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서울이 <경성>으로 불리웠던 때가 있었다. 그전에는 뭐라 불렀을까.반도조선의 입장에서는 <한양,한성>이라고 불리웠다고 하며 이것이 어릴때부터 교과서에서,신문에서,방송등에서 보고 들어온 내용인 것이다.지금도 그렇단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글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사라진 서울-20세기초 서울사람들의 서울 회상기/강명관 풀어 엮음/중앙일보 정재숙 선임기자 2010.1.16]
가수 조용필의 노래 가사에서 서울은 ‘그리움이 남는 곳’이다. 급기야 서울은 ‘오 마이 러버’로 칭송된다. 이용의 노래에서도 서울은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곳인지라 ‘사랑하리라’는 경탄을 자아낸다. 서울은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이다. 시시각각 꿈틀대는 서울은 알고 보면 500살이 넘은 꽤 늙은 애인이다. 100살을 채 못 살다가는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저마다 얘기 보따리가 큼직하다는데 서울은 오죽할까. 그런데도 전문 연구자들 말을 들어보면 서울에 관한 자료가 흔치 않단다.
‘오호! 이 어찌 급히 바뀌었던고?’라고 동시대인도 탄식했을 만큼 20세기 초 서울은 가파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이 큰 요인이었지만 서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중요 동력이었다. 남의 나라 땅이 된 낯선 서울이 갑자기 소중하게 다가왔기 때문일까. 조선시대 서울이 본격 사라지는 순간에, 떠나가는 애인을 붙들듯 경성 깍쟁이들은 회상을 쏟아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24년 6월부터 8월까지 ‘동아일보’에 50회에 걸쳐 연재된 ‘경성백승(京城百勝)’이다. 각 동리에 살고 있는 독자들이 써 보낸 동네 명물 사연을 사회부 기자들이 다듬어 엮었다. 당대의 문장가인 벽초 홍명희와 위당 정인보가 기획을 한 만큼 내용이 충실하고 해학이 넘친다. 일종의 풍물지이자 인류학 보고서다.
서울을 "500살이 넘은 꽤 늙은 애인"이라고 근사하게 표현한 감수성이 매우 부럽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헛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였다면, 이 늙은 애인은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
경성(京城)은 도읍의 성으로 보통 <수도>를 이른다. <경성>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진다.
경성부(일본어: 京城府 게이조후)는 일제 강점기 때에 존재했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해당한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에 일본 제국의 조선 식민 지배의 행정 중심지로서 경성부로 불리게 되었고, 경기도에 편입되어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잠시 경성으로 불렸으나, 1946년 9월 28일 미군정에 의하여 경기도에서 분리해 서울특별자유시(―特別自由市)가 되었다.이후 대한민국 정부 출범 다음 해인 1949년 8월 15일에 서울특별시가 되었다.
1920년대 일제강점하의 문화정치기에는 다수의 신문과 잡지가 창간되었는데, 이로 인해 발행 부수에 대한 경쟁이 촉발되었고 각 신문은 발행부수 확보를 위해 미디어 이벤트를 진행했다. 1920년에 창간되어 당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지닌 동아일보는 1924년 독자가 직접 참여하는 ‘내 동리 명물’을 기획하였고, 당시 서울의 각 동리에 살던 독자들이 투고한 글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들이 손을 본 뒤 게재한 것으로 이것이 1924년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일백정(一百町) 일백물(一百物), 내 동리 명물(名物)’이며, 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경성백승>의 '원조'인 것이다.
동아일보의 당시 취지를 보면, 더운 날씨에 독자들에게 위안거리를 제공하고자 함이라 한다.
"여름이 점점 깁허감니다. 도회의 여름이라 더욱 괴롭습니다. 그래서 훈훈하고 텀텀한 긔운이 머리로부터 발끗까지 둘러싸어 그야말로 눈뜨고도 꿈꾸리만콤 사람의 정신을 느른하게 히고 흐리터분하게 합니다. 이때를 당하여 본보를 사랑하시는 독자제씨에게 훌륭한 위안거리는 선사치 못한다 하더라도 날마다 여러 분 압헤보희는 긔사자톄로써 대신할 방법이 업슬가하고 연구한 결과 위선이 것을 시험하려고 하얏슴니다. 서울은 여든다섯군대의 동(洞)과 일백한구대의 뎡(町)이 잇슴니다. 그런데 어느 동리에든지 반듯이 그 동 리의 명물이 잇슬것이외다. 전례를 들면 종로에 종각, 서소문에 아편굴 가튼것이외다. 이와가튼 명물을 별항에 지뎡한 일백동뎡에 일백가지를 추리여 하루에 둘식 자미잇는 긔사와 사진을 아울러 날마다 계속 게재하여 독자제씨의 취미와 실익을 도읍는 동시에 아래의 규뎡에 따라 약간의 선사를 드리려 함니다. "
이렇게 나온 1924년의 100가지의 동리명물 이야기가, 1929년(혹은 27년)에 정가 50전에 책으로 엮어져 나올때는
<경성백승>이란 거창한 제목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경성부내에 186개의 정(町)과 동(洞)이 있었지만, 내동리 명물의 선정 범위는 경성시내 100개 동리로 한정하였는데, 이는 186동리 전부를 대상으로 하면 지루하고, 101곳의 정은 대부분 일본인 중심의 지역이기 때문이어서 85개 동과 조선인 중심의 15개 정을 선정하였다. 내동리 명물의 선정은 훌륭하고 좋은 것이 아닌 그 동리에서 가장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대상의 좋고 나쁨,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그 동리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입에 오르내리면 명 물로 선정하였다. - 내동리 명물로 선정된 대상들을 유형화하면, 건축요소 54건, 생물요소 17건, 마을 및 장소 14건, 기반시설 13건, 기타 2건으로 분류된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경성>은 당시의 지명이름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100가지의 동리 '명물'을 80여년전의
정인보나 홍명희같은 편집자들이 <백승>이라는 과장된 허울을 씌웠던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하는 것이다.
"빼앗긴 들에서"의 동네 명물에 대한 어떤 자조적인 뉘앙스라도 주고 싶었던 것일까...
강명관의 <사라진 서울>이란 책은 아직 못 구해 보았지만 80년 전의,<경성백승>의 많은 부분을 참고,인용한 듯 하다.
강명관(1958.대한민국의 한문학자,대학교수)은 이것을 1차사료로 선택하여, '사라진 서울'을 회상하고, 증명하는 듯 한데, 근본적인 오류는 '일제때'의 <경성>을 '조선시대'의 서울로 같이 뭉뚱그려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강명관에 따르면,
"100년 전인 20세기 초 신문과 잡지들이 갑자기 서울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은 당시 서울이 마치 지금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고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광화문 광장과 피맛골의 변화처럼 100년 전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도 같은 진통을 겪었다. 일제는 1909년 창경궁 안의 전각을 헐어낸 데 이어 1915년 식민통치의 효과를 선전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경복궁의 주요 건축물을 훼손했다. 총독부와 조선신궁 등 식민통치를 위한 건물들이 지어지는 등 근대건축물이 서울시내에 들어서면서 서울성곽도 크게 훼손됐다. 조선시대 서울은 19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500살이 넘은 우리 옛 애인은 버뮤다 삼각지대(대륙)에서 홀연히 사라졌지, 반도의 새서울에서 사라진것이 아니다.
빼앗긴 산과 들에서 무슨 서울의 모습을 간직하려고 신문들이 애를 썼을까.
그리고 이 <사라진 서울>을 소개하는 기자의 "경성깍쟁이들의 회상"이라고 아무렇게나 얘기하는 이 편안함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하나.기획의도가 더위를 물리치고자 한 일환에, 동네 이야기거리를 모아 놓은 것인데, 뭔 나라를 잃은 깍쟁이들의 낭만에 겨운 회상이라는 것인지... 다 자기 입맛에 맞는 해석이다.
반도의 서울이 <경성>으로 "개명"된 채로 영원히 남아있을수도 있었다.
<경성백승>이란 책으로 묶여 나올때에도,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 유명한 표현대로, "해방은 도둑처럼" 왔으니까...
요즘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를 보고있다.이 역시 백년후에는 어느 부분 사라진 '반도'의 서울을 보여주게 되겠지만,
매번 동네 여기저기에서 줄기차게, 짬짬이 조선을 끌어당기는데는 정말 할말이 없다...
첫댓글 작년 8월쯤에, 고하 송진우를 검색하던중, 경성백승에 대해서도 알게되었습니다. PDF 파일로 되어서 거인의 숨결(221 페이지)과 같이 일단 프린트해 놓았고, <거인의 숨결>은 근대사 관련부분이라 동시대의 관련인물들을 다 읽어야 판단이 될것 같아 한켠에 놓았습니다. 경성백승은 일람하여 보니, 몇군데 공유할 부분이 있었으나 이 역시 고 이규태씨의 개화백경을 읽지 않고는 미흡할듯하여 미루고 있던차, 최근에 제가 올린글에 도깨비장난질이 붙어서 조회수가 급증하여, 경성백승 88번째 의주통 '독갑이골"이 생각이 나서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김영철과 6.25 등등이 결국 이렇게 글을 올리게 하였습니다.사실, 이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니, 500살 넘은 늙은 애인을 더 늦기전에 찾아야 되지 않겠나"였는데, 너무 계몽적인 말투라 삭제,수정하였습니다. 제 나름대로 아픈 내용을 에둘러 말하느라고 아주 아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경성백승에 나온 몇가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력이 아주 훌륭해 보이십니다. 나중에 올려주신 글들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셔도 좋은 작품이 될것으로 보입니다. 주제선정이 참신하고 아직 해보지 않은 부분 그리고 잊혀져 가는 부분을 재가공하여 글을 올리신 것이 아주 좋다는 생각입니다. 지속적인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제글은 선생님들의 옥고에 비하면 일종의 추임새일뿐인데요... 감사합니다! 늘 건필하시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