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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비전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예예
성 경 : 갈 4:12-15절
제 목 : 모든 저주에서 속량받았습니다
일 시 : 2024. 3. 24.
갈4:12-15/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꿈을 꾸더라도 그 꿈을 바르게 해몽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과거에 애굽의 바로 왕이 너무나 중요한 꿈을 꾸었지만 그것을 해석할 줄 몰라서 고민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꿈을 해몽해 줌으로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해방되었으며, 또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세계적인 꿈을 꾸었으나 해석해 줄 사람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것처럼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올바른 성경해석이 중요합니다. 또한 노아가 물로 세계를 심판하는 홍수가 임했을 때 방주를 만들고 역청으로 발랐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밖에서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완전한 구원을 무너뜨리고 깨뜨리는 어떤 잘못된 이론도 우리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병들게 하셨다는 잘못된 성경해석을 거부함으로 악한 영이 병을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요19:30절과 말씀과 갈3:13-14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 라고 말씀하시고 머리를 숙이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셔서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갈3:13-14절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저주에서 속량되었습니다. 더 이상 저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잘못 해석함으로 여전히 저주 가운데 살아가도록 만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모든 권세와 능력을 빼앗긴 원수마귀가 우리의 삶에 저주를 가지고 오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서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하나님이 주신 질병이 아니었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므로 여전히 저주 가운데 머물러 있게 만드는 잘못된 성경해석에 대해서 다루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도 하나님께서 치유하기를 거부하신 병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늘날 우리도 모든 병에서 치유받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전체와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병이 아니라 박해를 조장하려고 사탄이 보낸 악마 같은 사자(박해자)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병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4장을 잘못 해석합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바울이 눈에서 진물이 흐르고 부어 오르게 하는 고대 아람 족의 눈병을 앓고 있었고, 끊임없이 눈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론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그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갈4:12-15/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1. 먼저 육체의 약함이라는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갈4:13절에 나온 육체의 약함이라는 용어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그냥 약함이 아니라 육체의 약함이었습니다. 갈4:14절에서 똑같은 용어를 다시 사용했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두 구절에 나오는 약함이라는 단어를 보고 바울에게 병약함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4:13절에서 한 말을 주목하십시오. 갈4: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처음에 라는 단어입니다. 처음에(는)at the first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치유하지 않으신 것이 오랜 기간이 아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4: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십시오 지금 바울은 눈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육체의 약함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육체의 약함이 바울이 평생 앓았던 진물이 흐르고 부어 오른 눈병이었다는 이론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육체의 약함이 바울이 평생동안 지속된 눈병이었다는 이론은 근거가 빈약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정확한 해석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사도행전 1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평생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그런 기적을 본 사람들이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행14:11-12/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숭배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어제는 그를 신이라 여기던 그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분노하였습니다. 행14:19-20/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돌에 맞아서 죽은 줄로 알고 버려진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고후 11장에서 언급합니다. 고후11:25절에 한 번 돌에 맞고 라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바울이 죽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았다 해도 그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죽은 줄로(행14:19)로 알 정도로 거의 죽은 상태였습니다. 바울이 죽었든지 아니면 거의 죽은 상태가 되었든지 간에 성경은 제자들이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버려진 바울의 주위로 둘러서서 지켜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일어나서 그 성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약32-81km(정확한 거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떨어져 있는 더베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그 다음 마을로 걸어서(또는 말을 타고)가서 다음 날 거기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행14:20-21).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라는 도시는 전부 갈라디아 지역에 속한 곳들이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처음에 너희는 내 육체의 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가엾게 여겼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너희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다(갈4:15)라고 편지를 써 보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어떤 종류의 고대의 눈병이 있었다는 근거 없는 이론을 지어내기보다는 갈4장이 언급하고 있는 시기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어서 버려진 후 살아나서 바로 다음날 약 32km가 넘는 도시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던 때와 정확히 같은 시기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정직한 성경해석입니다. 바울이 죽도록 돌에 맞은 때로부터 다음 도시에서 말씀을 전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24시간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전날에 바울의 머리를 수 차례 강타했던 돌로 인해 그의 눈이 상처를 입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까요? 지극히 당연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의 능력이 바울의 몸에 역사한 것은 분명하지만, 바울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아마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바울은 이 육체의 약함이 그를 괴롭게 했던 것은 단지 처음에 뿐이었다고 표현합니다(갈4:13). 성경 구절끼리 비교하여 바울에게 눈의 문제가 있었다면 전날 도시 사람들에게 돌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합니다. 아마도 돌에 맞은 눈이 퉁퉁 부어있었지만 시간이 걸려서 완전히 치유되었고, 사도 바울은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갈4: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일시적으로 눈에 문제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2) 그리고 사람들이 바울에게 눈병이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라는 말씀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 나라들에서 간이라도 빼서 줄 수 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간이라도 빼어서 줄 수 있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여러분이나 내가 간이 나쁘기 때문에 대신 빼 준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상대가 나를 위해 어떤 것도 희생하려고 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사용하는 비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라고 바울이 말한 것은 그의 눈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바울이 전날 돌에 맞은 것으로 인해 눈에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 해도, 그 손상은 일시적이었을 뿐입니다. 바울은 갈4:13절에 나온 처음에(는)라는 말로 그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3) 또한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눈병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6장을 거론합니다.
갈6: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이 구절을 근거로 바울이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 거의 장님수준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 크기가 약8-10cm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큰 글씨로 써야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고,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글씨가 큰 글씨였다고 한다면 갈라디아서가 얼마나 커야했는지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갈라디아서를 운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큰 글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바울이 한 페이당 하나 내지 두 글자만 썼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 얼마나 많은 단어가 있는지 한번 세어보세요.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됩니다.
헬라어에는 크기나 분량을 가리키는 여러 단어들이 있습니다. 갈6:11절에 큰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각 단어의 글자가 얼마나 큰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의 분량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에게 써서 보낸 이 편지, 즉 서신서 중에서 이번 편지는 아주 길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책을 보면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네 페이지 정도로 작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글씨를 표준서체로 12 포인트 정도로 키워서 매 줄마다 띄우고 A4용지로 인쇄활 경우에는 여덟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가 다른 서신서에 비해서 길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큰 글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써서 보냈던 각각 단어의 모든 글자의 크기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마23:24)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눈병이 있었다고 말하기 위해서 이 성경구절(갈6:11)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성경해석의 모든 규칙을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갈4장에서 언급되었듯이 바울의 눈에 어떤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전날에 그가 돌에 맞아서 죽은 자로 버려졌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눈에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어떤 종류의 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박해를 조장하려고 사탄이 보낸 악마 같은 사자였습니다. 우리는 박해로부터는 속량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질병으로부터는 속량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병으로 해석하는 것은 편의주의 신학입니다. 그런 해석은 우리에게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냥 육신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치유를 받지 못할 경우 우리는 글쎄요, 그 질병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 같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 질병을 감내하기 원하십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회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믿음으로 활동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권세를 사용하고, 그분의 능력을 행사하며, 그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많은 책임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주님께서 주신 책임을 쉽게 회피하는데 대가가 되었습니다.
2. 디모데 목사에게 물을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치유하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라는 진리를 반박하려는 의도에서 딤전 5장을 인용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딤전5:23/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저는 실제로 사람들이 이 성경구절에 근거해서 디모데에게는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 만성질환이 있었으며, 바울의 오른팔 같은 디모데 목사도 치유되지 않았다면 우리를 치유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경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딤전5:23)은 성경 중에서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딤전5:23절이 디모데를 언급하면서 그의 위장을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말하는 대목은 신약성경전체 가운데 유일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과 비교할만한 다른 구절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디모데에게 어떤 만성질환이 있었다는 것을 포함해서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가설(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설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증거로서 이 성경구절(딤전5:23)을 제시하는 것은 부정확하고 부정직한 성경해석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디모데가 어떤 병을 앓았든지 그것은 위장의 문제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 3세계 나라를 여행하다가 그 지역의 물을 마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바로 위장에 탈이 날 것입니다(물갈이를 합니다). 멕시코에서는 그것을 몬테수마의 복수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마시기에 부적합한 물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다른 나라를 여행한 많은 사람들이 물을 마셔서 배탈이 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진저리를 치며 이야기합니다. 그곳의 물이 마시기에 안전하고 깨끗하지 않다면, 차라리 물 대신에 다른 것을 마시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을 마시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물이 그의 위장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 대신에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포도주를 쓰라는 말은 포도주가 약을 대신해서 처방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포도주에는 약 성분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디모데의 위장문제를 위해 약을 복용하라고 조언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디모데의 위장 문제는 오염된 물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물을 마시지 말고, 대신에 포도주를 마셔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탄산수가 있었다면, 바울은 물을 마시지 말고 대신에 탄산수를 마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탄산수는 없었고 포도주만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디모데에게 치유를 받지 못한 만성질환이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만 물을 마시지 말라. 그것이 네 위장에 탈이 나게 하는 원인이다. 물 대신에 다른 것을 마셔라 라고 말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외국으로 선교여행을 할 때 그 지역에서 공급되는 수도꼭지에 나오는 물은 마시지 말고 대신에 끊인 물을 마시든지, 탄산수를 마시고, 그 지역에서 나오는 수도 물은 마시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바입니다.
3. 사람들은 다음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치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딤후4:20/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의 동료 중 한 사람인 드로비모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다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일리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치유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만큼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단지 어떤 사람들이 병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아프기를 원하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드로비모가 사도 바울과 함께 여행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가 치유받을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추론합니다. 그들은 그가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치유되었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TV 죠수아 목사님의 주위에 있다고 해서 모든 병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치유사역자라고 해도 치유사역자의 믿음으로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서도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이 믿지 않고 거부할 경우에 주님은 그들을 치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드로비모가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이 아니라 드로비모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은 드로비모가 밀레도에 남겨진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아마도 드로비모는 믿었지만, 그의 몸에 치유가 나타나려면 일정기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치유가 드로비모의 몸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 먼저 떠났던 것입니다. 드로비모는 치유되어 나중에 바울과 합류했거나 아니면 다른 식으로 사역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드로비모가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아서 바울이 그를 그곳에 병든 채로 놔두고 떠나기를 결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들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치유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징후로 인해 바울이 드로비모를 밀레도에 병든 채로 놔두고 떠났다고 해석할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4.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이해하여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한 사람은 아플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롬8:28절 즉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떤 사람들이 병들어 아프게 된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실수와 잘못으로 병이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 경우를 두고 마치 하나님이 병을 들게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수로 또는 부주의해서 병이 들더라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병으로 치셨다는 대목이 몇 군데 있지만 그것을 한 번도 축복으로 여겨진 적이 없습니다. 미리암(민12장)과 웃시아 왕(대하26장)둘 다 나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전염병으로 185,000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왕하19장). 주님의 천사가 돌아다니면서 하룻밤 사이에 애굽의 처음 태어난 것들을 다 죽였습니다(출12장). 그렇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병을 두셨지만 그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나병이 덮치기 전에 미리암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말씀이 그녀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은 단지 그녀가 죽어서 사람들이 애도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의 사역은 끝났습니다. 나병은 처벌이요 저주였지, 축복은 아니었습니다.
웃시아는 하나님께서 강력하신 쓰신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병이 덮친 후에는 기름부음이 떠난 것 같습니다. 그는 평생 고통을 당했습니다. 병은 저주지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병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를 아프게 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죽인 185,000명의 사람들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그들에게 어떤 유익도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본보기가 될 수 있었을 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축복은 아니었습니다.
5. 우리는 새 언약 안에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은 병은 유익이 아니라 저주이며, 건강은 축복임을 아주 분명하게 진술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로 사람들을 치신 때가 있었지만 갈3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갈3:13-14/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병과 나병과 질병과 눈멂과 죽음으로 치신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형벌이었고 저주였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 안에서 우리는 저주에서 완전히 속량받고 해방되었습니다.
6.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질병을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글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병으로 징계하시고 비극적인 일로 교정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배우고 깨닫게 됩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딤후3:16-17/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책망하고, 교정하며, 지시하십니다. 병과 질병과 비극적인 일은 주님의 교정시스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훈계하십니다. 다른 어떤 교정수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실 수 있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겸손케 하려고 우리에게 병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괴롭히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에게 맞셨던 장본인은 사탄이 보낸 사자였습니다. 주님은 참고 인내하면서 무엇인가를 배우라고 말씀하시면서 바울을 치유하기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내가 네게 마귀와 사람들이 네 길에 던지는 모든 고초와 박해를 참고 견딜 수 있는 은혜를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모든 문제를 끝장내기 위해서 그들(박해자들)을 죽이고 제거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회심하여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었던 또 다른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가해진 박해를 멈추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에게 고초와 박해를 조장했던 장본인은 악마 같은 사자였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는 바울을 무너뜨려 더 이상 하나님께서 높이 쓰시지 못하게 하려고 사탄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전체와 명백하게 일치하는 강력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병에 걸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 뒤로 숨지 마십시오. 치유에 대한 이런 종교적 편견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오늘 우리에게 병을 주신 것이라는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돌이키십시오. 우리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했던 진리를 정직하게 고려하십시오. 스스로 성경을 찾아보십시오. 원어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와 문맥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스스로 공부해보면 지금까지 나누었던 것이 진리로 증명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질병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질병은 저주입니다. 그리고 모든 저주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되는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 홀로 앉으십시오.
1. 갈4:12-15절을 읽고 바울의 육체의 약함은 언제였는지 생각해봅시다.
◎ 함께 나누십시오.
1. 꿈보다 해몽이 중요한 것처럼 성경해석이 잘못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2. 육체의 약함을 눈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거로 제시하는 성경구절들은?
3. 바울이 디모데 목사에게 물을 마시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4. 드로비모가 병이 든 이유들을 추측해 본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5. 우리는 새 언약 안에 있지만 옛 언약 안에서도 병은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6.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질병과 끔찍한 일로 가르치지 않고 무엇으로 가르치십니까?
1.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2.갈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갈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3.다른나라를 여행할때 마시기에 부적합한 물을 마셔서 위장에 탈이 났기때문 (물갈이)
4.드로비모는 병이 치유될것을 믿었고 그의 몸에 치유가 나타나려면 일정기간의 시간이 필요했을것이고 또는 드로비모가 하나님을 더이상 믿지않아서 바울이 그를 그곳에 병든 채로 나두고 떠나갔을 경우입니다
5.저주
6.성경말씀으로 - 딤후 3:16~17 모든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