형센가? 철도국 직공으루 댕기는 놈이……· 또 게을러 빠졌죠. 오늘두 나가보니까, 대가리를 봉대루 싸매구 드러눴기에 웨 그랬냐니까, 술을 너무 먹구,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그랬다든가? 그래 오늘째 연 사흘 쉬는데, 그래두 일급이 아니라 월급이 돼놔서 며칠을 쉬든 간에 상관이 없다는구면. 온, 똥을 자배기루 쌀 놈……”
“아, 그래두 서랑이 최주사껜 약주 대접만 잘허나보든데 그러세요?”
“약주 대접이 무슨 약주 대접……”
“웨 이러십니까? 괜시리……· 다아 알구 있는데……·.”
“응, 오오, 참, 먹구 가라구 소주 십오 전어치 사다주드.군. 온, 신에두 붙지 않게…… 십 전이면 십 전이구, 이십 전이면 이십 전이지, 십오 전어치란 뭐야” 온, 고런 안달이·……·.”
그러고 그는 다시,
“아이, 이 꼴 저 꼴 안 보려면, 오늘 밤 안으루래두 죽어버려야……”
하고,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나, 그는 그래도 윤치호옹보다는 좀더 오래 살 것을 은근히 계획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여,
“근대에 사회적 인물로는 내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앙하였습니다. 월남선생 돌아가셨을 때는 내가 영구를 뫼시구 남문 밖까지 따라갔었으니까……· 월남선생 돌아가신 후의 인물로는 윤치호 선생인데, 그분 돌아가시면 내 또 영구 따라 나서야지.”
하고,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분장』 임시증간 7호(1939. 7); 『박태원단편집』 (학예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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