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과 46년 보들레르는 그 해의 살롱전 미술비평으로 서양 근대미술의 비평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이다. 현재에는 1857년에 발표한 <악의 꽃>으로 근대 낭만주의 시인을 대표하고 있지만, 시집을 발표하기 전에는 3회의 살롱 전시 비평과 낭만주의 회화의 거장인 들라크로아의 예술세계를 분석하는 글로 근현대 미술비평의 흐름에 초석이 되는 것이다. 본 연구는 보들레르의 미술비평을 심미적 성격으로 판단하고 이에 초점을 맞춰 보았다. 예술이란 어떠한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예술(pure art)',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미술비평 연구이다. 보들레르가 젊어서 쓴 미술비평은 전통적 아카데미즘을 부정하고 반대되는 입장이었으며,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심미적 미술비평이다. 보들레르의 심미적 미술비평에 배경이 되었던 미학은 '예술창조에 관한 것'과 '예술의 목적'이 무언가를 찾는 일이다. 초기 미술비평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자연관의 새로운 해석과 미의 자율성 문제, 그리고 상상력과 현대성에 관한 보들레르의 정의는 대단히 중요하다. 자연은 일종에 사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미의 자율성과 예술가가 갖고 있는 상상력을 중요시한다. 또한 그의 미술비평이 최초의 근대적 성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현대성'에 대한 명확한 시대 규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전통적 미의 가치관과 표현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는 "현대성이란 일시적이며, 순간적인, 그리고 우연한 것"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이와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 1845년 이후 3차례에 걸쳐 쓴 <살롱 미술비평>이다. 살롱 전시 평에는 당시 미술가들의 진취적 의식을 읽을 수 있으며, 그 외 미술비평의 목적이나 좋은 그림에 대한 설명적 내용이 담겨진다. 특히 많은 부분이 들라크로아의 낭만주의 미술에 관한 예찬과 작품분석을 할애하고 있어, 들라크로아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보들레르의 살롱 전시평 속에 담긴 많은 화가들의 서술과 들라크로아의 예술론은 새로운 시대의 미술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그의 심미적 미술비평이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미에 대한 재해석이었으며, 새로운 미의식과 표현의 문제 등 미술 작품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구체적인 사례를 찾는 작업이었다. 결코 단순한 미술 작품의 형식적 비평이 아닌 보들레르의 심미적 미술비평은 내용을 중요시한 비평으로 19세기 중반 이후 전개되기 시작한 근현대미술의 전위적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그러한 내용의 흔적들을 찾고자 하는 작업이다.
2.미술비평의 배경
1)보들레르의 삶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1821년 파리에서 출생했다. 부친인 프랑스와 보들레르(1759-1827)는 18세기 전형적인 귀족으로, 예술 애호가인 동시에 아마추어 화가이다. 그의 나이 62세 때 아들인 샤를르 보들레르를 얻었으며, 아들의 출생신고에 자신의 직업을 화가로 기입하였다. 모친 카롤린은 영국에서 망명한 군인의 딸로 태어나 고아로 자랐으며, 결혼 당시에 28세 였다. 보들레르가 6세 때 부친이 사망하였으며, 이듬해 모친은 39세의 육군 중령 오픽 씨와 결혼한다. 어렸을 때부터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하였던 보들레르는 천진난만한 성격이었다고 하나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며, 때로 마비된 듯한 침체 상태에 자주 빠진 곤했다. 그의 자전적 기록에 나타난 어린 시절은 "루이 16세 풍의 고가구들, 고미술품들, 집정시대의 파스텔화..."를 보고 미술품에 대한 끊임없는 취미를 키워 나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보들레르는 점차 성장하면서는 문학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대학은 엉뚱하게도 법과를 지망한다.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은 하였으나 한번도 수업에는 들어가지 않고 자유로운 파리 생활을 즐긴다. 카페와 술집에서 문학과 미술 하는 친구들을 사귀면서 한량과 같은 생활로 빚을 지고 궁지에 몰리기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를 파리의 유혹에서 멀리 떼어 넣기 위하여 캘커타로 가는 배에 태워 보낸다. 이 때가 만 20세 이었다. 항해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는 어려움을 겪고 인도양에 도착한 직후 곧 바로 귀향을 서두른다. 이듬해 파리로 돌아온 후 보들레르는 만 21세 성년이 달하여, 죽은 부친의 막대한 유산을 받는다. 그러나 가족들은 무절제한 낭비와 빚때문에 유산을 공증인이 관리하여 매월 일정액만 받도록 법정에서 금치산 선고를 내리도록 한다.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실격을 선고받은 것이다. 당시 24세인 보들레르는 처음으로 <1845년 살롱 미술평>을 발표한다. 살롱 미술비평은 40년대 후반까지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며, 50년대로 들어서면 미술비평보다는 자신의 시집 출판과 미국 작가인 애드거 알렌 포우의 작품 번역에 몰두한다. 1855년경에는 중견 시인으로 위치를 굳히나 1857년 대표작인 <악의 꽃>을 출간하게 되면서 기소와 유죄판결을 받는다. 이 뜻밖의 타격과 건강 악화, 특히 무기력과 우울증, 공포, 신경마비 상태 등 참담한 상태에 빠진다. 그런 중에서도 그는 자신의 <내면 기록>과 문학비평, 포의 번역을 계속하고 가끔 미술비평을 한다. 마지막 미술비평으로는 1863년에 쓴 <현대생활의 화가>가 있다. 1866년에는 벨기에로 문학 강연회를 갔다가 졸도하여 실어증에 걸리고 반신불수가 된다. 곧바로 파리로 후송되어 1년을 병상에 누워지내다가 1867년 8월 31일, 46세로 사망한다.
2) 심미적 비평의 배경 - 자연관과 미의 새로운 해석 (1)자연관, (2) 상상력, (3)현대성 ,(4)미의 정의
(1)자연관 : 보들레르의 심미적 미술비평의 배경에는 예술의 자율성이나 예술가들의 상상력, 그리고 순수 미를 추구하는 것이 깊게 관여하고 있다. 예술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보들레르의 첫 번째 비평 원칙이다. 당시 고전주의 예술은 교훈적이거나 도덕을 증진시키기 위한 정치, 사회적 목적을 갖고 있었으며, 아니면 단순한 장식성과 눈속임으로 고답적 성격이었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이와 같은 교리와의 관계를 끊는다. 즉, 그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예술, 그 자체에서 추구되는 순수한 예술(pure art)을 정의하고자 노력한다."
전통 예술은 예술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언가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혹은 모종의 다른 외부적 목적을 갖는다. 때로 그것은 종교적 신념이나 국가, 민족의 성취를 위한 반면에 순수 예술은 어떠한 형식적 목적도 거부하고 있다. 전통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자연 해석을 바탕으로 미에 대한 새로운 작업, 이는 미술이 자연을 모방하고 재현해야 한다는 고전주의 미술 원리를 부정한다. 예술의 창조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지 자연의 묘사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식을 무엇보다 강조하게 된다. 이제 예술가들은 자연의 형식적 재현이 아니라 근원적인 자연의 모습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을 재현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과 분리되고, 인간의 경험에서 자유로운 세계를 표현하려는 출발점이다.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자연은 천상계(정신,이데아)와 지상계(물질,감각)가 교감하는 곳으로 일방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자연관은 시집 『악의 꽃』중 <상응 Correspondances>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La Nature est un temple ou de vivants piliers Laissent parfois sortir de confuses paroles; L'homme y passe a travers des forets de symboles Qui l'observent avec des regards familiers. "<자연>은 하나의 사원이니 거기서 산 기둥들이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
자연은 초월적인 것으로 인간을 속박한다. 근대 이전 예술가들은 외부 세계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자연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여기서 자연은 인위적 행위가 가해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초월적 자연에서 보들레르는 어지러운 말(言)들의 난무와 향과 색이 서로 응답하고 교감하는 는 것을 발견한다. 또다른 세계로 자연, 그것은 거대한 사원인 동시에 혼돈의 기둥들이 세워지는 곳이다. 이것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인간을 그리는 것이 예술가들의 숙제이었다. 속인에게는 어둡고 컴컴한 곳이나 시인에게는 광명처럼 광활한 자연이라는 상징의 숲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화가들에게 있어서 사원과 같은 자연은 과연 무엇인가? 초월적인 자연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는 자연에서 화가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이다. 자연은 일종에 '사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모방과 재현은 중요한지 않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자연은 하나의 사전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전에서 단어의 뜻과 어원을 찾기도 하고 문구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발췌하기도 하는 것처럼 상상을 중요시하는 화가는 사전에서처럼 구상에 알 맞는 요소를 찾아야 한다. 그것을 재치 있게 적절히 맞춤으로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사전을 모사하고 있는 것 뿐이다." 보들레르가 생각한 자연은 '평범하고(banale)', '표정이 없는 것'이며, 자연은 예술가들에게 모델이 되는 초상으로 자유로운 상상력을 억압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부연해서 그는 "나는 존재하는 것을 재현한다는 것은 무용하고 따분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존재만으로는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예술가에 의해 반영된 자연은 회화로 나타나며, 창조적 상상력을 지닌 그림이야말로 '마술과 같은 작용'이고 '영혼의 환기'임을 강조한다. 보들레르의 심미적 미술비평에 근원이 되는 것은 이와 같은 자연의 해석이다. 자연이 절대성을 갖지 않음으로 열쇠는 인간이 갖게 된다. 예술가는 자연을 보다 명쾌하고 보다 단순하게 나타내야 한다.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자연을 그리는 미술가들이 개성을 갖지 못하고 보는 그대로를 답습만 한다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다. 예술가의 개성, 이것이 초월적인 자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2)상상력 : 상상력은 창작의 모체가 된다는 보들레르의 미학은 낭만주의 미술과 일치가 된다. 그의 <미학적 탐구>에서 "신비스런 능력, 능력 중에 초점이 되는 힘"이라고 상상력을 설명하고 있다. 상상력은 예술가에게 있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무한한 예술의 창조적 가능성을 밑받침해 주는 상상력은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크로아가 가장 중요시한 이론이었다. 창조적 상상력은 참다운 독창적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나타났던 것이다. 자연에서의 자율성을 획득한 예술가들은 창조적 상상력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정열적인 기질의 예술가, 이들은 열정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자연에 접근한다. 덧붙여서 보들레르는 상상력을 '인간의 모든 능력 중의 여왕'이라고 말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상상력은 삼라만상을 분해하고 영혼의 깊숙한 데서 생겨났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규칙에 따라서 재료를 모으고 처리해서 일종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고 설명한다. 자연에서 벗어나는 길을 '상상력'에서 찾았던 보들레르는 이처럼 상상력을 미술작품 평가하는 절대적 요소로 지적한다. 상상력에 의해 이해되는 보들레르의 심미적 미술비평은 아카데믹한 자연주의를 거부하는 정확한 동기가 된다. 이처럼 과거에 '자연'의 무분별한 모사가 비난을 받고, 외부 세계의 불완전성을 지속시키는 무비판적 재현과 왜곡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상상력'이 더욱 주목받게 되었던 것이다.
(3)현대성: "현대성이란 일시성, 순간성, 우연성이다. 그것은 예술의 절반을 이루며, 나머지 절반에 해당하는 것은 영원성과 불멸성이다."(La modernite, c'est le transitoire, le fugitif, le contingent, la moitie de l'art, dont l'autre moitie est l'eternel et l'immuable.) 여기서 우리는 보들레르의 명확한 '현대성'의 정의를 읽을 수 있다. 일시적이고 변하기 쉬운 , 그야말로 변덕스러운 미의 표현들, 마치 오늘날의 모더니즘 미술의 특성을 논하고 있는 것 같다.분명 현대성은 부정적 요소를 갖고 있으나 보들레르는 이를 창조적 요소로 바꾸어 나가려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현대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전통적인 표현방법이나 미의식만을 고집하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다. 사실 미술은 시대정신의 반영이며, 어느 시대 건 시한성을 가지고 변화가 이루어져 왔다. 그렇다고 목적 있는 시대적 표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성은 예술의 영원성에 담겨진 절반이며, 이것은 삶의 가변성에서 나온다는 해석이다. 현대성이라고 해서 예술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고전주의는 나름대로 '독창성의 평범한 형태'(la forme banale de l'originalite)를 만들었다. 보들레르 역시 고전의 보편적 진실을 주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대성을 바탕으로 창조되어지는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무한에의 갈망과 같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대적 독창성을 살려 나가야 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현대성이 고전성을 획득할 수 있으려면,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불어넣는 신비로운 미가 추출되어야만 한다라는 주장과 일치된다.
(4)미의 정의(定義) : 초월적 자연이나 평범한 일상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시적인가를 색채와 소묘로서 보여주는 사람들이 화가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창조적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보들레르는 서슴지 않고 '미(美)'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변덕스럽고 변화가 많은가? "미란 언제나 기이한 것이다.(le beau est toujours bizarre) 그것은 고의적으로, 냉정하게 기이하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언제나 약간의 기이함, 천진하고 비의도적이며 무의식적인 기이함이 들어 있다는 점이며, 또한 미를 특히 미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기이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이함은 바로크의 사전적 의미와 다르다. 1740년 프랑스 아카데미 사전에서 정의된 바로크의 의미는 "불규칙, 이상함, 불균형"이다. 불어의 bizarre는 괴상하며 조화가 잘 안 맞는다는 뜻이다. 보들레르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미를 설명하나, 그의 bizarre는 다양하고 변화가 심한 아름다움으로 순수한 예술을 추구하는 정신성의 요소이다. 기이함이 예술의 본질을 이룬다는 그의 생각은 낭만주의 미술에서 잘 적용되고 있다. 바로크 미술에서 나타나듯 19세기 초 들라크로아를 비롯한 낭만주의 화가들은 격정적인 몸짓과 색채로 역동적 표현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의 순수성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약간의 기형이 아닌 것은 무감각해 보인다. 불규칙함, 다시 말해 예기치 못한 것, 뜻밖의 요소, 놀라움이 미의 본질이며, 특성인 것이다." 보들레르의 미술비평에 근원을 이루는 심미성은 미의 본질을 찾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가 강조한 '기이한 미'는 당시에 가장 최신의, 가장 모던한 현실적인 표현이다.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난 미의 표현은 내면적이면서 영적이어야 하며 무한을 동경하는 상상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결국 심미적 미를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첫 번째 목적이며, 어떻게 심미적 미를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가 예술가들의 커다란 과제인 것이다. 그 구체적 사례들을 보들레르는 살롱 미술비평을 통해 발표하고, 자신의 심미적 미술비평을 강조하게 된다.
3. 살롱 미술비평
1) <1845년 살롱> 미술비평
1845년 살롱 미술평은 미술에 관한 "몇 마디 소개"와 4점의 들라크로아의 작품 비평부터 시작한다. "몇 마디 소개"는 당시 미술작품에 관한 아카데미즘 미술을 긍정하면서 아울러 부르조아 계급의 소박함과 정직함을 지닌 새로운 분위기의 미술비평 필요성을 강조하는 서론인 셈이다. 여기서 그는 친구도 적도 가질 수 없다는 비평의 객관성을 논한다. 비평의 객관성을 위해 보들레르는 사회적 계급의 허위성과 '부르주아' 계급에 예속된 살롱 미술비평을 비난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예술비평에서 정통성을 주장하고 악의는 없다고 하지만 성격 없는 부르주아를 위한 비평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한편 부르주아 사회를 위한 긍정적 미술비평으로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 계급의 미술 수용을 인정하면서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예술적 가치를 밝히는 역할로 "몇 마디 소개"는 계속된다. 동시에 그는 어떠한 사회 계층의 악덕을 묘사하는 것을 자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들 주변에 너무나 많은 계층이 존재하고 끝없는 부정의 부정은 미술비평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 번째 살롱평을 전개하면서 24세의 보들레르가 제기한 문제는 좋은 것이 좋다고 하는 부르주아적 계층을 위한 심사위원의 성격이다. 체계적인 반대와 날카로운 비평을 요구하고자 하였던 보들레르로서는 모두에 대한 경멸을 갖고 있으면서도 처음에는 자제와 분별력을 보여준다. 특히 심사위원을 임명하는 방법과 작품의 양식, 전시회 횟수 등 등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요구하고 있다.이러한 해결 방안은 심사위원들의 판정에 만족하여, 예술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게 되면서 군중들의 경멸적인 비난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1845년 살롱평 첫번째 비평문인 "몇 마디 소개"에 이어서 두 번째 장은 '역사화'를 제목으로 하면서 맨 처음 들라크로아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들라크로아는 이미 1824년 <키오스의 학살>을 발표하여 신고전주의에 대항한 낭만주의 예술로 알려진 화가이다. 여기서 보들레르는 1845년 출품된 들라크로아의 작품 <사막의 막달리아 마리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언>, <금광맥을 가르키는 무녀>, <신하와 근위병에 둘러 쌓인 모로코의 술탄>에 국한시켜 낭만주의 미술의 성격규정보다 작가에 대한 열렬한 개인적 찬사를 보낸다. 들라크로아의 낭만주의 미술 예찬과 이어서 논하는 것은 당시 가장 많이 등장하였던 신고전주의 성격의 역사화와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 뎃상-판화, 조각 순의 작품 해설과 비평이다. 본 비평문에서는 역사화 29명, 초상화 16명,풍속화 25명,풍경화 26명,소묘,판화 13명, 조각 14명으로 총 123명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보들레르는 들라크로아와 베르네, 오술리에 등 역사화가와 풍경화의 코로 등 몇 명만 제외하고는 간단한 작가 소개로 그친다.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작가 중심의 서술적 비평은 지나치게 나열식으로 전개되어 심미적 미술비평과 거리가 먼 느낌이다. 후에 보들레르는 자신이 쓴 <1845년 살롱미술평>에 커다란 불만을 가졌던 것도 전시회 전체를 설명하는 일반적 살롱비평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2)<1846년 살롱> 미술비평
1846년 살롱평은 1845년 살롱평과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서문에서 부르조아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시작된 이 평문은 예술의 기득권층 반성이나 지성과 힘을 바탕으로 미술비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이 담겨진 글이다. 특히 1846년 살롱평에서 그는 비평의 의미와 새로운 미술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하는 나름대로의 원칙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총 18개의 장으로 소제목을 붙혀 편성된 살롱평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장에서는 <1.좋은 비평이란 무엇인가?>하는 자신의 비평관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2.낭만주의(Romantisme)이란 무엇인가?> , <3.색채로 부터(de la couleur)>, <4.으젠느 들라크로아>, <5.타싸르(Tassaert)와 사랑의 주제>, <6.몇몇 색채주의자들>, <7.관념적 표현과 모델>, <8.몇몇 소묘가들>, <9.초상화>, <10.멋진 작품과 진부한 작품>, <11.호라스 베르네(H.Vernet)> , <12.의혹과 절충주의(l'Eclectisme)>, <13.감상적 싸인과 아리 쉐페르(A.Scheffer)>, <14.몇몇 의혹자들>,<15.풍경화>, <16.왜 조각은 지루한가?> ,<17.노동자와 학교>, <18.현대생활과 영웅주의(Heroisme)> 등이 있다. 1846년 살롱평은 이처럼 작가 개개인을 다루기 보다 18개의 장을 통해 예술 전반의 비판적 주장과 특정 작가, 특정 분야를 다루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심미적 성격이 드러나는 미술비평에 관한 글이다. 과연 좋은 미술비평이란 무엇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비평관을 명확하게 말한다. " 나는 재미있고 시적인 비평이 가장 훌륭한 비평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 다시말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식으로 의도적 감정이 제거되고 증오와 사랑이 결여된 비평을 원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좋은 그림은 예술가에 의해 본질이 반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비평이란 지성적 감성에 의해 그림을 반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그림의 가장 훌륭한 설명은 소네트(短詩)나 엘레지(悲歌)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시적인 비평을 요구하는 보들레르의 미술비평관은 분명 전통적 작품에 적용시키기 힘들다. 단순한 작품 해석이 아닌 창작의 의미를 강조한 하나의 소네트와 엘레지로 비평문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보들레르는 비평의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하고 있다. 현대적 비평은 편파적이고 정열적이며,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 시각을 유지하면서 더 넓은 시계(視界)를 를 열어주는 비평을 강조한다. 비평가의 자질에 관해서도 일정한 기준을 제시한다. 즉, "비평가는 근원에서 이끌어낸 기준을 갖춘다음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러나 비평가는 비 인간적일 필요는 없다. 정열이란 서로 유사한 기질을 접근시키고 새로운 차원에서 이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스땅달은 '회화란 구축된 도덕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술이란 도덕을 떠나 언제나 각자의 감정과 정열, 꿈에 의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총체 속에서 다양함, 혹은 절대성의 다양한 얼굴이기 때문에 비평은 순간 순간마다 형이상학과 관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평은 작품에 나타난 시각적 대상의 해석보다 내용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것이다. 외적인 것을 수용하면서도 "비평이란 각 순간마다 형이상학과 관계"를 강조하는 태도는 미술의 표현양식 이전에 표현의 순수성을 다루고자 하는 심미적 태도가 된다. 1846년 살롱평은 비평의 목적이나 비평가의 입장을 다뤘다면 그 후의 세분화된 장에서는 미술가들의 태도와 작품 분석이다. 보들레르는 화가들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기질(temperament)'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순수성(naivete)'을 말한다. 왜냐하면 기질이 없는 화가는 그림을 그릴 자격이 없기 때문이며, '순수성'을 담고있지 못한 작품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작품은 그 자체에 어떤 절대적 관점에서 구상되어지는 것이며, 예술의 최대 적은 '모방자'와 '절충주의자', 즉 모든 상투적 묘사와 손재주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들레르는 이처럼 절충과 상투적인 것들을 나쁜 그림으로 분류한다. 당시 유명하였던 호레이스 베르네를 통속적 작가로 분류하면서 멋진 손재간으로 만들어진 신문 삽화라고 하면서 창의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또한 쉐페르나 메소니에 그림도 색채의 풍부함이나 매력적인 이야기 그림으로 칭찬을 받고 있으나 무엇보다 이들의 그림에 개성과 소박한 맛, 그리고 예술가적 기질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이와 같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보들레르의 주관적 비평은 '낭만주의'와 이를 대표하는 들라크로아의 예술세계를 예찬하는 글이 만들진다.
3)낭만주의와 들라크로아
1845년과 1846년 살롱평에서 특히 주목되었던 것은 보들레르의 낭만주의 해석과 들라크로아(E.Delacroix 1798-1863) 작품 비평이다. 보들레르는 살롱평을 통해 앵그르의 완벽한 기교나 도미에의 데상력을 열렬히 찬양하기도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들라크로아의 예찬과 낭만주의를 바탕으로 한 심미적 미술비평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낭만주의 미술은 가장 현대적이며, 최신의 미적 표현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습관처럼 많은 미적 형태들이 있다. 진보의 철학이 이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도덕체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사랑이나 종교 등등과 같은 관념들,...낭만주의는 기술적인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도덕적 태도와 예술관에 의해 구성된다." 다시말해 낭만주의는 화가가 선택한 주제나 자연의 재현이나 모사에 있지 않다. 낭만주의는 에술가의 감정에 의해 나타나며, 느끼는 방법을 중요시한다. 보들레르는 자연을 재현하기 위해 외부를 철저히 바라보듯, 낭만주의 예술가는 내부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술적 완벽함과 낭만주의와 동일시 하는 것은 위험하다. 낭만주의자들은 과거의 예술가들이 알지 못했거나 경멸하였던 인간의 본성과 인간적 상황을 알고자 한다. 여기서 보들레르는 근대미술(modern art)의 대표로 서슴지 않고 낭만주의를 말한다. 낭만주의 미술에서 강조하였던 색채나 무한에의 갈망, 그리고 상상력과 정신성 등이 나타나면서 분명 과거와 다른 예술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낭만주의 미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조형 요소는 색채이다. 보들레르 자신이 색채의 중요성과 편애를 아끼지 않으면서 색채를 낭만주의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그에게 색채는 곧 낭만주의를 말하며, 한편 현대성을 의미한다. 낭만주의는 미에 관한 가장 적극적인 표현으로 시대를 앞서 간다고 설명한다. 소묘는 '물질주의자'나 '자연주의자'로 끝나는 것에 비해, 색채는 이상주의자이며, 정신주의자로 해석하고 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며, 현실 저편의 피안을 감지하게 하는 색채야말로 낭만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조형요소인 것이다. 낭만주의를 지역적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즉, 유럽에 있어서 북부를 낭만주의로, 남부를 자연주의라고 한다. 즉, 남부는 자연이 너무 아름답고 청명하여 자신이 보는 것 이상의 아름다운 것을 창작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북부는 어둡고 불안한 자연 속에서 화가들은 무한의 심연 속에서 길을 잃고 있지만 환상을 그리려는 꿈을 계속 꾸고 있다는 것이다. 렘브란트를 순수한 색채주의자로 보지 않고 조화주의자로 보면서 우리의 감정과 꿈을 소중히 하려는 낭만주의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낭만주의는 그 얼마나 독창적 감명을 불러 일으키고, 또 얼마나 찬미할 만한 것인가?"라면서 근대미술에 있어서 낭만주의 예찬을 하게된다. 낭만주의가 유럽의 예술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과 사회사』에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자신의 감정과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낭만주의는 서양의 정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정신은 유토피아와 동화되면서 무의식과 상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현실로의 도피와 주관적, 자기중심적이 된다. 1846년 보들레르의 두번째 미술평론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들라크로아의 작품이었으나 사실 더 강조되는 것은 낭만주의에 관한 정의이다. 보들레르는 살롱평을 통해 현대적 특성과 현대미술을 연결시키면서 낭만주의를 예로 든다. 즉, 현대성은 곧 낭만주의 예술이 되었으며, 낭만주의 예술가로 들라크로아가 나타난 것이었다.
낭만주의 미술의 대가로 칭송을 받는 들라크로아는 보들레르의 말처럼 '위대함이 넘치는 역사화'를 그린 화가이다. 1845년 첫 살롱평에서 "들라크로아는 고금을 통해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평가하였던 보들레르이다. 오늘날에도 들라크로아는 낭만주의 거장으로 상상과 현실을 체험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내면성(l'intimite)에 가득찬 강렬한 색채의 그림을 그린 화가로 알려졌다. 특히 보들레르는 드라크로아의 상상력과 음악적 색채에 초점을 맞춰 써나간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놀라운 색의 조화는 때때로 음악의 하모니와 선율을 꿈꾸게 하며, 그의 그림에서 얻는 인상은 대단히 음악적이다." 그리고 "들라크로아의 상상력 ! 그의 상상력은 종교의 어려운 경지까지 기어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늘이 지옥과 전쟁과 올림프스산과 관능과 함께 모두 이 화가에 속한다. 이로 인해 그는 시인의 자질을 갖춘 화가의 전형이다!"라고 예찬한다. 들라크로아의 상상력은 낭만주의를 "주제의 선택이나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어지는 것과 일치된다.
'상상력'은 보들레르의 심미적 비평에 근원이 된다. 그는 상상력의 이름 아래 들라크로아의 미학을 찬양하고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1859>년 마지막 살롱평에서 보들레르는 제4장을 <상상력의 지배(Le gourvernement de l'imagination)>를 쓰면서 '상상력'과 연결된 들라크로아의 작품을 분석한다. 들라크로아의 작품에 나타난 상상력은 인간이 가진 가장 소중한 열정으로 서정의 극치와 격렬한 기쁨을 준다. 아울러 "그의 작품은 작품은 철학적 견고함과 번쩍이는 재치, 그리고 타오르는 열정의 찬탄스런 복합물입니다."라고 보들레르는 들라크로아를 극찬한다. 당시 낭만주의 회화가 고전주의만큼 인정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상상력의 불신이나 장엄함의 결여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것을 예술의 퇴보라고 말한다. 테크닉만 가지고는 상상력의 정복이 어렵다고 말한다. 반대로 지혜를 사랑하면서 테크닉의 완성도와 같이 상상력은 풍부한 광휘를 발휘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살롱전에 출품되었던 들라크로아 작품에 관한 비평은 대단히 흥분한 상태에서 쓴 감상적 비평이다. 사실적 기술보다 추상적이며 최상의 언어로 마음 속에 느낀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 1845년 출품된 <사막의 막달라 마리아>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언>에 관한 내용을 보면, "아주 부드럽고 온화한 색채", "이 색채는 유례없이 완벽한 과학에 속한다.", "얼마나 날카로운 에스프리인가 !", "격렬한 독창성을 잃지 않은 채 항상 잔인하고 맹렬하다. 이같은 녹색과 적색의 균형은 우리들의 영혼에 응답한다." 등 등이다. 특히 색채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한 작품 해석은 낭만주의 미술을 설명하는 열쇠가 되었으며, 보들레르의 심미적 미술비평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한 1846년 살롱평에서는 들라크로아의 초기 작품인 <지옥의 단테와 버질(1822)>, <키오스의 학살(1824)>과 <알제리의 여인들(1834)> 등 대표적 작품을 다루면서 보들레르의 심미적 비평은 더욱 힘을 발휘한다. 당시 이러한 작품들이 발표될 때 분위기를 "진정한 혁명의 표시인 이 아름다운 그림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방약무인한 폭소와 놀람, 어리둥절, 분노, 함성, 또는 열광"이라고 표현하면서 이제 들라크로아에게 그 반대로 영광을 되돌리고자 한다. 왜냐하면 보들레르의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로 내세웠던 내면성(intimite)이나, 정신성(spiritualite), 그리고 무한에의 갈망이라는 상상력(imagination)이 들라크로아 작품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5. 맺는 말
일반적으로는 보들레르는 <악의 꽃>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여 근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시인으로서의 보들레르, 그러나 그의 짧은 생애 속에서 미술비평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살롱전을 중심으로 씌여진 그의 미술비평은 근대 미술비평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현대적 삶(la vie moderne) 속에서 자신이 예찬할 수 있는 미술가와 미술 작품을 찾았다. '현대적'임을 강조하였던 보들레르의 미술비평은 '순수한 예술'을 정의하고자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예술가는 무엇보다 힘있는 계층과 타협하지 않아야 하며, 현실이나 사회, 정치적 목적에 따라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모더니즘 예술에 있어서 '예술을 위한 예술'과 일치한다. 예술의 자율성으로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그의 미학은 심미적 미술비평은 근간을 이룬다. 순수한 예술은 심미적 비평을 낳으며, 여기서 비평 역시 외부의 어떠한 목적도 배제하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심미적 비평에 결정적인 단어-열쇠가 되는 것은 1)초월적 자연관과 2)상상력, 3)현대성과 4)기이한 아름다움으로 불리우게 되는 현대적 미의 정의이다. 첫 번째 요소로 등장한 초월적 자연관은 신비주의나 정신주의에 가깝다. 즉, 자연을 하나의 단순한 사전으로 해석하면서 그 속에서 예술가들은 초월적 힘을 찾아내야 한다는 자연관이다. 그리고 예술과 자연, 자연과 인간,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자연으로 이야기 되면서도 창조적 상상력을 가지고 자연에서 출발한다는 보들레르의 자연관과 상상력의 연결이 놀랍다. 또한 이것을 현대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해석과 낭만주의와 연결시킨 미의 정의를 나타내면서 "일시성, 순간성, 우연성"을 바탕으로 독특한 심미적 미술비평의 규범을 탄생시킨다. 보들레르는 위의 4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미술비평을 시작한다. 그 구체적인 예가 <1845년 살롱>과 <1846년 살롱>, <낭만주의와 들라크로아>의 미술비평이다. 1845년에는 살롱전에 참가한 장르별 미술가들 전원을 약간씩이나마 언급하면서 들라크로아의 출품작을 예찬하는 비평문이다. 약간은 인상적인 비평과 기록적인 면에 치우쳐, 독자적 미술비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나 곧바로 1846년 살롱평에서는 참여 작가 전원을 다룬 것이 아닌 몇몇 작가를 선정하여 초월적 자연관과 상상력, 현대성, 그리고 현대적 미의 규범을 바탕으로 비평을 하는 변화가 이루어진다. 특히 낭만주의 예술의 가치를 어느 누구보다 먼저 일깨워 주었던 보들레르의 글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현대미술의 기원을 낭만주의 사상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들라크로아의 작품에서 색채를 음악과 비교하여 설명한 것이나, 마술적 힘을 가졌다는 색채 설명은 예술에 있어서 정신성을 강조하는 추상미술 비평의 근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을 구별하려고 노력하였던 보들레르는 미술비평은 즐겁고 시적으로 쓰여지길 원했다. 사랑과 증오를 동반한 미술비평을 주장한 보들레르, 이것은 너무 감상적이고 극단적이나 미술사가의 체계적이고 분석적 작품 연구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느낌이다. 모방자와 절충주의자를 밝혀 내고자 하였던 보들레르의 미술비평은 사랑과 증오의 극단을 오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심미적 태도를 유지한다. 오늘날 보들레르의 미술비평이 다시 주목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와 같은 심미적 주관주의 성격이 다양한 변화를 펼쳐 보이고 있는 현대미술 비평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성과 자율적 미, 시대성을 바탕으로 이루지는 미의 개념 변화를 쫓을 수 잇는 것은 객관적 형식 분석보다 주관적 심미성을 바탕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보들레르는 19세기 근대미술뿐만 아니라 20세기 현대미술에 있어서도 미술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던 미술평론가 중의 한사람으로 주목될 것이다. *
*보들레르 연보와 미술비평 (1821-1867) :
1821년 파리에서 출생. 1827년 67세로 부친 사망. 1828년 모친(39세) 오픽 소령과 재혼 1836년 루이 르 그랑 중.고등학교 기숙사 생활 시작 1839년 대학입학 자격시험 합격 1840년 파리에서 방탕한 생활 시작 1841년 인도행 숭선 1845년 <1845년 살롱> 미술평론 1846년 <1846년 살롱> 미술평론, 코믹 캐리커춰 미술평론 1847년 소설 <라 팡파르로> 발표 1851년 <악의 꽃> 시11편 발표 1853년 애드가 알렌 포의 <까마귀> 번역 1855년 <악의 꽃> 시18편 발표, <1855년 국제전>미술평론 1857년 <악의 꽃> 발간 1859년 <1859년 살롱> 미술평론, <철학적 예술론> 1861년 <들라크로아의 벽화> 해설 1862년 <사르다나팔 전시> 해설 1863년 <현대생활의 화가> 평론 1864년 강연을 위한 <들라크로아 예술론> 1865년 애드가 알렌 포의 번역집<진지지하고 괴이한 이야기> 발간 1866년 브뤼셀 방문중 졸도, 반신불수와 실어증 걸림 1867년 46세로 사망 *
*참고문헌
Baudelaire Charles, Ecrits sur l'art 1.2., Paris : Ed Gallimard, 1971 ---------------, Ecrits esth tiques, Paris:UGE, 1992 ---------------, Selected writing on art & artists, New York: Cambridge U.P. 1972 ---------------, 『화가와 시인』, 윤영애 역, 열화당,1979 ---------------, 『악의 꽃』, 김붕구 역, 민음사, 1974초판, 1995개정판 Decaunes Luc, Charles Baudelaire, Paris : Ed Seghers, 1968 Ferran Andre, L'esthetique de Baudelaire, Paris : Librarie Nizet, 1960 Moshe Barasch, Modern theories of art 1, New York :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0 Richard Andre, La critique d'art, Paris : Ed P.U.F.Que sais-Je, 1980 ------------, 『미술비평사』, 백기수,최민 역, 열화당, 1981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근세 上下』, 염무웅 역, 창작과 비평사,1995 임영방, 『현대미술의 이해』,서울대 출판부, 1987 심재상, "老莊的 視覺에서 본 보들레르의 詩世界", 서울대학교 불문과 박사학위 논문, 1994
R sum Une tude de la critique esth tique chez Baudelaire Jae-Kil Yoo
Nous nous proposons dans ce travail d' tudier 'la critique esth tique chez Baudelaire. Cette recherche se veut une approche pour mieux faire comprendre les propositions et les critiq1ues d'art de Baudelaire. La critique de Baudelaire est l'expression!! de la crise de notre temps. Les entrevues t rares mais l'influence du peintre a t d cisive pour le critique. D but dans la carriere litteraire : publication du et particuli rement , , etc... Le Salon de 1845 n'est qu'un d but, encore maladroit, que l'auteur d savouera. Les oeuvres ma tresse sont , qui, dans le sillage de Delacroix, exalte l'imagination et condamne le modernisme. Dans le chapitre de notre tude vise le trajet imaginaire de Baudelaire refl t dans ce miroir : Nous analyserons dans ce travail trois probl matiques maieures, qui sont premi rement de 'la Nature' dans le critique, par exemple - ; "La Nature est un temple ou de vivants piliers, Laissent parfois sortir de confuses paroles, L'homme y passe a travers des forets de symboles, Qui l'observent avec des regards familiers." Deuxi mement : nous parlons du degr et de la port e de 'L'imagination' et puis nous ne dirons que quelques mots du 'Gourvernement de l'imagination'. C'est par lui que se sont transmises les conceptions que nous venons de d terminer chez Baudelaire, le premier des grands po tes modernes qui a t en m me temps le premier critique de l'art, et galement celui d'une nouvelle conception de l'art. Troisiem ment : l'import!!ance de la modernit dans la critique de l'art. Nous consid rerons les ph nom nes du critique dans la vie moderne. "La modernit : c'est le transitoire, le fugitif, le contingent, la moiti de l'art, dont l'autre moiti est l' ternel et l'immuable." Finalement, nous verrons le nouveau esth tique chez Beaudelaire. Qu'est que c'est 'Le Beau' : "Le Beau est toujours bizarre." On ne veut pas dire qu'il soit volontairement, froidement bizarre, car il serait un monstre sorti des rails de la vie. Baudelaire dit qu'il contient toujours un peu de bizarrerie dans la vie moderne. En effet, dans ce travail d' tudier 'la critique esthetique' chez Baudelaire qu'il se trouve en nouvelle conception de la critique d'art. Une tude de la critique d'art est consacr e au Baudelaire romantiste. Fils du Romantisme, il se croit maudit et damn , d'o r sulte son univers caract ristique que nous voulons nommer 'le critique esth tique'. Il vise le Baudelaire qui renonce a la vision monarchique pour revenir chercher un asile dans l'impecable na vet . C'est ainsi qu'il pourra introduire dans son monde po tique au lieu de l'artificiel. Sa critique de l'esth tique est l'expression!! d'un pouvoir createur de celui qui est parvenu a trouver l'indentit des deux id es contradictoires : 'l'imagination' et la nouvelle conception de l'a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