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9. 주일예배설교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
희망의 하나님
■ 오늘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기후 위기를 비롯해 축소되는 인구 위기, 상승하는 물가 위기 등 총체적인 위기의 시대, 절망의 시대를 맞은 탓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을 묻는 질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뿐인 듯합니다.
그러나 과연 침묵이 최선의 답일까요? 침묵 외에는 답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침묵이 최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침묵은 절망의 무게와 깊이만 더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침묵을 풀고 희망을 말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고통스럽더라도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어쩌면 고통스럽기 때문에 더욱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고통스럽기 때문에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을 외칠 수 있고, 외쳐야 합니다.
만약 지금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절망의 밑바닥이라면, 오히려 밑바닥에 계신 하나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희망을 외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침묵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15장 끝자락의 메시지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메시지가 얼마나 위대한 약속이며 희망인지 알 필요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희망을 상실한 시대와 사람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우리를 희망의 하나님께로 안내할 것입니다.
■ 방금 읽은 55절은 구약 시대 호세아의 메시지입니다. 죄악과 악법이 횡횡하던 시절에 하나님이 호세아의 입에 올리신 메시지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사망”은 당시 죄악과 악법이 낳고자 하는 결과였습니다. 모두를 절망과 죽음으로 몰아넣겠다고 시대의 죄악과 악법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백성들을 절망과 죽음의 공포 몰아넣고 있는 시대의 죄악과 악법을 향해 매우 매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히려 절망과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백성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는 호세아 13장 14절인데,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내가 그들을 사망에서 구속하겠다.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이제는 내게 동정심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은 절망과 죽음을 조장하는 원인자에게 오히려 사망의 철퇴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절망과 죽음에 떨고 있는 모든 시대의 오고 가는 모든 백성에게 승리의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55~57절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절망의 공포에 떨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떨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절망이 아닌 승리를 말할 수 있고, 죽음이 아닌 승리를 말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입장이자 태도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우리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희망이 우리의 메시지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십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의 절정입니다.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보증하신 것입니다. 죽음은 절망이지만, 부활은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바라봄이 곧 희망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시편 62편 5절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분명하죠?
포로수용소 생활 경험이 있는 한 독일인이 해 준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희망의 생명력을 체험했습니다. 희망을 가진 자는 살아 남는 데 반해, 포기한 자는 병들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으로 희망이 삶과 죽음의 분수령인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는 희망에서, 그리고 희망에 의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희망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을 약속하시는데, 이것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희망이시고, 약속의 성취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희망과 약속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입니다.
■ 그런데 희망과 약속은 늘 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와 연결된 이유로 희망과 약속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위급함을 만나면, 당장 현실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위기의식은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조장합니다. 희망과 약속이 흔들립니다.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긴 도피 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개를 보인 야곱이지만, 형과 만날 일을 생각하면 끔찍했습니다. 불안했고, 공포스러웠습니다. 혹시 모를 일을 위해 이중 삼중의 생명 보호 장치를 했지만, 형과 조우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불안과 공포는 더 심해졌습니다. 결국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붙잡고야 떠오르는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야곱을 다시 희망으로 가게 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건강한 신학자였던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박사께서 일주일 전에 소천하셨습니다. 고령이긴 하셨지만, 그래도 더 사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질만큼, 인품이 넓은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천국에서 편히 쉬시길!
몰트만 박사는 2차세계대전 당시 학도병으로 동원되었습니다. 그가 있었던 함부르크는 영국공군부대의 고모라 작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4만 명이 불타 죽었습니다. 그는 화염 속에서 갈기갈기 찢긴 친구들의 시체를 목격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살아남았다. 밤에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에게 외쳤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나는 살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았습니까?’”
그 질문과 투쟁하던 중, 마침내 그는 얍복강에서 야곱에게 믿음의 싸움을 걸어오신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신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신학을 정초했습니다. 당시 신학의 분위기는 ‘신 죽음의 신학’이었습니다. 이 신학이 탄생한 이유는 당시 교회의 부패 때문이었지만, 신학의 색깔은 창백한 회색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을 내놓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신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기를 마련했고, 전 세계의 교회로 하여금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몰트만 박사의 ‘희망의 신학’은 신학과 교회에 혈색을 돌게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신학이 탁월해서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만이 희망이심을 깨닫게 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만이 희망이십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희망이십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포기하거나, 희망을 이상적인 태도라고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절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만약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용기를 잃고, 희망을 저버리는 것은 죄입니다.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희망의 하나님을 신앙하는 교회의 과제이자 사명은, 개인 회심과 함께, 절망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와 제도를 변혁시키는 데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58절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러므로 교회의 과제는 세계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희망의 궁극적인 성취는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58절의 권면처럼, 우리는 희망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약속을 담은 희망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의 성취는 많은 부분이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희망은 행동입니다. ‘왜 하나님이 세상의 악에 대해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시는가?’를 묻는 대신, 악을 변화시키려고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는 현 역사 안에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필요한 경우, 거룩한 힘을 발휘하여 현 사회를 개조해야 합니다. 이것이 58절의 의미입니다.
■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현존 안에 있는 불안과 사망을 치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살만한 세상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비전교회는 ‘희망공동체’로, 여러분은 ‘희망전달자’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분명 희망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