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황사(美黃寺)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 061-533-3521
전남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 536-922
대한불교조계종 제 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1692년 (숙종 18)에 세운 사적비에 의하면 749년(경덕왕 8)에 의조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돌로 된 배가 사자(獅子) 포구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의조가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하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보니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고 큰 상자 안에 경전ㆍ비로자나불상ㆍ문수보살상ㆍ보현보살상ㆍ40성중ㆍ53선지식ㆍ16나한ㆍ불화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 1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인도 국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通敎寺)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금의인이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고 했다고 한다.
--------------------------------------------------------------------------------------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명승 제 59호)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의 두륜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산이 달마산(達磨山,489m)이다. 해남군 현산면ㆍ송지면ㆍ북평면에 걸쳐있고, 천년고찰 미황사와 어우러져 경관이 빼어나다. 산 이름은 경전(dharma, 達磨)을 봉안한 산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의 지형도에는 達馬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달마대사가 중국에 선을 전하고, 해동의 달마산에 늘 머물러 있다고 하여 달마산이라 이름 지었다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찾아와 달마산을 찬탄하고 예경하였다고 전해진다.
산 능선은 마치 공룡의 등줄기처럼 울퉁불퉁한 기암과 괴봉이 7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남해의 금강산으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 만큼 풍광이 수려하고, 힘찬 기상과 장엄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달마산은 불상과 바위, 그리고 석양빛 세 가지가 조화를 이뤄 아름답다. 특히 산능선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는 남도 제일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황홀하다.
이렇듯 수려한 산세가 아름다운 절, 미황사를 잉태했다.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설화가 있다.
미황사 창건설화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홀연히 돌배 한 척이 땅끝 마을 사자포구에 와서 닿았다. 배 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고자 하였으나 배는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의조스님이 이를 듣고, 장운 장선 두 스님과 신도 백여 명과 함께 목욕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돌배가 바닷가에 닿았는데, 그 곳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안을 살펴보니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과 바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40성중, 16나한, 탱화 등이 있고 금가락지, 검은 돌이 한 개씩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경전을 바닷가에 내려놓고 모실 장소를 의논할 때 검은 돌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날 밤 의조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금의인(金衣人)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전과 부처님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 봉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소에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성상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소 등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눕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걸어갔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소가 처음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뒤에 일어나지 않은 자리에 미황사(美黃寺)를 지어 불상과 경전을 모셨다. 미황사의 ‘미(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에서 따왔고, ‘황(黃)‘은 금의인의 황금빛을 따와 이름 붙였다.
1692년(숙종 18)에 민암이 지은 <미황사사적비>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이 같은 미황사 창건설화는 불교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바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여서 세삼 흥미롭다.
우전국 - 이 창건설화에 나오는 우전국은 지금의 인도이다. 이 나라에 관한 기록은 진나라 때인 3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엄경]의 번역자인 법현스님이 쓴 [법현집]에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우전국은 부유한 나라로 백성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수만 명의 승려들이 대승불교를 배우고 있었다. 법현스님 일행을 맞이한 우전국 국왕은 ‘구마제사’라는 절에 머물게 했는데 3천명의 승려가 살고 있는 큰 사찰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때를 축하하는 축제도 열렸는데 14곳의 큰 사찰을 돌며 14일 동안이나 계속되는 큰 잔치였다.
우전국에는 ‘왕신사’ 라는 큰 절이 있었다. 3대의 왕에 걸쳐 세워진 이 절은 탑의 높이가 75미터나 되었으며 기둥과 창문은 모두 금으로 칠한 화려한 모습이었다. 5세기 초 우전국의 사찰이 얼마나 장관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법현 스님 이후 200여 년이 지나 현장 스님 또한 ‘왕신사’를 방문하였는데 그 곳에 300미터나 되는 탑이 서 있었다. 현장 스님 기록에 따르면 우전국에는 사찰이 100여개, 승려가 5천 여명이 있을 정도로 불교가 크게 번창하였다.
국왕은 스스로 비사천문의 후손이라 하며 불법을 귀히 여겼다. 우전국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남아 있는 것들을 종합해보면 불교를 국교로 하여 나를 다스리던 불교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미황사 일주문
미황사 일주문(一柱門) - 미황사 일주문은 새로 단장하였는지 아주 깨끗한 상태이다.
미황사가 위치하고 있는 산은 달마산이다. 이 미황사를 품은 산이 왜 달마산인지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달마대사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해발 489미터인 달마산은 소백산맥이 한반도 서남쪽의 해남 두륜산을 거쳐 최남단 땅끝을 향해 뻗어 내려가다 남해에 이르기 전에 솟은 바위산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미황사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고, 기록마저 없어졌다. 이후 조선후기 세 차례 걸쳐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다시 번성했고,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승풍을 크게 떨쳤다. 현재 경내에는 ‘해남 미황사 대웅전(보물 제 947호)’, ‘해남 미황사 응진당(보물 제 1183호))’, ‘미황사 괘불탱(보물 제 1342호)’ 등 국가지정 문화재 3점이 있다. 발굴조사 등 고증을 통해 옛 가람배치를 확인하고, 정비계획에 따라 복원불사도 활발하다.
현재 이곳에 머무는 지운, 현공, 금강스님이 1989년에 퇴락한 미황사에 오게 되었다. 흔적만 남아있던 명부전, 삼성각, 종각, 만하당, 달마전, 자하루, 백운당, 청운당, 감로당,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낡은 세심당과 염화실, 향적전을 증축하였다. 15년 넘게 이어진 중창 불사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의 전각은 보물 제 947호인 대웅보전, 보물 제 1183호인 응진당이 있고 그 외에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요사채(후원),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 자하루(누각), 감로다실(종무소) 등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미황사는 일주문을 지나면 제법 가파른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가야 한다. 3년 전 없던 계단이 편리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지만 오히려 불편하다는 분도 계실 듯싶다.
큰 바위 밑에 크고 작은 막대기들이 바위를 떠 받치고 있다. 굴러내리지 말라는 뜻인가. 작은 힘들이 모여서 큰 힘을 발휘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고...
아니면 막대기는 우리 중생이고 바위는 부처님으로 보면 될 듯도 싶다. 중생 모두가 부처님을 우러러 떠 받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미황사 사천왕문 - 현재 불사 중에 있다.
미황사 사천왕문(四天王門) - 미황사 사천왕문은 현재 불사 중에 있다. 아직 편액도 없고 단청도 안 되어 있고, 건물 형태만 완성된 상태이다. 당연히 사천왕상도 아직 모시지 않았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달마선다원을 좌측에 만날 수 있다.
달마선다원
달마선다원(達摩禪茶苑) - 달마선다원은 전통찻집이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용품도 취급하고 있다.
자하루에 오르는 계단
미황사는 전형적인 산지형 가람이라 축대와 계단이 많은 편이다.
미황사 자하루(紫霞樓)
미황사 자하루(紫霞樓) - 자하루는 대웅보전과 마주보며 대웅전과 직선상에 서 있는 누각이다. 2001년에 다시 지었다고 하며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자하루를 누하진입하여 올라서면 왼편에 범종각과 청운당(靑雲堂)이 있다.
자하루의 초석은 자연석을 전혀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초석은 응진당에서도 만날 수 있다. 순서로 보면 응진당을 건립할 때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했고 2001년에 자하루를 새로 지으면서 그대로 자연석을 사용했다고 보면 되겠다.
자하루 후면에는 만세루(萬歲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자하루에서는 이종구 작가님의 "미황사_절집기행"이라는 타이틀로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달마대사 - 자하루 입구 서편에 서 계시는 달마대사
자하루 동편에서 바라본 미황사
자하루를 올라서면 자하루와 마주보며 대웅전이 우뚝 서 있다. 대웅전 앞 큰 마당이 있고 좌우에 종무소와 세심당이 위치하고 있다.
미황사 마당에 들어섰으니, 미황사 주지스님이 쓰신 시 한 수 소개합니다. 제목은 <미황사의 마당>입니다.
미황사의 마당
마당에 들어서면
반갑게 맞아주는
도량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향처럼
따뜻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의 맑은 바람처럼
청정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밝은 보름달처럼
환한 지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아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途)
미황사
이름만 들어도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 면하고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得解脫)
달마산
산문에 들어오는 자 모두 해탈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위의 시의 내용처럼 미황사에 들어서면 반갑게 맞이하는 도량이 있고, 고향처럼 따뜻함, 새벽의 밝은 바람처럼 청정함, 밝은 보름달처럼 환한 지혜가 넘쳐난다. 아울러 미황사 이름만 들어도 삼악도를 면하고 달마산 산문에 들어서는 사람 모두 해탈의 기쁨을 누리게 되리라. 그러한 기쁨을 위해 미황사 참배는 계속된다.
미황사 범종각
미황사 범종각(梵鐘閣) - 범종각에는 범종을 모셔놓았다. 범종각과 나란히 청운당이 위치하고 있다.
미황사 청운당
미황사 청운당(靑雲堂) - 청운당은 범종각 바로 옆에 위치하며 요사채로 쓰이는지 사람들의 신발은 간지런히 놓여 있는데 출입은 금하고 있었다. 청운당은 전각배치도에도 없는 것을 보면 불사를 완성한 것이 아주 최근의 일인 모양이다.
범종각과 청운당이 있는 마당에서 위축대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좌측에 종무소 우측에 세심당이 보이고 정면에 대웅보전이 우뚝 서 있다.
범종각에서 바라본 미황사
미황사 종무소 - 세심당과 마주보고 있다.
미황사 종무소 - 대웅전 앞마당 서편에 위치한 종무소가 있다. 종무소 바로 뒤편 위쪽에 나란히 향적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종무소는 세심당과 마주 보고 있다.
종무소 뒷편에 염화실과 향적당이 위치하고 있다.
미황사 세심당
미황사 세심당(洗心堂) - 대웅전 앞마당 동편에 위치한 세심당은 대웅전 앞마당을 두고 종무소와 마주보고 있는 형태이고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ㄴ'자로 되어 있다. 세심당과 일심관은 마주보고 있는 형태인데 일심관은 ‘ㄱ'자로 되어 있다.
세심당에 걸려 있는 "미수(麋壽)"라는 편액
미수는 '큰사슴처럼 오래 살아라'는 뜻이라고 한다.
당 시대에 이 미수(麋壽)라는 글씨를 가지고 회갑 등을 맞이하는 분에게
"큰 사슴처럼 장수하세요" 라는 의미로 선물을 하곤 하였다고 한다.
편액에는 '노완만필老阮漫筆'이라는 관지가 보인다.
노완은 추사의 또 다른 호이다.( 추사는 100여개의 별호를 사용하였다. )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라는 설과 모작이라는 설이 있는데,
미황사 종무소에서는 추사의 친필이 맞다고 한다.
미황사 일심당
미황사 일심당(一心堂) - 세심당과 일심관은 평소에 참배를 금하고 있는데 공양 때문에 우리는 출입이 가능했다. 세심당은 수련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일심관은 공양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53선지식 단원들도 일심간에서 공양을 하였다.
대웅보전 앞 괘불대와 배례석
미황사 대웅보전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 947호) - 염주를 굴리 듯 한 발 한 발 미황사 입구 돌계단을 타고 오르면 바다처럼 푸른 하늘, 우뚝 솟은 달마산과 그 아래 대웅보전의 팔작지붕이 춤을 추듯 흔들리며 다가온다.
보물 제947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982년에 보수 공사 중 발견된 "대법당중수상량문"(1754년 작성)에 의하면 응진전과 함께 1751년에 중수되었다. 오랜 세월에 씻겨 건물 외부의 단청이 지워지고 나뭇결이 보드랍게 살아 대웅보전을 찾는 이에게 소박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전해준다.
법당 안에는 목조삼존불(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의 닷집은 이곳이 부처님의 집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듯 장엄화려의 극치를 구가하고 있으며, 법당 안에는 소종과 법고, 법고대, 괘불 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천장에는 범어(인도 싼스크리스트어)로 쓰여진 글자와 일천불의 벽화가 있는데 아잔타 석굴 벽화를 연상케 하며 국내에서 보기 드문 수작이다. 특히 천장 곳곳에 그려진 천불의 부처님 때문에 미황사 대웅전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천 분이시니 세 번이면 삼천 배가 되니 어찌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있으랴? 대웅보전은 미황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배(인도에서 경전과 부처님상을 싣고온 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반야용선의 의미도 있는데 이는 중생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는 배를 상징하기도 한다.
미황사의 배흘림기둥의 초석을 보면 연꽃봉오리가 활짝 핀 연화문과 거북, 게 모양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곳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이다. 한편 인근의 미황사 부도에도 이런 조각들이 상당수 있다고 한다.
미황사의 대웅전은 위에서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대웅전과 응진당 사이의 계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온 세상의 업을 이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고 그 시간이 서쪽 바다로 해 떨어질 무렵이라면 마음속 찌꺼기는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이다.
현재 미황사 대웅보전은 단청이 없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고 원래는 단청을 했었다. 그러나 1754년 건물을 중수할 때 단청을 했으나 250여년이 넘는 동안 바닷바람 등의 영향으로 그 고운색이 바랬다.
대웅보전의 기둥은 느티나무이다. 느릅나무과 낙엽송인 이 나무는 우리나라, 일본, 몽골, 중국 등지에 분포해 있다. 주로 동네 어귀에 심어 마을 사람들에게 큰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가 느티나무이다. 이 나무는 질이 매우 튼튼하고 굵어서 생활용품이나 집을 지을 때 사용했다.
현재 기둥의 기초인 주춧돌은 1260년 되었고, 기둥은 400년이 되었고 단청은 250여년이 되었다.
미황사 대웅보전 기둥 초석에는 게 거북이 등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 미황사 대웅보전은 단청이 벗겨진 채로 나무결을 그대로 드러낸 상태이다.
마치 화장을 하지 않은 여인의 맨얼굴처럼...
모든 번뇌와 삼독을 떨쳐버린 진여를 보여주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법당 삼존 개금 및 단청 중수기를 소개한다.
미황사 대법당 삼존 개금 및 단청 중수기
저 묘하고도 장엄한 자리 위
금빛 부처님 벌집 좌우에 펼친 듯,
안팎의 황금 채색 찬란히 화려하니
여러 부처님 상주하시며
용신이 호위하시기 딱 좋은 곳이로다.
본사 연진화상께서 평생토록
대법당 단청과 삼불상의 개금을 원으로 세우셨거늘
풍년 드는 해가 없어 때를 만나지 못하더니
우연히 병을 얻어 경진년* 납월 초에 그만 세상을 뜨셨다.
상좌 율흔 등이 비장하게 마음을 먹고
스승의 재산을 다 모아 도감에게 주었다.
도감이 이 재물을 주재하고
신사년** 삼월 초에 역사를 시작하여
4월 초순에 마쳤다.
이때가 마침 대사의 백일재 날이었다.
그날 밤에 점안을 하고
다음날 정오에는 운수행각을 베풀었다.
모은 재물을 아끼다 쓸모없이 만드느니
스승께서 천상에 오르기 좋도록 다리를 놓아드리는 일,
좋지 않은가?
또 화주인 영운당 순헌 등이
비바람을 마다 않고 마을을 돌며 재물을 모아
마음을 모아 동참한 공도 또한 참으로 아름답다.
여기 보시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무판에 새겨
산문에 길이 남기는 것은
지금 우리가 옛일을 기억하듯
후일에도 오늘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 황금빛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라노라.
참으로 좋은 일이다.
도광 2년 신사*** 3월일에 소림자 맹일이 기술하다.
* 경진년은 조선 순조 20년, 서기 1820년이다.
** 신사년은 조선 순조 21년, 서기 1821년이다.
*** 도광 2년 신사는 조선 순조 21년, 서기 1821년이다.
대웅보전에 모신 삼존불 -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 아미타불
선묵혜자스님은 <53 기도도량>이라는 책에서 미황사를 '미타도량'으로 분류를 해 놓으셨다.
미황사 대웅보전 내 신중탱
미황사 괘불함
미황사 천정에는 산스크리트어 문양이 있고, 내벽에는 천불을 봉안하였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황사 대웅보전의 초석에는 게와 거북이 그리고 연꽃을 새겨 놓았고, 그리고 삽모양의 문양도 볼 수가 있다. ( 삽모양을 달리 보이시는 분 댓글 부탁합니다. )
미황사 동영상
미황사 응진당
미황사 응진당(應眞堂, 보물 제 1183호) - 대웅보전에서 석축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규모의 응진전이 외벽 담을 두르고 서 있다. 미황사의 副佛殿인 응진당(보물 1183호)은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에 아난,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고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동자상 및 불패가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水墨)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 맛이 선필(禪筆)의 경지를 보인다.
건축연대는 1982년 대웅전 보수공사 때 대들보에서 나온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대웅전과 같은 해인 1751년 상량(上樑)된 것으로 18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미황사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선 달마산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남도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린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선을 전하고 해동의 달마산에 늘 머물러 있다고 하여 달마산이라 이름지어졌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찾아와 달마산을 찬탄하고 예경하였다고 전해진다.
응진(應眞)은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훤히 깨닫고 해탈에 이른 이들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라한’의 한자어이다.
1993년 전남도지정 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되었고 2001년 보수공사를 마쳤다.
응진당 내벽화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水墨)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 맛이 선필(禪筆)의 경지를 보인다.
응진당에서 내려다 본 미황사
응진당 마당은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이 응진전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일품이다. 특히 해질 녘 진도와 그 밖의 뭇 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미황사 응진당 앞에서 단체 사진
미황사 만하당
미황사 만하당 - 미황사 만하당은 응진당 바로 동편에 위치하며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현재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대웅보전과 응진당
미황사 명부전(冥府殿)
*미황사 명부전(冥府殿)
諸惡莫作(제악막작) 모든 악은 짓지 말며
衆善奉行(중선봉행)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며
自淨其意(자정기의)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한다면
是諸佛敎(시제불교)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착한 일에는 즐거움이 따르고 나쁜 일에는 괴로움이 따름을 설하여 인과(因果)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괴로움에서 벗어나 천상에 태어나도록 하는 법문이다.
이 인과법(因果法)에 무지한 사람은 지옥에 나게 되는데 이 지옥중생까지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시고 자신의 성불을 미루신 분이 바로 지장보살님이시다. 그래서 지장보살님은 흔히 죽은 이를 위한 변호사로 불린다.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는 업경대가 놓여 있는데 이는 저승에 당도한 망자가 평생에 있었던 사소한 사건까지 업경에 영상으로 비치며 지나가고 그에 따라 서기가 옆에서 죄목을 일일이 두루마리 문서에 받아 기록한다. 이 문서를 저울에 달 때 무게가 나가는데 죄가 무겁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이런 장면들이 시왕탱화에 묘사되어 있고 지장보살님은 업경대 옆에서 죄를 가볍게 처리하도록 변호하여 주는 것이다. 이런 지장보살님을 모신 곳이 명부전이고 미황사의 명부전은 대웅보전 옆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명부전 안에 있는 시왕을 조각해 모신 사람은 '자화상'이 국보로 지정되어 유명한 공재 윤두서다. 그가 명부전에 10대 시왕을 모신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 절 근처에 있던 은행나무를 베어 10대 시왕을 조성했는데 그 후 신기하게도 10명의 아들을 보았다 한다. 더욱 믿지 못할 일은 시왕 중 네 번째 시왕의 두 눈 크기가 실수로 서로 다르게 조각되었는데(아래 사진 참조) 그의 넷째 아들도 눈 크기가 달랐다 한다.
바로 이 태산대왕의 눈의 크기가 달랐다고 한다.
현재는 육안으로 식별하기 힘든데 그 이유는 빛이 퇴색하여 덧칠을 하는 과정에 현재의 상태로 되었다고 한다. 네 번째란 지장보살을 기준으로 도명존자가 시립해 계시는 방향으로 네 번째이며 시왕의 순서로는 7대인 태산대왕이다.
미황사 삼성각(三聖閣)
*미황사 삼성각(三聖閣) - 미황사의 삼성각은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며 칠성탱을 중심으로 좌우에 산신탱, 독성탱이 모셔져 있다.
미황사 삼성각 내 칠성탱
칠성탱 -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미황사의 칠성탱화(삼성각 정면)는 화면 중앙에 가득하게 치성광여래를, 그 좌우에 일광 월광보살을 그렸다. 하단 중앙에 기록된 화기란에 의하면 1943년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미황사 삼성각 내 산신탱
산신탱 -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미황사 삼성각에 모셔놓은 산신탱화는 화면 왼쪽에 호랑이를 걸터앉은 산신과 그 좌우에 동자와 여인이 자리한 구도이다. 동자와 여인은 독성탱화의 것과 모습이 흡사하다.
화면 하단 오른쪽에 기록된 화기란에 1943년 해남군 송지면 대죽리(大竹里)에 거주하는 김사숙(金仕琡) 일가가 시주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크기는 가로 112cm 이고 세로 97cm 이다.
미황사 삼성각 내 독성탱
독성탱 - 독성은 천태산(天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 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미황사 삼성각에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와 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스님이 왼손에 염주를 들고 앉아 있고 차를 달이는 동자와 여인이 등장한다. 화면 하단 오른쪽에 기록된 화기란을 보면 완도읍에 사는 이유복과 장순복이 아들을 얻은 기념으로 시주한 듯 하며 신미년 오월이라는 간지로 보아 1943년을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크기는 가로 112cm이고 세로 97cm 이다.
미황사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대웅보전
미황사 본전 참배를 끝낸 후 미황사 부도전 참배로 이어진다. 미황사 부도전은 세심당 일심당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분 이상 걸어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미황사 대웅보전에서 약 12분가량 걸어 올라가니 부도전이 보이고 좌측에 새로 지은 듯한 전각이 보입니다.
미황사 부도암
가까이 가서 보니 부도암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부도암 바로 마당에 미황사 사적비가 서 있다. 부도암을 신축하면서 땅을 돋워서 그런지 사직비가 땅 밑으로 푹 꺼쪄 있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산지형을 평면으로 바꾸면서 일어난 현상이리라...
미황사 사적비
미황사 사적비(事蹟碑) - 비좌는 묻혀서 보이지 않고 비신(碑身)은 크기가 280Cm, 폭 129Cm, 두께 33Cm이다. 이수는 용을 얹은 조각이다. 이 비문을 지은 사람은 민묵(閔黙: 1635-1694)으로 자는 장유, 본관은 여흥으로 이조참판 민응협의 아들로 숙종 때 하경 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내다가 후에 우의정까지 올랐다. 비문을 쓴 이는 수리 이우(1637-1693)으로 자는 석경 호는 관란정으로 전주 인흥군(영조 12남) 영(瑛)의 아들이다. 양성군에 봉(封)함을 받았다. 그리고 이 비는 조선 숙종 18년(1692)에 두인(杜忍) 스님이 세웠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비문 내용
조선국 전라도 영암군 달마산 미황사 사적비명에 아울러 서 하노라.
숭정대부 행병조판서 겸 지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 사세자좌빈객 민암 장유가 찬하고,
현록대부 낭선군 겸 오위도총관부 도총관 오가 쓰고 아울러 새긴다.
내가 서방의 글을 읽다가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책을 덮으며 탄식하며 말하였었다.
기이하도다!
우리 동방 정토의 업이 대개 또한 모르는 사이에 묵약이 있었나.
담무갈의 일만이천 반야의 몸이 이처럼 잘 보존되었고,
월씨국에서 오십삼 철종을 찍었던 자취도 또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대저 금강산은 장엄한 세월 사이에 드러나서
인조수미로 더불어 함께 위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었으니,
그 드러난 영험이 마땅히 빛나는 옥처럼 밝고 큰 것이라.
예전 호남 달마산 미황사의 창건 자취도 또 어쩌면 이리도 기이한가.
당 개원13년 을축 신라 경덕왕 8년 8월12일에,
홀연 돌로 만든 배 한 척이 산 아래 사자포구에 와서 정박하였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악인 듯 범패 소리가 배 안에서 계속 들려오기에
어부들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려고 하자 배는 문득 멀어져 버렸다.
의조화상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장운과 장선 두 사미 및
촌주인 우감, 그리고 향도 백 사람을 데리고 그곳을 찾아 가셨다.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를 하였더니 돌배가 해안으로 다가왔다.
금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노를 잡고 일어나
수놓은 돛대를 펼치기에 다가가 살펴보니,
그 안의 자물쇠 달린 금함에는
옥축 두루마리에 금으로 쓴 화엄경 80박과 법화경 7박,
비로자나 문수 보현 40성중과 53선지식 및 16나한 등의 화상이 있었고,
또 금가락지와 검은 돌 각각 한 매씩이 들어 있었다.
향도 등 여러 사람이 경전을 가지고 해안으로 내려와서
바야흐로 봉안할 곳을 의논하고 있는데
검은 돌이 부숴지면서 청흑색의 암소 한 마리가 나오더니
갑자기 훌쩍 커졌다.
그날밤 금옷을 입은 사람이 화상의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우전국의 왕인데
여러 나라를 두루 돌면서 경전과 화상 안치할 곳을 구하던 중
달마산 꼭대기에 일만 분의 부처님 상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곳을 찾아 왔노라.
그대가 경전을 소에 싣고 가다보면
소가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곳이 있을 터이니
그곳이 곧 경전을 안치할 만한 장소라.”
이에 화상께서 소에 경전을 싣고 가자니
소가 처음 한 곳 땅에서는 누웠다 일어나고,
산골짝에 이르러 다시 누워서는
“아름답구나” 큰소리로 부르짖고 숨을 거두었다.
처음 누웠던 땅에 절을 세웠으니 지금의 통교사이며
나중 누웠던 골짜기에도 또 하나의 사찰을 경영하여
경전과 화상을 안치하고 미황사라 현판을 걸었다.
미는 소의 울음소리에서 취한 글자요,
황은 사람의 색에서 취한 것이니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라.
신선이 문득 삼한에 돌아와 달마산에 방장의 가지를 꽂은 것은
땅이 본디 기름지며 신선이 살 만한 깨끗한 땅이기 때문이라,
이렇게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취가 나타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당시 돌에서 나온 소며 금옷 입은 사람 이야기 따위는
허황하고 망연하여서 세상의 귀로는 가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연대의 고증을 그저 추측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패엽경과 금구(金軀), 그리고 탱화 등이 있어서 완연하게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건대 여러 부처님들의 나심이 모두 일대의 사건이지만,
이른바 일대사라는 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그런데 지금 어떻게 하여 멀뚱히 서 있던 돌덩이가
도생의 머리 끄덕임에 따라 살아나고,
뿔 달린 동물이 설산회상으로부터 나오면서
여전히 가섭마등, 축법란, 축법태께서 오셨던 옛 이야기를 재현하는가.
금신(金神)이 꿈에 나타나 감동시킨 것 또한
아난존자께서 유통하여 가르치신 뜻이로다.
지원 연간 남송의 달관군자들도 흠모하여서 그림으로 그려 갔으니
또한 족히 우리 총림의 자랑거리가 되었노라.
이 모두가 돌에 새겨 영원토록 표를 삼을만한 일이로다.
내 장천각의 이론과 백거이의 문장과는
비할 바 못되는 멸멸한 솜씨이지만,
어른께서 멀리서 오신 뜻을 어기기 어려워
인하여 술하신 바를 차례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또 그 감동을 명문으로 짓노라.
“돌이며 소는 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요,
금이며 사람도 가히 알 수 없는 일이로다.
신령함에 향방이 없고 조화가 끝이 없으니
아, 놀랍도다!”
숭정 기원후 65년 임신* 9월일에 두인이 비를 세우다.
*숭정 기원후 65년 임신은 조선 숙종 18년, 서기 1692년이다.
有明朝鮮國全羅道靈巖郡達摩山美黃寺事迹碑銘. 幷序.
崇政大夫行兵曹判書兼知 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閔黯長孺撰.
顯祿大夫朗善君兼五衛都摠管府都摠管俣書幷篆.
余讀西方書, 至華嚴經諸菩薩住處品, 未嘗不掩卷而嘆曰, 异哉! 我東方淨土之業, 盖亦有冥契者, 存曇無竭之據一萬二千般若之軀者如此, 月氏之印五十三鐵鐘之迹者又如此. 夫金剛之爲山也, 見在於莊嚴星宿之間, 與人鳥須彌, 同爲無上菩提之境, 則其表靈也, 宜其炳琅而光大也. 乃者, 湖南達摩山美黃寺之刱跡, 抑何奇之甚也. 有唐開元十三年乙丑新羅景德王八年八月十二日, 忽有一石舡, 來泊于山底獅子浦口, 天樂梵唄之聲, 迭發於船中, 漁人欲迫而察之, 則舡輒遠. 義照和尙聞之, 與張雲張善二沙彌, 曁村主于甘香徒一百人同往, 齋沐虔禱, 石船乃至岸, 鑄成金人一軀執櫓, 而立張以繡帆. 就而觀之, 其中有金函具鎖鑰, 盛以玉軸金字華嚴經八十縛, 法華經七縛, 毘盧遮那文殊普賢四十聖衆五十三善知識十六羅漢等畵幀, 又有金環黑石各一枚. 香徒等齎經河岸, 方議奉安之地, 黑石卽拆, 而生靑黑牸牛一頭, 倏忽長大, 是夕金人入和尙夢中曰, 我本于闐國王也. 遍歷諸國, 求安經像, 望見山頂, 有一萬佛現相, 茲故來此, 爾宜駄經以牛, 牛臥不起處, 卽安經之所也. 和尙乃以經載牛而行, 初臥一壤而復起, 至山峽而復臥大吼曰美, 因而斃焉. 初臥之壤, 刱一蘭若, 今通敎寺是也. 後臥之峽, 營一刹, 以安聖經及神幀, 顔之曰美黃. 美取牛之聲也, 黃取人之色也. 奇乎, 异哉. 世稱神山輒歸之三韓, 達摩以方丈之枝, 素饒眞境故, 有此聖迹靈踪之來, 應焉. 當時石牛金人事, 悅惚窅茫, 非世耳之所可剽者, 而年代考證不啻八字打開, 且貝葉金軀幀像等物故, 宛然也. 窃念諸佛出興, 皆爲一大事, 所謂一大事, 不外乎方便, 今茲塊然者豈自生公點頭中來, 而角者豈從雪山會上, 仍倣騰蘭駄來故事也耶. 金神之夢感者, 亦有阿難流通敎誨之遺意焉. 至於至元間, 南宋之達官君子, 望風馳想, 致令圖寫而去, 則亦足爲叢林吐氣, 此俱可以書諸貞珉, 標之永永者也. 余於張天覺之理, 白香山之筆, 皆蔑蔑如, 而重上人遠來之意, 因其所述, 而詮次之, 又有感於循物假物之義, 云爾銘曰, 石耶牛耶不可思, 金耶人耶不可知, 神無方而化無涯. 嘻噫. 崇禎紀元後六十五年壬申九月日, 立碑杜忍.
미황사 부도전
미황사 부도전(浮屠田) -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석조물을 말한다. 탑이 주로 사찰 안에 있는 반면 부도는 대부분 사찰 밖에 있다 미황사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경우 부도전은 일주문을 가기 전에 있지만 미황사의 경우 조금 다르다. 대웅보전에서 세심당을 지나 남쪽으로 난 산길을 올라가면 21기의 부도와 5기의 탑이 있는 부도전이 있다. 이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1백미터 쯤 되는 곳에 6기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모두 조선 후기인 1700년경부터 세워졌다.
부도에 모셔진 스님들은 조선 후기 대흥사와 미황사 대중의 존경을 받던 큰스님들로 조선후기 화엄의 대가로 꼽히는 연담 유일스님을 비롯해서 대흥사 12종사의 한 분인 벽하 설봉스님 그리고 정련, 정암, 송파, 낭암 스님 등 당시의 큰스님들이다. 이 부도전으로 하여 당시 미황사의 사세나 이곳을 중심으로 정진했던 스님들의 수행이 깊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도에는 게와 거북이, 물고기, 새, 방아찧는 토끼 등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바닷가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미황사 부도전 내 설봉당(雪峯堂) 부도
설봉당 부도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감실 문양
귀면 문양
새 문양 - 한 쪽 다리를 들고 꼿꼿이 서 있다.
그리고 벽하당(碧霞堂) 스님의 부도는 지붕이 팔각으로 되어 있으며 각 모서리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새 문양
게와 사람 문양
용두 문양
연꽃 문양
등 다양한 문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미황사 괘불(掛佛, 보물 제 1342호) -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 괘불은 1727년(영조 3)탁행(琢行)·설심(雪心)·희심(喜心)·임한(任閑)·민휘(敏輝)·취상(就詳)·명현(明現) 등의 화승(畵僧)이 조성한 것으로, 본존석가불을 크게 강조하고 좌우 아랫부분에 용녀와 용왕을 조그맣게 묘사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2002년 7월 2일 보물 제1342호로 지정되었다.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1170㎝, 너비 486㎝이다. 입상으로 표현된 본존은 손바닥을 위로 한 왼손을 배 중앙에 위치시키고 오른손은 내려 땅을 가리키고 있다. 머리는 형식화되고 간략하게 윤곽선만 표현된 나발(螺髮)에 뾰족한 육계를 지녔으며, 중앙 계주와 정상 계주가 큼직하게 묘사되어 있다. 둥근 얼굴은 다소 처진 눈썹에 눈·코·입·귀가 작게 표현되었다.
불의(佛衣)는 대의(大衣)가 양쪽 어깨를 덮고 있으나 오른쪽 팔과 가슴은 넓게 드러나도록 묘사되었고, 승각기가 반원 형태로 표현된 것이 특징적이다. 대의를 장식하고 있는 격자무늬는 18세기 후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문양이다. 광배는 좌상으로 묘사된 불화에 자주 보이는 이중의 윤광(輪光)이며, 두광(頭光) 좌우로 각각 작은 삼존의 화불(化佛)이 묘사되어 있다.
본존석가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양발을 떠받치고 있는 연화의 족좌(足座) 주변에 연화당초가 묘사된 것이 특징적이다. 전체적으로 녹색과 적색의 밝은 선염(渲染)과 녹두색·분홍색·황토색이 사용되어 은은하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수준작으로 평가된다.
괘불재(掛佛齋) - 괘불재는 해남 미황사에서 매년 가을에 열리는 불교종합예술제이다. 미황사는 보물 제 1342호로 지정된 괘불탱화를 모시고 있는 절이다.
이 괘불탱화는 높이 12m, 폭 5m의 대형불화로서 세계적으로 희귀하다. 1년에 한 번 공개되며, 전통방식으로 불단을 차리고, 불교음악과 깨달음의 설법을 통하여 사람들의 정신적 성숙과 존재감을 깨어나게 하며, 평화롭고 해복한 힘을 갖게 한다.
괘불재는 2010년 일본 큐슈박물관에 30일간 토픽전에 초대되었고, 미황사괘불은 2004년 통도사박물관에 60일간 전시되기도 하였다.
땅끝 마을 사람들에게는 괘불을 모시는 해는 풍년이 들고, 한 번 참배하면 소원이 이루어지며, 세 번 참배하면 죽어서는 극락세계로 태어난다는 신앙이 깊다.
2015년 미황사 괘불재는 불기 2559년 10월 24일(토) 오후 1시에 거행된다.
순서는
괘불이운 - 미황사 큰 부처님 마당으로 모심
고불문 -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발원문
만불공양 - 한 해 동안 땀 흘린 결실 공양
봉 천 - 고요하고 맑고 행복한 마음을 담는 기도
법 어 - 보선스님(대흥사 회주) 법문
음성공양 - 이경선(서울대 음대교수, 바이올린)
두레상 한솥밥 - 공양물 나누기
만물공양 - 소원의 등불
순이다.
미황사 주지는 금강스님이시다. 94년 종단개혁불사 당시 중앙승가대 총학생회장을 맡기도 하셨던 한문학당을 개설하여 어린이 포교에도 힘쓰시는 금강스님은 현재 달라이라마 방한 추진위원회 준비위원장을 맡아 달라이라마 방한을 적극 추진하고 계신다.
김영택 작가님의 펜화
미황사 전각배치도(미황사 가람배치도)
- 감사합니다-
|
첫댓글 수고 했습니다
과거형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ㅎㅎ
지금도 계속 올리고 있는 중입니다.
단장님 방문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세한 내용 잘 보고 있습니다._()_
선배님, 관심과 배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준함님 상세한 사진과 설명 감사합니다. 일정상 보지못한부분 덕분에 잘보았습니다^*^
재무국장님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관심을 좀 더 기울이겠습니다.
2015년 10월 12일 21시 40분경에 미황사를 스크랩해 가신 분은 이 글이 완성되면 다시 스크랩해 가시기 바랍니다. 완성되지 않은 글을 스크랩해가시면 잘못된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는데요.....
내용을 보완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현재 상황에서 글의 오류나 착오가 있으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미황사 동영상을 첨부하였습니다.
1차 완성을 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수정 작업에 들어갑니다.
세심당에 걸려 있는 미수(麋壽) 라는 편액 사진은 금륜 홍상수 선배님께 받은 파일임을 알려드립니다.
2차 수정을 하였습니다.
수정 내용은
1. 세심당의 미수(麋壽) 라는 편액의 보충설명
2. 명부전의 네 번째 대왕 확인
3. 괘불 및 괘불재가 누락되어 삽입
등이 있습니다.
이 외에 혹시 내용상 오류나 오자 탈자 등이 있으면 댓글 부탁합니다.
정리를 잘 해 놓으셨네요
잘 보고 갑니다 _()_
의식봉사회 회장님...바쁘신 와중에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미황사 구경많이 했습니다....
준암,,,,수고많이 하셨네요,,,고맙습니다.
의식봉사회 전임회장님...늘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준함님...
53선지식 총무차장님....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공부 잘했습니다 ()()
차안에서는 일정소개, 법당에서는 발원문까지....
오랜 공백을 깨고 정말이지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엄청난 열정과 희생
그리고 헌신적인 마음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데...
도반인게 자랑스럽고
53선지식의 진정한 필수요원이십니다
흔적을 남겨주시어 감사합니다.
경험상 사찰 순례를 하고 나면
어디가 어디인지 참 아리송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안내지침서를 만들어 보자는 차원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 긴 글이라 지루하게 느껴실 수도 있고 하여 늘 조심스럽습니다.
이런 자리를 통해서 동문들이
적극 댓글로 참여를 하여 채찍도 하고, 독려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면서
서로의 생각들과 불교장식물에 대한 견해도 알게되고 하면 좋은데,
그렇게 커뮤니케이션(댓글과 그에 따를 또 다른 덧글)이 원할하게 되지 않는 점이 참 아쉽습니다.
동문들이 적극 참여를 하지 않고 '나홀로의 글' 이 되면 참 안 좋은데....
응진전 내벽화 ...
응진당 내벽화로 수정요망
대웅보전 기둥 관련 느룹나무..
느릅나무 이겠지요
그렇군요....응진전이 너무 익어서 나도 모르게 응진전으로 쓰고 말았네요....
지적 감사합니다....수정 완료하였습니다.
독성은
천태산(天山)에서...
한자표기 문제
보통 천태산(天台山)으로 표기합니다
사리암 천태각(天台閣) 같이...
나무천태산상독수선정 나반존자
南無天台山上獨修禪定
那畔尊子
미황사 홈페이지 내용을 그대로 옮기다 보니 실수를 하였네요...
수정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참여하시는 분이 더 많으면 좋겠습니다.
글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함께 보완해가면 참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