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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베를린 한인회
제1회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대회 개막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베를린 한인회 김진복 회장.
베를린 한인회가 새 역사를 썼다. 한인병탄 100년을 맞아 고 손기정 선생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손기정 기념재단과 공동으로 제1회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또한, 손기정 선생 동상 제막식도 가졌다. 베를린 템펠호퍼 파크에서 9월 18일 열린 행사에는 재독 동포와 현지인 등 500여 명의 마라토너가 참여해 망국의 설움 속에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생의 넋을 기리고 한일 강제 병합 100년의 의미를 되새긴 자랑스러운 역사를 썼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베를린 한인회 김진복 회장으로부터 제1회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대회와 베를린 한인사회의 이모저모를 알아본다.
베를린에 한국인이 처음 거주한 것이 언제인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일병탄이후 많은 수의 나라를 잃은 지식인들이 해외로 도피하여 새로운 문물을 배우거나 유럽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독일 유학생의 수도 많이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유학생들과 기술자들 그리고 간호사들이 모여 이국땅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고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친목회의 성격을 띤 모임으로 사단법인 베를린 한인회를 결성했다고 김진복 회장은 말한다.
김진복: 베를린 한인회가 1971년에 결성될 때는 거의가 유학생이었습니다. 리더로 계시던 분은 전희수 교수님으로 몇 달 전에 작고하셨는데 독일에 한국학 교수로 오셔서 독일 한인사회에서 아버님 같은 역할로 그 당시 쌀도 제대로 구하지 못할 때 쌀도 구해주고 배추도 없어서 양배추로 김치 비슷한 것을 담아 먹고 된장도 구해서 된장국도 끓여 먹으면서 고향 향수를 달래는 그런 침목 모임이 바로 한인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진복 회장은 1973년 당시에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은 결혼 적령기를 맞아 자연스레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진복: 광부 간호사들이 당시 우연한 일치로서 나이가 비슷했고, 나이가 비슷하니까? 결혼 적령기였는데 여러가지 일화가 많지요. 하루 만나 결혼한 분도 있고 한 달 만에 결혼한 분도 있고 굉장히 결혼 속도가 빨랐습니다. 나이는 벌써 황혼기에 돌아가신 분도 많고 70을 내다보고 있으니까?
김진복 회장은 베를린 한인회는 80년대 들면서부터 한인회다운 면모로 성장했다고 한다.
김진복: 초창기 한인회는 만남의 장소로써 활용되다가 광부와 간호사의 숫자가 늘면서 80년대부터는 한인회로서의 모양을 갖춘 각종 운동경기, 고전무용 등을 배워서 독일사회에 전달하는 활동으로 넓혀 갔습니다. 90년대가 되면서부터는 2세들이 자라나면서 2세들의 교육문제인 한글학교가 생기게 됩니다.
김진복 회장은 유럽에서는 제일 큰 한인회가 바로 베를린 한인회라고 자랑한다.
김진복: 베를린이 유럽 대륙에서는 제일 큰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를린 인구는 대략 4백 30만 명인데 한국인의 인구는 한 7천 명 정도 됩니다. 그러나 유럽 전체로 봐서는 제일 큰 한인회입니다. 한인회관이 크지는 않지만 이런 회관을 가지고 있고 회보를 만들어 동포들에게 배포하고 있습니다.
손기정 동상 앞에 서있는 김진복 회장. (사진제공-베를린 한인회)
김진복 회장은 2008년도 한인회장이 되어 정치적인 것보다도 우리 문화를 우리도 즐기면서 독일 사회에 접목하는 일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1회 손기정 마라톤 대회도 구상하게 됐다고 말한다.
김진복: 손기정 옹에 대해서 관심을 두다 보니까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손기정 옹은 우리 민족에게 태극기의 고마움을 가르쳐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 숨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손 옹이 추구하는 것이 1936년에 태극기를 가슴에 달지 않고 금메달을 땄지만, 후세에게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을 남기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손기정 마라톤 대회를 시작하게 됐고 또 두 번째 계기는 제가 1989년 6월 29일 만주 하얼빈에 가서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찾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베를린에 35년을 살면서 손기정 옹의 흔적이라고는 손기정이 한국사람으로서 최초로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신 분이야 라는 것밖에 모르는 것을 생각하며 손 옹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으면서 다음 세대 세대에 넘겨주고자 제1회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제1회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보람되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김진복 회장은 많은 외국인이 마라톤에 참가해 마음 뿌듯했다고 한다.
김진복: 베를린에서 외국인으로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 마라톤 대회를 개최한 것이 최초입니다. 여러 가지 기술적이라든지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번에 마라톤 대회에 450명 정도 전체 구경 인원까지 1,000여 명 됩니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더욱 힘을 갖게 된것은 제1회 손기정 마라톤 대회를 베를린에서 개최했는데 3분의 2가 외국인이었습니다. 이번에 1등 하신 분도 폴란드 사람이고 제가 바라는 것은 한국인보다도 세계 속의 손기정 마라톤 대회를 만들고 싶은 것이 제 뜻이었는데 이걸 계속해서 우리 국위도 선양되고 우리 민족의식도 찾게 되는 데 큰 힘을 가질 수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갖게 됐습니다.
김진복 회장은 이번 제1회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시작으로 손기정 옹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수집 중이란다. 바로 손기정 선수의 흔적을 찾고 싶단다.
김진복: 지금 손기정 선수의 흔적을 찾는 중이고요. 독일 문서보관서를 통해서 1936년도의 손 선수와 관련된 필름을 가지고 있으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마라톤 1등에 손기정선수 3등에 남성용 선수인데 두 분이 금메달을 따시고 일본 대사관에서 축하연을 베풀려고 하는데 두 분이 사라지고 없었던 거예요. 나중에 알아보니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이 베를린에 유학하고 있었어요. 그 집에서 불고기 파티를 했다고 하는데 그 집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하는데 아직 찾지 못했어요. 이런 집을 찾는 거라든지.
김진복 회장은 베를린에 손기정 옹의 길 이름을 만들고 싶단다.
김진복: 올해 역사적인 것은 손기정 선수의 동상을 한국으로부터 가져왔습니다. 제1회 손기정 마라톤 대회의 상징적인 의미로 가져왔는데 아직 놓은 자리를 못 찾았어요. 그전부터 제가 로비를 하는 것은 베를린에 손기정 옹의 길 이름을 붙이고 싶다. 그리고 그 자리에 동상을 놓는 것이 제 뜻인데 언제 될 수 있을 것인지 미지수지만 집념을 갖고 있고 꼭 손기정 옹의 길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김진복 회장은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지던 날 현장에서 한국의 통일을 생각했다고 한다.
김진복: 1989년도에 통일이 됐는데 20여 년 동안 관찰해 봤을 때 독일이 통일되기 10년 전에 분단국가에서 온 한국사람으로 봤을 때 독일의 통일이 다 됐다고 하니 독일 사람들이 다 비웃어요. 너 외국사람이 건방지게 독일에 대해 무얼 알아서 그러느냐! 그러나 독일의 한 장관님과 이야기 할 때 외국 사람의 눈이 더 예리 한 거야! 하더라고요. 제가 분단된 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더 관심 갖고 봤을 때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느냐면 하면은 남북한과는 입장이 달라서 동서독은 왕복하고 있었잖아요. 동서독에서는 아주 적은 것부터 토끼를 키우는 사람이 토끼 키우는 모임을 갖자 해서 동서독 사람이 만나고 정책적으로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65세 이상 된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서독을 방문하게 하자. 동 서독에서는 정책적으로 한 번 오는 사람에게 여행비를 지급해주고 그것이 벌써 40-50년 가까이 되니까 일반인들의 심증에서는 통일된 것을 봤습니다. 서독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동독에서 다 볼 수 있고 왔다 갔다 하니까 정치적으로 통일되기 전에 심적으로 통일된 것을 봤습니다.
김진복 회장은 독일통일의 현장에서 무너진 시멘트 조각과 쇳조각을 모아 한반도 통일의 상징으로 삼고 싶단다.
김진복: 동서독이 통일될 때 담 가까이 가서 매일 변화하는 모습들을 처음에는 담벼락에서 넘어오는 모습들, 제가 외국사람인데도 눈물겨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20년 전에 무너진 벽의 시멘트라든지 쇠를 짤라 조각 만든다고 정원에 갖다 놓고 아직도 못 만들고 있는데 .
김진복 회장은 죽기 전에 통일되기를 간절히 바란단다.
김진복: 멀리 한국과 지구 반 바퀴에 떨어져 있지만, 한국도 통일이 돼야겠다. 몇일 전에 연평도 피격 사건항의로 북한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했습니다만 보라 여기서 300미터 떨어진 곳에 동서독 간의 경계 담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권총도 한 방 쏘지 않고 통일이 됐는데 우린 어떤 저질행동을 하고 있느냐 내가 이번에 데모하게 된 동기는 이북 대사관 앞에서 최초로 데모했는데 전쟁 속에서도 민간인을 살상해서는 안 되는데 평화스러운 상태에서 민간인이 사상자가 생겼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 데모를 했습니다. 한국도 통일이 돼야 되는데 독일과 같이 권총도 한 방 쏘지 않고 평화스럽게 통일 되는 것을 죽기 전에 보고 싶습니다.
베를린 한인들의 자랑을 들려달라고 했다. 김 회장은 올해 다국적 문화행사에서 7등을 했단다. 김진복: 우리 베를린 한인회에서 지난 5월 말에 이곳 다국적 문화행사로 베를린에 사는 모든 외국인이 모여 하루종일 문화 잔치를 합니다. 올해에는 97개 나라가 참여했는데 우리 베를린 한인회가 7등을 했는데 특별히 서울특별시에서도 찬조 출연했는데 큰 트럭에 한국적으로 장식하고 한복을 입고 갖쓰고 지팡이 짚고 전형적인 한국 의상을 하고 사물놀이를 앞세우고 한국 전통의 춤을 추면서 10시간 정도 행진하는 행사를 합니다. 올해 행사에는 베를린 시민 100만 명이 구경하러 나와 봤으며 언론 매체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김진복 회장은 한인회를 이끌어오신 선배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김진복: 27대까지 오기까지 그동안 선배들의 도움으로 성장해 올 수 있었고 회관이 있고 한인회보를 발행하는 것이며 베를린 한인들도 문화생활을 하는데 지금도 나이가 60이 넘으신 분들이 고전무용을 하는 분들이 많고 60 넘으신 분들의 참여하는 합창단이 3개나 됩니다. 그동안 선배님들이 베를린 한인회를 끈질기게 집념을 가지고 붙들고 한인회를 유지해온 것에 대해 존경하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베를린 한인회 김진복 회장으로부터 제1회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대회와 베를린 한인사회의 이모저모를 알아봤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