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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과 자야 [출처] 4. 법정스님과 길상사의 아름다운 인연 |작성자 김영한
대원각은 요정 정치로 유명하던 곳이기도 하다
종 각 성북동 북악스카이웨이 아래쪽에 위치한 길상사는 조계종 사찰이자 도심속의 조용한 휴게공간으로 유명하다. 잘 가꾸어진 나무와 깨끗하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정겨운 곳이다. 길상사(吉祥寺) 는 본래 김영한(金英韓)이라는 여인의 법명인 길상화를 딴 절 이름이다. 이 곳은 60-70년대에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고급요정으로 손꼽히던 대원각이 있던자리다
가을이면 길상사에 붉은 감이 꽃처럼 흐들어진다. 가난한 탓에 몸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의 김영한.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사이 남편은 우물에 빠져 죽고, 그녀는 기생의 길을 걸을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 되었다. <현대판 황진이>라 할까.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갔지만 스승의 투옥소식으로 귀국하여 함흥감옥으로 옥바라지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김영한(22세)에게 첫눈에 반한 백석(26세)과 뜨거운 사랑이 시작된다.
김영한의 기명은 진향이었고, 백석은 자야子夜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기생과 동거하는 것을 반대한 백석의 부모는 갈라놓기 위해 3번이나 다른 여자와 억지결혼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백석은 그때마다 첫날 밤 손 한번 잡지 않고 도망쳐 김영한에게 돌아왔고, "함께 만주로 도피하자."고 하였으나 김영한은 그에게 걸림돌이 될까 염려하여 거절하였다고 한다.
백석이 자야를 위하여 지은 시를 보자. ( 문학에 소질을 보인 자야가 '삼천리'에 발표했던 '눈 오는 날' 을 시화한 백석의 사랑 고백이었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타샤를 나는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눈은 푹푹 나리고 ~ 백석~
결국 백석은 시 백편을 써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3년 남짓한 동거생활을 마치고 혼자 만주로 간다. 해방후 함흥으로 왔으나 그 사이 38선이 그어져 두 사람은 영영 생이별을 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안 그녀는 그의 시를 읽으며 혼절을 하였다고 한다.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래도 그녀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그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에 음식을 먹지 않았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녀가 오랜 기다림의 얘기를 (내 사랑 백석) 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무렵(1995년), 백석은 북녘 어느 산골에서 운명하였다. 1988년 백석이 월북작가 해금조치가 있은 후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그에 대해 배운 적이 없고 그녀는 1997년 현금 2억원을 창작과 비평사에 출연하여 백석문화상을 제정하였고 매년 시집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백석이 그리우면 줄담배를 피웠는데 결국 폐암에 걸리면서 생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평생 운영한 대원각을 조계종 법정스님에게 기부하여 오늘날 길상사가 창건되었고, 그녀의 법명 <길상화>는 법정스님으로 부터 받은 것이다. 매일 술판, 풍악, 욕정, 고기냄새가 진동하던 곳이 아름다운 사찰로 변신하였다.
당시 대원각은 대지 7천평과 건물이 40동으로 시가 1,000억원이라 한다. 그리고 나머지 재산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하여 카이스트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어느 기자가 김영한에게 물었다. " 전 재산 다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십니까 ? " " 후회는 무슨 후회 ! 천억이 그 사람 시 한줄 만 못 해. " " 어느 때 그 사람이 가장 생각납니까 ? " "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데 때가 따로 있느냐 "
길상사 설립 2년후 1999년 11월 14일 김영한은 평생 간직해오던 한 사람을 기다리다가 한많은 생을 마감하였고 그녀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하여 길상사 구석구석 뿌려졌다고 한다. 길상사에서는 2001.11.21 <시주 길상화 공덕비> 를 세워 그녀를 기리고 있다.
법정스님은 1997.12 .14 길상사를 창건하고 회주로 주석하셨으나, 2003.12 회주직을 사양하시고 강원도 산골에 칩거중이셨다. 1년에 두번 (4월, 10월 셋째주 일요일) 길상사에서 대중법회를 하였다.
길상사는 열린 마음을 중요시한다. 종교간에 벽이 없고, 그저 <사람>이 모여 마음을 닦고 수행하는 곳이다. 2000년 4월 봉안된 길상사의 트레이드 마크인 <관세음보살상>은 법정스님께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에게 의뢰.제작한 작품으로 佛母 라 명명되었다. 높이 180cm.
세상 모든 일은 한 조각 마음에서 비롯된다고들 한다. 내 마음이 열려 있을 때는 모든 일을 포용할 수 있지만, 분노, 어리석음, 탐욕으로 닫혀 있을 때는 바늘 끝 하나 꽂을 데가 없는 것이 또한 사람 마음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고 내 안의 나와 마주 앉는 시간은 그야말로 나를 맑고 향기롭게 다듬어 줄 것이다.
마음은 물 뿌려 싹 틔우는 꽃이다. 내가 백석이 되어 /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이생진 시인님 (제주도 성산포 시비거리리로 유명세가 더하다)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金英韓** 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 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 태어나서 문학할거야' -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사랑을 간직하는 데는 시밖에 없어'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 백석 (1912-?) 시인.
본명은 기행. 필명은 백석 평북 정주 출생 1929년 오산 고보 졸업. 도쿄 아오야마 학원영문학 수학 1934년 조선일보 출판부 입사. <여성>지 편집 1935년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등단 1936년 시집 "사슴" 간행. 이동순 편 "백석 시선집" (창작과 비평) *김영한(1916-1999) 본명 김진향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되자,열여섯에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됨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 교사로 있던 청년 시인 백석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53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록 <백석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 선가<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 <내 사랑 백석> 등 출간
길상사 설립 2년후 1999년 11월 14일 김영한은 평생 간직해오던 한 사람을 기다리다가 한많은 생을 마감하였고 그녀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하여 길상사 구석구석 뿌려졌다고 한다. 길상사에서는 2001.11.21 <시주 길상화 공덕비> 를 세워 그녀를 기리고 있다.
법정스님은 1997.12 .14 길상사를 창건하고 회주로 주석하셨으나, 2003.12 회주직을 사양하시고 강원도 산골에 칩거중이셨다. 1년에 두번 (4월, 10월 셋째주 일요일) 길상사에서 대중법회를 하였다.
길상사는 열린 마음을 중시한다. 종교간에 벽이 없고, 그저 <사람>이 모여 마음을 닦고 수행하는 곳이다. 2000년 4월 봉안된 길상사의 트레이드 마크인 <관세음보살상>은 법정스님께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에게 의뢰.제작한 작품으로 佛母 라 명명되었다. 높이 180cm.
길상사 관음보살상 (마치 성당의 성모 마리아상을 연상케 한다.)
세상 모든 일은 한 조각 마음에서 비롯된다고들 한다. 내 마음이 열려 있을 때는 모든 일을 포용할 수 있지만, 분노, 어리석음, 탐욕으로 닫혀 있을 때는 바늘 끝 하나 꽂을 데가 없는 것이 또한 사람 마음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고 내 안의 나와 마주 앉는 시간은 그야말로 나를 맑고 향기롭게 다듬어 줄 것이다.
마음은 물 뿌려 싹 틔우는 꽃이다. [출처] 4. 법정스님과 길상사의 아름다운 인연 |작성자 김영한
[출처] 4. 법정스님과 길상사의 아름다운 인연 |작성자 김영한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갔지만 스승의 투옥소식으로 귀국하여 함흥감옥으로 옥바라지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김영한(22세)에게 첫눈에 반한 백석(26세)과 뜨거운 사랑이 시작된다.
김영한의 기명은 진향이었고, 백석은 자야子夜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기생과 동거하는 것을 반대한 백석의 부모는 갈라놓기 위해 3번이나 다른 여자와 억지결혼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백석은 그때마다 도망쳐 김영한에게 돌아왔고, "함께 만주로 도피하자."고 하였으나 김영한은 그에게 걸림돌이 될까 염려하여 거절하였다고 한다.
백석이 자야를 위하여 지은 시를 보자. ( 문학에 소질을 보인 자야가 '삼천리'에 발표했던 '눈 오는 날' 을 시화한 백석의 사랑 고백이었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출처] 4. 법정스님과 길상사의 아름다운 인연 |작성자 김영한 [출처] 4. 법정스님과 길상사의 아름다운 인연 |작성자 김영한 |
첫댓글 길상사에 데한 이야기 처음 대하내요
한사람을 죽을때까 사랑한다 얼마나 행복 할까 ?????
나도 집식구를 김진향 처럼 사랑하고 십다
감사합니다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 여기 차한잔
멋진 사랑의 하트 차 참 맑고 곱습니다.
한사람이 한 사람을 죽음까지 안고 가는
소박하면서도 위대한 소망 꼭 이루 소서.
지금도 사랑의 그 마음이 금메달이십니다. 화이팅~~
감사합니다 저도 화이팅 ~~~~