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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頭陀)(Dhuta)란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두타는 12조항(12두타행)의 생활규범이 있어 조용한 숲속에서 한루 한 끼식식만 하고,하늘을 지붕삼아 단좌불와(但坐不臥:항상 단정하게 앉아 있고 눕지 말 것)를
하라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산이나 들 그리고 세상을 편력하며 온갖 고행을 하는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불과 몇 해 전 가을에 댓재(해발 800m)를 기점으로 두타산(頭陀山·1,352.7m)과 청옥산(靑玉山·1,403.7m)을 올라 무릉계로 내려섰다.
<☞ http://cafe.daum.net/phanmaum/FXy6/242>
오늘 다시 이 산을 찾은 건 이 산의 품이 그만큼 넓고 깊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가을과 달리 여름의 무릉계는 또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무릉계(武陵溪)는 중국의 무릉도원과 견줄 만큼 절경을 이루고 있음을 말한다.
오늘은 쉰움산(五十井山)을 타고오르는 천은사를 들머리로 선택하였다.
천은사(天恩寺)는 고려 후기 문신인 휴휴(休休)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쉰움산이란 이름은 ‘오십정산(五十井山)’의 순 우리말로 정상 바위에 50개의 우물이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두타산 능선에 한 발 걸친 작은 산이지만 기암과 괴송들이 비경을 연출한다.
영동지역 사람들이 용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멕이’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두타산성은 무릉계 건너 관음암 일원의 기암절벽 조망이 일품으로 수많은 의병들이 왜병에 맞서 싸우다 산화한 곳.
삼화사 기점 산행(매표소 해발 180m)은 어느 코스를 택하든 1,200m 안팎의 고도를 올려쳐야 하므로 여러모로 힘이 든다.
가벼운 무릉계 탐승산행이 목표인 C코스는 무릉계 초입의 삼화사에서 400여 미터 지나 관음암 안내판을 따라 우측으로 올라 산성12폭 비경을 즐기다가
다시 무릉계로 내려서 쌍폭과 용추폭을 탐승하는 하늘문길이 좋다.(약 2시간30분).
매표소 위에 있는 정자 오른쪽 암반이 그 유명한 무릉반석(武陵磐石)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널따란 반석에는 시인묵객들이 남긴 각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란 각자는 조선조 4대 명필인 봉래 양사언(또는 삼척부사 정하언)이 남겼다는 글자.
금란정(金蘭亭)은 이 고장 선비들의 모임인 금란계(金蘭契)의 뜻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다.
* 무릉계곡 입장료 2,000원 * A코스: 6시간 30분, B코스: 5시간 30분, C코스: 3시간 30분
두타산천은사(頭陀山天恩寺) 일주문을 지나서...
불이교(不二橋)직전의 주차장에서 버스는 멈춘다.
불이교엔 '버스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주차장 아래의 화장실로 쪼르르 내려갔다 화장을 하고 최근에 세워진 듯한 '두타산천은사중창공덕비'를 살핀다.
그리곤 천은사를 향하여 불이교를 건너 뒤돌아 본 모습. (산행은 A팀과 B팀 그리고 C팀으로 나눠서 진행하였다.)
동안사 갈림길에서...
사적 제421호인 동안사(動安祠)는 우측 지근거리의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선생의 사당이다.
사당문은 잠겨있고...
카메라만 안으로 밀어 넣어 살짝 당기고...
동안사는 이방인을 고려의 역사 속으로 이끈다. 천은사 일대는 ‘이승휴 유허지’.
고려 때의 문신 이승휴가 삼척의 외가로 낙향해 용안당이란 건물을 짓고 ‘제왕운기’를 집필했던 곳이 현재의 천은사다.
당시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고, 이승휴의 위패를 모신 사당 동안사(動安祠)만 남아 있다.
무슨무슨 공덕비인데 일부러 훼손한 듯하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다리를 건너기 전 좌측으로 산길을 열어 놓았다.
산길 입구엔 사찰로 들어오지말고 바로 산으로 붙으라는 이정표가 있지만 우리는 다리를 건너 천은사 경내를 들어간다.
천은사 창건역사는 경덕왕 17년(738년) 인도에서 두타의 세 신선이 흰 연꽃을 가지고 와서 창건했다는 백련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뒤 흥덕왕 4년(829년)에 범일국사가 극락보전을 건립함으로써 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중수하고 이 곳에서 대장을 다 읽었다는 뜻에서 간장이라 하였고 조선 선조 때 청허 서산대사가 절을 중건하고 흑악사라 하였다.
다시 1899년 이성계 4대조의 묘인 목조릉을 미로면 활기리에 만들면서, 이 절을 원당사찰로 삼고 `임금의 은혜를 입었다' 하여 천은사라 불렀다.
한국전쟁 때 큰 불을 만나 완전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는데 1983년 문일봉 스님이 중건하였다.<자료요약>
범종각이 보이고...
그 옆엔 영월루(暎月樓) 편액이 걸려있으나 건물 안쪽에 ‘보광루(葆光樓)’ 편액이 또 걸려 있다.
영월루엔 법전사물(法殿四物) 중에 법고(法鼓)를 중앙으로,좌측에 목어(木魚)와 우측에 운판(雲板)이 있는데,운판은 식사시간을 알릴 때 울리는 도구.
극락보전엔 '삼척 천은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안에선 스님의 염불소리가 은은히 들려 경내를 숙연하게 만든다. 바쁜 일정으로 법당으로 오르지 못하고 합장으로 예를 갖추고 바삐 산으로 스며든다.
극락보전 좌측의 약사전 앞을 가로 질러...(빨간 동그라미안엔 등산로 안내 푯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7호인 '삼척 천은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三陟 天恩寺 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조각 수법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삼존불 모두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면서 완전한 상태이며
연대 추정이 가능한 개금발원문 등 복장유물이 있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음. <강원도고시 제 2007-9 호>
약사전 앞을 가로지르며 무심코 바라 보는데...
약사전 문살의 문양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를 일러 '통판투조꽃살문'이라 한다는데,이는 큰 널판 그대로에 소나무와 학,대나무,매화를 통째로 새겨 문틀에 끼우는 방법이다.
아까 천은사 다리 입구에서 산으로 바로 올라오면 건너는 다리와 만난다.
물이 별로 없는 다리를 건너...
이정표가 가리키는 두타산을 보며 걷는다.
이 쯤에서 후미의 꼬리를 물었다. 욱분씨와 미옥씨가 바위 위에 올라 있다.
마침 전화가 왔나배.
좌측 조금 아래에 커다란 바위가 시선을 끌어 당긴다. 무속인들이 제를 올린 듯 바위 곳곳에 그을음과 재가 남아 있다.
그 커다란 바위를 떠받치는 듯 돌기둥이 박혀 있다. 이 바위는 ‘은사암’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사람이 박아놓은 듯 아귀가 딱 맞다.
쉰움산은 태백산에 버금가는 기도처라고 한다. 그래서 봄이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온다.
무속인들은 이 바위를 은사암이라며 산당으로 부르고, 쉰움산 정상은 원당이라고 부른다.
등산로는 은사암 바위 오른쪽 돌탑이 있는 곳이지만 우리는 은사암을 마주보고 왼쪽으로 가서 조망이 확 트이는 너럭바위를 오르기로 하였다.
두타산 정상으로 향하는 힘찬 능선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밧줄이 걸린 너럭바위를 올라...
돌탑이 있는 능선으로 치고 올라도 바위가 미끄럽지 않아 그리 위험하진 않다.
너럭바위 잔등으로 올랐다.
마주 보이는 바위 하나가 유독 시선을 끈다. "옥분씨,무얼 닮았나요?" "상어..." 꼬리가 짤린 상어를 닮았다.
바위 아래에선 두 분이 끙끙 너럭바위를 타고 오르고 있다.
너럭바위 잔등에는 수많은 돌탑들이 오만가지 소원을 품고 서 있다.
조망이 장쾌하다.
잘생긴 소나무들의 사열을 받으며 솔방솔방 걷는 길.
천은사~두타산이 5km인데,이제 1/3을 올라온 셈.
능선에 붙기전 샘을 만난다. 샘은 날이 가물어 마시기엔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능선에서 우측으로 난 산길은 쌍용채석장으로 내려 가는 길.
지금까지는 대체로 육산의 지형이었다면 이제부턴 골산의 위용이 드러난다. 우측의 바위지대를 타고 오르자...
아래로 깊숙하게 펼쳐지는 빛내골의 협곡. 나는 높이 뻗어가는 헌걸찬 조망만 멋있는 줄 알았다. 말로만 듣던 '그랜드케년'이 이렇게 생겼을까?
기차바위라 이름 붙일 만한 칼바위 능선에서 기념촬영하기에 바쁜 일행들.
쉰움산 정상은 기차바위(혹은 칼바위) 저 끄트머리.
생성 원인을 알 수 없는 혈(穴)이 바위에 움푹음푹 파여있다.
찬탄 찬탄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측 바위절벽 아래론 천애의 낭떠러지.
B코스를 밟은 후 시간이 남는다면 c코스를 염두에 두었지만 글렀다. 이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말았으니...
높이 솟은 송곳바위는 좌측으로 에둘러...
바위 옆뽈떼기를 휘어돈다. 다행히 암질이 미끄럽지가 않으니 가능하다.
너럭바위를 이룬 쉰움산 정상의 모습.
앞서간 일행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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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보다도 더 氣가 좋다는 쉰움산. 그 쉰움산에서도 제일 명당자리인 이 식사자리.
이 명당자리에선 신을 벗고 식사를 하여야만 한다고 만식씨가 너스레를 떤다. 웃통도 벗을까?
올라온 길을 돌아보며 살짝 당겨본다. 氣찬 암석지대는 은사암 정수리다.
표석엔 오십정(五十井)이라 새겨져 있고 옆에 작은 글씨로 순 우리말인 '쉰우물'이라 적혀있다. '쉰우물산'이 '쉰움산'으로 변화되었고...
정상의 마르지 않는 쉰우물에 들판에서 자라는 피가 자라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청개구리 새끼 한 마리가 숨어있다.
쌀 한 톨 크기의 작은 청개구리 새끼.
빛내골 그랜드케년에 자꾸만 눈길이 가고,바위 틈새엔 뒤틀리며 자란 향나무를 닮은 고목 한 그루가 버티며 섰다.
오만 소원들이 난무하는 곳으로 산길안내 표식이 있고...
이정표는 두타산을 3km로 가리키고 있다.
잘생긴 소나무와...
쭉쭉빵빵 잘 생긴 소나무와 산길로 이어지는 암릉길을 따라...
또 한 차례 걸음을 멈춘다.
목질이 금강석처럼 단단한 금강송(金剛松)의 본래 이름은 황장목(黃腸木).
속이 노란 황장목은 표피가 붉어서 적송(赤松), 줄기가 매끈하게 뻗었다고 해서 미인송으로도 불린다.
목재의 집산지가 봉화 춘양이어서 춘양목으로도 불리는 금강송은 예로부터 궁궐의 기둥이나 왕실의 관으로 쓰인 귀한 소나무다.
귀품을 유지하고 있는 금강송의 귀태.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
氣찬 바위지대에서 제단으로 형성된 듯한 자리를 살핀다.
그렇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유달리 친근한 나무다.
금줄에 솔가지를 매달고 태어나서,송화가루로 허기를 채우고,송기를 벗겨 먹으며 자랐다.
솔가리를 긁고,소나무 장작으로 밥을 해 먹었으며,송림에서 머리를 식히고,솔밭에서 뒹굴었다.
죽어서는 소나무 관에 들어누워 소나무가 지켜주는 산에 묻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였다.
이정표
우측 안개덮힌 두타산성 능선 자락에서 앞서간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두타산성 갈림길(해발 약 1,125m)에 닿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릉계곡 방향으로 방향을 잡는다. 앞서간 일행이 두타산을 찍고 U턴하여 합류를 하였다.
적송(赤松)이라 함은 거북 등껍질처럼 굵게 감싸고 있는 표피가 벗어지면서 속살이 드러나며 붉게 보이는 것을 일러 말하는 듯하다.
허물어진 성터를 밟고 올라서...
바위에 올라 서 보지만 조망은 이제 안개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
황장목하면 울진의 백암산을 들지만 쉰움산~두타산이야말로 하나도 모자라지 않다.
다시 허물어진 성터.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더니, 수많은 세월을 버티며 온갖 산꾼들의 시름들을 다 들었을 고사목.
하늘을 찌를 듯 잘생긴 소나무들이 길을 안내하는 대로 그저 타박타박 발걸음을 대 딛는다.
이정표
다시 허물어진 두타산성을 타고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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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지점의 다른 각도에서 본 이정표
좌측 산허리로 펼쳐지는 절경.
마주 보이는 백두대간 줄기는 안개에 묻혀있고...
거북바위라 일컫는 좌측 계곡으로...
살짝 내려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계곡을 따라 뻗어내린 폭포는 물줄기가 말라 있고...
그새 안개는 걷히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 있다.
이게 거북의 모습인가?
위험을 알리는 금줄이 쳐진 조망처에서 맞은 편 관음암(오늘 C코스)을 내려다 본다. (오사장님 머리 위로 관음암이 보인다.)
살짝 당겨본 관음암.
깊은 무릉계곡으로 문지방 산성이 문지방을 이루고 있다.
무릉계곡 상류로 고적대를 가늠해 보지만 안개에 묻혔다.
두타산성 문지방을 딛고 내려온 길을 돌아보니 기암의 생긴 모습이 큰 노적가리를 닮았다.
이정표
빤질빤질 무던히도 밟았을 문지방. 난(亂)을 피해 올라온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산화한 의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두타산성은 삼국시대 진흥왕(550)에 의해 지어졌고,방어와 통치의 거점으로 식량의 저장고 역할도 하였다.
두타산 중허리는 파사왕(102)이 쌓았다는 석성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이 석성은 길이8.725척 높이 5척으로 문간치는 조선 태종갑오(1414). 삼척부사 김맹손이 쌓았다고 하며 길이는8.725척 높이는 6 척이라 한다.
바위 이곳저곳을 살피다 이 지점이 포인터로 백곰의 돌아선 뒷모습을 닮았다.
안내판
내려서서 돌아본 산길.
이 지점의 안내판과...
두타산성 안내.
이제 내려서는 길에서 반듯한 다리(옥류동교)를 지나면...
다리밑으로 수려한 계곡의 암반과...
안내판이 보인다.
이정표와...
옛길 이정표.
다시 좌측으로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鶴巢臺)가 보이지만 물줄기가 시원치 않고...
안내판
오늘 우리 C팀이 오른 관음암으로 오르는 '하늘문길' 입구를 만난다. 이 지점은 삼화사에서 약 400m상류에 위치.
하늘문길 입구의 이정표와...
관음암 푯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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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 천왕문을 들어선다.
천왕문 현판 아래엔 '수건법계수륙무차보리도장(修建法界水陸無遮菩利道場)'이라 쓰여져 있고,안으로 보물인 '삼층석탑'과 철불이 모셔져 있는'적광전'이 보인다.
삼화사(三和寺)의 건립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공존하고 있다.
첫째는 삼화사사적(三和私史蹟)에 근거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율사에 의한 창건설과
둘째 강원도지(江原道誌)에 근거한 통일신라 흥덕왕 4년(829년) 창건설.
셋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근거한 범일국사 창건설이다.
호국사찰의 성격을 띠고 창건되었다가 교종사찰에서 선종사찰로 전환되었다가 범일국사에 의해 사굴산문으로 편입되었다.
예전엔 삼화동 산 중턱 채석장에 삼화사 도량이 있었다.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자 채광권 안에 속하게 된 삼화사가 1977년부터 지금의 자리인 개국사터로 옮겨오게 된 것.
사천왕 탱화는 복원불사가 진행 중이라 하고...
범종각과 공수실(供需室)을 우로 보고...
적광전(寂光殿)이 보이는 삼층석탑 앞에 섰다.
2층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여러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많이 훼손되었으며 여러번 해체 복원되어선지 어딘지 균형미가 없어 뵌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보물 제1277호>
안내판
육화료(六和寮)는 대중이 함께 쓰는 생활 공간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켜야할 육화경법(六和敬法)이라는 규범과 질서가 있다고 한다.
1. 신화공주(身和共住) - 남의 희생을 전제로 자기만 잘 살려고 하지 말아라
2. 구화무쟁(口和無諍) - 모든 다툼은 입에서 비롯되니 서로 말을 조심하라
3. 의화동사(意和同事) -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남의 주장을 무시하지 말라
4. 계화동수(戒和同修) - 만인은 평둥하니 모든 계율을 잘 지켜라
5.견화동해(見和同解) - 옳은 것을 그르다고 그른 것을 옳다고 왜곡하지 말라
6. 이화동균(利和同均) - 모든 이익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골고루 나누어라
육화료(六和寮)
범종각
맞배지붕의 두 건물
극락전
적광전(寂光殿)엔 보물로 지정된 철불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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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292호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시멘트로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는데,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려 주고 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안내판
약사전을 내려서다...
천왕문을 내려다보니 앞 산자락의 기운찬 산세가 눈에 들어온다.
천왕문을 나서면 계곡쪽에 유구한 세월을 견뎌온 늙은 느티나무가 있다.
400년이 훨씬 넘었다.
천왕문을 벗어나 무릉반석 다리를 건너기 전 '동안거사 이승휴 유적비'와 '삼화사 사적비'가 있다.
다리위에서 내려다 보는 상류쪽 풍경.
아래쪽은 그 유명한 무릉반석이다. 어린이 놀이터 또는 풀장을 방불케 한다.
약사삼불을 싣고 용이 두타산을 오르던 길이 '용오름 길'이라 한다고...
'두타산삼화사' 일주문을 빠져나와 돌아본다.
그리곤 무릉반석으로 들어간다.
양사언이 새겼다는 각자를 찾아보기 위함인데, 그 넓은 바위에는 온통 이름석자를 새겨서 그 허울좋은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였다.
부백(府伯),찰방(察訪) 등 조선시대 관직이 나오고...
무릉계곡으로 숨어든 도둑들을 잡기 위하여 토포사(討捕使)도 온 듯하다.
그리곤 무슨무슨 계원의 단합을 과시하고...
기축(己丑) 사월이면 1829년 또는 1889,1949년으로 날짜까지 박았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동해무릉계곡(무릉도원)이라 불리는 동해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수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마치 현존하는 선경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천은사의 전신인 용안당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때에 삼척부사로 재직 하고 있던 김효원이 제명 하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명승지로,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삼척부사나 토포사들의 이름이 각각 10명 이상 새겨져 있다.
최중희의 초서 '관동기관(關東奇觀)'
* 관동(關東)이란 관(關)의 동쪽이니(대관령이 관) 강릉 지역의 강원도를 말하므로 강원도의 기이한(奇) 볼꺼리(觀)쯤 되겠다.
화가 심지황(沈之潢1888∼1964)이 쓴 현판.
이 정자는 광무 7년(1903) 유림제생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금란계를 만들어 한일합방 국치에 울분을 달래며 정각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일본관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5년 해방이되자 그 당시 서생계원과 자손들이 선인의 뜻을 받들어 1949년 처음 이원동 단봉 석경지 계남 심지황 생가 근처에 정자를 건립했다가 1958년 동해시
명소이며 절경인 무릉계곡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8.15는 우리나라 만세 부르는 날
일본 천황 라디오로 항복하던 날
못 배우던 우리 한글 배우게 되니
나는야 기쁘구나 왜놈 망해서
8.15는 우리나라 만세 부르는 날
쪽바리 게다짝을 불사르던 날
못 입었던 색동옷에 꽃치마 입고
나는야 당실당실 춤을 췄지요"
('8.15는 만세 부르는 날' -서영화-).
무릉반석 피서객들을 비집고 이 각자를 찾았다.
전(傳) 양사언(楊士彦 1517~1584) 석각(石刻)인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은 조선조 4대 명필인 봉래 양사언(또는 삼척부사 정하언)이 남겼다는 글자.
각자(刻字)의 뜻은
"신선이 놀던 무릉도원,
너른 암반과 샘이 솟는 바위,
번뇌조차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골짜기"
산에 오를 때마다 인용하는 양사언의 너무나 유명한 시조가 또 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점차 훼손이 심하여 길 옆에 모형석각을 뜨서 새겼다.
큰 글자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는 신미년(1571년)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말.
양사언의 글씨로 추정하는 사람들은 그가 초서의 대가이고, 강릉부사로 왔던 때가 신미년(1571년)이며,또 그가 전임 부사인 정두형의 상(喪)을 조문하기 위해
무릉계에 인접한 비천동을 다녀갔다는 기록,그리고 삼척지방의 구전(口傳)과 최만희가 쓴 책자 등에도 양사언의 글씨라고 기재된 점이다.
또 다른 견해로는 1750년에 삼척부사로 와서 2년 동안 있었던 옥호자 정하언(玉壺子 鄭夏彦)이 쓴 글씨라는 견해.
정하언은 어제 편제(御製 扁額)와 창경궁 편액(扁額)을 썼을 정도로 글씨가 뛰어났다.
'옥호거사서신미'라는 7자에서 신미년은 정하언 부사가 재임기간인 1751년과 일치하고 있다.
이 고장 출신 요절한 시인인 최인희(1926~1958)님의 낙조(落照) 시비가 세워져 있다.
낙조/최인희
골 따라 산길 더듬어 오르면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
묵묵히 세월 지키는 느티나무
운무 서렸다 흩어진 바위 아래
은은히 흔들리는 범종소리
백석 씻는 시낼랑 뒤로 흘려보내고
고개 너머 낡은 단청 산문은 트였는데
천년 묵은 기왓장도
푸르른 채 어둡나니.
국민관광지 1호인 무릉계곡 안내판
입장료 어른 2,000원(30인 이상 단체 1,500원)
상가들이 운집한 시설지구와 주차장을 지나면...
더 아래에 마련된 또다른 주차장.
이곳엔 다목적 세척실 또는 세면장이 있다.
자연 야영장의 이용요금은 성수기와 주말 그리고 평일이 각각 다르다.
내일이면 광복 70년이다.
조금 전 아베넘은 14일 발표한 전후 70년 담화(아베 담화)에서 '회오(悔悟),니 '통석(痛惜)의 염(念)' 이니 난해한 표현을 사용해 구렁이 담넘어 가듯 애매모호
두루뭉실 해치웠다.
미국은 덩달아 평화니 민주주의니 하며 환영한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어정쩡하게 수용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한미일 공조는 현실적으로 절실한 상태이고,미국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의사가 불렀다는 '옥중가'를 접했다.
님의 충정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애절해 와락 눈물을 쏟을 것만 같다.
-옥 중 가-
적막한 가을 강산 야월에
숨어 울며 날아가는 저 기러기야
북방에 소식을 네가 아느냐
여기서 저기가지 몇 리 되는지
아차차 가슴 답답 이내 신세야
만주 땅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
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내 신세야
해외에 널려있는 백두산 하에
나의 일가 동포 형제 저기 있건만
나는 소식 몰라 답답하구나
만주당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
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내 신세야
교대 잠이 편안하여 누가 자며
콩둔 밥이 맛이 있어 누가 먹겠나
때려라 부셔라 왜놈들 죽여라.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지어 직접 부른 노래>
첫댓글 무더운 날씨에 A팀 B팀 모두 수고 해서요....
예~,먼 거리,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잘 다녀왔죠. 두타와 무릉계곡은 볼수록 아름다웠습니다.
가을과는 느낌이 다른 산세와 특히 쉰움산의 살아있는 氣가 느껴졌었죠.A팀은 관음암 '하늘문 길'을,B팀은 두타산성 능선을 서로 볼 수 있었죠.
9,10월 계획을 붙들고 씨름을 하다 이제사 손에서 놓았어요.이래저래 성에 다 차지는 않지만...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