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람들은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아사리판 같은 사바세상을 벗어나 자기만의 호젓한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휴가를 가는 것 아닐까요
어떤 선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기 마음 속 보다 고요 한곳은 없다 사람들은 가장 호젓한 곳을 옆구리에 끼고 살지만 더 좋은 곳, 더 좋은 곳만을 원하죠"
"'떠날곳도 없고 도착할곳도 없는 사람은 도인이다.. 차안도 없고 피안도 없는 사람 ..구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 도인이다. 일상이 도요 평상심이 도다"'
미국의 자연주의 사상가 '헨리 소로우'라는 사람은 하바드를 나올정도의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매사츄세츠주의 보스턴 근교 월든 호수가에 통나무 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시쳇말로 초야에 묻혀 호젓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 소로우라는 사람이 이런말을 했습니다
간소하고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데 그대의 일을 두가지나 세가지로 줄일 것이며 그대의 일을 백가지나 천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 명료 해질 것이다 그때 비로소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게 된다 그대의 삶을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인적이 끊긴 그 역에 내리고 싶다
그 산골 그 계곡에 가보고 싶다 누구를 몹시 그리워 하고 증오 하는 것은 자기를 태우는 일이라 했거늘 ...........
이시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부군"이라는 소설 영화로도 만들어져 호평을 받았죠 주인공중 한 사람이 지리산에서 총을 맞고 높이 솟구쳤다가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윗주머니있던 수첩에서 사진이 튕겨 나오면서 풍지박산되는데 그사진 속에는 이런 난리는꿈도 꾸지 못했던 평화시에 남녀 고향 친구 들과 여럿이서 웃고 찍은 사진과 애인과 함께 찍은 사진 속의 친구들은 아무도 없는 비참한 이 산속에서 죽는 이주인공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군요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이 골짜기에서 따뜻한 체온이 그 체온으로서 공부도 하고 사랑도 하고 사색도 했을 그 체온이 서서히 식어 이세상을 떠나는 한 인간의 종말을 말입니다
사실 나그네 야그는 단발로 끝날 얘기였습니다 어느날 김유원으로부터 서화회 소식 전해 듣다가 자기의 홈피에 나의 사진도 많이 들어 있으니 들려달라고 해서 광고를 하지않아 홈피가 있는 줄 잘 몰랐고 들어가 보니 공들여 만든 홈피에 방문록에 홈피 주인이 방문록을 쓰는 경우가 많아 개똥도 가끔 약에 쓴다고 내가 몇 자 수고하면 홈피가 풍부 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몇자 갈긴건데 역시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이 고루 어울리면 자연 풍부해진다고 생각 됩니다
색다른 사람이 들어오는걸 싫어 하는것 같은 배타적인 슬픈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습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습니다 세상은 영원한 이해관계만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나요
내가 열여덟 나이에 객지 생활을 시작했는데.. 지금생각하면 아무 것도 모를 어린나이였습니다 남들은 식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나는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게 몹시 괴로웠습니다 해가 설풋 넘어가는 해질녁에는 아랫녁 말로 본병이 도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객지 생활 오래 하고 혼자 오래산 남자 또는 여자들은 독특한 버릇 한가지 쯤은 갖고 있다고 생각 하숙집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초저녁에 본병이 도져 갑자기 일어나 공부는 고사 하고 어디론가 쏘다녀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의 무게를 덜어 내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는데..
그무렵에 나에게 다가 온 것이 서화회 구세주였죠 내마음의 뻥 뚤린 허전함을 어느 정도 메꿔 주었지요
학교와 하숙집만 있는 단조로운 루트에 중간에 서화회가 있어 쿵짝 에서 비로소 삼박자 쿵짝짝
그래서 나는 서화회를 잊지 못하고 정도 남보다 각별 이해 해 주시겠지요..
대학교 수업이라는게 계속 연달아 있는게 아니어서 중간에 빠지는 시간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그때는 4층 서화회가 딱
다방이나 당구장도 요즘처럼 자주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그 당시 한학번의 서화회 회원이 현재 주소록을 보면 3-4명이면 많은거죠 74-75 학번 쯤되니까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76학번정도 가면 한학번의 서화회 동기가 많은 경우는 20명도 넘는 양적 팽창 학교도 단과 대학을 늘려 발전하고 정부의 경제개발의 열매를 어느 정도 따는 단계가 아니었나 생각
서화회 회원도 여러찔인 것이 날마다 들리는 골수분자 중독된 남녀 회원들 2-3 일에 한번 나오는 중독 전단계에 있는열심 당원들 7일에 한번 나오는 주일 학교 파 15일에 한 번 나오는 뭐 재밌는 일 없나파 굿::을 한다고 광고를 하고 전화를 해야 겨우 나오는 6.25 직후에 또는 크리스 마스 때 구호 물자 탈 때만 교회 나오는할렐루야 파
내가 재학중엔 회장만 겨우 있고 서로 회장도 안할려고 미루는 역사 책에 나오는 삼황 오제 또는 요 순 시대같은 때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자 회원이 많아 지면서 회원 관리를 위해 부득히 회장 부회장 홍보실장 화실장 서실장 중전 마마 분파가 되는 모습
우리때는 중전마마 같은 것은 없었고 혹
터주대감은 있었어도 말입니다
얼마전에 나하고 같은과를 졸업한 친구가 사업상 오랜만에 만나 우연히 서화회 홈피를 본 모양
재학중에 많은 써클이 명멸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모임은 그렇게 흔치 않다는 것
지금 서화회 홈피 주소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서화회 회원은 그래도 대단한 끈기의 사람이라고 생각
회원중에는 글씨를 잘쓰는 사람 그림을 잘그리는 사람 그림과 글씨는 별로지만 잡기에 능한 사람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악기 잘 다루는 사람 이도 저도 아니지만 서화회의 끈끈한 정에 미쳐 심취한 사람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여 서화회는 재미도 있었고 정도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고 생각
김영명의 클라식 키타 아람브라 궁의 추억을 한번 듣고 넘어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군요
김영명은 그때 법대 재학생이었고 아람브라궁은 아랍족 무어인들이 지금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을때 그 무어인들이 지은 궁인데 유럽대륙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아랍풍의 건물인데 그정원이 그렇게 환상적
달포전에 재익형이 '서화회야사 편집진'에게 수고한다고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인사동'하얀김 푸른네'에서 만났는데 그 자리에는 조담이도
오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독일 갈일이 생겼다고 안왔고 두일이 내외도 오기로 했었는데 사업상 바쁜일이 생겨 영천 문기 터줏대감 강진환 건수 재익형 나 등등이 참석한 자리였는데 문기는 터줏대감과 한집에 사니 날마다 호미회 모임이니 부럽기도 했고요 재익형이 회상하는 예날 문기 얘기가 나와 한바탕 웃었습니다
문기는 술을 굉장히 즐기는 편이고 잘먹어 선배들이 시내에서 술자리가 있을 경우 자주 참석하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번은 선배들 따라 시내에서 늦게까지 술을 들고 안암동 하숙집으로 오는데 깜빡 졸아 눈을 떠 보니 미아리 종점이더란 얘기죠 그래 다시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안암동으로 오는데 또 깜빡하여 눈을 떠 보니 청파동인가 어딘가 하여튼 좀점이더라는거죠 몇 번 그러다 날 샛다는 야그
한번은 학교 앞에서 술을 잔뜩 먹고 구불구불 골목길을 지나 제기동 하숙집까지 갈 자신이 없어 학교 코앞 재익형 자취방으로 엎혀가다 싶이 했는데 재익형이 자다가 낙수물 소리가 하도 크게 나서 꿈에 박연폭포에라도 왔나 싶어 방문쪽을 보니 집이 하도 작다보니 문기가 취중 비몽 사몽간에 문턱에 서서 생리적인 방사를 하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 물길이 주인집 나들 창문에 집중적으로 부딪히면서 폭포소리가 났다는 야그 아닙니까 재익형은 자취집에서 방빼라고 할까 겁먹었는데 한참 후 주인아줌마가 그 밤중에 소낙비 오는줄 알고 빨래 걷으러 나오드라는 야그 아닙니까
고대 연대 서화회 합동 쪼인트굿 사건 이후에 연대 대강당에서 라트라비아타 공연이 있었는데 연대 서화회에서 초청이 있었는지 하여튼 재익형 문기 터줏대감 등등 신촌 나들이를 모처럼 하였는데 문기는 그전날 건축과 투시도 찐한 숙제가 있었는지 하여튼 피곤한 상태였는지 공연중에 잠깐 졸았던 모양이라 오페라 라는게 관심이 많은 사람을 제외 하면 썩 재미있다고 할 수는 없는것이기도 하지만 재익형이 교문 밖으로 나오면서 캄캄한 밤이었지만 문기에게 공연 관람 소감을 묻자 자기는 우체부가 편지를 갖다주는 소리 편지요.... 하는 대목만 기억날뿐이라는거죠 그러면서 하는 얘기 오페라 구경은 이것이 재미없어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하더랍니다
제대하고나서 직장에 다닐때던가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는때도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연락이 되어들 가지고 쉬는날이었겠죠 인천 차이나 타운있는 높은 계단있는 곳으로 수채화 그리러 간 일 생각 납니다
전철 타고 여러명이 갔습니다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영릉인가에 그림 그리러 간 일 있었고 두일 영천 정섭 등과 같이 간 것같고.. 졸업하기 전 국어 교양과목 숙제를 도와준 인연으로 군대 있을때 어찌어찌 연락이 되어 중국어 첫걸음이라는 책 보내준 원예과 여학생 있었는데 요즘 생각해 보면 핸드폰도 없던 그 당시 어찌 연락을 했을까 짐작이 잘 안됩니다
붓글씨도 열심히 쓰던 서실 여학생이었는데 어찌 어찌 연락이 되어 제대 후에 극장 구경 책 보내 주어 고맙다는 보답 한적도 있었고..
여학생이 있었는데 내가 4학년때 1학년 글도 잘 써 석탑 신문에 가끔 투고 된 내용이 나오기도 했죠
어리기는 하지만 깔끔하고 멋쟁이 학생 졸업식때 노란집 앞에서 전성기 학형이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내가 군대 제대하고 어찌 어찌 연락이 되어 경기도 양평인가 학교 선생님 하는 곳으로 놀러 간 기억도 나고... 나중에는 인천에서 선생님 한다는 소식만 듣고 볼 기회가 없었군요
원예과 나온 여학생으로 미도파 백화점에 근무하던 서실 후배가 있었는데 우연히 미도파 백화점에 가서 만난 적도 있었고 ..
이문 설렁탕을 아시나요 80년대 우리 서화회의 정기적인 만남의 장소였으며 그 옆에 고대 동문회 회관도 있었고 종로 골목의 피마골 골목처럼 고풍 스러운 것이 설렁탕 술맛은 별로 였으나 분위기만은 괜찮아 한동안 우리 추억의 본부 역할
졸업하고 한참 직장 생활 할 때 시민회관에서 호미회 미전 한일 생각나고 오천선배가 지도하는 글쓰는 학생들 작품과 함께 전시한 기억도 납니다 언젠가 한번은 의명형 아시는 분이 불광동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는데 조담이 나 의명형 그 초등학교에 가서 "환경 미환가 뭔가"한다고 그림을 왕창 그려주고 온 적도 있었죠
86년도 쯤인가 광화문에 있는 시민회관 부근 식당에 오랬만에 호미회 식구들이 많이 모여 재익형을 회장 내가 총무 그렇게 뽑고 잘해 보자고 했으나 그때만해도 나이로 봐서 모두 바쁠때였는지 일이 잘 진척이 없었던 일도 있었죠
호미회 화동미전을 주도한 후배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간판에 보면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어디께 쯤인가 공장을 빌어 화실로 꾸민 것 같은데 부럽기 짝이 없었고 드럼통을 짤라 만든 난로도 너무 멋졌고 내가 대림동에 근무할 때 <황건>건축과 기억이도
사무실이 가까운 곳이어서 가끔 좋은 소식 전해 주는데 화실 후배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대림역 부근에 사무실 겸 화실을 간소하게 차렸는데 그림그리고 싶을때 가끔 놀러 오라 하여 그림 그리고 싶은 욕심에 몇 번 찿아 갔으나 문이 잠겨 헛걸음만 한 적 있었습니다
나는 명색이 화가 지망생이었지만 변변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군대가서 드디어 화가가 됩니다 군대가면 조금이라도 편할려고 요리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편하다면 취사병으로 빠질려고 훈련 안받는다 하니 거짓말 하는 경우 많은데 화가로 뽑혀 사단 예하 100여개 중대를 돌아 다니면서 비록 페인트로 그리는 그림이긴 하지만 벽화도 그리고 빼치카가 흉물스럽다하여 빼치카 벽에다 벽화를 그렸으니 인류의 그림의 시원 ""알타미라"' 동굴 벽화라 하지 않는가 벽화는 원없이 그려 봤으며 그 순간 만은
그것도 그림이라고 그런대로 행복 불국사를 짓기위해 징발된 석공같은 심정으로 한동안 살았죠 그 작업이 끝나자 촤트 작업실에 동원되어 탱크 대포등 온갖 무기들은 다 그렸죠 내일 모래 제대하는 고참들에게 불려가 메모리 앨범에 삽화가로서 동원되기도 하고 ...
재익형 한테서 편지가 오면 철책선 앞의 전포대장으로서 한가할때는 사병들에게 노래도 가르쳐 주고 바이올린도 철책선 앞까지 비밀리에 반입하여 들려 주기도 하고 작은 서화회를 이곳에 만들었다는 편지도 오고...
. 제대 하여 삼성에 입사하여 처음 발령 받은 부서가 건설 경리부여서 초기엔 애로사항 많아 조담이의 개인 교습이 큰 도음이 되었노라 얘기 하시기도 하고... 건축 현장 사무실에 언젠가 밤에 놀러 간 적 있었는데 사무실 입구 현판이 재익형 붓글씨로 일필 휘지 붙었더란 야그
얼마 후 호미회OB 팀 들이 은퇴하여 시간여유가 있으면 작품들을 모아 OB서화회전시회 한번 크게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천마산 사건이후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찍는 사진기인 리플렉스 카메라의 필름은 35미리 필름하고 달라 명함크기 정도였는데 필름이 조금 남아 노란집에 가서 그겨울 벽난로에 불이 타오르는 광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기억 안나는데 69학번 국문과 나온 여학생이랑 7-8명의 후배들을 찍었는데 사진도 전해주지 못하고 졸업하고 말았군요
재학 중에 아침일찍 교정에 인적이 드물 때 가끔 서화회 4층에 갈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없으리라고 서실 문을 열면 재익 형이 작품 쓴다고 맑은 정신에 써야 한다고 어제 저녁에 먹을 갈아 물이 어느정도 증발해 작품쓰기 좋은 점도의 먹물로 일필 휘지 글씨를 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침이라 그런지 밤새도록 먹내음이 배었음인지 먹냄새 좋고.... 그때는 지금보다 가난 했지만 지금처럼 살벌하지않은 그래도 인간미가 남아있던 세월은 아니었나 생각 해 봅니다 지금은 더 잘 산다는데도 더 살벌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