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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전체) - 5월 7일(목)
-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부모님께 감사의 선물을 준비합니다.
- 4, 5세 / 카네이션 꽃바구니, 메타세콰이어 목걸이 만들기, 부모님께 그림편지 꾸미기
- 6, 7세 / 카네이션 꽃바구니, 부모님께 그림편지쓰기, 아빠에게 편지쓰기
원예치료사 원장님과 꾸미는 카네이션 꽃바구니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7세 자녀들이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만들어요.
오아시스에 직접 카네이션과 여러가지 꽃을 꽂아 정성껏 만든 사랑의 꽃바구니!!
할머니·할아버지 사랑해요. 건강하세요... 엄마·아빠!! 저를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길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정지역 청계산자락에 위치한 한결어린이집內 자연학습장 1,100여 평의 먹거리 농장 녹색지대는...
신선한 공기와 햇빛이 드는 자연에서 부모와 교사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상상하며 온몸으로 뛰어노는 곳 입니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는 양육원칙 10’ ☞ 여기를 클릭해 보세요.)
자존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 자세로, 자존심은 작은 웅덩이지만 자존감은 넓은 호수로써 존재의 깊이를 가지게 됩니다.
생태어린이 한결어린이들과 호흡하며 소통할수있는 자연 및 생태 전문 교육 프로그램은 교육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낍니다.
청계산자락에 위치한 한결어린이집은 "교실 밖 교실" 문밖이 교실인 원내에 1,100여평의 어린이농장을 운영합니다.
우리가 직접 가꾸고, 수확하여 김장도 해 보고 한결어린이집에선 재래식 김장항아리에
담궈 저장고에서 숙성시켜가며 우리들의 식탁에 오르니 한결어린이들은 편식 하지 않습니다!
준비물 : 다양한 꽃들, 꽃바구니, 오아시스...선생님께서 이른 아침에 물에 담궈 준비하셨어요.
꽃바구니에 오아시스를 넣었어요.
오아시스를 넣은 후 카네이션 꽃의 색과 모양을 탐색하여 보았어요.
오아시스에 카네이션을 먼저 꽂고...
원장 선생님이 옆에 꽂을 잎에 대해 설명해 주셔요.... 이 나무의 이름은 측백나무라고 합니다. 한결어린이집에도 있지요.
작은 꽃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스타라고 합니다.
카네이션 옆에 측백나무와 스타를 꽂아 보았어요.
우리 친구들 스스로 만든 꽃바구니랍니다.
엄마를 드릴 생각에 기분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하늘타리반(7세) 형님들에 이어서 구름송이반(6세) 아우님들의 꽃바구니 만들기도 원장 선생님께서 도와 주셨습니다^^
아빠들!! 힘 나시겠죠!^^
6세 자녀들이 그림편지와 함께 작은 선물로 '차'를 넣어 보내드렸습니다^^
차 한잔 드시면서 우리 아이들의 편지를 보시면 정말 힘이 나실 것 같아요^^어버이날 축하드립니다^^
7세 형님들이 꽃바구니에 넣을 감사 편지와 엄마 아빠를 그렸어요.
편지글이 들어가니 더 예쁜 것 같아요.
하늘타리반(만 5세) 자녀들이 직접 만든 꽃바구니와 카드를 받으시면, 어버이께서 정말 행복하시겠지요^^
아빠 편지에 들어갈 복주머니도 직접 접어 보았답니다.
우리 친구들이 접은 복 주머니에 기분을 좋게 하는 차를 편지와 함께 보내 드렸어요.
우리 친구들이 직접 쓴 편지들입니다....이 편지는 아빠 회사로 부쳐집니다.
하늘타리반(7세) 종일반 친구들과 직접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붙이고. 편지를 부쳐 보았어요.
우표는 어떤 모양이 있었을까? 서로 이야기하면서, 우리 친구들이 직접 우표를 붙여요.
우표를 다 붙인 후 각 지역에 맞는 통에 직접 편지도 넣었어요.
우리 친구들은 아빠가 받으실 편지에 마음이 기뻤답니다. 자녀들의 편지가 아빠 직장으로 배달되거든요^^
*5월의 기념일
5월 5일 어린이날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날로, 어린이들이 바르고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 행사를 합니다.
어버이날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조상과 부모님의 사랑을 기념하며 부모님에게 카네이션을 드립니다.
5월 15일 스승의 날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의 유래
미국의 웨이브스터라는 마을에 사는 쟈비스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마을의 주일학교의 모든 학생들로부터 어머니처럼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쟈비스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학생들이 그 분을 추모하기 위해서, 교회로 모였는데
쟈비스 부인의 딸인 안나는 자기집 뜰에 핀 하얀 카네이션을 들고와 어머니 무덤에 올려 놓았습니다.
매년 이런 행사가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카네이션을 들고 오게 되었고, 후에 미국에서 어머니날로 이 날을 제정하게
되었고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붉은 카네이션을 계시지 않는 경우는 하얀 카네이션을 다는 풍습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국무회의에서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정했어요.
어버이날은 어머니날 행사에 서운함을 느낀 아버지들이 ‘아버지의 날’ 제정을 제기하자, 1973년 3월 30일 대통령령으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제정·공포되면서 ‘어버이날’로 변경되었습니다.
*스승의날 5월 15일의 유래: 스승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날
1958년 5월 8일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적십자의 날을 맞아 병중에 있거나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하기 시작하면서,
스승의 날을 제정하는 의견이 제기된 뒤 1963년 10월 서울과, 1964년 4월 전주에서 청소년 적십자단의 각도 대표가 모여
회의를 열고, 불우한 퇴직교사 또는 질병에 걸린 교사를 위로하자는 차원에서 세종대왕 탄생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전국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스승의 날 기념식 행사를 개최하다가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73년, 국민교육헌장 선포일인 12월 5일에 통합 폐지되었고, 1982년부터 다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날은 스승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교육적으로 의미있는 여러 가지 행사를 각급 기관 및 단체별로
실시하는데, 교육 유공자 포상과 음악회·체육대회 등을 연다.
정부에서는 교육인적자원부 직원뿐 아니라 중앙·지방행정기관의 공직자, 국영기업체·정부투자기관·사회단체·일반기업체
임직원 등이 스승 찾아뵙기, 안부편지 보내기, 모교 및 자녀학교 방문하기 등의 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한편,
교육에 헌신 전념하는 우수 교원을 발굴하고, 교원의 사기 진작과 스승에 대한 존경 풍토를 조성할 목적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큰 교원들에게 훈장·포장 및 대통령·교육인적자원부장관 표창 등을 수여한다.
전국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스승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경건한 뜻을 표하며, 불우한 퇴직 은사나 와병 중인 교사를
방문해 위문품을 전달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스승의 어원
스승의 어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무당을 나타내는 '무격'에서 유래한다는 설과 중을 나타내는 '사승'에서 유래한다는 설이다.
옛날 무당을 나타내는 말로 '무격(巫覡)'이란 말이 있다. 여기에서 '무(巫)'는 '여자무당'을, '격(覡)'은 '남자무당'을 말한다.
그런데 옛 문헌을 보면 '무(巫)'를 '스승 무'라고 하고 '격(覡)'을 '화랑이 격'이라 되어 있다. 결국 '스승'이란 '여자 무당'을
말하는 것이다.
'여자 무당'은 고대사회의 모계사회에서 대단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남자 무당'인 '화랑이 격'의 '화랑'은 신라시대의 '화랑'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스승은 원래 중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15세기의 문헌 〈월인석보〉에는 '스승'이 나오는데,
'법(法) 치
닌 스승이오
ㅣ호
닌 제자(弟子)이라'고 하였다.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불교의 중을 '스승(師)'이라고 기록하였다.
옛날에는 중을 존경해서 부를 때 '사승(師僧)' 혹은 '사(師)님'이라는 호칭을 썼던 것이다.
〈동언교략(東言巧略)〉에 보면 사(師)의 중국 발음이 '스'란 점으로 미루어 사승(師承)이 스승의 어원이라 했다.
이 '사승'이 변해서 '스승'이 되었고, '사(師)님'이 '스님'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스승은 중을 높여 부르는 '사승(師僧)'에서
온 말이다.
이율곡의 〈학교모범(學校模範)〉에는 '스승을 쳐다볼 때 목 위에서 봐서 안 되고, 선생 앞에서는 개를 꾸짖어서도 안 되고,
웃는 일이 있더라도 이빨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스승과 겸상할 때는 7푼만 먹고 배부르게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 성균관 '학칙(學則)'에는 '길에서 스승을 만나거든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길 왼쪽에 서 있어야 하고, 말을 타고
가거든 몸을 엎드려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고려 때에는 선생이란 말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었다. 조선조 중엽 때 문헌인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보면 당시 선비들이 술 마시며 글 짓는 문주회(文酒會)에서 벼슬이 높거나 낮건 간에 서로 '선생'이라 호칭을 하였다.
'비록 벼슬이 높은 귀인일지라도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그저 대인이라 부르는 것이 고려 때부터의
법도'라고 기록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어느 선생님의 감동수기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뺑소니차에 당한 사고라 변변한 보상도 받지 못했고,
네 살 많은 누나와 저만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우리는 큰아버지 댁으로 보내졌습니다.
적은 액수였지만 부모님 앞으로 나오는 보험금이 있었는데
누나 이름으로 된 통장을 큰아버지가 관리한다고 가져가셨습니다.
저희는 의지할 곳이 없었고, 너무 어렸기에 통장을 달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적 충격이 컸던 저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생각을 하고 뭐라고 말도 하고 싶은데,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정신적인 문제라 꾸준히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큰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문제라면서 병원엔 데려가 주지 않으셨습니다.
성격이 까칠했던 큰어머니는
집안에 머리카락 하나 뒹구는 것도 용납을 안 하는 분이라서, 저와 누나가 들어온 후로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지셨습니다.
손에 테이프를 들고 다니면서 닦고 바깥에서 닦고, 들어오게 하셨지요. 큰아버지에게는 자식이 한 명 있었는데
저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국으로 유학을 간 상태라, 방이 비어 잇었는데도 그 방을 어지럽히면 안 된다고
저와 누나는 다용도실로 쓰는 방을 사용했습니다. 간혹 친척들이 다니러 오거나 손님이 오실 때만 그 방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지냈고, 손님들이 돌아가시면 바로 다용도실로 가야 했습니다.
누나는 큰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마당 쓸고, 집안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매일 손빨래까지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을 많이 하다 보니 누나는 코피를 자주 쏟았고, 누나가 코피를 쏟으면 큰어머니는 더럽다고 난리를 치셨습니다.
성적이 좋았던 누나는 점점 성적이 떨어졌고, "시험기간이라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큰어머니는 "집안일은 누가 하냐?"며
노발대발하셨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면 밥값은 해야지 니가 안 하면, 니 동생을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기에 누나는 저 대신 그 많은 일을
다 해냈습니다. 아직 말도 못하는 동생에게 힘든 일을 시키다 혹시 영원히 말을 못 하게 될까봐
누나는 저에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큰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자 누나와 저를 향한 못마땅한 시선은 더욱 심해졌고, 말끝마다 "고아원에 안 보내고 데리고
살아주는 걸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점점 술 마시는 날이 늘어갔고, 유학 간 아이에게 돈을 부쳐줘야 하는데 왜 돈을 안 주느냐고 싸우는 일이 잦더니
큰어머니의 잔소리가 그치지 않자 술을 마시고 매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해 겨울날, 누나와 저는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방에서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문이 열리더니 큰아버지가 들어와 허리에 매고 있던 허리띠를 풀어 우리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하도 맞으니까 누나가 제 앞을 가로막고 "왜 자꾸 때리느냐?"며 "이럴거면 고아원으로 보내주라,
차라리 고아원에 가겠다" 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큰아버지는 "키워주는 은혜도 모르고 대든다"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누나를 무섭게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때리던지 누나가 죽을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누나 때리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까지 속에서만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고, 큰아버지는 제가 말을 하는데 놀랐는지 때리는 걸 멈추고 방을 나갔습니다.
누나는 제가 말을 하자 너무 기뻐하면서 "집을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말도 못 하는데 고아원에 가면 혹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봐 누나는 꾹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니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고아원에 가서 살자"면서 "어디를 가든 여기보다 나쁘기야 하겠냐?"며
그 밤에 누나와 저는 짐을 싸서 집을 나왔습니다. 고아원에 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경찰서에 찾아가 고아원에 보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경찰서에서 큰아버지한테 연락을 할까봐,
그래서 다시 큰집으로 가게 될까봐 저희들은 밤길을 오래 헤매야 했습니다.
누나는 고민을 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누나의 담임선생님이었던 분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누나한테 힘내라고 매일 전화해주고 챙겨주던 고마운 선생님이셨습니다.
누나가 전화를 하자 선생님은 멀리 지방에서 밤새 달려 저희가 있는 곳까지 와주셨습니다.
누나와 제 얼굴을 보더니 더 이상 말씀을 안하시고 그냥 꼭 안고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선생님이 사는 집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누나는 선생님께 "고아원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고,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던 거냐?"고 자세히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큰집으로 가셔서 저희 짐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더러 "함께살자"고 하셨습니다. "아들 딸 다 결혼해서 그동안 혼자 살기 적적했는데
너희가 함께 살아 주면 외롭지 않아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저희 남매에게 엄마가 되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을 엄마라 부르는 누나와 달리 저는 엄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쭉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선생님도 편하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누나와 제가 부모 없는 아이들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봐
모든 면에서 소홀하지 않게 신경을 쓰셨습니다.
가족 모임이 있을 때도 저희들을 꼭 챙기셨고, 누나와 형들도 저희를 가족처럼 생각해 주셨습니다.
사춘기 시절, 제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을 하고 집을 나와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했을때도 선생님은 수소문을 해서 저를
찾아와 "니가 이렇게 살면 내가 나중에 너희 친부모님을 어떻게 보겠느냐?"며 눈물을 흘리셨고, 제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매일
중국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전 선생님이 고마우면서도 도움을 받는 제 입장이 너무 싫었습니다.
혼자 자립해서 살고 싶었습니다.
매일 저를 기다리던 선생님께서 학교 끝나고 저를 보러 오시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제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친부모님도 교통사고로 잃었는데 저 때문에 선생님마저 돌아가시면 저는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는 내내 '선생님이 살아만 계시면 앞으로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들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보니 선생님은 수술실에 계셨고, 다행히 목숨엔 지장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큰 수술이어서 석 달 동안 입원을 하셔야 했고,
그 기간 동안 저는 선생님의 간병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속썩인 것을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선생님을 화장실에 모셔다 드렸는데, 화장실을 나오면서 "잠을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씀에 제가
"엄마는 아들한테 미안한게 왜 이렇게 많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처음 뱉은 '엄마'라는 단어에 선생님이 또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셨고, 저는 그렇게 선생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선생님을 엄마라고 부릅니다. 이젠 퇴직을 하셔서 텃밭을 가꾸고 주말에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시는 엄마.
엄마가 안 계셨으면 저와 누나가 이만큼 바르게 자라지 못했을 겁니다.
공무원이 된 누나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저. 저희들은 엄마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엄마가 제게 하신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든든한 선생님으로 기억되려고 합니다.
그것이 엄마가 제게 주신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어느 선생님의 수기 中에서>
스승존경 하늘처럼! 제자사랑 바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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