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김 세형
그날 밤, 내 곳간에 소중히 저장해 두었던
종자씨앗들을 꺼내 아내의 밭이랑에 뿌리자
몇 달 후, 아내의 부풀어 오른 젖가슴엔
검 분홍빛 꽃망울 두개가 슬픔처럼 맺혔다
그리고 그 해 늦가을, 아내의
뱃속 넝쿨 가지에 거꾸로 힘겹게 매달려 있던
실한 둥근 호박덩이 하나가 아내의 밭고랑 사이로
쿵! 하며 머릴 처박으며 아프게 떨어졌다
그 해 작황은 그런대로 좋았으나 앞날의
일기예보 전망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기상청 당국자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도
지구의 계속된 온난화로 인해 한반도에도
가뭄과 홍수와 태풍과 폭설 등 잦은 기상이변이
갈수록 극심해 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더군다나 아내의 밭고랑 사이에서
한 해 결실을 수확하던 그 날, 칠레에 이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협약이 체결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도 있었다
누구는 내일 지구가 당장 멸망한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라고 했다지만
그날 밤 난 아무래도 파종을 괜히 한 것만 같았다
드라마
김 세 형
진실은 정말 진실로 죽었던 것일까?
드라마 속의 진실과 드라마 밖의 진실은 진실로 죽었던 것일까?
*‘장밋빛 인생’의 죽음이 장안에 핏빛 곡성으로 낭자하다
그녀의 드라마는 아직 종영되지 않았다
이미 끝난 드라마가 아직도 저렇게 하루한시도 거름 없이
장안에 파다하게 연속 재방영되고 있으니
어찌 드라마 밖 주인공 진실이 죽음의 요람 속에서
등 굽은 애벌레처럼 곤히 잠들 수가 있겠는가?
죽음의 요람 속에서조차 편히 잠들지 못한 죽음의 드라마가
자꾸 자꾸 재탄생되어 바삐 돌아가고 있구나
인생은 짧지만 드라마는 길구나
죽음도 드라마적일 땐 꽤 볼 만한가 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슬퍼서 볼만한가 보다
티브이에서 티브이로, 시청자들 입에서 입으로,
슬픔인 듯, 악플인 듯, 하루에도 몇 차례나 리플되며
광고하듯 연속 재방송되고 있으니....생사가
모두 드라마라지만 역시 죽음의 드라마가 더 극적인가보다
남의 죽음을 우려먹는 재미가 무척 쏠쏠한가 보다
저 드라마의 작가는 누구인가?
제 드라마를 제 스스로도 종영치 못하는 작가는?
또한 그 슬픔의 신나는 감흥에 쫓겨 구천으로 달아난
죽음의 주인공을 끝까지 쫒아가 죽음의 등덜미에다
추모의 리본 달아놓고 희희낙낙하는 악플들의 작가는?
드라마 속의 진실과 드라마 밖의 진실은 진실로 죽었던 것일까?
진실은 정말 진실로 죽었던 것일까
*장밋빛 인생-최진실 주연의 티브이 드라마 제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독일의 시인이며 작가인 괴테가 지은 서간체 소설 주인공 베르테르가 남의 약혼녀를 사랑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끝내
권총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약력: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성균관대 유교대학원 수료. 2005년 <불교문예> 봄호로 등단.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창작21작가회 회원. 시집 <모래인어> <사라진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